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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좌파는 사탄이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순수한 혈통이라며 더럽고 타락한 이방인들을 저주했다. 선지자 요나는 '사탄의 나라'라 불리던 니느웨로 가라는 부르심을 조국의 명예가 더 중요했기에 거부했다. 우파는 유신론의 뿌리를 좌파는 무신론의 뿌리를 가졌으니— 오직 '우파'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 신실한 '좌익 그리스도인'을 알고 단 한 번도 하나님께 의지해 본 적 없는 '우익 인사'와도 오래도록 함께 지내왔다. 우리의 지상 명령은 너무도 단순하다. 서로 사랑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 하나님은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원수의 나라—오늘날로 치면 식민의 상처를 남긴 '일본 제국' 같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하셨다. "그들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 그게 곧 하나님의 뜻이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 아예 원수를 사랑하심으로 그 말씀을 완성하셨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좌파를, 혹은 회개하지 않은 일본을 '사탄'이라 부르는 그 마음이야말로— 정작 가장 사탄에 가까운 마음이라는 것을. 애초에 회개조차 은혜로만 가능한데 하나님의 거룩에 닿아 세상이 줄 수 없는 사랑을 먼저 맛본 우리가— 이 땅의 이익과 자존감, 정치적 정체성을 달래려 상대 진영을 향해 "사탄!"을 외친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지금 상황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설령 이보다 더 참혹한 일이 일어난다 해도— 진리는 요동치지 않는다. 국가 전복이든, 납치든, 음모든— 그 앞에서 나도 여전히 연약하다. 분노하며 계속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십자가 아래에 두라 하신다. 그리고 불가능한 원수 사랑을 당신 자신으로 증명하시고 그 길을 따라오라 하신다. 정치 성향이 단순히 우파이거나 자유주의자라면 어떻게 반응하든 상관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는 이들이 왜 이 땅의 이익과 깃발 아래— 신앙이 아닌 '정치적 신념'에 그토록 깊이 빠져 사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 사랑의 부족은 정치가 다른 이들 때문이 아니라— 정작 정치적으로 비슷한 그리스도인들을 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기대했던 것이다. 세상이 보여줄 수 없는 그 말도 안 되는 주님의 사랑을— 이들이라면 보여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더 묻고 싶다. 예수님을 만났다고 고백하면서— 왜 그분의 성품을 닮으려 하지 않는가. 끊임없는 자기 부정, 주님께 생명을 드린 삶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정말 더 큰 영적 공격은 상대 진영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신앙의 언어를 쓰기 때문에— 오히려 더 깨닫지 못한 채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있는 건 아닐까. 오직 우리는 사랑을 증거하고 정죄와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야 할 제자들이다. 요나가 회개를 요구했던 니느웨도 결국 하나님께서 100년 뒤에 직접 심판하셨다. 그런데 왜— 정죄와 심판의 깃대를 스스로 움켜쥔 채 더 격앙되어 거친 말을 쏟아내고 있는가. 사랑해도 모자랄 시간에 왜 자꾸 묘한 우월감을 느끼려 하는가. 당신도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 누구와도 비할 수 없는 '죄인'임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왜 자꾸 자신이 더 낫다고 주장하는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더 나은 것 같은가. 비기독교인보다 세상보다 혹은 그 '좌파'보다— 당신이 더 거룩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우월감은 신앙이 아니다. 그건 복음의 반대편에서 은혜를 흉내 내는 또 다른 교만일 뿐이다. 사랑은 우위를 점하는 일이 아니라 같은 높이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다. 그게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이었다. 분별은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다. 비인격화도, 공격도 아니다. 전투처럼 흥분하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도 다— 결국 내 교만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쓰는 이 글도 결국 내 의를 위한 또 하나의 변명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도뿐이다. 주님— 저에게 더 깊고 넓은 사랑을 허락하소서. 이들의 아픔과 열심을 헛되이 보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분노도, 정의도, 공의마저도 예수님의 온화한 성품을 더욱 닮게 하소서.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릴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손으로 우리 모두를 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17 hours ago | [YT] |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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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때로는 놀랍게도 당하는 것이 사랑이다. 속임을 당하고, 매를 맞고, 손해를 보고, 배신을 견디는 것— 십자가의 사랑은 그 길을 말한다. 그래서 세상 눈에는 끝없이 미련해 보인다. 애초에 십자가를 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열혈 사도 베드로가 가장 먼저 가로막았으나— "사탄아, 물러가라."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럼 네 이웃이 끌려가 고문을 당해도 그딴 소리 할 거냐?" 나는 못 할 것 같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초대교회는 그렇게 했다. 이웃이, 가족이 끌려가도 신앙을 지켰다. 맞서 싸우기보다 조용히 무릎 꿇고 기도한 그 세대를 하나님은 칭찬하셨다. 승리주의, 투쟁주의, 정의주의— 이런 것들은 복음의 언어를 빌려 복음 자체를 뜨겁게 대체해 버린다. 신앙과 표현의 자유가 넘치는 서구보다 강하게 통제받는 공산권의 '억울한' 자리에서 기독교가 전례 없이 부흥하는 순간들을 본다. 물론 인위로 그 자리를 만들자는 뜻이 아니다. 다만 어디든, 물리적 억압만 다를 뿐 본질은 초대교회와 결코 다르지 않다. 우리는 자꾸 '세상의 방식'으로 이기고 싶어 한다. 원수를 껴안아 사랑하여 그 피로 열매를 증거하기보다 "가만있으면 아내를 빼앗긴다"는 두려움에 칼집에서 칼을 뽑는다. 성경 구절을 인용해 "두려워 말라" 하면서도 실은 본인도 그 두려움 속에 상대를 끊임없이 도발한다. 무신론에서 나온 이념이라 하여 모조리 '사탄'의 세력으로 정죄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쓰는 컴퓨터와 휴대폰— 수많은 기술과 제도는 무신론자들의 손에서 나왔다. 그 무신론을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무신론자도 사랑하신다. 우리는 계속 사랑을 잃는다. 수많은 투쟁의 문장에는 사랑이 없다. 하나님을 지킨다 말하지만 그분이 본래 '무적'이심을 잊는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분열을 좋아하는 사탄의 노략 속에서 어떻게 끝까지 평안을 지키는지— 그걸 보시려는 건 아닐까. 우리가 당하고, 양보하고, 손해 보고— 심지어 우리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 앞에 설 때 사람들은 비로소 '복음의 힘'에 놀라지 않을까. 반대로, 복음의 자유가 아니라 이념이 가리키는 자유를 위해 목울대가 터져라 싸울 때— 사람들은 오히려 더 멀어지지 않을까. 주님이 먼저 십자가로 보여주신 승리 방식을 왜 우리는 부정하고, 답답하다 여기고 피상적이라 취급하는가. 왜 '인내'의 열매 대신— 급진적 구호의 선명함에만 반응하는가. 그게 인간의 본성, 곧 죄성이다. 문제는 그것이 죄인 줄 모르고 도파민의 취기 속(도파민은 자기중심성을 증폭시킨다)에 '내 편 = 하나님 편'이라 착각한다는 것. 신앙의 길은 좁고, 때로 애매하다. 끊임없이 기도로 묻고 공동체 안에서 나누며 분별해야 한다. 명확한 슬로건 아래 모여 맞붙는— 그런 눈에 보이는 전쟁이 아니다. 이미 영적 전쟁이 아닌 '다른 전쟁'을 치르는 이들에게는 복음의 초청이 쉽게 닿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사랑이 가장 필요한 영혼일지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증거하지 못한 채— 분노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입에 칼을 문 채 살아간다면, 우리는 먼저— 부족한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달라 기도하고 계속 드러나는 이 은혜의 결핍을 위해— 오늘도 조용히 주 앞에 엎드려야 한다. 결국 기독교는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죄와 교훈의 칼로 율법을 다시 들이댄다. 자기의 옳음을 입증하며 안도하려는 이 세태— 이것이 2000년 전부터 반복된 굴레라는 사실이 도리어 성경의 진리를 더 굳게 증명해 준다.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당하심으로 이기신 그 길, 미련해 보이나 그 무엇보다 크신 사랑. 어렵겠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자. 그 길만이— 우리와 이 시대를 살려낼 것이다.
1 day ago | [YT] |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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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의 우상입니다." 라고 입 밖에 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우리는—종교개혁자의 말마따나— '우상을 쏟아내는 공장'이다. 인간은 반드시 보이는 것에 휘둘린다. 선악과 이후 밝아진 눈은 늘 눈앞의 것을 붙든다. 그러나 더 큰 빛을 보면— 전에 붙들던 것들이 우상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연약함은 남아 우리는 다시, 끊임없이 보이는 것에 흔들린다. 가장 먼저는 사람이다. 불안을 잠재울 리더를 원한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 정치 권위자가 어느새 우리의 '구원자'가 된다. 미국 남부의 바이블 벨트에서 트럼프가 메시아처럼 호명되는 장면— 교회 안에서조차 그를 찬양하는 입술들. 그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어차피 우리는 우상공장이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연약함마저 선으로 합하여 주신다. 그렇다고 "그렇지 뭐—"에 멈춰야 하는가. 정치는 차선의 예술이라 해도, '차악'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과연 지혜인가. 아마 내가 찍는 곳과 기독교 정치를 우상화하는 이들이 찍는 곳은 거의 같을 것이다. 말이 오가도 결과는 비슷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가만히 있어도 되는가. 복음이든 정치든, 어차피 결말이 비슷하니. 아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세속의 논리다. 우상화와 '복음적' 정치의 결말이 닮아도, 하나님은 과정과 의도를 보신다. 우리 마음의 방향을 보신다. 입술로 "예수님과 복음"을 말하면서도 내가 기대하는 것이 주님을 닮은 인격과 작은 예루살렘 같은 공동체인가. 아니면 현실의 답답함을 풀어줄 또 다른 정치 이상 위에 믿음, 소망, 사랑의 언어를 덧씌운 것인가. 요즘의 뜨거움이 성령의 열심에서 왔는가, 아니면 이념에 취한 열광인가. 좋은 게 좋다 해도 가끔은 멈춰 짚어야 한다. 신앙의 언어를 쓰기에 오히려 경각심을 잃는 교묘한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더 깊이 신앙을 성찰해야 한다. "복음으로 돌아가자"가 순진하게 들리고 "십자가를 지자"가 애매하게 들린다면— 우리가 인생을 좌우의 축으로만 재단하고 있는지 한 번은 되돌아봐야 한다. 끝없이 흘러내린 보혈은 두 갈래 큰길보다 더 좁은 길이다. 그러나 반드시 인내로 걸어야 할 길이기에 지루해 보이고 나이브해 보여도 담대히 끝까지 가야 한다. (오히려 가장 급진적인 길이다) 나 역시 끔찍한 죄성을 타고났다. 답답함 속에서 누군가를 정죄하고 싶은 본심이 고개를 든다. 어쩌면 그래서 하나님은 다소 기울어진 우리의 정치 열심도 인내로 사용하시고 나의 답답함 속 거룩하지 못한 자기중심까지 비추어 드러내신다. 하나님이 좌와 우를 허락하시고 때로는 체제 전복의 음모조차 허용하시는 이유— 연약한 인간이 그럼에도 서로 사랑하라 하신 뜻이 아닐까. 나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고 앞으로 가야 할 길도 멀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가 우상 공장임을 가능하다면 매일 아침 기억하자. 정해진 틀 속에 사는 한계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는 은혜의 시간만은 놓치지 말자. 주시는 사랑의 분량만큼만이라도 사랑하길 원한다. 내게 그 힘이 없음 알기에, 더욱 간절히 구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이 가득하길 진심을 다해 기도한다.
1 day ago | [YT] |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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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예쁘게 생긴 마귀." 어릴 적 동화의 '마귀 할멈' 탓에 사탄이라 하면 으레 사납고 괴이한 얼굴을 떠올렸다. 혹은 서브컬처 속 '소악마' 이기적이지만 귀여운 캐릭터— 작은 뿔 머리띠로 장난치는 이미지. 나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청순하고 단정한 해달라는 대로 다 들어주는 미소의 여인. 오히려 천사 같은 친절로 다가오는 존재—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사탄은 '영'이다.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모습이 없다. 그래서 신앙을 가져도 사탄을 단지 상징쯤으로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C. S. 루이스가 말했듯 사탄을 믿지 않거나 그를 얕보는 자는 결국 사탄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하나님이 나를 붙드신 뒤— 내가 가장 주의 깊게 살피게 된 영역이 있다. 바로 '정치'다. 그 전에는 막연히 정치적 우파와 기독교를 겹쳐 보았다. 지키려는 가치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위 서구의 '기독교 우파' 흐름 속에는 이념이 신앙의 언어를 빌려 교묘하게 자기 논리를 포장하고 있다. 나는 그걸— 나중에서야 분별하게 되었다. 그래서 놀랍게도 정치는 복음이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무엇보다 복음을 중심으로 내세우던 정치 인플루언서들이 상대 진영을 ‘사탄’으로 몰아가는 장면을 보고서야— 여기가— 사탄이 가장 좋아할 자리라는 섬뜩한 떨림이 밀려왔다. 정말로 거기에 경각심을 가진 이는 거의 없었다. 보수든 진보든— 조금 과격해도 방향만 맞으면 복음적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초대교회도 같은 문제에 시달렸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그분을 '정치적 메시아'로 소비하려 했던 당대 권력의 현실정치였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보다 보이는 장에서 도파민이 폭발하는 현실정치로 끌어들이는 일. 분노할 때 다량의 도파민이 솟구친다는 걸 모르는 이들이 많다. 그게 바로 사탄의 전략이다. 그러니 사람을 사탄으로 여기면 안 된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되 죄인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내어주셨다. 우리가 '사탄'이라 지적하고 싶은 바로 그 사람을, 주님은 사랑하셔서 그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우리가 그 앞에서 정죄의 깃발을 드는 순간— 우리는 복음의 자리에서 멀어진다. 더 뜨겁고, 더 몰두되고— 복음의 군사가 된 듯한 도취. 그러나 그것이 이념에 홀린 상태와 무엇이 다른가. 양선과 온화, 평강이 열매 맺지 못한다면 우린 십자군의 칼을 다시 쥔 것뿐이다. 복음의 언어를 휘두르지만 실은 권력의 칼을 쥔 손.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 뜻이 땅에서 드러난 방식은 놀랍게도 '십자가'였다. 우리가 참여할 것은 그 사역이지, 세상의 방식 그대로 권위와 권력을 타는 일이 아니다. 물론 음모의 전말— 끔찍한 체제 전복의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정당한 염려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로마가 지배하든 말든 오직 주님만 바라보던 그 시선을 잃고, 로마에 맞서 현실 혁명을 꿈꾸던 1세기의 '질럿'과 닮아가는 지금의 SNS 시대.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더 깊은 골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탄은 영이다. 그 보이지 않는 영은 우리의 내면을 흔들고 심지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해 하나님의 말씀조차 입에 올린다. 누군가 이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악한 계획을 꾸민다 해도— 그를 '사탄'이라 단죄할 권한은 우리에게 없다. 그 언어는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 오히려 기독교를 권력의 도구처럼 보이게 한다. 정치적 전도를 앞세워 자신이 속한 진영의 기반을 지키려 들기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성품이 성화되는 열매— 온유와 절제, 화평을 고민하고 훈련해야 한다. 그것이 권력자에게 가장 어려운 겸손일지라도 휘두르며 얻는 즐거움은 결코 하늘의 즐거움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좌든 우든 서로를 '사탄'이라 부르며 이 땅의 전쟁이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님을 어느새 잊어버린 채— 하나님의 영이 아닌 거짓의 영에 휘둘리고 만다. 보이지 않기에 더 그럴듯하고 정의로운 얼굴로 가장하기에 더 위험한— 그 마귀를 조심하자.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이들을 부디 '사탄'이라 부르지 말자. 십자가는 우리 편의 깃발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구원임을— 절대 잊지 말자.
2 days ago | [YT] |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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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재미있어지는 법." 어쩌면 일은 조금 재미없는 편이 낫다. 너무 재미있으면 신경학적으로 곧 무뎌진다. 일은 저주이자 동시에 소명. 그래서 적당히 재미없을 때 균형이 맞는다. 나는 유튜브 보는 게 좋아서 '유튜브 읽어주는 남자'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보는 것도 만드는 것도 질렸다. 재미있고 돈도 벌리니 처음엔 신기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가수, 배우, 디자이너, 바리스타— 처음의 설렘을 떠받칠 철학이 없으면 근력은 곧 사라지고 즐거움은 우울로 바뀐다. 신경학자 앤드류 후버만은 요즘 시대에 흔히 나타나는 이 증상은 10~14일 쉼으로 거의 완벽하게 회복된다고 한다. 엘리야도 하나님의 능력을 본 뒤 곧 번아웃에 시달리며 사역을 내려놓고 떡과 물을 먹으며 쉬었다. 마틴 로이드 존스 역시 말했다. 큰 축복 뒤에는 영적 침체가 찾아오기 쉽다고. 문제는— 그럼에도 점점 더 큰 한 방을 원한다는 것. 무너질 줄 알면서도 일단 뛰어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면 배운다. 속도를 늦추는 법. 대박 대신, 소박한 일상에 충실하는 법. 사는 게 괜찮아지려면 무엇보다 일이 할만해지려면, 삶이 원래 조금 재미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모두 이미 안다. "사는 게 늘 재미있을 수 없지." 그러나 말씀이 스며들지 않으면 그 앎은 머릿속에만 맴돌다 사라진다. 결국 작심삼일— 다시 대박을 꿈꾸며 오늘 하루를 불행하게 산다. 사는 건 원래 조금 텁텁하다. 그걸 받아들이는 게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러다 말씀에 기대어 살다 보면 잔잔한 재미가 스며든다. 아니, 크게 재미가 없기에 더 괜찮아진다. 그리고 문득— 짜릿한 순간이 온다. 그러니 지금은 조금 재미없어도 괜찮다. 가끔 찾아올 그 순간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주어지는 평안— 그 말씀의 비밀을 살짝쿵 나누고 싶었다. 평안은 질리는 법이 없으니까.
5 days ago | [YT] |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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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난 기대수명." 영원이라는 건, 아무래도 와닿지 않는다. 당신의 수명은 오늘 100세에서 1억 년으로 늘어났다. 물론 '영원'과는 비교도 안 되지만 우리의 지각 한계를 감안해 이 정도로만 가정하자. 그럼 한 가지 불합리가 생긴다. 지금 이 100년이— 앞으로의 1억 년을 책임진다는 것. 이쯤 되면 노후 대비가 아니라 사후 대비다. 열혈 사도 바울의 말. "천국이 거짓이면—내가 왜 이 고생을 하겠니?" 물론 순교한 바울은 남들보다 더 실제적으로 천국을 맛보았기에 이 고백이 가능했을 것이다. 앞으로 살 1억 년을 생각하면 이 땅의 100년은 조금 손해 보고 살아도 된다. 즉각적인 도파민을 미룰수록— 다가올 영원의 기쁨은 더 커지는 법. 겉으로는 어리석어 보여도 이게 가장 지혜로운 길이다. 게다가 '손해'라 여겼던 것이 막상 들여다보면 손해가 아닐 때가 있다. 얼마 전 나보다 늦게 온 이에게 의도치 않게 자리를 내주었는데— 결국 더 넓고 좋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양보할 때 얼굴이 굳은 게 민망했다) 그러니 1억 년을 위해— 이 100년은 세상보다 조금만 더 불편하게 살아 보자. 솔직히 요즘은 하나님 믿는다고 무조건 더 힘든 것도 아니다. 비기독교 국가를 보라. 우리보다 더 힘겨운 이들이 많다. 가까운 일본만 봐도—복음 없는 메마름이 선명하다. 어차피 인생은 고통이다. 피터슨 말대로 믿든 안 믿든—정말 너무 힘들다. 그러니 파스칼 말처럼 진짜 딱 한 번쯤은 진심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아보라. 영원과 천국이 유치하게 들려도— 가볍게나마 귀를 기울여 보라. 함께 연습해 나가자. 무명의 길, 손해의 길, 고난의 길을. 각오하고 들어서면— 의외로 버틸 만하고 심지어는 믿기 전보다 더 큰 축복이 내려올 때도 있다. 그런데 영원까지 보장하신다고…? 아니, 하나님. 도대체 얼마나 사랑하시는 겁니까. 그건 좀 불공정하지 않습니까— 영원이면 됩니다. 하나님 한 분이면 족합니다. 그러니 이 땅 100년은 살짝 손해 봐도 괜찮습니다. 그럼에도—아낌없이 주시는 분. 그게 아버지의 마음이다. 참고로 요즘 성경 앱도 좋은 게 많다. 한 번만 열어 보자. 단 한 구절이— 당신의 영원이 될 수 있으니.
6 days ago | [YT] |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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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알겠다." 에반게리온은 찬사의 이름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감독이 직접 다시 만든 '신극장판'은— 찬사 대신 욕설이 쏟아졌다. 나는 좋았다. 심지어 세상에서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원작은 어둡다. 정말 끝까지 가라앉는 어둠이다. 반면 신극장판은 밝다. 어이가 없을 만큼 밝다. 너무 쉽게— 너무 단순하게 해피엔딩으로 닫힌다. 그것도 주인공 신지의 결단이나 희생이 아니라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개입— 갑작스러운 '손'이 세상을 구한다. 그러니 화가 난다. 세기의 달콤한 암흑을 값싼 손짓 하나로 봉합하다니. 웃으라고 만든 장면이 아니었지만 헛웃음조차 나지 않는다. 그런데—이제야 알겠다. 원작도, 신극장판도— 모두 [안노 히데아키]의 무의식을 비춘 거울이다. 극심한 우울 속에서 만든 첫 작품은 그 어둠을 그대로 품고 있다. 눈을 찌푸려야 겨우 보이는 한 줄기 희망— 그러나 희망이라 부르기도 괴로운 빛. 이후 그는 관계의 회복과 인격의 성숙을 지나 무의식은 더 맑고 단순한 결로 드러났다. 신극장판은 그 흔적이다. 인격이 성숙할수록 서사는 단순해진다. 철학의 끝이 신학을 더듬듯 고뇌의 끝은 절대적 영성을 스친다. 그래서 마지막에 '마키나미'가 '구원'의 손이 된다. 팬덤은 이를 비꼬아 "데우스 엑스—마키나미"라 부른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 안에서 진리를 본다. 진리는 단순하다. 뜬금없이 보이는 손이 우리를 구원한다. 사람들은 그 단순함을 싫어한다. 차라리 스스로 짐을 지고 어둠 속에 머물고 싶어 한다. 그래서 빛을 미워한다. 신극장판의 너무 단순해 보이는 그 빛을—증오한다. 성경은 이미 말한다. 사람은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다. 스스로 인생의 주인— 자기 자신이 구세주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니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내려온 빛의 손을 거부한다. 문학은 본능적으로 신보다 인간을, 빛보다 어둠을 높인다. 미해결과 고통 속에서만 진정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단순한 결말은 곧 졸작의 낙인이다. 그건 충분히 정당한 평가다. 그러나 놀랍다. 어둠을 끝까지 사랑하는 인간의 구조와 빛으로 돌연 닫히는 신적 개입의 구조가— 에반게리온의 두 버전 속에서 '성경' 그 자체처럼 맞붙는다니. 결국 깨닫는다. 종교의 바깥에서도 진리는 새어 나온다. 복음의 뿌리가 얕은 일본의 콘텐츠 속에서도 하늘과 땅이 한 분의 통치 아래 있기에— 같은 해를 비추듯 같은 무의식이 흔들린다. 우리 깊은 곳엔 구원을 향한 갈망과 끝내 어둠을 택하려는 본능이 함께 숨 쉬고 있듯이.
1 week ago | [YT] |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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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가 없다." 뭇 사람들은 내가 세상의 길을 포기하고 '복음의 길'을 걷는 것을 대단하게 여긴다. 그러나 사실은 조금 다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결단으로 세상의 길을 버린 게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칭송받아야 마땅하겠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조금 더 직관적인 예를 들어보자. 내가 금과 은괴를 훔치지 않은 건 그저 내 주변에 훔칠 만한 금과 은괴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음란에 빠지지 않은 건 그 음란을 함께할 이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자기애에 깊이 빠지지 않은 건 예상치 못한 곳에서 흰머리가 자라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물론 기쁨과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것만이 내 삶의 의미가 된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 외에 한눈팔 만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싹 다 정리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성과 자극적으로 노닥거릴 시간과 관계, 돈이 잘 벌려 사치를 즐길 기회, 멈출 수 없는 젊음이 외모로 드러나는 욕정까지— 그 모든 것들이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내 삶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것을 고립과 실패, 안쓰러움으로 보지만— 성경은 이것을 '복'이라 부른다. 우습지 않은가?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분명 기쁨과 성령의 충만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말하면 "어쩔 수가 없다"이기 때문이다. 교회 안의 은어로 말하자면 [주님께 붙들려 온 포로]다. 좀 우습지만—정확하다. 솔직히 말해, 지금이라도 내 주변에 나를 조금이라도 자극하는 이성이 있다면 나는 금세 유혹에 빠져— 입술이 닿기도 전에 혀를 내밀고 말 것이다. 아직 젊음의 욕정이 탄탄한 피부로 빛나고, 돈도 손쉽게 들어오는 환경이었다면— 나는 복음이 아니라 사치와 향락을 쫓았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을 이끄실 때 고난과 가난— 그리고 바울에게 주셨던 가시와 같은 "어쩔 수가 없다"의 환경을 허락하신다. 그것이 광야요, 내가 마셔야 할 잔이며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길이다. 그래서—어쩔 수가 없다. 난 복음의 포로가 된 기쁨에 미쳐 날뛰는 자다. 그러니 부탁드린다. 유혹하지 말아 달라. 아니, 당신이 가만히 있어도— 내 눈엔 아직 정화되지 못한 폭풍 같은 정욕의 씨앗이 남아 있다. 돈 되는 이야기, 복음을 꺾고 요란하게 내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기회들— 그런 것들을 내게 들이밀지 말아 달라. 하나님이 날 지켜 주시겠지만 언젠가는 시험으로 다듬으시는 때가 머지않아 올 것이다. 어쩌면 나는 곧장 넘어져 여러분에게 어이없는 허망함을 남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다시 복음에 붙들린 나를 기대해 달라. 나도 방금 여러분을 위해 기도했다. 그러니 여러분도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 어쩔 수가 없다.
1 week ago | [YT] |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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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읽어주던 남자." 이르면 내년 1월 출간될 책 원고가 거의 마무리되고 있다. 놀랍게도—신앙서적이 아니다…! 정말 재미있을 것이다. 기대되는 건 책 자체만이 아니다. 지난 북콘서트처럼 (아이러니하게도 내 책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이번 홀리컴뱃 컨퍼런스처럼, 여러분을 직접 만날 기회가 또 생기지 않을까 싶다. 아무래도 숫자에 휘둘리는 시대다 보니,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반기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는다. 화평 없이 50만을 찍고도 홀로 외로웠던 때보다, 빠지고 또 빠져 30만이 되어도 함께해 주는 분들과 만날 때— 그때야말로 느낀다. 숫자는 결국 허망한 바벨탑이라는 것을. 쓰던 소설도 공교롭게 내년 초쯤 퇴고를 시작하면, 직접 개설한 웹소설 사이트에 곧장 올라갈지도 모른다. 좀 더 신속한 공개를 위해 회차별로 퇴고하고 바로 올릴까 생각 중이기 때문이다. 소설은—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정말 미쳤다. 글자가 호흡하고 문장이 살아 움직이는 순간— 나는 그것을 분명히 느꼈다. 조던 피터슨이 말한 "허구가 때로는 실제보다 실제에 가깝다"는 그 역설. 물론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니지만, 그 문턱에 닿은 듯한 순간이 있었다. 물론 소재와 플롯 자체도 읽다 보면 실제와 겹쳐 보이는 순간이 있다. (특히 '자금위' 시절을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더욱) 자전적 소설은 아니지만, 그때의 즐거웠던 수많은 일들이 판타지이면서도 기묘하게 현실적인 이야기로 흘러나온다.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나 스스로도 신나고, 즐겁고 또 감동을 받는다. 또 하나의 신앙 에세이는 그보다는 더 늦게 나오겠지만, 어쨌든 텍스트에 빠져 사는 이 기간 자체가 참 즐겁다. 모두 여러분과 함께 걸어온 여정에서 우러난 것들이니, 머지않아 다시 한 번— 웃으며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는 시간을 꿈꾼다. 오늘도 주님의 희락이 가득하시길—!
1 week ago | [YT] |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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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더 악하다." 몇몇 사람들이 나에 대해 심하게 욕을 한다고 한다. 정확히 무슨 말인지 듣지는 못했지만 그 소식을 들은 나의 형제들이 나보다 더 아파하고 답답해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에 대해 무엇을 말하든— 나는 그 말보다 더 악하다. 아무리 나를 죄스럽다 욕해도 나는 그 언어보다 더 죄스럽고 훨씬 더 악한 사람이다. 나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지난 1년 반 동안 눈물로 기도해 왔다. 물론 처음에는 나도 모르게 끓어오르는 분개심 때문에 정신을 제대로 가다듬기 힘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과 다르지 않은 죄인이고 어쩌면 더 나쁜 사람이기에 하나님이 일찍 붙들어 주셨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아직 악을 선으로 이기는 법을 모른다. 뭇 형제들은 내 손으로 '정의'가 일어나길 바라지만, 적어도 나는 그 정의가 무엇인지 아직 확신하지 못한다. 다만 이것만 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와 공의— 그리고 사울이 끝까지 쫓아와도 칼을 들지 않고— 동굴 속에서 수년을 울부짖으며 견뎠던 다윗의 마음에 가깝다는 것을.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께 "맞서 싸우자"고까지 했다. 그는 체포하러 온 자의 귀를 잘라내며 자기 방식의 정의를 세우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 그리고 잘린 귀를 치유하셨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길은 답답하다. 그래서 '좁은 길'이라 부른다. 곧장 전쟁으로 치닫는 세상의 '넓은 방식'과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님을 믿던 그날부터 죽기 전까지 모욕과 수치— 그리고 홀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통까지 기꺼이 짊어질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없고 편안한 삶을 바라는 것, 그것이 곧 우상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에겐 힘이 없다. 그래서 나는 어떤 악에도 심지어 내 안에 깊이 자리한 악조차도— 제대로 맞설 길을 알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악을 선으로 갚으신다. 그 길은 인간의 방법이 아니다. 자녀의 손에 무기 대신 말씀을, 복수 대신 사랑을 품게 하시는— 그 어떤 초월적 영웅보다 더 어렵고 더 강한 힘을 주시는 분이시다. 누가 나를 욕하든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죄된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나를 용서하시고 죄를 묻지 않으시고 잊어 주시며 '더 나은 자'로 불러 주신 분이 계시다. 나는 그분만 본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도 그분만을 보길 바랄 뿐이다. 이 길은 어렵다. 그래서 여러분의 기도와 위로가 필요할 때가 있다. 나도 오늘 아침 여러분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나를 미워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사랑은 반드시 승리한다. 하나님의 길은 좁지만 인내와 결실의 열매로 가득하다. 그러니 나는 다시 말씀을 붙들고 기도한다. 은혜와 공의의 하나님,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주님 안에서는 모든 것을 감당합니다. 떨어지는 낙엽 하나도 주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믿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순간에도 신뢰하며 잠잠히 기다리게 하시고 굳은 마음에 사랑이 샘솟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1 week ago | [YT] |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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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좌파는 사탄이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순수한 혈통이라며
더럽고 타락한 이방인들을 저주했다.
선지자 요나는
'사탄의 나라'라 불리던 니느웨로 가라는 부르심을
조국의 명예가 더 중요했기에 거부했다.
우파는 유신론의 뿌리를
좌파는 무신론의 뿌리를 가졌으니—
오직 '우파'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 신실한 '좌익 그리스도인'을 알고
단 한 번도 하나님께 의지해 본 적 없는 '우익 인사'와도
오래도록 함께 지내왔다.
우리의 지상 명령은 너무도 단순하다.
서로 사랑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
하나님은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원수의 나라—오늘날로 치면
식민의 상처를 남긴 '일본 제국' 같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하셨다.
"그들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
그게 곧 하나님의 뜻이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
아예 원수를 사랑하심으로
그 말씀을 완성하셨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좌파를, 혹은 회개하지 않은 일본을
'사탄'이라 부르는 그 마음이야말로—
정작 가장 사탄에 가까운 마음이라는 것을.
애초에 회개조차 은혜로만 가능한데
하나님의 거룩에 닿아
세상이 줄 수 없는 사랑을 먼저 맛본 우리가—
이 땅의 이익과 자존감,
정치적 정체성을 달래려
상대 진영을 향해 "사탄!"을 외친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지금 상황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설령 이보다 더 참혹한 일이 일어난다 해도—
진리는 요동치지 않는다.
국가 전복이든, 납치든, 음모든—
그 앞에서 나도 여전히 연약하다.
분노하며 계속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십자가 아래에 두라 하신다.
그리고 불가능한 원수 사랑을
당신 자신으로 증명하시고
그 길을 따라오라 하신다.
정치 성향이 단순히 우파이거나
자유주의자라면 어떻게 반응하든 상관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는 이들이
왜 이 땅의 이익과 깃발 아래—
신앙이 아닌 '정치적 신념'에
그토록 깊이 빠져 사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 사랑의 부족은
정치가 다른 이들 때문이 아니라—
정작 정치적으로 비슷한 그리스도인들을
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기대했던 것이다.
세상이 보여줄 수 없는
그 말도 안 되는 주님의 사랑을—
이들이라면 보여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더 묻고 싶다.
예수님을 만났다고 고백하면서—
왜 그분의 성품을 닮으려 하지 않는가.
끊임없는 자기 부정,
주님께 생명을 드린 삶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정말 더 큰 영적 공격은
상대 진영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신앙의 언어를 쓰기 때문에—
오히려 더 깨닫지 못한 채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있는 건 아닐까.
오직 우리는 사랑을 증거하고
정죄와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야 할 제자들이다.
요나가 회개를 요구했던 니느웨도
결국 하나님께서 100년 뒤에 직접 심판하셨다.
그런데 왜—
정죄와 심판의 깃대를 스스로 움켜쥔 채
더 격앙되어 거친 말을 쏟아내고 있는가.
사랑해도 모자랄 시간에
왜 자꾸 묘한 우월감을 느끼려 하는가.
당신도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 누구와도 비할 수 없는 '죄인'임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왜 자꾸 자신이 더 낫다고 주장하는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더 나은 것 같은가.
비기독교인보다
세상보다
혹은 그 '좌파'보다—
당신이 더 거룩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우월감은 신앙이 아니다.
그건 복음의 반대편에서
은혜를 흉내 내는 또 다른 교만일 뿐이다.
사랑은 우위를 점하는 일이 아니라
같은 높이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다.
그게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이었다.
분별은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다.
비인격화도, 공격도 아니다.
전투처럼 흥분하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도 다—
결국 내 교만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쓰는 이 글도 결국
내 의를 위한 또 하나의 변명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도뿐이다.
주님—
저에게 더 깊고 넓은 사랑을 허락하소서.
이들의 아픔과 열심을 헛되이 보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분노도, 정의도, 공의마저도
예수님의 온화한 성품을 더욱 닮게 하소서.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릴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손으로 우리 모두를 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17 hours ago | [YT] |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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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때로는 놀랍게도 당하는 것이 사랑이다.
속임을 당하고, 매를 맞고, 손해를 보고, 배신을 견디는 것—
십자가의 사랑은 그 길을 말한다.
그래서 세상 눈에는 끝없이 미련해 보인다.
애초에 십자가를 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열혈 사도 베드로가 가장 먼저 가로막았으나—
"사탄아, 물러가라."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럼 네 이웃이 끌려가 고문을 당해도 그딴 소리 할 거냐?"
나는 못 할 것 같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초대교회는 그렇게 했다.
이웃이, 가족이 끌려가도 신앙을 지켰다.
맞서 싸우기보다 조용히 무릎 꿇고 기도한 그 세대를
하나님은 칭찬하셨다.
승리주의, 투쟁주의, 정의주의—
이런 것들은 복음의 언어를 빌려
복음 자체를 뜨겁게 대체해 버린다.
신앙과 표현의 자유가 넘치는 서구보다
강하게 통제받는 공산권의 '억울한' 자리에서
기독교가 전례 없이 부흥하는 순간들을 본다.
물론 인위로 그 자리를 만들자는 뜻이 아니다.
다만 어디든, 물리적 억압만 다를 뿐
본질은 초대교회와 결코 다르지 않다.
우리는 자꾸 '세상의 방식'으로 이기고 싶어 한다.
원수를 껴안아 사랑하여 그 피로 열매를 증거하기보다
"가만있으면 아내를 빼앗긴다"는 두려움에
칼집에서 칼을 뽑는다.
성경 구절을 인용해 "두려워 말라" 하면서도
실은 본인도 그 두려움 속에 상대를 끊임없이 도발한다.
무신론에서 나온 이념이라 하여
모조리 '사탄'의 세력으로 정죄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쓰는 컴퓨터와 휴대폰—
수많은 기술과 제도는 무신론자들의 손에서 나왔다.
그 무신론을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무신론자도 사랑하신다.
우리는 계속 사랑을 잃는다.
수많은 투쟁의 문장에는 사랑이 없다.
하나님을 지킨다 말하지만
그분이 본래 '무적'이심을 잊는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분열을 좋아하는 사탄의 노략 속에서
어떻게 끝까지 평안을 지키는지—
그걸 보시려는 건 아닐까.
우리가 당하고, 양보하고, 손해 보고—
심지어 우리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 앞에 설 때
사람들은 비로소 '복음의 힘'에 놀라지 않을까.
반대로, 복음의 자유가 아니라
이념이 가리키는 자유를 위해 목울대가 터져라 싸울 때—
사람들은 오히려 더 멀어지지 않을까.
주님이 먼저 십자가로 보여주신 승리 방식을
왜 우리는 부정하고, 답답하다 여기고
피상적이라 취급하는가.
왜 '인내'의 열매 대신—
급진적 구호의 선명함에만 반응하는가.
그게 인간의 본성, 곧 죄성이다.
문제는 그것이 죄인 줄 모르고
도파민의 취기 속(도파민은 자기중심성을 증폭시킨다)에
'내 편 = 하나님 편'이라 착각한다는 것.
신앙의 길은 좁고, 때로 애매하다.
끊임없이 기도로 묻고
공동체 안에서 나누며 분별해야 한다.
명확한 슬로건 아래 모여 맞붙는—
그런 눈에 보이는 전쟁이 아니다.
이미 영적 전쟁이 아닌
'다른 전쟁'을 치르는 이들에게는
복음의 초청이 쉽게 닿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사랑이 가장 필요한 영혼일지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증거하지 못한 채—
분노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입에 칼을 문 채 살아간다면,
우리는 먼저—
부족한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달라 기도하고
계속 드러나는 이 은혜의 결핍을 위해—
오늘도 조용히 주 앞에 엎드려야 한다.
결국 기독교는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죄와 교훈의 칼로
율법을 다시 들이댄다.
자기의 옳음을 입증하며 안도하려는 이 세태—
이것이 2000년 전부터 반복된 굴레라는 사실이
도리어 성경의 진리를 더 굳게 증명해 준다.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당하심으로 이기신 그 길,
미련해 보이나 그 무엇보다 크신 사랑.
어렵겠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자.
그 길만이—
우리와 이 시대를 살려낼 것이다.
1 day ago | [YT] |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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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당신은 나의 우상입니다."
라고 입 밖에 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우리는—종교개혁자의 말마따나—
'우상을 쏟아내는 공장'이다.
인간은 반드시 보이는 것에 휘둘린다.
선악과 이후 밝아진 눈은
늘 눈앞의 것을 붙든다.
그러나 더 큰 빛을 보면—
전에 붙들던 것들이 우상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연약함은 남아
우리는 다시, 끊임없이 보이는 것에 흔들린다.
가장 먼저는 사람이다.
불안을 잠재울 리더를 원한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 정치 권위자가
어느새 우리의 '구원자'가 된다.
미국 남부의 바이블 벨트에서
트럼프가 메시아처럼 호명되는 장면—
교회 안에서조차 그를 찬양하는 입술들.
그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어차피 우리는 우상공장이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연약함마저
선으로 합하여 주신다.
그렇다고 "그렇지 뭐—"에 멈춰야 하는가.
정치는 차선의 예술이라 해도,
'차악'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과연 지혜인가.
아마 내가 찍는 곳과
기독교 정치를 우상화하는 이들이 찍는 곳은
거의 같을 것이다.
말이 오가도 결과는 비슷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가만히 있어도 되는가.
복음이든 정치든, 어차피 결말이 비슷하니.
아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세속의 논리다.
우상화와 '복음적' 정치의 결말이 닮아도,
하나님은 과정과 의도를 보신다.
우리 마음의 방향을 보신다.
입술로 "예수님과 복음"을 말하면서도
내가 기대하는 것이
주님을 닮은 인격과 작은 예루살렘 같은 공동체인가.
아니면 현실의 답답함을 풀어줄
또 다른 정치 이상 위에
믿음, 소망, 사랑의 언어를 덧씌운 것인가.
요즘의 뜨거움이
성령의 열심에서 왔는가,
아니면 이념에 취한 열광인가.
좋은 게 좋다 해도
가끔은 멈춰 짚어야 한다.
신앙의 언어를 쓰기에 오히려 경각심을 잃는
교묘한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더 깊이 신앙을 성찰해야 한다.
"복음으로 돌아가자"가 순진하게 들리고
"십자가를 지자"가 애매하게 들린다면—
우리가 인생을 좌우의 축으로만 재단하고 있는지
한 번은 되돌아봐야 한다.
끝없이 흘러내린 보혈은
두 갈래 큰길보다 더 좁은 길이다.
그러나 반드시 인내로 걸어야 할 길이기에
지루해 보이고 나이브해 보여도
담대히 끝까지 가야 한다.
(오히려 가장 급진적인 길이다)
나 역시 끔찍한 죄성을 타고났다.
답답함 속에서
누군가를 정죄하고 싶은 본심이 고개를 든다.
어쩌면 그래서 하나님은
다소 기울어진 우리의 정치 열심도 인내로 사용하시고
나의 답답함 속 거룩하지 못한 자기중심까지
비추어 드러내신다.
하나님이 좌와 우를 허락하시고
때로는 체제 전복의 음모조차 허용하시는 이유—
연약한 인간이 그럼에도
서로 사랑하라 하신 뜻이 아닐까.
나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고
앞으로 가야 할 길도 멀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가 우상 공장임을
가능하다면 매일 아침 기억하자.
정해진 틀 속에 사는 한계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는 은혜의 시간만은
놓치지 말자.
주시는 사랑의 분량만큼만이라도 사랑하길 원한다.
내게 그 힘이 없음 알기에, 더욱 간절히 구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이 가득하길
진심을 다해 기도한다.
1 day ago | [YT] |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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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생각보다 예쁘게 생긴 마귀."
어릴 적 동화의 '마귀 할멈' 탓에
사탄이라 하면 으레 사납고 괴이한 얼굴을 떠올렸다.
혹은 서브컬처 속 '소악마'
이기적이지만 귀여운 캐릭터—
작은 뿔 머리띠로 장난치는 이미지.
나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청순하고 단정한
해달라는 대로 다 들어주는 미소의 여인.
오히려 천사 같은 친절로 다가오는 존재—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사탄은 '영'이다.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모습이 없다.
그래서 신앙을 가져도
사탄을 단지 상징쯤으로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C. S. 루이스가 말했듯
사탄을 믿지 않거나
그를 얕보는 자는
결국 사탄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하나님이 나를 붙드신 뒤—
내가 가장 주의 깊게 살피게 된 영역이 있다.
바로 '정치'다.
그 전에는 막연히
정치적 우파와 기독교를 겹쳐 보았다.
지키려는 가치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위 서구의 '기독교 우파' 흐름 속에는
이념이 신앙의 언어를 빌려
교묘하게 자기 논리를 포장하고 있다.
나는 그걸—
나중에서야 분별하게 되었다.
그래서 놀랍게도
정치는 복음이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무엇보다 복음을 중심으로 내세우던
정치 인플루언서들이
상대 진영을 ‘사탄’으로 몰아가는 장면을 보고서야—
여기가—
사탄이 가장 좋아할 자리라는
섬뜩한 떨림이 밀려왔다.
정말로
거기에 경각심을 가진 이는 거의 없었다.
보수든 진보든—
조금 과격해도 방향만 맞으면
복음적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초대교회도 같은 문제에 시달렸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그분을 '정치적 메시아'로 소비하려 했던
당대 권력의 현실정치였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보다
보이는 장에서 도파민이 폭발하는
현실정치로 끌어들이는 일.
분노할 때 다량의 도파민이 솟구친다는 걸
모르는 이들이 많다.
그게 바로 사탄의 전략이다.
그러니 사람을 사탄으로 여기면 안 된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되
죄인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내어주셨다.
우리가 '사탄'이라 지적하고 싶은 바로 그 사람을,
주님은 사랑하셔서 그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우리가 그 앞에서 정죄의 깃발을 드는 순간—
우리는 복음의 자리에서 멀어진다.
더 뜨겁고, 더 몰두되고—
복음의 군사가 된 듯한 도취.
그러나 그것이
이념에 홀린 상태와 무엇이 다른가.
양선과 온화, 평강이 열매 맺지 못한다면
우린 십자군의 칼을 다시 쥔 것뿐이다.
복음의 언어를 휘두르지만
실은 권력의 칼을 쥔 손.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 뜻이 땅에서 드러난 방식은
놀랍게도 '십자가'였다.
우리가 참여할 것은 그 사역이지,
세상의 방식 그대로 권위와 권력을 타는 일이 아니다.
물론 음모의 전말—
끔찍한 체제 전복의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정당한 염려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로마가 지배하든 말든
오직 주님만 바라보던 그 시선을 잃고,
로마에 맞서 현실 혁명을 꿈꾸던
1세기의 '질럿'과 닮아가는
지금의 SNS 시대.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더 깊은 골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탄은 영이다.
그 보이지 않는 영은 우리의 내면을 흔들고
심지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해
하나님의 말씀조차 입에 올린다.
누군가 이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악한 계획을 꾸민다 해도—
그를 '사탄'이라 단죄할 권한은
우리에게 없다.
그 언어는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
오히려 기독교를
권력의 도구처럼 보이게 한다.
정치적 전도를 앞세워
자신이 속한 진영의 기반을 지키려 들기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성품이 성화되는 열매—
온유와 절제, 화평을
고민하고 훈련해야 한다.
그것이 권력자에게 가장 어려운 겸손일지라도
휘두르며 얻는 즐거움은
결코 하늘의 즐거움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좌든 우든 서로를 '사탄'이라 부르며
이 땅의 전쟁이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님을
어느새 잊어버린 채—
하나님의 영이 아닌
거짓의 영에 휘둘리고 만다.
보이지 않기에 더 그럴듯하고
정의로운 얼굴로 가장하기에 더 위험한—
그 마귀를 조심하자.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이들을
부디 '사탄'이라 부르지 말자.
십자가는 우리 편의 깃발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구원임을—
절대 잊지 말자.
2 days ago | [YT] |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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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일이 재미있어지는 법."
어쩌면 일은
조금 재미없는 편이 낫다.
너무 재미있으면
신경학적으로 곧 무뎌진다.
일은 저주이자 동시에 소명.
그래서 적당히 재미없을 때 균형이 맞는다.
나는 유튜브 보는 게 좋아서
'유튜브 읽어주는 남자'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보는 것도 만드는 것도 질렸다.
재미있고 돈도 벌리니
처음엔 신기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가수, 배우, 디자이너, 바리스타—
처음의 설렘을 떠받칠 철학이 없으면
근력은 곧 사라지고
즐거움은 우울로 바뀐다.
신경학자 앤드류 후버만은
요즘 시대에 흔히 나타나는 이 증상은
10~14일 쉼으로 거의 완벽하게 회복된다고 한다.
엘리야도 하나님의 능력을 본 뒤
곧 번아웃에 시달리며 사역을 내려놓고
떡과 물을 먹으며 쉬었다.
마틴 로이드 존스 역시 말했다.
큰 축복 뒤에는
영적 침체가 찾아오기 쉽다고.
문제는—
그럼에도 점점 더 큰 한 방을 원한다는 것.
무너질 줄 알면서도
일단 뛰어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면 배운다.
속도를 늦추는 법.
대박 대신,
소박한 일상에 충실하는 법.
사는 게 괜찮아지려면
무엇보다 일이 할만해지려면,
삶이 원래 조금 재미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모두 이미 안다.
"사는 게 늘 재미있을 수 없지."
그러나 말씀이 스며들지 않으면
그 앎은 머릿속에만 맴돌다 사라진다.
결국 작심삼일—
다시 대박을 꿈꾸며
오늘 하루를 불행하게 산다.
사는 건 원래 조금 텁텁하다.
그걸 받아들이는 게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러다 말씀에 기대어 살다 보면
잔잔한 재미가 스며든다.
아니, 크게 재미가 없기에
더 괜찮아진다.
그리고 문득—
짜릿한 순간이 온다.
그러니 지금은
조금 재미없어도 괜찮다.
가끔 찾아올 그 순간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주어지는 평안—
그 말씀의 비밀을
살짝쿵 나누고 싶었다.
평안은 질리는 법이 없으니까.
5 days ago | [YT] |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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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늘어난 기대수명."
영원이라는 건, 아무래도 와닿지 않는다.
당신의 수명은 오늘
100세에서 1억 년으로 늘어났다.
물론 '영원'과는 비교도 안 되지만
우리의 지각 한계를 감안해 이 정도로만 가정하자.
그럼 한 가지 불합리가 생긴다.
지금 이 100년이—
앞으로의 1억 년을 책임진다는 것.
이쯤 되면 노후 대비가 아니라 사후 대비다.
열혈 사도 바울의 말.
"천국이 거짓이면—내가 왜 이 고생을 하겠니?"
물론 순교한 바울은
남들보다 더 실제적으로 천국을 맛보았기에
이 고백이 가능했을 것이다.
앞으로 살 1억 년을 생각하면
이 땅의 100년은 조금 손해 보고 살아도 된다.
즉각적인 도파민을 미룰수록—
다가올 영원의 기쁨은 더 커지는 법.
겉으로는 어리석어 보여도
이게 가장 지혜로운 길이다.
게다가 '손해'라 여겼던 것이
막상 들여다보면 손해가 아닐 때가 있다.
얼마 전 나보다 늦게 온 이에게
의도치 않게 자리를 내주었는데—
결국 더 넓고 좋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양보할 때 얼굴이 굳은 게 민망했다)
그러니 1억 년을 위해—
이 100년은 세상보다 조금만 더
불편하게 살아 보자.
솔직히 요즘은
하나님 믿는다고 무조건 더 힘든 것도 아니다.
비기독교 국가를 보라.
우리보다 더 힘겨운 이들이 많다.
가까운 일본만 봐도—복음 없는 메마름이 선명하다.
어차피 인생은 고통이다.
피터슨 말대로
믿든 안 믿든—정말 너무 힘들다.
그러니 파스칼 말처럼
진짜 딱 한 번쯤은 진심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아보라.
영원과 천국이 유치하게 들려도—
가볍게나마 귀를 기울여 보라.
함께 연습해 나가자.
무명의 길, 손해의 길, 고난의 길을.
각오하고 들어서면—
의외로 버틸 만하고
심지어는 믿기 전보다
더 큰 축복이 내려올 때도 있다.
그런데 영원까지 보장하신다고…?
아니, 하나님.
도대체 얼마나 사랑하시는 겁니까.
그건 좀 불공정하지 않습니까—
영원이면 됩니다.
하나님 한 분이면 족합니다.
그러니 이 땅 100년은 살짝 손해 봐도 괜찮습니다.
그럼에도—아낌없이 주시는 분.
그게 아버지의 마음이다.
참고로 요즘 성경 앱도 좋은 게 많다.
한 번만 열어 보자.
단 한 구절이—
당신의 영원이 될 수 있으니.
6 days ago | [YT] |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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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이제야 알겠다."
에반게리온은 찬사의 이름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감독이 직접 다시 만든 '신극장판'은—
찬사 대신 욕설이 쏟아졌다.
나는 좋았다.
심지어 세상에서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원작은 어둡다.
정말 끝까지 가라앉는 어둠이다.
반면 신극장판은 밝다.
어이가 없을 만큼 밝다.
너무 쉽게—
너무 단순하게 해피엔딩으로 닫힌다.
그것도 주인공 신지의 결단이나 희생이 아니라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개입—
갑작스러운 '손'이 세상을 구한다.
그러니 화가 난다.
세기의 달콤한 암흑을
값싼 손짓 하나로 봉합하다니.
웃으라고 만든 장면이 아니었지만
헛웃음조차 나지 않는다.
그런데—이제야 알겠다.
원작도, 신극장판도—
모두 [안노 히데아키]의 무의식을 비춘 거울이다.
극심한 우울 속에서 만든 첫 작품은
그 어둠을 그대로 품고 있다.
눈을 찌푸려야 겨우 보이는 한 줄기 희망—
그러나 희망이라 부르기도 괴로운 빛.
이후 그는 관계의 회복과 인격의 성숙을 지나
무의식은 더 맑고 단순한 결로 드러났다.
신극장판은 그 흔적이다.
인격이 성숙할수록 서사는 단순해진다.
철학의 끝이 신학을 더듬듯
고뇌의 끝은 절대적 영성을 스친다.
그래서 마지막에 '마키나미'가
'구원'의 손이 된다.
팬덤은 이를 비꼬아
"데우스 엑스—마키나미"라 부른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 안에서 진리를 본다.
진리는 단순하다.
뜬금없이 보이는 손이 우리를 구원한다.
사람들은 그 단순함을 싫어한다.
차라리 스스로 짐을 지고
어둠 속에 머물고 싶어 한다.
그래서 빛을 미워한다.
신극장판의 너무 단순해 보이는 그 빛을—증오한다.
성경은 이미 말한다.
사람은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다.
스스로 인생의 주인—
자기 자신이 구세주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니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내려온
빛의 손을 거부한다.
문학은 본능적으로 신보다 인간을,
빛보다 어둠을 높인다.
미해결과 고통 속에서만
진정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단순한 결말은 곧 졸작의 낙인이다.
그건 충분히 정당한 평가다.
그러나 놀랍다.
어둠을 끝까지 사랑하는 인간의 구조와
빛으로 돌연 닫히는 신적 개입의 구조가—
에반게리온의 두 버전 속에서
'성경' 그 자체처럼 맞붙는다니.
결국 깨닫는다.
종교의 바깥에서도 진리는 새어 나온다.
복음의 뿌리가 얕은 일본의 콘텐츠 속에서도
하늘과 땅이 한 분의 통치 아래 있기에—
같은 해를 비추듯 같은 무의식이 흔들린다.
우리 깊은 곳엔 구원을 향한 갈망과
끝내 어둠을 택하려는 본능이
함께 숨 쉬고 있듯이.
1 week ago | [YT] | 170
View 29 replies
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어쩔 수가 없다."
뭇 사람들은
내가 세상의 길을 포기하고
'복음의 길'을 걷는 것을
대단하게 여긴다.
그러나 사실은 조금 다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결단으로 세상의 길을 버린 게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칭송받아야 마땅하겠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조금 더 직관적인 예를 들어보자.
내가 금과 은괴를 훔치지 않은 건
그저 내 주변에 훔칠 만한 금과 은괴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음란에 빠지지 않은 건
그 음란을 함께할 이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자기애에 깊이 빠지지 않은 건
예상치 못한 곳에서 흰머리가 자라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물론 기쁨과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것만이 내 삶의 의미가 된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 외에 한눈팔 만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싹 다 정리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성과 자극적으로 노닥거릴 시간과 관계,
돈이 잘 벌려 사치를 즐길 기회,
멈출 수 없는 젊음이 외모로 드러나는 욕정까지—
그 모든 것들이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내 삶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것을 고립과 실패,
안쓰러움으로 보지만—
성경은 이것을 '복'이라 부른다.
우습지 않은가?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분명 기쁨과 성령의 충만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말하면
"어쩔 수가 없다"이기 때문이다.
교회 안의 은어로 말하자면
[주님께 붙들려 온 포로]다.
좀 우습지만—정확하다.
솔직히 말해, 지금이라도 내 주변에
나를 조금이라도 자극하는 이성이 있다면
나는 금세 유혹에 빠져—
입술이 닿기도 전에 혀를 내밀고 말 것이다.
아직 젊음의 욕정이
탄탄한 피부로 빛나고,
돈도 손쉽게 들어오는 환경이었다면—
나는 복음이 아니라
사치와 향락을 쫓았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을 이끄실 때
고난과 가난—
그리고 바울에게 주셨던 가시와 같은
"어쩔 수가 없다"의 환경을 허락하신다.
그것이 광야요, 내가 마셔야 할 잔이며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길이다.
그래서—어쩔 수가 없다.
난 복음의 포로가 된
기쁨에 미쳐 날뛰는 자다.
그러니 부탁드린다.
유혹하지 말아 달라.
아니, 당신이 가만히 있어도—
내 눈엔 아직 정화되지 못한
폭풍 같은 정욕의 씨앗이 남아 있다.
돈 되는 이야기,
복음을 꺾고 요란하게
내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기회들—
그런 것들을 내게 들이밀지 말아 달라.
하나님이 날 지켜 주시겠지만
언젠가는 시험으로 다듬으시는 때가
머지않아 올 것이다.
어쩌면 나는 곧장 넘어져
여러분에게 어이없는 허망함을 남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다시 복음에 붙들린 나를
기대해 달라.
나도 방금
여러분을 위해 기도했다.
그러니 여러분도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
어쩔 수가 없다.
1 week ago | [YT] |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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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유튜브 읽어주던 남자."
이르면 내년 1월 출간될 책 원고가
거의 마무리되고 있다.
놀랍게도—신앙서적이 아니다…!
정말 재미있을 것이다.
기대되는 건 책 자체만이 아니다.
지난 북콘서트처럼
(아이러니하게도 내 책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이번 홀리컴뱃 컨퍼런스처럼,
여러분을 직접 만날 기회가
또 생기지 않을까 싶다.
아무래도 숫자에 휘둘리는 시대다 보니,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반기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는다.
화평 없이 50만을 찍고도 홀로 외로웠던 때보다,
빠지고 또 빠져 30만이 되어도
함께해 주는 분들과 만날 때—
그때야말로 느낀다.
숫자는 결국 허망한 바벨탑이라는 것을.
쓰던 소설도 공교롭게
내년 초쯤 퇴고를 시작하면,
직접 개설한 웹소설 사이트에 곧장 올라갈지도 모른다.
좀 더 신속한 공개를 위해
회차별로 퇴고하고
바로 올릴까 생각 중이기 때문이다.
소설은—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정말 미쳤다.
글자가 호흡하고
문장이 살아 움직이는 순간—
나는 그것을 분명히 느꼈다.
조던 피터슨이 말한
"허구가 때로는 실제보다 실제에 가깝다"는 그 역설.
물론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니지만,
그 문턱에 닿은 듯한 순간이 있었다.
물론 소재와 플롯 자체도
읽다 보면 실제와 겹쳐 보이는 순간이 있다.
(특히 '자금위' 시절을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더욱)
자전적 소설은 아니지만,
그때의 즐거웠던 수많은 일들이
판타지이면서도 기묘하게 현실적인 이야기로 흘러나온다.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나 스스로도 신나고, 즐겁고
또 감동을 받는다.
또 하나의 신앙 에세이는
그보다는 더 늦게 나오겠지만,
어쨌든 텍스트에 빠져 사는
이 기간 자체가 참 즐겁다.
모두 여러분과 함께 걸어온
여정에서 우러난 것들이니,
머지않아 다시 한 번—
웃으며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는 시간을 꿈꾼다.
오늘도 주님의 희락이 가득하시길—!
1 week ago | [YT] |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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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내가 더 악하다."
몇몇 사람들이
나에 대해 심하게 욕을 한다고 한다.
정확히 무슨 말인지 듣지는 못했지만
그 소식을 들은 나의 형제들이
나보다 더 아파하고
답답해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에 대해 무엇을 말하든—
나는 그 말보다 더 악하다.
아무리 나를 죄스럽다 욕해도
나는 그 언어보다 더 죄스럽고
훨씬 더 악한 사람이다.
나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지난 1년 반 동안 눈물로 기도해 왔다.
물론 처음에는
나도 모르게 끓어오르는 분개심 때문에
정신을 제대로 가다듬기 힘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과 다르지 않은 죄인이고
어쩌면 더 나쁜 사람이기에
하나님이 일찍 붙들어 주셨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아직
악을 선으로 이기는 법을 모른다.
뭇 형제들은
내 손으로 '정의'가 일어나길 바라지만,
적어도 나는 그 정의가 무엇인지
아직 확신하지 못한다.
다만 이것만 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와 공의—
그리고 사울이 끝까지 쫓아와도
칼을 들지 않고—
동굴 속에서 수년을 울부짖으며 견뎠던
다윗의 마음에 가깝다는 것을.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께
"맞서 싸우자"고까지 했다.
그는 체포하러 온 자의 귀를 잘라내며
자기 방식의 정의를 세우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
그리고 잘린 귀를 치유하셨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길은 답답하다.
그래서 '좁은 길'이라 부른다.
곧장 전쟁으로 치닫는
세상의 '넓은 방식'과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님을 믿던 그날부터
죽기 전까지 모욕과 수치—
그리고 홀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통까지
기꺼이 짊어질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없고 편안한 삶을 바라는 것,
그것이 곧 우상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에겐 힘이 없다.
그래서 나는 어떤 악에도
심지어 내 안에 깊이 자리한 악조차도—
제대로 맞설 길을 알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악을 선으로 갚으신다.
그 길은 인간의 방법이 아니다.
자녀의 손에 무기 대신 말씀을,
복수 대신 사랑을 품게 하시는—
그 어떤 초월적 영웅보다 더 어렵고
더 강한 힘을 주시는 분이시다.
누가 나를 욕하든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죄된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나를
용서하시고
죄를 묻지 않으시고
잊어 주시며
'더 나은 자'로 불러 주신 분이 계시다.
나는 그분만 본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도
그분만을 보길 바랄 뿐이다.
이 길은 어렵다.
그래서 여러분의 기도와 위로가
필요할 때가 있다.
나도 오늘 아침 여러분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나를 미워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사랑은 반드시 승리한다.
하나님의 길은 좁지만
인내와 결실의 열매로 가득하다.
그러니 나는 다시
말씀을 붙들고 기도한다.
은혜와 공의의 하나님,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주님 안에서는 모든 것을 감당합니다.
떨어지는 낙엽 하나도
주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믿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순간에도
신뢰하며 잠잠히 기다리게 하시고
굳은 마음에 사랑이 샘솟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1 week ago | [YT] |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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