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때로는 놀랍게도 당하는 것이 사랑이다.


속임을 당하고, 매를 맞고, 손해를 보고, 배신을 견디는 것—
십자가의 사랑은 그 길을 말한다.


그래서 세상 눈에는 끝없이 미련해 보인다.
애초에 십자가를 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열혈 사도 베드로가 가장 먼저 가로막았으나—


"사탄아, 물러가라."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럼 네 이웃이 끌려가 고문을 당해도 그딴 소리 할 거냐?"


나는 못 할 것 같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초대교회는 그렇게 했다.


이웃이, 가족이 끌려가도 신앙을 지켰다.
맞서 싸우기보다 조용히 무릎 꿇고 기도한 그 세대를
하나님은 칭찬하셨다.


승리주의, 투쟁주의, 정의주의—
이런 것들은 복음의 언어를 빌려
복음 자체를 뜨겁게 대체해 버린다.


신앙과 표현의 자유가 넘치는 서구보다
강하게 통제받는 공산권의 '억울한' 자리에서
기독교가 전례 없이 부흥하는 순간들을 본다.


물론 인위로 그 자리를 만들자는 뜻이 아니다.
다만 어디든, 물리적 억압만 다를 뿐
본질은 초대교회와 결코 다르지 않다.


우리는 자꾸 '세상의 방식'으로 이기고 싶어 한다.


원수를 껴안아 사랑하여 그 피로 열매를 증거하기보다
"가만있으면 아내를 빼앗긴다"는 두려움에
칼집에서 칼을 뽑는다.


성경 구절을 인용해 "두려워 말라" 하면서도
실은 본인도 그 두려움 속에 상대를 끊임없이 도발한다.


무신론에서 나온 이념이라 하여
모조리 '사탄'의 세력으로 정죄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쓰는 컴퓨터와 휴대폰—
수많은 기술과 제도는 무신론자들의 손에서 나왔다.


그 무신론을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무신론자도 사랑하신다.


우리는 계속 사랑을 잃는다.
수많은 투쟁의 문장에는 사랑이 없다.


하나님을 지킨다 말하지만
그분이 본래 '무적'이심을 잊는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분열을 좋아하는 사탄의 노략 속에서
어떻게 끝까지 평안을 지키는지—
그걸 보시려는 건 아닐까.


우리가 당하고, 양보하고, 손해 보고—
심지어 우리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 앞에 설 때
사람들은 비로소 '복음의 힘'에 놀라지 않을까.


반대로, 복음의 자유가 아니라
이념이 가리키는 자유를 위해 목울대가 터져라 싸울 때—
사람들은 오히려 더 멀어지지 않을까.


주님이 먼저 십자가로 보여주신 승리 방식을
왜 우리는 부정하고, 답답하다 여기고
피상적이라 취급하는가.


왜 '인내'의 열매 대신—
급진적 구호의 선명함에만 반응하는가.


그게 인간의 본성, 곧 죄성이다.


문제는 그것이 죄인 줄 모르고
도파민의 취기 속(도파민은 자기중심성을 증폭시킨다)에
'내 편 = 하나님 편'이라 착각한다는 것.


신앙의 길은 좁고, 때로 애매하다.


끊임없이 기도로 묻고
공동체 안에서 나누며 분별해야 한다.


명확한 슬로건 아래 모여 맞붙는—
그런 눈에 보이는 전쟁이 아니다.


이미 영적 전쟁이 아닌
'다른 전쟁'을 치르는 이들에게는
복음의 초청이 쉽게 닿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사랑이 가장 필요한 영혼일지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증거하지 못한 채—


분노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입에 칼을 문 채 살아간다면,


우리는 먼저—
부족한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달라 기도하고


계속 드러나는 이 은혜의 결핍을 위해—
오늘도 조용히 주 앞에 엎드려야 한다.


결국 기독교는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죄와 교훈의 칼로
율법을 다시 들이댄다.


자기의 옳음을 입증하며 안도하려는 이 세태—


이것이 2000년 전부터 반복된 굴레라는 사실이
도리어 성경의 진리를 더 굳게 증명해 준다.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당하심으로 이기신 그 길,
미련해 보이나 그 무엇보다 크신 사랑.


어렵겠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자.


그 길만이—


우리와 이 시대를 살려낼 것이다.

3 days ago | [YT] | 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