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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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성령 충만한 가정폭력."








신앙은 성취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요즘 새삼 절실히 깨닫는다.


회심 후 처음 들은 설교는
'베이직교회' 조정민 목사님의 말씀이었다.


그 위에 내 신앙의 토대를 놓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이후 '라이프처치'의 크레이그 그로셸 목사 역시
교회보다 아내와 자녀를 더 끔찍이 여긴다.


내 주변엔 목회자 자녀들이 많다.
그래서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된다.


교회 운영의 극심한 스트레스,
규모 확장, 장로와 교인으로부터의 인정 욕구 때문에
가정에 폭력을 휘두르는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이기에
사탄은 더 집요하게 방해하며
가장 가까운 관계를 노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나를 거쳐
가장 가까운 이에게 흘러가야 한다.


그럼에도 목회의 방향이 여전히 외부,
결국 사회적 인정을 향한다.


목사임에도 수십 년을 그 길로 가다가
거의 마지막 순간에서야 잘못을 깨닫는 모습을 보면
그저 기가 막히고 아이러니할 뿐이다.


내가 들은 설교의 핵심은 분명했다.
세상이든 교회든 모든 일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


정작 내 곁의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세계 기업을 세우든
세계 교회를 세우든 아무 소용이 없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결국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닮지 못하면,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를 세우고
교인과 장로들이 "성령이 충만하다"고 외쳐도—


아내에게 불성실하고 자녀를 폭행하며
"기도 방해하지 말라"고 소리치는 그 장면은,


받은 은혜를 잘못 돌렸거나
어쩌면 애초에 은혜를 받은 적도 없이
그저 외적으로만 쓰임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건 단지 한 목회자의 문제가 아니다.
험난한 시대를 지나오며 교회 전체가
'비본질'에 휘둘려 온 구조적 문제일지도 모른다.


설령 교회가 무너지고
힘든 아르바이트로 몸이 고되어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 가정을 사랑하며
매 순간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는 사람.


그가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리고 천국은 바로 거기서 확장된다.


예수를 영접했다 해도
세상의 논리대로 영향력과 자존감을
'규모'에서 찾는 이들이 많다.


바벨탑의 본성을 내려놓지 못한 채—
십자가를 자기계발의 수단으로 바꾸어 버린다.


여전히 주도권을 쥔 채 살며
주변을 병들게 한다.


그래서 다시 확인한다.
신앙은 세속의 성취와 다르다.


교인의 외피를 두르고도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기독교 인구가 20% 남짓.
한국이 아시아에서 부흥을 경험했다 말하지만—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정직히 묻자.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정말 진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건방져 보일지 모르지만
이 말은 내 미래를 두려워하는 고백이기도 하다.


순전한 믿음은 이 생에서 완전할 수 없겠지만
내게 주신 이 뜨거움을 오래 지키고 싶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뜨거움을 금세 잊는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이제 겨우 1년 반이 지났다.


성숙하되 타협하고 싶지 않다.
내 주변을 해치면서까지
다시 규모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나이 들어—
하나님의 붙드심 없는 괴물이 되어 가기보다


차라리 뜨거운 지금 이대로
데려가시길 바랄 때도 있다.


물론 이것도 교만이고, 치기 어린 생각임을 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알고
그 기이한 신앙조차 써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안다.


목회자와 교회가
오히려 더 끔찍하게 보이는 이 절망의 골짜기를 지나—
어둠이 깊을수록 더 선명히 빛나는 순간을
보게 하실 것을 소망한다.


나부터 주시는 분량만큼이라도
조금 더 믿고, 조금 더 이해하고
조금 더 사랑하길 원한다.


아무리 그래도 문제는 문제다.
교회의 병은 여전히 깊다.


이 상황을 하나님이 어떻게 되돌리실까.


그 과정은 분명—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아플 것이다.


그래서인지 벌써부터
가볍지 않은 씁쓸함이 스민다.

4 hours ago | [YT] | 144

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골방이 더 두려운 사람들."








누구나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
어떤 사람에겐 그 공기가 더 잘 맞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전성기—
말 그대로 가장 '슈퍼스타'이실 때
오히려 그 인기를 뒤로하고 산으로 오르셨다.


골방에서
아버지와의 교제를 끊지 않기 위해서였다.


정말 깊은 영성가와 목회자들은
엄청난 사역과 존경, 인기 속에서도
반드시 홀로 하나님과 마주하는 시간을 구별한다.


하나님과 1대1로 '데이트'하는 그 시간.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과 친구처럼 이야기하며 율법을 받았다.


그러나 산 아래의 백성들은
그 시간을 견디지 못했다.


불평했고
눈앞의 현실에 마음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 현실은
더 독해졌다.


하늘을 바라보면 어디서든 전진하고
현실만 바라보면 결국 그 자리에 묶인다.


현실을 응시하는 것이 더 책임 있어 보이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그 모든 것을 초월하신다.


우리가 그 '비현실'—곧 하나님의 초월을 살아낼 때,
사람들이 조롱하고 취했다고 손가락질해도
그때가 오히려 훨씬 더 멀리 간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인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해—
시선을 곧장 휘몰아치는 파도에 둔다.


그 순간 거대한 두려움이 밀려오고
세상이 뒤집히는 듯하며
이 나라가 무너질까 전전긍긍한다.


그 불안을 하나님의 뜻과 억지로 엮어
노이로제에 가까워지면서도—


정작 골방에 들어가
그분과 진짜로 마주할 생각은 떠올리지도 못한다.


그리고 오직 이 땅을 위해
눈물로 기도한다.


주님이 계신 곳이 어디든 하늘나라인데도,
우리는 이 땅을 지키려는 '인간의 열심'을 위해
하나님께 열성을 다해 빌 때가 많다.


광야를 떠돌던 땅 없는 백성들을
한결같이 사랑하신 하나님을 잊고
정치 지도자와 운동가를 높인다.


'국가주의'는 그럴듯해 보여
우상처럼 느껴지지 않지만
실은 가장 위험한 우상 중 하나다.


조상들이 이룬 위대한 제도와 이념을
유일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알게 모르게 동일시할 정도다.


물론, 정치 참여는 필요하다.
심지어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좋은 것일수록
오히려 더 쉽게 우상이 된다.


우상은 대개 나쁜 것보다
'좋은 것'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최상으로 좋은 것'—
오직 그분께만 붙들려야 한다.


그 외에는 아무리 좋아도
순서가 바뀌면 위험하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으로 포장된 열심 아래서조차
투쟁과 싸움의 골짜기에 다시 빠진다.


세상과 완벽하게 같은 방식으로—
아니, 때로는 더 괴물처럼.


그래서 스스로의 멱살을 붙들고
골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곧 자기 부인이며,
주님께로 돌아가 맡기는 일이다.


가능하면 일주일에 하루—
아무리 못해도 반나절.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는 시간.


말도 안 되지 않은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나를 만나 주신다는 사실이.


그러니 지금 당장 전쟁이 일어나
모든 걸 빼앗길 것 같아도—
혹은 세상의 인기가 갑자기 폭발해도
이 시간을 포기할 수는 없다.


레벨이 완전히 다르니까.


인간의 환호성 vs 신과의 대담—
이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관계는 절대로 우연히 좋아지지 않는다.
시간을 정하고, 만나고, 약속해야 한다.


그러니 잠시만이라도
문을 닫고 불을 낮추자.
기도 방석과 작은 촛대 하나면 충분하다.


남은 것은—
그분이 곧 오신다는 사실.


그분은 결코 늦지 않으신다.


아니, 언제나 먼저—


기다리고 계셨다.

3 days ago | [YT] | 257

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그 누구보다 빠르게."








하나님을 진짜로 만나면
동시에 천국을 알게 된다.


어떤 장소가 아니라 인격,
하나의 영원한 '관계'로 알게 된다.


나는 지난 5년 동안
PC주의와 페미니즘을 비판하며
보수의 가치를 전해 왔다.


그 가치는 지금도 여전히 소중하다.
다만 하나님을 만난 뒤—


그 모든 가치 위에 놓여야 할
더 근본적인 중심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천국을 맛보았으면 한다.


차라리 조금 양보하고 손해 보더라도,
한 사람이라도 더 주님을 알게 되는 쪽이
더 중요해졌다.


거듭난 후 우리가 이 땅에 서는 이유는 한 가지.
모두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함이다.


그 길의 첫째는 언제나 '은혜'.
우리가 먼저 받은 사랑을 건네는 일.


따끔함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역할은 이미 세상이 과잉으로 하고 있다.


게다가 심리학적으로
나도 당신도 누구도
'화'와 '비판'으로 설득된 적이 없다.


예수님이 이방의 사마리아 여인—
그것도 죄로 가득한 그녀에게 하신 일은
비판도, 비난도 아니었다.


그저 한순간의 대화였다.
그 짧은 대화가 한 영혼을 완전히 바꿨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사랑이다.


사랑을 주지 못하니
청년들은 이단과 이념 집단으로 모인다.
그곳에서 '소속'과 '돌봄'을 먼저 맛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도,
자기 진영과 당장의 권리를 지키려 들며
마치 하늘 시민권을 잊은 사람처럼 굴 때가 많다.


왜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불안과 분노에 떨며 사는가.


이 땅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제도와 이념보다 시급한 일—
곁의 지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맛보게 하는 것 아닐까.


우리가 건넬 것은
'사탄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이 아니라
사랑받아 본 적 없는 이들과의 한 끼 식사—
혹은 따뜻한 한 마디.


물론 대화는 커녕—
감사보다 먼저 욕을 들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씨익 웃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기억하자.
우리는 이미 하늘나라에 산다.
그 나라는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세상은 줄 수 없는 특권—
곧 하나님의 아가페를 나누는 사람들이다.


정치의 알고리즘에
우리의 신경가소성을 내어주지 말자.


무엇보다 그것이
주님과의 교제를 방해한다면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곳은 오히려 말씀 쪽이다.


이 땅이 무너져도
주님의 말씀을 아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은 없다.


세상의 지혜보다,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더 선명히 빛나게 해 달라—
그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게 하자.


어차피 우리는
천국에서 다시 만날 사람들이다.


나와 다른 이웃,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이가
주님을 만나게 된다면


그가 붙들던 잘못된 틀은
자연스레 내려놓게 될 것이다.


바울이 그랬듯
우선순위가 바뀔 것이다.


그럼에도 이미 정치 이념이
알게 모르게 복음보다 앞선—
하나의 교과서이자 '운영체제'가 된 이들이 적지 않다.


실제 상처와 분노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하나님께 토로하기보다


'정치적 이슈' 안에서 소비하는 회로가
어느새 더 큰 신경 회로가 되어 버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조급한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다.


그러니
현실의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힐수록—


광야로 돌아가자.
말씀과 기도로 예배하는 그곳,


주님과 함께 걸으며
인격적 관계를 다시 시작하는 원점으로.


그 자리에서
사랑과 은혜로 붙들리자.


그리고 그 은혜에
흠뻑 젖은 채,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자.


그때가 오히려—
가장 빠른 때일 테니까.

4 days ago | [YT] | 257

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좌파는 사탄이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순수한 혈통이라며
더럽고 타락한 이방인들을 저주했다.


선지자 요나는
'사탄의 나라'라 불리던 니느웨로 가라는 부르심을
조국의 명예가 더 중요했기에 거부했다.


우파는 유신론의 뿌리를
좌파는 무신론의 뿌리를 가졌으니—
오직 '우파'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 신실한 '좌익 그리스도인'을 알고
단 한 번도 하나님께 의지해 본 적 없는 '우익 인사'와도
오래도록 함께 지내왔다.


우리의 지상 명령은 너무도 단순하다.
서로 사랑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


하나님은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원수의 나라—오늘날로 치면
식민의 상처를 남긴 '일본 제국' 같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하셨다.


"그들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
그게 곧 하나님의 뜻이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
아예 원수를 사랑하심으로
그 말씀을 완성하셨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좌파를, 혹은 회개하지 않은 일본을
'사탄'이라 부르는 그 마음이야말로—
정작 가장 사탄에 가까운 마음이라는 것을.


애초에 회개조차 은혜로만 가능한데
하나님의 거룩에 닿아
세상이 줄 수 없는 사랑을 먼저 맛본 우리가—


이 땅의 이익과 자존감,
정치적 정체성을 달래려
상대 진영을 향해 "사탄!"을 외친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지금 상황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설령 이보다 더 참혹한 일이 일어난다 해도—
진리는 요동치지 않는다.


국가 전복이든, 납치든, 음모든—
그 앞에서 나도 여전히 연약하다.
분노하며 계속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십자가 아래에 두라 하신다.


그리고 불가능한 원수 사랑을
당신 자신으로 증명하시고
그 길을 따라오라 하신다.


정치 성향이 단순히 우파이거나
자유주의자라면 어떻게 반응하든 상관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는 이들이
왜 이 땅의 이익과 깃발 아래—
신앙이 아닌 '정치적 신념'에
그토록 깊이 빠져 사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 사랑의 부족은
정치가 다른 이들 때문이 아니라—


정작 정치적으로 비슷한 그리스도인들을
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기대했던 것이다.


세상이 보여줄 수 없는
그 말도 안 되는 주님의 사랑을—
이들이라면 보여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더 묻고 싶다.
예수님을 만났다고 고백하면서—
왜 그분의 성품을 닮으려 하지 않는가.


끊임없는 자기 부정,
주님께 생명을 드린 삶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정말 더 큰 영적 공격은
상대 진영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신앙의 언어를 쓰기 때문에—
오히려 더 깨닫지 못한 채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있는 건 아닐까.


오직 우리는 사랑을 증거하고
정죄와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야 할 제자들이다.


요나가 회개를 요구했던 니느웨도
결국 하나님께서 100년 뒤에 직접 심판하셨다.


그런데 왜—
정죄와 심판의 깃대를 스스로 움켜쥔 채
더 격앙되어 거친 말을 쏟아내고 있는가.


사랑해도 모자랄 시간에
왜 자꾸 묘한 우월감을 느끼려 하는가.


당신도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 누구와도 비할 수 없는 '죄인'임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왜 자꾸 자신이 더 낫다고 주장하는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더 나은 것 같은가.


비기독교인보다
세상보다
혹은 그 '좌파'보다—


당신이 더 거룩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우월감은 신앙이 아니다.
그건 복음의 반대편에서
은혜를 흉내 내는 또 다른 교만일 뿐이다.


사랑은 우위를 점하는 일이 아니라
같은 높이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다.


그게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이었다.


분별은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다.
비인격화도, 공격도 아니다.
전투처럼 흥분하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도 다—
결국 내 교만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쓰는 이 글도 결국
내 의를 위한 또 하나의 변명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도뿐이다.


주님—
저에게 더 깊고 넓은 사랑을 허락하소서.


이들의 아픔과 열심을 헛되이 보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분노도, 정의도, 공의마저도
예수님의 온화한 성품을 더욱 닮게 하소서.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릴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손으로 우리 모두를 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5 days ago | [YT] | 462

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때로는 놀랍게도 당하는 것이 사랑이다.


속임을 당하고, 매를 맞고, 손해를 보고, 배신을 견디는 것—
십자가의 사랑은 그 길을 말한다.


그래서 세상 눈에는 끝없이 미련해 보인다.
애초에 십자가를 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열혈 사도 베드로가 가장 먼저 가로막았으나—


"사탄아, 물러가라."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럼 네 이웃이 끌려가 고문을 당해도 그딴 소리 할 거냐?"


나는 못 할 것 같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초대교회는 그렇게 했다.


이웃이, 가족이 끌려가도 신앙을 지켰다.
맞서 싸우기보다 조용히 무릎 꿇고 기도한 그 세대를
하나님은 칭찬하셨다.


승리주의, 투쟁주의, 정의주의—
이런 것들은 복음의 언어를 빌려
복음 자체를 뜨겁게 대체해 버린다.


신앙과 표현의 자유가 넘치는 서구보다
강하게 통제받는 공산권의 '억울한' 자리에서
기독교가 전례 없이 부흥하는 순간들을 본다.


물론 인위로 그 자리를 만들자는 뜻이 아니다.
다만 어디든, 물리적 억압만 다를 뿐
본질은 초대교회와 결코 다르지 않다.


우리는 자꾸 '세상의 방식'으로 이기고 싶어 한다.


원수를 껴안아 사랑하여 그 피로 열매를 증거하기보다
"가만있으면 아내를 빼앗긴다"는 두려움에
칼집에서 칼을 뽑는다.


성경 구절을 인용해 "두려워 말라" 하면서도
실은 본인도 그 두려움 속에 상대를 끊임없이 도발한다.


무신론에서 나온 이념이라 하여
모조리 '사탄'의 세력으로 정죄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쓰는 컴퓨터와 휴대폰—
수많은 기술과 제도는 무신론자들의 손에서 나왔다.


그 무신론을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무신론자도 사랑하신다.


우리는 계속 사랑을 잃는다.
수많은 투쟁의 문장에는 사랑이 없다.


하나님을 지킨다 말하지만
그분이 본래 '무적'이심을 잊는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분열을 좋아하는 사탄의 노략 속에서
어떻게 끝까지 평안을 지키는지—
그걸 보시려는 건 아닐까.


우리가 당하고, 양보하고, 손해 보고—
심지어 우리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 앞에 설 때
사람들은 비로소 '복음의 힘'에 놀라지 않을까.


반대로, 복음의 자유가 아니라
이념이 가리키는 자유를 위해 목울대가 터져라 싸울 때—
사람들은 오히려 더 멀어지지 않을까.


주님이 먼저 십자가로 보여주신 승리 방식을
왜 우리는 부정하고, 답답하다 여기고
피상적이라 취급하는가.


왜 '인내'의 열매 대신—
급진적 구호의 선명함에만 반응하는가.


그게 인간의 본성, 곧 죄성이다.


문제는 그것이 죄인 줄 모르고
도파민의 취기 속(도파민은 자기중심성을 증폭시킨다)에
'내 편 = 하나님 편'이라 착각한다는 것.


신앙의 길은 좁고, 때로 애매하다.


끊임없이 기도로 묻고
공동체 안에서 나누며 분별해야 한다.


명확한 슬로건 아래 모여 맞붙는—
그런 눈에 보이는 전쟁이 아니다.


이미 영적 전쟁이 아닌
'다른 전쟁'을 치르는 이들에게는
복음의 초청이 쉽게 닿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사랑이 가장 필요한 영혼일지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증거하지 못한 채—


분노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입에 칼을 문 채 살아간다면,


우리는 먼저—
부족한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달라 기도하고


계속 드러나는 이 은혜의 결핍을 위해—
오늘도 조용히 주 앞에 엎드려야 한다.


결국 기독교는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죄와 교훈의 칼로
율법을 다시 들이댄다.


자기의 옳음을 입증하며 안도하려는 이 세태—


이것이 2000년 전부터 반복된 굴레라는 사실이
도리어 성경의 진리를 더 굳게 증명해 준다.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당하심으로 이기신 그 길,
미련해 보이나 그 무엇보다 크신 사랑.


어렵겠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자.


그 길만이—


우리와 이 시대를 살려낼 것이다.

6 days ago | [YT] | 225

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당신은 나의 우상입니다."







라고 입 밖에 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우리는—종교개혁자의 말마따나—
'우상을 쏟아내는 공장'이다.


인간은 반드시 보이는 것에 휘둘린다.
선악과 이후 밝아진 눈은
늘 눈앞의 것을 붙든다.


그러나 더 큰 빛을 보면—
전에 붙들던 것들이 우상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연약함은 남아
우리는 다시, 끊임없이 보이는 것에 흔들린다.


가장 먼저는 사람이다.
불안을 잠재울 리더를 원한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 정치 권위자가
어느새 우리의 '구원자'가 된다.


미국 남부의 바이블 벨트에서
트럼프가 메시아처럼 호명되는 장면—
교회 안에서조차 그를 찬양하는 입술들.


그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어차피 우리는 우상공장이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연약함마저
선으로 합하여 주신다.


그렇다고 "그렇지 뭐—"에 멈춰야 하는가.


정치는 차선의 예술이라 해도,
'차악'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과연 지혜인가.


아마 내가 찍는 곳과
기독교 정치를 우상화하는 이들이 찍는 곳은
거의 같을 것이다.
말이 오가도 결과는 비슷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가만히 있어도 되는가.
복음이든 정치든, 어차피 결말이 비슷하니.


아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세속의 논리다.


우상화와 '복음적' 정치의 결말이 닮아도,
하나님은 과정과 의도를 보신다.
우리 마음의 방향을 보신다.


입술로 "예수님과 복음"을 말하면서도
내가 기대하는 것이
주님을 닮은 인격과 작은 예루살렘 같은 공동체인가.


아니면 현실의 답답함을 풀어줄
또 다른 정치 이상 위에
믿음, 소망, 사랑의 언어를 덧씌운 것인가.


요즘의 뜨거움이
성령의 열심에서 왔는가,
아니면 이념에 취한 열광인가.


좋은 게 좋다 해도
가끔은 멈춰 짚어야 한다.


신앙의 언어를 쓰기에 오히려 경각심을 잃는
교묘한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더 깊이 신앙을 성찰해야 한다.


"복음으로 돌아가자"가 순진하게 들리고
"십자가를 지자"가 애매하게 들린다면—


우리가 인생을 좌우의 축으로만 재단하고 있는지
한 번은 되돌아봐야 한다.


끝없이 흘러내린 보혈은
두 갈래 큰길보다 더 좁은 길이다.


그러나 반드시 인내로 걸어야 할 길이기에
지루해 보이고 나이브해 보여도
담대히 끝까지 가야 한다.
(오히려 가장 급진적인 길이다)


나 역시 끔찍한 죄성을 타고났다.
답답함 속에서
누군가를 정죄하고 싶은 본심이 고개를 든다.


어쩌면 그래서 하나님은
다소 기울어진 우리의 정치 열심도 인내로 사용하시고
나의 답답함 속 거룩하지 못한 자기중심까지
비추어 드러내신다.


하나님이 좌와 우를 허락하시고
때로는 체제 전복의 음모조차 허용하시는 이유—


연약한 인간이 그럼에도
서로 사랑하라 하신 뜻이 아닐까.


나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고
앞으로 가야 할 길도 멀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가 우상 공장임을
가능하다면 매일 아침 기억하자.


정해진 틀 속에 사는 한계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는 은혜의 시간만은
놓치지 말자.


주시는 사랑의 분량만큼만이라도 사랑하길 원한다.


내게 그 힘이 없음 알기에, 더욱 간절히 구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이 가득하길


진심을 다해 기도한다.

6 days ago | [YT] | 199

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생각보다 예쁘게 생긴 마귀."









어릴 적 동화의 '마귀 할멈' 탓에
사탄이라 하면 으레 사납고 괴이한 얼굴을 떠올렸다.


혹은 서브컬처 속 '소악마'
이기적이지만 귀여운 캐릭터—
작은 뿔 머리띠로 장난치는 이미지.


나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청순하고 단정한
해달라는 대로 다 들어주는 미소의 여인.
오히려 천사 같은 친절로 다가오는 존재—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사탄은 '영'이다.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모습이 없다.


그래서 신앙을 가져도
사탄을 단지 상징쯤으로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C. S. 루이스가 말했듯
사탄을 믿지 않거나
그를 얕보는 자는
결국 사탄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하나님이 나를 붙드신 뒤—
내가 가장 주의 깊게 살피게 된 영역이 있다.
바로 '정치'다.


그 전에는 막연히
정치적 우파와 기독교를 겹쳐 보았다.
지키려는 가치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위 서구의 '기독교 우파' 흐름 속에는
이념이 신앙의 언어를 빌려
교묘하게 자기 논리를 포장하고 있다.


나는 그걸—
나중에서야 분별하게 되었다.


그래서 놀랍게도
정치는 복음이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무엇보다 복음을 중심으로 내세우던
정치 인플루언서들이
상대 진영을 ‘사탄’으로 몰아가는 장면을 보고서야—


여기가—
사탄이 가장 좋아할 자리라는
섬뜩한 떨림이 밀려왔다.


정말로
거기에 경각심을 가진 이는 거의 없었다.


보수든 진보든—
조금 과격해도 방향만 맞으면
복음적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초대교회도 같은 문제에 시달렸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그분을 '정치적 메시아'로 소비하려 했던
당대 권력의 현실정치였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보다
보이는 장에서 도파민이 폭발하는
현실정치로 끌어들이는 일.


분노할 때 다량의 도파민이 솟구친다는 걸
모르는 이들이 많다.


그게 바로 사탄의 전략이다.
그러니 사람을 사탄으로 여기면 안 된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되
죄인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내어주셨다.


우리가 '사탄'이라 지적하고 싶은 바로 그 사람을,
주님은 사랑하셔서 그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우리가 그 앞에서 정죄의 깃발을 드는 순간—
우리는 복음의 자리에서 멀어진다.


더 뜨겁고, 더 몰두되고—
복음의 군사가 된 듯한 도취.


그러나 그것이
이념에 홀린 상태와 무엇이 다른가.


양선과 온화, 평강이 열매 맺지 못한다면
우린 십자군의 칼을 다시 쥔 것뿐이다.


복음의 언어를 휘두르지만
실은 권력의 칼을 쥔 손.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 뜻이 땅에서 드러난 방식은
놀랍게도 '십자가'였다.


우리가 참여할 것은 그 사역이지,
세상의 방식 그대로 권위와 권력을 타는 일이 아니다.


물론 음모의 전말—
끔찍한 체제 전복의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정당한 염려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로마가 지배하든 말든
오직 주님만 바라보던 그 시선을 잃고,


로마에 맞서 현실 혁명을 꿈꾸던
1세기의 '질럿'과 닮아가는
지금의 SNS 시대.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더 깊은 골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탄은 영이다.


그 보이지 않는 영은 우리의 내면을 흔들고
심지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해
하나님의 말씀조차 입에 올린다.


누군가 이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악한 계획을 꾸민다 해도—
그를 '사탄'이라 단죄할 권한은
우리에게 없다.


그 언어는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
오히려 기독교를
권력의 도구처럼 보이게 한다.


정치적 전도를 앞세워
자신이 속한 진영의 기반을 지키려 들기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성품이 성화되는 열매—
온유와 절제, 화평을
고민하고 훈련해야 한다.


그것이 권력자에게 가장 어려운 겸손일지라도
휘두르며 얻는 즐거움은
결코 하늘의 즐거움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좌든 우든 서로를 '사탄'이라 부르며


이 땅의 전쟁이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님을
어느새 잊어버린 채—


하나님의 영이 아닌
거짓의 영에 휘둘리고 만다.


보이지 않기에 더 그럴듯하고
정의로운 얼굴로 가장하기에 더 위험한—
그 마귀를 조심하자.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이들을
부디 '사탄'이라 부르지 말자.


십자가는 우리 편의 깃발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구원임을—


절대 잊지 말자.

1 week ago | [YT] | 372

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일이 재미있어지는 법."











어쩌면 일은
조금 재미없는 편이 낫다.


너무 재미있으면
신경학적으로 곧 무뎌진다.


일은 저주이자 동시에 소명.
그래서 적당히 재미없을 때 균형이 맞는다.


나는 유튜브 보는 게 좋아서
'유튜브 읽어주는 남자'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보는 것도 만드는 것도 질렸다.


재미있고 돈도 벌리니
처음엔 신기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가수, 배우, 디자이너, 바리스타—
처음의 설렘을 떠받칠 철학이 없으면
근력은 곧 사라지고
즐거움은 우울로 바뀐다.


신경학자 앤드류 후버만은
요즘 시대에 흔히 나타나는 이 증상은
10~14일 쉼으로 거의 완벽하게 회복된다고 한다.


엘리야도 하나님의 능력을 본 뒤
곧 번아웃에 시달리며 사역을 내려놓고
떡과 물을 먹으며 쉬었다.


마틴 로이드 존스 역시 말했다.
큰 축복 뒤에는
영적 침체가 찾아오기 쉽다고.


문제는—
그럼에도 점점 더 큰 한 방을 원한다는 것.


무너질 줄 알면서도
일단 뛰어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면 배운다.
속도를 늦추는 법.


대박 대신,
소박한 일상에 충실하는 법.


사는 게 괜찮아지려면
무엇보다 일이 할만해지려면,
삶이 원래 조금 재미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모두 이미 안다.
"사는 게 늘 재미있을 수 없지."


그러나 말씀이 스며들지 않으면
그 앎은 머릿속에만 맴돌다 사라진다.


결국 작심삼일—
다시 대박을 꿈꾸며
오늘 하루를 불행하게 산다.


사는 건 원래 조금 텁텁하다.
그걸 받아들이는 게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러다 말씀에 기대어 살다 보면
잔잔한 재미가 스며든다.


아니, 크게 재미가 없기에
더 괜찮아진다.


그리고 문득—
짜릿한 순간이 온다.


그러니 지금은
조금 재미없어도 괜찮다.


가끔 찾아올 그 순간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주어지는 평안—


그 말씀의 비밀을
살짝쿵 나누고 싶었다.


평안은 질리는 법이 없으니까.

1 week ago | [YT] | 335

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늘어난 기대수명."









영원이라는 건, 아무래도 와닿지 않는다.


당신의 수명은 오늘
100세에서 1억 년으로 늘어났다.


물론 '영원'과는 비교도 안 되지만
우리의 지각 한계를 감안해 이 정도로만 가정하자.


그럼 한 가지 불합리가 생긴다.


지금 이 100년이—
앞으로의 1억 년을 책임진다는 것.
이쯤 되면 노후 대비가 아니라 사후 대비다.


열혈 사도 바울의 말.
"천국이 거짓이면—내가 왜 이 고생을 하겠니?"


물론 순교한 바울은
남들보다 더 실제적으로 천국을 맛보았기에
이 고백이 가능했을 것이다.


앞으로 살 1억 년을 생각하면
이 땅의 100년은 조금 손해 보고 살아도 된다.


즉각적인 도파민을 미룰수록—
다가올 영원의 기쁨은 더 커지는 법.


겉으로는 어리석어 보여도
이게 가장 지혜로운 길이다.


게다가 '손해'라 여겼던 것이
막상 들여다보면 손해가 아닐 때가 있다.


얼마 전 나보다 늦게 온 이에게
의도치 않게 자리를 내주었는데—
결국 더 넓고 좋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양보할 때 얼굴이 굳은 게 민망했다)


그러니 1억 년을 위해—
이 100년은 세상보다 조금만 더
불편하게 살아 보자.


솔직히 요즘은
하나님 믿는다고 무조건 더 힘든 것도 아니다.


비기독교 국가를 보라.
우리보다 더 힘겨운 이들이 많다.
가까운 일본만 봐도—복음 없는 메마름이 선명하다.


어차피 인생은 고통이다.
피터슨 말대로
믿든 안 믿든—정말 너무 힘들다.


그러니 파스칼 말처럼
진짜 딱 한 번쯤은 진심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아보라.


영원과 천국이 유치하게 들려도—
가볍게나마 귀를 기울여 보라.


함께 연습해 나가자.
무명의 길, 손해의 길, 고난의 길을.


각오하고 들어서면—
의외로 버틸 만하고
심지어는 믿기 전보다
더 큰 축복이 내려올 때도 있다.


그런데 영원까지 보장하신다고…?


아니, 하나님.
도대체 얼마나 사랑하시는 겁니까.
그건 좀 불공정하지 않습니까—


영원이면 됩니다.
하나님 한 분이면 족합니다.
그러니 이 땅 100년은 살짝 손해 봐도 괜찮습니다.


그럼에도—아낌없이 주시는 분.
그게 아버지의 마음이다.


참고로 요즘 성경 앱도 좋은 게 많다.
한 번만 열어 보자.


단 한 구절이—
당신의 영원이 될 수 있으니.

1 week ago | [YT] | 269

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이제야 알겠다."







에반게리온은 찬사의 이름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감독이 직접 다시 만든 '신극장판'은—
찬사 대신 욕설이 쏟아졌다.


나는 좋았다.
심지어 세상에서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원작은 어둡다.
정말 끝까지 가라앉는 어둠이다.


반면 신극장판은 밝다.
어이가 없을 만큼 밝다.


너무 쉽게—
너무 단순하게 해피엔딩으로 닫힌다.


그것도 주인공 신지의 결단이나 희생이 아니라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개입—
갑작스러운 '손'이 세상을 구한다.


그러니 화가 난다.
세기의 달콤한 암흑을
값싼 손짓 하나로 봉합하다니.


웃으라고 만든 장면이 아니었지만
헛웃음조차 나지 않는다.


그런데—이제야 알겠다.


원작도, 신극장판도—
모두 [안노 히데아키]의 무의식을 비춘 거울이다.


극심한 우울 속에서 만든 첫 작품은
그 어둠을 그대로 품고 있다.


눈을 찌푸려야 겨우 보이는 한 줄기 희망—
그러나 희망이라 부르기도 괴로운 빛.


이후 그는 관계의 회복과 인격의 성숙을 지나
무의식은 더 맑고 단순한 결로 드러났다.


신극장판은 그 흔적이다.


인격이 성숙할수록 서사는 단순해진다.
철학의 끝이 신학을 더듬듯
고뇌의 끝은 절대적 영성을 스친다.


그래서 마지막에 '마키나미'가
'구원'의 손이 된다.


팬덤은 이를 비꼬아
"데우스 엑스—마키나미"라 부른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 안에서 진리를 본다.


진리는 단순하다.
뜬금없이 보이는 손이 우리를 구원한다.


사람들은 그 단순함을 싫어한다.
차라리 스스로 짐을 지고
어둠 속에 머물고 싶어 한다.


그래서 빛을 미워한다.
신극장판의 너무 단순해 보이는 그 빛을—증오한다.


성경은 이미 말한다.
사람은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다.


스스로 인생의 주인—
자기 자신이 구세주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니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내려온
빛의 손을 거부한다.


문학은 본능적으로 신보다 인간을,
빛보다 어둠을 높인다.


미해결과 고통 속에서만
진정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단순한 결말은 곧 졸작의 낙인이다.
그건 충분히 정당한 평가다.


그러나 놀랍다.


어둠을 끝까지 사랑하는 인간의 구조와
빛으로 돌연 닫히는 신적 개입의 구조가—


에반게리온의 두 버전 속에서
'성경' 그 자체처럼 맞붙는다니.


결국 깨닫는다.
종교의 바깥에서도 진리는 새어 나온다.


복음의 뿌리가 얕은 일본의 콘텐츠 속에서도
하늘과 땅이 한 분의 통치 아래 있기에—


같은 해를 비추듯 같은 무의식이 흔들린다.


우리 깊은 곳엔 구원을 향한 갈망과


끝내 어둠을 택하려는 본능이


함께 숨 쉬고 있듯이.

1 week ago | [YT] | 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