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당신은 나의 우상입니다."







라고 입 밖에 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우리는—종교개혁자의 말마따나—
'우상을 쏟아내는 공장'이다.


인간은 반드시 보이는 것에 휘둘린다.
선악과 이후 밝아진 눈은
늘 눈앞의 것을 붙든다.


그러나 더 큰 빛을 보면—
전에 붙들던 것들이 우상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연약함은 남아
우리는 다시, 끊임없이 보이는 것에 흔들린다.


가장 먼저는 사람이다.
불안을 잠재울 리더를 원한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 정치 권위자가
어느새 우리의 '구원자'가 된다.


미국 남부의 바이블 벨트에서
트럼프가 메시아처럼 호명되는 장면—
교회 안에서조차 그를 찬양하는 입술들.


그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어차피 우리는 우상공장이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연약함마저
선으로 합하여 주신다.


그렇다고 "그렇지 뭐—"에 멈춰야 하는가.


정치는 차선의 예술이라 해도,
'차악'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과연 지혜인가.


아마 내가 찍는 곳과
기독교 정치를 우상화하는 이들이 찍는 곳은
거의 같을 것이다.
말이 오가도 결과는 비슷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가만히 있어도 되는가.
복음이든 정치든, 어차피 결말이 비슷하니.


아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세속의 논리다.


우상화와 '복음적' 정치의 결말이 닮아도,
하나님은 과정과 의도를 보신다.
우리 마음의 방향을 보신다.


입술로 "예수님과 복음"을 말하면서도
내가 기대하는 것이
주님을 닮은 인격과 작은 예루살렘 같은 공동체인가.


아니면 현실의 답답함을 풀어줄
또 다른 정치 이상 위에
믿음, 소망, 사랑의 언어를 덧씌운 것인가.


요즘의 뜨거움이
성령의 열심에서 왔는가,
아니면 이념에 취한 열광인가.


좋은 게 좋다 해도
가끔은 멈춰 짚어야 한다.


신앙의 언어를 쓰기에 오히려 경각심을 잃는
교묘한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더 깊이 신앙을 성찰해야 한다.


"복음으로 돌아가자"가 순진하게 들리고
"십자가를 지자"가 애매하게 들린다면—


우리가 인생을 좌우의 축으로만 재단하고 있는지
한 번은 되돌아봐야 한다.


끝없이 흘러내린 보혈은
두 갈래 큰길보다 더 좁은 길이다.


그러나 반드시 인내로 걸어야 할 길이기에
지루해 보이고 나이브해 보여도
담대히 끝까지 가야 한다.
(오히려 가장 급진적인 길이다)


나 역시 끔찍한 죄성을 타고났다.
답답함 속에서
누군가를 정죄하고 싶은 본심이 고개를 든다.


어쩌면 그래서 하나님은
다소 기울어진 우리의 정치 열심도 인내로 사용하시고
나의 답답함 속 거룩하지 못한 자기중심까지
비추어 드러내신다.


하나님이 좌와 우를 허락하시고
때로는 체제 전복의 음모조차 허용하시는 이유—


연약한 인간이 그럼에도
서로 사랑하라 하신 뜻이 아닐까.


나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고
앞으로 가야 할 길도 멀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가 우상 공장임을
가능하다면 매일 아침 기억하자.


정해진 틀 속에 사는 한계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는 은혜의 시간만은
놓치지 말자.


주시는 사랑의 분량만큼만이라도 사랑하길 원한다.


내게 그 힘이 없음 알기에, 더욱 간절히 구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이 가득하길


진심을 다해 기도한다.

2 days ago | [YT] | 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