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이제야 알겠다." 에반게리온은 찬사의 이름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감독이 직접 다시 만든 '신극장판'은— 찬사 대신 욕설이 쏟아졌다. 나는 좋았다. 심지어 세상에서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원작은 어둡다. 정말 끝까지 가라앉는 어둠이다. 반면 신극장판은 밝다. 어이가 없을 만큼 밝다. 너무 쉽게— 너무 단순하게 해피엔딩으로 닫힌다. 그것도 주인공 신지의 결단이나 희생이 아니라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개입— 갑작스러운 '손'이 세상을 구한다. 그러니 화가 난다. 세기의 달콤한 암흑을 값싼 손짓 하나로 봉합하다니. 웃으라고 만든 장면이 아니었지만 헛웃음조차 나지 않는다. 그런데—이제야 알겠다. 원작도, 신극장판도— 모두 [안노 히데아키]의 무의식을 비춘 거울이다. 극심한 우울 속에서 만든 첫 작품은 그 어둠을 그대로 품고 있다. 눈을 찌푸려야 겨우 보이는 한 줄기 희망— 그러나 희망이라 부르기도 괴로운 빛. 이후 그는 관계의 회복과 인격의 성숙을 지나 무의식은 더 맑고 단순한 결로 드러났다. 신극장판은 그 흔적이다. 인격이 성숙할수록 서사는 단순해진다. 철학의 끝이 신학을 더듬듯 고뇌의 끝은 절대적 영성을 스친다. 그래서 마지막에 '마키나미'가 '구원'의 손이 된다. 팬덤은 이를 비꼬아 "데우스 엑스—마키나미"라 부른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 안에서 진리를 본다. 진리는 단순하다. 뜬금없이 보이는 손이 우리를 구원한다. 사람들은 그 단순함을 싫어한다. 차라리 스스로 짐을 지고 어둠 속에 머물고 싶어 한다. 그래서 빛을 미워한다. 신극장판의 너무 단순해 보이는 그 빛을—증오한다. 성경은 이미 말한다. 사람은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다. 스스로 인생의 주인— 자기 자신이 구세주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니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내려온 빛의 손을 거부한다. 문학은 본능적으로 신보다 인간을, 빛보다 어둠을 높인다. 미해결과 고통 속에서만 진정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단순한 결말은 곧 졸작의 낙인이다. 그건 충분히 정당한 평가다. 그러나 놀랍다. 어둠을 끝까지 사랑하는 인간의 구조와 빛으로 돌연 닫히는 신적 개입의 구조가— 에반게리온의 두 버전 속에서 '성경' 그 자체처럼 맞붙는다니. 결국 깨닫는다. 종교의 바깥에서도 진리는 새어 나온다. 복음의 뿌리가 얕은 일본의 콘텐츠 속에서도 하늘과 땅이 한 분의 통치 아래 있기에— 같은 해를 비추듯 같은 무의식이 흔들린다. 우리 깊은 곳엔 구원을 향한 갈망과 끝내 어둠을 택하려는 본능이 함께 숨 쉬고 있듯이.
1 week ago | [YT] |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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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알겠다."
에반게리온은 찬사의 이름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감독이 직접 다시 만든 '신극장판'은—
찬사 대신 욕설이 쏟아졌다.
나는 좋았다.
심지어 세상에서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원작은 어둡다.
정말 끝까지 가라앉는 어둠이다.
반면 신극장판은 밝다.
어이가 없을 만큼 밝다.
너무 쉽게—
너무 단순하게 해피엔딩으로 닫힌다.
그것도 주인공 신지의 결단이나 희생이 아니라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개입—
갑작스러운 '손'이 세상을 구한다.
그러니 화가 난다.
세기의 달콤한 암흑을
값싼 손짓 하나로 봉합하다니.
웃으라고 만든 장면이 아니었지만
헛웃음조차 나지 않는다.
그런데—이제야 알겠다.
원작도, 신극장판도—
모두 [안노 히데아키]의 무의식을 비춘 거울이다.
극심한 우울 속에서 만든 첫 작품은
그 어둠을 그대로 품고 있다.
눈을 찌푸려야 겨우 보이는 한 줄기 희망—
그러나 희망이라 부르기도 괴로운 빛.
이후 그는 관계의 회복과 인격의 성숙을 지나
무의식은 더 맑고 단순한 결로 드러났다.
신극장판은 그 흔적이다.
인격이 성숙할수록 서사는 단순해진다.
철학의 끝이 신학을 더듬듯
고뇌의 끝은 절대적 영성을 스친다.
그래서 마지막에 '마키나미'가
'구원'의 손이 된다.
팬덤은 이를 비꼬아
"데우스 엑스—마키나미"라 부른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 안에서 진리를 본다.
진리는 단순하다.
뜬금없이 보이는 손이 우리를 구원한다.
사람들은 그 단순함을 싫어한다.
차라리 스스로 짐을 지고
어둠 속에 머물고 싶어 한다.
그래서 빛을 미워한다.
신극장판의 너무 단순해 보이는 그 빛을—증오한다.
성경은 이미 말한다.
사람은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다.
스스로 인생의 주인—
자기 자신이 구세주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니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내려온
빛의 손을 거부한다.
문학은 본능적으로 신보다 인간을,
빛보다 어둠을 높인다.
미해결과 고통 속에서만
진정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단순한 결말은 곧 졸작의 낙인이다.
그건 충분히 정당한 평가다.
그러나 놀랍다.
어둠을 끝까지 사랑하는 인간의 구조와
빛으로 돌연 닫히는 신적 개입의 구조가—
에반게리온의 두 버전 속에서
'성경' 그 자체처럼 맞붙는다니.
결국 깨닫는다.
종교의 바깥에서도 진리는 새어 나온다.
복음의 뿌리가 얕은 일본의 콘텐츠 속에서도
하늘과 땅이 한 분의 통치 아래 있기에—
같은 해를 비추듯 같은 무의식이 흔들린다.
우리 깊은 곳엔 구원을 향한 갈망과
끝내 어둠을 택하려는 본능이
함께 숨 쉬고 있듯이.
1 week ago | [YT] | 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