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골방이 더 두려운 사람들." 누구나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 어떤 사람에겐 그 공기가 더 잘 맞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전성기— 말 그대로 가장 '슈퍼스타'이실 때 오히려 그 인기를 뒤로하고 산으로 오르셨다. 골방에서 아버지와의 교제를 끊지 않기 위해서였다. 정말 깊은 영성가와 목회자들은 엄청난 사역과 존경, 인기 속에서도 반드시 홀로 하나님과 마주하는 시간을 구별한다. 하나님과 1대1로 '데이트'하는 그 시간.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과 친구처럼 이야기하며 율법을 받았다. 그러나 산 아래의 백성들은 그 시간을 견디지 못했다. 불평했고 눈앞의 현실에 마음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 현실은 더 독해졌다. 하늘을 바라보면 어디서든 전진하고 현실만 바라보면 결국 그 자리에 묶인다. 현실을 응시하는 것이 더 책임 있어 보이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그 모든 것을 초월하신다. 우리가 그 '비현실'—곧 하나님의 초월을 살아낼 때, 사람들이 조롱하고 취했다고 손가락질해도 그때가 오히려 훨씬 더 멀리 간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인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해— 시선을 곧장 휘몰아치는 파도에 둔다. 그 순간 거대한 두려움이 밀려오고 세상이 뒤집히는 듯하며 이 나라가 무너질까 전전긍긍한다. 그 불안을 하나님의 뜻과 억지로 엮어 노이로제에 가까워지면서도— 정작 골방에 들어가 그분과 진짜로 마주할 생각은 떠올리지도 못한다. 그리고 오직 이 땅을 위해 눈물로 기도한다. 주님이 계신 곳이 어디든 하늘나라인데도, 우리는 이 땅을 지키려는 '인간의 열심'을 위해 하나님께 열성을 다해 빌 때가 많다. 광야를 떠돌던 땅 없는 백성들을 한결같이 사랑하신 하나님을 잊고 정치 지도자와 운동가를 높인다. '국가주의'는 그럴듯해 보여 우상처럼 느껴지지 않지만 실은 가장 위험한 우상 중 하나다. 조상들이 이룬 위대한 제도와 이념을 유일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알게 모르게 동일시할 정도다. 물론, 정치 참여는 필요하다. 심지어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좋은 것일수록 오히려 더 쉽게 우상이 된다. 우상은 대개 나쁜 것보다 '좋은 것'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최상으로 좋은 것'— 오직 그분께만 붙들려야 한다. 그 외에는 아무리 좋아도 순서가 바뀌면 위험하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으로 포장된 열심 아래서조차 투쟁과 싸움의 골짜기에 다시 빠진다. 세상과 완벽하게 같은 방식으로— 아니, 때로는 더 괴물처럼. 그래서 스스로의 멱살을 붙들고 골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곧 자기 부인이며, 주님께로 돌아가 맡기는 일이다. 가능하면 일주일에 하루— 아무리 못해도 반나절.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는 시간. 말도 안 되지 않은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나를 만나 주신다는 사실이. 그러니 지금 당장 전쟁이 일어나 모든 걸 빼앗길 것 같아도— 혹은 세상의 인기가 갑자기 폭발해도 이 시간을 포기할 수는 없다. 레벨이 완전히 다르니까. 인간의 환호성 vs 신과의 대담— 이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관계는 절대로 우연히 좋아지지 않는다. 시간을 정하고, 만나고, 약속해야 한다. 그러니 잠시만이라도 문을 닫고 불을 낮추자. 기도 방석과 작은 촛대 하나면 충분하다. 남은 것은— 그분이 곧 오신다는 사실. 그분은 결코 늦지 않으신다. 아니, 언제나 먼저— 기다리고 계셨다.
6 days ago | [YT] |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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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이 더 두려운 사람들."
누구나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
어떤 사람에겐 그 공기가 더 잘 맞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전성기—
말 그대로 가장 '슈퍼스타'이실 때
오히려 그 인기를 뒤로하고 산으로 오르셨다.
골방에서
아버지와의 교제를 끊지 않기 위해서였다.
정말 깊은 영성가와 목회자들은
엄청난 사역과 존경, 인기 속에서도
반드시 홀로 하나님과 마주하는 시간을 구별한다.
하나님과 1대1로 '데이트'하는 그 시간.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과 친구처럼 이야기하며 율법을 받았다.
그러나 산 아래의 백성들은
그 시간을 견디지 못했다.
불평했고
눈앞의 현실에 마음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 현실은
더 독해졌다.
하늘을 바라보면 어디서든 전진하고
현실만 바라보면 결국 그 자리에 묶인다.
현실을 응시하는 것이 더 책임 있어 보이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그 모든 것을 초월하신다.
우리가 그 '비현실'—곧 하나님의 초월을 살아낼 때,
사람들이 조롱하고 취했다고 손가락질해도
그때가 오히려 훨씬 더 멀리 간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인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해—
시선을 곧장 휘몰아치는 파도에 둔다.
그 순간 거대한 두려움이 밀려오고
세상이 뒤집히는 듯하며
이 나라가 무너질까 전전긍긍한다.
그 불안을 하나님의 뜻과 억지로 엮어
노이로제에 가까워지면서도—
정작 골방에 들어가
그분과 진짜로 마주할 생각은 떠올리지도 못한다.
그리고 오직 이 땅을 위해
눈물로 기도한다.
주님이 계신 곳이 어디든 하늘나라인데도,
우리는 이 땅을 지키려는 '인간의 열심'을 위해
하나님께 열성을 다해 빌 때가 많다.
광야를 떠돌던 땅 없는 백성들을
한결같이 사랑하신 하나님을 잊고
정치 지도자와 운동가를 높인다.
'국가주의'는 그럴듯해 보여
우상처럼 느껴지지 않지만
실은 가장 위험한 우상 중 하나다.
조상들이 이룬 위대한 제도와 이념을
유일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알게 모르게 동일시할 정도다.
물론, 정치 참여는 필요하다.
심지어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좋은 것일수록
오히려 더 쉽게 우상이 된다.
우상은 대개 나쁜 것보다
'좋은 것'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최상으로 좋은 것'—
오직 그분께만 붙들려야 한다.
그 외에는 아무리 좋아도
순서가 바뀌면 위험하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으로 포장된 열심 아래서조차
투쟁과 싸움의 골짜기에 다시 빠진다.
세상과 완벽하게 같은 방식으로—
아니, 때로는 더 괴물처럼.
그래서 스스로의 멱살을 붙들고
골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곧 자기 부인이며,
주님께로 돌아가 맡기는 일이다.
가능하면 일주일에 하루—
아무리 못해도 반나절.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는 시간.
말도 안 되지 않은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나를 만나 주신다는 사실이.
그러니 지금 당장 전쟁이 일어나
모든 걸 빼앗길 것 같아도—
혹은 세상의 인기가 갑자기 폭발해도
이 시간을 포기할 수는 없다.
레벨이 완전히 다르니까.
인간의 환호성 vs 신과의 대담—
이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관계는 절대로 우연히 좋아지지 않는다.
시간을 정하고, 만나고, 약속해야 한다.
그러니 잠시만이라도
문을 닫고 불을 낮추자.
기도 방석과 작은 촛대 하나면 충분하다.
남은 것은—
그분이 곧 오신다는 사실.
그분은 결코 늦지 않으신다.
아니, 언제나 먼저—
기다리고 계셨다.
6 days ago | [YT] | 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