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대로 말씀과 기도의 집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2023년 1월 파주 문산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복음 통일과 이스라엘 회복을 두기둥으로 삼고 주님께서 주신 12개의 말씀으로 세워졌습니다.

시온의 대로 말씀과 기도의 집은 매일 3번의 예배로 번제와 화목제를 올려드립니다.

주님을 향한 갈망과 주님의 영광의 임재를 사모하며 거룩한 기름부음으로 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교회입니다.

"시온의 대로", "경배의 대로", "왕의 대로" 그 거룩한 대로(메씰라)로 여호와의 산으로 오르기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그 높은 곳에 올라(메씰라) 주와 대면하여 만나는 영광을 사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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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 301-0343-4871-11 시온의대로 말씀과 기도의집
010 4624 2901 박의준 목사


시온의 대로 말씀과 기도의 집

테슈바 40일 경외 <40> 대속죄일
존 비비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누가복음 24장 32절)
(35) 종에서 친구로
아브라함과 모세의 삶은 하나님과 우정의 관계를 맺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보여 준다. 하나님은 모세에 대해 이렇게까지 말씀하셨다. “그는 내 온 집에서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다.”(민12:7) 하나님은 그 세대에 그분의 온 백성 중에서 모세보다 더 신뢰하는 사람은 없다고 선포하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선포인가.

예수님은 이 기준을 바꾸셨을까? 예수님은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우정의 문을 활짝 여셨을까? 일단, 답은 “아니다”이다. 요한이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관해 쓴 글을 보면서 이 문제를 살펴보자.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요한복음 2장 23~24절)

여기서 “의탁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완전히 믿고 의지할만큼 신뢰하는 것. 확신을 갖는 것”으로 정의된다. 흥미롭게도 하나님은 사람들의 신뢰에 같은 신뢰로 반응하시지 않았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정도로 신뢰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신뢰하시지 않았다. 그것은 대다수 인간들이 믿을 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셨다. 하지만 그들을 친구로까지 여기시지는 않았다. 예수님(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은 그분을 단순히 믿기만 하는 자들에 대해 하나님이 모세를 신뢰하시듯 신뢰하지 않으셨다.

시간을 빨리 돌려 최후의 만찬 현장으로 가 보자. 예수님이 사역하신 지난 3년간, 그분을 믿었던 사람들 대부분은 믿을 만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남몰래, 혹은 멀찍이 떨어져서 혹은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만 예수님을 따랐다. 많은 제자들이 그분을 떠났고, 가룟 유다는 그분을 배신했다. 이제 예수님이 왜 그들을 신뢰하시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는가?

식사 자리에서 이제 예수님은 가장 가까운 이들과 함께 앉아 계신다. 그분은 감사와 애정을 담아 말씀하신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눅22:28) 요컨대 그들은 믿을 만한 모습을 보여 왔다. 베드로는 그날 밤 큰 실수를 저지르긴 하지만 결국 회개하고 더 충성스러운 마음을 품고 돌아오게 된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다.

가룟 유다는 배신을 저지르려고 이미 자리를 뜬 상태다. 예수님은 남은 열한 제자에게 말씀하신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요15:15) “이제부터는” 이라는 말씀은 이 제자들이 전에는 종이었다는 뜻이다. 바울은 이 원칙을 이렇게 풀이한다.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갈라디아서 4장 1절)

궁금하지 않은가? 왜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인 우리를 종의 위치에 머물게 하시는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운명을 맞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1980년대에 아내와 나는 두 군데 사역 단체에서 일했다. 한 단체는 직원이 450명이었고, 다른 단체는 150명이었다. 그런데 두 단체 모두에서 리더십의 문제를 본 우리는 직접 사역 단체를 시작하면서 그런 리더십은 발휘하지 말자는 생각이 지나쳐 그만 반대편 극단으로 흐르고 말았다. 개중에는 좋은 아이디어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디어도 있었다. 당시 우리가 추구한 패러다임 중 하나는 “모든 직원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된다.”였다. 딱 봐도 어리석음이 보이지 않는가?

우리의 첫 직원은 한 젊은이였다. 여기서는 저스틴이라고 부르자. 나는 그를 둘도 없는 친구처럼 대했다. 우리는 함께 농구를 하고 영화를 보고 자주 식사를 했다. 우리는 절친한 친구들이 하는 모든 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1년쯤 뒤 그에게 사소한 지적을 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는 내 책상 건너편에 앉아 있었고, 나는 부드러운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저스틴 나와 함께 다닐 때 우리가 제공하는 자료를 구하러 오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해야 해요. 웃으면서 이야기하도록 해요. 그들은 하나님께 귀한 존재들이니까요.”

그 다음 상황은 실로 충격이었다. 저스틴은 내게 삿대질을 해 가며 내가 온갖 그릇된 행동을 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내가 옳지 않게 행동한 것들을 일일이 나열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내가 그런 행동을 했었나?’ 하지만 곧 그가 지닌 비판적인 시각 탓에 나를 왜곡해서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잠시 멈춰서 성령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다. 곧 성령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를 내보내라.”

내가 “저스틴 이 일을 그만 두도록 해요.” 라고 말하자. 그는 길길이 날뛰었다. 그는 씩씩거리며 우리 집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를 아끼고 사랑했기에 가슴이 찢어졌다. 갑자기 성령이 내게 속삭이셨다. “그는 두 배로 충성스러워져서 돌아올 것이다.”

세 달 뒤 저스틴에게서 전화 한통이 걸려 왔다. “하나님이 분명한 음성을 통해 저를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용서를 구하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두 분의 삶에서 어느 위치에 두셨는지를 망각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두 분을 제 삶에서 어느 위치에 두셨는지를 잊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리더가 아닌 동료로 대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

나는 즉시 “용서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계속해서 화해의 말이 오간 뒤에 나는 그에게 다시 와서 일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기꺼이 수락했고, 그 뒤로는 더 이상 똑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제 나는 전과 다른 마음가짐으로 사역을 한다. 다른 직원들이 저스틴이 놓친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들에게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비밀을 함부로 털어놓지 않는다. 직원들에게 거리를 두고 그들을 비인격적으로 대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들이 저스틴처럼 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나면 친구처럼 가까이 대한다. 실제로 우리 직원 중 몇몇은 내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삶 속에서 내가 누구이고 나와의 관계에서 네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나를 두려워하기 전까지는 네가 아무리 상속자요 내 나라의 아들딸이라 해도 종의 위치에 머물게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네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운명을 맞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한복음 15장 15절)

예수님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지금까지는 너희에게 극비 정보, 그러니까 내 비밀스러운 계획이나 내 마음의 내밀한 부분을 알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모세와 아브라함을 신뢰했던 것처럼 너희를 신뢰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다.

너희는 ~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한복음 15장 14절)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시라는 내용의 찬양을 부르고 설교를 하고 일상에서도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절친한 친구인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앞 구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완성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면” 이란 단어는 조건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동적으로 예수님의 친구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바로 그분의 친구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과의 우정의 조건은 무엇인가?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은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에 떠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거나 유익이 눈에 보이지 않거나 고통스러워도 그분의 명령에 즉각적이고도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모세는 하나님을 경외해 그분과의 우정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최우선으로 여기면 그분은 우리를 신뢰하고 우정이라는 관계 속으로 받아 주신다. 우주의 창조주의 친구가 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명예요 특권이며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이번 장을 마치기 전에 당신의 머릿속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질문을 다루어 보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을 주시는가?” 그렇다. 신약에만도 500개 이상의 명령이 기록되어 있다. 단, 이것들은 구원에 필요한 명령은 아니다. 구원은 값없이 받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명령들이며, 거룩한 두려움을 품을 때 이 명령들을 지킬 수 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주신 마지막 말씀은 이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28:19~20)

거룩한 두려움이 지닌 가장 큰 유익은 예수님과의 우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핵심 말씀 :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15:14)

5 days ago | [YT] | 7

시온의 대로 말씀과 기도의 집

테슈바 40일 경외 <39>
존 비비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압도적인 경외감에 사로잡힐 때 비로소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할 수 있다. (알리스테어 벡)
(34) 하나님께 신뢰를 받다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친구”로 불린 구약의 다른 인물을 살펴보자.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출애굽기 33장 11절)

성경에서 하나님과 모세의 우정에 대해 “대면하여”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거의 이해하기 힘들 정도다. 생각해 보라. 이분은 길거리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심지어 유명한 인물도 아니다. 이분은 무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이제 이 표현이 얼마나 엄청난지 이해가 가는가? 친밀함을 묘사하는 이 표현은 성경에서 한 번만 사용되고 있지는 않다. 이 표현은 하나님이 모세를 비판하는 아론과 미리암에게 분노하셨을 때 두 번째로 사용된다. 하나님은 지엄한 음성으로 이렇게 선언하셨다.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내가 신뢰하는 사람이다.)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민수기 12장 7~8절)

하나님께 “내가 너를 신뢰한다.” 라는 말을 듣는 것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 중 하나다. 여기서 하나님과의 우정에 관한 또 다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우정은 신뢰라는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신뢰를 어떻게 쌓을 수 있을까?

○무조건적인 순종: 항상 시키는 대로 하는 것
○절대적인 언행일치: 항상 말한 대로 지키는 것
○흔들리지 않는 우선 순위: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시 하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 결정을 내릴 때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

이 네 가지 모든 측면에서 일관성을 갖추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 어느 한 영역이 무너지면 재빨리 진심으로 회개해야 한다. 그러면 신뢰 회복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 거룩한 두려움은 이 네 가지 영역 모두에서 신뢰성을 갖추게 만든다. 이번 장에서는 세 번째와 네 번째 영역, 즉 항상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선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모세의 삶을 생각해 보라. 처음 40년간은 막대한 부와 각종 산해진미, 화려한 옷과 최고의 물질로 가득한 삶이었다. 으리으리한 집에서 살았던 그는 뭐든 원하는 대로 즐길 수 있었다. 온 천지에 그의 할아버지인 바로보다 더 부유하거나 강력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애굽의 보화를 갖는 것 대신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통을 선택했다. 그가 그분의 큰 보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장 25~26절)

모세는 그 모든 안락에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그는 왕궁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애굽에서 얻을 수 없는 “그분의 큰 보상”을 “선택”했다. 그 상은 약속의 땅 가나안이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그가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가장 열렬히 추구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그가 왕궁을 나간 뒤의 삶을 살펴보자. 그가 왕궁의 모든 부귀영화를 떠나기로 한 선택이 현명해 보이는가? 삶의 환경이 애굽 왕자 시절보다 좋아졌는가? 그가 사람들을 다스리는 일을 버리고 한 일은 광야에서 기껏 양이나 치는 것이었다. 그것도 무려 40년 동안이나! 정말 긴 시간이다. 그다음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바로에게서 해방 시키는, 매우 골치 아프고도 지지부진한 시간을 지나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황량한 광야에서 장막(텐트)를 치며 살았다. 그가 이끄는 사람들은 툭하면 그의 리더십에 불만을 떠뜨리고 말썽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스트레스와 피곤을 크게 덜어 줄 제안을 하신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사람들을 모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라고 지시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인도하여 모든 적국을 몰아낼 천사를 엄선해 배정하신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곳이 매우 풍요롭고 비옥한 땅이라는 점을 상기시키신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이렇게 선언하신다.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출33:3)

잠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같이 마주한 현실을 떠올려 보자. 광야는 다채로울 게 전혀 없다. 아름다운 골짜기나 강, 숲, 비옥한 땅, 정원, 수목원, 초장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따뜻한 목욕을 하고 푹신한 침대에서 자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느긋하게 쇼핑을 한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났다. 지긋지긋한 메뉴에 신선한 과일이나 채소, 생선, 소고기, 디저트는 구경한 지 오래였다. 매일 아침 땅 위에 놓여 있는 만나가 끼니의 전부였다. 땅콩버터나 잼을 바르거나 소시지를 끼워 넣은 빵이 아니었다.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을 끔찍했지만 메마른 사막에서 방황하는 생활은 그보다 나을 게 없었다. 어떤 식으로 힘드냐만 달라졌지 극도로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광야에서는 소망이 있었다. 풍요롭고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을 얻으리라는 소망, 그들은 그 땅을 위해 수 세대를 기다렸다!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을 듣는 순간이 그려지는가? 나 같으면 당장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가 온 백성에게 이 놀라운 소식을 전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기뻐하며 그를 다시 위대한 리더로 치켜세웠을 것이다. 모든 백성이 그토록 기대했던 약속의 땅으로 힘차게 한 걸음을 내딛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제안에 대한 모세의 반응을 들어 보라.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출애굽기 33장 15절)

“이곳”은 어디인가? 바로 역경과 스트레스와 고난이 점철된 광야다. 모세는 깨닫지 못한 자들에게는 당혹스럽고 심지어 황당무계하게 들리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는 사실상 이렇게 선언했다. “하나님의 ‘임재’와 ‘복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조건 하나님의 임재를 선택하겠습니다!” 왜일까? 누군가와 함께 있지 않고도 그에 관해서 알 수 있지만 그와 친밀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모세가 간절히 원했던 보상이다.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모세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기를 거부하는데 하나님은 왜 기뻐하시는가?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다. 이렇게 생각해 보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혼자서만 즐길 수 있는 뭔가를 제시한다고 해 보자. 사심 없이 제시했는데 그가 뜻밖에도 이렇게 말한다. “됐어요 저는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아요. 당신이 없으면 세상 부귀영화가 다 무슨 소용인가요?” 이런 반응이 물론 드물긴 하지만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 반응인가?

모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하나님께 중요한 것이 항상 최우선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기에 그분의 신뢰를 얻었다. 하지만 그가 이끈 사람들은 다른 마음을 품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하나님)는 모세에게 그의 속성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의 행사를 보이셨다. (시편 103편 7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러신 것처럼 모세에게도 그분의 “속성”을 밝히셨다. GNT 역본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분의 “계획”을 밝히셨다고 번역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그분의 비밀을 모세에게 밝히셨다. 단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밝히지 않으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기도응답 곧 그분의 “행사”를 통해서만 그분을 알았다.

오늘날 기도 응답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아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친밀한 관계보다는 거래 관계에 더 가깝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알지만 그분의 마음은 모른다. 그들에게 성경은 주로 규칙과 역사 이야기처럼 보일 뿐이다. 혹은 교훈을 얻기 위한 자료로만 사용될 뿐이다.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는 인생 변화의 진리들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들의 불법적인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하기까지 한다.

아브라함과 롯과 다를 바 없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의로웠다.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만이 그분의 마음(그분의 속성, 비밀, 계획)을 알 수 있다. 왜 하나님은 모세는 신뢰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신뢰하지 않으셨을까? 하나님은 모세가 언제나 모세 자신에게 좋아 보이는 것보다 그분의 마음을 선택할 줄 아셨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거룩한 두려움을 지니고 사는 삶이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자 하나님은 진노 가운데 이렇게 선언하셨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애굽기 32장 10절)

이번에도 구미가 당길 만한 제안이 등장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큰 나라를 이루겠다고 말씀하신다. 이 얼마나 멋진 제안인가. 하지만 모세의 반응은 또 어떠했는가? 이번에도 그는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좋은 쪽을 선택했다. 그는 애굽을 비롯한 지켜보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평판을 생각해서 이 제안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뢰를 저버린 분으로 부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뜻을 돌이키”시라며 대담하게 간구했다. (12절) 그에게는 진노한 하나님께 마음을 바꾸시라고 요청드릴 만한 베짱이 있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그분의 마음과 뜻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라면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이 모세를 신뢰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해 주시면서도 신뢰하지는 않으신 이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강한 마수에서 기적적으로 건져 주셨지만 그들에게 마음을 터놓지는 않으셨다. 우정에 대한 이런 조건이 신약 시대를 사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그대로 적용될까? 다음 장에서는 이 문제를 살펴보자.

핵심 말씀 :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맡기고 넘겨주셨으니)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11:27)

6 days ago | [YT] | 6

시온의 대로 말씀과 기도의 집

테슈바 40일 경외 <38>
존 비비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영혼을 깨우치고 악을 없애고 정욕을 약화시키고, 영혼에서 어두움을 몰아내 깨끗하게 만든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지혜의 최고봉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는 그 어떤 좋은 것도 찾을 수 없다. 누구든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면 끔찍한 타락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시리아인 에프렘)
(33) 하나님 일에 쓰임 받다.

앞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우정이 쌓이는 과정을 살펴 보았다. 그 과정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를 알 수 있다. 그 방법을 다루기 전에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조금 더 살펴 보겠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야고보서 2장 21~23절)

사도 야고보는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우정을 이야기하는데 야고보와 하나님의 사자가 한 말이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 이 관계를 형성시킨 것은 아브라함이 지닌 거룩한 두려움이었고, 그 두려움은 즉각적이고도 온전한 순종(행동)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하나님의 명령이 이해되지 않고 분명한 유익이 보이지 않고 고통스러웠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떨었다. 거룩한 두려움은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간절히 원하고 실제로 그 일을 행하게 한다. 거룩한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가는 문을 열어 준다.

어느 날 하나님은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숲 근처에서 아브라함을 방문했을 때 동행한 두 천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하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18:17)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쪽으로 몸을 돌려 그분의 계획에 관해 의논하셨고, 두 천사는 계속해서 소돔과 고모라성으로 갔다. 이제부터 그다음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쓰려고 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의 요점은 이렇다. “아브라함아 죄가 너무도 극악해서 이 두 성을 멸망시킬 계획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창조주께 이런 말씀을 듣는다면 어떨 것 같은가? 아브라함은 충격에 빠져 대답한다. “소돔이요?” 하나님은 대답하신다. “그렇다. 고모라도 멸망시킬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 네 생각은 어떠하냐?” 아브라함은 겁에 질린 채 속으로 생각한다. ‘아브라함 생각을 해 보자. 그래 조카 롯이 거기 있지. 조카를 비롯한 무고한 사람들을 위해 내가 나서야 겠어.’ 아브라함은 묘안을 떠올린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세기 18장 23~25절)

언약의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흐뭇함이 그려지지 않는가? 하나님은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좋은 지적이다! 좋다. 그곳에 의인 50명만 있으면 두 성을 멸하지 않으마. 내 친구 아브라함과 이야기를 나누니 정말 좋구나.”

하지만 아브라함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만약 그곳에 의인이 50명도 없다면? 그래서 그는 같은 논리를 내세워 숫자를 45명으로 줄인다.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좋다. 그곳에 의인 45명만 있으면 그 성들을 멸하지 않으마. 내 친구 아브라함과 이렇게 의논을 하니까 정말 좋구나.”

아브라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숫자를 줄여 나간다. 45명에서 40명으로, 40명에서 30명으로 30명에서 20명으로 마침내 10명으로 이제 그는 속으로 생각한다. ‘설마 10명은 되겠지. 내 조카를 배면 나머지 9명만 있으면 돼.’

오직 친구만이 심판의 권세를 지닌 왕에게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다. 종이나 신하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심히 무례한 행동이다. 하나님은 이 모든 요청을 들어주셨다. 이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창18:33)

명심하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분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그분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한다는 뜻이다. 한번은 내가 나를 가혹하게 대한 사람에게 사랑으로 치유의 말을 했더니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들아 내가 아끼는 것(사람들)을 네가 아끼면 내 계획을 너와 의논할 것이다.” 거룩한 두려움은 하나님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더 진정으로 더 깊이 사랑하게 한다.

성경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라고 말한다. (눅17:28) 이 도시들은 지구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일보 직전인데도 그곳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흥청망청 쾌락을 즐기며 불경을 일삼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이게 아니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성경에서 “의로운” 사람이라 불린 롯도 여느 불경한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게, 곧 닥칠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벧후 2:7) 결국 두 천사가 가서 그와 그의 가족들을 피신시켜야 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아브라함이 기도한 덕분이었다. (창19:1~29)

이 상황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 보자. 두 명의 의로운 사람이 있다. 둘 다 구원받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다. 한 의인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실지 사전에 알고서 하나님이 그 일을 어떻게 하실지 결정하는 데 자신의 의견을 반영시킨다. 다른 의인은 다가올 심판에 대해 악인들처럼 전혀 알지 못한다.

왜일까? 첫 번째 의인은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벗(친구)”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비밀을 안다. 두 번째 의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친구가 아니고 그래서 하나님의 비밀을 모른다.

롯은 의인으로 불렸지만 세속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 나아가 현대 서구 교회 교인들처럼 속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는 신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이 ‘의로운’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나와 미국 대통령의 관계와 별다르지 않다. 나는 대통령의 결정과 리더십의 혜택을 보긴 하지만 대통령의 극비 정보, 계획, 개인 감정, 결정을 사전에 알지는 못한다.

롯의 인격은 그가 고른 동네와 아내, 근친상간을 통해 낳은 자식들(모압과 암몬 족속)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롯은 늘 자신에게 가장 좋아 보이는 것을 선택했다. 아브라함은 롯과 갈라설 때가 되자 그에게 먼저 살 곳을 정하게 해 주었다. 자신은 그가 정한 곳과 반대 방향으로 가기로 약속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창13:10)

이 때 롯은 그 평야 도시들이 얼마나 악한지를 알았다. 그래서 필시 그는 그 땅을 바라보면서 세상의 혜택들을 누리면서도 세상에 휩쓸리지 않을 방안을 고민했을 것이다. 고민 끝에 그는 악의 소굴에서 적당히 떨어진 평야에 장막을 치기로 했다. (창13:12) 하지만 이런 타협안은 통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와 식구들은 결국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결국 세상에 휩쓸렸다.

거룩한 두려움이 없으면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도 최대한 세상에 가까이 다가갈 방법을 찾게 되어 있다. 하지만 세상에 휩쓸리는 것은 시간 문제다. 우리가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잃은 자들을 구하기 위해 세상 가운데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롯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반면교사 역할을 한다. 아브라함의 중보가 아니었다면 심판은 야밤을 틈탄 도둑처럼 롯에게 갑자기 임했을 것이다. 그의 세속적인 삶에는 끔찍한 대가가 따랐다. 앞서 말했듯이 롯의 후손들은 몹시 불경했다. 그의 아내는 소돔에 푹 빠져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들의 명령을 거역했다가 심판을 맞았다.

그녀는 즉시 소금 기둥으로 변했다. 예수님은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롯의 처를 기억하라.” 라고 경고하신다. (눈17:32) 자 이런 수준의 우정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위한 것일까? 이 질문을 다루기 전에 먼저 구약에 소개된 하나님의 또 다른 친구를 살펴보자.

핵심 말씀 :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약4:8)

1 week ago | [YT] | 7

시온의 대로 말씀과 기도의 집

테슈바 40일 경외 <37>
존 비비어
우리 자신의 생각에서 나오는 것은 우리를 깨우치거나 놀라게 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언제나 경이와 경외의 요소가 나타난다. (조이 도우슨)
(32) 하나님이 비밀을 털어 놓으신다

지난 두 장은 힘든 주제,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주제를 다루었다. 예수님께 “어서 하나님의 기쁨 속으로 들어 오렴” 하는 말을 들을 줄 기대했겠지만 “내게서 떠나가라”라는 말을 들을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가슴이 철렁했으리라. 하나님과 전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기만도 없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갑자기 깨닫고 충격에 빠질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과 연합한’ 것이 아니라 내내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었다는 현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찾아오는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는 대신, 이기적인 목적으로 그분의 말씀을 이용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미지근한 상태나 자기기만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깊은 사랑 안에서 이 끔찍한 상황을 경고하고 계신다.

이제 가짜 친밀함에 관해 충분히 이해했으니 창조주와의 진정한 친밀함이라는 아름다운 경험에 관한 논의를 즐겁게 시작해 보자. 이번 장에서 한 가지 시나리오를 살펴보기 시작할 텐데, 다음 몇 장에 걸쳐서 이 시나리오를 철저히 탐구해보자.

먼저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내게서 떠나가라”라는 끔찍한 말을 듣지 않을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면서도 하나님과 친밀해질 기회를 놓칠 수 있을까? 일단 답은 “그렇다”이다. 성경을 보며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히 탐구해 보자. 먼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부터 보자.

여호와의 친밀하심(비밀)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시편 25편 14절)

여기서 “친밀하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소드”로 “의논 혹은 계획”이라고 정의된다. 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 이 단어의 핵심은 내밀함이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획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냥 “비밀”이라고 해도 상관 없다. 이 구절은 이렇게 풀이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그분의 비밀을 알려 주신다.”

우리는 보통 누구에게 비밀을 털어놓는가? 지인인가? 아니면 절친한 친구인가? 답은 물론 절친한 친구일 것이다. 하나님도 다르시지 않다. 하나님은 친밀하고 가까운 친구들에게 그분의 비밀을 알려 주시며 그분과 가까운 친구란 거룩한 두려움을 품은 사람이다. ESV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한다. “하나님의 우정은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친구가 아니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친구가 아니시다. 구약에서부터 이 개념에 관해 살펴보자. 구약에 하나님의 친구(벗)로 소개된 두 사람이 있다. 바로 아브라함과 모세다. 또 다른 사람들은 없는가? 물론 있다. 노아, 다니엘, 에스더, 야곱, 다윗, 욥, 에녹, 이사야 등 하나님과 친밀히 동행했던 인물이 많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삶은 하나님과의 우정에서 이어지는 길을 누구보다도 잘 보여 주고 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 보자. 왜 그는 하나님의 친구로 불리는가? 그가 75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가장 간절한 소원인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그 약속은 즉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아내 사라가 기적적으로 이삭을 낳기까지 그는 2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토록 오래 기다린 끝에 아들을 품에 안았을 때의 깊은 감사와 기쁨이 머릿속에 그려지는가?

필시 해를 거듭할수록 부자 관계는 점점 더 끈끈해졌을 것이다. 막대한 부를 지닌 기쁨은 아들이 있는 기쁨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보다 소중한 것은 없었다. 그에게 아들은 목숨보다도 소중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무런 사전 경고도 없이 하나님은 기도하던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뭐라고? 단순히 하나님이 시키셨다고 해도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죽인다고? 게다가 아무런 이유도 듣지 않고서? 진심인가? 아브라함의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가는가?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그토록 어려운 요구를 하실 줄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생명보다도 더한 것을 요구하셨다. 바로 아브라함의 마음, 이건 도무지 말이 안되는 요구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 하나를 짚고 넘어가자. ‘우리’는 지금 이것이 시험이었음을 안다. 성경은 이 사건을 기술하는 시작점에서 이미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라고 진상을 밝힌다. (1절) 하지만 이것이 이미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읽는 독자들에게 불리한 점이다.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이야기를 여러번 듣거나 읽어서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것이 시험임을 몰랐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린다. 우리는 시험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험에서는 부정행위로 통과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내 주신 시험에서는 아무도 그럴 수 없다. 마음의 정화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숙제를 평소에 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시험에 통과하기는 어렵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광야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나님의 시험인 줄 알았다면 그들은 아마도 다르게 반응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후손들과 달랐다. 그에게는 그들에게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거룩한 두려움이었다.

어렵기만 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실로 아름답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는 곧장 행동에 돌입했다! 그는 며칠이나 몇 주간씩 고민하지 않았다. 친구들을 찾아가 의견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그와 이삭과 두 종은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챙겨서 길을 나섰다.

전날 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난 직후에는 그나마 순종하기가 쉬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틀하고 반나절 뒤에는 어떠했을까? 그 동안 하늘에서 한마디로 듣지 못한 뒤에는? 막상 가장 소중한 보물을 희생시킬 산 앞에 이르러서는?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그냥 하나님이 죽이라고 하시니까 죽여야 하는 상황.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산발치로 올라갔고, 종들에게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삭만을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가 제단을 쌓았다. 그러는 내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과 솟구치는 눈물을 억지로 감추었다. 제사에 필요한 준비를 하려면 온몸에 남아 있는 의지력과 정신력을 남김없이 짜내야 했다. 마침내 시간이 다가왔다.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실 일말의 희망조차 완전히 사라진 것만 같았다. 아브라함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 이삭을 묶고 칼을 들어 아들의 심장을 찌를 준비를 했다. 아무 이유도 듣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니 실행하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하나님의 사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 어떻게 알았을까? 아브라함이 이해가 되지 않고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손해가 되는 상황에서도 즉시 그리고 온전하게 순종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그제야 칼을 내려 놓고 이삭을 풀었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수풀에 걸린 숫양 한 마리가 보였다. 그의 입에서 “여호와 이레”라는 말이 나왔다. 이는 “하나님이 공급하실 것이다.”라는 뜻이다. (창22:14)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 순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분의 속성을 보여 주셨다. 이것은 전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은 왜 그러셨을까?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보겠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모든 독자는 나를 저자 존 비비어로 알고 있다. 개중에 콘퍼런스나 교회에서 내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은 나를 강사 존 비비어로 알 것이다. 하지만 나를 남편 존 비비어이자 애들 아빠 존 비비어, 할아버지 존 비비어, 가장 친한 친구 존 비비어, 사랑하는 사람 존 비비어로 아는 여성이 있다. 내 정체성의 이 모든 면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오직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만 이런 면을 안다. 특히, 마지막 측면은 오직 내 아내만 아는 것이다. 그날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더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다음 장에서 이 두 친구 사이의 놀라운 역학을 탐구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그런 관계를 누릴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보자.

핵심 말씀 : 여호와의 친밀하심(비밀)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시25:14)

1 week ago | [YT] | 6

시온의 대로 말씀과 기도의 집

테슈바 40일 경외 <35>
존 비비어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이사야 65장 2절)
(31) 순종 없이는 그분을 알 수 없다.

계속해서 정반대의 것을 살펴보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소중히 여기게 될 것이다. 지난 장에 이어서 이번 장의 주제도 삼키기 힘든 알약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주제에 관한 성경의 경고들은 사실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사랑과 보호의 선물들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거룩한 두려움을 불어넣으며 이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생명의 원천께 딱 붙어 있게 해 준다.

성경은 마지막 날에 예수님의 진정한 주 되심이 빠진 가짜 구원을 제시하는 복음이 널리 선포되고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것은 거룩한 두려움의 정반대이며, 많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받아들였던 것과 비슷한 ‘가짜 예수’를 만들어 낸다.

바울은 이 헬라인 ‘신자들’이 ‘다른 예수’를 따르는 것을 지적한 뒤에 가짜 구원자를 만들어 낸 그들의 마음 상태를 다룬다. “여러분 가운데 많은 사람이 여러분의 오랜 죄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적인 육적 쾌락에 대한 열망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고후12:21) 그들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되 그의 말씀에 반하는 삶을 살았다.

이런 일이 초대 교회에서는 드물었지만 현대 교회에는 만연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실제 삶의 주인으로 삼지 않고 그저 “주”라는 호칭만 사용했다. 예수님은 이렇게 예언하신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장 21절)

예수님은 마호메트나 조셉 스미스, 부처, 크리슈나, 공자, 혹은 우리 시대의 거짓 선지자를 숭배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분만을 “주”로 선포하는 사람들을 인정하신다. 이 구절에서 “주여”가 연속으로 두 번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라 성경에서 어떤 단어나 어구가 두 번 반복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성경 기자는 강조의 의미로 그런 방식을 사용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 반복은 강조만이 아니라 감정의 강렬함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아들이 요압 군대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격한 감정 상태로 반응했다. “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삼하 19:4) 다윗이 실제로 “내 아들”을 두 번 말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슬퍼서 외치는 소리가 너무나 절절했기에 기자는 “내 아들”을 두 번 반복해서 기록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그분을 향한 이 사람들의 강한 감정을 표현하고 계신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가르침에 머리로 동의할 뿐 아니라 그 사실을 열정적으로 믿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 이라는 사실을 몹시 기뻐하고 있다. 자신의 신앙을 이야기할 때 흥분해서 목소리 톤이 올라가고 예배 시간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딱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말로만 외치지 않고 그 나라를 세우는 일에 열심히 참여한 사람들이다.

벌써부터 내 눈에 훤히 보인다. 최후 심판 날에 많은 사람들이 거들먹거리며 내게 와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는 메시지를 전했고, 귀신을 혼내 줬으며, 하나님이 후원해 주신 우리 사업은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 메시지 성경)

메시지 성경에서는 그들이 방관자들이 아니라는 점을 가장 잘 표현해 준다. 그들은 자기 교회 사역에 직접 참여하거나 후원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복음에 대한 믿음을 거리낌 없이 표현한다. “우리는 메시지를 전했고,” 요컨대 그들은 사람들의 인생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적극 참여한다.

메시지 성경은 “많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폴루스”는 ‘대부분’ 이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 어떤 경우든 예수님은 소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복음의 가르침을 믿는 다수의 무리에 관해 말씀하고 계신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라 부르며 신앙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충만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그분 사역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누가 봐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만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그들은 어떤 면에서 진정한 신자들과 다른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장 23절)

여기서 핵심 문장은 “불법을 행하는”이다. 다시 말하지만 불법적인 행위는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가끔’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불순종이 더 이익이라고 판단되면 언제라도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경시하거나 불순종한다. 그들에게는 거룩한 두려움이 없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이전 장에서 말했듯이 여기서 “알다”는 헬라어 “기노스코”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야다”와 같이 누군가를 친밀히 안다는 뜻이다. 그들은 예수님과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라 부르지만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것은 단순한 호칭에 불과하다.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기노스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기노스코)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요한일서 2장 3~4절)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설교의 요점을 이렇게 정리하신다. “그들의 열매(행위)로 그들을 알리라.”(마7:20) 여기서 행위는 기독교 사역, 메시지 선포, 교회 출석을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께 외면당하는 이들도 이런 부분에서는 흠잡을 데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참된 신자에게서도 분명 이런 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이런 속성 없이는 참된 신자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속성을 지녔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참된 자녀인 것은 아니다. 결정적인 요인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다. 이는 예수님의 유명한 산상수훈에서 맨 마지막에 나타나는 논의다. 예수님은 이 논의를 이렇게 정리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태복음 7장 24~27절)

이 두 그룹의 차이점은 단 한 가지다. 두 그룹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만 첫 번째 그룹은 그 말씀대로 ‘행하고’ 두 번째 그룹은 ‘행하지 않는다.’ 달리 표현하면 첫 번째 그룹은 하나님의 말씀에 떤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두 번째 그룹은 하나님의 말씀에 떨지 않는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두 그룹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비슷하다. 신앙의 기초가 약한 그룹도 기독교 교리를 믿고,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주라 부르고 사역에 적극 참여한다. 신앙의 기초가 강한 그룹도 같은 속성을 지녔다. 단,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뜻인 것처럼 철저히 순종했다.

두 집은 모두 같은 재료, 곧 같은 가르침으로 지어졌다. 예배와 섬김에서는 둘 다 동일하게 보인다. 차이는 보이지 않는 기초에 있다. 한 그룹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리지만, 다른 그룹은 그렇지 못하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거룩한 두려움을 품고 사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다음 몇 장에 걸쳐 당신과 내가 초대받은 이 놀라운 특권을 살펴보자.

핵심 말씀 :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은혜)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후 1:2~4)

1 week ago | [YT] | 5

시온의 대로 말씀과 기도의 집

테슈바 40일 경외 <34>
존 비비어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언 16장 25절)
(30) 가짜 친밀함에 속지 말 것

뭔가를 이해하려면 그것의 정반대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관해 계속해서 논하기 전에 먼저 다음 이야기를 통해 가짜 친밀함에 관해 살펴보자.

나는 리더십 콘퍼런스에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하와이에 도착했다. 그런데 내 호텔 방이 아직 손님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아서 수영장 옆에 있는 파라솔 아래에서 좀 쉬기로 했다. 다른 콘퍼런스에 참석 중인 한 여류 사업가도 자신의 방이 준비되기까지 기다리는 중이었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내가 기독교 작가이자 사역자라는 사실을 알고서 그녀는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에 관해 자세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녀가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녀는 자신이 ‘믿는’바를 자신있게 말했지만 그것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성령께 지혜를 요청했고, 잠시 후 성령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려 주셨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나는 이렇게 물었다. “저기 수영장 건너편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이시나요?” 그녀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필시 내가 느닷없이 주제를 바꿨기 때문이리라.) “네 보여요.” 나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남자의 이름은 짐이에요. 캘리포니아주 프레즈노에서 온 친구죠. 철저한 채식주의자랍니다. 저 친구의 꿈은 미국 수구 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하는 겁니다. 저 친구는 하루에 세 시간씩 수영장과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한답니다.

취미는 피클 볼과 스카이다이빙, 그림이죠. 저기 온수 풀에 있는 저 여성이 짐의 부인이랍니다. 이름은 베스고요. 짐보다 열 살이 적어요.” 내가 그 남자를 어찌 그리 잘 아는지 궁금해진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저분도 선생님과 함께 콘퍼런스에 오신 건가요?” 나는 즉시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녀의 호기심이 더 커졌다. “그러면 저분을 어떻게 그리 잘 아시나요?” 나는 그녀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며 대답했다. “사실 저는 저 사람을 만나 본 적도 없습니다.”

내 말에 그녀의 안색이 변하면서 의심의 빛이 번졌다. 아마도 나를 스토커나 사설탐정, 혹은 정부 요원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힘주어 말했다. “이것이 내가 저 남자에 관해서 ‘믿는’바랍니다.”

어안이 벙벙한 눈치였다. 나는 계속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선생님은 좀 전에 예수님에 관해 ‘믿는’ 바를 아주 자신 있게 말씀하셨죠. 하지만 그 말 대부분은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달라요. 저는 예수님을 알기에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했다. 하지만 크게 흔들린 기색이 역력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깊이 사랑하는 한 교회의 교인들에게 충격적인 직언을 한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11:4)

그는 다른 신이 아니라 “다른 예수”라고 말한다. 이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분을 ‘알지는’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왜일까? 그들은 뭐든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믿었고, 그 결과 진짜 예수님에게서 멀어진 삶을 살았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의 공상 속에서 그분의 본성을 바꿀 수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와 비슷한 짓을 저질렀다. 애굽(이집트)에서 나온 것은 세상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고전10:4~5)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그 모든 이유는 하나로 귀결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 거룩한 두려움의 부재였다.

모세가 40일 동안 산에 올라가 있을 때 이스라엘의 현장 리더인 아론은 황금 송아지를 만들었다. 우리 모두는 이 상황을 보며 “우상숭배!”라고 외칠 것이다. 우상숭배, 맞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잘 모르는 사실은, 아론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 송아지를 “엘로힘”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 히브리어 단어는 구약에서 2,606번 등장한다. 이 단어는 거짓 신들을 지칭할 수도 있지만, 열에 아홉은 ‘여호와’ 곧 한 분이신 참된 하나님을 가르킨다. 예를 들어, 이 단어는 창세기이 첫 번째 장에서 32번 나타나는데, 성경의 첫 구절은 이렇게 말한다. “태초에 하나님(엘로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들이 그 송아지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에서 엘로힘이라고 부른 것인지 거짓 신이라는 의미에서 엘로힘이라고 부른 것인지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대한 증거는 아론이 그 송아지를 “여호와”라고 부른 데서 발견된다.(출32:5)

이 표현은 한 분이신 참된 하나님의 신성한 이름이다. 이곳 말고는 성경 그 어디에서도 이 단어를 거짓 신의 이름으로 사용한 구절이 없다.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은 그 송아지를 ‘오시리스’나 ‘바알’, ‘이시스’ 같은 거짓 신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선포한다. “이분은 우리를 애굽 땅에서 구해 낸 분 곧 ‘여호와’이시다.” (출32:4)

어떻게 이렇게까지 어리석을 수 있는가? 왜 그들은 모세처럼 살아 계신 참된 하나님을 몰랐을까? 그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숱한 기적을 보았다. 그들은 내내 하나님이 만드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따라왔다. 그런데 왜? 답은 복잡하지 않다. 몇 달 전 하나님이 처음 산에서 내려와 자신을 소개하셨을 때 그들은 뒷걸음질하며 모세에게 부르짖었다.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신5:27)

모세가 얼마나 실망했을지 상상이 간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려는 열망이 어찌 이리 부족할 수 있는가?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한가. 모세는 그 답을 알고자 하나님께 이 문제를 아뢰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반응은 모세의 예상을 빗나가는 것이었다.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신5:28)

하나님은 탄식하셨다. 그들이 거룩한 두려움을 품기만 했다면 그분의 임재 안에 들어와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들과 그들의 자손이 다 잘 되었을 것이다. 이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리셨다.

가서 그들에게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이르고 너는 여기 내 곁에 서 있으라. 내가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네게 이르리니 (신명기 5장 30~31절)

이 명령에는 슬픔과 기쁨이 공존한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실로 슬픈 일이다. 이스라엘의 가장 어두운 순간은 황금 송아지를 만든 순간이나 약속의 땅 입성을 막은 악한 보고서를 내놓은 순간이 아니었다. 바로 이 순간이 이스라엘의 가장 어두운 순간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까이 불러 그분이 그들을 아는 것처럼 그들도 그분을 알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애굽(세상)에서 구해내셨다. 하지만 그들은 ‘거룩한 두려움이 없는 탓에’ 하나님의 손을 뿌리쳤다. 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

반면 모세로서는 기쁜 일이었다. 하나님께 가까이 서서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을 기회를 얻었으니까 말이다. 백성들이 각자의 장막으로 돌아간 사이에 그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초대 받았다.

내가 수영장에서 만난 그 여성은 ‘다른 예수’를 주장했고,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다른 예수’를 섬겼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하나님’을 따랐다. 어떤가? 패턴이 보이는가? 자기 멋대로 신을 만들고서 예수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하나님 우편에 계신 진짜 예수님은 모르는 것이 가능하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과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경험하고도 그런 오류에 빠졌다는 것이다.

심판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주라 부르지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 관해 하나님께 들었던 것과 똑같은 말을 듣게 될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내게서 떠나가라” 이 무리에게 일어날 일에 관한 예수님의 예언적인 말씀을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번 장의 첫머리에서 말했듯이, 그러고 나면 우리 주님과의 친밀함에서 거룩한 두려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장에서 이 주제를 다루어 보자.

핵심 말씀 :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고전 15:2)

1 week ago | [YT] | 4

시온의 대로 말씀과 기도의 집

테슈바 40일 경외 <33>
존 비비어
5부 거룩한 두려움을 품을수록 깊어지는 친밀함
하나님의 음성을 늘 간접적으로만 듣기보다는 그 음성을 직접 듣기 위해 그 어떤 대가도 기꺼이 치를 것이다 그 대가가 지독히 힘든 상황에 처하는 것이라 해도 (조이 도우슨)
(29) 친밀함이 싹트는 출발점

하나님의 영광을 더 분명히 이해할수록 우리 안에서 거룩한 두려움이 자라난다. 이 두려움은 우리의 동기를 정화 시켜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시키고 우리 삶에 진정한 거룩함을 낳는다. 거룩한 두려움은 이해되지 않거나 유익이 보이지 않거나 고통스러워도 그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즉각적이고도 온전히 순종하는 모습으로 표출된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이 독특한 선물이 가져다주는 유익들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5부에서는 그중에서 단연 가장 큰 유익인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친밀하다는 뜻의 영단어 “인티밋”(intimate)은 두 라틴어 단어에서 비롯했다. 하나는 “안”을 의미하는 “인투스”이고, 다른 하나는 “매우 비밀스러운”을 의미하는 “인티무스”다. 이 둘을 합치면 ‘가장 깊은 곳의 비밀들’이 된다. 이 단어는 친밀함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이 단어는 아주 가까운 두 친구가 단순한 지인보다 훨씬 더 깊이 연결되는 상황을 묘사한다. 지인은, 가끔 만나지만 서로를 잘 모르는 상태의 사람을 말한다.

친밀함은 양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양 당사자 모두 서로의 가장 깊은 바람과 생각을 알려고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시각과 우리의 시각 둘 다를 살펴보자.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시편 139편 1절)

여기서 “살펴보셨으므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카르”다. 그 정의는 “탐구하다, 살피다, 찾아내다”다. 이 단어는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보여 준다. 다른 사람의 가장 깊은 생각과 뜻을 탐구하려면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물론 친밀한 관계를 쌓으려고 할 때 그렇게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은 부담스럽기는커녕 기쁜 일이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 생활에서 기꺼이 이런 노력을 기울였다. 처음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나는 아내가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 경멸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아내의 가장 깊은 생각과 뜻을 알아가는 데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물론 나는 그 과정을 즐겼다. 아내와 친밀해지려면 정신적, 감정적, 육체적으로 집중해서 지속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

위의 성경 구절에서 주목해야 할 다음 단어는 “아시나이다”다. 이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친밀함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자주 사용된다. 예를 들어 창세기 4장 1절은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동침하매”에 해당하는 단어가 “야다”다. 이렇듯 성령은 두 인간이 이생에서 맺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관계에 대해 “야다”를 사용하신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다윗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님은 저를 매우 깊이 아십니다.”

다윗은 “하카르”와 “야다”라는 단어를 둘 다 사용하여 우리와 친밀해지기 위해 우리의 가장 깊은 바람과 뜻을 탐구하시는 하나님의 생생한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이번에도 우리 부부의 관계를 예로 들면, 나는 오랜 세월 함께 동고동락한 후에 아내를 훨씬 깊이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아내의 깊은 갈망을 알 뿐 아니라 아내의 일상, 특정 상황에서의 아내의 주된 반응, 아내가 여가 시간을 보내는 방식, 아내가 즐겨하는 활동 등을 안다. 같은 맥락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편 139편 2~4절)

하나님은 우리에 관해 우리의 이해를 초월할 만큼 자세히 아신다. “하카르” 측면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탐구하기 위해 노력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도 그와 똑같이 대하신다. 하나님은 내가 지난 40년 동안 아내를 탐구했던 것처럼 나를 대하시되 훨씬 더 철저히 탐구하신다. 사실, 몇 구절 뒤에서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세상 모래알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많다는 놀라운 진술이 나타난다. (18절) 내가 지난 40년 동안 아내의 기호, 버릇, 갈망, 싫어하는 것에 관해 5초 정도마다 한 번씩 생각했다고 해도 신발 상자 하나를 가득 채운 모래알의 숫자만큼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지구상의’모래알을 합친 것보다도 많다. 그리고 하나님은 절대 과장하시지 않는다. 과정은 결국 거짓말이며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을 알려는 하나님의 열정이 얼마나 강렬한지 이해가 좀 되는가?

하나님은 우리 각자와 친밀해지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진정한 친밀함은 한쪽만이 아니라 양 당사자가 ‘모두’서로를 잘 알 때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우리의 가장 깊고 내밀한 생각을 탐구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분과의 진정한 친밀함을 열정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모세는 이런 수준의 관계를 추구하며 이렇게 간청했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야다)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야다)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출애굽기 33장 12~13절)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를 수많은 무리 중 하나의 숫자로 ‘아시는’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개인적으로 아신다. 우리 각자의 이름을 일일이 아신다. 이 구절에서 모세는 이 은혜에 보답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를 원한다. 그는 친밀한 관계를 원한다. 하나님만 모세를 깊이 알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도 하나님을 깊이 알기를 원한다. 우리는 어떠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4:8)

어떤가? 이제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 나오는 탄식이 들리지 않는가? 그 탄식의 소리가 점점 더 강해지지 않는가? “나와 친밀해질 수 있는데 왜 이렇게 멀어져 있느냐?” 사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수준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다. 더 쉽게 말해 보겠다. 우리가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워질지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다! 자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무슨 상관인가?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출발점)이거늘 (잠언 1장 7절)

무엇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인가? 잠언 기자가 의학적 지식이나 과학적 지식, 역사적 지식, 혹은 학문적 지식을 말하는 것인가? 대학마다 이런 지식으로 꽉 차 있는 식자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하나님을 별로 혹은 거의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사회적 혹은 정치적 지식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세상의 길은 하나님에 대해 어리석다. 성경 지식을 말하는 것인가? 전혀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 전문가들이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분을 매우 노엽게 했다. 답은 다음 구절에서 발견된다.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리니 (잠언 2장 5절)

성경 용어 사전은 이 “지식”을 “사람에 관한 정보, 그 사람과 관계가 있음을 강하게 함축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바인 완전 해설 사전은 이 단어가 “그분(하나님)에 관한 깊은 경험적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구절의 약속을 간단히 표현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을 친밀히 아는 것의 시작이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친밀한 수준에서 아는 것을 시작조차 하지 못한 셈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품는 것이 곧 출발점이다. 뭐든 출발점 밖에서 시작하면 완주할 수 없다. 100미터 달리기를 출발선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50미터 더 나아가서 시작하면 경주에 참여할 수도 완주할 수도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거룩한 두려움이 없다면 하나님을 친밀히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을 친밀히 알 길을 마련해 주셨다. 문제는 우리가 그 길로 갈 것인가이다.

기억하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악 혹은 불법에서 떠나게 된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이 심판의 날 충격받을 사람들에 관해 하신 예언을 생각해 보라.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지만 결국 그분께 이런 말을 들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 여기서 “알지”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기노스코”다. 히브리어로는 “야다”다. 예수님은 거룩한 두려움이 없는 자들에게 “나는 너희를 친밀히 알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것이 다음 장에서 다룰 주제다.

핵심 말씀 :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시27:8)

1 week ago | [YT] | 6

시온의 대로 말씀과 기도의 집

테슈바 40일 경외 <32>
존 비비어
사람이 하나님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분의 법을 망설임 없이 어기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 결과에 대한 두려움도 죄를 막지 못한다. (A. W. 토저)
(28) 민감한 양심을 지키라

이전 장에서 말했듯이 거룩한 두려움을 잃어 가고 있다는 초기 신호는 포착하기 힘들다. 이 과정이 워낙 교묘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이 중요한 문제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제가 될 만한 일을 하려고 할 때 마음속에서 울리는 경고음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우리 모두는 그 소리가 우리를 지키는 ‘양심’의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양심의 명료함과 강도가 변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우리 양심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하나님의 선물이다. 양심은 우리 ‘마음’의 중요한 일부다. 거룩한 두려움은 양심을 민감하게 만드는 반면, 거룩한 두려움이 없으면 양심은 무뎌진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경고한다.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내가 30대 초반에 한 유명한 목사 한 분이 나를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식사 도중 그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제가 여느 리더들처럼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 말에 그만 먹던 음식이 목에 걸릴 뻔 했다. 왜 내게 그런 질문을 던졌을까? 나는 젊었고, 그는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기간보다도 더 오래 목회를 해 왔다. 하지만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조용히 물었다. “성령님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즉시 음성이 들려왔다. “양심을 가장 소중한 보배로 여겨 잘 지키라고 말하라.” 나는 들은 대로 말했다. 그런데 이어서 갑자기 내 영혼에서 이런 말도 함께 나왔다. “목사님은 좋은 기회들을 마주할 겁니다. 하지만 그중에는 양심에 어긋나고 옳지 않고 문제의 소지가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만한 기회들도 있을 겁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양심의 경고음을 흘려듣지 마십시오. 양심을 무시하면 하나님에 대한 민감성을 잃을 겁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나는 “양심”이란 단어가 성경에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에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찾아보니 신약에서만도 그 단어가 약 30번 정도 등장했다. 예를 들어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디모데전서 1장 19절)

믿음의 파선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앞서 말한 그 점심 식사 자리 덕분에 나는 바울의 진술이 지니는 무게를 깨닫게 되었다. 그가 한 말은 많은 이들이 마무리를 잘하지 못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성경에서 양심을 지키라고 권고하는 것은 처음에는 양심이 좋은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씻어 준다. (딤전3:9, 히9:9,14)

이런 정화는 새로운 탄생이 주는 큰 유익 중 하나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양심에 관해 말하는데 그의 말은 잘못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렘17:9)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닮은 새로운 본성을 갖고 다시 태어난 사람들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새로운 마음을 가지지 못했다. 대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겔36:26) 예수님이 우리의 본성을 구속하고 그 분의 본성을 주실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기적 덕분에 우리는 믿을만한 양심을 지녔다. 문제는 그 양심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양심이 더러워지는가? 완전한 부패는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개 부패는 작은 문제에서 시작되곤 한다. 하지만 그 상황을 방치하면 끝내 파선으로 이어진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야고보서 1장 22절)

여기서도 순종을 이야기하고 있다. 앞서 우리는 거룩한 두려움이 이해가 가지 않거나 유익이 눈에 분명히 보이지 않거나 손해가 되어도 즉각적이고도 온전히 순종하게 만든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렇게 말씀에 따라 행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

잠시 이 점에 관해 생각해 보자. 지인을 속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심지어 가까운 친구와 가족도 속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속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런데 불순종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수록 진리의 보호막이 약해지고 도덕관념이 흐려진다. 자신이 해로운 길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점점 덜 인식하게 된다.

예를 들어 보겠다. 누군가를 헐뜯는 말을 한 적이 있는가? 그 순간, 당신은 마음을 찌르는 것 같은 날카로운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 느낌이 바로 양심의 소리다. 그때 당신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회개하고 즉시 자신의 말을 바로잡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행동을 정당화할 때가 너무도 많다. ‘뭐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우리는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쉽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그릇된 논리가 이기곤 한다. 그래서 내면의 경고음을 무시한 채 잘못을 바로 잡지 않는다. 그렇게 부패 과정이 시작되고 양심의 민감도는 점점 약해지기 시작한다.

다음번에 누군가를 비방할 때는 칼에 찔리는 느낌이 나지 않는다. 그냥 마음을 강하게 꼬집히는 느낌 정도다. 양심이 다시 목소리를 내지만 이번에는 전만큼 분명하지 않다. 이제 내적 갈등이 전만큼 세지 않다. 그래서 경고음을 무시하고 자신의 말을 정당화하기가 더 쉽다. 그렇게 마음은 더 더러워지고 양심의 민감도는 더 약해진다.

누군가를 다시 비방하면 이번에는 강하게 꼬집히는 느낌조차 없다. 그냥 살짝 따끔거리기만 한다. 아니, 때로는 그것마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자신을 설득할 필요도 없다. 양심의 소리가 너무 작아서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가 훨씬 더 쉬워진다. 양심의 민감도는 바닥에 가까워진다.

마침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양심이 완전히 마비된다. 분별력이 흐려지는 수준을 넘어 아예 사라진다. 이제 도덕관념은 없다. 믿음의 파선이 임박했다. 이제 우리는 완전한 자기기만에 빠진다.

그런데 그저 회개하기만 하면 이런 결과를 피할 수 있다. 마음을 완전히 바꾸기만 하면 된다. 우리의 지혜가 쓸데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굳게 부여잡으면 된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28:13)

자비와 회복은 언제라도 가능하지만 거룩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회개를 미룬다. 그런 사람의 마음은 양심의 자각에 점점 무뎌져서 위험을 자초한다. 반면,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양심의 경고음에 귀를 기울여 재빨리 회개한다. 그는 지체할수록 위험하다는 사실을 안다.

성경에도 우리 시대에도 양심의 소리를 들었으나 회개하기를 미룬 사람들이 많다. 마치 러시안 룰렛과 비슷하다. 한 번은 파선을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계속하다가는 언제 양심의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지 알 수 없다. 바울은 이렇게 탄식한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디모데전서 4장 1~2절)

뜨겁게 달궈진 쇠로 인간의 살을 지지면 모든 감각을 잃어버린다. 양심도 마찬가지다. 이제 자신의 진짜 모습과 다른 이미지를 표출하면서도 전혀 자각이 없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울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그런 지경에 빠졌다.

불로 지질 때 나타나는 또 다른 결과는 차단되는 것이다. 고기를 구우면 육즙이 빠져나가지 못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롬9:1) 신자가 양심에 화인을 맞으면 더 이상 성령과 소통할 수 없다. 육즙이 고기를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의 증언이 양심을 뚫고 우리의 영혼에 이를 수 없다. 그러면 인생의 내비게이션 없이 살게 된다. 그 결과는 물론 멸망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한 많은 진술 중 두가지를 유심히 읽어보라.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행23:1)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행24:16) 우리의 양심을 부지런히 지키자.

핵심 말씀 :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10:22)

1 week ago | [YT] | 4

시온의 대로 말씀과 기도의 집

테슈바 40일 경외 <31>
존 비비어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잠언 4장 26절)
(27) 온전히 순종하기

이번 장을 시작하면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어떤 프로젝트든 끝까지 완수하지 않고서 그 잠재력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가능할까? 답은 당연히 “아니다”이다. 우리 주님은 거대한 프로젝트를 이미 진행 중이시다. 그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한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 있다. 그분은 우리 각자에게 하위 프로젝트들에 대한 책임을 맡기셨다. 우리가 이 프로젝트들을 끝까지 완수하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라의 일이 완성될 것이다.

이 진리를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대한 마지막 측면으로 넘어가 보자. 처음 네 가지와 함께 새로운 측면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 즉시 순종한다.
2. 말이 되지 않아도 하나님께 순종한다.
3. 개인적인 유익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 순종한다.
4. 고통스럽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한다.
5.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한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떨지 않는 사람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예다. 그는 이해되지 않거나 유익이 분명히 보이지 않거나 자신의 목적과 부합하지 않을 때면 쉽게 순종을 포기했다. 그는 거룩한 두려움이 없는 탓에 툭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이나 해를 가했다.

하지만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사울은 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만 해도 겸손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던 청년이었다. 이 두가지 덕목은 언제나 짝을 이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왜 저를 주목하십니까? 저는 이스라엘서 가장 작은 지파 출신입니다. 게다가 제 가문은 제 지파에서 가장 보잘 것 없고요.”(삼상 9:21)

나중에 이스라엘의 첫 왕을 보기 위해 온 백성이 모였다. 그리고 긴 과정을 거친 끝에 사울이 뽑혔다. 하지만 리더들이 그를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그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었다. 그는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삼상 10:20~24)

하지만 거룩한 두려움이 그에게는 보배가 아니었다. 솔로몬과 마찬가지로 그는 성공, 명성, 리더 위치가 주는 혜택들을 경험한 뒤에 결국 그 두려움을 버렸다. 사울 왕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경우, 거룩한 두려움을 잃는 과정은 처음에는 미묘하게 진행된다. 처음에는 작은 일에서 신념을 따르지 않는 일로 시작된다.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양심은 점점 더 무뎌져만 간다. 결국, 더 중요한 문제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불순종을 하기에 이른다.

사울왕이 그랬다. 거룩한 두려움을 잃었다는 증거가 표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삼상 13:5~14)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는 큰 성공을 경험하고 있었기에 그것을 깨닫기가 힘들었다.(삼상14:47)

얼마 뒤 사울왕은 이런 명령을 받았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삼상15:3) 하나님은 이 나라의 악한 행위에 벌을 내리실 참이었다.

사울은 21만 명의 군대를 동원했다. 그 군대는 모든 인간과 가축을 도륙했다. 단, 아말렉 왕 아각과 가장 좋은 가축들만 빼고, (삼상15:7~9) 한번 찬찬히 생각해보자. 사울이 이만한 규모의 군대를 동원했을 정도면 아말렉에는 최소한 25만명의 시민이 있었을 것이다. 사울의 군대는 말하자면 그들 중 249,999명을 죽였다. 사울은 맡은 임무의 99.99퍼센트를 완수했다. 하지만 ‘거의’완벽한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어땠는지 보라.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내 명령에 순종하기를 거절했음이니라.) 사무엘상 15장 11절

사무엘은 이 메시지를 사울에게 전하면서 그의 행위를 “거역”으로 규정했다. (삼상15:23) 사울은 의심의 여지없이 ‘죄’를 지었다. 잠시 죄에 관해서 논해보자. 사도 요한은 죄가 “불법”이라고 말한다. (요일3:4) 죄에 대한 그의 정의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반항이다. 이 죄를 이런 관점에서 보라. 예를 들어, 에덴 동산에서 아담은 창녀와 한 침대에 눕거나 은행 강도질을 하거나 살인하지 않았다. 단순히 그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불순종했다. 마찬가지로 사울은 하나님이 시키신 일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다.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사울은 전쟁에 나서라는 명령을 받고서 짜증을 내며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말했다면 대부분이 거역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기 일만 챙기지도 않았다. 그랬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는 순종을 우선시하지 않는 죄를 지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사울의 행위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거역으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사울의 임무의 99.99퍼센트를 완수했기 때문에 대부분이 잘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 행동을 거역이라고 말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울의 입장이 되어서 그런 지적을 받으면 누구나 “너무하는군! 왜 작은 실수만 따지는 거야? 내가 이룬 많은 성과를 인정해 줄 수는 없어?” 라고 따질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거의 완벽한’ 순종은 전혀 순종이 아니다.

왜 이렇게 강한 표현을 사용했는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당시에 왕이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서 적국의 왕을 산 채로 잡아 오는 것은 왕궁에 살아 있는 트로피를 진열하는 것과도 같았다. 이는 스스로도 기분이 우쭐해지고 왕궁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위대함을 늘 각인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둘째, 왜 가장 좋은 가축들을 남겼을까? 이에 대한 답을 말하기 전에 이 상황이 왜 복잡한지를 생각 보자. 사울은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가장 좋은 가축들을 죽이지 않고 살렸다. 그가 사무엘 선지자에게 어떻게 항변했는지를 들어 보라.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삼상 15:15)

그는 왜 이렇게 말했을까? 백성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이 나라는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였다. 병사, 제사장, 백성들은 십중팔구 서로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정말 경건한 왕이야. 항상 하나님을 가장 먼저 챙긴다니까 이번에도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들을 드린다잖아.”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이 모든 것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사울은 자신의 평판을 높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의 행동 이면에 자리한 동기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는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었다.

요즘 시대는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편이다. 하지만 불안감 이면에는 불순종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인정과 사랑을 받으려는 욕구가 있다. 그들은 창조주께서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받아 주시고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내 불안감의 정체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위험한 함정이다.

사울은 거룩한 두려움이 없는 탓에 명령을 완수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본보기로 돌아가 보자. 예수님은 거부, 수치, 미움, 심한 반대, 매질, 끔찍한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다. 성전 경비들이 그분을 체포하러 왔을 때 제자들은 그들을 막으며 그분은 보호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분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마태복음 26장 53~54절)

예수님께는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고등학교 시절 우리 학교 라커룸에 흥미로운 포스터 한 장이 걸려 있었다. 나는 매일 오후 농구 연습이 끝날 때마다 그 포스터를 보았다. 포스터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만두겠어” 라고 말하는 한 운동선수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 아래에는 십자가에 달려서 “나는 그만두지 않았다”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그림이 있었다.

당시 나는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그 이미지는 내 안에 깊이 각인 되었다. 예수님이 극심한 고초와 잔혹한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마침내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계속해서 순종하셨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 이미지가 내게 훨씬 큰 의미로 다가온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온전한 순종의 본, 하나님이 무엇을 맡기시든 끝까지 완수하는 본을 보이셨다.

이제 더 큰 믿음을 달라고 부르짖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주신 명령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으리라 믿는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 (누가복음 17장 10절)

이제 “다” 라는 말씀의 의미가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리라 믿는다. 언제나 온전히 순종하자.

핵심 말씀 : 절대로 멈추지 마십시오! 오직 예수만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우리가 참여한 이 경주를 시작하고 완주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어떻게 하셨는지 배우십시오. 그분은 앞에 있는 것, 곧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결승점을 지나는 기쁨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기에 달려가는 길에서 무엇을 만나든 ..참으실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시들해지거든 그분 이야기를 하나 하나 되새기고 그분이 참아내신 적대 행위의 긴 목록을 살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에 새로운 힘이 힘차게 솟구칠 것입니다. (히12:2~3)

2 weeks ago | [YT] | 4

시온의 대로 말씀과 기도의 집

테슈바 40일 경외 <30>
존 비비어
순종을 떠나서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순종 없는 구원은 자기 모순적이며 불가능한 일이다. (A.W. 토저)
(26) 고통스러워도 순종하기

여성이 아기를 낳는 것은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이 과정은 어렵고도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결과는 기다리던 새 가족의 탄생이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불편 없이는 아름다운 새 생명이 세상에 나올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떠는 것의 다음 측면도 비슷하다. 처음 세 가지와 함께 새로운 측면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 즉시 순종한다.
2. 말이 되지 않아도 하나님께 순종한다.
3. 개인적인 유익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 순종한다.
4. 고통스럽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한다.

이 책의 핵심 성경 구절 중 하나인 빌립보서 2장 12~13절로 돌아가 보면, 그 구절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다. 우리의 ‘순종’을 촉구하는 이 구절 직전에 바울은 본보기를 보여 주시는 예수님을 가리킨다. 우리 주님은 신적인 특권을 포기하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다. (빌2:8) 예수님은 극심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아버지 하나님의 요청에 기꺼이 순종하셨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고통 속에서 울부짖으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순종과 자기 보호 사이의 이 갈등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예수님의 몸에서 굵직한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 떨어질 정도였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라는 사실을 기억하라.(히4:15) 그래서 예수님은 곧 닥칠 끔찍한 고난을 미리 아시고서 아버지의 뜻을 이룰 다른 길을 간청하셨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으셨다. 어떻게 해서 이런 엄청난 순종이 가능했을까?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

경건하심, 곧 거룩한 두려움으로 인해 예수님은 인간의 본성으로는 피할 수밖에 없는 그 일을 감내하셨다. 이로 인해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베드로전서 4장 1절)

이 논의를 더 하기 전에 중요한 요점 하나를 짚고 넘어가자. 거짓 종교는 신을 달래기 위해 고통을 추구한다. 반면, 참된 기독교는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추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타락한 세상의 저항을 맞닥뜨리며, 그 결과는 대개 고난이다. 고난 자체를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순종이다. 어쨌든 고난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다 다가올 수 있다. 어떤 경우든 고통은 매우 실질적이다.

베드로는 “갑옷을 삼으라” 즉 자신을 무장하라고 강권한다. 비행기나 군함, 탱크, 총, 총알, 칼 같은 것이 전혀 없는 비무장 상태로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상상이 가는가? 생각만 해도 황당하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고난을 준비하지 않는 것은 미친 짓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자가 너무도 많다. 무장하지 않은 신자는 자신을 보호하려고 고난을 회피하기 쉽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를 무장시킨다. 그 두려움은 어떤 고난이 닥쳐도 하나님께 순종할 깊은 결단을 이끌어 낸다.

1990년 초 선교 여행 중에 일어난 이야기다. 나와 아내, 우리 아이들은 목사를 떠나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작은 마을의 한 교회에서 사역 중이었다. 그 목사는 교인들을 버리고 더 큰 교회로 떠났다. 처음 몇 번의 집회는 힘들었다. 대다수 교인이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젊은이들은 뒤편에 앉아 서로 농담하며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세 번째 집회에서 변화가 나타났다. 강력한 역사가 임했다. 이제 젊은이들도 앞자리에 앉으려고 일찍 왔다. 참석자는 급증했고, 집회는 몇 주간이나 지속되었다. 사람들은 매일 밤 발 디딜 틈 없이 꽉 찬 작은 교회로 모여들었다. 적지 않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고, 대부분의 신자들이 신앙의 회복을 경험했다.

오랜 기도 끝에 우리는 새로운 목사를 맞을 준비가 될 때까지 몇 달이고 상관없이 그곳에 머물며 집회를 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당회는 정해진 일정과 기존 방식이 흔들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들이 보인 불만 중 하나는 젊은이들이 앞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 외에도 불만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일일이 나열할 가치도 없다. 결국 그들은 내 제안을 받아들일지 우리를 떠나게 할지를 놓고 투표를 했다.

투표가 이루어진 날 밤 저녁 나는 교인들에게 다음 날 저녁이 마지막 집회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실망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강한 반응도 나오며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불편한 순간이었다. 다음 날 그 교회는 그 집회에 참석했다가 불만을 품은 한 사람에게 전화를 받았다. 그는 마지막 집회 도중에 교회 건물을 폭파시키겠다고 위협했다. 나는 경찰서에서 전화가 걸려 오기 전까지는 그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경찰관의 전화에 나는 반박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자 경찰관은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님 저희는 그자를 잘 압니다. 우두머리급 마약 운반책 혐의를 받고 있는 자입니다. 술만 몇 잔 들어가도 충분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인간이에요.”

갑자기 걱정이 들기 시작한 나는 이렇게 물었다. “저를 보호할 경찰관들 좀 보내 주실 수는 없을까요?” 그의 대답은 너무 뜻밖이었다. “저희 경찰서가 그 마을에서 가까이 있는데도 50킬로미터 넘게 떨어져 있습니다. 저는 오늘 저녁 6시에 퇴근하고요. 여기는 인력이 모자라서 그곳까지 갈 경찰관이 없습니다.”

황당한 답변에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때부터 불안이 마구 몰려 왔다. 당장 짐을 싸서 그 마을을 떠나고 싶었다. 우리는 들판에 주차된 한 교인의 이동식 주택에서 지내던 터라 테러에 완전히 무방비상태였다. 우리는 불안감에 떨기 시작했다. ‘당회에서 우리를 퇴짜 놓았는데 뭣 하러 저녁까지 기다려? 당장 마을을 떠나야 해!’

하지만 그것이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우리가 2주간 사역하는 동안 많은 사람이 변화를 경험했다. 그런데 우리가 위협에 못 이겨 할 일을 마치지도 않고 도망치면 그들은 또다시 리더에게 버림받은 배신감에 치를 떨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그 한 번의 타협은 우리 가족의 삶에도 타협의 패턴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요10:12)

우리는 몇 시간 동안 뜨겁게 기도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사람은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한다는 성경 말씀이 마음속에서 반복해서 들려왔다. (시15:4) 마침내 불안감은 물러가고 우리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그날 저녁 우리는 뜨거운 집회를 감동적으로 마쳤다. 테러는 없었고, 우리는 교인들에게 잘 인사하고 헤어질 수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에 반하고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한 타락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것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이유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빌1:29) 바울 뿐 아니라 베드로도 같은 말을 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베드로전서 2장 21~23절)

우리는 보복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그 어떤 부당한 대우도 하나님 손에 맡겨야 한다. 그 일을 무시하지는 말되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넘겨야 한다. 하나님이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식으로 갚아 주실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영웅들은 믿음으로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하나님께 순종하다가 조롱, 결박, 고문, 학대, 투옥, 사막에서의 방황, 동굴살이를 비롯한 온갖 불편하거나 고통 스러운 상황을 겪었다. 왜일까?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적대적인 타락한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히11:36~39)

그들 모두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거룩한 두려움 때문에 설령 해를 당하는 일이 있어도 순종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이 약속을 확신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 (시126:5~6)

핵심 말씀 :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잠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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