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대로 말씀과 기도의 집

테슈바 40일 경외 <40> 대속죄일
존 비비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누가복음 24장 32절)
(35) 종에서 친구로
아브라함과 모세의 삶은 하나님과 우정의 관계를 맺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보여 준다. 하나님은 모세에 대해 이렇게까지 말씀하셨다. “그는 내 온 집에서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다.”(민12:7) 하나님은 그 세대에 그분의 온 백성 중에서 모세보다 더 신뢰하는 사람은 없다고 선포하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선포인가.

예수님은 이 기준을 바꾸셨을까? 예수님은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우정의 문을 활짝 여셨을까? 일단, 답은 “아니다”이다. 요한이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관해 쓴 글을 보면서 이 문제를 살펴보자.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요한복음 2장 23~24절)

여기서 “의탁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완전히 믿고 의지할만큼 신뢰하는 것. 확신을 갖는 것”으로 정의된다. 흥미롭게도 하나님은 사람들의 신뢰에 같은 신뢰로 반응하시지 않았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정도로 신뢰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신뢰하시지 않았다. 그것은 대다수 인간들이 믿을 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셨다. 하지만 그들을 친구로까지 여기시지는 않았다. 예수님(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은 그분을 단순히 믿기만 하는 자들에 대해 하나님이 모세를 신뢰하시듯 신뢰하지 않으셨다.

시간을 빨리 돌려 최후의 만찬 현장으로 가 보자. 예수님이 사역하신 지난 3년간, 그분을 믿었던 사람들 대부분은 믿을 만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남몰래, 혹은 멀찍이 떨어져서 혹은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만 예수님을 따랐다. 많은 제자들이 그분을 떠났고, 가룟 유다는 그분을 배신했다. 이제 예수님이 왜 그들을 신뢰하시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는가?

식사 자리에서 이제 예수님은 가장 가까운 이들과 함께 앉아 계신다. 그분은 감사와 애정을 담아 말씀하신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눅22:28) 요컨대 그들은 믿을 만한 모습을 보여 왔다. 베드로는 그날 밤 큰 실수를 저지르긴 하지만 결국 회개하고 더 충성스러운 마음을 품고 돌아오게 된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다.

가룟 유다는 배신을 저지르려고 이미 자리를 뜬 상태다. 예수님은 남은 열한 제자에게 말씀하신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요15:15) “이제부터는” 이라는 말씀은 이 제자들이 전에는 종이었다는 뜻이다. 바울은 이 원칙을 이렇게 풀이한다.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갈라디아서 4장 1절)

궁금하지 않은가? 왜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인 우리를 종의 위치에 머물게 하시는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운명을 맞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1980년대에 아내와 나는 두 군데 사역 단체에서 일했다. 한 단체는 직원이 450명이었고, 다른 단체는 150명이었다. 그런데 두 단체 모두에서 리더십의 문제를 본 우리는 직접 사역 단체를 시작하면서 그런 리더십은 발휘하지 말자는 생각이 지나쳐 그만 반대편 극단으로 흐르고 말았다. 개중에는 좋은 아이디어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디어도 있었다. 당시 우리가 추구한 패러다임 중 하나는 “모든 직원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된다.”였다. 딱 봐도 어리석음이 보이지 않는가?

우리의 첫 직원은 한 젊은이였다. 여기서는 저스틴이라고 부르자. 나는 그를 둘도 없는 친구처럼 대했다. 우리는 함께 농구를 하고 영화를 보고 자주 식사를 했다. 우리는 절친한 친구들이 하는 모든 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1년쯤 뒤 그에게 사소한 지적을 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는 내 책상 건너편에 앉아 있었고, 나는 부드러운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저스틴 나와 함께 다닐 때 우리가 제공하는 자료를 구하러 오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해야 해요. 웃으면서 이야기하도록 해요. 그들은 하나님께 귀한 존재들이니까요.”

그 다음 상황은 실로 충격이었다. 저스틴은 내게 삿대질을 해 가며 내가 온갖 그릇된 행동을 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내가 옳지 않게 행동한 것들을 일일이 나열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내가 그런 행동을 했었나?’ 하지만 곧 그가 지닌 비판적인 시각 탓에 나를 왜곡해서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잠시 멈춰서 성령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다. 곧 성령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를 내보내라.”

내가 “저스틴 이 일을 그만 두도록 해요.” 라고 말하자. 그는 길길이 날뛰었다. 그는 씩씩거리며 우리 집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를 아끼고 사랑했기에 가슴이 찢어졌다. 갑자기 성령이 내게 속삭이셨다. “그는 두 배로 충성스러워져서 돌아올 것이다.”

세 달 뒤 저스틴에게서 전화 한통이 걸려 왔다. “하나님이 분명한 음성을 통해 저를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용서를 구하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두 분의 삶에서 어느 위치에 두셨는지를 망각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두 분을 제 삶에서 어느 위치에 두셨는지를 잊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리더가 아닌 동료로 대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

나는 즉시 “용서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계속해서 화해의 말이 오간 뒤에 나는 그에게 다시 와서 일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기꺼이 수락했고, 그 뒤로는 더 이상 똑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제 나는 전과 다른 마음가짐으로 사역을 한다. 다른 직원들이 저스틴이 놓친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들에게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비밀을 함부로 털어놓지 않는다. 직원들에게 거리를 두고 그들을 비인격적으로 대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들이 저스틴처럼 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나면 친구처럼 가까이 대한다. 실제로 우리 직원 중 몇몇은 내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삶 속에서 내가 누구이고 나와의 관계에서 네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나를 두려워하기 전까지는 네가 아무리 상속자요 내 나라의 아들딸이라 해도 종의 위치에 머물게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네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운명을 맞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한복음 15장 15절)

예수님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지금까지는 너희에게 극비 정보, 그러니까 내 비밀스러운 계획이나 내 마음의 내밀한 부분을 알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모세와 아브라함을 신뢰했던 것처럼 너희를 신뢰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다.

너희는 ~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한복음 15장 14절)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시라는 내용의 찬양을 부르고 설교를 하고 일상에서도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절친한 친구인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앞 구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완성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면” 이란 단어는 조건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동적으로 예수님의 친구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바로 그분의 친구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과의 우정의 조건은 무엇인가?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은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에 떠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거나 유익이 눈에 보이지 않거나 고통스러워도 그분의 명령에 즉각적이고도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모세는 하나님을 경외해 그분과의 우정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최우선으로 여기면 그분은 우리를 신뢰하고 우정이라는 관계 속으로 받아 주신다. 우주의 창조주의 친구가 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명예요 특권이며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이번 장을 마치기 전에 당신의 머릿속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질문을 다루어 보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을 주시는가?” 그렇다. 신약에만도 500개 이상의 명령이 기록되어 있다. 단, 이것들은 구원에 필요한 명령은 아니다. 구원은 값없이 받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명령들이며, 거룩한 두려움을 품을 때 이 명령들을 지킬 수 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주신 마지막 말씀은 이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28:19~20)

거룩한 두려움이 지닌 가장 큰 유익은 예수님과의 우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핵심 말씀 :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15:14)

5 days ago | [YT]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