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대로 말씀과 기도의 집

테슈바 40일 경외 <33>
존 비비어
5부 거룩한 두려움을 품을수록 깊어지는 친밀함
하나님의 음성을 늘 간접적으로만 듣기보다는 그 음성을 직접 듣기 위해 그 어떤 대가도 기꺼이 치를 것이다 그 대가가 지독히 힘든 상황에 처하는 것이라 해도 (조이 도우슨)
(29) 친밀함이 싹트는 출발점

하나님의 영광을 더 분명히 이해할수록 우리 안에서 거룩한 두려움이 자라난다. 이 두려움은 우리의 동기를 정화 시켜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시키고 우리 삶에 진정한 거룩함을 낳는다. 거룩한 두려움은 이해되지 않거나 유익이 보이지 않거나 고통스러워도 그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즉각적이고도 온전히 순종하는 모습으로 표출된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이 독특한 선물이 가져다주는 유익들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5부에서는 그중에서 단연 가장 큰 유익인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친밀하다는 뜻의 영단어 “인티밋”(intimate)은 두 라틴어 단어에서 비롯했다. 하나는 “안”을 의미하는 “인투스”이고, 다른 하나는 “매우 비밀스러운”을 의미하는 “인티무스”다. 이 둘을 합치면 ‘가장 깊은 곳의 비밀들’이 된다. 이 단어는 친밀함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이 단어는 아주 가까운 두 친구가 단순한 지인보다 훨씬 더 깊이 연결되는 상황을 묘사한다. 지인은, 가끔 만나지만 서로를 잘 모르는 상태의 사람을 말한다.

친밀함은 양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양 당사자 모두 서로의 가장 깊은 바람과 생각을 알려고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시각과 우리의 시각 둘 다를 살펴보자.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시편 139편 1절)

여기서 “살펴보셨으므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카르”다. 그 정의는 “탐구하다, 살피다, 찾아내다”다. 이 단어는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보여 준다. 다른 사람의 가장 깊은 생각과 뜻을 탐구하려면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물론 친밀한 관계를 쌓으려고 할 때 그렇게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은 부담스럽기는커녕 기쁜 일이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 생활에서 기꺼이 이런 노력을 기울였다. 처음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나는 아내가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 경멸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아내의 가장 깊은 생각과 뜻을 알아가는 데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물론 나는 그 과정을 즐겼다. 아내와 친밀해지려면 정신적, 감정적, 육체적으로 집중해서 지속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

위의 성경 구절에서 주목해야 할 다음 단어는 “아시나이다”다. 이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친밀함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자주 사용된다. 예를 들어 창세기 4장 1절은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동침하매”에 해당하는 단어가 “야다”다. 이렇듯 성령은 두 인간이 이생에서 맺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관계에 대해 “야다”를 사용하신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다윗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님은 저를 매우 깊이 아십니다.”

다윗은 “하카르”와 “야다”라는 단어를 둘 다 사용하여 우리와 친밀해지기 위해 우리의 가장 깊은 바람과 뜻을 탐구하시는 하나님의 생생한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이번에도 우리 부부의 관계를 예로 들면, 나는 오랜 세월 함께 동고동락한 후에 아내를 훨씬 깊이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아내의 깊은 갈망을 알 뿐 아니라 아내의 일상, 특정 상황에서의 아내의 주된 반응, 아내가 여가 시간을 보내는 방식, 아내가 즐겨하는 활동 등을 안다. 같은 맥락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편 139편 2~4절)

하나님은 우리에 관해 우리의 이해를 초월할 만큼 자세히 아신다. “하카르” 측면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탐구하기 위해 노력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도 그와 똑같이 대하신다. 하나님은 내가 지난 40년 동안 아내를 탐구했던 것처럼 나를 대하시되 훨씬 더 철저히 탐구하신다. 사실, 몇 구절 뒤에서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세상 모래알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많다는 놀라운 진술이 나타난다. (18절) 내가 지난 40년 동안 아내의 기호, 버릇, 갈망, 싫어하는 것에 관해 5초 정도마다 한 번씩 생각했다고 해도 신발 상자 하나를 가득 채운 모래알의 숫자만큼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지구상의’모래알을 합친 것보다도 많다. 그리고 하나님은 절대 과장하시지 않는다. 과정은 결국 거짓말이며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을 알려는 하나님의 열정이 얼마나 강렬한지 이해가 좀 되는가?

하나님은 우리 각자와 친밀해지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진정한 친밀함은 한쪽만이 아니라 양 당사자가 ‘모두’서로를 잘 알 때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우리의 가장 깊고 내밀한 생각을 탐구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분과의 진정한 친밀함을 열정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모세는 이런 수준의 관계를 추구하며 이렇게 간청했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야다)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야다)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출애굽기 33장 12~13절)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를 수많은 무리 중 하나의 숫자로 ‘아시는’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개인적으로 아신다. 우리 각자의 이름을 일일이 아신다. 이 구절에서 모세는 이 은혜에 보답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를 원한다. 그는 친밀한 관계를 원한다. 하나님만 모세를 깊이 알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도 하나님을 깊이 알기를 원한다. 우리는 어떠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4:8)

어떤가? 이제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 나오는 탄식이 들리지 않는가? 그 탄식의 소리가 점점 더 강해지지 않는가? “나와 친밀해질 수 있는데 왜 이렇게 멀어져 있느냐?” 사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수준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다. 더 쉽게 말해 보겠다. 우리가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워질지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다! 자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무슨 상관인가?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출발점)이거늘 (잠언 1장 7절)

무엇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인가? 잠언 기자가 의학적 지식이나 과학적 지식, 역사적 지식, 혹은 학문적 지식을 말하는 것인가? 대학마다 이런 지식으로 꽉 차 있는 식자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하나님을 별로 혹은 거의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사회적 혹은 정치적 지식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세상의 길은 하나님에 대해 어리석다. 성경 지식을 말하는 것인가? 전혀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 전문가들이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분을 매우 노엽게 했다. 답은 다음 구절에서 발견된다.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리니 (잠언 2장 5절)

성경 용어 사전은 이 “지식”을 “사람에 관한 정보, 그 사람과 관계가 있음을 강하게 함축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바인 완전 해설 사전은 이 단어가 “그분(하나님)에 관한 깊은 경험적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구절의 약속을 간단히 표현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을 친밀히 아는 것의 시작이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친밀한 수준에서 아는 것을 시작조차 하지 못한 셈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품는 것이 곧 출발점이다. 뭐든 출발점 밖에서 시작하면 완주할 수 없다. 100미터 달리기를 출발선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50미터 더 나아가서 시작하면 경주에 참여할 수도 완주할 수도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거룩한 두려움이 없다면 하나님을 친밀히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을 친밀히 알 길을 마련해 주셨다. 문제는 우리가 그 길로 갈 것인가이다.

기억하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악 혹은 불법에서 떠나게 된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이 심판의 날 충격받을 사람들에 관해 하신 예언을 생각해 보라.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지만 결국 그분께 이런 말을 들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 여기서 “알지”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기노스코”다. 히브리어로는 “야다”다. 예수님은 거룩한 두려움이 없는 자들에게 “나는 너희를 친밀히 알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것이 다음 장에서 다룰 주제다.

핵심 말씀 :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시27:8)

2 weeks ago | [Y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