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슈바 40일 경외 <38>
존 비비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영혼을 깨우치고 악을 없애고 정욕을 약화시키고, 영혼에서 어두움을 몰아내 깨끗하게 만든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지혜의 최고봉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는 그 어떤 좋은 것도 찾을 수 없다. 누구든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면 끔찍한 타락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시리아인 에프렘)
(33) 하나님 일에 쓰임 받다.
앞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우정이 쌓이는 과정을 살펴 보았다. 그 과정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를 알 수 있다. 그 방법을 다루기 전에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조금 더 살펴 보겠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야고보서 2장 21~23절)
사도 야고보는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우정을 이야기하는데 야고보와 하나님의 사자가 한 말이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 이 관계를 형성시킨 것은 아브라함이 지닌 거룩한 두려움이었고, 그 두려움은 즉각적이고도 온전한 순종(행동)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하나님의 명령이 이해되지 않고 분명한 유익이 보이지 않고 고통스러웠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떨었다. 거룩한 두려움은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간절히 원하고 실제로 그 일을 행하게 한다. 거룩한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가는 문을 열어 준다.
어느 날 하나님은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숲 근처에서 아브라함을 방문했을 때 동행한 두 천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하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18:17)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쪽으로 몸을 돌려 그분의 계획에 관해 의논하셨고, 두 천사는 계속해서 소돔과 고모라성으로 갔다. 이제부터 그다음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쓰려고 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의 요점은 이렇다. “아브라함아 죄가 너무도 극악해서 이 두 성을 멸망시킬 계획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창조주께 이런 말씀을 듣는다면 어떨 것 같은가? 아브라함은 충격에 빠져 대답한다. “소돔이요?” 하나님은 대답하신다. “그렇다. 고모라도 멸망시킬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 네 생각은 어떠하냐?” 아브라함은 겁에 질린 채 속으로 생각한다. ‘아브라함 생각을 해 보자. 그래 조카 롯이 거기 있지. 조카를 비롯한 무고한 사람들을 위해 내가 나서야 겠어.’ 아브라함은 묘안을 떠올린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세기 18장 23~25절)
언약의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흐뭇함이 그려지지 않는가? 하나님은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좋은 지적이다! 좋다. 그곳에 의인 50명만 있으면 두 성을 멸하지 않으마. 내 친구 아브라함과 이야기를 나누니 정말 좋구나.”
하지만 아브라함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만약 그곳에 의인이 50명도 없다면? 그래서 그는 같은 논리를 내세워 숫자를 45명으로 줄인다.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좋다. 그곳에 의인 45명만 있으면 그 성들을 멸하지 않으마. 내 친구 아브라함과 이렇게 의논을 하니까 정말 좋구나.”
아브라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숫자를 줄여 나간다. 45명에서 40명으로, 40명에서 30명으로 30명에서 20명으로 마침내 10명으로 이제 그는 속으로 생각한다. ‘설마 10명은 되겠지. 내 조카를 배면 나머지 9명만 있으면 돼.’
오직 친구만이 심판의 권세를 지닌 왕에게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다. 종이나 신하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심히 무례한 행동이다. 하나님은 이 모든 요청을 들어주셨다. 이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창18:33)
명심하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분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그분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한다는 뜻이다. 한번은 내가 나를 가혹하게 대한 사람에게 사랑으로 치유의 말을 했더니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들아 내가 아끼는 것(사람들)을 네가 아끼면 내 계획을 너와 의논할 것이다.” 거룩한 두려움은 하나님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더 진정으로 더 깊이 사랑하게 한다.
성경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라고 말한다. (눅17:28) 이 도시들은 지구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일보 직전인데도 그곳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흥청망청 쾌락을 즐기며 불경을 일삼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이게 아니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성경에서 “의로운” 사람이라 불린 롯도 여느 불경한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게, 곧 닥칠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벧후 2:7) 결국 두 천사가 가서 그와 그의 가족들을 피신시켜야 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아브라함이 기도한 덕분이었다. (창19:1~29)
이 상황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 보자. 두 명의 의로운 사람이 있다. 둘 다 구원받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다. 한 의인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실지 사전에 알고서 하나님이 그 일을 어떻게 하실지 결정하는 데 자신의 의견을 반영시킨다. 다른 의인은 다가올 심판에 대해 악인들처럼 전혀 알지 못한다.
왜일까? 첫 번째 의인은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벗(친구)”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비밀을 안다. 두 번째 의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친구가 아니고 그래서 하나님의 비밀을 모른다.
롯은 의인으로 불렸지만 세속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 나아가 현대 서구 교회 교인들처럼 속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는 신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이 ‘의로운’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나와 미국 대통령의 관계와 별다르지 않다. 나는 대통령의 결정과 리더십의 혜택을 보긴 하지만 대통령의 극비 정보, 계획, 개인 감정, 결정을 사전에 알지는 못한다.
롯의 인격은 그가 고른 동네와 아내, 근친상간을 통해 낳은 자식들(모압과 암몬 족속)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롯은 늘 자신에게 가장 좋아 보이는 것을 선택했다. 아브라함은 롯과 갈라설 때가 되자 그에게 먼저 살 곳을 정하게 해 주었다. 자신은 그가 정한 곳과 반대 방향으로 가기로 약속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창13:10)
이 때 롯은 그 평야 도시들이 얼마나 악한지를 알았다. 그래서 필시 그는 그 땅을 바라보면서 세상의 혜택들을 누리면서도 세상에 휩쓸리지 않을 방안을 고민했을 것이다. 고민 끝에 그는 악의 소굴에서 적당히 떨어진 평야에 장막을 치기로 했다. (창13:12) 하지만 이런 타협안은 통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와 식구들은 결국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결국 세상에 휩쓸렸다.
거룩한 두려움이 없으면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도 최대한 세상에 가까이 다가갈 방법을 찾게 되어 있다. 하지만 세상에 휩쓸리는 것은 시간 문제다. 우리가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잃은 자들을 구하기 위해 세상 가운데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롯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반면교사 역할을 한다. 아브라함의 중보가 아니었다면 심판은 야밤을 틈탄 도둑처럼 롯에게 갑자기 임했을 것이다. 그의 세속적인 삶에는 끔찍한 대가가 따랐다. 앞서 말했듯이 롯의 후손들은 몹시 불경했다. 그의 아내는 소돔에 푹 빠져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들의 명령을 거역했다가 심판을 맞았다.
그녀는 즉시 소금 기둥으로 변했다. 예수님은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롯의 처를 기억하라.” 라고 경고하신다. (눈17:32) 자 이런 수준의 우정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위한 것일까? 이 질문을 다루기 전에 먼저 구약에 소개된 하나님의 또 다른 친구를 살펴보자.
핵심 말씀 :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약4:8)
시온의 대로 말씀과 기도의 집
테슈바 40일 경외 <38>
존 비비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영혼을 깨우치고 악을 없애고 정욕을 약화시키고, 영혼에서 어두움을 몰아내 깨끗하게 만든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지혜의 최고봉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는 그 어떤 좋은 것도 찾을 수 없다. 누구든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면 끔찍한 타락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시리아인 에프렘)
(33) 하나님 일에 쓰임 받다.
앞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우정이 쌓이는 과정을 살펴 보았다. 그 과정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를 알 수 있다. 그 방법을 다루기 전에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조금 더 살펴 보겠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야고보서 2장 21~23절)
사도 야고보는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우정을 이야기하는데 야고보와 하나님의 사자가 한 말이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 이 관계를 형성시킨 것은 아브라함이 지닌 거룩한 두려움이었고, 그 두려움은 즉각적이고도 온전한 순종(행동)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하나님의 명령이 이해되지 않고 분명한 유익이 보이지 않고 고통스러웠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떨었다. 거룩한 두려움은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간절히 원하고 실제로 그 일을 행하게 한다. 거룩한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가는 문을 열어 준다.
어느 날 하나님은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숲 근처에서 아브라함을 방문했을 때 동행한 두 천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하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18:17)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쪽으로 몸을 돌려 그분의 계획에 관해 의논하셨고, 두 천사는 계속해서 소돔과 고모라성으로 갔다. 이제부터 그다음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쓰려고 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의 요점은 이렇다. “아브라함아 죄가 너무도 극악해서 이 두 성을 멸망시킬 계획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창조주께 이런 말씀을 듣는다면 어떨 것 같은가? 아브라함은 충격에 빠져 대답한다. “소돔이요?” 하나님은 대답하신다. “그렇다. 고모라도 멸망시킬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 네 생각은 어떠하냐?” 아브라함은 겁에 질린 채 속으로 생각한다. ‘아브라함 생각을 해 보자. 그래 조카 롯이 거기 있지. 조카를 비롯한 무고한 사람들을 위해 내가 나서야 겠어.’ 아브라함은 묘안을 떠올린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세기 18장 23~25절)
언약의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흐뭇함이 그려지지 않는가? 하나님은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좋은 지적이다! 좋다. 그곳에 의인 50명만 있으면 두 성을 멸하지 않으마. 내 친구 아브라함과 이야기를 나누니 정말 좋구나.”
하지만 아브라함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만약 그곳에 의인이 50명도 없다면? 그래서 그는 같은 논리를 내세워 숫자를 45명으로 줄인다.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좋다. 그곳에 의인 45명만 있으면 그 성들을 멸하지 않으마. 내 친구 아브라함과 이렇게 의논을 하니까 정말 좋구나.”
아브라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숫자를 줄여 나간다. 45명에서 40명으로, 40명에서 30명으로 30명에서 20명으로 마침내 10명으로 이제 그는 속으로 생각한다. ‘설마 10명은 되겠지. 내 조카를 배면 나머지 9명만 있으면 돼.’
오직 친구만이 심판의 권세를 지닌 왕에게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다. 종이나 신하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심히 무례한 행동이다. 하나님은 이 모든 요청을 들어주셨다. 이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창18:33)
명심하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분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그분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한다는 뜻이다. 한번은 내가 나를 가혹하게 대한 사람에게 사랑으로 치유의 말을 했더니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들아 내가 아끼는 것(사람들)을 네가 아끼면 내 계획을 너와 의논할 것이다.” 거룩한 두려움은 하나님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더 진정으로 더 깊이 사랑하게 한다.
성경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라고 말한다. (눅17:28) 이 도시들은 지구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일보 직전인데도 그곳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흥청망청 쾌락을 즐기며 불경을 일삼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이게 아니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성경에서 “의로운” 사람이라 불린 롯도 여느 불경한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게, 곧 닥칠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벧후 2:7) 결국 두 천사가 가서 그와 그의 가족들을 피신시켜야 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아브라함이 기도한 덕분이었다. (창19:1~29)
이 상황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 보자. 두 명의 의로운 사람이 있다. 둘 다 구원받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다. 한 의인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실지 사전에 알고서 하나님이 그 일을 어떻게 하실지 결정하는 데 자신의 의견을 반영시킨다. 다른 의인은 다가올 심판에 대해 악인들처럼 전혀 알지 못한다.
왜일까? 첫 번째 의인은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벗(친구)”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비밀을 안다. 두 번째 의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친구가 아니고 그래서 하나님의 비밀을 모른다.
롯은 의인으로 불렸지만 세속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 나아가 현대 서구 교회 교인들처럼 속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는 신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이 ‘의로운’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나와 미국 대통령의 관계와 별다르지 않다. 나는 대통령의 결정과 리더십의 혜택을 보긴 하지만 대통령의 극비 정보, 계획, 개인 감정, 결정을 사전에 알지는 못한다.
롯의 인격은 그가 고른 동네와 아내, 근친상간을 통해 낳은 자식들(모압과 암몬 족속)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롯은 늘 자신에게 가장 좋아 보이는 것을 선택했다. 아브라함은 롯과 갈라설 때가 되자 그에게 먼저 살 곳을 정하게 해 주었다. 자신은 그가 정한 곳과 반대 방향으로 가기로 약속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창13:10)
이 때 롯은 그 평야 도시들이 얼마나 악한지를 알았다. 그래서 필시 그는 그 땅을 바라보면서 세상의 혜택들을 누리면서도 세상에 휩쓸리지 않을 방안을 고민했을 것이다. 고민 끝에 그는 악의 소굴에서 적당히 떨어진 평야에 장막을 치기로 했다. (창13:12) 하지만 이런 타협안은 통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와 식구들은 결국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결국 세상에 휩쓸렸다.
거룩한 두려움이 없으면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도 최대한 세상에 가까이 다가갈 방법을 찾게 되어 있다. 하지만 세상에 휩쓸리는 것은 시간 문제다. 우리가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잃은 자들을 구하기 위해 세상 가운데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롯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반면교사 역할을 한다. 아브라함의 중보가 아니었다면 심판은 야밤을 틈탄 도둑처럼 롯에게 갑자기 임했을 것이다. 그의 세속적인 삶에는 끔찍한 대가가 따랐다. 앞서 말했듯이 롯의 후손들은 몹시 불경했다. 그의 아내는 소돔에 푹 빠져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들의 명령을 거역했다가 심판을 맞았다.
그녀는 즉시 소금 기둥으로 변했다. 예수님은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롯의 처를 기억하라.” 라고 경고하신다. (눈17:32) 자 이런 수준의 우정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위한 것일까? 이 질문을 다루기 전에 먼저 구약에 소개된 하나님의 또 다른 친구를 살펴보자.
핵심 말씀 :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약4:8)
2 weeks ago | [YT]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