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슈바 40일 경외 <34>
존 비비어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언 16장 25절)
(30) 가짜 친밀함에 속지 말 것
뭔가를 이해하려면 그것의 정반대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관해 계속해서 논하기 전에 먼저 다음 이야기를 통해 가짜 친밀함에 관해 살펴보자.
나는 리더십 콘퍼런스에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하와이에 도착했다. 그런데 내 호텔 방이 아직 손님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아서 수영장 옆에 있는 파라솔 아래에서 좀 쉬기로 했다. 다른 콘퍼런스에 참석 중인 한 여류 사업가도 자신의 방이 준비되기까지 기다리는 중이었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내가 기독교 작가이자 사역자라는 사실을 알고서 그녀는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에 관해 자세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녀가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녀는 자신이 ‘믿는’바를 자신있게 말했지만 그것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성령께 지혜를 요청했고, 잠시 후 성령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려 주셨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나는 이렇게 물었다. “저기 수영장 건너편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이시나요?” 그녀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필시 내가 느닷없이 주제를 바꿨기 때문이리라.) “네 보여요.” 나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남자의 이름은 짐이에요. 캘리포니아주 프레즈노에서 온 친구죠. 철저한 채식주의자랍니다. 저 친구의 꿈은 미국 수구 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하는 겁니다. 저 친구는 하루에 세 시간씩 수영장과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한답니다.
취미는 피클 볼과 스카이다이빙, 그림이죠. 저기 온수 풀에 있는 저 여성이 짐의 부인이랍니다. 이름은 베스고요. 짐보다 열 살이 적어요.” 내가 그 남자를 어찌 그리 잘 아는지 궁금해진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저분도 선생님과 함께 콘퍼런스에 오신 건가요?” 나는 즉시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녀의 호기심이 더 커졌다. “그러면 저분을 어떻게 그리 잘 아시나요?” 나는 그녀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며 대답했다. “사실 저는 저 사람을 만나 본 적도 없습니다.”
내 말에 그녀의 안색이 변하면서 의심의 빛이 번졌다. 아마도 나를 스토커나 사설탐정, 혹은 정부 요원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힘주어 말했다. “이것이 내가 저 남자에 관해서 ‘믿는’바랍니다.”
어안이 벙벙한 눈치였다. 나는 계속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선생님은 좀 전에 예수님에 관해 ‘믿는’ 바를 아주 자신 있게 말씀하셨죠. 하지만 그 말 대부분은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달라요. 저는 예수님을 알기에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했다. 하지만 크게 흔들린 기색이 역력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깊이 사랑하는 한 교회의 교인들에게 충격적인 직언을 한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11:4)
그는 다른 신이 아니라 “다른 예수”라고 말한다. 이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분을 ‘알지는’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왜일까? 그들은 뭐든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믿었고, 그 결과 진짜 예수님에게서 멀어진 삶을 살았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의 공상 속에서 그분의 본성을 바꿀 수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와 비슷한 짓을 저질렀다. 애굽(이집트)에서 나온 것은 세상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고전10:4~5)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그 모든 이유는 하나로 귀결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 거룩한 두려움의 부재였다.
모세가 40일 동안 산에 올라가 있을 때 이스라엘의 현장 리더인 아론은 황금 송아지를 만들었다. 우리 모두는 이 상황을 보며 “우상숭배!”라고 외칠 것이다. 우상숭배, 맞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잘 모르는 사실은, 아론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 송아지를 “엘로힘”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 히브리어 단어는 구약에서 2,606번 등장한다. 이 단어는 거짓 신들을 지칭할 수도 있지만, 열에 아홉은 ‘여호와’ 곧 한 분이신 참된 하나님을 가르킨다. 예를 들어, 이 단어는 창세기이 첫 번째 장에서 32번 나타나는데, 성경의 첫 구절은 이렇게 말한다. “태초에 하나님(엘로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들이 그 송아지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에서 엘로힘이라고 부른 것인지 거짓 신이라는 의미에서 엘로힘이라고 부른 것인지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대한 증거는 아론이 그 송아지를 “여호와”라고 부른 데서 발견된다.(출32:5)
이 표현은 한 분이신 참된 하나님의 신성한 이름이다. 이곳 말고는 성경 그 어디에서도 이 단어를 거짓 신의 이름으로 사용한 구절이 없다.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은 그 송아지를 ‘오시리스’나 ‘바알’, ‘이시스’ 같은 거짓 신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선포한다. “이분은 우리를 애굽 땅에서 구해 낸 분 곧 ‘여호와’이시다.” (출32:4)
어떻게 이렇게까지 어리석을 수 있는가? 왜 그들은 모세처럼 살아 계신 참된 하나님을 몰랐을까? 그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숱한 기적을 보았다. 그들은 내내 하나님이 만드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따라왔다. 그런데 왜? 답은 복잡하지 않다. 몇 달 전 하나님이 처음 산에서 내려와 자신을 소개하셨을 때 그들은 뒷걸음질하며 모세에게 부르짖었다.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신5:27)
모세가 얼마나 실망했을지 상상이 간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려는 열망이 어찌 이리 부족할 수 있는가?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한가. 모세는 그 답을 알고자 하나님께 이 문제를 아뢰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반응은 모세의 예상을 빗나가는 것이었다.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신5:28)
하나님은 탄식하셨다. 그들이 거룩한 두려움을 품기만 했다면 그분의 임재 안에 들어와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들과 그들의 자손이 다 잘 되었을 것이다. 이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리셨다.
가서 그들에게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이르고 너는 여기 내 곁에 서 있으라. 내가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네게 이르리니 (신명기 5장 30~31절)
이 명령에는 슬픔과 기쁨이 공존한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실로 슬픈 일이다. 이스라엘의 가장 어두운 순간은 황금 송아지를 만든 순간이나 약속의 땅 입성을 막은 악한 보고서를 내놓은 순간이 아니었다. 바로 이 순간이 이스라엘의 가장 어두운 순간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까이 불러 그분이 그들을 아는 것처럼 그들도 그분을 알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애굽(세상)에서 구해내셨다. 하지만 그들은 ‘거룩한 두려움이 없는 탓에’ 하나님의 손을 뿌리쳤다. 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
반면 모세로서는 기쁜 일이었다. 하나님께 가까이 서서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을 기회를 얻었으니까 말이다. 백성들이 각자의 장막으로 돌아간 사이에 그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초대 받았다.
내가 수영장에서 만난 그 여성은 ‘다른 예수’를 주장했고,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다른 예수’를 섬겼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하나님’을 따랐다. 어떤가? 패턴이 보이는가? 자기 멋대로 신을 만들고서 예수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하나님 우편에 계신 진짜 예수님은 모르는 것이 가능하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과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경험하고도 그런 오류에 빠졌다는 것이다.
심판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주라 부르지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 관해 하나님께 들었던 것과 똑같은 말을 듣게 될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내게서 떠나가라” 이 무리에게 일어날 일에 관한 예수님의 예언적인 말씀을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번 장의 첫머리에서 말했듯이, 그러고 나면 우리 주님과의 친밀함에서 거룩한 두려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장에서 이 주제를 다루어 보자.
핵심 말씀 :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고전 15:2)
시온의 대로 말씀과 기도의 집
테슈바 40일 경외 <34>
존 비비어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언 16장 25절)
(30) 가짜 친밀함에 속지 말 것
뭔가를 이해하려면 그것의 정반대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관해 계속해서 논하기 전에 먼저 다음 이야기를 통해 가짜 친밀함에 관해 살펴보자.
나는 리더십 콘퍼런스에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하와이에 도착했다. 그런데 내 호텔 방이 아직 손님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아서 수영장 옆에 있는 파라솔 아래에서 좀 쉬기로 했다. 다른 콘퍼런스에 참석 중인 한 여류 사업가도 자신의 방이 준비되기까지 기다리는 중이었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내가 기독교 작가이자 사역자라는 사실을 알고서 그녀는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에 관해 자세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녀가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녀는 자신이 ‘믿는’바를 자신있게 말했지만 그것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성령께 지혜를 요청했고, 잠시 후 성령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려 주셨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나는 이렇게 물었다. “저기 수영장 건너편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이시나요?” 그녀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필시 내가 느닷없이 주제를 바꿨기 때문이리라.) “네 보여요.” 나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남자의 이름은 짐이에요. 캘리포니아주 프레즈노에서 온 친구죠. 철저한 채식주의자랍니다. 저 친구의 꿈은 미국 수구 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하는 겁니다. 저 친구는 하루에 세 시간씩 수영장과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한답니다.
취미는 피클 볼과 스카이다이빙, 그림이죠. 저기 온수 풀에 있는 저 여성이 짐의 부인이랍니다. 이름은 베스고요. 짐보다 열 살이 적어요.” 내가 그 남자를 어찌 그리 잘 아는지 궁금해진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저분도 선생님과 함께 콘퍼런스에 오신 건가요?” 나는 즉시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녀의 호기심이 더 커졌다. “그러면 저분을 어떻게 그리 잘 아시나요?” 나는 그녀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며 대답했다. “사실 저는 저 사람을 만나 본 적도 없습니다.”
내 말에 그녀의 안색이 변하면서 의심의 빛이 번졌다. 아마도 나를 스토커나 사설탐정, 혹은 정부 요원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힘주어 말했다. “이것이 내가 저 남자에 관해서 ‘믿는’바랍니다.”
어안이 벙벙한 눈치였다. 나는 계속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선생님은 좀 전에 예수님에 관해 ‘믿는’ 바를 아주 자신 있게 말씀하셨죠. 하지만 그 말 대부분은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달라요. 저는 예수님을 알기에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했다. 하지만 크게 흔들린 기색이 역력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깊이 사랑하는 한 교회의 교인들에게 충격적인 직언을 한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11:4)
그는 다른 신이 아니라 “다른 예수”라고 말한다. 이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분을 ‘알지는’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왜일까? 그들은 뭐든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믿었고, 그 결과 진짜 예수님에게서 멀어진 삶을 살았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의 공상 속에서 그분의 본성을 바꿀 수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와 비슷한 짓을 저질렀다. 애굽(이집트)에서 나온 것은 세상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고전10:4~5)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그 모든 이유는 하나로 귀결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 거룩한 두려움의 부재였다.
모세가 40일 동안 산에 올라가 있을 때 이스라엘의 현장 리더인 아론은 황금 송아지를 만들었다. 우리 모두는 이 상황을 보며 “우상숭배!”라고 외칠 것이다. 우상숭배, 맞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잘 모르는 사실은, 아론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 송아지를 “엘로힘”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 히브리어 단어는 구약에서 2,606번 등장한다. 이 단어는 거짓 신들을 지칭할 수도 있지만, 열에 아홉은 ‘여호와’ 곧 한 분이신 참된 하나님을 가르킨다. 예를 들어, 이 단어는 창세기이 첫 번째 장에서 32번 나타나는데, 성경의 첫 구절은 이렇게 말한다. “태초에 하나님(엘로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들이 그 송아지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에서 엘로힘이라고 부른 것인지 거짓 신이라는 의미에서 엘로힘이라고 부른 것인지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대한 증거는 아론이 그 송아지를 “여호와”라고 부른 데서 발견된다.(출32:5)
이 표현은 한 분이신 참된 하나님의 신성한 이름이다. 이곳 말고는 성경 그 어디에서도 이 단어를 거짓 신의 이름으로 사용한 구절이 없다.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은 그 송아지를 ‘오시리스’나 ‘바알’, ‘이시스’ 같은 거짓 신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선포한다. “이분은 우리를 애굽 땅에서 구해 낸 분 곧 ‘여호와’이시다.” (출32:4)
어떻게 이렇게까지 어리석을 수 있는가? 왜 그들은 모세처럼 살아 계신 참된 하나님을 몰랐을까? 그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숱한 기적을 보았다. 그들은 내내 하나님이 만드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따라왔다. 그런데 왜? 답은 복잡하지 않다. 몇 달 전 하나님이 처음 산에서 내려와 자신을 소개하셨을 때 그들은 뒷걸음질하며 모세에게 부르짖었다.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신5:27)
모세가 얼마나 실망했을지 상상이 간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려는 열망이 어찌 이리 부족할 수 있는가?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한가. 모세는 그 답을 알고자 하나님께 이 문제를 아뢰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반응은 모세의 예상을 빗나가는 것이었다.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신5:28)
하나님은 탄식하셨다. 그들이 거룩한 두려움을 품기만 했다면 그분의 임재 안에 들어와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들과 그들의 자손이 다 잘 되었을 것이다. 이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리셨다.
가서 그들에게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이르고 너는 여기 내 곁에 서 있으라. 내가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네게 이르리니 (신명기 5장 30~31절)
이 명령에는 슬픔과 기쁨이 공존한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실로 슬픈 일이다. 이스라엘의 가장 어두운 순간은 황금 송아지를 만든 순간이나 약속의 땅 입성을 막은 악한 보고서를 내놓은 순간이 아니었다. 바로 이 순간이 이스라엘의 가장 어두운 순간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까이 불러 그분이 그들을 아는 것처럼 그들도 그분을 알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애굽(세상)에서 구해내셨다. 하지만 그들은 ‘거룩한 두려움이 없는 탓에’ 하나님의 손을 뿌리쳤다. 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
반면 모세로서는 기쁜 일이었다. 하나님께 가까이 서서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을 기회를 얻었으니까 말이다. 백성들이 각자의 장막으로 돌아간 사이에 그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초대 받았다.
내가 수영장에서 만난 그 여성은 ‘다른 예수’를 주장했고,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다른 예수’를 섬겼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하나님’을 따랐다. 어떤가? 패턴이 보이는가? 자기 멋대로 신을 만들고서 예수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하나님 우편에 계신 진짜 예수님은 모르는 것이 가능하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과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경험하고도 그런 오류에 빠졌다는 것이다.
심판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주라 부르지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 관해 하나님께 들었던 것과 똑같은 말을 듣게 될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내게서 떠나가라” 이 무리에게 일어날 일에 관한 예수님의 예언적인 말씀을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번 장의 첫머리에서 말했듯이, 그러고 나면 우리 주님과의 친밀함에서 거룩한 두려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장에서 이 주제를 다루어 보자.
핵심 말씀 :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고전 15:2)
1 week ago | [Y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