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대로 말씀과 기도의 집

테슈바 40일 경외 <37>
존 비비어
우리 자신의 생각에서 나오는 것은 우리를 깨우치거나 놀라게 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언제나 경이와 경외의 요소가 나타난다. (조이 도우슨)
(32) 하나님이 비밀을 털어 놓으신다

지난 두 장은 힘든 주제,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주제를 다루었다. 예수님께 “어서 하나님의 기쁨 속으로 들어 오렴” 하는 말을 들을 줄 기대했겠지만 “내게서 떠나가라”라는 말을 들을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가슴이 철렁했으리라. 하나님과 전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기만도 없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갑자기 깨닫고 충격에 빠질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과 연합한’ 것이 아니라 내내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었다는 현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찾아오는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는 대신, 이기적인 목적으로 그분의 말씀을 이용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미지근한 상태나 자기기만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깊은 사랑 안에서 이 끔찍한 상황을 경고하고 계신다.

이제 가짜 친밀함에 관해 충분히 이해했으니 창조주와의 진정한 친밀함이라는 아름다운 경험에 관한 논의를 즐겁게 시작해 보자. 이번 장에서 한 가지 시나리오를 살펴보기 시작할 텐데, 다음 몇 장에 걸쳐서 이 시나리오를 철저히 탐구해보자.

먼저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내게서 떠나가라”라는 끔찍한 말을 듣지 않을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면서도 하나님과 친밀해질 기회를 놓칠 수 있을까? 일단 답은 “그렇다”이다. 성경을 보며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히 탐구해 보자. 먼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부터 보자.

여호와의 친밀하심(비밀)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시편 25편 14절)

여기서 “친밀하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소드”로 “의논 혹은 계획”이라고 정의된다. 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 이 단어의 핵심은 내밀함이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획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냥 “비밀”이라고 해도 상관 없다. 이 구절은 이렇게 풀이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그분의 비밀을 알려 주신다.”

우리는 보통 누구에게 비밀을 털어놓는가? 지인인가? 아니면 절친한 친구인가? 답은 물론 절친한 친구일 것이다. 하나님도 다르시지 않다. 하나님은 친밀하고 가까운 친구들에게 그분의 비밀을 알려 주시며 그분과 가까운 친구란 거룩한 두려움을 품은 사람이다. ESV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한다. “하나님의 우정은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친구가 아니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친구가 아니시다. 구약에서부터 이 개념에 관해 살펴보자. 구약에 하나님의 친구(벗)로 소개된 두 사람이 있다. 바로 아브라함과 모세다. 또 다른 사람들은 없는가? 물론 있다. 노아, 다니엘, 에스더, 야곱, 다윗, 욥, 에녹, 이사야 등 하나님과 친밀히 동행했던 인물이 많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삶은 하나님과의 우정에서 이어지는 길을 누구보다도 잘 보여 주고 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 보자. 왜 그는 하나님의 친구로 불리는가? 그가 75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가장 간절한 소원인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그 약속은 즉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아내 사라가 기적적으로 이삭을 낳기까지 그는 2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토록 오래 기다린 끝에 아들을 품에 안았을 때의 깊은 감사와 기쁨이 머릿속에 그려지는가?

필시 해를 거듭할수록 부자 관계는 점점 더 끈끈해졌을 것이다. 막대한 부를 지닌 기쁨은 아들이 있는 기쁨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보다 소중한 것은 없었다. 그에게 아들은 목숨보다도 소중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무런 사전 경고도 없이 하나님은 기도하던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뭐라고? 단순히 하나님이 시키셨다고 해도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죽인다고? 게다가 아무런 이유도 듣지 않고서? 진심인가? 아브라함의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가는가?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그토록 어려운 요구를 하실 줄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생명보다도 더한 것을 요구하셨다. 바로 아브라함의 마음, 이건 도무지 말이 안되는 요구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 하나를 짚고 넘어가자. ‘우리’는 지금 이것이 시험이었음을 안다. 성경은 이 사건을 기술하는 시작점에서 이미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라고 진상을 밝힌다. (1절) 하지만 이것이 이미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읽는 독자들에게 불리한 점이다.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이야기를 여러번 듣거나 읽어서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것이 시험임을 몰랐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린다. 우리는 시험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험에서는 부정행위로 통과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내 주신 시험에서는 아무도 그럴 수 없다. 마음의 정화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숙제를 평소에 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시험에 통과하기는 어렵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광야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나님의 시험인 줄 알았다면 그들은 아마도 다르게 반응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후손들과 달랐다. 그에게는 그들에게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거룩한 두려움이었다.

어렵기만 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실로 아름답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는 곧장 행동에 돌입했다! 그는 며칠이나 몇 주간씩 고민하지 않았다. 친구들을 찾아가 의견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그와 이삭과 두 종은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챙겨서 길을 나섰다.

전날 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난 직후에는 그나마 순종하기가 쉬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틀하고 반나절 뒤에는 어떠했을까? 그 동안 하늘에서 한마디로 듣지 못한 뒤에는? 막상 가장 소중한 보물을 희생시킬 산 앞에 이르러서는?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그냥 하나님이 죽이라고 하시니까 죽여야 하는 상황.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산발치로 올라갔고, 종들에게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삭만을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가 제단을 쌓았다. 그러는 내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과 솟구치는 눈물을 억지로 감추었다. 제사에 필요한 준비를 하려면 온몸에 남아 있는 의지력과 정신력을 남김없이 짜내야 했다. 마침내 시간이 다가왔다.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실 일말의 희망조차 완전히 사라진 것만 같았다. 아브라함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 이삭을 묶고 칼을 들어 아들의 심장을 찌를 준비를 했다. 아무 이유도 듣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니 실행하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하나님의 사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 어떻게 알았을까? 아브라함이 이해가 되지 않고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손해가 되는 상황에서도 즉시 그리고 온전하게 순종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그제야 칼을 내려 놓고 이삭을 풀었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수풀에 걸린 숫양 한 마리가 보였다. 그의 입에서 “여호와 이레”라는 말이 나왔다. 이는 “하나님이 공급하실 것이다.”라는 뜻이다. (창22:14)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 순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분의 속성을 보여 주셨다. 이것은 전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은 왜 그러셨을까?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보겠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모든 독자는 나를 저자 존 비비어로 알고 있다. 개중에 콘퍼런스나 교회에서 내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은 나를 강사 존 비비어로 알 것이다. 하지만 나를 남편 존 비비어이자 애들 아빠 존 비비어, 할아버지 존 비비어, 가장 친한 친구 존 비비어, 사랑하는 사람 존 비비어로 아는 여성이 있다. 내 정체성의 이 모든 면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오직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만 이런 면을 안다. 특히, 마지막 측면은 오직 내 아내만 아는 것이다. 그날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더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다음 장에서 이 두 친구 사이의 놀라운 역학을 탐구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그런 관계를 누릴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보자.

핵심 말씀 : 여호와의 친밀하심(비밀)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시25:14)

1 week ago | [Y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