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슈바 40일 경외 <32>
존 비비어
사람이 하나님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분의 법을 망설임 없이 어기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 결과에 대한 두려움도 죄를 막지 못한다. (A. W. 토저)
(28) 민감한 양심을 지키라
이전 장에서 말했듯이 거룩한 두려움을 잃어 가고 있다는 초기 신호는 포착하기 힘들다. 이 과정이 워낙 교묘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이 중요한 문제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제가 될 만한 일을 하려고 할 때 마음속에서 울리는 경고음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우리 모두는 그 소리가 우리를 지키는 ‘양심’의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양심의 명료함과 강도가 변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우리 양심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하나님의 선물이다. 양심은 우리 ‘마음’의 중요한 일부다. 거룩한 두려움은 양심을 민감하게 만드는 반면, 거룩한 두려움이 없으면 양심은 무뎌진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경고한다.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내가 30대 초반에 한 유명한 목사 한 분이 나를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식사 도중 그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제가 여느 리더들처럼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 말에 그만 먹던 음식이 목에 걸릴 뻔 했다. 왜 내게 그런 질문을 던졌을까? 나는 젊었고, 그는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기간보다도 더 오래 목회를 해 왔다. 하지만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조용히 물었다. “성령님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즉시 음성이 들려왔다. “양심을 가장 소중한 보배로 여겨 잘 지키라고 말하라.” 나는 들은 대로 말했다. 그런데 이어서 갑자기 내 영혼에서 이런 말도 함께 나왔다. “목사님은 좋은 기회들을 마주할 겁니다. 하지만 그중에는 양심에 어긋나고 옳지 않고 문제의 소지가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만한 기회들도 있을 겁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양심의 경고음을 흘려듣지 마십시오. 양심을 무시하면 하나님에 대한 민감성을 잃을 겁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나는 “양심”이란 단어가 성경에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에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찾아보니 신약에서만도 그 단어가 약 30번 정도 등장했다. 예를 들어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디모데전서 1장 19절)
믿음의 파선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앞서 말한 그 점심 식사 자리 덕분에 나는 바울의 진술이 지니는 무게를 깨닫게 되었다. 그가 한 말은 많은 이들이 마무리를 잘하지 못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성경에서 양심을 지키라고 권고하는 것은 처음에는 양심이 좋은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씻어 준다. (딤전3:9, 히9:9,14)
이런 정화는 새로운 탄생이 주는 큰 유익 중 하나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양심에 관해 말하는데 그의 말은 잘못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렘17:9)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닮은 새로운 본성을 갖고 다시 태어난 사람들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새로운 마음을 가지지 못했다. 대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겔36:26) 예수님이 우리의 본성을 구속하고 그 분의 본성을 주실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기적 덕분에 우리는 믿을만한 양심을 지녔다. 문제는 그 양심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양심이 더러워지는가? 완전한 부패는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개 부패는 작은 문제에서 시작되곤 한다. 하지만 그 상황을 방치하면 끝내 파선으로 이어진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야고보서 1장 22절)
여기서도 순종을 이야기하고 있다. 앞서 우리는 거룩한 두려움이 이해가 가지 않거나 유익이 눈에 분명히 보이지 않거나 손해가 되어도 즉각적이고도 온전히 순종하게 만든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렇게 말씀에 따라 행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
잠시 이 점에 관해 생각해 보자. 지인을 속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심지어 가까운 친구와 가족도 속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속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런데 불순종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수록 진리의 보호막이 약해지고 도덕관념이 흐려진다. 자신이 해로운 길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점점 덜 인식하게 된다.
예를 들어 보겠다. 누군가를 헐뜯는 말을 한 적이 있는가? 그 순간, 당신은 마음을 찌르는 것 같은 날카로운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 느낌이 바로 양심의 소리다. 그때 당신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회개하고 즉시 자신의 말을 바로잡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행동을 정당화할 때가 너무도 많다. ‘뭐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우리는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쉽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그릇된 논리가 이기곤 한다. 그래서 내면의 경고음을 무시한 채 잘못을 바로 잡지 않는다. 그렇게 부패 과정이 시작되고 양심의 민감도는 점점 약해지기 시작한다.
다음번에 누군가를 비방할 때는 칼에 찔리는 느낌이 나지 않는다. 그냥 마음을 강하게 꼬집히는 느낌 정도다. 양심이 다시 목소리를 내지만 이번에는 전만큼 분명하지 않다. 이제 내적 갈등이 전만큼 세지 않다. 그래서 경고음을 무시하고 자신의 말을 정당화하기가 더 쉽다. 그렇게 마음은 더 더러워지고 양심의 민감도는 더 약해진다.
누군가를 다시 비방하면 이번에는 강하게 꼬집히는 느낌조차 없다. 그냥 살짝 따끔거리기만 한다. 아니, 때로는 그것마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자신을 설득할 필요도 없다. 양심의 소리가 너무 작아서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가 훨씬 더 쉬워진다. 양심의 민감도는 바닥에 가까워진다.
마침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양심이 완전히 마비된다. 분별력이 흐려지는 수준을 넘어 아예 사라진다. 이제 도덕관념은 없다. 믿음의 파선이 임박했다. 이제 우리는 완전한 자기기만에 빠진다.
그런데 그저 회개하기만 하면 이런 결과를 피할 수 있다. 마음을 완전히 바꾸기만 하면 된다. 우리의 지혜가 쓸데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굳게 부여잡으면 된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28:13)
자비와 회복은 언제라도 가능하지만 거룩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회개를 미룬다. 그런 사람의 마음은 양심의 자각에 점점 무뎌져서 위험을 자초한다. 반면,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양심의 경고음에 귀를 기울여 재빨리 회개한다. 그는 지체할수록 위험하다는 사실을 안다.
성경에도 우리 시대에도 양심의 소리를 들었으나 회개하기를 미룬 사람들이 많다. 마치 러시안 룰렛과 비슷하다. 한 번은 파선을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계속하다가는 언제 양심의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지 알 수 없다. 바울은 이렇게 탄식한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디모데전서 4장 1~2절)
뜨겁게 달궈진 쇠로 인간의 살을 지지면 모든 감각을 잃어버린다. 양심도 마찬가지다. 이제 자신의 진짜 모습과 다른 이미지를 표출하면서도 전혀 자각이 없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울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그런 지경에 빠졌다.
불로 지질 때 나타나는 또 다른 결과는 차단되는 것이다. 고기를 구우면 육즙이 빠져나가지 못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롬9:1) 신자가 양심에 화인을 맞으면 더 이상 성령과 소통할 수 없다. 육즙이 고기를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의 증언이 양심을 뚫고 우리의 영혼에 이를 수 없다. 그러면 인생의 내비게이션 없이 살게 된다. 그 결과는 물론 멸망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한 많은 진술 중 두가지를 유심히 읽어보라.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행23:1)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행24:16) 우리의 양심을 부지런히 지키자.
핵심 말씀 :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10:22)
시온의 대로 말씀과 기도의 집
테슈바 40일 경외 <32>
존 비비어
사람이 하나님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분의 법을 망설임 없이 어기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 결과에 대한 두려움도 죄를 막지 못한다. (A. W. 토저)
(28) 민감한 양심을 지키라
이전 장에서 말했듯이 거룩한 두려움을 잃어 가고 있다는 초기 신호는 포착하기 힘들다. 이 과정이 워낙 교묘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이 중요한 문제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제가 될 만한 일을 하려고 할 때 마음속에서 울리는 경고음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우리 모두는 그 소리가 우리를 지키는 ‘양심’의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양심의 명료함과 강도가 변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우리 양심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하나님의 선물이다. 양심은 우리 ‘마음’의 중요한 일부다. 거룩한 두려움은 양심을 민감하게 만드는 반면, 거룩한 두려움이 없으면 양심은 무뎌진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경고한다.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내가 30대 초반에 한 유명한 목사 한 분이 나를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식사 도중 그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제가 여느 리더들처럼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 말에 그만 먹던 음식이 목에 걸릴 뻔 했다. 왜 내게 그런 질문을 던졌을까? 나는 젊었고, 그는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기간보다도 더 오래 목회를 해 왔다. 하지만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조용히 물었다. “성령님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즉시 음성이 들려왔다. “양심을 가장 소중한 보배로 여겨 잘 지키라고 말하라.” 나는 들은 대로 말했다. 그런데 이어서 갑자기 내 영혼에서 이런 말도 함께 나왔다. “목사님은 좋은 기회들을 마주할 겁니다. 하지만 그중에는 양심에 어긋나고 옳지 않고 문제의 소지가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만한 기회들도 있을 겁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양심의 경고음을 흘려듣지 마십시오. 양심을 무시하면 하나님에 대한 민감성을 잃을 겁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나는 “양심”이란 단어가 성경에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에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찾아보니 신약에서만도 그 단어가 약 30번 정도 등장했다. 예를 들어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디모데전서 1장 19절)
믿음의 파선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앞서 말한 그 점심 식사 자리 덕분에 나는 바울의 진술이 지니는 무게를 깨닫게 되었다. 그가 한 말은 많은 이들이 마무리를 잘하지 못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성경에서 양심을 지키라고 권고하는 것은 처음에는 양심이 좋은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씻어 준다. (딤전3:9, 히9:9,14)
이런 정화는 새로운 탄생이 주는 큰 유익 중 하나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양심에 관해 말하는데 그의 말은 잘못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렘17:9)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닮은 새로운 본성을 갖고 다시 태어난 사람들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새로운 마음을 가지지 못했다. 대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겔36:26) 예수님이 우리의 본성을 구속하고 그 분의 본성을 주실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기적 덕분에 우리는 믿을만한 양심을 지녔다. 문제는 그 양심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양심이 더러워지는가? 완전한 부패는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개 부패는 작은 문제에서 시작되곤 한다. 하지만 그 상황을 방치하면 끝내 파선으로 이어진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야고보서 1장 22절)
여기서도 순종을 이야기하고 있다. 앞서 우리는 거룩한 두려움이 이해가 가지 않거나 유익이 눈에 분명히 보이지 않거나 손해가 되어도 즉각적이고도 온전히 순종하게 만든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렇게 말씀에 따라 행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
잠시 이 점에 관해 생각해 보자. 지인을 속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심지어 가까운 친구와 가족도 속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속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런데 불순종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수록 진리의 보호막이 약해지고 도덕관념이 흐려진다. 자신이 해로운 길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점점 덜 인식하게 된다.
예를 들어 보겠다. 누군가를 헐뜯는 말을 한 적이 있는가? 그 순간, 당신은 마음을 찌르는 것 같은 날카로운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 느낌이 바로 양심의 소리다. 그때 당신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회개하고 즉시 자신의 말을 바로잡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행동을 정당화할 때가 너무도 많다. ‘뭐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우리는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쉽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그릇된 논리가 이기곤 한다. 그래서 내면의 경고음을 무시한 채 잘못을 바로 잡지 않는다. 그렇게 부패 과정이 시작되고 양심의 민감도는 점점 약해지기 시작한다.
다음번에 누군가를 비방할 때는 칼에 찔리는 느낌이 나지 않는다. 그냥 마음을 강하게 꼬집히는 느낌 정도다. 양심이 다시 목소리를 내지만 이번에는 전만큼 분명하지 않다. 이제 내적 갈등이 전만큼 세지 않다. 그래서 경고음을 무시하고 자신의 말을 정당화하기가 더 쉽다. 그렇게 마음은 더 더러워지고 양심의 민감도는 더 약해진다.
누군가를 다시 비방하면 이번에는 강하게 꼬집히는 느낌조차 없다. 그냥 살짝 따끔거리기만 한다. 아니, 때로는 그것마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자신을 설득할 필요도 없다. 양심의 소리가 너무 작아서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가 훨씬 더 쉬워진다. 양심의 민감도는 바닥에 가까워진다.
마침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양심이 완전히 마비된다. 분별력이 흐려지는 수준을 넘어 아예 사라진다. 이제 도덕관념은 없다. 믿음의 파선이 임박했다. 이제 우리는 완전한 자기기만에 빠진다.
그런데 그저 회개하기만 하면 이런 결과를 피할 수 있다. 마음을 완전히 바꾸기만 하면 된다. 우리의 지혜가 쓸데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굳게 부여잡으면 된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28:13)
자비와 회복은 언제라도 가능하지만 거룩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회개를 미룬다. 그런 사람의 마음은 양심의 자각에 점점 무뎌져서 위험을 자초한다. 반면,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양심의 경고음에 귀를 기울여 재빨리 회개한다. 그는 지체할수록 위험하다는 사실을 안다.
성경에도 우리 시대에도 양심의 소리를 들었으나 회개하기를 미룬 사람들이 많다. 마치 러시안 룰렛과 비슷하다. 한 번은 파선을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계속하다가는 언제 양심의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지 알 수 없다. 바울은 이렇게 탄식한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디모데전서 4장 1~2절)
뜨겁게 달궈진 쇠로 인간의 살을 지지면 모든 감각을 잃어버린다. 양심도 마찬가지다. 이제 자신의 진짜 모습과 다른 이미지를 표출하면서도 전혀 자각이 없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울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그런 지경에 빠졌다.
불로 지질 때 나타나는 또 다른 결과는 차단되는 것이다. 고기를 구우면 육즙이 빠져나가지 못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롬9:1) 신자가 양심에 화인을 맞으면 더 이상 성령과 소통할 수 없다. 육즙이 고기를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의 증언이 양심을 뚫고 우리의 영혼에 이를 수 없다. 그러면 인생의 내비게이션 없이 살게 된다. 그 결과는 물론 멸망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한 많은 진술 중 두가지를 유심히 읽어보라.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행23:1)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행24:16) 우리의 양심을 부지런히 지키자.
핵심 말씀 :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10:22)
1 week ago | [Y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