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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禪

2025. 8. 16 .(토)
스님께서 올려주신 유튜브 채널영상
(인공지능이 창의적으로 느껴지는 이유)

인공지능이 더 창의적인 바둑을 두는 것 같지?
알파고 마스터 버전을 보면서 알았죠,
왜 그랬는지를.
알파고 마스터가 극 초반에
이제 3-3을 판다고 해요. 그 수를 두는데, 우리가 그 수는 안 좋다고 어릴 때부터 배우는 수예요.
근데 전혀 못 둘 수는 아니죠.
당연히 어릴 때 그렇게 배워놓으니까요. 틀을 만든 거죠, 쉽게 말해서.
근데 인공지능이 그런 틀이 있습니까?
제가 못 뒀잖아요.
결국은 그래서 궁금해서 찾아봤어요.
나는 못 뒀지만 다른 기사들은 있겠지. 없습니다.
아무도 못 뒀어요.

이게 생각을 하면 그렇게 어려운 수가 아닌 거예요. 어릴 때 ‘이건 안 되는 수야’ 하니까 커서도 못 두는 거죠.
그러니까 프로가 되고 성적을 냈지만도
그 수를 못 두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인간의 고정관념이라는 걸 명확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에요. 고정관념이 없어서 이게 더 창의적으로 보이는 거예요. 자연스럽고. 그러니까 우리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AI와 협업을 해야 된다.

(유트브 채널 /요약문)
인공지능이 창의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고정관념의 부재 때문입니다.
알파고 마스터가 둔 3-3 침투는 인간이
어릴 때부터 ‘안 좋은 수’라고 배워온 방식이었지만,
AI는 이러한 틀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프로 기사조차 두지 못했던 수를 AI는 자유롭게 구사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인간의 고정관념이 창의성을 제한하는 반면, AI는 데이터 기반으로 최적의 수를 찾아내기에 더욱 창의적인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AI의 창의성은 우리에게 새로운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1 month ago (edited) | [YT]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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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수행자의 독백12>

7.31. 차담 법문을 듣고,
매일의 작은 실천들이 모여
조용하지만 단단한 용기를 키워주었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걷는 나를 보며
그래도 괜찮아 하는 마음이 스며들었고, 두려움은 조금씩 용기로 바뀌었으며,
반복은 마침내 지혜가 되어가고 있으며,
그 마음으로 용기내어 글을 올립니다.

마음공부라는 게 처음엔 참 낯설고 어려웠습니다.
‘내가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싶었던 때가 많았지만,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어느 순간 보면
또 하고 있고, 처음엔 큰 결심이 있어야만 겨우 시작할 수 있었던 일들이
어느새 **‘그냥 하게 되는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그게 변화다”라고 말하겠지만,
저는 여전히 두렵고 조심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또 한 번 용기 내어 제 이야기를 올릴 수 있었던 건,
함께 공부한 도반님들의 진심이 제 마음에 깊이 와닿았기 때문입니다.
그 따뜻한 마음이 제게 용기가 되었고,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다시 한 번
마음을 내어 글을 씁니다.

이번 법문을 들으며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반복’**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스님께서 “밥도 하루 세 번 먹듯이, 이 공부도 매일 반복해야 한다”고 하셨듯이,
이 공부는 한두 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해 매일 새롭게 반복하는 실천임을 되새기게 됩니다.

돌이켜보면, 스님의 법문을 알지 못했던
그 시절에도 괴로움 속에서 무언가 해보려는 마음으로 매일 새벽 108배, 휴일이면 산에 오르며 나름대로의 작은 실천을 반복하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이게 맞는 걸까’ 확신도 없고,
그저 버티듯 하던 날들이 많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모든 과정이
스님의 가르침을 만나기 위한 준비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무언가를 찾고, 걷고, 반복했던 그 시간들이 지금 이 공부로 이어져 주었고, 저를 다시 한 번 마음을 내는 자리로 이끌어준 것 같습니다.

스님의 첫 법문을 들었을 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먹먹함이 가슴에 남았던 기억이 납니다.
희미하게나마 뭔가 보이기 시작했고,
제 안에서 꿈틀대는 생명 같은 어떤 것이 깨어났습니다.

스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 항상하지만, 조건과 상태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그 흐름을 꿰뚫어보는 것이 수행이며,
삶을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처럼, 저는 그동안 내 마음을 바라보지 못한 채 외부 탓만 하며 살아왔던 자신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안전한 틀 안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생각,
도덕과 기준, 사회적 관념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 속에서 ‘괜찮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살았던 시간들.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꽃을 달고 사는 중생’,
그 모습이 바로 저였습니다.

그러나 매일 법문을 반복해서 듣다 보니,
그 말씀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들리기 시작했고, 조금씩 실천으로 이어졌습니다.
두려움 많았던 제가 마음을 보고, 두들기고, 걷다 보니 두려움은 점점 용기로 바뀌었고,
스스로 만들어낸 틀은 서서히 무너져
마음에 시원함과 가벼움이 찾아왔습니다.

스님은 말씀하십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슬픔도, 기쁨도, 우울도 — 모두 내 마음의 집착에서 비롯된 것임을,
저 또한 내 감정의 원인을 직면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며
조금씩 배워가고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기쁜 나도, 슬픈 나도,
우울한 나도 모두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로 느껴지고, 그 모든 ‘나’를 감사히 껴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공부는 단지 듣는 공부가 아니라,
이치를 정확히 알고, 실천하며, 삶 속에서 확인해 가는 공부라는 걸
저는 날마다 경험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이 언제나 매끄럽지만은 않았습니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되돌아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스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평온할 때도, 큰 파도가 칠 때도
늘 깨어서 나를 바라보는 연습, 그게 진짜 마음공부예요.”
이 공부는 완벽하게 해내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한 걸음을 내딛는 것,
그 자체가 공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올리는 일도, 여전히 저에겐 용기의 실천입니다. 예전엔 큰 결심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마음을 내는 일이 매일의 습관이 되었고, 그 습관은 제 삶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바꾸어주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예전처럼 쉽게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
무엇보다 ‘내가 쥐고 있던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연습이
저를 조금씩 자유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 걸음, 또 한 걸음씩
반복하며 나아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한결 따뜻해졌습니다.

이 공부는 결국, 이치를 알고 실천하며, 반복 속에서 삶이 바뀌는 길임을
오늘도 다시금 깊이 새깁니다.

2 months ago | [YT]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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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수행자의 독백11>

7.31.(목) 밴드 차담 오전 12:00

본 글은 밴드 법문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으로, 부정확하거나 미흡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너그러이 양해 바랍니다.

“우리 마음은 항상해요.
그러나 그 마음의 작용은 조건과 상태에 따라 끊임없이 변합니다.”

“이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 그게 바로 수행이에요.”

“삶을 바로 세우는 첫걸음은, 마음을 꿰뚫어보는 데서부터 시작해요.”

“밥도 하루 세 번 먹듯이, 이 공부도 매일 반복해야 해요. 다 아는 얘기지만 잊어버리니까요. 잊으면 다시 놓치게 되니까요.”

“우리는 괴롭고 슬플 때 대부분 바깥에서 원인을 찾습니다. 그러나 모든 원인은 내 마음의 집착에서 비롯돼요.”

“내 뜻과 맞으면 기쁘고, 내 뜻과 어긋나면 괴로워요.”

“반드시, 마음이 어떤 상태가 되었을 때는, 거기에 딱 맞는 이유가 있어요.”

“원인 없는 결과는 없어요.”

“그 원인을 정확히 보고, 수용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마음은 다시 평안해져요.

‘아, 이래서 이랬구나’ 하고 지혜가 일어나요.”

“그 지혜는 마치 일기예보처럼 다가올 마음의 날씨를 예측하게 해줘요.”

“마음이 평온할 때도, 큰 파도가 칠 때도, 늘 깨어서 나를 바라보는 연습, 그게 진짜 마음공부예요.”

“사는 거예요. 살리는 거예요.”
- 깨어서 나를 바라보는 삶이 곧 사는것이고,
- 그 삶은 나 자신을 살리고, 관계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길입니다.
- 살아 있는 공부는 결국 ‘지금 이 순간
깨어있음’에서 시작됩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어느새 저처럼
꽃 하나씩 달고 다니게 됩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뭐 다 하는 얘기 맨날 매일매일 반복합니다. 할 일이 없으니까. 맨날 우리 똑같은 밥 먹어도 하루 세끼는 먹어야 되잖아요. 많이 들어서 이제 다들 알고 계시는 내용이긴 한데, 그래도 자꾸 새기는 뜻으로 반복하는 거죠. 반복. 새롭고 또 뭔가 다른 얘기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거 무슨 공부하는 거예요? 마음 공부하죠. 마음. 마음 공부하는 겁니다. 요즘은 일기예보가 있어서 그래도 좀 날씨를, 기상을 예측할 수 있죠. 태풍이 분다, 비가 온다, 장마다, 폭염이다. 예측 가능하죠. 굉장히 살기 좋아졌잖아요. 옛날 시대는 일기예보가 없었기 때문에 속수무책. 그 기상 변화를 우리가 받아들이고 또 당할 수밖에 없었죠.

태풍이 불면 우리는 태풍에 당할 수밖에 없었고, 폭우가 내린다면 폭우에 우리는 그대로 속수무책 당하는 거고. 그래서 옛날에 우리 이런 일기예보가 없었던 옛날 시절, 특히 농경 사회에서는 특히 기상이 더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그래서 이제 제를 지내는... 제를. 옛날 시대에는 제를 지내는 게 전부 조상한테 지내는 게 아니잖아요. 조선시대 유교문화에 들어와서 조상한테 지내는 거고, 조선시대 그 이전의 제는 다 어디에다가 제를 지냈을까요? 하늘에 지냈습니다. 조선시대에 와서 조상한테 지내는 거예요. 제사 문화는 다 하늘에 제를 지냈는데, 하늘에 왜 제를 지냈을까요? 이 날씨, 기상을 좀 잘 봐주십사 하고 다 이게 하늘로 제를 지내는 거죠. 그만큼 우리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거죠. 그러나 이제 지금은 하늘에 제를 안 지내죠. 인공위성이 다 예측하게 해 주니까. 우리 마음 공부도 사실은 그런 맥락에서 같은 원리입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 공부를 하는 이유는 나한테 닥칠, 또 이미 닥친 이런 모든 문제를 예측 가능하게 해 주는 거죠. 예측 가능하게. 막을 수는 없어요. 태풍을 막을 수 있나요? 기상이 아무리 일기예보가 발달했다 하더라도, 문명이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기상 이변을 막을 순 없습니다. 우리 이 마음 공부도 어떤 나한테 일어나는 모든 재앙, 액운 소멸시키는 게 아니에요. 액운 소멸. 그래서 절에 다니신 분들 기도도 많이 하죠. 모두 나한테 이런 재앙과 불행과 액운을 소멸하게 해 달라, 이렇게 기도하는데, 소멸시켜 줄 수는 없어요. 다만 우리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 또 우리가 마음 공부를 하는 이유는, 목적은 예측 가능하게 해서 거기에 잘 대처할 수 있게 하는 게 우리 마음 공부죠. 기존의 우리 기복불교하고 완전히 다르죠. 기복불교는 아예 그런 일이 나한테 안 일어나게 해주세요, 라고 싹싹 비는 거잖아요. 인과를 안 받으려고 공부하셨잖아요. 나한테 오는 건 막을 수는 없다. 이건 불가항력인 겁니다. 막는 공부가 아니고, 예측 가능하게 해서 우리는 내가 그러한 모든 재앙으로부터 예측 가능하면 잘 준비, 대처를 할 수 있는 거죠. 그것뿐입니다. 깨달았다고 해서 받을 인과의 과보를 안 받고, 나한테 오는 재앙을 없애고 할 수 있나요? 없어요. 깨달았다고 해서 안 아프고, 깨달았다고 해서 내 신변에 문제가 안 일어나는 건 아니죠. 이 또한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왜 깨닫는가. 깨달으면 우리가 안 죽나요? 병이 안 드나요? 안 늙어요? 아니죠. 안 늙고 병이 안 들고 안 죽는 공부가 아니다. 이거는. 예측 가능하다는 건 바로 아는 거죠. 정확하게 아는 거죠. 정확하게 알아서 우리는 그걸 잘 대처하는 공부다. 하늘의 이 기상이 우리가 일기예보가 없으면 우리가 잘 대처할 수 없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도. 우리 마음을 참 그렇게 묘사도 합니다. 참 묘하고 묘하다. 마음은 왜 묘하고 묘하냐? 시시각각 변하니까. 우리 마음의 상태가 변하는 거하고, 그다음에 소멸되고 없어지는 건 달라요. 우리 마음은 시시각각 변한다, 안 변한다? 변합니다. 그걸 우리 마음의 상태라고 이름하죠. 우리 마음 자체가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우리 마음 자체는 항상 존재하는데, 마음의 상태는 시시각각 계속 변하게 되어 있어요. 자, 마음은 항상 하죠. 항상 한 듯. 마음은 마음 자체는 항상 한데, 마음의 상태, 그걸 우리가 보통 마음의 상태를 감정, 기분 혹은 여러 가지로 이름하는 거죠. 마음의 상태를 보통 감정과 기분이라고 하는 거죠. 이런 우리 마음의 감정, 마음의 이런 건 우리가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때문에, 이걸 우리가 막을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깨달았다고 해서 우리 마음이 안 변하게 꽉 붙들어 매는 그런 건 없습니다. 다 때가 되면 우리 마음은 좋았다가 안 좋았다가, 업 됐다가 다운됐다가, 우리 마음에, 우리 마음 상태는 기뻤다가 슬펐다가, 또 흥분됐다가 우울했다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2 months ago | [YT]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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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구우목>
사람으로 태어나서 공부를 알고서도 이루지 않으면
반드시 통곡하며 피눈물 흘리면서 슬피 울 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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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가 모두 물로 덮여 있는데, 어떤 사람이 구멍이 뚫린 나무판 하나를 물에 던져 넣었다고 상상해보라.

그 나무판은 바람에 휩쓸려 북쪽으로, 남쪽으로, 동쪽으로 그리고 서쪽으로 떠다니게 될 것이다.

그런데 눈 먼 거북이 100년에 한 번씩 수면에 떠오른다고 하자.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눈 먼 거북이 100년에 한 번 수면에 떠올라 나무판에 있는 구멍에 머리를 끼워 넣을수 있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런 일은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자, 인간으로 태어나게 될 가능성도 그와 똑같이 어려운 일이다. 여래(如來)ㆍ거룩한 분ㆍ완벽하게 깨달은 붓다가 세상에 출현할 가능성도 그와 똑같이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여래가 설한 법法이 [세상에서] 가르쳐지게 될 가능성도 그와 똑같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이제 인간으로 태어났고,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여, 진리[法]를 가르쳐 왔다.

그러므로 정진하여 고성제苦聖諦 ‧ 집성제集聖諦 ‧ 멸성제滅聖諦와 도성제道聖諦,
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를 깨닫도록 하라.

2 months ago | [YT]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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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수행자의 독백 10-1>


2025. 7. 24.(목) 오후 7:09
불교의 목적(2).
1. 존재의 실체증명
2. 존재의 작용방법

스님의 불교의 목적 이 법문을 들으며,

평소 살아오며 품고 있던 마음이
조금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느낌이었습니다.

스님께서 “걸으면 걷는 줄 알고, 먹으면 먹는 줄 알고, 말하면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고 하신 그 말씀 안에,
이미 삶 전체를 바로 쓰는 길이 담겨 있다는 것이 조용히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그저 흘러가듯 해오던 일상 하나하나가
실은 공부였고, 또 공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스님의 법문은 언제나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부드럽게 비춰주고,
말 없는 지도처럼
걸어가는 발걸음을 정리해주는 것 같습니다.

혹 제가, 스님의 원문과 조금 다르더라도,
그 말씀을 삶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눈 것이니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법문을 함께 나누며,
우리 모두가 제자리에서 더 환하게 깨어 있기를 소망합니다.
고맙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제에 이어서, 즉 연결해가지고 공부를 마무리 지어봅시다.
어제 우리가 했던 내용을 다시 재정리해 보면,
물론 말이 익숙치 않고 또 이런 용어가 익숙치 않아서 똑같은 말을 안 해도 되는데,
무슨 뜻으로 우리가 이야기가 되고 있나,
내용을 우리가 지금 주고받을 수 있잖아요.

여러분, 이 내용의 흐름을 그냥 가볍게 따라오시면 돼요. 외우려고 하면 안 돼요.
계속 반복할 거니까,
계속 이 내용의 흐름을 따라오면 되는 거예요. 외울 필요 없어요.

우리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죠.
그러니까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이렇게 연결시키는 거예요.
그럼 뭘 깨달을 거냐,
이게 나오겠죠, 자연히.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그럼 무엇을 깨닫는 거냐.

지금 존재하는 이것들이 도대체 뭐냐,
이게 신기하잖아요.
왜 나무는 이렇게 존재하고,
왜 하늘은 저렇게 존재하고,
왜 돌멩이는 저렇게 존재하고,
왜 저 텃밭에 식물들은 저렇게 존재하고, 그죠?
왜 산은 저렇게 존재하고,
저 구름은 왜 저렇게 존재하고.

근데 ‘나’라는 것은 또 왜 이렇게 존재하고.
이런 모든 것들이,
모든 존재들에 대한 성찰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존재들의 실체가 뭐냐.
"도대체 저게 도대체 뭐지?"
이걸 생각하는 거, 이걸 깨닫는 거예요.

왜, 저게 어디서 왔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잘 모르잖아요.
누가 만들었는지, 어디서 샀는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르니까
우리가 뭘 알아야 그걸 사용을 할 거 아닙니까?

보살님도 공양간에서 누가 택배를 보냈어.
그러면 그게 뭔지 일단 알아봐야겠죠.
"이게 뭐가 왔지?" 뜯어봐야 할 거 아니에요.

그리고 여기 뭔지를 처음 보는 거면,
이리저리 만져도 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좀 약간 이렇게 잘라도 보고 해봐야 할 거예요.

처음 본 거라면, "도대체 이게 뭐꼬?"
그게 우리가 말하는 존재에 대한 성찰이란 말이에요. 존재의 실체를 밝힌다.

그래서 우리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데,
뭘 깨닫는 거냐.
모든 존재의 실체를 증명하는 것.
단순히 ‘나’를 가리키는 것만 아니에요.
모든 존재라고 하는 거죠.

모든 존재들의 실체, 도대체 뭐냐 저게.
이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나도 문득 태어났는데,
그냥 이게 내가 뭔지도 모르고 막 살아가면,
이게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겠죠.

“뭐지?” 한번 알아보자는 게 깨달음이에요. 그렇죠? 이게 자연스럽고 너무 상식적인 얘기잖아요. 우리가 뭘 봐도,
일단 이게 뭐야?라고 봐야 쓸 거 아닙니까?

어려운 얘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데,
뭘 깨닫는 거냐?
모든 존재의 실체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에요. 모든 존재의 실체를.
그러니까 쉬운 말로 하면,
"저게 뭔지, 이게 뭔지 정확하게 알자."는 거죠. 알아야 쓸 수 있으니까.
모르면 못 써요.
모르면 다른데다 쓰는 거죠.

이거 구워 먹어야 될 걸 삶아 먹게 되고,
삶아 먹어야 될 걸 그냥 생으로 먹게 되고,
모르고 그런다는 거죠.

무슨 말씀인지 이해되죠?
그래서 우리 불교는 뭐다? 깨달음.
불교라는 건 깨달음의 종교다.
뭘 깨닫느냐. 그렇ㅈ

불교는 뭐다.
네 그렇게 말을 이어가시면데요.
부처님 가르침을 불교라 하죠.
불교는 뭐다?
그럼 뭘 깨닫는 거냐. 그렇죠.

그래서 모든 존재의 실체를 정확하게
아는 것. 그죠?
그러고 나면 이 존재의 실체를 알았으면,
이걸 우리가 왜 알아요? 뭐 하려고?
쓸려고. 작용하려고. 사용하려고.
용도에 맞게끔.

그래서 첫 번째는
이 모든 존재의 실체를 정확하게 아는 것.

두 번째는
이 존재의 실체를 알았으면 바르게 쓰는 것. 작용하는 방법.

이거, 불교의 전부란 말이에요.
불교의 전부라 할 수 없죠.
이게 우리 인생의 전부예요.

인생. 인생이 전부 이것뿐이에요.
이 세상 다 이미 있는 거잖아.
이거 뭐, 산을 우리가 만들었어요?
이건 본래 있는 건데,
우리는 이걸 정확하게 알아서 정확하게 사용만 하면 되는 거라고.
우리가 만든 게 아니라, 다 이미 만들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이 정도는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해야 되는 일인 거죠.
그걸 우리 부처님은 최소한의 이 가르침을 전해주신 거예요.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최소한 요 정도는 알고 살아야 한다.
이것도 모르고 살면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중생이라 그래요.
근데 옛날 말로는 중생을 ‘짐생’이라고 했어. 짐생. 짐생이 짐승이 된 거예요.
이 정도도 모르고 숨 쉬고 살아가면,
그건 짐생이다. 짐생과 같다.
이 정도는 알아야 사람이 사람답다 하겠구나.

그러니까 정확히 보면,
불교는 어떤 특별하고 신비한 게 아니에요.

사람이 사람으로서 배워야 할
최소한의 바른 견해예요.
사람이 사람으로서 알아야 할
최소한의 이치란 말이에요.

불교다. 불교는 뭐다?
정확하게 말 흐릿해 하지 말고,
끝까지 정확하게 하세요.
불교는 뭐다? 깨달음의 종교.
불교는 뭐다? 깨달음의 종교.
"어, 그럼 뭘 깨닫는 거냐?"
"어, 왜? 뭐 하려고?"
그렇죠. 바르게 쓰려고, 제대로 쓰려고.
이게 불교의 전부예요.

그래서 불교 하면 뭡니까?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뭘 깨닫은 거냐?
모든 존재의 실체.
모든 존재의 실체를 아는 겁니다.
모든 존재의 실체, 왜 이 모든 존재를 잘, 제대로, 맞게 사용하려고 하죠?
얼마나 쉬워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 배워서 아는 게 아니죠. 그냥 이 말만 조금 정리하면 쉬운 거예요.

그런데 어제 우리가 이제 이 존재 실체를 배웠죠. 그러면 이 존재라는 게 뭐냐 보니까, 모든 존재의 원리가 똑같더라.
모든 존재의 원리가! 사람만 그런 게 아니다. 동물도 그렇고, 식물도 그렇고, 저 생명 없는 바윗돌도 그렇고, 모든 존재.
그래서 유정, 무정이라 그래요.

우리 정신이 있는 건, 숨 쉬는 건 유정체.
저 돌멩이와 같은 건 무정체.
그러니까 유정, 무정 모든 존재들.
모든 존재들은 존재의 원리가 다 똑같더라. 어제 배운 거죠.

그래서 모든 존재, 그 원리. 첫 번째,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게 하나가 있고, ‘근원’. 근원.
그 다음에 이 근원에서 생겨난 결과물이 있어요, ‘결과물’.
그리고 이 근원에서 결과물이 만들어지도록 연결시키는 줄기 같은 게 있단 말이에요.

모든 존재가 다 이와 같이 만들어졌더라. 예를 들면, 고추대에서 고추가 열리려면
첫 번째 뭐가 있어야 돼요? 고추에 뿌리가 있어야 되는 거죠, ‘뿌리’. 그 다음에 뭐가 있어야 돼요? ‘줄기’가 있어야지. 그 다음에 뭐가 있는 거죠? 고추가 있는거죠.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그 근원된 뿌리가 있고, 그 다음에 이 뿌리에서 우리는 결국 열매, ‘열매’가 맺히는데, 뿌리에서 그냥 열매가 맺히지 않더라. 반드시 연결하는 ‘연결체’. 보통 이와 같이 있는 겁니다.

바다에서 파도가 치죠?
그럼 연결체 뭐가 있어야 돼요?
‘바람’이 있어야 된다.
모든 게 이와 같아요. 그죠?
여기에 해당 안 되는 게 없더라, 그렇죠?

그래서 하늘에서 비가 내리려면 뭐가 있어야 돼? 먼저 ‘구름’이 있어야겠지. 그 다음에 뭐가 맞아야 돼요?
구름이 비가 되려면 그게 맞는 조건이 돼야겠죠. 뭐, 온도가 맞아야 된다든지, 기압이 서로 부딪친다든지, 충돌이 일어나야 되는 거죠. 이것도 연결체인 거죠.
그러면 뭐가 됩니까? ‘비’가 돼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와 같이 그 근원된 뿌리가 있고, 그 결과가 있는데,
이걸 연결시키는 게 반드시 있어야 된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게...없어요.

그럼 우리 부처님은 그걸 '연기법'이라고 설명하셨어요. '연기법'.
‘인연과’. '인'이라고 하는 건 뿌리예요.
뿌리, 근원, 뿌리.
‘연’이라고 하는 건 그 연결체란 말이에요. 연결체.
‘과’라고 하는 건 열매, 결과.
또 그걸 우리 부처님, 불교에서는 뭐라고 하냐? ‘법신’, ‘보신’, ‘화신’이라 이렇게 해요.
법신이라는 게
그 부처의 본래 성품을 가리켜요, 본래 성품.
그 다음에 화신이라는 건 그 부처의 본래 성품에서 이제 나타난 형상을 가리켜요. 그리고 이 법신에서 화신이 나오려면 ‘보신’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해서, 우리 법신이라는 걸 소위 쉬운 말로 하면 ‘마음’을 가리킵니다. 본래 마음은 청정해야 한다.
‘청정하다’는 말은 오염돼 있지 않아야 돼요. 그러니까 어떤 것에도 사전에 물들지 않고 있어야 돼. 선입견이 없어야 되고. 그죠?
선입견, 판단, 이런 게 없어야 되는 거예요. 마음은. 예. 그래야 모든 생각을 일으킬 수 있겠죠. 본래 내 청정한 마음에 선입견, 지레짐작, 이런 게 없어야겠죠. 그래야 모든 가능성이 있는 생각이 일어나겠죠.

‘원만보신 노사나불’. 그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에는 어떠한 것도 오염되면 안 돼요.
이거다, 저거다 있으면 안 돼요.
그래야 모든 생각을 할 수 있어. ‘원만하다’, ‘생각이 참 원만하다’, ‘너 참 생각이 원만하구나’.

‘원만보신 노사나불’, 이 노사나불, 비로자나불은 다 상징성이야.
그러면 마음에 어떠한 티끌도 없이,
생각이 원만하게 일어나니까 그 나타난 결과물이에요. 사람은 자유롭겠죠.
모든 것으로 다 변화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겠죠. 그게 천백억 화신 석가모니불. 이렇게 된단 말이에요. 부처.
저기, 우리 불교에서 이렇게 얘기하면,
그럼 우리 본래 사람으로 치면,
모든 사람한테는 마음이 있다는 거야.

옛날 우리나라 말로 하면 ‘혼백’이라고 해요. 혼백, 마음, 혼백이 있다는 거. 그죠? ‘혼’이라는 게 있다. ‘얼’이라는 게 있다는 거야. 모든 생명은.

근데 그 마음에서, 그 홀에서, 어려서, ‘정신’이 일어난 거예요.
그걸 ‘생각’이라 해요, 생각.
그래서 이 마음에서 생각이 일어나면,
이 생각이 몸을 조종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있고, 생각이 있고,
몸이 있다. 사람은. 동물도 그런 거죠.

이와 같이 모든 존재의 실체를 이렇게 밝혀놨단 말이에요. 모든 존재는 다, 그래서 몇 가지로 되어 있다?
자, 모든 존재는 몇 가지로 돼 있다? 세 가지. 그게 절대 잊어먹으면 안 돼요.

모든 존재는 몇 가지로 돼 있다?
자, 세 가지로 존재했는데,
사람은 뭘로 돼 있다? 마음. 생각. 몸
자, 부처는 뭐로 돼 있다? 법신. 보신. 화신
아니, 아까 내가 부처는 법신, 보신, 화신. 연기법으로는 그걸 뭐라고 한다? 인.연.과 그렇지. 연, 과. 이렇게 되는 거죠.
인, 연, 과가 있더라.

저 고추는 뭐가 되어 있더라? 그렇죠?
뿌리,줄기.열매
바다의 파도는 어떻게 되어 있더라? 바다, 바람, 파도. 이렇게 돼야겠죠. 인, 연, 과니까.

이렇게, 우리가 여러분들이 일상에서 관찰해 보시라는 거예요. 모든 건 다 그렇게 세 가지 조건과 조건과 조건이 연결되어서,
세 가지의 조건과 조건과 조건이 서로 동시에 딱 존재함으로써 완전한 존재가 만들어지더라는 거야.
완전한 존재가 만들어지더라. 이게 우리가 말하는 정상적인 완전체예요. 정상적인 완전체란 말이에요.

근데 이제 한번 봅시다. 비정상적인 존재는 뭐냐? 이 가운데 하나가 두 개가 없는 거예요. 그걸 ‘비정상 존재’라고 그래요. 있어도 인식을 못하는 겁니다.

뿌리도 있고, 줄기도 있는데 열매가 안 맺혀. 그걸 고치라고 할 수 있어요?
바다도 있고, 바람도 부는데 파도가 안 쳐. 그럼 바다가 어떻게 되겠어요? 썩어버려요. 물고기가 못 살아요.

하늘이 맨날 구름만 꽉 껴 있어.
비가 안 내려.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 못 살아요.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마음도 있고, 생각도 있고, 몸도 있어야 되는데,
중생은 생각과 몸만 알아요.
생각은 계속 쓰고 있으니까,
몸도 계속 눈에 보이니까.
이 마음이란 실체를 모르더라, 중생은.
그래서 일단 마음을 일깨워준 겁니다.
그걸 ‘견성’이라 해요.

중생은 마음을 모르고 살았어요.
맨날 생각하고, 맨날 이 몸뚱이 뭐야? 간수하는 거밖에 몰랐다고.
생각할 때는 생각뿐이었고, 또 이 몸이 어쩌면 그냥 예쁘게 닦는 거밖에 모르지, 마음이라는 걸 몰라요. 있다는 것도 안 믿고.

그래서 우리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 이유가 ‘그 마음이라는 게 있다’를 알려주시려고 출현하셨다고.
마음이란 게 있다는 걸,
왜? 중생은 아니까 모르니까. 뭘 모르니까? 그리고 마음을 모르니까 마음을 일러주는 거예요. 나머지는 생각과 몸은 부처님이 안 일러줘도 있었어요, 없었어요?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부처님이 깨달아주신 거지, 마음이 전부는 아니에요.

중생은 원래 두 개는 갖고 있었다고.
생각과 몸을. 마음은 안 갖고,
몰랐단 말이에요.
그래서 ‘마음’을 깨닫게 해준 거예요.

그러면 마음과 생각과 몸이 딱 하나로, 완전무결해지겠죠? 원망 부족 없어지겠죠? 완전체가 되겠죠.

그래서 우리 부처님은 ‘마음’을 특별히 강조하여 설명하신 겁니다.
왜? 생각과 몸은 알아서 잘하고 있잖아, 그죠?

그랬더니 우리 어리석은 또 부처님 제자들, 수행자들이 뭐냐? “마음이 전부다”라고 해버린 거야.

아니에요. 몸과 생각은 그렇지 않아도 잘 쓰고 있으니 말을 안 한 거지. 강조해서. 마음이 전부가 아니다.

‘마음’과 ‘몸’과 ‘생각’은 똑같이 중요하다.

근데 이 마음이라는 것과,
마음과 생각과 몸은 성질이 달라요.
‘마음’은 무형이에요. 무형.
모양과 색깔이 없어. 형태가 없어요. 마음은.

우리 마음은 지금 보고, 듣고, 하고 있는 그거거든요.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그게 다 마음이에요.

근데 그 마음은 지금 어떻게 우리가 드러낼 수가 없어요. 모양이 없어서.
형상이 없고. 그죠?
근데 있어요. 있는데, 이 마음이 안 드러나. 우리 몸은 이렇게 드러나는데. 그래 가만히 보니, 마음은 무형으로 항상 존재하더라.

어떻게? 지금 말하고, 보고, 듣고, 생각하는 그게 다 ‘마음’이란 말이에요.
이와 같이 ‘마음’은 무형으로써 항상 존재하더라.

근데 눈에 안 보여. 눈에 안 보이니까. 중생은 맨날 눈으로만 보려고 하잖아. 손으로만 잡으려고 하잖아.
중생은 오감으로만 다 그 존재를 확인하려 하거든요.

근데 이건 오감으로 확인이 안 돼요.
모양과 형상, 색깔이 없어요.
그래서 오감으로 확인이 안 되지만,
지금 존재하고 있는 그거란 말이야.

그래서 이건 어릴 때나 잠잘 때나 어떤 때에도, 이 마음, 어디 간 적이 없어요.

아, 그러니까 ‘마음’은 무형으로
항상 존재하고 있구나 라는 걸
우리가 ‘마음이 마음을 깨닫는’ 겁니다.
그리고 보니까, 우리 몸뚱아리와 생각은 또 마음과 성질이 반대예요.

몸과 생각은, 생각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로서 존재하고,
그래서 이 ‘생각’을 우리가 볼 수 있다고.
우리 몸은 육신으로 볼 수 있단 말이에요. 물질로.
그래서 ‘생각’과 ‘몸’은, 또 ‘마음’과 반대로 이미지와 모양과 색깔이 있네?

그러니까 이거는 모양과 색깔과 이미지가 있으니, 이건 변하겠어요, 안 변하겠어요? 변해요. 이건 결국 ‘소모’된단 말이야. ‘소모’, ‘달아진단’ 말이에요.
아, 모양과 색깔과 형태가 있는 건 다 소모되고, 변하고, 사라지는구나. 그쵸?
모양과 색깔이 없는 우리 ‘마음’은 소모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겠구나.
이거 뭐 있어야 달아지지.

아, 그래서 가만히 보니 우리 ‘생각’은 계속 찰나찰나로 변하고.
자, 생각은 어떻게 변한다? 찰나찰나. 1초보다 빠르게 변한단 말이에요.
엄청 착착 돌아가 버려요. 왜? 모양과 색깔이 있으니까 빨리 변하는 거야.
우리 ‘몸’은 한 생을 기준으로 변하는 거예요.

근데 이 생각과 몸은 계속 변하지만, 없어지는 건 아니지.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저 생각에서 이 생각으로.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거지,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생각은. 우리 몸도 그렇단 말이에요.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저 몸에서 이 몸으로,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왔다 갔다 하는 거지. 변화는 없어지는 게 아니야. 그죠?

근데 우리 ‘마음’은 왔다 갔다 하지 않아.
가만 보니, 우리 ‘마음’은 항상 존재하면서, 몸과 생각은 계속 변해.

그러니까 결국은 ‘변한다’. ‘사라지는’ 건 아니라고. 또 다른 걸로 전환되는 거죠.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전환되듯이, 우리는 이 몸에서 저 몸으로 또 바뀐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몸’과 ‘생각’이 변하는 건 당연하다. 슬픈 일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게 당연하고, 정상적인 일이란 말이에요.
생각이 변하고, 몸이 변하는 건 정상이다? 비정상이다? 정상이다.
그래서 우리 몸이 늙고 병들고 죽는 건 정상이다? 아니다? 정상이다.

왜 또 다시 새 몸 받아요? 왜?
생각과 같거든요. 우리 생각이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저 생각에서 또 변하죠.
그럼 우리 생각이 죽는다고 그래요?
안 하죠.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나잖아요.

우리 몸도 또 다른 몸이 일어난단 말이야. 이와 같이,
아, 몸과 생각이 변하는 건 너무 지극히 정상이고, 당연하고,
반드시 변해야 하는구나. 몸과 생각은.

중생은 ‘안 변해서’ 문제란 말이에요. 생각이
집착하거나, 중생은 뭔가 고집하면 생각이 안 변해. 그냥 맨날 그 생각에 딱 틀어박혀 있단 말이야. 그게 한 생각에 머물러 있다.

중생은 한 생각에 계속 머물러 있으니까, 오염되고 썩었다 이 말이에요. 냄새난다, 더럽다 이 말이야. 왜? 생각이 변하지 않느냐, 그렇죠?

그래야 우리가 씻을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그렇죠?

우리 몸도 계속 이렇게 늙어 빠진 몸으로 살고 싶어요? 영원히? 또 변해서 젊어지면 새 몸 받아야 될 거 아니에요, 그죠?

그래서 결국 우리는 마음은 변하지 않으니까, 이 마음의 뿌리에서 계속 새 몸과 새 생각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이건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기쁜 일이란 말이야. 늙고 병들고 죽는 게 슬픈 일이 아니란 말이에요. 당연한 일이고, 아, 우리는 새 몸 받으러 가는구나.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란 말이에요.

이렇게 아니까, 생사의 두려움이 사라지더라. 그리고 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더라.
존재의 실체를 바로아니까 그렇다는 거예요. 이게 이제 우리가 존재 실체를 아는 목적입니다.

생사 해탈이 되어버렸잖아. 생사가 없어요. 마음은 맨날 그 자리에 있어.
몸과 생각이 변하는 게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좋은 일이잖아요.

생각이 좀 변해야 한단 말이야.
생각이 좀... 졸지 말고.
생각이 변해야겠습니까?
안 변해야겠습니까? 생각이 변해야겠어요? 안 변해야겠어요?
생각이 변하겠어요. 제발 좀 다양하고,
남이 예측하지 못한, 정말 자기만의 신선하고, 생동감 있고, 정말 활기찬 생각을 하면, 내 몸도 자연히 그렇게 따라간단 말이에요. 내 인생도 그렇게 따라오고, 나머지는 다 그림자야. 다 따라와.

아무리 그래도 우리 마음은 안 변하니까. 여기에 이제 우리가 존재의 실체를 아는
그 ‘앎’과 그 ‘목적’이란 말이에요. 여기까지가 됐습니다

2 months ago (edited) | [YT] | 17

공유禪

<어느 수행자의 독백 10-2>

한숨 돌리고,
그러면 이 존재 실체를 알아서
어떻게 쓸 거냐 이거예요.
어떻게 쓸 거냐. 써야겠죠?
쓰는 방법을 설명한다.

이건 아주 쉬워요. 간단해요. 왜냐하면,
이 원리는 너무 쉬워. 다만 일상에서 하기가 어려워요. 알기는 너무 쉬워.

자, 보자. 이 존재를 어떻게 쓸 거예요? 생각해.
우리 존재는 세 가지라고 그랬죠?
그래서 몸을 일단 놔둬요.
몸은 생각대로 따라오게 돼 있어.
그냥 몸은 의식할 필요 없어요.
몸이 뜨거운 몸, 지가 알아서 움직이는 건 아니잖아.
그래서 ‘마음’과 ‘생각’만 우린 파악하면 돼요. 몸은 알아서 따라오니까.
자, 그럼 봅시다.
우리 ‘마음’이 있다고 그랬죠?
우리 마음은 두 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두 가지 성질. 마음은 몇 가지? 두가지
나란 존재는 몇 가지다? 세가지 그렇죠. 뭡니까? 마음.생각.몸그렇지.
그러면 이 마음을 보는 거죠.
이 몸은 몇 가지다... 아니, 이 마음은 몇 가지 성질이다? 두 가지 성질이다.

자, 보자. 이 마음이란 게 어떻게 두 가지냐?
하나는 조건이 되면, 그냥 생각 없이
ㅣ그냥 받아들여지는 성질이 하나 있어요.
여기는 생각이 필요 없어요.
생각해서 받아들이면 안 돼.
생각이 있건 없건 관계없이,
외부의 조건이 되면...

이 ‘외부의 조건’을 ‘연’이라 그래요. 연(緣).

인연과에서 외부의 조건만 되면,
아무 노력도 할 필요 없고,
아무 애도 쓸 필요 없고,
아무런 생각도 할 필요 없이,
그냥 탁 하면 턱 받아들여지는
우리 마음의 성질이란 말이야.
이걸 우리가 아무 노력 안 했죠?
그래서 ‘무위’(無爲)라 그래요.
할 ‘위’ 자를 써서, 뭔가 함이 없다.
그니까 지금 이 소리를 탁 듣는데,
뭘 했어요? 안 했어요? 아무것도 안 했죠?

그래서 이걸 ‘무위의 마음’. ‘무위의 마음’, 무위의 마음. ‘무위’. 예, 무위.

아무것도 안 해도, 저절로 우리 마음이 작동이 되더라. 조건만 되면. 무위의 마음이야.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가만히 있어도 바깥에 소리가 나면 들려요, 안 들려요? 들려요.
이렇게,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될 마음이 하나 있어. 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될 마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들, 내 얘기 들을 때 아무것도 하면 안 돼요. 그냥 들어야 된단 말이야.

그게 ‘무위의 마음’이야.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그걸 사량(思量), 분별, 판단하지 말라 이거야.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건,
일단 그걸 무조건... 아니지.
‘무위의 마음’으로 수용하는 거예요.
일단 받아들이는 거예요.
어떻게 할 거예요?
이미 나한테 닥친 일을. 그죠?
그래서 거기엔 판단이 필요 없어요.
싫고 좋음을 가릴 필요 없어요.
옳다, 그르다 가릴 필요 없어요.
이미 그건 일어난 일이에요.

자, 이미 이렇게 일어난 걸,
거부할 수 있어요? 거부할 수 있어요?
거부할 수 없는 건 그냥 받아들여야지. 거부할 수 없는 걸 받아들여야 되는데,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그것이 바로 '갈등'이라 그래요. 갈등. 갈등이라고 그래.

그러니까 수용을 해야 될 일에 수용을 하지 않고, 우리가 자기 생각, 고집, 판단, 견해를 일으켜 가지고 갈등을 일으키는 게 어리석다는 거예요.

소리를 듣거나 어떤 모양이 나타나면
그냥 보는 겁니다. 그냥.
세상의 모든 일이 나한테 닥쳐오면,
일단 받아들여야 돼요.
온 걸 어떻게 하겠어?
거부한다고 지금 물러집니까?
손 내봐요. 맞았는데 물러져요? 물러져요?
아니, 어쩌다 보니까 살다 보니까
내가 돌멩이를 맞았어. 막 갈등하면, 거부하면 물러져요? 물러집니까?
안 물러집니까? 안 물러집니다.그래.
그런 거 우리가 그냥 받아들여야겠어요? 우리가 생각을 이렇게 해 가지고, 막 이런저런 생각하는 게 좋겠어요?

어쩌다 보니 막 나한테 일이 일어났어. 사건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걸 일단 받아들여야겠어요? 거부해야겠어요?
받아들여야겠어요.
그래, 우리는 일단 우리 마음은 무위의 마음, 그냥 무조건 절대적으로 수용하는 마음의 성질이에요.

왜냐하면, 아무리 우린 그걸 거부해도 거부 안 돼요. 눈 뜨고 지금 이걸 봐봐요.
안 볼 수 있어요? 안 봐지냐고.
거부할 수 있어요? 거부할 수 있어요? 없어요. 정확하게. 거부할 수 있어요? 없어요? 그럼 이거 받아들여야지.
근데 왜 거부하는가?
그래서 안 되는 걸 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남한테 뺨 맞았는데,
막 화내고 짜증 내고 싸우면,
이게 맞은 게 없어져요? 없어지냐고.
안 되죠.
그게 우리가 중생들의 어리석음이라는 거야. 안 되는 걸 하려고 하니까 갈등이 일어나고, 괴로움이 일어나고, 화가 치밀고, 어리석어진단 말이에요. 안 되는 걸, 이미 이런 거. 어쩌겠단 말이야. 그죠?

그래서 첫 번째, 우리 마음은
무슨 마음이다? 수용하는 마음,
받아들이는 마음, 무위의 마음.
조작됨이 없는 마음.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쉬운 말로 하면 '받아들일 마음'.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되는 거예요. 거부된다? 안 된다. 안 돼요. 다 안 됐어. 와서 맞아볼래요? 뭘, 와서 맞아봐요.
ㅎㅎㅎ
이거 안 볼 수 없죠. 이런 마음이 있으니까, 일단 여러분들이 이걸 받아들여야 된다는 거예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미 나한테 일어난 건, 닥친 건 싸우고 갈등하고 화내고 해봐야 아무 의미 없어요. 나한테 이러한 일이 없어지지 않아. 더 문제를 키울 뿐이에요. 자, 여기까지.
그리고 우리 마음은 무위의 마음.
그냥 받아들이면.
그래서 이걸 우리는 듣는데, 생각이 필요해요? 안 해요?
그래서 생각이 필요 없다.
그래서 ‘생각이 필요 없다’는 말이에요.
생각 이전이다. 생각과 관계없다.‘이전’이란 말도 안 해도 돼. 생각과 무관하다.
따라해요, 무위의 마음은 생각과 무관하다.
받아들이는 마음은 생각과 무관하다.
수용하는 마음은 생각과 무관하다.
그러니까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는 뜻이에요. 여기는.

그럼 우리는 생각 없이 살 수 있어요? 없죠. 그 다음부터 이제 두 번째 마음의 종류가 있단 말이에요. 이제는 이미 벌어지고, 이미 일어난 일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되지만, ‘이걸 어떻게 해결할까’, ‘이것을 어떻게 할까’는 생각을 해야겠어요? 말아야겠어요?
생각해야죠. 요때는 이제 ‘생각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아니고,
생각을 쓰는 마음. 일으키는 거,
쓰는 마음, 사용하는 마음.
이걸 우리가 ‘마음을 쓰는 거’죠.
이걸 이름하여 **‘생각’**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둘 다 마음이에요.
그냥 받아들이는 것도 마음이고, 쓰는 것도 마음이야.
근데 이걸 이름으로 ‘생각’이라 한 거예요.
생각도 결국은 마음이야.
근데 마음을 쓰는 거지.
마음을 쓰니까 우리는 ‘생각’이라 불렀어. 그죠?

그냥 마음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그걸 ‘마음’이라 불렀어.
이렇게 이름을 구분한 거지.
생각도 마음인 거예요.
근데 이제 뭐든지 우리가 입력이 있으면 출력이 있죠.
입속으로 들어가면 영혼이 안 나옵니까 어디로 나와요? 똥으로 나오지.
똥구멍으로 똥이 나오잖아요.
뭐, 뭐 고상한 체하나? 입속으로 음식물이 들어가면 똥구멍으로 똥이 나오고, 오줌구멍에 오줌이 나오는 거죠.
안 나올 수 있어요?
모든 게 그래요.
뭐든지 이것이 들어가면
저것이 나와야 돼요.

이와 같이 마음도 수용을 했으면 나와야 돼요. 안 나오고 삭히는 걸 뭐라 한다?
그게 병나는 거지. 그게 화병이 되는 거죠.
뭐든지 들어갔으면 나와야 되는데,
이놈의 그 ‘참고, 인욕’하고
그냥 마음에 주워 담는 거죠.
그게 전부 ‘화’가 돼버린 거야. 몸에
화병이 되는거죠.
그래서 우리나라, 이 조선시대부터, 옛날 시대에 우리 여자들, 또 우리 서민들, 백성들은 한이 많은 거예요.
한. 내뿜을 데가 없었잖아.
반드시 뭐든지 받아들였으면,
받아들이는 것만큼 나와야 합니다.그죠?
음식도 먹은 만큼 나와야 돼요. 어디로? 똥. 오줌으로 그렇죠.
왜 말을 못하나? 뭐 되게 고상한 사람 같네. 똥 안 싸요? 오줌 안 싸요?
똥 싸요? 안 싸요?음식 먹으면 어디로 나와야 돼? 똥구멍으로 똥이 나와야지.
이게 정상이란 말이에요.

마음도 똑같아요.받아들였으면,
받아들이는 것만큼 나와야 합니다.
다만 중생은 이때 마음을 일으키는 걸 ‘생각’이라 하는데, 생각을 쓸 때는 지혜가 있어야 된단 말이에요.
지혜가 없이 그냥 성질 내고, 화내고,
그냥 막 앞이 캄캄해져 가지고, 고집 부리고, 어거지 부리고 막 이러니까 나오는 것이 **‘독’**이 돼버린 거야.

이게 지혜롭게 나오면, 들어간 만큼 나와버리니까, 우리 마음은 항상 갈등이 없고, 우리 마음은 항상 가볍단 말이에요. 몸이 가벼운 것처럼. 음식물 먹었으면...
근데 이 안에서 음식을 먹었는데 소화도 못 시키면, 막 독소가 돼서 나오겠죠?
음식 먹었는데 안에 소화 기능이 약하면,
다 독소가 되는 거 아니에요.
마음도 그런 것처럼.
세상을 마음이 받아들였는데 지혜가 없으면, 독이 돼버리는 거예요. 지혜가 없으면,

그래서 막 거친 말이 나오고, 남을 죽이는 거, 남을 해롭게 하고, 남과 싸우려 하고, 남을 시비하려 하고, 남을 못 살게 하려고. 혹은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자기 자신을 막 죽이고, 자기 자신을 막 못 살게 하는.
이런 걸로 나와버린 생각이 괴롭겠죠?

그래서 우리는 첫 번째, 마음을 수용하는 마음이 있는 만큼, 정확히 5:5로 나가는 작용하는 마음도 있어야 한다.

이 작용할 때 지혜가 필요한 거예요. 지혜.
그래서 지혜로운 작용을 하는 게,
우리가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용.
그러면 이게 엄청 많아요.
지혜라는 게 수만 가지잖아요.
일이 많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우리 옛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도 아닌 것 같아요. 내가 봤을 때는. ‘37조도품’이라고 해서,
37가지 우리 마음을 쓰는 데,
마음을 작용하는 데 도와주는 역할을 해주는 건데...그렇게 학문적으로, 학술적으로 공부할 필요는 없어.
근데 쉬운 방법을 알려준다, 이거예요.
자, 첫 번째는 마음을 받아들이는 건 생각이 필요해요? 안 해요? 안 해요.
대신, 우리 마음을 내 뱉을 때는 생각이 필요하다이거죠.
그래서 어떤 생각만 하면 되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금 내 감정이 어떤지,
내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자기가 알고 있으면 돼요.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알기만 하면 돼.
그러면 실수가 없어지고,
어리석음이 사라집니다.

나올라해도 들어가. 그게 뭔지 알기 때문에.
이게 순간적으로 모르면, 캄캄하게 어두워져 가지고, 업이 나와버리는 거예요. 업이.
화가 나와버리고, 짜증이 올라와버리고, 못된 말이 나와버리고, 못된 행동이 나와버려요.
그래서 아주 쉽다, 이거야.
우리 마음은 받아들이는 게 있죠?
그래서 아까 우리는
‘마음과 생각과 몸’이라 했지.
그래서 마음을 받아들이는 게 ‘마음’이고,
자, 마음을 일으키는 건 다 이제 끝났죠?
마음을 일으킬 때는 뭐만 하면 된다?
알기만 하면 돼.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기만 하면되잖아요.
이게 아주 쉽죠?
근데 생활에서는 이게 엄청 어려워요.
이게 제일 어려운 수행이에요.

왜? 24시간, 1분 1초를 한 번도
이걸 자각하고 있어야 돼.
걸으면 걷는 줄 알아야 되고,
내가 보면 보는 줄 알고 있어야 되고,
지금 내가 말을 하고 있으면,
말을 하고 있는 줄 알아야 되고,
내가 먹으면 먹는 줄 알아야 되고,
내가 뭘 듣고 있으면 듣는 줄 알아야 되고잉,
내가 지금 어떤 음악을 들으면,
어떤 음악을 듣는지 알아야 되고잉,
새소리를 들으면 새소리를 듣는 줄알아야 되고, 국을 먹으면 국을 먹는 줄알아야 되고,
누워 있으면 누워 있는 줄알아야 되고,
잠을 자면 잠을 자는 줄알아야 돼요.

그러니까 일상생활에서 어렵겠어요? 쉽겠어요? 어려워요.
그래서 여기까지, 이 일은 아주 쉽지만, 일상생활에서 하기는 어려워요.
왜?우리는 그냥 하긴 하지만 모르고 하더라, 중생은. 중생은 하기도 하는데 모르고 해.
그걸 우리가 무명이라 하고 업이라 그래요.
말을 하긴 하는데, 지가 뭔 말을 하는지 모르고 해. 그랬어요? 안 그랬어요?
말을 하는데도, 지가 뭔 말을 하는지 모르고 하죠? 알고 할 때보다 모르고 할 때가 많죠.
뭘 보는데, 내가 뭘 보는지 알고 볼 때가 많아요? 멍하니 그냥 보는 게 많아요.
뭘 듣는데, 하루 종일 듣고 있죠.
뭘 듣는지 알아요? 아니면 그냥 습관적으로, 그냥 막 들어요? 음식을 넣었는데, 진짜 이게 뭔지 하나하나 맛을 봐가면서 먹어요?
아니. 그냥 막 처먹고, 그냥 목구멍에 넣기 바쁜 거예요. 모든 게 그렇단 말이에요.
그럼 나는 잘되면 안 되죠?
그래서 다 이렇게 우리가 노력하는 거예요.

가장 어려운 게 뭐냐?
우리가 잠자는 게 안 되는 거예요.
꿈에서조차 완전히 잊어버리잖아.
꿈을 꾸고 있으면, 꿈을 꾸는 줄 알아야 된단 말이에요. 근데 그건 아주 어려운 일이고,
눈을 떠 있는 이 의식이 깨어 있는 동안에라도 걸으면 걷는 줄,
서 있으면 서 있는 줄,
지금 앉아 있으면 앉아 있는 줄,
내가 더우면 더운 줄알아야지.
더운 줄도 모르고 앞치마 하루 종일 입고 있어.그걸 보고 바보, 무명이라 하는 거죠.
내가 지금 죽을 만큼 힘든데, 죽을 만큼 힘든지도 모르고 일하고 있어.
세상에 가면 그렇잖아요.
일하는데 정신이 빠져가지고,
죽는지도 모르고 일하고,
내가 지금 뭘 하는지도 모르고 자식을 키우고 있고, 내가 결혼생활이 뭔지도 모르고 결혼생활을 하고 있고,
자식을 낳는 일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자식을 순풍순풍 낳아.
내가 지금 왜 공부하는지도 모르고 하고,
왜 출가해서 수행자, 스님이 됐는지도 모르고 그냥 목탁 치고 있단 말이에요.
목탁 치려고 수행 출가자가 됐는지, 수행해서 깨달으려고 됐는지 몰라요. 승속을 가리지 않고 자기가 뭘 하고 있는 줄 모르더라.

그래서 우리가 이걸 바르게 알면 잘 쓰는 겁니다. 매 순간 나의 생각과 나의 말과
나의 감정과 나의 행동.
그럼 우리가 신구의, 혹은 의구신 하거든요. '의'라는 건 생각이에요.
지금 내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야 되나, 몰라야 되나? 알아야 된다.
근데 우린 잘 알아요? 몰라요?
'구' 말.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된다? 모른다? 그럼 잘 모르죠.
그러니까 말이, 지금 뭔 말 하는지도 모르고 말하고, 말하면 잊어버리고.
이게 지금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지,
나와 남을 죽이는 건지, 자기 죽을 말인지, 살 말인지 알아요? 몰라요?
행동. 이게 지금 네가 살려고 하는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의·구·신, 신·구·의 세 가지를
잘 다스리라.
‘다수량’은 뭐냐? 정확하게 알고 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지금 마음을 받아들여야 되는, 이 내 마음이 세상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인 건지. 그죠? 뭔가 나타났으면,
우린 받아들여야 되는 순간이지.
근데 우리는 지가 막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인지 모르는 거죠. 막 써버려.
막 화내고, 거부하고, 짜증 내버리는 거죠.
그래서 뭔가 우리 받아들일 때와 마음을 써야 할 때로 구분이 돼야겠죠.

그래서 받아들일 때는생각하지 말고,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입도 떼지 말고,
한 생각도 움직이지 말고 받아들이란 말이에요. 받아들여야 할 때는.

그리고 받아들인 다음에 대화를 해도,
남의 얘기를 다 들은 다음에.
그냥 한마디 하면, 자기가 10마디 하고 싶어 가지고, 남 얘기 뭔 말 하는지도 모르고.
안 되잖아요. 남과 대화를 하더라도,
남이 한 얘기 다 들은 다음에.
들을 때는 생각을 일으키리라,
일으키지 마라. 남의 얘기를 들을 때는 말을 섞거나, 섞지 마라.
그래 하고 있습니까? 안 되죠.
그래서 다 들을 때, 들어야 된단 말이에요.
이게 우리가 말하는 무위의 받아들일 마음이란 말이야.

그리고 다 듣고 나서, 내가 그냥 혼자 삭이고 있으면 병나요? 안 나요? 나요.
그래서 그 병 났잖아. 지금까지.
바보, 멍청이가 되고, 마음이 다 머리에 막 쥐났잖아. 다 듣고 난 다음에 담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해야죠. 이제 해야 됩니다.
그러나 이걸 지혜롭게 할 거냐, 어리석게 할 거냐.이거예요. 그렇죠?
그러면 내가 지금 어떻게 하는 게,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너도 살고 나도 살고,
우리가 같이 공존할 수 있는지,
공생할 수 있는지,
서로 자리이타, 이타자리,
더불어 살 수 있는지.
살려서 나도 살아야 할 거 아닙니까.
나만 살고 남을 죽이면,
그러면 남이 가만히 있을까? 아니요. 그렇겠죠?
나만 살고, 우리 모두를 모른 채 해버리면, 나 힘들 때 누가 날 도와주겠어요?
안 도와주겠죠.
그러니까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그 목적으로 말을 다시 해야 된다는 겁니다.
담고 있으면 안 돼요. 똥 싸야 돼요.
똥을 제대로 못 싸서 이렇게 다 병들었단 말이에요.
참고 삭이고. 그러면 둘 중에 하나야.
그러면 치매, 바보가 되든, 치매, 몸에 염증이 많이 생겨 가지고 암 걸려.
둘 중에 하나요. 예.
일단 받아들일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여라.
그리고 받아들인 만큼 써야 됩니다.

어떻게?
잘 알고. 그걸 알고 쓰란 말이에요.

이렇게 하면 다 공부가 끝이 나는 거예요.
이게 불교의 시작과 끝이에요.

근데 내가 지금 1시간도 안 된 얘기인데, 얼마나 쉬워요?

생활에서 이걸 실제로 하려고 하면,
1년, 3년, 365일 화두 정진하는 것보다 어려워요. 화두 정진은 껌이요.
그걸 하다가 좀 쉬잖아. 이거는 쉴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
이거는 단 한순간도 쉴 수 없는 공부예요.
그러나 죽을 만큼 힘쓸 필요도 없어.
살면서 그냥 자연스럽게 하는 공부예요.
살면서 자연스럽게 하는 일상의 공부지만, 단 한순간도 쉴 수 있다? 없다? 없다.
없단 말이에요. 계속 자기가 스스로 노력해야 되는 공부예요.

받아들일 때와 마음을 써야 할 때.
받아들이는 건 우리 무위의 마음이고,
마음을 쓰는 걸 생각이라 그래.
**‘유위’**라 그래.
생각할 때는, 우리가 생각이 곧 말이 되고, 행동이 되니까
생각할 때는 지혜롭게 해야겠구나.그렇죠?
그러면 내가 지금 이 생각이 왜 이러는지도 알아야 되겠죠?
자, 이렇게까지.
그래서 내가 불교 깨달음의 전부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이해는 되죠.

이거 다시 재정리 하셔야 돼요.
그래서 뼈대를 세우세요.
막 그냥 하나하나 외우려고 하지 말고, 따라가 보면 돼.
자, 불교는 뭐다? 뭘 깨닫는다? 존재의 실체.
왜? 왜 알아야 된다? 잘 쓰기 위해서.
모든 존재의 실체는 몇 가지로 돼 있다?
세 가지로 돼 있다.
자, 그걸 우리 연기법으로 말하면 뭐다? 인.연.과
사람을 얘기하면 뭐다? 마음.생각.몸
뿌리부터 얘기해야지.
부처로 얘기하면 뭐다?. 법신.보신.화신
그렇지, 그렇죠.이렇게 해서 세 가지를 했다.
그러면 이제 이걸 우리 잘 써야겠죠.
그럼 잘 쓰려면 우리 마음을 써야 되는데,
우리 마음 몇 가지로 됐다?
두 가지다
자, 하나의 속성은 뭐다? 무위의 마음 받아들이는거.수용하는거
어, 두 번째 속성은 뭐다? 유의의마음 지혜로 일으키는 마음
그렇죠. 이렇게 뼈대를 세워요.
그리고 여기다 계속 살을 붙여야 되는 것도 아시겠죠.
모르면 또 해줄게요. 걱정하지 말고요.
외우려고 하지 마요.
이거 절대 외우면 안 돼.
계속 이걸, 이걸 그냥 굴려봐요.
뼈대로 계속 굴려보는 거야.
그리고 여러분, 저와 함께 서로 자꾸 물어보고,
그래서 질문에서 답을 찾고,
또 답에서 질문을,
또 답을 또 찾고 이어나가는 겁니다.
고맙습니다 🙏

2 months ago | [YT] | 21

공유禪

<어느 수행자의 독백 9-1>

2025.7.20.오전 차담
"한 생각에 머물지 않으면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

스님의 귀한 법문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번 말씀에서는 ‘생각’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는데,
그동안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왔던 “생각은 허상이다”라는 말이
실은 ‘한 생각에 머무를 때의 착각’이라는 것을 찬찬히 풀어주십니다.

중생은 한 생각에 고정되고, 수행자는 한 생각도 하지 않으려 하며, 우리는 늘 그 양극단을 오가며 괴로워하지요.

그러나 스님은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모든 생각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비로소 중도(中道)의 자리, 부처의 자리에 닿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법문을 들으며 저는, 얼마나 자주 한 생각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는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도반님들과 함께 천천히 곱씹으며 사유하고,
우리 안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를 함께 느껴보면 좋겠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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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생각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하려고 해요. 그동안 마음에 관해서 얘기를 많이 했잖아요. 마음, 마음을 얘기할 때의 법담과 생각에 대해서 얘기할 때의 법담은 좀 다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이 ‘생각’에 대해서 얘기하는 시간이라는 걸 알고 들으셔야 이게 매칭이 잘 돼요. 생각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마음을 또 떠올려서 마음에다 포커스를 맞추면 안 맞게 돼요. 지금은 생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을 깨닫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지만, 이 생각의 실체에 대해서 우리가 바르게 아는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마음과 생각은 나눌 수가 없거든요. 나눠지지도 않고, 마음과 생각은 불가분의 관계예요. 그런데 성질이 조금 달라요. 마음과 생각은 전혀 동떨어진 게 아니라는 건, 나눌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마음이 있는 한, 생각이 있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마음과 생각을 절대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생각을 따로 얘기하는 이유는, 이 생각의 성질에 대해 좀 바르게 알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예요.
보통 사람들, 중생들은 한 생각에 고정돼서 착각을 하고,
수행자들은 한 생각도 안 하려는 착각에 빠져 있어요.
자, 같이 따라 해보세요.

"중생은 한 생각에 고정돼서 착각에 빠져 있고, 수행자는 한 생각도 안 하려는 착각에 빠져 있다."

"한 번 더, 중생은 한 생각에 고정돼서 착각에 빠져 있고, 수행자는 한 생각도 안 하려는 착각에 빠져 있다" 이걸 곱씹어보세요.

우리는 양극단에 빠져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리석은 중생이나 수행자나, 반대편에서 반대편을 향해 치닫고 있는 거예요.
이걸 지금 설명하고, 예시를 들면서 이해시키려는 게 우리가 하고 있는 얘기인데, 이걸 바로 알면 사실 이해도 예시도 필요 없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보통 사람들은 한 생각이 일어나죠? 일어남과 동시에 거기에 딱 점을 찍는단 말이에요. 바로 고정이 돼요. 보통 사람들은 그걸 주장한다, 고집한다, 견해를 세운다고 해요.
한 생각이 일어나면 딱 거기에 머무르죠. 이게 우리의 일상다반사 아닌가요?
그런데 어디선가 "생각은 실체가 없다", "생각은 내가 아니다",
"생각은 허상이다"라는 얘기를 주워들어요.

그런데 실제로 관찰해 본 적은 없어요. 유튜브를 보면서 마음 공부한다고 주워들은 거예요. 그래서 "생각은 허상이다", "생각에 머물지 마라", "생각으로 생각을 짓지 마라",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거죠. 그래서 한 생각에도 머물지 않으려고, 한 생각도 안 하려고 용을 씁니다. 수행자들이 그래요. 반면, 수행하지 않는 보통 사람은 일으킨 모든 생각에 바로 고정돼 버려요. 그래서 생각에 붙잡히지 말라는 의미로 "생각은 허상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또 생각을 안 하려고 애를 써요. 지나가려고, 머물지 않으려고. 화두를 든다든지, 명상을 한다든지, 염불을 한다든지. 이게 다 다른 생각을 막아주는 방식입니다. 안 하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염불, 화두, 명상 전부 생각을 안 하려는 수행이거든요.

이와 같이 중생은 한 생각에 붙잡혀 있고, 수행자는 한 생각도 안 하려는 양극단으로 치닫고 있어요. 그런데 이게 그냥 우스갯소리가 아니에요. 사람들은 거의 다 이 두 가지 중 하나에 속해요. 보통 사람들은 한 생각에 고정돼 있고, 수행자는 한 생각도 안 하려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 해요. 전부 어디서 주워들었어요. 깨달아서가 아니에요. 어디서 주워들었어요. 누가 얘기하니까 “한 생각도 없는 이 자리” 하니까, 막 주워들은 거지, 자기가 깨달은 게 아니에요. 자꾸 그런 자리라고 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뭐. 그래서 한 생각에 머물거나, 한 생각에 머물지 않으려고 생각을 안 하려 하는 양쪽 극단으로 치달아가는 이 중생들 사이에서, 중도는 뭘까요? 이걸 찾아내는 게 깨달음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그 ‘중도’가 뭘까요? 여러분들 지금까지 공부 많이 하셨잖아요. 어떻게 해야겠어요?

‘필요한 생각은 하고, 필요 없는 생각은 안 하고.’ 이 얘기를 하죠. 그런데 ‘필요한 생각’이라는 게 누구 기준이에요? 그 필요하다는 기준이 정해져 있어요? 그럼 오류가 많지 않겠어요? 지기(知機)가 맞으면 필요하고, 지기가 안 맞으면 안 필요하다, 이렇게 될 수도 있죠. 그러니까 한 생각에 고정된 이면에는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으려는 마음’ 안에는 ‘한 생각에 고정된 마음’이 있다는 거예요. 그건 그래도 비교적 가까운 말이네요. 그래서 우리 부처님께서 뭐하러 오신 분인지 잘 생각해봐야 돼요. 부처님은 “너는 필요한 사람, 너는 필요 없는 사람” 이렇게 구별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어요? 아니잖아요. “너도 너 나름대로, 너도 나름대로 다 필요한 그릇이니까 평등하다. 모두 다 똑같이 있다.” 이러려고 오신 거죠. 그 말은 곧 뭘까요? “너는 가고, 너는 있어라.”가 아니고, “모두 다 있어라.”거기서 착안해보세요.
“너는 필요 없으니까 집에 가고, 너는 필요하니까 여기 있어라.”가 아니라, “너는 이래서 필요하고, 너는 저래서 필요하다. 그러니까 다 있어라.” 이 세상은 다 평등하다. 다 필요한 존재다. 이걸 생각했다면, 그걸 생각에다 대입해보세요. “모든 생각은 다 필요하다.” 이렇게 말해야겠죠? 그런데 자꾸 “너는 필요 없으니까 가고, 너는 필요하니까 있어라.” 이렇게 차별을 붙여요. 답을 알려줬잖아요. 다 있어라. 생각도 마찬가지예요. 좋은 생각만 있고, 나쁜 생각은 가라? 이게 불법이에요? 보살님은 나하고 안 맞으니까 나쁘니까 가고, 보살님은 나하고 맞으니까 좋으니까 있고. 이게 불법인가요? 생각도 마찬가지죠. 이 생각은 필요 없으니까 보내고, 이 생각은 필요하니까 쓰고.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차별 때문에 우리가 차별심이 생기는 거예요. 분별심, 차별심.
나한테 이로우면 챙기고, 해로울 것 같으면 버리고. 그걸 누가 정하냐? 자기가 정하죠. 자기는 그걸 지혜롭다고 생각해요. 그게 바로 분별심, 차별심이란 말이에요. 그게 중생들이에요. 한 생각에 머물러서, 자기한테 이로우면 좋고, 해로우면 나쁘고. 그게 바로 업이에요. 그래서 이제 수행자라고 뭘 하냐? 생각을 아예 없애려고 해요.다 보내버려. “너도 가, 너도 가, 다 가!” 싹 쓸어버리는 거죠. 한 생각도 안 하려고. 그런데 상식적으로, 한 생각도 안 하려고 아무리 해봐야, 그 ‘한 생각도 안 하려는 생각’이 있어요. 아무리 머물지 않으려고 해도, ‘머물지 않으려는 생각’이 있어요. 결국은 한 생각도 떠날 수 없어요. 전부 착각에 빠진 거예요. 어떻게 사람이 마음과 생각을 떠날 수 있어요? 삼매에 들어가면 생각 안 해요? 무슨 생각을 해요? 삼매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고 화두를 들면, 그 화두를 들고 있는 것도 생각 아닌가요? 그죠? 그게 생각이에요. ‘생각 이전’은 생각이 아니에요. 우리가 가끔 “생각 안 해도 이 소리는 저절로 들리죠?” 그건 생각이 아니에요. 그때 우리가 ‘생각이 없다’는 건, 그런 뜻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냥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하나만 알고 다 안다고 착각하고. 참 중생들은 결국 구제불능이에요. 한 생각에 고정돼서 거기에만 사로잡혀 있으니까.

그러면 우리가 하나 썩어버리잖아요. 거기서 구제해주기 위해서 “생각은 네가 아니다”, “생각은 실체가 없다”고 얘기해줍니다. 그랬더니 “아, 모든 생각도 실체가 없구나.” 하고 또 착각해요. 중생이 왜 중생인 줄 알아요? 이 정도 얘기하면 탁탁 알아들어야 하는데, 못 알아들어요. 그게 중생이에요.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마세요. 잘 봐요. 한 생각에 머물러 거기에 사로잡혀 있는 걸 중생이라고 했죠? 그런데 해답을 어떻게 찾느냐?

“모든 생각은 머물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답을 찾아요. 질문이 ‘한 생각에 머물러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해답을 ‘모든 생각에 머물지 말자’로 찾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이 아니잖아요. 화두만 들고 있으면 다른 생각 할 수 있어요? 없어요? 화두만 들고 있으면, 우리가 세상을 살 수 있어요? 그래서 한 생각, 화두만 딱 들고 있으면 다른 생각을 못 하죠. 그게 바로 중생의 습이라는 말이에요. 업이라고도 하죠.
어떤 생각이 하나 들어오면, 우리는 그거밖에 못 한다는 거예요. 안 좋은 생각이 하나 올라오면, 그 생각에만 계속 사로잡혀 있죠. 어떤 사람이 미워지면, 미운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죠. 다른 생각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중생은 못 한단 말이에요. 자식이 갑자기 죽으면, 평생을 그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요.다른 생각 못 해요. 안 일어나요. 그러니 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 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게 중생이에요.

그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모든 생각을 다 없애버려요? 아니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질문에서 답을 찾으세요. ‘한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는 걸 중생이라 한다’ 했죠. 그럼 어떻게 해야 중생이 안 되겠어요? 답은 거기 있어요. 한 생각에만 사로잡히면 안 돼요. 사로잡히지 않으면 되는 거예요.
‘모든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아니고요. 이걸 풀어서 말하면, ‘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건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죠? 중생은 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다른 생각을 못 해요. 그렇죠?
그러니까 한 길로 가라고 하면, 중생은 그 길밖에 못 가요. 그 길 끝에 낭떠러지가 있는데도 그냥 가요. 죽잖아요. 그런데 이 한 생각에서만 벗어나면 모든 생각을 할 수 있어요. 모든 길이 생겨요. 전체가 다 내 갈 길이 되고, 내 인생이 되잖아요. 그럼 뭐든지 가도 되겠죠. 그런데 모든 길을 다 없애버려요.
그냥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어요. 가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하고. 돌기둥이 돼서 서 있으면서 부처가 된 줄 알아요. 그래서 ‘모든 생각을 없애버려라’, ‘생각하지 마라’, ‘생각은 허상이다’라고 해요. 근데 ‘생각이 허상이다’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면, 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 생각에만 빠져 있어서 다른 걸 다 잊어버리잖아요. 다 못 하게 되잖아요. 그걸 허상이라 얘기하는 거예요. 길이 백 가지가 있는데, 너는 왜 한 길밖에 모르냐? 왜 맨날 인생을 그렇게밖에 못 사냐? 인생을 사는 데는 천 가지, 만 가지 길이 있는데 너는 왜 맨날 그 길밖에 모르냐는 거예요. 너는 왜 인생을 그렇게밖에 못 사냐? 천 가지, 만 가지 길이 있는데, 그죠?
인생을 살아오면서 천 가지, 만 가지 길을 다 걸어봤어요? 아니죠. 맨날 길이 나 있는 길, 거기만 그냥 쫓아다녔죠. 어때요? 결국 낭떠러지밖에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은 허망하다”, “생각은 허상이다”, “생각에 머물지 마라”, “생각으로 하지 마라” 이 말의 진짜 뜻은, 한 생각만 고집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말은 곧 모든 생각을 하라는 뜻이라고요. 그게 우리 부처님의 마음이에요. “모든 생각을 하라.” 그게 ‘상에 머물지 말라’는 뜻이에요. 하나에 고정되면 ‘상’이 돼버리잖아요. 하나에 고정이 안 되면, 모든 걸 할 수 있잖아요.
그게 바로 극락, 사랑의 열애, 여여한 세상, 여여한 생각, 그게 바로 우리 부처님의 마음이에요.

사람이 태어나면 죽죠. 그러면 죽는다는 생각밖에 못 하죠. 살다 괴로우면 괴로운 생각밖에 못 해요.
조금 좋으면 좋은 게 전부예요. 결혼하면 그게 전부고,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내 남편이고, 내 부인이고.
자식 한 번 낳으면, 죽을 때까지 내 자식이에요. 항상 중생은 한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잖아요. 천 갈래, 만 갈래 길이 있다는 걸 몰라요. 어떻게 한 사람하고 평생을 사냐 이거예요. 천 명, 만 명이 있고, 천 년, 만 년이 있고, 천 사람, 만 사람이 있는데. 그죠?

중생은 한 사람 만나서 백년회로를 한다고 믿고 살아가요. 그게 중생이 사는 길이라고, 우리가 잘못 알고있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모든 사람과 우리가 얼마든지 교제하고, 교감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게 낫겠어요? 아니면 한 사람하고만 죽을 때까지 사는 게 낫겠어요? 솔직히, 모든 사람과 세상 넓은 데서 정말 세상이 좁다 하고, 다 그냥 할 수만 있다면, 다양하게 교감하고 소통하고, 다 가족같이 살아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런데 사람은 어때요? 안 그래요. 그게 한 생각이 고정돼서 그렇다는 말이에요. 다른 길을 몰라요.
다른 세상을 보고 싶은 생각도 없고, 다른 음식을 먹고 싶은 생각도 없고, 다른 사람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도 없고, 혹시 다른 얘기가 뭐 있나 들어보고 싶은 생각도 없고, 맨날 하나만, 그것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그렇게 살아가는 게 중생이란 말이에요. 그게 중생이라 하니까 또, 수행자라는 그 잘난 사람들은 뭐 하냐?
모조리 없애버려요. "한 생각도 안 해야지. 한 생각도 안 해야지." 그런데 사람이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한 생각도 안 할 수 있어요? 없어요? 그래서 육조단경이 나온단 말이에요. 마음이 있는 한 우리는 반드시 생각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반드시. 그래서 마음과 생각은 분리할 수 없단 말이에요. 이걸 우리가 진짜 알아야 되는데, 이게 오랫동안 인이 박혀 가지고안 돼요. 혼자 가만히 놔두면, 수행했던 사람들은 화두 들었다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분들은 내가 공부를 하다가도 "알았다" 하고 고개 끄덕끄덕 해놓고, 혼자 가면 뭐 해요? 이뭣고해요. 그냥 걸어가면서 또 이뭣고가 저절로 올라와요. 자동. 그런 것처럼, “생각은 허망하다”, “생각하지 말아야지”, “생각은 못 쓰는 거야” 이렇게 인이 박힌 사람은 가만히 놔두면 맨날 혼자서 “생각은 허망하지,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계속 올라와요. 근데 자기는 생각 안 한다고 생각해요.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무식하고, 무지하고, 고집스럽고, 그런 사람으로 점점 되어가더라. 수행한다고 하면서 더 옹졸해지고, 더 고집스러워지고, 더 말라가고, 저 사람이 흉악하게, 진짜 괴물로 변해가더라. 수행을 한다는 사람들이, 더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쳐 가거든요. 그래서 우리 깨달음이라는 건 뭐냐? 자꾸 양극단에 치우치지 말라는 뜻이에요.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건, 곧 모든 생각을 하라는 뜻이야. 그러니 모든 생각이 나니까,
어느 하나의 생각을 나라고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자동으로 한 생각에 머물 수 없게 돼요. 모든 생각이 나니까, 버릴 생각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흘러갈 것도 하나도 없어요. 다 머무르고, 다 품는 거란 말이에요. 이게 전체가 되는, 부처가 되는 법이란 말이에요. 하나도 없이 싹 쓸어버려요? 지금 물난리 나서 다 쓸어버리듯이 그냥 홍수 나서 싹 쓸어버리면 깨끗해져요? 그런 게 아니란 말이에요. 모든 생각을 나로 여기는 것, 이게 중도란 말이에요.
전부가 되는 것, 이게 생각이 먼저예요. 모든 가능성이 있어야, 나의 말과 나의 행위가 이루어지겠죠? 그러니까 모든 생각이 곧 나란 말이에요. 그걸 목표로 삼고 우리가 전진해야 하는 거예요. 그걸 목표 삼아야지, 자꾸 모든 걸 쓸어버리려고 하면 안 돼요. 생각 없는 돌멩이가 돼서 어쩌려고요? 생각 안 하는 바보가 돼서 어쩌려 그래요? 근데 안타까운 건, 대부분 수행하는 사람들이 이러고 있어요. 대부분 수행처의 법사들조차이러고 있다니까요. 지금 생각을 죽이려고 하는 중이에요. “생각이 허망하다”는 건 딱 한 뜻이에요.
한 생각에 머물 때허망한 거예요. 중요한 건 ‘한 생각’이에요. 전부 생각, 전부가 아니에요.

2 months ago (edited) | [YT]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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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수행자의 독백 9-2>

한 생각 하나에 머물러 있을 때 거기에 고정되니까, ‘상’이 되는 거예요. “네가 나의 영원한 배필이야.” 하면,
머물게 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계속 거기만 붙들려 있어야 되잖아요? 거기서 벗어나게 해주는 게?
해탈이란 말이에요. 모든 생각을 할 수 있어야 돼요. 모든 생각. 그러니 가능성이 얼마나 많아요?
그럼 뭐든지 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겠죠? 자꾸 그런 쪽으로 공부를 해야지. 그렇죠?

뭐든지 할 수 있어야지. 뭐든지 잘 안 되죠? 자꾸 ‘뭐든지 안 된다’는 생각 되죠?

뭐든지 먹을 수 있어야죠. 아예 그런 생각이 없잖아요.
그래서 안 되더라도, “뭐든지 가능하다”, “뭐든지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나다. 라는 목표로 가야 되고, 그때 바뀌는거예요. 10년을 하면. 그런데 그걸 일단 배제해 놓고 하면, 10년이 흘러도 하나도 수행이 안 돼요. 10년이 흘러도 자기 틀 안에 갇혀 있어요. 100년을 해도 여전히 자기 틀 안에 갇혀 있어요.

그래서 우리 깨달음이라는 건, 생각에 대해서 잘 알아야 돼요. 생각과 마음은 불가분의 관계라 했죠?
우리 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런단 말이에요. 우리 마음은 원래 경계가 없어요. 틀이 없단 말이에요.
고정돼 있지 않아요. 그러니 자연히 생각도 그래야 되는데, 마음은 무경계인데 생각은 어때요?경계에 다 사로잡혀 있어요.

그 경계로부터 벗어나서, 모든 생각을 하자. 그러면 이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지금은 당장 안 돼도, 그렇게 가는 게 수행이란 말이에요. 생각을 모조리 없애버리는 게 수행이 아니고요. 근데 오랫동안, 또 몇 년 동안 “생각하지 마라, 생각하지 마라, 모든 생각은 다 허상이다.”중요한건 모든 생각이야 계속 이런 얘기만 들었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모든 생각은 허상이다.” 이렇게 인이 박혀 있어요.
귀에다 몇 년만 듣고 있잖아요? 그냥 저절로, “모든 생각은 허상이다.” 지가 깨달은 것도 아니고,
그런 법문을 수없이 들었어요. 인이 박혀버렸어. 안 바뀝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어쩔 수 없어요.
나는 그런 사람을 ‘구제불능’이라고 해요. 안 돼요. 그래서 최소한 이걸 이해는 해야 된단 말이에요.

“생각은 허망하다.”그게 아니라고요. “한 생각이 허망하다.”이게 정확한 말이에요.

“생각은 허망하다.” 하면, 마치 맞는 말 같죠? 깊이 생각 안 하면, 고개가 끄덕끄덕해져요.
그게 자기가 못 깨닫고, 그냥 말만 들어서 그래요. “생각은 허망하다.” 그러면 그 생각은 왜 안 허망한데요?

“생각은 허망하다”는 게 정말 맞다면, “생각은 허망하다”는 그 생각도 허망해야죠. 그래야 맞는 말이잖아요?

그러니까 “생각은 허망하다” 맞아요. 그런데 그게 뭐냐? “지금 네가 일으키는 그 생각이 허망하다는 거야.”

허망하다는 그 생각이 허망한 거예요. 그게 지금 한 생각이잖아. 지금 일어난 한 생각이잖아요.

“아, 생각은 허망해.” “모든 생각은 허망하지.” 그게 지금 한 생각이잖아. 그게 허망하다는 거예요.

거기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뜻이에요.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허망하다”는 생각도 쓸 이유가 없어요.
없단 말이에요. 사실은 생각이 허망하지 않게 돼요. 그래서 모든 생각을 다 쓸 수 있게 되고, 모든 가능성이 열려요. 왜? 죽을 때, “죽는다”는 생각만 하잖아요? 그 한 생각에 빠져 있잖아요. 그 “죽는다”는 한 생각에서 벗어나면, 죽을 수가 없어요. 모든 생각이 열려 있는데. 다시 태어날 수도 있고,
모든 가능성이 있는데. 너는 왜 꼭 “죽으면 죽는다”는 생각에만 빠져 있냐는 거예요. 왜 맨날 그 생각에 빠져 있냐 이거예요. 그걸 ‘한 생각’이라 해요. 그러니까 한 생각에만 머물지 않으면, 모든 생각이 들어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모든 생각이 곧 다 들어온단 말이에요.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
이게 바로 부처란 말이에요.

부처는 돌멩이가 아니에요. 생각이 없는… 그건 돌부처고, 목불이고, 석불이지. 생불은 뭐다?
생불은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
생불은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
생불은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한 생각에 머물지 말라.
모든 생각을 하려면,
한 생각에 머물지 말라는 거예요.

그냥 모든 생각에 머물지 말라가 아니라, 지금 그 ‘한 생각’에 머물지 마라.
그러면 어떻게 돼요?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
그게 답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따라 하세요.
한 생각에 머물지 않으면,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
한 생각에 머물지 않으면,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
이게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에요. 응무소주가 뭐예요? 한 생각에 머물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러니 이생기심한다.
그러면 모든 마음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모든 생각이 일어나요.
하나에만 머물지 않으면, 천불이 일어난다.
천불이 깨어난다. 뭐든지 할 수 있게 되죠. 그럼 왜 우리는 뭐든지 못 하느냐?
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못 하는 거예요.
그거 때문에 발목이 붙잡히는 거죠. 그러니까 “모든 생각은 허망하다” 이 말, 이제 말이 되는 소리예요? 안 되는 소리예요? 근데 “모든 생각은 허망하다” 하면, 이걸 모르고 들으면, 마치 그게 꼭 깨달은 소리 같죠? 예,
이 ‘한’이라는 한 글자와 ‘모든’이라는 말, 이걸 자체적으로 구분을 못 해요.
“한 생각에도 머물지 말라.”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거든요. 근데 요걸 쏙 빼먹어요. 이놈의 이 머리에서 뭔 조작을 하는지 몰라. 들은 대로좀 공부했으면 좋겠는데…“한 생각에도 머물지 말라.” 그러니까 중생은 ‘한’을 빼먹고“생각에 머물지 말라.” 아, 알았어. “생각에 머물지 말아야지.” 이래요. 이게 중생 수준이에요. 이게 요즘 법사들 수준이에요. 요즘 유튜브 법사들, 다 이 수준이에요. 들어보세요. 다 이래요. 이 ‘한’ 글자에서,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몰라요. 근데 그걸, 법사가 10년 동안 그렇게 법문해봐요. 자기는 몰라요. 거기서 5년만 들어봐요.
지금 이게 구분이 안 돼요. 내 말이 사이비처럼 들려요. 이렇게 ‘한’ 글자 차이에 깨달음이 천지 차이로 갈려버려요.
“한 생각에도 머물지 않으면,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돼요? 모든 것이 열려버려요.
그러니까 결론은 뭐예요? 모든 생각을 하라는 거예요. “한 생각도 하지 마라”가 아니고요. 핵심은 그거예요.

“두두물물(頭頭物物), 부처 아닌 것이 없다.” 라는 걸 말하는 거예요. 모든 생각이 열려 있으니, 모든 게 가능하죠. 그럼 우리가 화가 나고 시비가 일어나겠어요?
모든 게 열려 있는데, 한 생각에만 사로잡히니까 화가 나고, 지금 시비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스님이 하는 얘기를 모든 생각으로 바라보면,
시비가 안 일어나요.
한 생각에 붙잡혀 있으니까, 이 말이 지금 시비가 되는 거예요. 왜?
“지가 깨달았대.” 이건 이게 아니거든요. 귀가 열리면, 이게 이치에 맞는 모든 말이 진리가 된단 말이에요.

어느 한 사람이 한 얘기가 진리가 아니고, 이치에 맞는 모든 말이 진리가 된단 말이에요. 그렇죠?

그런데 어느 하나의 스승, 어느 하나의 법사에 꽂혀 있으면 다른 게 다 부정돼요.
안 들어가요, 귀에.

그게 바로 머물러 있는 중생들의 세계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치에만 맞는 말을 하면, 모든 게 법문이 된단 말이에요. 법문 아닌 게 있어요? 없어요? 그때부터는 법문 아닌 게 없게 돼요. 이치에 맞으면, 한 생각만 벗어나면, 모든 사람이 하는 말이 다 법문이 된단 말이에요. 여러분들도 이치에 맞는 말씀을 하시면, 그게 다 법문이 되는 거예요. 그렇죠? 이치에 맞는 말. 이치에 맞는 말이 뭐예요? 고정됨이 없는 말이에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말. 그런데, “이것 좀 한번 해보는 게 어떨까요?”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이건 이치에 안 맞는 말이에요.
고정된 말이잖아요. 그런 말에 속지 말라는 거예요. 그죠.이해돼요?
이해돼도 내일 또 잊어버리겠지. 왜? 중생은 항상 한 생각에 고정되는 습이 돼 있거든요. 한 생각이 올라오면, 그 한 생각에 고정되는 게 습이 돼 있어요. 모든 생각이 안 일어나요. 모든 모양이 안 보여요.

사람을 볼 때도, 모든 모양이 안 보여요. 그냥 다 자기한테 꽂히는 그 모양만 보여요. 그 이미지만 본다는 거예요. 사람도 그렇고, “이 사람은 정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그럴까요? 중생의 눈에는 안 보여요.

지금 이 날씨를 봐도,이 날씨만 보여요.
이 날씨에, 밝고, 어둡고, 비 내리고,
눈 내리는 게 다 보여요?
중생의 눈에는 안 보이겠죠.
그래서 이 하늘을 보면, 여기 비도 오고, 눈도 오고, 천둥도 치고, 번개도 치고, 햇빛도 쨍쨍한 것들이 다 보여야한단 말이에요. 중생의 눈에는 보인다?
안 보인다? 안 보여요. 그게 중생이에요.

그럼 우리는 어떤 수행을 해야 해요?
“한 생각에도 머물지 말고, 모든 것을 보는 훈련을 하자.” 그게 수행이에요. 비가 오면, 비 안 오는 날, 햇빛 쨍쨍한 날, 천둥 치는 날, 눈 오는 날도 같이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이 스님을 보면, 이 스님이 승복을 입고 있는 모습, 안 입고 있는 모습, 막걸리 한잔 하고 있는 모습, 차를 마시고 있는 모습, 법문하는 모습, 자는 모습, 다 들어 있어야 해요.
그렇죠? 그러니까 이 스님은 모든 모양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럼 여러분들도 이해의 폭이 넓어지겠죠.

그런데 만약 스님이 맨날 승복만 입고, 스님다운 모습만하고 있으면, 스님이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면 확 깨지겠죠? 그게 중생이란 말이에요.
모든 사람을 볼 때, 모든 모양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보라는 말이에요.
그러면 분별심이 생겨요? 안 생겨요?
안 생기죠. 세상을 볼 때도,
세상에 나와 살 때도 마찬가지예요.
이게 바로 우리가 말하는 지혜로운 생각, 깨달음 생각 이해되죠? 안 돼도 괜찮아요.
자꾸 스스로에게 말하세요. “나는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요.”
그렇죠? 자기가 안 할 뿐이지.
자기가 고정되어 있어서,
고집이 세서 안 하는 거예요.
할 수 있다니까요. 안되는게 어딨어요.
우리는 이미 완전히 그랬단 말이에요.
자, 여기까지 합시다.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비된다.

고맙습니다. 마지막에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비된다” 하신 스님의 말씀에 깊은 감사와 울림을 느꼈습니다.

이 얼마나 지극한 마음으로, 우리 중생들의 무명을 풀어주시려
한 말씀 한 말씀을 그렇게 다 쏟아주셨을까요.

말씀을 듣는 내내 스님의 호흡과 숨결, 그 안에 담긴 지혜와 자비가 제 마음 깊이 전해졌습니다.

스님께서 기울여주신 그 귀한 에너지와 시간, 그것이 헛되지 않도록 저 역시 제 자리에서, 한 생각에 머물지 않고 모든 생각을 품는 수행을 묵묵히 이어가 보려 합니다. 스님의 지극한 가르침에 진심으로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도반님들과 함께 나눌 수 있음에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2 months ago | [YT]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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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수행자의 독백8>

잠도 수행입니다 :
견성 이후, 잠자는 법과 꿈. 2025.7.17.(목) 오후 10:52

도반님들, 평안하신가요?
오늘은 스님께서 한밤중, 문득 생각나셔서 나눠주신 귀한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견성 이후의 수행자는 잠자는 것까지도 수행이어야 한다”고 하신 이 법문은,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뿐 아니라 잠들어 있는 시간까지도 어떻게 공부의 장으로 삼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십니다.
부처 아닌 것이 없고, 나 아닌 것이 없기에, 우리의 잠과 꿈조차도 수행의 자리라는 말씀이 깊이 다가옵니다.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공부의 세 가지 문턱 무지, 입문, 견성을 분명히 바라보게 되고,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가만히 살피게 됩니다.
잠시 멈추어 이 법문을 함께 곱씹어 보며, 다시 한 번 마음의 나침반을 가다듬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지나가는 말씀 한번 들어보세요.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모든 법문은 깨달은 사람들을 위해 하신 걸까요, 아니면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하신 걸까요? 이게 참 중요한 갈림길입니다.

부처님 입장이 아니라 우리 입장에서 보면, 불법을 공부하고 마음공부를 하고 있는 우리는 아직 깨닫지 못한 상태니까 이 불법을 공부하고 있는 거지요. 부처님께서도 깨닫지 못한 중생을 위해 불법을 전하신 것이고요. 그러니까 우리 역시 ‘아직 깨닫지 못한 나’라는 전제 아래 마음공부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분수령’입니다. 아직 깨닫지 못한 우리가 마음공부를 한다는 건, 다시 말해 ‘깨달은 나’로 아직 살아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이게 달라져야 합니다. 다소 어려운 이야기지만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깨닫지 못한 이들을 위해 설법하셨듯이, 지금 우리가 이 공부를 하고 있는 것도 ‘깨닫지 못한 나’로서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생각, 몸, 감정, 느낌, 고정된 의식, 즉 다섯 가지 오온—이 오온이 나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라고요. 그런데 이걸 거꾸로 말하면, 깨닫지 못했을 때는 이 오온이 내가 아니지만, 깨닫고 나면 이 오온이 전부 내가 되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이게 매우 어렵습니다. 깨닫지 못했을 때, 즉 마음공부 자체를 모르고 살 때는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면, 다 토막이 나 있거든요. 생각이 일어날 때는 그 생각만 나로 보고, 몸이 아플 때는 몸이 나이고, 감정이 올라올 때는 감정만 나로 보입니다. 어떤 생각에 빠져 있을 때는 그 생각만 나라고 여기고요. 마음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은 완전히 토막 난 존재로 살아갑니다. 그 조각들만 나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이제 마음공부를 시작한 초심자에게는 일어난 그 생각마저도 부정하게 가르칩니다. 마음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은 일어난 생각을 자기라고 여기니까, 그것을 고집하게 되지요. 그런데 공부를 시작하면 뭐라고 가르치느냐? "일어난 그 생각은 네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분리시켜주는 거지요.

그러다가 깨닫고 나면, 그 일어난 생각들, 모든 생각이 전부 다 나라고 합니다. 일어난 생각마다 부처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이 세 가지가 정확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마음공부를 모르는 사람은 생각을 자기라고 여기고, 마음공부를 시작하면 그 생각은 내가 아니라 하고, 깨닫고 나면 모든 생각이 다시 나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정확히 정리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가 “생각은 내가 아니다”, 혹은 “생각은 허상이다”, “몸은 허상이다”라고 여긴다면, 그건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깨닫고 나면, 생각도 그대로 내가 되고, 몸도 그대로 내가 되고, 감정도 그대로 내가 됩니다. 그걸 두고 "나 아닌 것이 없다", "부처 아닌 것이 없다"라고 합니다.

지금 이 법문을 듣는 나의 상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나는 지금 마음공부를 아예 모르는 상태인지, 이제 막 입문한 상태인지, 아니면 견성한 상태인지’ 이 세 단계 중 어디 있는지에 따라 법문이 다 다르게 들리거든요. 그래서 저도 가끔 말씀드릴 때 어떤 분들은 헷갈릴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생각이 나가 아니라고 했다가, 또 어떤 때는 생각이 나라고 하니까요. 이건 듣는 분들의 상태에 따라 달리 설명하는 겁니다. 생각에 완전히 빠져 있는 분들에겐 분리시켜야 하니까 “그 생각은 당신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이고요.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길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지금 여러분 정도의 마음공부 단계에서는 ‘생각이 내가 아니다’ 정도의 수준에 있는 것이고요. 하지만 다시 보면, 모든 생각도 내가 되고, 몸도 내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럼 더 이상 나 아닌 것이 없어지고, 버릴 것도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까지 설명하려면 매우 많은 내용이 필요하니, 어느 정도 공부하신 분들을 대상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법문을 듣는 분들이 자꾸 헷갈리는 겁니다. 어떨 땐 생각이 나라고 하고, 또 어떨 땐 생각이 내가 아니라고 하니 종잡을 수 없는 거죠. 몸뚱이를 나라고 했다가, 또 육신이 내가 아니라고 했다가요.

이 말씀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깨닫기 전에는, 마음공부를 아예 모를 때는 몸, 생각, 감정, 느낌이 전부 조각나 있습니다. 세상 따로, 나 따로지요. 그래서 그 조각들 중 하나가 들어오면 그걸 ‘나’라고 여깁니다.

그러다 마음공부에 입문하면 이론적으로 배우게 됩니다. ‘생각도 내가 아니다’, ‘마음도 내가 아니다’, ‘오온도 내가 아니다’, 이렇게 갈라쳐줍니다. 그런데 이걸 넘어서 ‘견성’이라는 건 본래의 나, 완전하고 전체적인 나를 보는 것입니다.

견성을 하고 나면 오온 그대로가 다 내가 됩니다. 몸, 느낌, 감정, 분별, 번뇌, 고정관념까지도 전부 내가 되는 것이죠. 이게 견성입니다. 견성을 하면 오온 전체가 다 나의 효자가 되지만, 견성을 못하면 오온은 내 참 나를 빼앗아가는 도적이 됩니다.

그래서 ‘일체처, 일체시’, 즉 ‘시방삼세’라 하지요. 공간은 시방, 시간은 삼세입니다. 우리말로 쉽게 풀면 ‘일체처, 일체 시간에 나 아닌 적이 없었고, 나 아닌 게 없었고, 나 아닌 때가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전부 다 내가 되는 겁니다.

이 바탕에서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지금 밤이니까 ‘견성 이후 수행자는 잠자는 것까지 수행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제 자야지” 하고 눈을 감으면 그냥 잠이라는 관념의 세계로 들어가 버립니다. 수행자는 “잔다”라고 해선 안 됩니다. 똑같이 편안하게 잠이 들더라도, 그 잠으로 들어가는 마음가짐이 달라야 합니다.

보통 사람은 피곤하니까 자고, 때가 되니까 자지만, 그런 식으로 자면 곧장 꿈으로 들어갑니다. “나는 잔다” 하는 순간 바로 꿈의 세계로 빠져버립니다.

하지만 수행자는 똑같은 잠을 자더라도 다르게 접근합니다. 어떤 분은 꿈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 마음의 편지다.” 오랫동안 내 마음에 저장되어 있던 모든 것이 나에게 보내는 편지라고요. 꿈은 내 마음의 일기이고, 과거 일기를 되짚어보는 시간입니다. “나는 이랬었구나, 저랬었구나.” 꿈을 통해 과거의 나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생뿐 아니라 전생까지도요. 과거의 나는 이런 것들을 내 마음에 심어두었구나—그걸 읽어보는 게 바로 꿈입니다. 그런데 잠자는 순간을 멍하게 넘겨버리면 꿈을 헤매는 게 되고, 여기에 익숙해지면 이 잠 자체가 수행의 방편이 됩니다. 그래서 잠에 들 때의 마음가짐이 매우 중요합니다.

잠자는 연습이 숙달되면, 죽는 순간에도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죽음을 맞이할 때 “아, 나 죽는다” 하고 암흑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이제 다시 내 마음으로 돌아간다”, “내 일기장을 살펴보러 간다”는 마음으로 들어가면, 이 잠의 수행이 죽음을 준비하는 연습까지도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건 견성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견성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본래 마음은 잠도 자지 않고, 죽음도 없다는 걸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잠잘 시간이 되어서 떠오른 김에, 이 이야기를 한번 해드리면 좋겠다 싶어 밴드를 열었습니다. 길게 이야기할 건 아니고요. 이건 그냥 듣는다고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동안 공부를 함께 해온 여러분은 말씀하시는 의도는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문제는 실천이지요.

왜냐하면 자꾸 잊어버리거든요. 피곤하면 바로 자버리고, 더 어려운 건 잠에서 깰 때입니다.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요. 잠결에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화장실 가거나, 물 마시거나, 다시 자거나 해서 꿈이 다 날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옛 어르신들 말씀에, “수행자는 낮을 밤 삼아 수행하고, 밤을 낮 삼아 수행한다”고 하셨지요. 수행자는 밤낮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많이 성장하시는 데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드리려고 생각난 김에 잠깐 열었습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2 months ago | [YT] | 23

공유禪

<어느 수행자의 독백7>

스님의 법문을 듣고 마음을 담아 사유합니다.

무시무공

잘 들어보세요.
먼저 보살님 두 분께서 시간과 공간 시공이 없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물어보셨죠.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도 내가 만든 거니까 내가 안 떠올리면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씀하신 거죠. 두 분은 이렇게 이해를 하고 계신 거죠. 어떤 나의 의지로 내가 시간과 과거의 시간이나 미래에 어떤 시간 또 저기 있었던 공간
여기 있었던 공간 이런 걸 다 내가 만든 거니까 어차피 내가 안 만들면 내가 그런 걸 생각하지 않으면 그런 건 본래 없는 게 아니냐 이런 말씀이시잖아요.
우리가 이제 그게 마음공부하면서 초기에 벌어지는 게 그게 오류예요. 시간과 공간이 없다. 이 말은 단순히 없다. 이렇게 보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제의 시간은 사실 있었어요. 없었어요. 어제는 있어요? 없었어요? 어제 시간이 실제로 존재했어요? 안 했어요?(안했어요) 그러면 보살님들은 오늘 어떻게 존재합니까? 조금 전에 우리가 오전에 밥을 먹었죠. 지금 배부르죠. 그런데 아까 과거의 시간 오전 시간에 저기서 밥을 먹었다는 이게 시공이죠. 과거의 시간과 과거의 공간 거기서 밥을 먹었다는 게 없으면 어떻게 지금 배가 부르겠어요. 시공! 시간과 공간이 없단 말은 단순히 그냥 없다. 이런 뜻이 아니에요. 없다라는 말 잘 해석하셔야 돼요. 없다라는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니고 그래서 내가 생각함이 있고 생각 안 하면 없고 이런 뜻이 아닙니다.
시공이 없다는 것은 잘 보세요. 시간과 공간이 없다. 이 말은 단순히 그렇게 해석할 게 아니란 말이야. 시간과 공간이 없다는 말이 그렇게 간단한 얘기가 아닙니다. 조금 전 오전에 과거의 시간이죠. 과거의 시간에 저쪽 공간에서 밥을 먹었죠. 이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없다는 것은 그냥 없애버리는 게 없다는 게 아니고 과거에 우리가 오전에 밥을 먹었다는 그 시간과 공간 속에 밥을 먹었던 나는 존재한다는 거예요. 그때도 있었고, 과거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는 밥을 먹었기 때문에 현재 배부른 상태도 존재하는 거죠. 그러니까 나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말이죠. 과거에도 있고 지금도 있다. 과거도 있고 지금도 있고 또 미래는 조금 있다가 오후 저녁 때도 밥을 먹을 거죠. 그건 있어요. 없어요.(있어요) 과거에도 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시공이 없다는 말은 시간과 공간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과거에도 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도 있으니까 과거에 있는 것만을 나라고 할 수는 없죠. 또 현재에 있는 이것만을 나라고도 할 순 없죠 그러니까 모든 시간과 공간에 있다는 말이에요.
과거 현재 미래 여기 저기 거기 다 내가 있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전부의 시간과 공간에 내가 존재했기 때문에 시공이 없단 말이야. 나는 전부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 시간 과거의 시간 거기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나는 딱 거기에만 있는 건 아니라는 말로 시공이 없다고 하는 거예요. 우린 본래 참나에 시공이 없다. 이런 말은 과거에도 내가 있었고, 그 과거가 이어져서 현재도 있고 또 이 과거 현재가 여기 현재에서 다시 미래로 이어지니까. 세 가지 시간에 나는 다 존재한단 말이에요. 다 존재하죠. 그러니까 어느 하나에 묶여있는 나는 존재한다. 안 한다. 그렇죠. 어느 하나에 묶여 있는 것이 없다는 뜻으로 시공이 없단 말이에요. 전체에 있으니까 우리 생사 없다는 말은 나고 죽음 없단 말도 똑같죠 우리는 안 죽는다는 게 아니에요. 안 태어난다는 게 아니에요. 계속해서 우리는 나고 죽음을 계속 반복해 왔기 때문에 죽으면 나고 나면 죽고 또 죽으면 나고 나면 죽기 때문에 생사가 없다. 하는 거예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다. 혹은 시간과 공간이 우리는 본래 없더라 이것은 내가 생각하면 과거가 있고 생각 안 하면 과거 없다. 이거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럼 내가 남을 죽여놓고 살인을 해놓고, 내가 그거 생각 안 할게 그런 일 없어 하면 없어집니까 그렇죠. 내가 어제 밥을 안 먹었는데 어제 밥 안 먹었던 기억이 없어 그럼 나는 괜찮아져요 아니죠.
어제 밥을 안먹어서 오늘 배고프다 어제는 밥 안 먹은 내가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오늘은 배가 고픈 내가 있고 그래서 지금 밥을 먹으면 좀 있다가 미래는 배가 부른 내가 있는 거죠. 이게 배고픈 나! 밥을 먹는 나! 배가 부른나! 이 세 가지 다 내가 있는 거죠. 시공에 내가 없다는 말은 모든 시간과 공간을 내가 있다는 뜻이에요. 전부가 나라는 뜻이에요. 생사도 이생도 우리 태어났죠. 또 이 육신은 죽겠죠. 그럼 죽으면 또 태어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게 끊어지지 않고 태어나고 죽고 또 죽으면 태어나고 또 태어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나고 이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생사가 없다는 거예요. 근데 우리 본래 마음은 생사가 없다. 이러니까 우리 마음이라는 게 따로 있어 가지고 특별하게 따로 있어서 그것만큼 생사가 없다.
이래 버리면 다 분리가 되어 있는 겁니다.

머물지 말라 이 말은 정확하게 머무르란 뜻입니다. 머물지 말라는 정확하게 머무르란 뜻이야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면 또 이 시간 이후에 지나면 또 정확하게 있는 거겠죠.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는 그 정확하게 그걸 하고 있으니까 모든 시간 공간에 존재한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머물지 않고 흘러간다는 말은 그냥 생각을 안 한다는 뜻이 아니고 생각을 안 해서 그냥 잊어버리라는 맹해지라는 이런 뜻이 아니고 모든 시간과 공간에 정확하게 내가 지금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모든 시간과 공간의 나의 작용이 정확하니까 모든 시간에 있다. 모든 공간에 있단 말을 머물지 말란 뜻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냥 그냥 흘러가라는 건 자꾸 내가 흘러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흘러가도 나는 항상 존재한다는 뜻이라고 변하면서 존재하죠. 나면 죽고 죽으면 나고 우리는 계속 변하면서 존재한다는 것이 생사가 없다. 또 시공이 없다. 하는 거죠. 계속 변하면서도 존재하니까 어제 밥을 안 먹었으면 오늘 배가 고프죠 변했죠. 변하지만 변하는 것이 그 원인과 결과로 존재합니다. 그럼 또 지금 밥을 먹으면 있다가 배가 불러야 안 고파요 부르겠죠. 조금 있다가는 또 배가 부르는 거죠.
또 배가 고파지고 이렇게 해서 변하면서 계속 존재하는 거지 그러니까 배고픈 시간과 공간 배가 부른 시간과 공간
나는 항상 있는 거죠. 시공간이 없다는 말은 모든 시간과 공간이 있단 말이에요. 그걸 시공이 없다. 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무아란 말도 내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항상 나는 존재한다는 참나가 무아란 말입니다. 전체에 연결돼 있으니까 근데 중생은 맨날 따로따로 떨어져 있잖아. 문득 나한테 안 좋은 일이 벌어지면 과거에 니가 그런 일을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 안 좋은 일이 일어났는데 우리는 과거를 기억 안 하죠.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졌어 하면서 원망이 들고 화가 나죠. 이어지지 않으니까. 우리는 그러한 생각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 지금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까 안 좋은 일이 일어났으면 이걸 안 머물고 그냥 지나버려 이게 공부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럼 맨날 회피밖에 안 돼요. 회피하는 게 아니고 머물지 말라는 말은 지금 이 현재의 결과에 머물지 마라
왜 과거에 니가 그리 했으니까 이게 일단은 연결시키란 말이에요. 머물지 말라는 말을 연결시키란 말입니다.흘러간다는 말은 매 순간 정확하게 알라는 말을 흘러가라는 거예요. 다 그냥 흘려보내버리라는 뜻이 아니고 매 순간 연결돼 있잖아요. 계속 우리가 연결되어 왔습니다. 연결되어 왔기 때문에 흐름을 보라는 말입니다. 흘러가라는 말은 흐름을 보란 말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앞뒤 구분 없이 다 흘러 없애버리라는 뜻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게 시공이 없다. 생사가 없다. 무아란 말이에요. 다 흘러가면 돼 그냥 다 흘러가면 돼 이게 그냥 없애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의 현재 결과가 어디서 왔겠어요. 다 과거의 나로부터 온 거죠. 지금에 머물지 마세요. 하는 건 과거에 니가 했던 걸 돌아보세요. 라는 뜻이에요. 지금 나한테 오만 일이 벌어졌다 그러면 이거 괴롭죠 우리 빨리 도망가고 싶죠 도망갈라 하지 말고 과거의 나를 돌아보라 했듯이 머물지 말라는 거야. 현재에!
그러니까 없다는 말은 모든 곳에 있단 말이에요. 뭐가 없다. 이 말은 모든 곳에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이런 뜻입니다. 없다 하면 전체가 있는 거구나 우리가 그냥 말에만 떨어졌다하면 이것은 우리 말머리에 떨어져 가지고 말 끝에만 떨어져 가지고 없다. 하니까 없구나 이렇게 생각해버리는 게 아주 단순하다고 생각해요. 흘러가라니까 막 자꾸 뭔가 흘러 보내라 그러면 안됩니다. 흘러가라는 건 지금 나한테 일어난 일이 과거에서도 흘러왔다는 얘기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 흐름을 보라는 얘기입니다. 흐름을 정확히 보라. 이게 흘러가란 말입니다.
머물지 말라는 뜻입니다.

고맙습니다 🙏

2 months ago | [YT] |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