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禪

<어느 수행자의 독백 9-2>

한 생각 하나에 머물러 있을 때 거기에 고정되니까, ‘상’이 되는 거예요. “네가 나의 영원한 배필이야.” 하면,
머물게 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계속 거기만 붙들려 있어야 되잖아요? 거기서 벗어나게 해주는 게?
해탈이란 말이에요. 모든 생각을 할 수 있어야 돼요. 모든 생각. 그러니 가능성이 얼마나 많아요?
그럼 뭐든지 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겠죠? 자꾸 그런 쪽으로 공부를 해야지. 그렇죠?

뭐든지 할 수 있어야지. 뭐든지 잘 안 되죠? 자꾸 ‘뭐든지 안 된다’는 생각 되죠?

뭐든지 먹을 수 있어야죠. 아예 그런 생각이 없잖아요.
그래서 안 되더라도, “뭐든지 가능하다”, “뭐든지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나다. 라는 목표로 가야 되고, 그때 바뀌는거예요. 10년을 하면. 그런데 그걸 일단 배제해 놓고 하면, 10년이 흘러도 하나도 수행이 안 돼요. 10년이 흘러도 자기 틀 안에 갇혀 있어요. 100년을 해도 여전히 자기 틀 안에 갇혀 있어요.

그래서 우리 깨달음이라는 건, 생각에 대해서 잘 알아야 돼요. 생각과 마음은 불가분의 관계라 했죠?
우리 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런단 말이에요. 우리 마음은 원래 경계가 없어요. 틀이 없단 말이에요.
고정돼 있지 않아요. 그러니 자연히 생각도 그래야 되는데, 마음은 무경계인데 생각은 어때요?경계에 다 사로잡혀 있어요.

그 경계로부터 벗어나서, 모든 생각을 하자. 그러면 이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지금은 당장 안 돼도, 그렇게 가는 게 수행이란 말이에요. 생각을 모조리 없애버리는 게 수행이 아니고요. 근데 오랫동안, 또 몇 년 동안 “생각하지 마라, 생각하지 마라, 모든 생각은 다 허상이다.”중요한건 모든 생각이야 계속 이런 얘기만 들었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모든 생각은 허상이다.” 이렇게 인이 박혀 있어요.
귀에다 몇 년만 듣고 있잖아요? 그냥 저절로, “모든 생각은 허상이다.” 지가 깨달은 것도 아니고,
그런 법문을 수없이 들었어요. 인이 박혀버렸어. 안 바뀝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어쩔 수 없어요.
나는 그런 사람을 ‘구제불능’이라고 해요. 안 돼요. 그래서 최소한 이걸 이해는 해야 된단 말이에요.

“생각은 허망하다.”그게 아니라고요. “한 생각이 허망하다.”이게 정확한 말이에요.

“생각은 허망하다.” 하면, 마치 맞는 말 같죠? 깊이 생각 안 하면, 고개가 끄덕끄덕해져요.
그게 자기가 못 깨닫고, 그냥 말만 들어서 그래요. “생각은 허망하다.” 그러면 그 생각은 왜 안 허망한데요?

“생각은 허망하다”는 게 정말 맞다면, “생각은 허망하다”는 그 생각도 허망해야죠. 그래야 맞는 말이잖아요?

그러니까 “생각은 허망하다” 맞아요. 그런데 그게 뭐냐? “지금 네가 일으키는 그 생각이 허망하다는 거야.”

허망하다는 그 생각이 허망한 거예요. 그게 지금 한 생각이잖아. 지금 일어난 한 생각이잖아요.

“아, 생각은 허망해.” “모든 생각은 허망하지.” 그게 지금 한 생각이잖아. 그게 허망하다는 거예요.

거기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뜻이에요.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허망하다”는 생각도 쓸 이유가 없어요.
없단 말이에요. 사실은 생각이 허망하지 않게 돼요. 그래서 모든 생각을 다 쓸 수 있게 되고, 모든 가능성이 열려요. 왜? 죽을 때, “죽는다”는 생각만 하잖아요? 그 한 생각에 빠져 있잖아요. 그 “죽는다”는 한 생각에서 벗어나면, 죽을 수가 없어요. 모든 생각이 열려 있는데. 다시 태어날 수도 있고,
모든 가능성이 있는데. 너는 왜 꼭 “죽으면 죽는다”는 생각에만 빠져 있냐는 거예요. 왜 맨날 그 생각에 빠져 있냐 이거예요. 그걸 ‘한 생각’이라 해요. 그러니까 한 생각에만 머물지 않으면, 모든 생각이 들어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모든 생각이 곧 다 들어온단 말이에요.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
이게 바로 부처란 말이에요.

부처는 돌멩이가 아니에요. 생각이 없는… 그건 돌부처고, 목불이고, 석불이지. 생불은 뭐다?
생불은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
생불은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
생불은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한 생각에 머물지 말라.
모든 생각을 하려면,
한 생각에 머물지 말라는 거예요.

그냥 모든 생각에 머물지 말라가 아니라, 지금 그 ‘한 생각’에 머물지 마라.
그러면 어떻게 돼요?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
그게 답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따라 하세요.
한 생각에 머물지 않으면,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
한 생각에 머물지 않으면,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
이게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에요. 응무소주가 뭐예요? 한 생각에 머물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러니 이생기심한다.
그러면 모든 마음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모든 생각이 일어나요.
하나에만 머물지 않으면, 천불이 일어난다.
천불이 깨어난다. 뭐든지 할 수 있게 되죠. 그럼 왜 우리는 뭐든지 못 하느냐?
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못 하는 거예요.
그거 때문에 발목이 붙잡히는 거죠. 그러니까 “모든 생각은 허망하다” 이 말, 이제 말이 되는 소리예요? 안 되는 소리예요? 근데 “모든 생각은 허망하다” 하면, 이걸 모르고 들으면, 마치 그게 꼭 깨달은 소리 같죠? 예,
이 ‘한’이라는 한 글자와 ‘모든’이라는 말, 이걸 자체적으로 구분을 못 해요.
“한 생각에도 머물지 말라.”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거든요. 근데 요걸 쏙 빼먹어요. 이놈의 이 머리에서 뭔 조작을 하는지 몰라. 들은 대로좀 공부했으면 좋겠는데…“한 생각에도 머물지 말라.” 그러니까 중생은 ‘한’을 빼먹고“생각에 머물지 말라.” 아, 알았어. “생각에 머물지 말아야지.” 이래요. 이게 중생 수준이에요. 이게 요즘 법사들 수준이에요. 요즘 유튜브 법사들, 다 이 수준이에요. 들어보세요. 다 이래요. 이 ‘한’ 글자에서,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몰라요. 근데 그걸, 법사가 10년 동안 그렇게 법문해봐요. 자기는 몰라요. 거기서 5년만 들어봐요.
지금 이게 구분이 안 돼요. 내 말이 사이비처럼 들려요. 이렇게 ‘한’ 글자 차이에 깨달음이 천지 차이로 갈려버려요.
“한 생각에도 머물지 않으면,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돼요? 모든 것이 열려버려요.
그러니까 결론은 뭐예요? 모든 생각을 하라는 거예요. “한 생각도 하지 마라”가 아니고요. 핵심은 그거예요.

“두두물물(頭頭物物), 부처 아닌 것이 없다.” 라는 걸 말하는 거예요. 모든 생각이 열려 있으니, 모든 게 가능하죠. 그럼 우리가 화가 나고 시비가 일어나겠어요?
모든 게 열려 있는데, 한 생각에만 사로잡히니까 화가 나고, 지금 시비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스님이 하는 얘기를 모든 생각으로 바라보면,
시비가 안 일어나요.
한 생각에 붙잡혀 있으니까, 이 말이 지금 시비가 되는 거예요. 왜?
“지가 깨달았대.” 이건 이게 아니거든요. 귀가 열리면, 이게 이치에 맞는 모든 말이 진리가 된단 말이에요.

어느 한 사람이 한 얘기가 진리가 아니고, 이치에 맞는 모든 말이 진리가 된단 말이에요. 그렇죠?

그런데 어느 하나의 스승, 어느 하나의 법사에 꽂혀 있으면 다른 게 다 부정돼요.
안 들어가요, 귀에.

그게 바로 머물러 있는 중생들의 세계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치에만 맞는 말을 하면, 모든 게 법문이 된단 말이에요. 법문 아닌 게 있어요? 없어요? 그때부터는 법문 아닌 게 없게 돼요. 이치에 맞으면, 한 생각만 벗어나면, 모든 사람이 하는 말이 다 법문이 된단 말이에요. 여러분들도 이치에 맞는 말씀을 하시면, 그게 다 법문이 되는 거예요. 그렇죠? 이치에 맞는 말. 이치에 맞는 말이 뭐예요? 고정됨이 없는 말이에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말. 그런데, “이것 좀 한번 해보는 게 어떨까요?”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이건 이치에 안 맞는 말이에요.
고정된 말이잖아요. 그런 말에 속지 말라는 거예요. 그죠.이해돼요?
이해돼도 내일 또 잊어버리겠지. 왜? 중생은 항상 한 생각에 고정되는 습이 돼 있거든요. 한 생각이 올라오면, 그 한 생각에 고정되는 게 습이 돼 있어요. 모든 생각이 안 일어나요. 모든 모양이 안 보여요.

사람을 볼 때도, 모든 모양이 안 보여요. 그냥 다 자기한테 꽂히는 그 모양만 보여요. 그 이미지만 본다는 거예요. 사람도 그렇고, “이 사람은 정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그럴까요? 중생의 눈에는 안 보여요.

지금 이 날씨를 봐도,이 날씨만 보여요.
이 날씨에, 밝고, 어둡고, 비 내리고,
눈 내리는 게 다 보여요?
중생의 눈에는 안 보이겠죠.
그래서 이 하늘을 보면, 여기 비도 오고, 눈도 오고, 천둥도 치고, 번개도 치고, 햇빛도 쨍쨍한 것들이 다 보여야한단 말이에요. 중생의 눈에는 보인다?
안 보인다? 안 보여요. 그게 중생이에요.

그럼 우리는 어떤 수행을 해야 해요?
“한 생각에도 머물지 말고, 모든 것을 보는 훈련을 하자.” 그게 수행이에요. 비가 오면, 비 안 오는 날, 햇빛 쨍쨍한 날, 천둥 치는 날, 눈 오는 날도 같이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이 스님을 보면, 이 스님이 승복을 입고 있는 모습, 안 입고 있는 모습, 막걸리 한잔 하고 있는 모습, 차를 마시고 있는 모습, 법문하는 모습, 자는 모습, 다 들어 있어야 해요.
그렇죠? 그러니까 이 스님은 모든 모양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럼 여러분들도 이해의 폭이 넓어지겠죠.

그런데 만약 스님이 맨날 승복만 입고, 스님다운 모습만하고 있으면, 스님이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면 확 깨지겠죠? 그게 중생이란 말이에요.
모든 사람을 볼 때, 모든 모양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보라는 말이에요.
그러면 분별심이 생겨요? 안 생겨요?
안 생기죠. 세상을 볼 때도,
세상에 나와 살 때도 마찬가지예요.
이게 바로 우리가 말하는 지혜로운 생각, 깨달음 생각 이해되죠? 안 돼도 괜찮아요.
자꾸 스스로에게 말하세요. “나는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요.”
그렇죠? 자기가 안 할 뿐이지.
자기가 고정되어 있어서,
고집이 세서 안 하는 거예요.
할 수 있다니까요. 안되는게 어딨어요.
우리는 이미 완전히 그랬단 말이에요.
자, 여기까지 합시다.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비된다.

고맙습니다. 마지막에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비된다” 하신 스님의 말씀에 깊은 감사와 울림을 느꼈습니다.

이 얼마나 지극한 마음으로, 우리 중생들의 무명을 풀어주시려
한 말씀 한 말씀을 그렇게 다 쏟아주셨을까요.

말씀을 듣는 내내 스님의 호흡과 숨결, 그 안에 담긴 지혜와 자비가 제 마음 깊이 전해졌습니다.

스님께서 기울여주신 그 귀한 에너지와 시간, 그것이 헛되지 않도록 저 역시 제 자리에서, 한 생각에 머물지 않고 모든 생각을 품는 수행을 묵묵히 이어가 보려 합니다. 스님의 지극한 가르침에 진심으로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도반님들과 함께 나눌 수 있음에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2 months ago | [YT] |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