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7. 24.(목) 오후 7:09 불교의 목적(2). 1. 존재의 실체증명 2. 존재의 작용방법
스님의 불교의 목적 이 법문을 들으며,
평소 살아오며 품고 있던 마음이 조금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느낌이었습니다.
스님께서 “걸으면 걷는 줄 알고, 먹으면 먹는 줄 알고, 말하면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고 하신 그 말씀 안에, 이미 삶 전체를 바로 쓰는 길이 담겨 있다는 것이 조용히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그저 흘러가듯 해오던 일상 하나하나가 실은 공부였고, 또 공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스님의 법문은 언제나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부드럽게 비춰주고, 말 없는 지도처럼 걸어가는 발걸음을 정리해주는 것 같습니다.
혹 제가, 스님의 원문과 조금 다르더라도, 그 말씀을 삶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눈 것이니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법문을 함께 나누며, 우리 모두가 제자리에서 더 환하게 깨어 있기를 소망합니다. 고맙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제에 이어서, 즉 연결해가지고 공부를 마무리 지어봅시다. 어제 우리가 했던 내용을 다시 재정리해 보면, 물론 말이 익숙치 않고 또 이런 용어가 익숙치 않아서 똑같은 말을 안 해도 되는데, 무슨 뜻으로 우리가 이야기가 되고 있나, 내용을 우리가 지금 주고받을 수 있잖아요.
여러분, 이 내용의 흐름을 그냥 가볍게 따라오시면 돼요. 외우려고 하면 안 돼요. 계속 반복할 거니까, 계속 이 내용의 흐름을 따라오면 되는 거예요. 외울 필요 없어요.
우리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죠. 그러니까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이렇게 연결시키는 거예요. 그럼 뭘 깨달을 거냐, 이게 나오겠죠, 자연히.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그럼 무엇을 깨닫는 거냐.
지금 존재하는 이것들이 도대체 뭐냐, 이게 신기하잖아요. 왜 나무는 이렇게 존재하고, 왜 하늘은 저렇게 존재하고, 왜 돌멩이는 저렇게 존재하고, 왜 저 텃밭에 식물들은 저렇게 존재하고, 그죠? 왜 산은 저렇게 존재하고, 저 구름은 왜 저렇게 존재하고.
근데 ‘나’라는 것은 또 왜 이렇게 존재하고. 이런 모든 것들이, 모든 존재들에 대한 성찰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존재들의 실체가 뭐냐. "도대체 저게 도대체 뭐지?" 이걸 생각하는 거, 이걸 깨닫는 거예요.
왜, 저게 어디서 왔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잘 모르잖아요. 누가 만들었는지, 어디서 샀는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르니까 우리가 뭘 알아야 그걸 사용을 할 거 아닙니까?
보살님도 공양간에서 누가 택배를 보냈어. 그러면 그게 뭔지 일단 알아봐야겠죠. "이게 뭐가 왔지?" 뜯어봐야 할 거 아니에요.
그리고 여기 뭔지를 처음 보는 거면, 이리저리 만져도 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좀 약간 이렇게 잘라도 보고 해봐야 할 거예요.
처음 본 거라면, "도대체 이게 뭐꼬?" 그게 우리가 말하는 존재에 대한 성찰이란 말이에요. 존재의 실체를 밝힌다.
그래서 우리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데, 뭘 깨닫는 거냐. 모든 존재의 실체를 증명하는 것. 단순히 ‘나’를 가리키는 것만 아니에요. 모든 존재라고 하는 거죠.
모든 존재들의 실체, 도대체 뭐냐 저게. 이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나도 문득 태어났는데, 그냥 이게 내가 뭔지도 모르고 막 살아가면, 이게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겠죠.
“뭐지?” 한번 알아보자는 게 깨달음이에요. 그렇죠? 이게 자연스럽고 너무 상식적인 얘기잖아요. 우리가 뭘 봐도, 일단 이게 뭐야?라고 봐야 쓸 거 아닙니까?
어려운 얘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데, 뭘 깨닫는 거냐? 모든 존재의 실체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에요. 모든 존재의 실체를. 그러니까 쉬운 말로 하면, "저게 뭔지, 이게 뭔지 정확하게 알자."는 거죠. 알아야 쓸 수 있으니까. 모르면 못 써요. 모르면 다른데다 쓰는 거죠.
이거 구워 먹어야 될 걸 삶아 먹게 되고, 삶아 먹어야 될 걸 그냥 생으로 먹게 되고, 모르고 그런다는 거죠.
무슨 말씀인지 이해되죠? 그래서 우리 불교는 뭐다? 깨달음. 불교라는 건 깨달음의 종교다. 뭘 깨닫느냐. 그렇ㅈ
불교는 뭐다. 네 그렇게 말을 이어가시면데요. 부처님 가르침을 불교라 하죠. 불교는 뭐다? 그럼 뭘 깨닫는 거냐. 그렇죠.
그래서 모든 존재의 실체를 정확하게 아는 것. 그죠? 그러고 나면 이 존재의 실체를 알았으면, 이걸 우리가 왜 알아요? 뭐 하려고? 쓸려고. 작용하려고. 사용하려고. 용도에 맞게끔.
그래서 첫 번째는 이 모든 존재의 실체를 정확하게 아는 것.
두 번째는 이 존재의 실체를 알았으면 바르게 쓰는 것. 작용하는 방법.
이거, 불교의 전부란 말이에요. 불교의 전부라 할 수 없죠. 이게 우리 인생의 전부예요.
인생. 인생이 전부 이것뿐이에요. 이 세상 다 이미 있는 거잖아. 이거 뭐, 산을 우리가 만들었어요? 이건 본래 있는 건데, 우리는 이걸 정확하게 알아서 정확하게 사용만 하면 되는 거라고. 우리가 만든 게 아니라, 다 이미 만들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이 정도는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해야 되는 일인 거죠. 그걸 우리 부처님은 최소한의 이 가르침을 전해주신 거예요.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최소한 요 정도는 알고 살아야 한다. 이것도 모르고 살면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중생이라 그래요. 근데 옛날 말로는 중생을 ‘짐생’이라고 했어. 짐생. 짐생이 짐승이 된 거예요. 이 정도도 모르고 숨 쉬고 살아가면, 그건 짐생이다. 짐생과 같다. 이 정도는 알아야 사람이 사람답다 하겠구나.
그러니까 정확히 보면, 불교는 어떤 특별하고 신비한 게 아니에요.
사람이 사람으로서 배워야 할 최소한의 바른 견해예요. 사람이 사람으로서 알아야 할 최소한의 이치란 말이에요.
불교다. 불교는 뭐다? 정확하게 말 흐릿해 하지 말고, 끝까지 정확하게 하세요. 불교는 뭐다? 깨달음의 종교. 불교는 뭐다? 깨달음의 종교. "어, 그럼 뭘 깨닫는 거냐?" "어, 왜? 뭐 하려고?" 그렇죠. 바르게 쓰려고, 제대로 쓰려고. 이게 불교의 전부예요.
그래서 불교 하면 뭡니까?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뭘 깨닫은 거냐? 모든 존재의 실체. 모든 존재의 실체를 아는 겁니다. 모든 존재의 실체, 왜 이 모든 존재를 잘, 제대로, 맞게 사용하려고 하죠? 얼마나 쉬워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 배워서 아는 게 아니죠. 그냥 이 말만 조금 정리하면 쉬운 거예요.
그런데 어제 우리가 이제 이 존재 실체를 배웠죠. 그러면 이 존재라는 게 뭐냐 보니까, 모든 존재의 원리가 똑같더라. 모든 존재의 원리가! 사람만 그런 게 아니다. 동물도 그렇고, 식물도 그렇고, 저 생명 없는 바윗돌도 그렇고, 모든 존재. 그래서 유정, 무정이라 그래요.
우리 정신이 있는 건, 숨 쉬는 건 유정체. 저 돌멩이와 같은 건 무정체. 그러니까 유정, 무정 모든 존재들. 모든 존재들은 존재의 원리가 다 똑같더라. 어제 배운 거죠.
그래서 모든 존재, 그 원리. 첫 번째,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게 하나가 있고, ‘근원’. 근원. 그 다음에 이 근원에서 생겨난 결과물이 있어요, ‘결과물’. 그리고 이 근원에서 결과물이 만들어지도록 연결시키는 줄기 같은 게 있단 말이에요.
모든 존재가 다 이와 같이 만들어졌더라. 예를 들면, 고추대에서 고추가 열리려면 첫 번째 뭐가 있어야 돼요? 고추에 뿌리가 있어야 되는 거죠, ‘뿌리’. 그 다음에 뭐가 있어야 돼요? ‘줄기’가 있어야지. 그 다음에 뭐가 있는 거죠? 고추가 있는거죠.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그 근원된 뿌리가 있고, 그 다음에 이 뿌리에서 우리는 결국 열매, ‘열매’가 맺히는데, 뿌리에서 그냥 열매가 맺히지 않더라. 반드시 연결하는 ‘연결체’. 보통 이와 같이 있는 겁니다.
바다에서 파도가 치죠? 그럼 연결체 뭐가 있어야 돼요? ‘바람’이 있어야 된다. 모든 게 이와 같아요. 그죠? 여기에 해당 안 되는 게 없더라, 그렇죠?
그래서 하늘에서 비가 내리려면 뭐가 있어야 돼? 먼저 ‘구름’이 있어야겠지. 그 다음에 뭐가 맞아야 돼요? 구름이 비가 되려면 그게 맞는 조건이 돼야겠죠. 뭐, 온도가 맞아야 된다든지, 기압이 서로 부딪친다든지, 충돌이 일어나야 되는 거죠. 이것도 연결체인 거죠. 그러면 뭐가 됩니까? ‘비’가 돼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와 같이 그 근원된 뿌리가 있고, 그 결과가 있는데, 이걸 연결시키는 게 반드시 있어야 된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게...없어요.
그럼 우리 부처님은 그걸 '연기법'이라고 설명하셨어요. '연기법'. ‘인연과’. '인'이라고 하는 건 뿌리예요. 뿌리, 근원, 뿌리. ‘연’이라고 하는 건 그 연결체란 말이에요. 연결체. ‘과’라고 하는 건 열매, 결과. 또 그걸 우리 부처님, 불교에서는 뭐라고 하냐? ‘법신’, ‘보신’, ‘화신’이라 이렇게 해요. 법신이라는 게 그 부처의 본래 성품을 가리켜요, 본래 성품. 그 다음에 화신이라는 건 그 부처의 본래 성품에서 이제 나타난 형상을 가리켜요. 그리고 이 법신에서 화신이 나오려면 ‘보신’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해서, 우리 법신이라는 걸 소위 쉬운 말로 하면 ‘마음’을 가리킵니다. 본래 마음은 청정해야 한다. ‘청정하다’는 말은 오염돼 있지 않아야 돼요. 그러니까 어떤 것에도 사전에 물들지 않고 있어야 돼. 선입견이 없어야 되고. 그죠? 선입견, 판단, 이런 게 없어야 되는 거예요. 마음은. 예. 그래야 모든 생각을 일으킬 수 있겠죠. 본래 내 청정한 마음에 선입견, 지레짐작, 이런 게 없어야겠죠. 그래야 모든 가능성이 있는 생각이 일어나겠죠.
‘원만보신 노사나불’. 그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에는 어떠한 것도 오염되면 안 돼요. 이거다, 저거다 있으면 안 돼요. 그래야 모든 생각을 할 수 있어. ‘원만하다’, ‘생각이 참 원만하다’, ‘너 참 생각이 원만하구나’.
‘원만보신 노사나불’, 이 노사나불, 비로자나불은 다 상징성이야. 그러면 마음에 어떠한 티끌도 없이, 생각이 원만하게 일어나니까 그 나타난 결과물이에요. 사람은 자유롭겠죠. 모든 것으로 다 변화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겠죠. 그게 천백억 화신 석가모니불. 이렇게 된단 말이에요. 부처. 저기, 우리 불교에서 이렇게 얘기하면, 그럼 우리 본래 사람으로 치면, 모든 사람한테는 마음이 있다는 거야.
옛날 우리나라 말로 하면 ‘혼백’이라고 해요. 혼백, 마음, 혼백이 있다는 거. 그죠? ‘혼’이라는 게 있다. ‘얼’이라는 게 있다는 거야. 모든 생명은.
근데 그 마음에서, 그 홀에서, 어려서, ‘정신’이 일어난 거예요. 그걸 ‘생각’이라 해요, 생각. 그래서 이 마음에서 생각이 일어나면, 이 생각이 몸을 조종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있고, 생각이 있고, 몸이 있다. 사람은. 동물도 그런 거죠.
이와 같이 모든 존재의 실체를 이렇게 밝혀놨단 말이에요. 모든 존재는 다, 그래서 몇 가지로 되어 있다? 자, 모든 존재는 몇 가지로 돼 있다? 세 가지. 그게 절대 잊어먹으면 안 돼요.
모든 존재는 몇 가지로 돼 있다? 자, 세 가지로 존재했는데, 사람은 뭘로 돼 있다? 마음. 생각. 몸 자, 부처는 뭐로 돼 있다? 법신. 보신. 화신 아니, 아까 내가 부처는 법신, 보신, 화신. 연기법으로는 그걸 뭐라고 한다? 인.연.과 그렇지. 연, 과. 이렇게 되는 거죠. 인, 연, 과가 있더라.
저 고추는 뭐가 되어 있더라? 그렇죠? 뿌리,줄기.열매 바다의 파도는 어떻게 되어 있더라? 바다, 바람, 파도. 이렇게 돼야겠죠. 인, 연, 과니까.
이렇게, 우리가 여러분들이 일상에서 관찰해 보시라는 거예요. 모든 건 다 그렇게 세 가지 조건과 조건과 조건이 연결되어서, 세 가지의 조건과 조건과 조건이 서로 동시에 딱 존재함으로써 완전한 존재가 만들어지더라는 거야. 완전한 존재가 만들어지더라. 이게 우리가 말하는 정상적인 완전체예요. 정상적인 완전체란 말이에요.
근데 이제 한번 봅시다. 비정상적인 존재는 뭐냐? 이 가운데 하나가 두 개가 없는 거예요. 그걸 ‘비정상 존재’라고 그래요. 있어도 인식을 못하는 겁니다.
뿌리도 있고, 줄기도 있는데 열매가 안 맺혀. 그걸 고치라고 할 수 있어요? 바다도 있고, 바람도 부는데 파도가 안 쳐. 그럼 바다가 어떻게 되겠어요? 썩어버려요. 물고기가 못 살아요.
하늘이 맨날 구름만 꽉 껴 있어. 비가 안 내려.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 못 살아요.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마음도 있고, 생각도 있고, 몸도 있어야 되는데, 중생은 생각과 몸만 알아요. 생각은 계속 쓰고 있으니까, 몸도 계속 눈에 보이니까. 이 마음이란 실체를 모르더라, 중생은. 그래서 일단 마음을 일깨워준 겁니다. 그걸 ‘견성’이라 해요.
중생은 마음을 모르고 살았어요. 맨날 생각하고, 맨날 이 몸뚱이 뭐야? 간수하는 거밖에 몰랐다고. 생각할 때는 생각뿐이었고, 또 이 몸이 어쩌면 그냥 예쁘게 닦는 거밖에 모르지, 마음이라는 걸 몰라요. 있다는 것도 안 믿고.
그래서 우리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 이유가 ‘그 마음이라는 게 있다’를 알려주시려고 출현하셨다고. 마음이란 게 있다는 걸, 왜? 중생은 아니까 모르니까. 뭘 모르니까? 그리고 마음을 모르니까 마음을 일러주는 거예요. 나머지는 생각과 몸은 부처님이 안 일러줘도 있었어요, 없었어요?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부처님이 깨달아주신 거지, 마음이 전부는 아니에요.
중생은 원래 두 개는 갖고 있었다고. 생각과 몸을. 마음은 안 갖고, 몰랐단 말이에요. 그래서 ‘마음’을 깨닫게 해준 거예요.
그러면 마음과 생각과 몸이 딱 하나로, 완전무결해지겠죠? 원망 부족 없어지겠죠? 완전체가 되겠죠.
그래서 우리 부처님은 ‘마음’을 특별히 강조하여 설명하신 겁니다. 왜? 생각과 몸은 알아서 잘하고 있잖아, 그죠?
그랬더니 우리 어리석은 또 부처님 제자들, 수행자들이 뭐냐? “마음이 전부다”라고 해버린 거야.
아니에요. 몸과 생각은 그렇지 않아도 잘 쓰고 있으니 말을 안 한 거지. 강조해서. 마음이 전부가 아니다.
‘마음’과 ‘몸’과 ‘생각’은 똑같이 중요하다.
근데 이 마음이라는 것과, 마음과 생각과 몸은 성질이 달라요. ‘마음’은 무형이에요. 무형. 모양과 색깔이 없어. 형태가 없어요. 마음은.
우리 마음은 지금 보고, 듣고, 하고 있는 그거거든요.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그게 다 마음이에요.
근데 그 마음은 지금 어떻게 우리가 드러낼 수가 없어요. 모양이 없어서. 형상이 없고. 그죠? 근데 있어요. 있는데, 이 마음이 안 드러나. 우리 몸은 이렇게 드러나는데. 그래 가만히 보니, 마음은 무형으로 항상 존재하더라.
어떻게? 지금 말하고, 보고, 듣고, 생각하는 그게 다 ‘마음’이란 말이에요. 이와 같이 ‘마음’은 무형으로써 항상 존재하더라.
근데 눈에 안 보여. 눈에 안 보이니까. 중생은 맨날 눈으로만 보려고 하잖아. 손으로만 잡으려고 하잖아. 중생은 오감으로만 다 그 존재를 확인하려 하거든요.
근데 이건 오감으로 확인이 안 돼요. 모양과 형상, 색깔이 없어요. 그래서 오감으로 확인이 안 되지만, 지금 존재하고 있는 그거란 말이야.
그래서 이건 어릴 때나 잠잘 때나 어떤 때에도, 이 마음, 어디 간 적이 없어요.
아, 그러니까 ‘마음’은 무형으로 항상 존재하고 있구나 라는 걸 우리가 ‘마음이 마음을 깨닫는’ 겁니다. 그리고 보니까, 우리 몸뚱아리와 생각은 또 마음과 성질이 반대예요.
몸과 생각은, 생각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로서 존재하고, 그래서 이 ‘생각’을 우리가 볼 수 있다고. 우리 몸은 육신으로 볼 수 있단 말이에요. 물질로. 그래서 ‘생각’과 ‘몸’은, 또 ‘마음’과 반대로 이미지와 모양과 색깔이 있네?
그러니까 이거는 모양과 색깔과 이미지가 있으니, 이건 변하겠어요, 안 변하겠어요? 변해요. 이건 결국 ‘소모’된단 말이야. ‘소모’, ‘달아진단’ 말이에요. 아, 모양과 색깔과 형태가 있는 건 다 소모되고, 변하고, 사라지는구나. 그쵸? 모양과 색깔이 없는 우리 ‘마음’은 소모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겠구나. 이거 뭐 있어야 달아지지.
아, 그래서 가만히 보니 우리 ‘생각’은 계속 찰나찰나로 변하고. 자, 생각은 어떻게 변한다? 찰나찰나. 1초보다 빠르게 변한단 말이에요. 엄청 착착 돌아가 버려요. 왜? 모양과 색깔이 있으니까 빨리 변하는 거야. 우리 ‘몸’은 한 생을 기준으로 변하는 거예요.
근데 이 생각과 몸은 계속 변하지만, 없어지는 건 아니지.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저 생각에서 이 생각으로.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거지,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생각은. 우리 몸도 그렇단 말이에요.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저 몸에서 이 몸으로,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왔다 갔다 하는 거지. 변화는 없어지는 게 아니야. 그죠?
근데 우리 ‘마음’은 왔다 갔다 하지 않아. 가만 보니, 우리 ‘마음’은 항상 존재하면서, 몸과 생각은 계속 변해.
그러니까 결국은 ‘변한다’. ‘사라지는’ 건 아니라고. 또 다른 걸로 전환되는 거죠.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전환되듯이, 우리는 이 몸에서 저 몸으로 또 바뀐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몸’과 ‘생각’이 변하는 건 당연하다. 슬픈 일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게 당연하고, 정상적인 일이란 말이에요. 생각이 변하고, 몸이 변하는 건 정상이다? 비정상이다? 정상이다. 그래서 우리 몸이 늙고 병들고 죽는 건 정상이다? 아니다? 정상이다.
왜 또 다시 새 몸 받아요? 왜? 생각과 같거든요. 우리 생각이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저 생각에서 또 변하죠. 그럼 우리 생각이 죽는다고 그래요? 안 하죠.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나잖아요.
우리 몸도 또 다른 몸이 일어난단 말이야. 이와 같이, 아, 몸과 생각이 변하는 건 너무 지극히 정상이고, 당연하고, 반드시 변해야 하는구나. 몸과 생각은.
중생은 ‘안 변해서’ 문제란 말이에요. 생각이 집착하거나, 중생은 뭔가 고집하면 생각이 안 변해. 그냥 맨날 그 생각에 딱 틀어박혀 있단 말이야. 그게 한 생각에 머물러 있다.
중생은 한 생각에 계속 머물러 있으니까, 오염되고 썩었다 이 말이에요. 냄새난다, 더럽다 이 말이야. 왜? 생각이 변하지 않느냐, 그렇죠?
그래야 우리가 씻을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그렇죠?
우리 몸도 계속 이렇게 늙어 빠진 몸으로 살고 싶어요? 영원히? 또 변해서 젊어지면 새 몸 받아야 될 거 아니에요, 그죠?
그래서 결국 우리는 마음은 변하지 않으니까, 이 마음의 뿌리에서 계속 새 몸과 새 생각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이건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기쁜 일이란 말이야. 늙고 병들고 죽는 게 슬픈 일이 아니란 말이에요. 당연한 일이고, 아, 우리는 새 몸 받으러 가는구나.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란 말이에요.
이렇게 아니까, 생사의 두려움이 사라지더라. 그리고 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더라. 존재의 실체를 바로아니까 그렇다는 거예요. 이게 이제 우리가 존재 실체를 아는 목적입니다.
생사 해탈이 되어버렸잖아. 생사가 없어요. 마음은 맨날 그 자리에 있어. 몸과 생각이 변하는 게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좋은 일이잖아요.
생각이 좀 변해야 한단 말이야. 생각이 좀... 졸지 말고. 생각이 변해야겠습니까? 안 변해야겠습니까? 생각이 변해야겠어요? 안 변해야겠어요? 생각이 변하겠어요. 제발 좀 다양하고, 남이 예측하지 못한, 정말 자기만의 신선하고, 생동감 있고, 정말 활기찬 생각을 하면, 내 몸도 자연히 그렇게 따라간단 말이에요. 내 인생도 그렇게 따라오고, 나머지는 다 그림자야. 다 따라와.
아무리 그래도 우리 마음은 안 변하니까. 여기에 이제 우리가 존재의 실체를 아는 그 ‘앎’과 그 ‘목적’이란 말이에요. 여기까지가 됐습니다
공유禪
<어느 수행자의 독백 10-1>
2025. 7. 24.(목) 오후 7:09
불교의 목적(2).
1. 존재의 실체증명
2. 존재의 작용방법
스님의 불교의 목적 이 법문을 들으며,
평소 살아오며 품고 있던 마음이
조금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느낌이었습니다.
스님께서 “걸으면 걷는 줄 알고, 먹으면 먹는 줄 알고, 말하면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고 하신 그 말씀 안에,
이미 삶 전체를 바로 쓰는 길이 담겨 있다는 것이 조용히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그저 흘러가듯 해오던 일상 하나하나가
실은 공부였고, 또 공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스님의 법문은 언제나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부드럽게 비춰주고,
말 없는 지도처럼
걸어가는 발걸음을 정리해주는 것 같습니다.
혹 제가, 스님의 원문과 조금 다르더라도,
그 말씀을 삶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눈 것이니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법문을 함께 나누며,
우리 모두가 제자리에서 더 환하게 깨어 있기를 소망합니다.
고맙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제에 이어서, 즉 연결해가지고 공부를 마무리 지어봅시다.
어제 우리가 했던 내용을 다시 재정리해 보면,
물론 말이 익숙치 않고 또 이런 용어가 익숙치 않아서 똑같은 말을 안 해도 되는데,
무슨 뜻으로 우리가 이야기가 되고 있나,
내용을 우리가 지금 주고받을 수 있잖아요.
여러분, 이 내용의 흐름을 그냥 가볍게 따라오시면 돼요. 외우려고 하면 안 돼요.
계속 반복할 거니까,
계속 이 내용의 흐름을 따라오면 되는 거예요. 외울 필요 없어요.
우리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죠.
그러니까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이렇게 연결시키는 거예요.
그럼 뭘 깨달을 거냐,
이게 나오겠죠, 자연히.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그럼 무엇을 깨닫는 거냐.
지금 존재하는 이것들이 도대체 뭐냐,
이게 신기하잖아요.
왜 나무는 이렇게 존재하고,
왜 하늘은 저렇게 존재하고,
왜 돌멩이는 저렇게 존재하고,
왜 저 텃밭에 식물들은 저렇게 존재하고, 그죠?
왜 산은 저렇게 존재하고,
저 구름은 왜 저렇게 존재하고.
근데 ‘나’라는 것은 또 왜 이렇게 존재하고.
이런 모든 것들이,
모든 존재들에 대한 성찰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존재들의 실체가 뭐냐.
"도대체 저게 도대체 뭐지?"
이걸 생각하는 거, 이걸 깨닫는 거예요.
왜, 저게 어디서 왔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잘 모르잖아요.
누가 만들었는지, 어디서 샀는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르니까
우리가 뭘 알아야 그걸 사용을 할 거 아닙니까?
보살님도 공양간에서 누가 택배를 보냈어.
그러면 그게 뭔지 일단 알아봐야겠죠.
"이게 뭐가 왔지?" 뜯어봐야 할 거 아니에요.
그리고 여기 뭔지를 처음 보는 거면,
이리저리 만져도 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좀 약간 이렇게 잘라도 보고 해봐야 할 거예요.
처음 본 거라면, "도대체 이게 뭐꼬?"
그게 우리가 말하는 존재에 대한 성찰이란 말이에요. 존재의 실체를 밝힌다.
그래서 우리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데,
뭘 깨닫는 거냐.
모든 존재의 실체를 증명하는 것.
단순히 ‘나’를 가리키는 것만 아니에요.
모든 존재라고 하는 거죠.
모든 존재들의 실체, 도대체 뭐냐 저게.
이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나도 문득 태어났는데,
그냥 이게 내가 뭔지도 모르고 막 살아가면,
이게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겠죠.
“뭐지?” 한번 알아보자는 게 깨달음이에요. 그렇죠? 이게 자연스럽고 너무 상식적인 얘기잖아요. 우리가 뭘 봐도,
일단 이게 뭐야?라고 봐야 쓸 거 아닙니까?
어려운 얘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데,
뭘 깨닫는 거냐?
모든 존재의 실체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에요. 모든 존재의 실체를.
그러니까 쉬운 말로 하면,
"저게 뭔지, 이게 뭔지 정확하게 알자."는 거죠. 알아야 쓸 수 있으니까.
모르면 못 써요.
모르면 다른데다 쓰는 거죠.
이거 구워 먹어야 될 걸 삶아 먹게 되고,
삶아 먹어야 될 걸 그냥 생으로 먹게 되고,
모르고 그런다는 거죠.
무슨 말씀인지 이해되죠?
그래서 우리 불교는 뭐다? 깨달음.
불교라는 건 깨달음의 종교다.
뭘 깨닫느냐. 그렇ㅈ
불교는 뭐다.
네 그렇게 말을 이어가시면데요.
부처님 가르침을 불교라 하죠.
불교는 뭐다?
그럼 뭘 깨닫는 거냐. 그렇죠.
그래서 모든 존재의 실체를 정확하게
아는 것. 그죠?
그러고 나면 이 존재의 실체를 알았으면,
이걸 우리가 왜 알아요? 뭐 하려고?
쓸려고. 작용하려고. 사용하려고.
용도에 맞게끔.
그래서 첫 번째는
이 모든 존재의 실체를 정확하게 아는 것.
두 번째는
이 존재의 실체를 알았으면 바르게 쓰는 것. 작용하는 방법.
이거, 불교의 전부란 말이에요.
불교의 전부라 할 수 없죠.
이게 우리 인생의 전부예요.
인생. 인생이 전부 이것뿐이에요.
이 세상 다 이미 있는 거잖아.
이거 뭐, 산을 우리가 만들었어요?
이건 본래 있는 건데,
우리는 이걸 정확하게 알아서 정확하게 사용만 하면 되는 거라고.
우리가 만든 게 아니라, 다 이미 만들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이 정도는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해야 되는 일인 거죠.
그걸 우리 부처님은 최소한의 이 가르침을 전해주신 거예요.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최소한 요 정도는 알고 살아야 한다.
이것도 모르고 살면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중생이라 그래요.
근데 옛날 말로는 중생을 ‘짐생’이라고 했어. 짐생. 짐생이 짐승이 된 거예요.
이 정도도 모르고 숨 쉬고 살아가면,
그건 짐생이다. 짐생과 같다.
이 정도는 알아야 사람이 사람답다 하겠구나.
그러니까 정확히 보면,
불교는 어떤 특별하고 신비한 게 아니에요.
사람이 사람으로서 배워야 할
최소한의 바른 견해예요.
사람이 사람으로서 알아야 할
최소한의 이치란 말이에요.
불교다. 불교는 뭐다?
정확하게 말 흐릿해 하지 말고,
끝까지 정확하게 하세요.
불교는 뭐다? 깨달음의 종교.
불교는 뭐다? 깨달음의 종교.
"어, 그럼 뭘 깨닫는 거냐?"
"어, 왜? 뭐 하려고?"
그렇죠. 바르게 쓰려고, 제대로 쓰려고.
이게 불교의 전부예요.
그래서 불교 하면 뭡니까?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뭘 깨닫은 거냐?
모든 존재의 실체.
모든 존재의 실체를 아는 겁니다.
모든 존재의 실체, 왜 이 모든 존재를 잘, 제대로, 맞게 사용하려고 하죠?
얼마나 쉬워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 배워서 아는 게 아니죠. 그냥 이 말만 조금 정리하면 쉬운 거예요.
그런데 어제 우리가 이제 이 존재 실체를 배웠죠. 그러면 이 존재라는 게 뭐냐 보니까, 모든 존재의 원리가 똑같더라.
모든 존재의 원리가! 사람만 그런 게 아니다. 동물도 그렇고, 식물도 그렇고, 저 생명 없는 바윗돌도 그렇고, 모든 존재.
그래서 유정, 무정이라 그래요.
우리 정신이 있는 건, 숨 쉬는 건 유정체.
저 돌멩이와 같은 건 무정체.
그러니까 유정, 무정 모든 존재들.
모든 존재들은 존재의 원리가 다 똑같더라. 어제 배운 거죠.
그래서 모든 존재, 그 원리. 첫 번째,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게 하나가 있고, ‘근원’. 근원.
그 다음에 이 근원에서 생겨난 결과물이 있어요, ‘결과물’.
그리고 이 근원에서 결과물이 만들어지도록 연결시키는 줄기 같은 게 있단 말이에요.
모든 존재가 다 이와 같이 만들어졌더라. 예를 들면, 고추대에서 고추가 열리려면
첫 번째 뭐가 있어야 돼요? 고추에 뿌리가 있어야 되는 거죠, ‘뿌리’. 그 다음에 뭐가 있어야 돼요? ‘줄기’가 있어야지. 그 다음에 뭐가 있는 거죠? 고추가 있는거죠.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그 근원된 뿌리가 있고, 그 다음에 이 뿌리에서 우리는 결국 열매, ‘열매’가 맺히는데, 뿌리에서 그냥 열매가 맺히지 않더라. 반드시 연결하는 ‘연결체’. 보통 이와 같이 있는 겁니다.
바다에서 파도가 치죠?
그럼 연결체 뭐가 있어야 돼요?
‘바람’이 있어야 된다.
모든 게 이와 같아요. 그죠?
여기에 해당 안 되는 게 없더라, 그렇죠?
그래서 하늘에서 비가 내리려면 뭐가 있어야 돼? 먼저 ‘구름’이 있어야겠지. 그 다음에 뭐가 맞아야 돼요?
구름이 비가 되려면 그게 맞는 조건이 돼야겠죠. 뭐, 온도가 맞아야 된다든지, 기압이 서로 부딪친다든지, 충돌이 일어나야 되는 거죠. 이것도 연결체인 거죠.
그러면 뭐가 됩니까? ‘비’가 돼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와 같이 그 근원된 뿌리가 있고, 그 결과가 있는데,
이걸 연결시키는 게 반드시 있어야 된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게...없어요.
그럼 우리 부처님은 그걸 '연기법'이라고 설명하셨어요. '연기법'.
‘인연과’. '인'이라고 하는 건 뿌리예요.
뿌리, 근원, 뿌리.
‘연’이라고 하는 건 그 연결체란 말이에요. 연결체.
‘과’라고 하는 건 열매, 결과.
또 그걸 우리 부처님, 불교에서는 뭐라고 하냐? ‘법신’, ‘보신’, ‘화신’이라 이렇게 해요.
법신이라는 게
그 부처의 본래 성품을 가리켜요, 본래 성품.
그 다음에 화신이라는 건 그 부처의 본래 성품에서 이제 나타난 형상을 가리켜요. 그리고 이 법신에서 화신이 나오려면 ‘보신’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해서, 우리 법신이라는 걸 소위 쉬운 말로 하면 ‘마음’을 가리킵니다. 본래 마음은 청정해야 한다.
‘청정하다’는 말은 오염돼 있지 않아야 돼요. 그러니까 어떤 것에도 사전에 물들지 않고 있어야 돼. 선입견이 없어야 되고. 그죠?
선입견, 판단, 이런 게 없어야 되는 거예요. 마음은. 예. 그래야 모든 생각을 일으킬 수 있겠죠. 본래 내 청정한 마음에 선입견, 지레짐작, 이런 게 없어야겠죠. 그래야 모든 가능성이 있는 생각이 일어나겠죠.
‘원만보신 노사나불’. 그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에는 어떠한 것도 오염되면 안 돼요.
이거다, 저거다 있으면 안 돼요.
그래야 모든 생각을 할 수 있어. ‘원만하다’, ‘생각이 참 원만하다’, ‘너 참 생각이 원만하구나’.
‘원만보신 노사나불’, 이 노사나불, 비로자나불은 다 상징성이야.
그러면 마음에 어떠한 티끌도 없이,
생각이 원만하게 일어나니까 그 나타난 결과물이에요. 사람은 자유롭겠죠.
모든 것으로 다 변화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겠죠. 그게 천백억 화신 석가모니불. 이렇게 된단 말이에요. 부처.
저기, 우리 불교에서 이렇게 얘기하면,
그럼 우리 본래 사람으로 치면,
모든 사람한테는 마음이 있다는 거야.
옛날 우리나라 말로 하면 ‘혼백’이라고 해요. 혼백, 마음, 혼백이 있다는 거. 그죠? ‘혼’이라는 게 있다. ‘얼’이라는 게 있다는 거야. 모든 생명은.
근데 그 마음에서, 그 홀에서, 어려서, ‘정신’이 일어난 거예요.
그걸 ‘생각’이라 해요, 생각.
그래서 이 마음에서 생각이 일어나면,
이 생각이 몸을 조종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있고, 생각이 있고,
몸이 있다. 사람은. 동물도 그런 거죠.
이와 같이 모든 존재의 실체를 이렇게 밝혀놨단 말이에요. 모든 존재는 다, 그래서 몇 가지로 되어 있다?
자, 모든 존재는 몇 가지로 돼 있다? 세 가지. 그게 절대 잊어먹으면 안 돼요.
모든 존재는 몇 가지로 돼 있다?
자, 세 가지로 존재했는데,
사람은 뭘로 돼 있다? 마음. 생각. 몸
자, 부처는 뭐로 돼 있다? 법신. 보신. 화신
아니, 아까 내가 부처는 법신, 보신, 화신. 연기법으로는 그걸 뭐라고 한다? 인.연.과 그렇지. 연, 과. 이렇게 되는 거죠.
인, 연, 과가 있더라.
저 고추는 뭐가 되어 있더라? 그렇죠?
뿌리,줄기.열매
바다의 파도는 어떻게 되어 있더라? 바다, 바람, 파도. 이렇게 돼야겠죠. 인, 연, 과니까.
이렇게, 우리가 여러분들이 일상에서 관찰해 보시라는 거예요. 모든 건 다 그렇게 세 가지 조건과 조건과 조건이 연결되어서,
세 가지의 조건과 조건과 조건이 서로 동시에 딱 존재함으로써 완전한 존재가 만들어지더라는 거야.
완전한 존재가 만들어지더라. 이게 우리가 말하는 정상적인 완전체예요. 정상적인 완전체란 말이에요.
근데 이제 한번 봅시다. 비정상적인 존재는 뭐냐? 이 가운데 하나가 두 개가 없는 거예요. 그걸 ‘비정상 존재’라고 그래요. 있어도 인식을 못하는 겁니다.
뿌리도 있고, 줄기도 있는데 열매가 안 맺혀. 그걸 고치라고 할 수 있어요?
바다도 있고, 바람도 부는데 파도가 안 쳐. 그럼 바다가 어떻게 되겠어요? 썩어버려요. 물고기가 못 살아요.
하늘이 맨날 구름만 꽉 껴 있어.
비가 안 내려.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 못 살아요.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마음도 있고, 생각도 있고, 몸도 있어야 되는데,
중생은 생각과 몸만 알아요.
생각은 계속 쓰고 있으니까,
몸도 계속 눈에 보이니까.
이 마음이란 실체를 모르더라, 중생은.
그래서 일단 마음을 일깨워준 겁니다.
그걸 ‘견성’이라 해요.
중생은 마음을 모르고 살았어요.
맨날 생각하고, 맨날 이 몸뚱이 뭐야? 간수하는 거밖에 몰랐다고.
생각할 때는 생각뿐이었고, 또 이 몸이 어쩌면 그냥 예쁘게 닦는 거밖에 모르지, 마음이라는 걸 몰라요. 있다는 것도 안 믿고.
그래서 우리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 이유가 ‘그 마음이라는 게 있다’를 알려주시려고 출현하셨다고.
마음이란 게 있다는 걸,
왜? 중생은 아니까 모르니까. 뭘 모르니까? 그리고 마음을 모르니까 마음을 일러주는 거예요. 나머지는 생각과 몸은 부처님이 안 일러줘도 있었어요, 없었어요?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부처님이 깨달아주신 거지, 마음이 전부는 아니에요.
중생은 원래 두 개는 갖고 있었다고.
생각과 몸을. 마음은 안 갖고,
몰랐단 말이에요.
그래서 ‘마음’을 깨닫게 해준 거예요.
그러면 마음과 생각과 몸이 딱 하나로, 완전무결해지겠죠? 원망 부족 없어지겠죠? 완전체가 되겠죠.
그래서 우리 부처님은 ‘마음’을 특별히 강조하여 설명하신 겁니다.
왜? 생각과 몸은 알아서 잘하고 있잖아, 그죠?
그랬더니 우리 어리석은 또 부처님 제자들, 수행자들이 뭐냐? “마음이 전부다”라고 해버린 거야.
아니에요. 몸과 생각은 그렇지 않아도 잘 쓰고 있으니 말을 안 한 거지. 강조해서. 마음이 전부가 아니다.
‘마음’과 ‘몸’과 ‘생각’은 똑같이 중요하다.
근데 이 마음이라는 것과,
마음과 생각과 몸은 성질이 달라요.
‘마음’은 무형이에요. 무형.
모양과 색깔이 없어. 형태가 없어요. 마음은.
우리 마음은 지금 보고, 듣고, 하고 있는 그거거든요.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그게 다 마음이에요.
근데 그 마음은 지금 어떻게 우리가 드러낼 수가 없어요. 모양이 없어서.
형상이 없고. 그죠?
근데 있어요. 있는데, 이 마음이 안 드러나. 우리 몸은 이렇게 드러나는데. 그래 가만히 보니, 마음은 무형으로 항상 존재하더라.
어떻게? 지금 말하고, 보고, 듣고, 생각하는 그게 다 ‘마음’이란 말이에요.
이와 같이 ‘마음’은 무형으로써 항상 존재하더라.
근데 눈에 안 보여. 눈에 안 보이니까. 중생은 맨날 눈으로만 보려고 하잖아. 손으로만 잡으려고 하잖아.
중생은 오감으로만 다 그 존재를 확인하려 하거든요.
근데 이건 오감으로 확인이 안 돼요.
모양과 형상, 색깔이 없어요.
그래서 오감으로 확인이 안 되지만,
지금 존재하고 있는 그거란 말이야.
그래서 이건 어릴 때나 잠잘 때나 어떤 때에도, 이 마음, 어디 간 적이 없어요.
아, 그러니까 ‘마음’은 무형으로
항상 존재하고 있구나 라는 걸
우리가 ‘마음이 마음을 깨닫는’ 겁니다.
그리고 보니까, 우리 몸뚱아리와 생각은 또 마음과 성질이 반대예요.
몸과 생각은, 생각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로서 존재하고,
그래서 이 ‘생각’을 우리가 볼 수 있다고.
우리 몸은 육신으로 볼 수 있단 말이에요. 물질로.
그래서 ‘생각’과 ‘몸’은, 또 ‘마음’과 반대로 이미지와 모양과 색깔이 있네?
그러니까 이거는 모양과 색깔과 이미지가 있으니, 이건 변하겠어요, 안 변하겠어요? 변해요. 이건 결국 ‘소모’된단 말이야. ‘소모’, ‘달아진단’ 말이에요.
아, 모양과 색깔과 형태가 있는 건 다 소모되고, 변하고, 사라지는구나. 그쵸?
모양과 색깔이 없는 우리 ‘마음’은 소모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겠구나.
이거 뭐 있어야 달아지지.
아, 그래서 가만히 보니 우리 ‘생각’은 계속 찰나찰나로 변하고.
자, 생각은 어떻게 변한다? 찰나찰나. 1초보다 빠르게 변한단 말이에요.
엄청 착착 돌아가 버려요. 왜? 모양과 색깔이 있으니까 빨리 변하는 거야.
우리 ‘몸’은 한 생을 기준으로 변하는 거예요.
근데 이 생각과 몸은 계속 변하지만, 없어지는 건 아니지.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저 생각에서 이 생각으로.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거지,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생각은. 우리 몸도 그렇단 말이에요.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저 몸에서 이 몸으로,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왔다 갔다 하는 거지. 변화는 없어지는 게 아니야. 그죠?
근데 우리 ‘마음’은 왔다 갔다 하지 않아.
가만 보니, 우리 ‘마음’은 항상 존재하면서, 몸과 생각은 계속 변해.
그러니까 결국은 ‘변한다’. ‘사라지는’ 건 아니라고. 또 다른 걸로 전환되는 거죠.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전환되듯이, 우리는 이 몸에서 저 몸으로 또 바뀐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몸’과 ‘생각’이 변하는 건 당연하다. 슬픈 일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게 당연하고, 정상적인 일이란 말이에요.
생각이 변하고, 몸이 변하는 건 정상이다? 비정상이다? 정상이다.
그래서 우리 몸이 늙고 병들고 죽는 건 정상이다? 아니다? 정상이다.
왜 또 다시 새 몸 받아요? 왜?
생각과 같거든요. 우리 생각이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저 생각에서 또 변하죠.
그럼 우리 생각이 죽는다고 그래요?
안 하죠.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나잖아요.
우리 몸도 또 다른 몸이 일어난단 말이야. 이와 같이,
아, 몸과 생각이 변하는 건 너무 지극히 정상이고, 당연하고,
반드시 변해야 하는구나. 몸과 생각은.
중생은 ‘안 변해서’ 문제란 말이에요. 생각이
집착하거나, 중생은 뭔가 고집하면 생각이 안 변해. 그냥 맨날 그 생각에 딱 틀어박혀 있단 말이야. 그게 한 생각에 머물러 있다.
중생은 한 생각에 계속 머물러 있으니까, 오염되고 썩었다 이 말이에요. 냄새난다, 더럽다 이 말이야. 왜? 생각이 변하지 않느냐, 그렇죠?
그래야 우리가 씻을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그렇죠?
우리 몸도 계속 이렇게 늙어 빠진 몸으로 살고 싶어요? 영원히? 또 변해서 젊어지면 새 몸 받아야 될 거 아니에요, 그죠?
그래서 결국 우리는 마음은 변하지 않으니까, 이 마음의 뿌리에서 계속 새 몸과 새 생각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이건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기쁜 일이란 말이야. 늙고 병들고 죽는 게 슬픈 일이 아니란 말이에요. 당연한 일이고, 아, 우리는 새 몸 받으러 가는구나.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란 말이에요.
이렇게 아니까, 생사의 두려움이 사라지더라. 그리고 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더라.
존재의 실체를 바로아니까 그렇다는 거예요. 이게 이제 우리가 존재 실체를 아는 목적입니다.
생사 해탈이 되어버렸잖아. 생사가 없어요. 마음은 맨날 그 자리에 있어.
몸과 생각이 변하는 게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좋은 일이잖아요.
생각이 좀 변해야 한단 말이야.
생각이 좀... 졸지 말고.
생각이 변해야겠습니까?
안 변해야겠습니까? 생각이 변해야겠어요? 안 변해야겠어요?
생각이 변하겠어요. 제발 좀 다양하고,
남이 예측하지 못한, 정말 자기만의 신선하고, 생동감 있고, 정말 활기찬 생각을 하면, 내 몸도 자연히 그렇게 따라간단 말이에요. 내 인생도 그렇게 따라오고, 나머지는 다 그림자야. 다 따라와.
아무리 그래도 우리 마음은 안 변하니까. 여기에 이제 우리가 존재의 실체를 아는
그 ‘앎’과 그 ‘목적’이란 말이에요. 여기까지가 됐습니다
2 months ago (edited) | [YT] |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