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행 060401 04 017449 자율구독료 후원계좌 예금주 안경기 저희 부부는 32살 나이차에도 불구 하고 궁합이 아주 잘맞는 부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부부의 개인택시 일상과 경험을 공유하는 곳입니다~ 우리에게는 부족한 점이 많으며 모든 사람의 제안을 수용할 것입니다~ank121@hanmail.net 구독과 팔로우 감사합니다...010 3110 3351..누구나 출연신청 하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우리집에서는 흑염소 2마리를 키웠다. 염소는 한겨울에도 솔잎을 먹거나 마른 풀도 잘 먹어서 사시사철 들판에 긴 줄을 연결해 묶어놓으면 잘 먹고 잘 자랐다. 어미 흑염소 2마리는 해마다 새끼를 2마리씩 낳았다.
어느 해 겨울 어미염소가 3마리의 아기염소를 낳았다. 아기염소 2마리는 건강했지만 나중에 낳은 한 마리는 다른 두 마리에 비해 부실했다.
양은 젖꼭지가 4개이지만, 염소는 젖꼭지가 2개이다. 힘센 두 마리 아기염소가 어미의 젖꼭지를 독차지했고 나머지 한 마리는 밀려났다. 어미도 부실한 녀석을 포기했는지 젖을 먹이지 않고 밀어냈다. 그렇게 밀려난 아기염소는 나날이 말라갔다.
사온 연유를 물에 타서 아기염소에게 먹였다. 비로소 아기염소가 생기를 되찾았다. 그 아기염소는 그때부터 제 어미에게 가지도 않고 ‘메에메에’ 울면서 엄마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어미에게 버림받은 아기염소를 애처러워하며 엄마는 그 아기염소에게 정성을 쏟았다. 물을 길으러 동네 우물에 갈 때도 아기염소가 엄마 뒤를 졸졸 따라갔고, 밤이 되면 아기염소는 엄마가 있는 사랑방의 댓돌 옆에서 쪼그리고 잠이 들었다.
어느 날 아침 내가 여물로 소죽을 끌이려고 사랑방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는데 아궁이 안에서 아기염소의 ‘메에 메에’ 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 엄마에게 소리쳐 알리고 아궁이의 불을 서둘러 껐다.
때는 한겨울이었다. 아마 아기염소가 추위에 떨다가 온기가 남아있는 아궁이로 들어갔는데 내가 소죽을 끌이려 불을 때니 불기운과 연기에 질식되어 울음소리를 낸 것 같았다. 어미의 따뜻한 품이 그리워 아궁이를 찾아간 걸까.
엄마는 아버지에게 아기염소를 구해달라고 매달렸다. 그날 온종일 장대를 아궁이 속으로 쑤셔넣고 아기염소를 꺼내려 했지만 닿지 않았고 아기 염소는 점점 아궁이에서 멀리 들어갔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구들장을 뜯어내고 아기염소를 구해달라’고 애원했고, 아버지는 ‘이 엄동설한에 구들장을 뜯어내면 우리 식구는 어디서 자느냐’며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결국 해거름녁에 아버지는 뒤안으로 가서 아궁이에서 가장 먼 곳인 굴뚝 부근의 벽체를 뜯어냈다. 다행히 그곳에서 빈사상태에 빠진 아기염소를 구해냈지만 그 녀석은 시름시름 앓다가 며칠 못 가서 죽고 말았다.
우리는 그 녀석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지만, 엄마는 구들장 밑에서 아기염소 울음이 들린다며 울며불며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온 가족이 모두 우울했다.
고향마을 이웃집에는 ‘호산할매’라고 불리는 먼 친척할머니가 홀로 살고 있었다. 워낙 말이 없고 바깥출입도 하지 않아 동네에서는 외톨이로 살았다. 어쩌다 멀리 시집간 딸이 편지를 보내오면 우리 집에 와서 읽어달라고 했고, 필체가 좋은 아버지가 답장을 써 주었다. 호산할매는 글을 읽지 못했다.
1972년 여름 월남전이 한창이던 어느 날, 호산할매가 방금 우체부가 배달해 준 편지라며 우리집에 가져 왔다. 마침 집에는 학교에서 금방 돌아 온 나 혼자 있었다. 국민학교 2학년생인 내가 마당으로 나가 호산할매의 편지를 받아들고 국어책 읽듯이 큰 소리로 읽었다.
‘전사통지서, 육군하사 김O섭은 1972년 모월 모일 월남국 OO지구 전투에서 전사하였음을 통지함. 육군참모총장.’
군복무 중 월남전에 파병된 호산할매의 막내 아들이 전사한 것이다.
호산할매에게는 그 위로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었지만 아들은 객지로 떠나 연락도 끊어져 버렸고, 멀리 시집간 딸에게서 가끔 편지가 올 뿐이었다. 전기가 없던 시절이니 전화가 있을리 없었다. 전쟁터 월남에 도착한 아들이 '어머니전상서'로 시작되는 군사우편을 한 번 보내와서 온 동네 사람들이 돌려가며 읽어본 것이 얼마 전이었다. 호산할매는 그 막내아들에게 의지하며 살고 있었다.
내가 편지를 다 읽자마자 호산할매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울부짖기 시작했다. 내 손에서 편지를 낚아채서 발기발기 찢어버리기도 하고 마당에서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며 목에서 피가나도록 울다가 한참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어린 나는 호산할매가 무서워서 헛간으로 도망가 나오지 못했다.
며칠 후 군용지프 한 대가 마을로 들어왔고, 병사 2명이 호산할매의 오두막집으로 들어갔다. 신기한 구경이라도 하듯 아이들이 몰려들었고, 병사들은 마루 한 쪽에 촛불을 켜고 영정사진과 유골함을 놓고 경례를 붙이더니 뒤돌아서 가 버렸다.
마루 끝에는 산발을 한 호산할매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흐느끼고 있었다.
그날 이후, 호산할매의 안타깝고 불행한 삶의 이야기는 너무 애처로와서 차마 쓸 수가 없다.
세월이 흘러 나도 군복무를 했지만 전사통지서는 더 이상 보지 못했다. 전쟁의 공포도 거의 사라졌다. 오랜 세월 계속된 평화는 이 땅에서 살아간 수많은 ‘호산할매’의 한과 피눈물의 결과였다.
고향마을에서는 겨울이 되면 집집마다 술을 빚었다. 쌀로 고두밥을 쪄서 ‘술약’이라고 불리던 효모와 누룩을 함께 잘 섞은 다음 더운 샘물을 넉넉하게 부어 넣은 술독을 따뜻한 아랫목에 며칠을 두면 밥알이 떠 오르면서 술이 익었다. 어른들은 마실을 다니며 집집마다 담가놓은 술과 함께 ‘뉘 집 자식 버르장머리 없다’는 얘기로 기나긴 겨울밤을 보냈다.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이 있던 시절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식량증산을 국정목표로 정하고 쌀로 술을 빚는 것을 금지했다. 대신 값싼 타피오카를 수입해 소주 원료로 제공했고 양조장은 미국의 원조물자인 밀가루로 막걸리를 제조하도록 했다. 밀가루 막걸리는 맛이 없었다. 그래서 집집마다 몰래 쌀로 밀주(密酒)를 빚었다.
어느 해 초겨울 지프차에 붉은 색 글씨로 ‘밀주단속’이라는 표식을 한 밀주단속반이 우리 마을에 들이닥쳤다. 당연히 우리집 안방에도 술단지에서 술이 익어가고 있었다.
엄마는 안방으로 달려가 술단지를 머리에 이고 밖으로 나왔다. 우선 마굿간에라도 숨겨놓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밀주단속반은 마을 입구에 있던 우리집을 제일 먼저 덥쳤고, 마당에서 단속반을 맞닥뜨린 엄마는 놀란나머지 술독과 함께 꽈당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술독이 박살이 났다. 단속반원들은 엄마가 밀주단속반을 속이려 했다며 다그쳤고, 엄마는 너무나 놀라서 한동안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단속반이 물러가고 난 다음 또 다른 사달이 났다. 아버지가 술독을 깨뜨린 엄마에게 위로는 커녕 아까운 술을 쏟아버렸다며 질책했다. 엄마는 서러워 눈물을 펑펑 쏟았다.
며칠 후 아버지는 세무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고, 5천원을 벌금으로 냈다. 그 며칠 동안 할머니와 엄마는 우물가에 정안수를 떠 놓고 아침 저녁으로 삼신할매에게 빌었다. 온가족이 모두 벌벌 떨며 걱정하던 밀주제조의 처벌은 그렇게 끝났다.
엄마는 세월이 흘러 기억히 희미해질 때까지 밀주단속 얘기를 하며 아버지에게 섭섭하다고 했다. 밀주단속 이야기는 물자가 부족했던 시절의 아픈 기억일 뿐이다.
이제는 쌀이 남아돌아 나라 곳곳에 보관창고가 부족할 지경이다. 세월은 참 많이 변했다. #고향
‘홀치기’란 밑그림이 그려진 직물의 무늬를 따라 실을 여러 차례 감아 염색약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한 후, 직물을 염색약에 담갔다가 실을 풀어내면 아름다운 무늬가 만들어지는 전통적인 염색법을 말한다.
1970년대 일본에서는 홀치기 염색법이 널리 쓰였고, 수가공으로 밑그림이 그려진 직물에 한 올씩 실을 감아야 하는 홀치기 물량은 인건비가 싼 한국의 부녀자들에게 넘어왔다.
홀치기를 의뢰하는 직물이 대량으로 한국에 넘어오면 다단계 방식으로 배분되어 전국 방방곡곡의 농촌 부녀자들에게 전달되었다.
그 과정에 단계마다 ‘구전(소개비)’을 떼는 총대(수집상)들이 많아서 정작 밤새워 홀치기에 매달리는 부녀자들에게 돌아가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홀치기로 면직물 ‘한 마’를 완성하려면 며칠 걸렸는데 완성품으로 몇 백 원 정도 지급되었다. ‘마’는 직물을 세는 단위로서 ‘야드’와 같아서 90Cm에 해당한다.
그 시절 농촌에는 ‘도리짓고땡’으로 하루 저녁에 소 한 마리 값을 날리는 사내와, 단돈 몇 백 원을 벌어보려고 호롱불 아래 밤새 홀치기 틀에 앉아 실꾸리를 달그락 거리며 홀치기 하는 아낙이 함께 살았다. 남존여비, 부부유별, 장유유서의 질서가 그대로 남아있던 시대였다. 다행히 아버지는 노름이나 화투를 하지 않았고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엄마는 겨울 내내 동네 몇몇 부인들과 모여 앉아 밤새 홀치기를 했다. 어머니 또래 동네 아지매들이 홀치기틀을 들고 우리집 작은방에 찾아왔다. 전기가 없던 시절이니 기나긴 겨울밤 호롱불 밑에서 밤늦게까지 두런두런 얘기를 하며 왼손으로는 천을 밑그림을 따라 홀치기 틀의 바늘을 꿰고 오른손으로는 재빨리 실꾸리로 실을 감아 홀쳐매기를 수백 수천번씩 했다.
그럴때면 나는 석유 타는 냄새가 솔솔 피어오르는 호롱불 옆에 밥상을 펴놓고 숙제를 하다가 달그락거리는 홀치기 소리에 스르륵 잠들곤 했다.
안여택 TV
드라마 정년이의 실제모델
조영숙 선생님이 나의 택시에 탑승했다...
그리하여 인연이...
90을 넘긴 연세에도
무대에서 쩌렁쩌렁
기가 꽉찬 목소리로
덕담과 비나리를 해주셨다
전체 후배들은 감동과 존경으로
눈시울을 적시며 노래하고
춤을추었다
#인순이
8 hours ago | [YT] | 7
View 0 replies
안여택 TV
개인택시운송사업조합이 앱미터기 단말기 공급사 코나아이와의 법적 분쟁에서 패소하며, 조합원 1300여 명에게 위약금 부담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법원은 “무상 단말기 공급 계약을 위반했다”며 조합원들의 위약금 지급 책임을 인정했다.
■ 법원 “무상 단말기 계약 어겼다”…지급명령 확정 단계
대전지방법원은 지난 10월 22일 코나아이가 신청한 지급명령을 인용했다. 지급명령서에 따르면 코나아이는 2022년 12월 27일 대전개인택시조합 조합원 차량에 앱미터기 단말기를 무상 공급했고, 계약 기간 동안 해당 단말기를 정상적으로 유지·사용하는 조건을 명시했다.
그러나 조합 측은 이후 조합원들에게 기존에 거래하던 타사(티머니) 단말기 사용을 지속적으로 권유했고, 상당수 조합원이 코나아이 단말기를 철거하면서 계약 위반이 발생했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다.
13 hours ago | [YT] | 3
View 0 replies
안여택 TV
우리집에서는 흑염소 2마리를 키웠다. 염소는 한겨울에도 솔잎을 먹거나 마른 풀도 잘 먹어서 사시사철 들판에 긴 줄을 연결해 묶어놓으면 잘 먹고 잘 자랐다. 어미 흑염소 2마리는 해마다 새끼를 2마리씩 낳았다.
어느 해 겨울 어미염소가 3마리의 아기염소를 낳았다. 아기염소 2마리는 건강했지만 나중에 낳은 한 마리는 다른 두 마리에 비해 부실했다.
양은 젖꼭지가 4개이지만, 염소는 젖꼭지가 2개이다. 힘센 두 마리 아기염소가 어미의 젖꼭지를 독차지했고 나머지 한 마리는 밀려났다. 어미도 부실한 녀석을 포기했는지 젖을 먹이지 않고 밀어냈다. 그렇게 밀려난 아기염소는 나날이 말라갔다.
사온 연유를 물에 타서 아기염소에게 먹였다. 비로소 아기염소가 생기를 되찾았다. 그 아기염소는 그때부터 제 어미에게 가지도 않고 ‘메에메에’ 울면서 엄마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어미에게 버림받은 아기염소를 애처러워하며 엄마는 그 아기염소에게 정성을 쏟았다. 물을 길으러 동네 우물에 갈 때도 아기염소가 엄마 뒤를 졸졸 따라갔고, 밤이 되면 아기염소는 엄마가 있는 사랑방의 댓돌 옆에서 쪼그리고 잠이 들었다.
어느 날 아침 내가 여물로 소죽을 끌이려고 사랑방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는데 아궁이 안에서 아기염소의 ‘메에 메에’ 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 엄마에게 소리쳐 알리고 아궁이의 불을 서둘러 껐다.
때는 한겨울이었다. 아마 아기염소가 추위에 떨다가 온기가 남아있는 아궁이로 들어갔는데 내가 소죽을 끌이려 불을 때니 불기운과 연기에 질식되어 울음소리를 낸 것 같았다. 어미의 따뜻한 품이 그리워 아궁이를 찾아간 걸까.
엄마는 아버지에게 아기염소를 구해달라고 매달렸다. 그날 온종일 장대를 아궁이 속으로 쑤셔넣고 아기염소를 꺼내려 했지만 닿지 않았고 아기 염소는 점점 아궁이에서 멀리 들어갔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구들장을 뜯어내고 아기염소를 구해달라’고 애원했고, 아버지는 ‘이 엄동설한에 구들장을 뜯어내면 우리 식구는 어디서 자느냐’며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결국 해거름녁에 아버지는 뒤안으로 가서 아궁이에서 가장 먼 곳인 굴뚝 부근의 벽체를 뜯어냈다. 다행히 그곳에서 빈사상태에 빠진 아기염소를 구해냈지만 그 녀석은 시름시름 앓다가 며칠 못 가서 죽고 말았다.
우리는 그 녀석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지만, 엄마는 구들장 밑에서 아기염소 울음이 들린다며 울며불며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온 가족이 모두 우울했다.
.
16 hours ago | [YT] | 4
View 0 replies
안여택 TV
그날은 유독 비가 많이 내렸던 것으로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밤 11시경, ‘자살’ 의심 신고가 지구대에 접수되었고, 순찰 근무 중이던 저와 사수는 신고장소로 신속히 출동하였습니다.
하지만, 기지국 위치만 잡힐 뿐 요구조자의 정확한 위치 파악이 어려웠고, 하필이면 쏟아지는 비 등으로 인해 빠른 조치 및 판단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평소 야간근무 시, 신고가 빈번했던 근처 숙박시설 가를 뛰어다니며
요구조자의 위치 파악에 전념했고, 운 좋게 요구조자 소유의 차량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자살의심자가 투숙 중이던 방에 진입해 보니,
바닥에는 수많은 소주병이 놔 뒹굴어져 있었고, 요구조자는 경찰이 진입했음에도 창문을 바라보며 당장 뛰어내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일촉즉발의 상황 속,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고 앉아, 차분하게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제 나이보다 3~4살을 어려 보이는 사람이 무슨 사연이 있어서 자살을 생각했겠느냐는 마음에
출동 경찰관이 아닌, 친구 또는 형처럼 다가가면 마음을 조금 어루만져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끼니는 해결했는지 등으로 말을 붙이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경찰관의 진입에도 아무런 미동조차 없던 친구가
약 20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자신이 살아온 가정사를 시작으로 마음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라왔다던 그 친구는 학창 시절부터 하루살이 아르바이트해 오며,
하루 3끼 식사를 아무런 고민 없이 먹어보는 게 소원이라고 말을 하면서,
현재는 가족들과의 연락마저 단절되어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다며 눈물을 보였습니다.
더 이상 퀴퀴한 공간에 그를 놔둘 수가 없어, 설득 끝에 지구대로 동행시킨 뒤,
제복 입은 경찰관이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의 대화가 필요하였기에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건네며 약 1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상담을 마치고 나서 그 친구는 마음을 잘 추스릴 수 있겠다는 다짐을 전하며
다음 날부터 막노동이라도 하면서 새롭게 출발해 보겠다는 밝은 얼굴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지구대 선배님들의 코칭을 받고 그 친구를 다시 숙박시설까지 바래다주었고,
얼마 되지 않지만, 편의점에서 도시락, 김밥, 커피가 담긴 비닐봉지를 손에 쥐여주며
지구대에서 한 약속을 용기 내서 꼭 지켜주길 바란다는 인사로 출동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인테리어 회사에 취직하여 평범한 사람들처럼 잘 지내고 있다고,
16 hours ago (edited) | [YT] | 7
View 0 replies
안여택 TV
그때 시절에 모두다 고향기차표 예매들 기다린 고향사람들 반가웠던 시절에 지금많이변해 고향에 안가고 해외여행
16 hours ago | [YT] | 4
View 0 replies
안여택 TV
- 전사통지서
펑펑 눈물..
고향마을 이웃집에는 ‘호산할매’라고 불리는 먼 친척할머니가 홀로 살고 있었다. 워낙 말이 없고 바깥출입도 하지 않아 동네에서는 외톨이로 살았다. 어쩌다 멀리 시집간 딸이 편지를 보내오면 우리 집에 와서 읽어달라고 했고, 필체가 좋은 아버지가 답장을 써 주었다. 호산할매는 글을 읽지 못했다.
1972년 여름 월남전이 한창이던 어느 날, 호산할매가 방금 우체부가 배달해 준 편지라며 우리집에 가져 왔다. 마침 집에는 학교에서 금방 돌아 온 나 혼자 있었다. 국민학교 2학년생인 내가 마당으로 나가 호산할매의 편지를 받아들고 국어책 읽듯이 큰 소리로 읽었다.
‘전사통지서, 육군하사 김O섭은 1972년 모월 모일 월남국 OO지구 전투에서 전사하였음을 통지함. 육군참모총장.’
군복무 중 월남전에 파병된 호산할매의 막내 아들이 전사한 것이다.
호산할매에게는 그 위로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었지만 아들은 객지로 떠나 연락도 끊어져 버렸고, 멀리 시집간 딸에게서 가끔 편지가 올 뿐이었다. 전기가 없던 시절이니 전화가 있을리 없었다. 전쟁터 월남에 도착한 아들이 '어머니전상서'로 시작되는 군사우편을 한 번 보내와서 온 동네 사람들이 돌려가며 읽어본 것이 얼마 전이었다. 호산할매는 그 막내아들에게 의지하며 살고 있었다.
내가 편지를 다 읽자마자 호산할매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울부짖기 시작했다. 내 손에서 편지를 낚아채서 발기발기 찢어버리기도 하고 마당에서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며 목에서 피가나도록 울다가 한참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어린 나는 호산할매가 무서워서 헛간으로 도망가 나오지 못했다.
며칠 후 군용지프 한 대가 마을로 들어왔고, 병사 2명이 호산할매의 오두막집으로 들어갔다. 신기한 구경이라도 하듯 아이들이 몰려들었고, 병사들은 마루 한 쪽에 촛불을 켜고 영정사진과 유골함을 놓고 경례를 붙이더니 뒤돌아서 가 버렸다.
마루 끝에는 산발을 한 호산할매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흐느끼고 있었다.
그날 이후, 호산할매의 안타깝고 불행한 삶의 이야기는 너무 애처로와서 차마 쓸 수가 없다.
세월이 흘러 나도 군복무를 했지만 전사통지서는 더 이상 보지 못했다. 전쟁의 공포도 거의 사라졌다. 오랜 세월 계속된 평화는 이 땅에서 살아간 수많은 ‘호산할매’의 한과 피눈물의 결과였다.
.
16 hours ago (edited) | [YT] | 1
View 0 replies
안여택 TV
고향마을에서는 겨울이 되면 집집마다 술을 빚었다. 쌀로 고두밥을 쪄서 ‘술약’이라고 불리던 효모와 누룩을 함께 잘 섞은 다음 더운 샘물을 넉넉하게 부어 넣은 술독을 따뜻한 아랫목에 며칠을 두면 밥알이 떠 오르면서 술이 익었다. 어른들은 마실을 다니며 집집마다 담가놓은 술과 함께 ‘뉘 집 자식 버르장머리 없다’는 얘기로 기나긴 겨울밤을 보냈다.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이 있던 시절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식량증산을 국정목표로 정하고 쌀로 술을 빚는 것을 금지했다. 대신 값싼 타피오카를 수입해 소주 원료로 제공했고 양조장은 미국의 원조물자인 밀가루로 막걸리를 제조하도록 했다. 밀가루 막걸리는 맛이 없었다. 그래서 집집마다 몰래 쌀로 밀주(密酒)를 빚었다.
어느 해 초겨울 지프차에 붉은 색 글씨로 ‘밀주단속’이라는 표식을 한 밀주단속반이 우리 마을에 들이닥쳤다. 당연히 우리집 안방에도 술단지에서 술이 익어가고 있었다.
엄마는 안방으로 달려가 술단지를 머리에 이고 밖으로 나왔다. 우선 마굿간에라도 숨겨놓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밀주단속반은 마을 입구에 있던 우리집을 제일 먼저 덥쳤고, 마당에서 단속반을 맞닥뜨린 엄마는 놀란나머지 술독과 함께 꽈당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술독이 박살이 났다. 단속반원들은 엄마가 밀주단속반을 속이려 했다며 다그쳤고, 엄마는 너무나 놀라서 한동안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단속반이 물러가고 난 다음 또 다른 사달이 났다. 아버지가 술독을 깨뜨린 엄마에게 위로는 커녕 아까운 술을 쏟아버렸다며 질책했다. 엄마는 서러워 눈물을 펑펑 쏟았다.
며칠 후 아버지는 세무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고, 5천원을 벌금으로 냈다. 그 며칠 동안 할머니와 엄마는 우물가에 정안수를 떠 놓고 아침 저녁으로 삼신할매에게 빌었다. 온가족이 모두 벌벌 떨며 걱정하던 밀주제조의 처벌은 그렇게 끝났다.
엄마는 세월이 흘러 기억히 희미해질 때까지 밀주단속 얘기를 하며 아버지에게 섭섭하다고 했다. 밀주단속 이야기는 물자가 부족했던 시절의 아픈 기억일 뿐이다.
이제는 쌀이 남아돌아 나라 곳곳에 보관창고가 부족할 지경이다. 세월은 참 많이 변했다. #고향
.
17 hours ago | [YT] | 4
View 0 replies
안여택 TV
‘홀치기’란 밑그림이 그려진 직물의 무늬를 따라 실을 여러 차례 감아 염색약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한 후, 직물을 염색약에 담갔다가 실을 풀어내면 아름다운 무늬가 만들어지는 전통적인 염색법을 말한다.
1970년대 일본에서는 홀치기 염색법이 널리 쓰였고, 수가공으로 밑그림이 그려진 직물에 한 올씩 실을 감아야 하는 홀치기 물량은 인건비가 싼 한국의 부녀자들에게 넘어왔다.
홀치기를 의뢰하는 직물이 대량으로 한국에 넘어오면 다단계 방식으로 배분되어 전국 방방곡곡의 농촌 부녀자들에게 전달되었다.
그 과정에 단계마다 ‘구전(소개비)’을 떼는 총대(수집상)들이 많아서 정작 밤새워 홀치기에 매달리는 부녀자들에게 돌아가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홀치기로 면직물 ‘한 마’를 완성하려면 며칠 걸렸는데 완성품으로 몇 백 원 정도 지급되었다. ‘마’는 직물을 세는 단위로서 ‘야드’와 같아서 90Cm에 해당한다.
그 시절 농촌에는 ‘도리짓고땡’으로 하루 저녁에 소 한 마리 값을 날리는 사내와, 단돈 몇 백 원을 벌어보려고 호롱불 아래 밤새 홀치기 틀에 앉아 실꾸리를 달그락 거리며 홀치기 하는 아낙이 함께 살았다. 남존여비, 부부유별, 장유유서의 질서가 그대로 남아있던 시대였다. 다행히 아버지는 노름이나 화투를 하지 않았고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엄마는 겨울 내내 동네 몇몇 부인들과 모여 앉아 밤새 홀치기를 했다. 어머니 또래 동네 아지매들이 홀치기틀을 들고 우리집 작은방에 찾아왔다. 전기가 없던 시절이니 기나긴 겨울밤 호롱불 밑에서 밤늦게까지 두런두런 얘기를 하며 왼손으로는 천을 밑그림을 따라 홀치기 틀의 바늘을 꿰고 오른손으로는 재빨리 실꾸리로 실을 감아 홀쳐매기를 수백 수천번씩 했다.
그럴때면 나는 석유 타는 냄새가 솔솔 피어오르는 호롱불 옆에 밥상을 펴놓고 숙제를 하다가 달그락거리는 홀치기 소리에 스르륵 잠들곤 했다.
엄마는 솜씨가 좋아서 수집상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아래는 그 시절 농가에서 홀치기를 하는 부녀자들의 사진들이다.
.
17 hours ago (edited) | [YT] | 3
View 0 replies
안여택 TV
고려대 명물 '영철버거' 이영철씨 별세
2000년 고대 앞 손수레서 1천원 버거로 '성공신화'
매년 고대에 장학금…폐업하자 고대생이 살리기 나서 재개업
무일푼으로 시작해 1천원짜리 '영철버거'를 고려대 명물로 일궈낸 이영철씨가 별세했다. 향년 58세.
13일 대학가에 따르면 이씨는 이날 세상을 떠났다. 암 투병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고인은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10살부터 중국집, 군복공장, 막노동판 등을 전전했다.
2000년 무렵 신용불량자라는 딱지를 안고 수중에 단돈 2만2천원만 남은 절박한 상황에서 고인은 고려대 앞 손수레에서 1천원짜리 버거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미국식 핫도그빵 사이에 고기볶음, 양배추, 소스 등을 넣은 투박한 방식의 '스트리트 버거'는 값싼 가격에 학생들의 허기를 채워주며 '명물'로 떠올랐다.
2005년쯤에는 40개의 가맹점을 거느려 '성공 신화'로 불리기도 했다.
고인은 버거에 들어가는 돼지고기를 등심으로 바꿨을 때도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 양배추와 청양고추 가격이 치솟아 버거 하나를 팔면 200원의 적자가 났을 때도 '1천원'의 약속을 지켰다.
2004년부터는 학생들에게 보답하고자 고려대에 매년 2천만원을 기부해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영철 장학금'을 지급했다. 정기 고연전(연고전) 때마다 영철버거 수천개를 무료로 뿌리기도 했다.
그런 고인은 고대생들에겐 늘 고마운 '영철 아저씨'였다.
2015년엔 영철버거도 경영난으로 폐업했다. 인근에 비슷한 가격대의 다양한 먹거리 가게가 들어서면서 영철버거도 메뉴 고급화 등을 시도하다 결국 재정난에 직면한 것이다.
그러자 고대생들은 영철버거 살리기에 나섰다.
당시 '영철버거 크라우드펀딩'에 총 2천579명의 고대생이 참가해 6천811만5천원을 모금했다. 그렇게 영철버거는 재개업을 해 다시 '고대 명물'로 자리 잡았다.
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 102호에 마련됐다. 발인은 15일 오전 6시 30분, 장지는 서울시립승화원이다.
17 hours ago | [YT] | 0
View 0 replies
안여택 TV
박나래 ‘링거 이모’ 입열었다, “의사·간호사 아닙니다, 반찬값 벌려고…”
17 hours ago | [YT] | 1
View 0 replies
Lo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