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누림교회

교회: 은혜누림교회
표어: 말씀으로 공급받고 복음으로 살리는 교회

교단: 기독교한국침례회 / 교단신학교: 침례신학대학교(대전 유성)
주소: 충남 논산시 연산면 송정리 / 계룡시 근처
김종완목사
교회홈페이지 enbc.kr/
온라인 헌금 / 국민은행 733101-01-313592


은혜누림교회

2025년 10월 26일 주일설교 요약
성경: 창세기16장 / 아브람의 선택, 우리의 이야기


오늘 우리는 ‘기다림’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택배는 하루 만에 오고, 음식은 5분만 늦어도 불평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오거나 응답이 늦을 때, 우리는 쉽게 ‘내 힘으로 해결하려는 길’을 찾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현실의 벽 앞에서 흔들렸습니다.
약속보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1. 현실보다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창15:4)
하지만 10년이 흐르면서 현실은 여전히 사래의 불임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진리를 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늦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훈련 때문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쉼표를 찍으시며 역사하십니다.

2.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로 살아야 합니다
인본주의는 ‘내 생각과 판단’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신본주의는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인본주의적 선택을 했습니다.
사래는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자녀를 얻으려 했습니다.
겉으로는 해결처럼 보였지만, 결국 상처와 갈등만 남았습니다(창16:4-6).
사람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본질은 기다림과 견딤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굳세게 지켜 견디며 열매를 맺는다”(눅8:15).
여기서 우리는 기다림이 신앙의 본질임을 깨닫습니다.

3. 인간적 방법의 끝은 상처와 갈등입니다
하갈이 임신하자, 그녀는 사래를 멸시했습니다.
사래는 분노했고, 아브람은 책임을 미뤘습니다.
결국 가정은 상처와 갈등의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하갈을 하나님이 찾아오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버려진 자, 외로운 자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4. 하나님은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갈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고백했습니다.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엘로이)”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보고 있다.”
눈물로 기도하는 여러분을, 조용히 믿음을 지키는 여러분을
주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광야 속, 고난 속, 기다림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시고,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과 순종 속에서 역사하시며
때가 되면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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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누림교회

2025년 10월 19일 주일설교 요약
성경: 창세기15장 1-7절 / 밤하늘의 별을 세는 믿음

1. 들어가는 말

오늘 우리는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뉴스에서는 경제 위기, 정치 혼란, 전쟁과 재난이 끊이지 않습니다. 최근 캄보디아에서는 한국인 납치 사건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직장, 가정, 건강, 인간관계의 문제로 마음이 무겁습니다.

아브람 역시 두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그 후 보복의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인간의 두려움은 실패 후뿐 아니라 성공 후에도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신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약속의 자녀가 없었습니다. 사래의 나이는 많아지고, 현실은 점점 절망적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인생의 각 단계마다 다른 형태의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문제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문제에 사로잡힌 우리의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신 위로의 말씀입니다.

2. 하나님의 위로 – “나는 네 방패요, 네 상급이니라”(1절)

하나님은 두려움에 빠진 아브람에게 찾아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이십니다. 방패는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생명을 지키는 보호막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미래의 화살까지 막아주십니다.

그러나 방패 되신 하나님이 계신다고 고난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고통의 화살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며 감당할 힘과 피할 길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상급이십니다. 세상은 돈, 성공, 명예를 상급이라 여기지만, 진정한 상급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상급이 되실 때,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감옥 속에서도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찬양했습니다(엡1:3).
그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복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초점도 “무엇을 주옵소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가 되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약속 – 장막 밖으로 나가라

아브람은 여전히 현실의 문제를 하나님께 쏟아놓았습니다. 자녀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종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장막 밖으로 이끌어내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장막 안에서는 늙은 몸만 보였지만, 장막 밖에서는 셀 수 없는 별을 보았습니다.
그 별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비전이었습니다.

우리도 장막 안의 절망에 갇혀 있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합니다.
현실을 뚫는 길은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예화) 고도원 작가는 어린 시절 수치와 외로움 속에 살았지만, 그 시간 속에서 “뭇별의 꿈”, 곧 수많은 사람을 위로하는 비전을 품었습니다.
절망의 장막 안에서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별’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4. 믿음의 반응 –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6절)

아브람은 별을 보며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하십니다.
의는 우리의 완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선행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그분이 대신 값을 치르셨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믿음은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평생 붙들어야 할 관계입니다.

5. 결론 – 하나님이 우리의 빛이시다

황가람 씨의 노래 <나는 반딧불>처럼, 우리는 별이 아니라 작고 초라한 개똥벌레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날 수 없지만, 주님이 우리의 빛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방패요, 네 상급이니라.”

우리의 인생이 작고 연약해도, 그 안에 하나님의 빛이 있다면 충분합니다.
오늘도 그 빛으로 어둠을 밝히며,
믿음으로 한 걸음씩 걸어가시는 선생님과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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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누림교회

<2025. 10.12, 설교요약>

성경: 창14:1-16 / 제목: 돕는자로 부름받음

1. 세상의 패권과 욕망의 전쟁
여러분, ‘패권국가’란 무엇입니까?
다른 나라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세계 질서를 이끄는 나라입니다.
오늘날 미국이 그렇습니다. 군사력, 경제력, 문화력으로 전 세계를 주도하지요.
그러나 그 어떤 강대국도 인류의 평화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전쟁은 언제나 욕망의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차지하려는 욕망, 더 지배하려는 욕망이 세상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현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14장에도 동방의 네 왕과 서방의 다섯 왕이 전쟁을 벌입니다.
경제적 이권, 조공 문제로 일어난 탐욕의 전쟁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고대의 ‘패권국가’라 불릴 만한 왕, 그돌라오멜이 있었습니다.
그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재물과 양식이 약탈당하고,
아브람의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는 눈에 보기에 좋은 땅, 풍요로운 소돔을 택했지만
결국 그 선택이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눈에 보이는 축복이 하나님의 축복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는 번영은 결국 사라지고 맙니다.

2. 아브람의 사랑의 반응
아브람은 조카 롯이 포로 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와줄 이유가 없습니다.
롯은 스스로 욕심을 따라 선택했고, 삼촌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사랑으로 반응합니다.
그는 집에서 길러지고 훈련된 자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갑니다(14절).
믿음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준비된 순종입니다.
그는 치밀한 전략을 세워 밤에 적을 급습하고,
결국 롯과 그의 모든 재산, 사람들을 구해옵니다.
아브람이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는 이전의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에서의 실수, 롯에게 양보했던 사건을 통해
그의 믿음은 점점 성숙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는 믿음으로 행동하는 사람,
사랑으로 싸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3. 믿음은 사명으로, 우리는 여호와의 군대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부르십니다.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느니라”(출12:41).
그들은 어제까지 노예였습니다.
전쟁 경험도, 무기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여호와의 군대’**라 부르셨습니다.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바로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양식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세상의 녹이 아니라 하나님의 만나로 삽니다.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바로를 위해 일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싸워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죄이며,
그 싸움의 무기는 미움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입니다.

4. 군인에게 필요한 것은 훈련입니다
아브람에게는 ‘훈련된 자’ 318명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무책임한 신념이 아닙니다.
훈련된 믿음, 준비된 믿음이 참된 믿음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요게벳의 품에서 정체성 훈련을,
바로의 궁정에서 지성 훈련을,
광야에서 영성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야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여호와의 군대로 부름받았기에
광야와 같은 인생훈련을 반드시 통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훈련되지 않은 자를 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훈련을 통과한 자는 결국 생명을 살리는 사람으로 세워집니다.
갈릴리 바다처럼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는 인생,
그런 인생이 바로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아브람이 롯을 구한 것처럼,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생명을 살리고 돕는자로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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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누림교회

2025년 10월 5일 <설교요약>

갈등 속에서 빛나는 믿음 (창세기 13장)

들어가는 글: 명절과 갈등
내일은 민족의 대명절, 풍요로운 한가위 추석입니다. 추석은 가족 간의 사랑을 나누는 기쁜 날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사람이 가족과 친지들의 참견, 간섭에서 오는 명절 스트레스와 갈등으로 마음의 고통을 겪습니다. 유태인 속담처럼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을 열라'는 지혜가 필요하듯, 우리의 갈등은 결국 언어, 대화의 문제에서 시작됩니다. 관계를 망치는 충고, 탐색, 해석, 판단(충탐해판)이나 비난, 비판, 부정, 불평(비비부불) 같은 교정반사 본능을 조심해야 합니다. 바른 말이라도 때로는 칼날이 될 수 있습니다. 이번 추석은 살리는 말을 많이 하시기를 바라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갈등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믿음에도 피할 수 없는 갈등이 있습니다.

아브람과 조카 롯이 애굽에서 나와 가축과 은금이 풍부해지자, 그들이 동거하기에 땅이 넉넉하지 못하게 되면서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창 13:1-6). 이처럼 기도를 열심히 해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갈등은 있습니다. 갈등이 있다는 것은 신앙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정상이며, 중요한 것은 그 갈등을 어떻게 이겨나가느냐입니다. 하나님은 환경을 바꾸시기보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며, 갈등은 주로 가장 가까운 사람, 즉 명절에 만나는 가족처럼 얼굴을 보고 만나는 사람에게서 일어날 확률이 높습니다. 이 갈등 속에서 우리의 성숙한 신앙이 빛나야 합니다.

2. 갈등 속에서 빛나는 믿음: 평화와 양보를 선택하다.

아브라함은 갈등 앞에서 가장 먼저 평화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혈기나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고 롯에게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고 선언했습니다 (창 13:8). 그는 어른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선택권을 조카 롯에게 먼저 주며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양보했습니다 (창 13:9). 아브라함은 시시비비를 가리거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대신, 진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면 양보했습니다. 이러한 양보는 애굽에서의 실패를 통해 '하나님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신다'는 약속을 더욱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우리는 갈등 속에서 이기려고 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3. 안목의 정욕을 조심해야 합니다. (롯의 실수)

롯은 삼촌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자신 역시 양보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가장 좋은 땅을 먼저 선택했습니다. 롯이 눈을 들어 바라본 요단 지역은 물이 넉넉하여 마치 여호와의 동산 같고 최고의 땅으로 불리던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 (창 13:10). 그러나 롯의 실수는 그 땅이 곧 죄악이 가득한 소돔과 가까웠다는 점입니다. 롯은 결국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습니다 (창 13:12). 돈이 되느냐, 이익이 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는가'입니다. 하나님 없는 성공은 진정한 축복이 아닐 수 있습니다. 롯은 안목의 정욕에 이끌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쫓았고 (요일 2:16), 이는 결국 어리석은 부자의 비극(눅 12:20)처럼, 끝이 있는 인생을 잊고 세상 것만 바라보는 욕심에 끌린 결과였습니다.

4. 아브람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롯이 스스로 눈을 들어 당장의 이익과 번영을 바라본 것과 달리 (창 13:10), 롯이 떠난 후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창 13:14).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께 맡기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시선은 땅의 풍요가 아닌, 보이지 않는 언약을 주신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좌를 선택하느냐 우를 선택하느냐보다 '내가 하나님 편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도 에덴처럼 변화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당장의 손해를 감수하는 양보와 희생의 영성을 통해 자손의 복과 땅의 복이라는 신적인 축복을 약속받았습니다 (창 13:16-17).

결론: 지혜로운 후퇴는 전진입니다.
아브람과 롯의 다툼에서, 아브라함은 평화를 선택하고 먼저 양보했습니다. 롯은 눈에 보이는 좋은 곳을 선택해 전진한 것 같았지만, 그 전진은 결국 후퇴였고, 아브라함의 후퇴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전진이었습니다. 지혜로운 후퇴는 전진입니다. 이번 추석 명절, 선생님과 성도님들 모두 갈등 속에서 혈기와 자기주장을 내려놓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삼아 영적 안목을 가지고 행동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있는 갈등을 통해 보석 같은 신앙으로 세워지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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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누림교회

2025년 9월 28일 <설교요약>
제목: 기근앞에서 / 성경: 창12장 10-20절

도종환 시인의 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처럼 꽃은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으면서 피어납니다. 우리의 삶과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흔들리고 젖으면서 성장하고,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 우리를 세우십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조차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흔들림 속에서도 붙드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보려 합니다.

1. 아브람이 만난 기근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 가나안에 왔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기근이 찾아왔습니다(창12:10). 순종하면 만사형통일 것 같지만, 믿음의 길에도 고난은 있습니다. 성경이 약속하는 복음은 고난이 없는 삶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진리입니다.

아브람은 기근 앞에서 하나님께 묻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는 신뢰보다는 인간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애굽은 풍요로움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세상을 의지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우리도 위기 때마다 “애굽”을 찾지 않습니까? 예배 없는 성공, 하나님 없는 안정을 좇고 있지 않습니까? 기근은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는 훈련입니다.

2. 아브람이 만난 더 큰 위기
애굽에 들어선 아브람은 아내 사래의 미모 때문에 자신이 죽을까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움은 거짓으로 이어졌고, 아내를 누이라 속였습니다(창12:11-13). 그 결과 사래는 바로의 궁으로 끌려갔습니다. 아브람은 많은 재물을 얻었으나 가장 소중한 아내를 잃을 뻔했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흔들림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과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두려움은 언제나 거짓을 낳고, 인간적인 꾀는 더 큰 위기를 부릅니다. 그러나 믿음은 두려움을 넘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3. 아브람이 경험한 하나님의 도우심
아브람은 아무 힘도 지혜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바로와 그 집에 재앙을 내리심으로 사래를 지켜내셨습니다(창12:17).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지킨 것은 그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개입하셨을까요? 사래의 태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려는 언약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람의 연약함과 실수조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성실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열심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성

아브람은 목숨을 지키려다 아내를 잃을 뻔했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기근’을 피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흔들리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적용과 결론

우리의 인생에도 기근은 찾아옵니다. 경제적 어려움, 건강의 위기, 신앙의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하나님을 붙잡을 때입니다. 기근은 끝이 아니라 믿음을 단련하고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도종환 시인의 말처럼,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흔들렸지만 하나님은 그를 붙드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도 그 신실하신 주님을 의지하여 기근을 견디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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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누림교회

2025년 9월 21일 <설교요약>

제목: 복의 통로 / 본문: 창12:1-5 /

하나님의 열심, 복의 근원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는 하나님을 떠나 절망 가운데 빠진 인간의 연약함을 다룹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시작되는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단순히 한 사람의 믿음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죄로 인해 깨어진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궁극적인 구원자를 보내시기 위한 첫걸음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위대한 계획을 시작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여정은 곧 우리가 따라야 할 믿음의 여정입니다.

1. 믿음은 떠남에서 시작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명령은 단순히 물리적인 이동을 넘어선 영적인 결단입니다. 이는 익숙한 삶의 터전과 세상적인 가치관, 그리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았던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명령입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듯이, 믿음의 첫걸음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옛 삶과 단절하는 용기 있는 결단입니다.

2. 믿음은 신뢰하며 걷는 여정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목적지를 명확히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모든 것을 보여주시고 가라고 하셨다면,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이 아니라 계산만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거래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가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신뢰만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예측할 수 없는 광야와 같지만, 믿음은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아브라함은 보지 못하고 믿었기에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3. 믿음은 복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됩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겠다'고 하지 않고, "너 자체가 복이 되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가장 큰 복은 바로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복의 통로가 되는 삶은 이 복음을 나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섬김으로 이웃과 열방에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흘러가지 않는 복은 고여서 썩게 됩니다.

4. 믿음은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라함과 롯의 가장 큰 차이는 순종의 대상에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은 눈에 보이는 삼촌을 따라갔습니다. 사람을 따라가면 시험에 들기 쉽지만, 말씀을 따라가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널 때 '법궤'를 앞세웠듯이, 우리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앞세우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양 '주님 말씀하시면'의 가사처럼, 주님께서 '가라' 하시면 믿음으로 나아가는 순종의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결론
하나님은 아브라함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불안한 미래를 점치거나 사람의 눈치를 보는 삶을 내려놓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보이지 않아도,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들고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갑시다.
주님께서 "가라" 하시면 믿음으로 나아가고, "서라" 하시면 묵묵히 기다리며, "멈추라" 하시면 그 뜻을 헤아리며 멈춰 서는 순종의 삶을 살아가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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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누림교회

제목: 나의 숨겨진 바벨탑
본문: 창세기 11장 1–9절

1. 들어가는 말: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의 몰락

여러분은 ‘타이타닉’ 호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1912년, 대영제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크고 튼튼한 배를 만들었다고 자랑했습니다. 길이 269m, 폭 28m, 최대 탑승 인원 3500명.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기술력의 결정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결코 침몰할 수 없는 배”라고 불렀고, 심지어 “하나님이라도 이 배를 침몰시킬 수 없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 배는 첫 항해에서 빙산과 충돌해 산산조각이 났고, 1500명 이상의 생명이 차가운 바다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결코 침몰하지 않는다”던 인간의 자만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세상도 다르지 않습니다. 과학, 의학, 인공지능, 우주 탐사… 인간은 더 높이, 더 빨리, 더 크게를 외치지만 그 끝은 언제나 허무와 무너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벨탑 사건은 바로 그 인간의 교만, 하나님 없는 연합의 비극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2. 본문 배경: 기술은 발전했지만 마음은 비어 있었다

홍수 이후 인류는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고, 한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었죠. 사람들은 벽돌을 굽고 역청을 사용하는 새로운 건축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벨탑 사건을 통해 우리 마음속 숨겨진 바벨탑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정말 쌓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3. 첫째, 교만을 멀리해야 합니다

바벨탑을 쌓은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창11:4)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 했습니다.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것은 단순히 높은 건물을 짓겠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도전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 교만의 뿌리는 에덴동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에게 “네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속삭였습니다(창3:4–5). 인간은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완전해질 수 있다는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유대 철학자 필로에 따르면, 사람들은 벽돌 하나하나에 자기 이름을 새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탑이 무너지자 그 이름들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인간의 명예욕이 얼마나 허망한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대신할 우상을 내면에 세우는 것이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성공, 돈, 명예라는 우상에 **‘나의 이름’**을 새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의 혈통과 학식과 명예를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그 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고전15:10).

4. 둘째, 흩어짐을 두려워하지 말고 생명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들이 탑을 쌓은 두 번째 이유는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불안이 있었습니다. 죄인은 항상 불안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안전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무지개 언약을 통해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흩어짐이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창1:28, 9:1)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 속으로, 세상 속으로 파송하십니다. 우리는 숨어 있는 수도자가 아니라 세상으로 보내진 소금과 빛입니다(마5:13–14). 소금은 소금통 안에서만 머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상 속으로 흩어져 들어가 부패를 막고 맛을 내야 합니다.

교회 울타리 안에서만 안전하게 머물려는 신앙은 바벨탑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력 있게 세상 속으로 들어가 가정에서, 일터에서, 학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5. 셋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고, 결국 그들을 온 지면으로 흩으셨습니다(창11:6–8). 바벨이라는 이름은 ‘혼란’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 무엇인가를 이루려 하면, 그 끝은 반드시 혼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계획을 무너뜨려서라도 순종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쳤을 때 하나님은 폭풍과 큰 물고기로 그의 계획을 깨뜨리고 니느웨로 돌려보내셨습니다. 우리의 계획이 무너지는 순간이 하나님의 뜻이 시작되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6. 결론: 바벨의 혼란에서 오순절의 연합으로

바벨탑 사건은 인간의 교만과 분열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역사를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시자 각기 다른 언어를 쓰던 사람들이 동일한 복음을 듣고 하나 되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행2:4).

진정한 연합은 성령이 임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실 때 가능합니다.
에베소서 4:3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사랑으로 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마음속에도 보이지 않는 바벨탑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욕망, 내가 만든 안전망, 내가 세운 계획들….
그 탑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숨겨진 바벨탑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성령 충만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 은혜의 사람, 겸손의 사람 되기를 축복합니다.

3 months ago | [YT] | 1

은혜누림교회

2025년 9월 7일 설교요약 / 창세기9장 / 노아의 실수

오늘 우리는 노아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려 합니다. 노아는 당대 의인이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홍수 심판을 이겨낸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영광스러운 성공만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가 실패하고 넘어지는 연약한 모습까지도 솔직하게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지점입니다.



1. 거대한 성공 뒤에 찾아온 작은 실패


노아는 거대한 물의 심판을 이겨냈지만, 작은 포도주 한 잔 앞에 무너졌습니다. 성경은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창 9:21)라고 기록합니다. 영적 긴장이 풀린 순간, 노아는 자신의 육체적 욕망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노아와 같지 않습니까?
직장과 가정에서 치열하게 싸우며 큰일을 해냈지만, 마음의 평안을 얻는 순간 나도 모르게 긴장을 놓칩니다. 큰 시험을 이겨낸 후에 오히려 작은 유혹에 넘어집니다. 아이들을 다 키우고 시간적·물질적 여유가 생길 때, 혹은 신앙생활에 익숙해져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고 안심하는 바로 그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고린도전서 10:12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성경은 노아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등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이 넘어졌던 이야기를 숨김없이 기록합니다. 이는 그들의 위대함을 깎아내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그리고 그 연약함 때문에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려 함입니다.

어제의 신앙으로 오늘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매일 새롭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노아의 실패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2. 수치를 드러내는 함의 길, 덮어주는 셈과 야벳의 길


벌거벗은 아버지의 모습을 본 세 아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보고 나가서 두 형제에게 떠벌렸습니다. 여기서 '알리다'는 말은 단순히 사실을 전달한 것이 아니라, 조롱과 비난의 마음으로 흥밋거리처럼 폭로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함의 문화'가 넘쳐납니다. 인터넷과 SNS는 다른 사람의 실수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거대한 광장이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실패를 보며 "그럴 줄 알았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묘한 우월감과 쾌감을 느낍니다. 죄악된 우리의 본성은 남의 허물을 드러내고 비판함으로써 자신을 높이려는 유혹에 쉽게 빠집니다.

하지만 셈과 야벳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옷을 가져다가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육체의 부끄러움을 가려준 행위가 아닙니다.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를 존중하며, 그분의 실수를 인정하되 그로 인해 온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덮어줌의 은혜'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실수를 외면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시편 32편 1절은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고 정죄하는 대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라는 거룩한 옷으로 우리의 더럽고 추한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이 '덮어주심'이 필요한 죄인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을 온전히 경험하면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할 수 없게 됩니다. 용서를 받아본 사람이 용서를 할 수 있고, 덮어주심을 체험한 사람이 다른 이를 덮어주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3. 축복의 언어, 저주의 언어

아버지 노아는 세 아들의 행동에 따라 축복과 저주를 선포합니다. 수치를 드러낸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는 저주가, 아버지를 덮어준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이 선언됩니다.
야벳에게는 '창대케 되는' 축복이 주어졌고,
셈에게는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가장 큰 영적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이는 셈의 후손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실 것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실수를 덮어준 셈의 선택은 단지 가문을 살린 것을 넘어, 인류 구원의 역사를 여는 출발점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에는 이처럼 무서운 영적인 힘이 있습니다.

특히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말은 그들의 미래를 빚어가는 조각칼과 같습니다.
"넌 커서 뭐가 될래?" "왜 그 모양이냐?"는 말은 자녀의 영혼에 상처를 남기고 잠재력의 문을 닫게 합니다. 반면, "하나님이 너를 통해 큰일을 하실 거야", "너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야"라는 축복의 말은 아이들의 내면을 건강하게 세웁니다.

부부 관계 전문가인 존 가트맨 박사는 '비난, 경멸, 방어, 담쌓기'라는 네 가지 태도가 관계를 망가뜨린다고 경고합니다. 이 네 가지는 모두 함이 아버지에게 보였던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비난과 저주의 언어가 아니라, 용서와 축복의 언어가 우리의 가정을 살리고 공동체를 세웁니다.




결론: 십자가 아래서 덮어주는 삶으로
우리는 모두 노아와 같이 연약하여 넘어지고 부끄러움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을 낱낱이 드러내어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 위에서 그분의 생명으로 우리를 덮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향해 돌을 들고 서 있던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돌을 내려놓았지만, 주님은 은혜를 들어 그 여인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남의 허물을 드러내고 손가락질하며 정죄하는 함의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십자가 은혜를 힘입어 덮어주고 세워주는 셈과 야벳의 길을 걸을 것인가?
주님은 우리에게 율법적으로 '허물을 덮으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십자가에서 너의 모든 허물을 이렇게 덮었단다." 이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 하루, 우리 안에 있는 덮어줌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의 옷자락을 기꺼이 다른 사람에게 펼쳐주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3 months ago | [YT] | 1

은혜누림교회

2025년 8월 31일 주일설교 요약

제목: 무지개 언약 (창9장)




새해가 되면 우리는 저마다의 소망을 품고 서로에게 덕담을 건넵니다. "올해는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일이 다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언제나 기대만큼 밝지 않습니다. 때로는 갑자기 몰아치는 폭풍처럼, 예상치 못한 일들이 우리의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 문제로 밤잠을 설치고, 예고 없이 찾아온 병으로 고통받으며,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해 마음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나이 들어가는 현실 앞에서, 앞날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이야기는 바로 그 절망의 한가운데서 시작됩니다. 대홍수 심판이 끝나고,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에서 나와 새로운 땅을 밟았을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이 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삶의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온통 폐허와 잿더미만 남아 있었습니다. 인류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새로운 시작을 열어가야 하는 그들의 마음속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실감,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막막함과 깊은 두려움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절망의 잿더미 위에 새로운 희망을 세워 주셨습니다. 노아에게 임했던 그 놀라운 은혜가 오늘 우리에게도 임하길 축복합니다.



1. 하나님은 복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 위에서 노아에게 가장 먼저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9:1). 히브리어로 이 단어는 ‘바라크’인데, 이는 단순히 ‘잘 되어라’는 축복을 넘어,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셔서 생명력을 불어넣고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마치 죽은 땅에 씨앗을 뿌려 새로운 생명이 움트게 하듯, 하나님께서 직접 노아의 삶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축복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처음 주셨던 축복과 정확히 일치합니다(창세기 1:28). 이는 죄로 인해 세상이 심판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선한 목적은 결코 포기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실패를 경험합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관계가 무너지고, 계속되는 취업 낙방에 절망합니다. 세상은 실패한 사람에게 ‘무능하다’, ‘게으르다’고 냉정하게 평가하며, ‘너만 힘든 게 아니다’는 말로 더 큰 좌절을 안겨주곤 합니다. 세상은 실패를 마치 그 사람의 최종 능력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실패를 끝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실패를 새로운 은혜의 출발점으로 바꾸십니다.



성경은 수많은 실패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가장 위대한 다윗조차 수많은 실패를 경험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주님을 위해 죽겠다고 장담했지만, 십자가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자격이 없다고 손가락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내 양을 먹이라”고 다시 사명을 주시며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시작하라. 내가 너와 함께하며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겠다.”



2. 하나님은 생명의 존엄성을 가르치십니다.


홍수 심판 이후, 하나님은 노아에게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지침을 주시며 육식을 허락하셨습니다(창세기 9:3). 이는 파괴된 환경 속에서 인류가 생존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배려와 은혜였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한 가지를 엄금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피를 금하셨을까요?



첫째,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피는 단순한 액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자리입니다. 피를 함부로 먹는 것은 생명을 경시하는 행위, 곧 창조주 하나님을 거스르는 행위가 됩니다. 이 명령에는 모든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생명을 귀하게 여기라는 깊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는 행위입니다(창세기 9:6).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기 전부터 이미 인간의 생명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약에 오신 예수님은 이 명령을 더 높은 수준으로 확장하셨습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태복음 5:22).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말 한마디로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를 무시하고 짓밟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듯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비교할 수 없는 존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둘째, 피는 속죄의 도구입니다. 구약 시대에 짐승의 피는 죄를 덮는 역할을 했습니다. 피는 인간의 식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위한 거룩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피는 일시적인 효력만 있었기에 죄를 범할 때마다 짐승의 피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단번에 흘리심으로, 더 이상 짐승의 피가 필요 없는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 제사를 완성하셨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브리서 10:12). 그러므로 우리는 피를 존중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존중하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귀히 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무지개로 언약하셨습니다.


홍수 심판을 겪은 노아와 그 가족은 비가 올 때마다, 하늘에 먹구름이 낄 때마다 ‘혹시 또 심판이 오는 건 아닐까’ 하는 깊은 트라우마와 두려움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안한 마음을 아시고, 확실한 언약의 증거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무지개’입니다(창세기 9:14-15). 무지개는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노아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하늘의 약속의 사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픔을 잊어버리라’고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억은 지우개로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대신 하나님은 그들의 상처 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무지개를 보여주시며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한다’는 따뜻한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저는 이 무지개 언약을 ‘변함없는 약속의 등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거친 바다와 같은 세상 속에서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맬 때, 하나님의 무지개 언약은 어둠 속에서 우리를 안전한 항구로 인도하는 꺼지지 않는 등대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무지개보다 더 크고 영원한 약속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무지개가 홍수 후의 약속이라면,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죄와 실패까지 덮는 영원한 무지개입니다. 무지개 언약이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면, 십자가는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 나의 생명을 내어주겠다'는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의 선언이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세상의 사랑은 조건적입니다. 능력 있고, 가치 있는 사람만 인정받고 사랑받습니다. 우리의 수많은 상처는 바로 이 조건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달랐습니다. 우리는 사랑받을 만한 어떤 조건도 갖추지 못했을 때, 심지어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노아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제는 잘 할 수 있다’고 다짐하지만 또다시 넘어지고 연약해집니다. 내 힘과 능력으로는 승리할 수 없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이루신 주님이 계십니다. 무지개 언약보다 더 크고 영원한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를 일으켜 세웁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자격을 갖추려 몸부림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주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매일 십자가를 바라보고, 매일 성령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3 months ago | [YT] | 0

은혜누림교회

2025년 8월 24일 주일설교 요약
제목: 자카르의 은혜 / 성경: 창8장



우리의 삶은 때로 끝없는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방주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병상에서, 오랜 문제 앞에서, 혹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독 속에서 우리는 묻습니다. "하나님, 정말 저를 잊으신 것은 아닙니까?“



홍수 심판 후 노아의 방주 안은 구원의 장소였지만, 동시에 불확실한 기다림과 고독의 공간이었습니다. 밖은 죽음의 물로 가득했고, 노아는 혹시 하나님이 자신을 잊으신 건 아닐까 하는 절망감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노아는 그 막막한 방주 안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의 축복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자카르의 은혜: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1절 말씀에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기억하사'는 '자카르(זָכַר)'입니다. 자카르는 단순히 생각나는 것을 넘어, '언약을 지키고 언약대로 행동으로 옮기심'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은 노아를 잊지 않으시고, 그와 맺은 언약을 잊지 않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사야 49장 15절은 말씀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혹여라도 인간의 사랑이 변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름은 이미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습니다.



라헬의 태를 여시고(창 30:22), 애굽에서 고통받던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 소리를 들으셨을 때(출 2:24)도 하나님은 그들을 '자카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카르'가 여러분의 삶과 가정 가운데 경험되기를 축복합니다.



2. 루아흐의 은혜: 성령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1절 말씀을 다시 보면,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람'은 히브리어로 '루아흐(רוּחַ)'입니다. '루아흐'는 단순히 자연의 바람이 아니라, 창세기 1장 2절의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혼돈과 흑암 위에 운행하실 때 질서와 생명이 시작되었듯, 노아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루아흐'가 불어오자 혼돈이 물러가고 새 질서가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물은 한 번에 빠지지 않았고, 서서히 줄어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때로는 조급해하는 우리의 마음과 달리 조금씩, 그러나 가장 완벽하게 우리의 삶을 이끄십니다.


성령님은 무질서한 곳에 질서를 세우시고, 절망의 자리에 소망을 심으시며, 죽음 같은 현실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십니다. 노아의 방주에 불었던 '루아흐'의 바람이 오늘 우리의 삶에도 불어오기를 소망합니다.



3. 노아의 믿음: 인내와 순종, 그리고 예배



1) 노아는 인내했습니다.



노아는 물이 줄어들자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내며 하나님의 때를 분별했습니다. 처음 보낸 비둘기가 돌아왔을 때, 그는 또 7일을 기다렸습니다. "믿음은 성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빨리빨리'의 시대에 살지만,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좋은 믿음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며, 인내로 결실하는 것입니다.



2) 노아는 순종했습니다.



땅이 마른 것을 알았지만, 노아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15-16절에서 하나님께서 "방주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시자, 비로소 노아는 순종했습니다. 순종은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온전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3) 노아는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후, 세상은 폐허와 같았습니다. 당장 생존을 위한 집과 식량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 구원의 근원이 자신의 지혜나 노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예배는 주일에 교회에 나와 출석 도장을 찍는 의무가 아닙니다. 삶의 가장 중요한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온전한 예배는 다시는 사람으로 인해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져오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영국의 한 목사님 예화처럼, 복음의 소망을 가진 자는 환경의 폭풍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누립니다. 우리 인생의 항해에도 폭풍은 있지만, 우리가 누구를 만날지, 그리고 우리의 여정 끝에 누가 기다리고 계신지 아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를 '자카르'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 위에 '루아흐'의 바람을 불어넣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붙들고, 노아처럼 인내하며 순종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3 months ago | [Y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