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바다를 뒤흔들어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예레미야 31:31-35
우린 지난 시간 하나님의 계획은 남유다의 멸망 이후 온전한 이스라엘의 회복까지 포함된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전화위복이란 말처럼 그들의 그 고난과 무너짐이 도리어 더 큰 갱신과 회복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버리지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실 것인데 반드시 그렇게 하셔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창조한 이스라엘과 피조 세계를 아무런 갱신의 형태도 없는 상태에서 멸절시킨다면 그것을 만드신 당신의 의도가 무너지는 것이며 당신의 실패를 전제하는 입니다. 또한 그 위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언약하신 분의 말이 허공의 메시지와 같이 되기 때문에 이 땅에 대한 어떤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파멸에 이르게 둘 수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유다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피조 세계도 기억하신다는 점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예레미야 31:27절을 보십시오. 예레미야 5. 복된 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며 멸하며 곤란케 하던것 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리는 날이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짐승이란 인간을 제외한 피조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짐승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단어 베헤마는 가축으로 주로 번역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아래의 세상을 만드실 때 에덴에 있던 것이 사람과 베헤마입니다. 에덴동산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노아 시대에도 베헤마를 방주에 함께 들어가게 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피조 세계를 파멸하는 것이 목적인 분이 아님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자와 사랑을 기본적으로 갖고 계시기에 이 아래의 자신이 만든 피조 세계와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파멸케 하는 분이 아니라 다시 갱신되도록 하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회복은 결국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된 피조 세계가 다시 회복되어 온전한 샬롬에 이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이 땅을 향한 목적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예레미야의 시대에 포로기가 허락된 것은 단순히 약간의 고침이 아니라 완전한 새로고침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완전히 무너트려 다시 세워 하늘의 것으로 새롭게 만들어 내셔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포로기라고 하는 광야로 이스라엘을 끌고 가서 신혼의 사랑으로 그들과 함께 살면서 다시 언약을 맺음으로 당신의 신실하심을 입증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새롭게 갱신된 백성들이 나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구조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조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베리트 언약입니다. 북왕조 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멸망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의 골자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구도 예배하지 않고 경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32절을 보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손을 잡고 데려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남편과 주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남편은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한 남편과 한 아내가 결혼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본적인 골격인데 구약 성경은 한 남편의 역할을 하나님에게 한 아내의 역할을 남성과 여성의 구별없이 이스라엘에게 배정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남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새로운 남편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들의 남편 히브리어로 바알 이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바알을 찾아 그를 섬겼다고 말한 것입니다. 전술했지만 여기서 남편이란 단어는 히브리어 바알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우상신 바알을 떠올리게 합니다.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내가 그들의 바알이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 바알을 자신의 신으로 삼았던 것에 대한 풍자적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라는 것인데 그 계약을 파기한 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인정하지 않으시고 새롭고 갱신된 공동체를 만들어 내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갱신은 이스라엘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광야로 가는 것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이 그 당시에는 포로 시기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목적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불렀지만 이스라엘은 가나안 일곱 족속의 우상을 하나님으로 섬겼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원했던 다산과 풍요를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다움을 요구하고 바알은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줄 것이라고 만든 우상 신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진단하신 내용은 이것입니다. 예레미야 2: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두 가지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이것이 죄가 되는 민족은 이스라엘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길을 만들고 먹을 것을 챙기며 돈을 버는 것이 소위 말하는 생존 아닙니까? 그 일을 위해서 신을 만들고 예배하는 것이 이 아래의 삶의 방식 아닙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심의 목적은 하나님과 함께 살고 그 분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를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적에 서로 동의하여 합의한 것이 여기서 말하는 베리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파기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이 아래의 세상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갱신된 포로기 이후의 백성들과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시겠다고 한 것입니다.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렇다면 왜 첫 언약은 실패했을까요? 하나님은 모세와 세운 그 첫 언약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판단하십니다. 예레미야 31:33절입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첫 언약은 돌판이 밖에 있었습니다. 그들과 멀리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으나 그 법도를 이스라엘이 멀리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과 연단을 통해 그들의 삶과 가슴 속에 하나님의 법도가 새겨 지도록 할 것이라고 단언하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포로기인 것입니다. 고난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비유를 하나 설명 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15:11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12절을 보면 두번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분깃을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달라는 구문은 명령문 도스 모이 토 에피발론 메로스 우시아 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자식이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물려 달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큰 문제적 행동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던 바리새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단순히 돈을 조금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은 나에게 죽은 자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극악무도한 폐륜적 행위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일에 대해 저주를 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그 요구대로 줍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의 그 무도함을 참아주신 것입니다. 그 이후 그 아들은 허랑방탕하게 모든 재산을 탕진해서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현실은 이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은 세상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고 돼지 쥐엄 열매도 먹을 수 없을 정도의 가난과 결핍을 경험합니다. 그러자 그는 깨닫고 돌이킵니다. 누가복음 15:17-19절을 보세요.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여기서 보시면 그는 돌이켜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우린 둘째 아들의 후회와 회개를 주목합니다만 지난 주 설교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이 모든 비유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관용입니다. 전술했지만 아버지가 유산을 달라고 하는 아들을 저주하거나 돌로 쳐 죽이지 않은 것은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를 용납했기 때문입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중요하기 때문에 헬라어 원문으로 읽어드리면서 구문독해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Καὶ ἀναστὰς ἦλθεν πρὸς τὸν πατέρα ἑαυτοῦ· 카이 아나스타스 엘덴 프로스 톤 파테라 헤아우투 에티 테 아우투 그리고 그가 일어나서 아버지를 향해서 갔다 스스로.
ἔτι δὲ αὐτοῦ μακρὰν ἀπέχοντος εἶδεν αὐτὸν ὁ πατὴρ αὐτοῦ 에티 데 아우투 마크란 아페코 에이돈 아우톤 호 파테르 아우투 아직도 거리가 상당히 멀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셨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헬라어 구문이 도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에서 주어와 동사는 그의 아버지 호 파테르 아우투 가 그를 보셨다 에이돈 는 것이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상당히 멀리 있었다는 형용표현이 앞서 있습니다. 모든 서양 언어는 앞에 등장하면 중요한 것입니다. 도치를 시켜 놓았다는 것은 돌아선 탕자와 아버지의 거리가 상당히 멀었음을 더 강조하는 그림인 것입니다. 탕자와 아버지의 거리감이 멀었지만 하나님은 그 거리감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그것을 보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탕자에 대한 관심을 놓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이렇게 행동합니다.
καὶ ἐσπλαγχνίσθη καὶ δραμὼν ἐπέπεσεν ἐπὶ τὸν τράχηλον αὐτοῦ 카이 에스페라코세 카이 드라몬 에페페센 에피 톤 트라켈론 톤 아우투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애가 끓게 되시고 미친듯이 달려가서 그의 목을 감싸안고
καὶ κατεφίλησεν αὐτόν. 카이 카테피레센 아우톤 그에게 입을 맞추셨다
하나님은 탕자가 집을 나간 이후에 맘 편하게 계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망하게 될 것을 다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시간을 허락하신 이유는 그 과정이 있어야 다시 그가 아버지를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생하던 탕자가 돌아서서 하나님에게 초라하게 거지 모습으로 나타셨을 때 아버지는 그를 저 멀리서 바라보고 애가 끓게 되셔서 달려가서 그를 안아 주셨습니다. 이 모습에서 우린 이스라엘과 우리의 삶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와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는. 이제 밖에 있던 아버지의 법령은 그에게 살이 되어 기쁨으로 동의하는 내용이 되었을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지 않습니까. 집에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아버지와 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집에 있었던 첫 번째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대해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집 밖을 다녀 온 두 번째 아들은 집 밖을 다녀 온 이후로 아버지와 한 몸이 되었습니다. 누가 탕자입니까?
본론으로 돌아와서 포로기를 겪으면서 밖에 있던 아버지가 안으로 들어오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고 그것이 ‘새 언약’입니다. 우리의 삶에 적용해보면 우린 이 아래의 세상에 왜 왔습니까? 아버지의 집, 아버지의 통치,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피부의 언어로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밖에 있는 목사나, 전도사나, 장로님이나 권사님들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아버지를 절대로 떠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내 안에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 언약입니다. 밖에 있던 하나님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의 삶에 오신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과 손을 잡고 걷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역사를 주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31:3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심비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 누가 가르칠 이유도 없고 강요할 이유도 없는 하나님과 함께 하기로 작정하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새 언약을 맺은 이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제 우리가 그 새언약의 백성이 되었다고 단언합니다. 고린도후서 3: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바울이 이렇게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새언약의 백성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음주에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새언약의 핵심이자 증거, 바로 그 분에 관한 이야기를 말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최근 시험 기간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시험을 잘 보았고 점수도 많이 올랐습니다. 그런데 한 두 명이 걸렸습니다. 점수가 오르지 않은 것입니다. 많은 아이들이 수고했고 좋은 결과를 얻었으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만 그 한 두명이 더 크게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저의 죄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법을 모르고 주신 것에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찬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그 죄가 얼마나 나를 괴롭게 하는지를 알고 그것을 멀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으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삶을 우린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저 밖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법도와 진리를 우리가 알게 될 것입니다.
유산을 달라는 탕아를 저주하지 않으시고 돌아온다는 그를 저 멀리서 보고 달려가서 미친듯이 껴안으시는 하나님, 그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주어진 삶 가운데 늘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는., 예레미야서의 표현처럼 남편이신 하나님을 둘러싼 신부 이스라엘의 삶이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 요한계시록 13:1-4
우린 지난 시간 마귀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전쟁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마귀와 "죽임당한 짐승 vs 죽임당한 어린양 … 적그리스도의 위장된 복음” 신자들의 싸움은 결국 ‘입’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바른 진리를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진리를 무시한 채로 인본주의적인 해석과 믿음을 고수할 것인가?사실 짐승에 대한 서술이 등장하는 요한계시록 13장의 내용도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을 담고 있는 환상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예나 지금이나 있습니다. 그리고 다들 훌륭한 통찰력을 갖고 설교를 준비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정말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설교자나 교인들이 모두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오늘은 요한은 또 다른 환상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짐승에 관한 것입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동물 모양의 형태를 갖고 있는 한 짐승은 다니엘 7:1-7절에 등장을 합니다.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이 그 침상에서 꿈을 꾸며 뇌 속으로 이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그 일의 대략을 진술하니라 다니엘이 진술하여 가로되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여기서 보시면 바다에서 짐승 넷이 나왔다고 합니다. 본래 고대 근동에서 바다는 하나님의 질서가 없는 곳을 은유하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용과 뱀은 세상 왕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해를 그대로 가져 와서 요한은 서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목할 점은 다니엘은 네 개의 다양한 제국이 있다고 서술했다면 요한은 한 짐승이 그 모든 네 동물의 형상을 갖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절을 보시면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이란 말은 일차적으로는 로마를 은유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나아가서 이 바다에서 올라온 한 짐승은 다니엘에서 말했던 많은 제국들의 모습을 이 짐승이 갖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이 땅 위에 세워진 모든 하나님을 대적하여 선 세상 군왕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짐승은 단순히 세상 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닌 종교적 존재라는 점입니다. 13:2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여기서 용이 짐승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권세를 주었다고 합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다른 용이란 존재가 짐승에게 자신의 권세를 수여하는 장면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모든 권세와 능력을 수여하시는 시편 110편의 모습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짐승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되었는데 그 상처가 나았다고 합니다.
13:3절을 보십시오.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여기서 죽게 되었다 에 상응하는 헬라어 단어는 스피조입니다. 이 단어는 요한계시록에서 등장할 때 어린 양이 죽임을 당했다고 서술할 때 쓰는 그 단어입니다. 심지어 이 현상을 본 이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Τίς ὅμοιος τῷ θηρίῳ” 티스 호모이스 토 데리오. 누가 이 짐승과 같은가?
이 표현은 홍해를 도하한 이후 하나님을 찬양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백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 온 것입니다. 누가 우리 하나님과 같은가? 란 표현에서 하나님을 없애고 짐승으로 바꾼 것입니다.
요한이 본 환상은 단순히 세상 임금이 기적을 행했다는 식의 구조가 아닌 종교적 차원의 존재들이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가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세상도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더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의 상처와 낫게 되는 그 과정을 통해 온 땅이 그 짐승을 경배합니다. 요약하면 여기서 등장한 용과 그에게서 권세를 받은 짐승과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해보면 상당히 유사한 점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 양과 짐승은 각각 하나님과 용에게 그 권세와 능력을 수여 받습니다. 어린 양과 짐승은 죽임을 당했다가 다시 부활했습니다. 어린 양과 짐승은 많은 이들의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습니다. 먼저 어린 양은 십자가와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세상은 이기셨지만 한 짐승은 폭력과 억압으로 성도들을 이깁니다. 어린 양의 통치 기간은 영원에서 영원이지만 한 짐승의 통치는 마흔 두 달, 유한한 시간입니다. 어린 양과 그의 십자가를 따르는 자들은 죽은 것 같지만 영생을 누리고 한 짐승을 따르는 자들은 마흔 두 달이 지나고 나면 모두 멸망한다는 점입니다.
요한이 본 환상이 이 유사한 점을 시사하는 것은 성도들의 대적인 세상은 제국적인 모습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차원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시대의 제국은 단순한 로마 제국이 아닌 황제가 자신을 신이라고 하며 많은 이들이 로마를 종교처럼 숭배하던 시대였습니다. 지금의 나라들과는 조금 다른 성격의 차원이었습니다. 리차드 보컴의 말처럼 이 한 짐승은 로마 제국과 로마 제국이 자신을 하나님으로 칭하며 속국들이 그들을 신으로 섬기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석학적으로 보자면 마틴 로이드 존스의 주장처럼 이 한 짐승은 오늘날에도 해석될 수 있고, 되어야 합니다. 이 아래의 세상은 언제나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를 싫어한다고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을 신으로 섬기고 그것을 숭배하는 종교적 성향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득세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한 짐승은 단순히 로마 제국이 아닌 타락한 인간 세상, 즉 아담 군상들을 총칭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이 짐승은 그리스도와 유사하게 보이는 변장된 그리스도 적그리스도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서 가르치는 자들 그리고 거짓된 용과 세상을 숭배하게 만드는 자들 바로 그들이 거짓 선지자들인 것입니다. 마귀의 공격은 입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그것은 그들의 가르침과 교회의 가르침이 상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마귀들의 공격은 언제나 겉으로 보기엔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고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는 것과 같지만 하나님은 없고 자신과 자신의 유익에만 경도된 것입니다. 자신을 신으로 신격화하고 그런 이들을 추앙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짐승은 신성 모독하는 이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12:17절에서 마귀들이 입을 벌려 강물을 토하여 냈었는데 그 강물의 토함이 결국 어떠한 것인지를 요한계시록 13장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사 기독교회와 진리의 기독교회의 싸움, 그것이 영적인 전쟁이며 종말에 있을 싸움입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해 비방하고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에 사는 자들도 비방하고 있습니다. 이 구조는 다니엘 8:10절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 군대에 미칠 만큼 커져서 그 군대와 별들 중의 몇을 땅에 떨어뜨리고 그것들을 짓밟고 또 스스로 높아져서 군대의 주재를 대적하며 그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를 없애 버렸고 그의 성소를 헐었으며 그의 악으로 말미암아 백성이 매일 드리는 제사가 넘긴 바 되었고 그것이 또 진리를 땅에 던지며 자의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여기서 그것은 뿔입니다. 세상 왕을 은유하는 뿔이 스스로 커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군대와 하늘의 별들을 떨어트리고 짓밟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하늘의 군대와 별들은 신자들을 은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왕들이 교회를 박해하도록 일정기간 허락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소를 헐었고 제사를 폐했으며 진리를 땅에 던지며 자의로 행하여 형통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이며 거짓 선지자들의 모습입니다. 진리가 없이 자신의 뜻대로 행하고 형통을 이루어 가려는 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자의로 행하다 상응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아사입니다. 그들은 형통을 만들고 진리와는 무관합니다. 문제는 그런 세상이 잠깐 득세 하더라는 것입니다. 13:7절입니다.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시편의 고백처럼 이 땅 위에서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잘 됩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힘이 듭니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와 무관하게 사는 자들이 훨씬 더 큰 영광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자괴감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당면한 현실입니다. 성경은 신자들에게 세상의 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복이 아닌 하늘의 복과 승리가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의 현상에 대해 현혹되어선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며 가까이 있는 자들은 인간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결정하심에 따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8절입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이들은 다 짐승에 경배한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아래의 세상이 승승장구 하고 거기에 현혹되겠지만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들은 그 세상에 경배하지 않고 고난과 인내의 삶을 견뎌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9-10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사로 잡혀갈 자는 사로 잡혀갈 것이고 칼에 죽을 자는 죽어야 하지만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로 잡혀 갈 자는 사로 잡혀간다는 말은 예레미야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레미야 15: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은 포로가 될 자들이 있을 것이며 칼에 죽을 자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 왕들을 섬긴 것에 대한 댓가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 신실한 자들도 겪어야 하는 현실이었습니다. 43:11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와서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칠 것이라
여기서도 동일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사로 잡혀 포로가 되고 칼에 죽을 때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자들은 안전합니까? 아닙니다. 괴로움과 어려움을 함께 겪습니다. 그러나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 예언과 약속 안에서 그를 믿고 인내하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 현실을 요한계시록은 그대로 가져 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형통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더 형통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현실 속에서도 신실하게 믿음을 갖고 인내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이미 예정하신 자들일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정이 주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을 인간이 막을 수 없고 역사가 흔들어 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셨기에 우린 완성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명한 현실의 파도가 높을지라도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예정하심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함께 하나님과 손을 잡고 이 바다를 넉넉히 걸어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렘 31:15-20.
우린 지난 시간 하나님이 칠 십년을 바벨론에서 생활하게 하신 이유를 복된 일을 위해서라고 정리했습니다. 하나님과 새 언약.. 그 복된 일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 같은 포로기의 시간을 살게 하시면서 다시 그 옛날 모세의 세대처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시기에 그 의도하신 바를 이루신 후에 우리에게 온전한 샬롬을 주실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멸망 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돌아올 회복에 대해서 누차 강조하여 예언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정한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였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유다가 다시 돌아오는 날이 있을 것이며 즐거움의 노래를 부르는 날이 올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31:4절입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나무들을 심되 심는 자가 그 열매를 따기 시작하리라 하나님은 반드시 이스라엘이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돌아올 이들에 대해 이스라엘아 라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덧붙여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나무를 심을 날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남유다가 아니라 이스라엘로 예루살렘이 아니라 사마리아를 언급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구도는 15절에서 최고점을 찍습니다. 예레미야 31:1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라헬이란 인물은 베냐민과 요셉의 어머니입니다.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은 북왕조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였습니다. 전술했지만 이 표현들은 하나같이 뜬금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는 이미 북왕조 이스라엘이 멸망을 한 이후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레미야는 남왕조의 멸망과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북왕조 이스라엘의 대표 지파인 에브라임과 그의 할머니인 라헬을 언급할까요?
하나님은 남유다의 멸망과 회복을 통해 북왕조 이스라엘까지 회복하실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온전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하나님이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남유다가 멸망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면 북왕조 이스라엘은 온전히 역사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북왕조 이스라엘을 그대로 두실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원한 인자와 사랑을 그들에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일정 기간동안 바벨론에 끌려 간 이후 돌아올 때 남유다가 아니라 온전한 이스라엘로 회복될 것이라고 선언하시고 있으며 이것은 멸망한 북왕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더 나아가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지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남 유다에 제한된 것이 아닌 더 크고 온전한 것을 향해 있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이 구조를 우리의 인생과 역사 안에서 적용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과 고난을 주시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게 허락하시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더 큰 뜻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지엽적이고 감정적입니다. 그 순간만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보고 듣는 것이 언제나 절대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을 넘어서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그 분은 지금 오늘의 현실이 아니라 완전한 그림 속에서 그 분의 백성을 인도합니다. 내가 북왕조 이스라엘을 버릴 수 없다 라는 명제는 그 당시 남유다 사람들에게는 크게 감동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지금 성경을 믿고 읽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은 온전하시고 완전한 뜻이 있으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저도 제 인생을 돌아보면 그 순간만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인정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은 그 순간을 넘어 영원의 차원의 것이기에 우리는 끌려 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즐겁게.
북왕조 이스라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우리가 당황할 수 있지만 이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떠올리게 합니다. 20절입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이 멸망한 에브라임을 생각할 때 창자가 끓는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한국적인 것으로 바꾸면 애가 닳는다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사랑하셨고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싫어하셔서 북왕조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닌 훈육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잠깐 무너진 것이고 멸망한 것입니다. 실제로 북왕조 이스라엘은 그들의 멸망으로 인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그들이 탄식했습니다. 그들은 징벌을 받아야 했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회복되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무관했던 북왕조 이스라엘은 멸망으로 인해 하나님을 찾는 족속이 된 것입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못한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란 표현입니다. 처음 송아지가 멍에를 메면 익숙하지 않고 힘들어 합니다. 멍에에 익숙해져야 하는 송아지였던 에브라임과 북왕조 이스라엘은 그 멍에를 짊어지는 것을 견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레미야의 조국인 남유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레미야 5:5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지도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
이 구절은 굉장히 유명한 구절입니다. 예레미야 5:1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진리를 아는 사람들을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고 선언합니다. 그 후 만나는 그들에게 너희들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길과 말씀은 하나님의 훈육하심의 멍에를 짊어지는 것으로 입증되는 것인데 그것을 거절했다는 말입니다. 북왕조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그들이 멍에를 지기 싫어하는 송아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유다도 동일한 이유 때문에 멸망했음을 독자들은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훈련과 양육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이지만 그 사랑 안에는 훈육과 양육의 개념이 포함됩니다. 그것을 버티지 않고 버리겠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입니다. 예레미야 30:11절을 보세요.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할 것이라 너를 흩었던 그 모든 이방을 내가 멸망시키리라 그럴지라도 너만은 멸망시키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법에 따라 너를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만 여기지는 아니하리라
이것이 하나님 사랑이며, 하나님의 훈육하심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훈육할 때 훈육과 징계를 하지 않는다면 부모의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부르시고 자녀로 삼으셨다면 그 백성들을 자신의 백성답게, 자녀답게 만들어 가실 권한과 책임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박차서 벗어나버린 것이 북왕조 이스라엘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멸망한 것입니다. 그 멸망과 과정 가운데서 북왕조 이스라엘은 후회했고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호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도 당연히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멸망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 멍에를 같이 짊어질 것을 요청하셨고 그것에 북 왕조 이스라엘은 동의한 것입니다.
따라서 남유다의 멸망과 회복에는 온전한 이스라엘의 회복까지 내포된 것입니다. 실제로 예레미야와 유사한 시대를 살았던 에스겔은 이런 환상을 봅니다. 에스겔 37: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네 민족이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거든 너는 곧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 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가져다가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선지자들은 하나같이 남유다의 포로기와 멸망 이후 하나님의 새언약이 세워질 것인데 그 대상이 온 이스라엘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은 언제나 우리보다 크고 온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 안에 갇힌 창조물이기 때문에 시간 밖에 계신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린 그 순간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순간이 아니라 영원 속에 계신 분이기 때문에 순간을 넘은 어떤 계획으로 백성들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끌려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이 그 뜻을 알려 주신다고 해도 절대로 우린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들의 오늘이고 현실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개념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다면, 그 분의 뜻하심이 나의 계획과 생각보다 우선하고 온전한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당장 당면한 오늘을 수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주해보겠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이스라엘을 다시 세워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옛언약의 구조를 회복하려 하십니다. 이것을 성경은 새창조라고 말합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그 옛날 모세가 홍해를 함께 건넜던 이스라엘과는 너무 거리가 먼 세상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광야와 같은 포로기를 보내게 하신 것입니다. 그 기간을 거치면서 그들은 하나님과 새로운 갱신된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과정이 복된 것입니다. 여러분 복이 무엇입니까? 만사가 형통하고 자식들이 좋은 대학교를 가고, 사업이 잘되면 복이 있는 것입니까? 성경이 언제 그런 복을 약속했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돈을 많이 벌어 항상 성공하고 슬픈 일 하나도 없다는 복입니까? 교회를 잘 섬기고 목사들에게 잘하면 받는 그런 복입니까? 그런 것은 성경의 복과 사실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복된 일은 하나님과의 연합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31:31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을 열심히 알아야 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옵니다. 그것이 새언약의 시대입니다.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이 밖에서 백날 천날 외치는 그 하나님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자신을 직접 계시하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것이 새언약입니다. 겉과 겉이 아닌 영과 영으로 속과 속으로 하나님과 한 몸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된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복” 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가?
말씀을 마무리 하면서 온 이스라엘이 회복된 때가 있습니까? 역사 속에서 새 언약의 대상인 온 이스라엘이 세워진 때가 언제입니까?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은 북왕조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 국한되지 않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을 얻은 온 믿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8: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브리서 저자는 예레미야 31장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새 언약에 대한 중보자가 예수시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은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셨던 온 이스라엘의 회복과 새 언약의 대상인 이스라엘은 결국 예수와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말하는 것임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서로 이야기 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고 서로 이야기 할 필요도 없는 시대가 바로 성령의 시대 아닙니까? 진리의 성령이 우리 안에 오는 시대가 왔으니 그 시대를 여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새 언약의 피를 흘린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새 언약의 약속은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이제 여름 수련회 시즌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들 여름 수련회 준비로 사역자들이 바쁩니다. 전 여름 수련회 문화가 좋은 점도 있지만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밖에 있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찾아오는 듯한 구조로 성도들이 인식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아니 계십니다. 예수께서 성령이 오시는 그 날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는 것과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내 안에서 이미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깨달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저기서 찾고 여기서 찾는다고들 난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예수라는 분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를 깨닫게 되었고 그것을 알리고 선언하는 자신이 새언약의 사도라고 말합니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가 밖에 있는 조문과 법령을 의지할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 안에 예수께서 사시고, 예수 안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꼐서 우리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복된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니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그 옛날 남유대가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서 말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종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나무들을 심되 심는 자가 그 열매를 따기 시작하리라 에브라임 산 위에서 파수꾼이 외치는 날이 있을 것이라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 예레미야 31:1-10.
우린 지난 시간에 예레미야 28-29장에 등장하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거짓된 화평과 번영을 기반으로 한 대중적인 니즈에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지점은 이것입니다. 겉보기엔 참된 선지자 같지만 이면은 거짓 선지자라는 점입니다. 본래 율법에 따르면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에 대한 기준은 그들의 말이 이루어지는가에 있습니다. 그들의 그 예언이 성취 되었는가를 봐야 합니다. 문제는 그들의 말이 이루어지는가 아닌가를 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냐의 경우를 보면 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예언을 합니다. 대중들은 열광했습니다. 그런데 비해 예레미야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처럼 말을 합니다. 예레미야 28:1절을 보겠습니다.
그 해 곧 유다 왕 시드기야가 다스리기 시작한 지 사 년 다섯째 달 기브온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6절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하니라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네가 예언한 말대로 이루사 여호와의 성전 기구와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이 곳으로 되돌려 오시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너는 내가 네 귀와 모든 백성의 귀에 이르는 이 말을 잘 들으라 나와 너 이전의 선지자들이 예로부터 많은 땅들과 큰 나라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되리라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말에 아멘으로 화답을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이 아니라 내가 말하는 바를 들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차이점입니다. 겉보기에도 하나냐가 권위 있는 예언자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실상은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습니까? 시간이 가기만 기다려야 합니까?
예레미야는 나와 너 이전의 선지자들이 예언을 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우린 성경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에 의해 감동되어 선언한 설교와 기록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바른 선지자들의 설교는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에 근거해야 합니다. 단순히 복을 빌어주는 성경 구절 하나를 읽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맥락과 가치, 성경이 말하려는 바를 숙지하고 그 틀 안에서 성경을 바탕으로 예언하고 설교하는 자들이 참된 선지자들입니다. 지금도 많은 설교자들이 있고 대부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했다고 확신할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하나님도 까불면 죽인다고 하는 시대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기억하셔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성경의 기록에 부합한 설교를 하고 있는가? 그 사람이 기독교 교리와 부합한 설교를 하고 있는가? 어거스틴을 비롯한 많은 교부들의 가르침과 교리적 고백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가? 그 사람들이 그런 것에 근거하여 겸손하게 설교를 하는가 아니면 그저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하나님이 그렇게 말했다고 우기는 식의 설교를 하는가 잘 보시면 그 사람의 거짓과 참의 여부를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전 어릴 때부터 설교가 전부라고 생각했지만 한국 교회의 구조상 설교가 전부이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목양이나 체계, 그리고 거기서부터 나오는 혜택들도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고 그런 면에서의 제한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이 교회에 오시라고 영상을 나누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의 설교를 들으시고 신앙생활을 유익하게 하시길 바랍니다. 다만 즉흥적이고 성경에 기반하지 않는 단순히 열광주의적이고 대중적인 열망에 부합하는 설교를 하는 이들을 주의하시는 것을 고려해보시기를 제안드리는 것입니다.
각설하고 오늘은 예레미야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새 언약 시리즈 1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칠십 년을 채우고 돌아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칠십은 물리적인 숫자일 수도 있지만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하심이 채워져야 한다는 의미의 완전수 칠십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품으신 복된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벨론에 끌려 가야 하고 거기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주된 요지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신학 안에서 이 예언을 도식화 해보면 우린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어 하고 천국을 빨리 가고 싶어 합니다. 도망쳐서 피한 곳에는 낙원이 없지만 우린 언제나 낙원을 그려보곤 합니다. 그리고 그 낙원이 인간의 입장에서 상상하는 이상적인 장소로 표현 또는 이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땅에서 피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복된 일을 위해서라고 단언합니다. 예레미야 29:32절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느헬람 사람 스마야와 그의 자손을 벌하리니 그가 나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기 때문에 이 백성 중에 살아 남을 그의 자손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 내가 내 백성에게 행하려 하는 복된 일을 그가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렇다면 복된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나누었지만 복된 일은 토브입니다. 토브는 하나님 나라가 구현되었을 때 하나님이 선언하신 표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바벨론 땅에서 칠십 년을 살라고 하신 이유는 오직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갱신을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는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론적 개념, 다시 말해 예루살렘이란 지명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30장에서 그들이 반드시 돌아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예레미야 30:8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 버리며 네 포박을 끊으리니 다시는 이방인을 섬기지 않으리라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그들을 위하여 세울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나의 종 야곱아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먼 곳으로부터 구원하고 네 자손을 잡혀가 있는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누릴 것이며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의 멍에를 꺾고 자유를 주실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스라엘이 가진 그 당시의 모습 그대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지명인 예루살렘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화려하게 하나님의 신부로 꾸미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며 목적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은 전혀 하나님의 백성다움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겉모양은 이스라엘이었지만 그 속은 이미 세상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들의 산학과 신앙은 세속화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다움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꿀 부분은 바꾸면 된다는 식이겠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근본이 타락했으며 하나님의 백성다움이 없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갱신을 위해 그 옛날 이스라엘을 태어나게 했던 자궁과 같은 곳으로 그들을 다시 돌려 보내야 했습니다. 그 자궁이 어디입니까. 세상과 다를바 없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말씀을 받고 참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회복했었던 곳 말입니다. 바로 광야입니다. 예레미야는 철저하게 바벨론 포로기의 시간이 그들이 광야를 겪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은유는 모든 포로기 예언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이 중심이 되시는 말 그대로 하나님 나라의 현현이었습니다. 광야를 거쳐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구조와 도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는 시간을 거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 나라로 완성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30:21절을 보십시오.
그 영도자는 그들 중에서 나올 것이요 그 통치자도 그들 중에서 나오리라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리니 그가 내게 가까이 오리라 참으로 담대한 마음으로 내게 가까이 올 자가 누구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여기서 보시면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산에서 법도를 주시면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이 표현은 선지서와 율법에서 자주 등장하던 표현이고 예레미야서 안에서도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칠십 년 포로 생활과 귀환을 통해 그들이 자신의 연단된 백성이 되고 자신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레미야 31:1절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면서 너는 내 백성이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시작을 하고 있는데 그 멸망과 회복의 과정은 결국 하나님 나라와 백성이 되기 위함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이르시되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말하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여기서 보시면 그들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대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한 예언 중간 마다 애굽과 광야를 떠올리게 하는 표현들을 사용하게 하시는데 그들의 포로 시간이 광야와 같은 것이며 그 기능을 수행하는 곳이라는 인식을 주지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너희가 잘못해서 고난을 당하지만 그 고난의 본래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 다움을 위한 것이다 가 하나님의 선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린 어찌보면 당연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겨두신 그 가나안 일곱 족속과 같은 존재와 내용들을 빨리 종교심을 갖고 치우려고 해선 안 됩니다. 그걸 통해 우리가 만들어 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아침에 기억해야 하는 내용입니다.
다른 관점에서 우리가 조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광야를 지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우릴 왜 이렇게 고생 시키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있어서 광야는 고난의 길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길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시절이 신혼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이 간극을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고생과 괴로움의 시간으로 광야를 이해하지만 하나님은 함께 하는 시간으로 광야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2절을 보십시오.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 모든 족속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아무것도 없고 씨를 뿌려도 무엇인가를 얻지 못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열매를 주셨고 그들은 그것을 따라 걸어갔습니다. 이것이 광야 생활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말씀을 받고 주야로 만나와 메추라기, 불과 구름 기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습니다. 초라해도 영적으로 부유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레미야의 시대는 그런 시절은 과거가 되어 버렸고 그들의 정신 마저도 퇴색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들은 하나님을 부르지도 않고 찾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그런 시간을 허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다시 우리의 언어로 도식화하자면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작정되었습니다. 그것은 부정과거시제, 이미 결정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린 왜 그 확정된 길을 돌아 돌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대체 왜 그런 광야의 생활을 주시는 것입니까? 처음 설교 때도 말씀 드렸지만 우린 이 어려운 삶 속에서 하나님이 숨겨두신 하나님 자신을 찾고 만나고 알아야 합니다. 그 분이 누구시며 그 분의 사역과 성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진리의 본체이신 그 하나님을 가져야 합니다. 건물 성전이 아니라 존재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전은 돈으로 건물을 쌓는게 아니라 인내로 우리 안에 쌓여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은 분명히 예레미야도 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굳이 돌아올 것이라면 떠나야 하느냐고 이스라엘은 묻고 있는 것이고 그런 이스라엘의 불만에 대해 거짓 위로를 하는 것이 거짓 선지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반드시 그들이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복을 누릴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예레미야 3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이방들이여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떼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셨으니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서 복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선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선한 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명사 투브는 예레미야 2:7절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읽었지만 거기서 그들이 아름다운 것을 먹게 되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아름다운 것이 투브입니다. 역시 광야에서 하나님이 먹이시던 그 행위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전 예전부터 축구선수 메시를 좋아했습니다. 여러 면에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축구 선수들이 받는 가장 권위 있는 상을 받기 전에 굉장히 유명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선수가 영상에 나와 “메시야, 여전히 축구하는 것이 즐겁니?” 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메시가 “당연하지” 라고 말하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아마 그 질문에는 이런 의미들이 담겨져 있을 것 같습니다.
너가 지금 최고의 선수이고 많은 명예와 인기를 얻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를 할 때 행복했던 그 처음 마음을 잘 기억하고 있니?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상 편지를 보내서 오늘 물어 오신다면 무엇이라고 답하겠습니까. 너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걷는 그 일이 즐겁니?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시간이 즐겁지 않았고 하나님 한 분만 기억하는 일도 귀찮아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신과 함께 걷기 위해서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백성임을 주지시켜야 했습니다. 그것이 곧 포로기였습니다. 당장은 고난과 연단의 오늘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이 시간이 우리와 함께 하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또 주어진 길을 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서다
🙏 구독자 300명, 감사합니다.
말씀 앞에 서려는 저희의 작은 걸음을
함께 지켜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은 목사님의 손글씨 한 구절을 나눕니다.
초대교회가 가졌던 그 ‘처음 사랑’을
다시 붙들며 함께 걸어가고 싶습니다.
작고 미약한 우리의 오늘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는 분명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 본문에 서다 –
1 week ago | [YT]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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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서다
📖 〈본문에 서다〉 & 임마누엘교회
〈본문에 서다〉 채널은 말씀을 본문 그대로 전하고,
흔들리는 시대에 진리를 분별하는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채널의 말씀 사역은 실제 교회인 임마누엘교회와 함께합니다.
임마누엘교회는 성도 10여 명이 모여
주일 오전 11시, 단 한 번의 예배를 드리는 작은 공동체입니다.
크고 화려하지 않지만,
본질을 붙드는 신앙, 말씀에 충실한 설교,
그리고 조용히 하나님을 따라 걷는 길을 소중히 여깁니다.
담임 목사님은 이중직으로 섬기시지만
늘 성경 본문을 깊이 연구하며
진지하고도 따뜻한 설교를 전하고 계십니다.
혹시 말씀 중심의 예배와 진정성 있는 교회를 찾고 계시다면,
임마누엘교회가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
📍 교회 주소 : 경기 화성시 병점노을4로 19 골든스퀘어원 10층 1011호
⏰ 예배 시간 : 주일 오전 11시
📞 문의 : 010 8332 1085
👉 블로그 : blog.naver.com/spermatos88_
2 months ago (edited) | [YT]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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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서다
🙏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 앞에 서려는 작은 걸음을
함께 지켜봐 주시고 동행해 주셔서
참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목사님의 손글씨 한 구절을
함께 나눕니다.
앞으로도 본문 속에서 위로와 소망을
같이 나누어 가길 바랍니다. 🌱
3 months ago | [YT]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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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서다
구독자 100명을 넘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큰 숫자라고 느껴집니다.
함께 걸어가 주시는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목사님께서 손글씨로 담아 주신 노트 한 장을 남깁니다. ✍️
빛을 반사하는 삶을 지향하며,
말씀 위에서 묵상과 분별을 이어가겠습니다. 🌿
본문에 서다 드림
5 months ago | [YT]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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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서다
[예레미야 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바다를 뒤흔들어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예레미야 31:31-35
우린 지난 시간 하나님의 계획은 남유다의 멸망 이후 온전한 이스라엘의 회복까지 포함된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전화위복이란 말처럼 그들의 그 고난과 무너짐이 도리어 더 큰 갱신과 회복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버리지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실 것인데 반드시 그렇게 하셔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창조한 이스라엘과 피조 세계를 아무런 갱신의 형태도 없는 상태에서 멸절시킨다면 그것을 만드신 당신의 의도가 무너지는 것이며 당신의 실패를 전제하는 입니다. 또한 그 위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언약하신 분의 말이 허공의 메시지와 같이 되기 때문에 이 땅에 대한 어떤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파멸에 이르게 둘 수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유다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피조 세계도 기억하신다는 점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예레미야 31:27절을 보십시오.
예레미야 5. 복된 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며 멸하며 곤란케 하던것 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리는 날이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짐승이란 인간을 제외한 피조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짐승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단어 베헤마는 가축으로 주로 번역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아래의 세상을 만드실 때 에덴에 있던 것이 사람과 베헤마입니다. 에덴동산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노아 시대에도 베헤마를 방주에 함께 들어가게 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피조 세계를 파멸하는 것이 목적인 분이 아님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자와 사랑을 기본적으로 갖고 계시기에 이 아래의 자신이 만든 피조 세계와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파멸케 하는 분이 아니라 다시 갱신되도록 하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회복은 결국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된 피조 세계가 다시 회복되어 온전한 샬롬에 이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이 땅을 향한 목적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예레미야의 시대에 포로기가 허락된 것은 단순히 약간의 고침이 아니라 완전한 새로고침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완전히 무너트려 다시 세워 하늘의 것으로 새롭게 만들어 내셔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포로기라고 하는 광야로 이스라엘을 끌고 가서 신혼의 사랑으로 그들과 함께 살면서 다시 언약을 맺음으로 당신의 신실하심을 입증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새롭게 갱신된 백성들이 나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구조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조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베리트 언약입니다.
북왕조 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멸망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의 골자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구도 예배하지 않고 경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32절을 보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손을 잡고 데려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남편과 주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남편은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한 남편과 한 아내가 결혼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본적인 골격인데 구약 성경은 한 남편의 역할을 하나님에게 한 아내의 역할을 남성과 여성의 구별없이 이스라엘에게 배정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남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새로운 남편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들의 남편 히브리어로 바알 이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바알을 찾아 그를 섬겼다고 말한 것입니다.
전술했지만 여기서 남편이란 단어는 히브리어 바알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우상신 바알을 떠올리게 합니다.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내가 그들의 바알이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 바알을 자신의 신으로 삼았던 것에 대한 풍자적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라는 것인데 그 계약을 파기한 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인정하지 않으시고 새롭고 갱신된 공동체를 만들어 내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갱신은 이스라엘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광야로 가는 것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이 그 당시에는 포로 시기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목적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불렀지만 이스라엘은 가나안 일곱 족속의 우상을 하나님으로 섬겼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원했던 다산과 풍요를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다움을 요구하고 바알은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줄 것이라고 만든 우상 신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진단하신 내용은 이것입니다. 예레미야 2: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두 가지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이것이 죄가 되는 민족은 이스라엘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길을 만들고 먹을 것을 챙기며 돈을 버는 것이 소위 말하는 생존 아닙니까? 그 일을 위해서 신을 만들고 예배하는 것이 이 아래의 삶의 방식 아닙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심의 목적은 하나님과 함께 살고 그 분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를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적에 서로 동의하여 합의한 것이 여기서 말하는 베리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파기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이 아래의 세상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갱신된 포로기 이후의 백성들과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시겠다고 한 것입니다.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렇다면 왜 첫 언약은 실패했을까요?
하나님은 모세와 세운 그 첫 언약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판단하십니다. 예레미야 31:33절입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첫 언약은 돌판이 밖에 있었습니다. 그들과 멀리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으나 그 법도를 이스라엘이 멀리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과 연단을 통해 그들의 삶과 가슴 속에 하나님의 법도가 새겨 지도록 할 것이라고 단언하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포로기인 것입니다. 고난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비유를 하나 설명 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15:11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12절을 보면 두번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분깃을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달라는 구문은 명령문 도스 모이 토 에피발론 메로스 우시아 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자식이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물려 달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큰 문제적 행동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던 바리새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단순히 돈을 조금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은 나에게 죽은 자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극악무도한 폐륜적 행위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일에 대해 저주를 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그 요구대로 줍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의 그 무도함을 참아주신 것입니다. 그 이후 그 아들은 허랑방탕하게 모든 재산을 탕진해서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현실은 이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은 세상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고 돼지 쥐엄 열매도 먹을 수 없을 정도의 가난과 결핍을 경험합니다. 그러자 그는 깨닫고 돌이킵니다.
누가복음 15:17-19절을 보세요.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여기서 보시면 그는 돌이켜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우린 둘째 아들의 후회와 회개를 주목합니다만 지난 주 설교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이 모든 비유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관용입니다. 전술했지만 아버지가 유산을 달라고 하는 아들을 저주하거나 돌로 쳐 죽이지 않은 것은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를 용납했기 때문입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중요하기 때문에 헬라어 원문으로 읽어드리면서 구문독해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Καὶ ἀναστὰς ἦλθεν πρὸς τὸν πατέρα ἑαυτοῦ·
카이 아나스타스 엘덴 프로스 톤 파테라 헤아우투 에티 테 아우투
그리고 그가 일어나서 아버지를 향해서 갔다 스스로.
ἔτι δὲ αὐτοῦ μακρὰν ἀπέχοντος εἶδεν αὐτὸν ὁ πατὴρ αὐτοῦ
에티 데 아우투 마크란 아페코 에이돈 아우톤 호 파테르 아우투
아직도 거리가 상당히 멀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셨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헬라어 구문이 도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에서 주어와 동사는 그의 아버지 호 파테르 아우투 가 그를 보셨다 에이돈 는 것이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상당히 멀리 있었다는 형용표현이 앞서 있습니다. 모든 서양 언어는 앞에 등장하면 중요한 것입니다. 도치를 시켜 놓았다는 것은 돌아선 탕자와 아버지의 거리가 상당히 멀었음을 더 강조하는 그림인 것입니다. 탕자와 아버지의 거리감이 멀었지만 하나님은 그 거리감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그것을 보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탕자에 대한 관심을 놓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이렇게 행동합니다.
καὶ ἐσπλαγχνίσθη καὶ δραμὼν ἐπέπεσεν
ἐπὶ τὸν τράχηλον αὐτοῦ
카이 에스페라코세 카이 드라몬 에페페센
에피 톤 트라켈론 톤 아우투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애가 끓게 되시고 미친듯이 달려가서 그의 목을 감싸안고
καὶ κατεφίλησεν αὐτόν.
카이 카테피레센 아우톤
그에게 입을 맞추셨다
하나님은 탕자가 집을 나간 이후에 맘 편하게 계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망하게 될 것을 다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시간을 허락하신 이유는 그 과정이 있어야 다시 그가 아버지를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생하던 탕자가 돌아서서 하나님에게 초라하게 거지 모습으로 나타셨을 때 아버지는 그를 저 멀리서 바라보고 애가 끓게 되셔서 달려가서 그를 안아 주셨습니다. 이 모습에서 우린 이스라엘과 우리의 삶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와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는. 이제 밖에 있던 아버지의 법령은 그에게 살이 되어 기쁨으로 동의하는 내용이 되었을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지 않습니까. 집에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아버지와 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집에 있었던 첫 번째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대해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집 밖을 다녀 온 두 번째 아들은 집 밖을 다녀 온 이후로 아버지와 한 몸이 되었습니다. 누가 탕자입니까?
본론으로 돌아와서 포로기를 겪으면서 밖에 있던 아버지가 안으로 들어오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고 그것이 ‘새 언약’입니다. 우리의 삶에 적용해보면 우린 이 아래의 세상에 왜 왔습니까? 아버지의 집, 아버지의 통치,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피부의 언어로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밖에 있는 목사나, 전도사나, 장로님이나 권사님들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아버지를 절대로 떠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내 안에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 언약입니다. 밖에 있던 하나님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의 삶에 오신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과 손을 잡고 걷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역사를 주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31:3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심비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 누가 가르칠 이유도 없고 강요할 이유도 없는 하나님과 함께 하기로 작정하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새 언약을 맺은 이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제 우리가 그 새언약의 백성이 되었다고 단언합니다. 고린도후서 3: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바울이 이렇게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새언약의 백성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음주에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새언약의 핵심이자 증거, 바로 그 분에 관한 이야기를 말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최근 시험 기간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시험을 잘 보았고 점수도 많이 올랐습니다. 그런데 한 두 명이 걸렸습니다. 점수가 오르지 않은 것입니다. 많은 아이들이 수고했고 좋은 결과를 얻었으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만 그 한 두명이 더 크게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저의 죄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법을 모르고 주신 것에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찬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그 죄가 얼마나 나를 괴롭게 하는지를 알고 그것을 멀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으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삶을 우린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저 밖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법도와 진리를 우리가 알게 될 것입니다.
유산을 달라는 탕아를 저주하지 않으시고 돌아온다는 그를 저 멀리서 보고 달려가서 미친듯이 껴안으시는 하나님, 그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주어진 삶 가운데 늘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는., 예레미야서의 표현처럼 남편이신 하나님을 둘러싼 신부 이스라엘의 삶이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months ago (edited) | [YT]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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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서다
[요한계시록 30. 설교문]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 요한계시록 13:1-4
우린 지난 시간 마귀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전쟁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마귀와
"죽임당한 짐승 vs 죽임당한 어린양 … 적그리스도의 위장된 복음” 신자들의 싸움은 결국 ‘입’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바른 진리를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진리를 무시한 채로 인본주의적인 해석과 믿음을 고수할 것인가?사실 짐승에 대한 서술이 등장하는 요한계시록 13장의 내용도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을 담고 있는 환상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예나 지금이나 있습니다. 그리고 다들 훌륭한 통찰력을 갖고 설교를 준비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정말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설교자나 교인들이 모두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오늘은 요한은 또 다른 환상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짐승에 관한 것입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동물 모양의 형태를 갖고 있는 한 짐승은 다니엘 7:1-7절에 등장을 합니다.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이 그 침상에서 꿈을 꾸며 뇌 속으로 이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그 일의 대략을 진술하니라 다니엘이 진술하여 가로되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여기서 보시면 바다에서 짐승 넷이 나왔다고 합니다. 본래 고대 근동에서 바다는 하나님의 질서가 없는 곳을 은유하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용과 뱀은 세상 왕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해를 그대로 가져 와서 요한은 서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목할 점은 다니엘은 네 개의 다양한 제국이 있다고 서술했다면 요한은 한 짐승이 그 모든 네 동물의 형상을 갖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절을 보시면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이란 말은 일차적으로는 로마를 은유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나아가서 이 바다에서 올라온 한 짐승은 다니엘에서 말했던 많은 제국들의 모습을 이 짐승이 갖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이 땅 위에 세워진 모든 하나님을 대적하여 선 세상 군왕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짐승은 단순히 세상 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닌 종교적 존재라는 점입니다. 13:2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여기서 용이 짐승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권세를 주었다고 합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다른 용이란 존재가 짐승에게 자신의 권세를 수여하는 장면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모든 권세와 능력을 수여하시는 시편 110편의 모습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짐승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되었는데 그 상처가 나았다고 합니다.
13:3절을 보십시오.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여기서 죽게 되었다 에 상응하는 헬라어 단어는 스피조입니다. 이 단어는 요한계시록에서 등장할 때 어린 양이 죽임을 당했다고 서술할 때 쓰는 그 단어입니다. 심지어 이 현상을 본 이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Τίς ὅμοιος τῷ θηρίῳ”
티스 호모이스 토 데리오.
누가 이 짐승과 같은가?
이 표현은 홍해를 도하한 이후 하나님을 찬양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백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 온 것입니다. 누가 우리 하나님과 같은가? 란 표현에서 하나님을 없애고 짐승으로 바꾼 것입니다.
요한이 본 환상은 단순히 세상 임금이 기적을 행했다는 식의 구조가 아닌 종교적 차원의 존재들이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가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세상도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더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의 상처와 낫게 되는 그 과정을 통해 온 땅이 그 짐승을 경배합니다.
요약하면 여기서 등장한 용과 그에게서 권세를 받은 짐승과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해보면 상당히 유사한 점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 양과 짐승은 각각 하나님과 용에게 그 권세와 능력을 수여 받습니다. 어린 양과 짐승은 죽임을 당했다가 다시 부활했습니다. 어린 양과 짐승은 많은 이들의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습니다. 먼저 어린 양은 십자가와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세상은 이기셨지만 한 짐승은 폭력과 억압으로 성도들을 이깁니다. 어린 양의 통치 기간은 영원에서 영원이지만 한 짐승의 통치는 마흔 두 달, 유한한 시간입니다. 어린 양과 그의 십자가를 따르는 자들은 죽은 것 같지만 영생을 누리고 한 짐승을 따르는 자들은 마흔 두 달이 지나고 나면 모두 멸망한다는 점입니다.
요한이 본 환상이 이 유사한 점을 시사하는 것은 성도들의 대적인 세상은 제국적인 모습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차원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시대의 제국은 단순한 로마 제국이 아닌 황제가 자신을 신이라고 하며 많은 이들이 로마를 종교처럼 숭배하던 시대였습니다. 지금의 나라들과는 조금 다른 성격의 차원이었습니다. 리차드 보컴의 말처럼 이 한 짐승은 로마 제국과 로마 제국이 자신을 하나님으로 칭하며 속국들이 그들을 신으로 섬기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석학적으로 보자면 마틴 로이드 존스의 주장처럼 이 한 짐승은 오늘날에도 해석될 수 있고, 되어야 합니다.
이 아래의 세상은 언제나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를 싫어한다고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을 신으로 섬기고 그것을 숭배하는 종교적 성향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득세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한 짐승은 단순히 로마 제국이 아닌 타락한 인간 세상, 즉 아담 군상들을 총칭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이 짐승은 그리스도와 유사하게 보이는 변장된 그리스도 적그리스도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서 가르치는 자들 그리고 거짓된 용과 세상을 숭배하게 만드는 자들 바로 그들이 거짓 선지자들인 것입니다. 마귀의 공격은 입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그것은 그들의 가르침과 교회의 가르침이 상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마귀들의 공격은 언제나 겉으로 보기엔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고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는 것과 같지만 하나님은 없고 자신과 자신의 유익에만 경도된 것입니다. 자신을 신으로 신격화하고 그런 이들을 추앙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짐승은 신성 모독하는 이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12:17절에서 마귀들이 입을 벌려 강물을 토하여 냈었는데 그 강물의 토함이 결국 어떠한 것인지를 요한계시록 13장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사 기독교회와 진리의 기독교회의 싸움, 그것이 영적인 전쟁이며 종말에 있을 싸움입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해 비방하고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에 사는 자들도 비방하고 있습니다. 이 구조는 다니엘 8:10절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 군대에 미칠 만큼 커져서 그 군대와 별들 중의 몇을 땅에 떨어뜨리고 그것들을 짓밟고 또 스스로 높아져서 군대의 주재를 대적하며 그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를 없애 버렸고 그의 성소를 헐었으며 그의 악으로 말미암아 백성이 매일 드리는 제사가 넘긴 바 되었고 그것이 또 진리를 땅에 던지며 자의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여기서 그것은 뿔입니다. 세상 왕을 은유하는 뿔이 스스로 커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군대와 하늘의 별들을 떨어트리고 짓밟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하늘의 군대와 별들은 신자들을 은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왕들이 교회를 박해하도록 일정기간 허락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소를 헐었고 제사를 폐했으며 진리를 땅에 던지며 자의로 행하여 형통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이며 거짓 선지자들의 모습입니다. 진리가 없이 자신의 뜻대로 행하고 형통을 이루어 가려는 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자의로 행하다 상응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아사입니다. 그들은 형통을 만들고 진리와는 무관합니다. 문제는 그런 세상이 잠깐 득세 하더라는 것입니다. 13:7절입니다.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시편의 고백처럼 이 땅 위에서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잘 됩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힘이 듭니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와 무관하게 사는 자들이 훨씬 더 큰 영광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자괴감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당면한 현실입니다. 성경은 신자들에게 세상의 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복이 아닌 하늘의 복과 승리가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의 현상에 대해 현혹되어선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며 가까이 있는 자들은 인간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결정하심에 따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8절입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이들은 다 짐승에 경배한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아래의 세상이 승승장구 하고 거기에 현혹되겠지만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들은 그 세상에 경배하지 않고 고난과 인내의 삶을 견뎌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9-10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사로 잡혀갈 자는 사로 잡혀갈 것이고 칼에 죽을 자는 죽어야 하지만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로 잡혀 갈 자는 사로 잡혀간다는 말은 예레미야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레미야 15: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은 포로가 될 자들이 있을 것이며 칼에 죽을 자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 왕들을 섬긴 것에 대한 댓가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 신실한 자들도 겪어야 하는 현실이었습니다. 43:11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와서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칠 것이라
여기서도 동일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사로 잡혀 포로가 되고 칼에 죽을 때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자들은 안전합니까? 아닙니다. 괴로움과 어려움을 함께 겪습니다. 그러나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 예언과 약속 안에서 그를 믿고 인내하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 현실을 요한계시록은 그대로 가져 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형통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더 형통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현실 속에서도 신실하게 믿음을 갖고 인내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이미 예정하신 자들일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정이 주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을 인간이 막을 수 없고 역사가 흔들어 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셨기에 우린 완성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명한 현실의 파도가 높을지라도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예정하심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함께 하나님과 손을 잡고 이 바다를 넉넉히 걸어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months ago | [YT]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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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서다
[예레미야 설교문 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렘 31:15-20.
우린 지난 시간 하나님이 칠 십년을 바벨론에서 생활하게 하신 이유를 복된 일을 위해서라고 정리했습니다. 하나님과 새 언약.. 그 복된 일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 같은 포로기의 시간을 살게 하시면서 다시 그 옛날 모세의 세대처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시기에 그 의도하신 바를 이루신 후에 우리에게 온전한 샬롬을 주실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멸망 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돌아올 회복에 대해서 누차 강조하여 예언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정한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였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유다가 다시 돌아오는 날이 있을 것이며 즐거움의 노래를 부르는 날이 올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31:4절입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나무들을 심되 심는 자가 그 열매를 따기 시작하리라
하나님은 반드시 이스라엘이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돌아올 이들에 대해 이스라엘아 라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덧붙여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나무를 심을 날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남유다가 아니라 이스라엘로 예루살렘이 아니라 사마리아를 언급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구도는 15절에서 최고점을 찍습니다. 예레미야 31:1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라헬이란 인물은 베냐민과 요셉의 어머니입니다.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은 북왕조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였습니다. 전술했지만 이 표현들은 하나같이 뜬금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는 이미 북왕조 이스라엘이 멸망을 한 이후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레미야는 남왕조의 멸망과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북왕조 이스라엘의 대표 지파인 에브라임과 그의 할머니인 라헬을 언급할까요?
하나님은 남유다의 멸망과 회복을 통해 북왕조 이스라엘까지 회복하실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온전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하나님이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남유다가 멸망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면 북왕조 이스라엘은 온전히 역사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북왕조 이스라엘을 그대로 두실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원한 인자와 사랑을 그들에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일정 기간동안 바벨론에 끌려 간 이후 돌아올 때 남유다가 아니라 온전한 이스라엘로 회복될 것이라고 선언하시고 있으며 이것은 멸망한 북왕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더 나아가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지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남 유다에 제한된 것이 아닌 더 크고 온전한 것을 향해 있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이 구조를 우리의 인생과 역사 안에서 적용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과 고난을 주시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게 허락하시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더 큰 뜻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지엽적이고 감정적입니다. 그 순간만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보고 듣는 것이 언제나 절대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을 넘어서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그 분은 지금 오늘의 현실이 아니라 완전한 그림 속에서 그 분의 백성을 인도합니다. 내가 북왕조 이스라엘을 버릴 수 없다 라는 명제는 그 당시 남유다 사람들에게는 크게 감동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지금 성경을 믿고 읽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은 온전하시고 완전한 뜻이 있으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저도 제 인생을 돌아보면 그 순간만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인정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은 그 순간을 넘어 영원의 차원의 것이기에 우리는 끌려 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즐겁게.
북왕조 이스라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우리가 당황할 수 있지만 이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떠올리게 합니다. 20절입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이 멸망한 에브라임을 생각할 때 창자가 끓는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한국적인 것으로 바꾸면 애가 닳는다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사랑하셨고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싫어하셔서 북왕조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닌 훈육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잠깐 무너진 것이고 멸망한 것입니다. 실제로 북왕조 이스라엘은 그들의 멸망으로 인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그들이 탄식했습니다. 그들은 징벌을 받아야 했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회복되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무관했던 북왕조 이스라엘은 멸망으로 인해 하나님을 찾는 족속이 된 것입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못한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란 표현입니다. 처음 송아지가 멍에를 메면 익숙하지 않고 힘들어 합니다. 멍에에 익숙해져야 하는 송아지였던 에브라임과 북왕조 이스라엘은 그 멍에를 짊어지는 것을 견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레미야의 조국인 남유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레미야 5:5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지도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
이 구절은 굉장히 유명한 구절입니다. 예레미야 5:1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진리를 아는 사람들을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고 선언합니다. 그 후 만나는 그들에게 너희들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길과 말씀은 하나님의 훈육하심의 멍에를 짊어지는 것으로 입증되는 것인데 그것을 거절했다는 말입니다. 북왕조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그들이 멍에를 지기 싫어하는 송아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유다도 동일한 이유 때문에 멸망했음을 독자들은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훈련과 양육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이지만 그 사랑 안에는 훈육과 양육의 개념이 포함됩니다. 그것을 버티지 않고 버리겠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입니다. 예레미야 30:11절을 보세요.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할 것이라 너를 흩었던 그 모든 이방을 내가 멸망시키리라 그럴지라도 너만은 멸망시키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법에 따라 너를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만 여기지는 아니하리라
이것이 하나님 사랑이며, 하나님의 훈육하심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훈육할 때 훈육과 징계를 하지 않는다면 부모의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부르시고 자녀로 삼으셨다면 그 백성들을 자신의 백성답게, 자녀답게 만들어 가실 권한과 책임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박차서 벗어나버린 것이 북왕조 이스라엘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멸망한 것입니다. 그 멸망과 과정 가운데서 북왕조 이스라엘은 후회했고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호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도 당연히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멸망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 멍에를 같이 짊어질 것을 요청하셨고 그것에 북 왕조 이스라엘은 동의한 것입니다.
따라서 남유다의 멸망과 회복에는 온전한 이스라엘의 회복까지 내포된 것입니다. 실제로 예레미야와 유사한 시대를 살았던 에스겔은 이런 환상을 봅니다. 에스겔 37: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네 민족이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거든 너는 곧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 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가져다가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선지자들은 하나같이 남유다의 포로기와 멸망 이후 하나님의 새언약이 세워질 것인데 그 대상이 온 이스라엘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은 언제나 우리보다 크고 온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 안에 갇힌 창조물이기 때문에 시간 밖에 계신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린 그 순간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순간이 아니라 영원 속에 계신 분이기 때문에 순간을 넘은 어떤 계획으로 백성들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끌려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이 그 뜻을 알려 주신다고 해도 절대로 우린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들의 오늘이고 현실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개념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다면, 그 분의 뜻하심이 나의 계획과 생각보다 우선하고 온전한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당장 당면한 오늘을 수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주해보겠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이스라엘을 다시 세워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옛언약의 구조를 회복하려 하십니다. 이것을 성경은 새창조라고 말합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그 옛날 모세가 홍해를 함께 건넜던 이스라엘과는 너무 거리가 먼 세상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광야와 같은 포로기를 보내게 하신 것입니다. 그 기간을 거치면서 그들은 하나님과 새로운 갱신된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과정이 복된 것입니다.
여러분 복이 무엇입니까? 만사가 형통하고 자식들이 좋은 대학교를 가고, 사업이 잘되면 복이 있는 것입니까? 성경이 언제 그런 복을 약속했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돈을 많이 벌어 항상 성공하고 슬픈 일 하나도 없다는 복입니까? 교회를 잘 섬기고 목사들에게 잘하면 받는 그런 복입니까? 그런 것은 성경의 복과 사실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복된 일은 하나님과의 연합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31:31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을 열심히 알아야 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옵니다. 그것이 새언약의 시대입니다.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이 밖에서 백날 천날 외치는 그 하나님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자신을 직접 계시하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것이 새언약입니다. 겉과 겉이 아닌 영과 영으로 속과 속으로 하나님과 한 몸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된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복” 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가?
말씀을 마무리 하면서 온 이스라엘이 회복된 때가 있습니까? 역사 속에서 새 언약의 대상인 온 이스라엘이 세워진 때가 언제입니까?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은 북왕조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 국한되지 않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을 얻은 온 믿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8: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브리서 저자는 예레미야 31장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새 언약에 대한 중보자가 예수시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은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셨던 온 이스라엘의 회복과 새 언약의 대상인 이스라엘은 결국 예수와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말하는 것임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서로 이야기 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고 서로 이야기 할 필요도 없는 시대가 바로 성령의 시대 아닙니까? 진리의 성령이 우리 안에 오는 시대가 왔으니 그 시대를 여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새 언약의 피를 흘린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새 언약의 약속은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이제 여름 수련회 시즌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들 여름 수련회 준비로 사역자들이 바쁩니다. 전 여름 수련회 문화가 좋은 점도 있지만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밖에 있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찾아오는 듯한 구조로 성도들이 인식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아니 계십니다. 예수께서 성령이 오시는 그 날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는 것과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내 안에서 이미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깨달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저기서 찾고 여기서 찾는다고들 난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예수라는 분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를 깨닫게 되었고 그것을 알리고 선언하는 자신이 새언약의 사도라고 말합니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가 밖에 있는 조문과 법령을 의지할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 안에 예수께서 사시고, 예수 안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꼐서 우리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복된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니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그 옛날 남유대가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서 말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5 months ago (edited) | [YT]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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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서다
[예레미야 3 설교문]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종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나무들을 심되 심는 자가 그 열매를 따기 시작하리라 에브라임 산 위에서 파수꾼이 외치는 날이 있을 것이라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 예레미야 31:1-10.
우린 지난 시간에 예레미야 28-29장에 등장하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거짓된 화평과 번영을 기반으로 한 대중적인 니즈에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지점은 이것입니다. 겉보기엔 참된 선지자 같지만 이면은 거짓 선지자라는 점입니다. 본래 율법에 따르면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에 대한 기준은 그들의 말이 이루어지는가에 있습니다. 그들의 그 예언이 성취 되었는가를 봐야 합니다. 문제는 그들의 말이 이루어지는가 아닌가를 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냐의 경우를 보면 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예언을 합니다. 대중들은 열광했습니다. 그런데 비해 예레미야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처럼 말을 합니다.
예레미야 28:1절을 보겠습니다.
그 해 곧 유다 왕 시드기야가 다스리기 시작한 지 사 년 다섯째 달 기브온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6절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하니라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네가 예언한 말대로 이루사 여호와의 성전 기구와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이 곳으로 되돌려 오시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너는 내가 네 귀와 모든 백성의 귀에 이르는 이 말을 잘 들으라 나와 너 이전의 선지자들이 예로부터 많은 땅들과 큰 나라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되리라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말에 아멘으로 화답을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이 아니라 내가 말하는 바를 들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차이점입니다. 겉보기에도 하나냐가 권위 있는 예언자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실상은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습니까? 시간이 가기만 기다려야 합니까?
예레미야는 나와 너 이전의 선지자들이 예언을 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우린 성경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에 의해 감동되어 선언한 설교와 기록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바른 선지자들의 설교는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에 근거해야 합니다. 단순히 복을 빌어주는 성경 구절 하나를 읽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맥락과 가치, 성경이 말하려는 바를 숙지하고 그 틀 안에서 성경을 바탕으로 예언하고 설교하는 자들이 참된 선지자들입니다.
지금도 많은 설교자들이 있고 대부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했다고 확신할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하나님도 까불면 죽인다고 하는 시대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기억하셔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성경의 기록에 부합한 설교를 하고 있는가? 그 사람이 기독교 교리와 부합한 설교를 하고 있는가? 어거스틴을 비롯한 많은 교부들의 가르침과 교리적 고백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가? 그 사람들이 그런 것에 근거하여 겸손하게 설교를 하는가 아니면 그저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하나님이 그렇게 말했다고 우기는 식의 설교를 하는가 잘 보시면 그 사람의 거짓과 참의 여부를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전 어릴 때부터 설교가 전부라고 생각했지만 한국 교회의 구조상 설교가 전부이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목양이나 체계, 그리고 거기서부터 나오는 혜택들도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고 그런 면에서의 제한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이 교회에 오시라고 영상을 나누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의 설교를 들으시고 신앙생활을 유익하게 하시길 바랍니다. 다만 즉흥적이고 성경에 기반하지 않는 단순히 열광주의적이고 대중적인 열망에 부합하는 설교를 하는 이들을 주의하시는 것을 고려해보시기를 제안드리는 것입니다.
각설하고 오늘은 예레미야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새 언약 시리즈 1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칠십 년을 채우고 돌아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칠십은 물리적인 숫자일 수도 있지만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하심이 채워져야 한다는 의미의 완전수 칠십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품으신 복된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벨론에 끌려 가야 하고 거기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주된 요지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신학 안에서 이 예언을 도식화 해보면 우린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어 하고 천국을 빨리 가고 싶어 합니다. 도망쳐서 피한 곳에는 낙원이 없지만 우린 언제나 낙원을 그려보곤 합니다. 그리고 그 낙원이 인간의 입장에서 상상하는 이상적인 장소로 표현 또는 이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땅에서 피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복된 일을 위해서라고 단언합니다. 예레미야 29:32절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느헬람 사람 스마야와 그의 자손을 벌하리니 그가 나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기 때문에 이 백성 중에 살아 남을 그의 자손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 내가 내 백성에게 행하려 하는 복된 일을 그가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렇다면 복된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나누었지만 복된 일은 토브입니다. 토브는 하나님 나라가 구현되었을 때 하나님이 선언하신 표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바벨론 땅에서 칠십 년을 살라고 하신 이유는 오직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갱신을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는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론적 개념, 다시 말해 예루살렘이란 지명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30장에서 그들이 반드시 돌아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예레미야 30:8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 버리며 네 포박을 끊으리니 다시는 이방인을 섬기지 않으리라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그들을 위하여 세울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나의 종 야곱아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먼 곳으로부터 구원하고 네 자손을 잡혀가 있는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누릴 것이며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의 멍에를 꺾고 자유를 주실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스라엘이 가진 그 당시의 모습 그대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지명인 예루살렘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화려하게 하나님의 신부로 꾸미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며 목적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은 전혀 하나님의 백성다움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겉모양은 이스라엘이었지만 그 속은 이미 세상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들의 산학과 신앙은 세속화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다움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꿀 부분은 바꾸면 된다는 식이겠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근본이 타락했으며 하나님의 백성다움이 없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갱신을 위해 그 옛날 이스라엘을 태어나게 했던 자궁과 같은 곳으로 그들을 다시 돌려 보내야 했습니다. 그 자궁이 어디입니까. 세상과 다를바 없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말씀을 받고 참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회복했었던 곳 말입니다. 바로 광야입니다.
예레미야는 철저하게 바벨론 포로기의 시간이 그들이 광야를 겪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은유는 모든 포로기 예언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이 중심이 되시는 말 그대로 하나님 나라의 현현이었습니다. 광야를 거쳐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구조와 도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는 시간을 거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 나라로 완성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30:21절을 보십시오.
그 영도자는 그들 중에서 나올 것이요 그 통치자도 그들 중에서 나오리라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리니 그가 내게 가까이 오리라 참으로 담대한 마음으로 내게 가까이 올 자가 누구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여기서 보시면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산에서 법도를 주시면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이 표현은 선지서와 율법에서 자주 등장하던 표현이고 예레미야서 안에서도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칠십 년 포로 생활과 귀환을 통해 그들이 자신의 연단된 백성이 되고 자신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레미야 31:1절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면서 너는 내 백성이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시작을 하고 있는데 그 멸망과 회복의 과정은 결국 하나님 나라와 백성이 되기 위함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이르시되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말하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여기서 보시면 그들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대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한 예언 중간 마다 애굽과 광야를 떠올리게 하는 표현들을 사용하게 하시는데 그들의 포로 시간이 광야와 같은 것이며 그 기능을 수행하는 곳이라는 인식을 주지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너희가 잘못해서 고난을 당하지만 그 고난의 본래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 다움을 위한 것이다 가 하나님의 선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린 어찌보면 당연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겨두신 그 가나안 일곱 족속과 같은 존재와 내용들을 빨리 종교심을 갖고 치우려고 해선 안 됩니다. 그걸 통해 우리가 만들어 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아침에 기억해야 하는 내용입니다.
다른 관점에서 우리가 조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광야를 지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우릴 왜 이렇게 고생 시키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있어서 광야는 고난의 길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길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시절이 신혼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이 간극을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고생과 괴로움의 시간으로 광야를 이해하지만 하나님은 함께 하는 시간으로 광야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2절을 보십시오.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 모든 족속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아무것도 없고 씨를 뿌려도 무엇인가를 얻지 못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열매를 주셨고 그들은 그것을 따라 걸어갔습니다. 이것이 광야 생활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말씀을 받고 주야로 만나와 메추라기, 불과 구름 기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습니다. 초라해도 영적으로 부유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레미야의 시대는 그런 시절은 과거가 되어 버렸고 그들의 정신 마저도 퇴색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들은 하나님을 부르지도 않고 찾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그런 시간을 허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다시 우리의 언어로 도식화하자면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작정되었습니다. 그것은 부정과거시제, 이미 결정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린 왜 그 확정된 길을 돌아 돌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대체 왜 그런 광야의 생활을 주시는 것입니까? 처음 설교 때도 말씀 드렸지만 우린 이 어려운 삶 속에서 하나님이 숨겨두신 하나님 자신을 찾고 만나고 알아야 합니다. 그 분이 누구시며 그 분의 사역과 성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진리의 본체이신 그 하나님을 가져야 합니다. 건물 성전이 아니라 존재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전은 돈으로 건물을 쌓는게 아니라 인내로 우리 안에 쌓여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은 분명히 예레미야도 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굳이 돌아올 것이라면 떠나야 하느냐고 이스라엘은 묻고 있는 것이고 그런 이스라엘의 불만에 대해 거짓 위로를 하는 것이 거짓 선지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반드시 그들이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복을 누릴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예레미야 3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이방들이여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떼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셨으니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서 복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선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선한 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명사 투브는 예레미야 2:7절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읽었지만 거기서 그들이 아름다운 것을 먹게 되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아름다운 것이 투브입니다. 역시 광야에서 하나님이 먹이시던 그 행위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전 예전부터 축구선수 메시를 좋아했습니다. 여러 면에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축구 선수들이 받는 가장 권위 있는 상을 받기 전에 굉장히 유명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선수가 영상에 나와 “메시야, 여전히 축구하는 것이 즐겁니?” 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메시가 “당연하지” 라고 말하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아마 그 질문에는 이런 의미들이 담겨져 있을 것 같습니다.
너가 지금 최고의 선수이고 많은 명예와 인기를 얻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를 할 때 행복했던 그 처음 마음을 잘 기억하고 있니?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상 편지를 보내서 오늘 물어 오신다면 무엇이라고 답하겠습니까.
너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걷는 그 일이 즐겁니?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시간이 즐겁지 않았고 하나님 한 분만 기억하는 일도 귀찮아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신과 함께 걷기 위해서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백성임을 주지시켜야 했습니다. 그것이 곧 포로기였습니다. 당장은 고난과 연단의 오늘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이 시간이 우리와 함께 하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또 주어진 길을 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
5 months ago | [YT]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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