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 요한계시록 13:1-4
우린 지난 시간 마귀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전쟁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마귀와 "죽임당한 짐승 vs 죽임당한 어린양 … 적그리스도의 위장된 복음” 신자들의 싸움은 결국 ‘입’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바른 진리를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진리를 무시한 채로 인본주의적인 해석과 믿음을 고수할 것인가?사실 짐승에 대한 서술이 등장하는 요한계시록 13장의 내용도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을 담고 있는 환상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예나 지금이나 있습니다. 그리고 다들 훌륭한 통찰력을 갖고 설교를 준비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정말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설교자나 교인들이 모두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오늘은 요한은 또 다른 환상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짐승에 관한 것입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동물 모양의 형태를 갖고 있는 한 짐승은 다니엘 7:1-7절에 등장을 합니다.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이 그 침상에서 꿈을 꾸며 뇌 속으로 이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그 일의 대략을 진술하니라 다니엘이 진술하여 가로되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여기서 보시면 바다에서 짐승 넷이 나왔다고 합니다. 본래 고대 근동에서 바다는 하나님의 질서가 없는 곳을 은유하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용과 뱀은 세상 왕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해를 그대로 가져 와서 요한은 서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목할 점은 다니엘은 네 개의 다양한 제국이 있다고 서술했다면 요한은 한 짐승이 그 모든 네 동물의 형상을 갖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절을 보시면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이란 말은 일차적으로는 로마를 은유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나아가서 이 바다에서 올라온 한 짐승은 다니엘에서 말했던 많은 제국들의 모습을 이 짐승이 갖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이 땅 위에 세워진 모든 하나님을 대적하여 선 세상 군왕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짐승은 단순히 세상 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닌 종교적 존재라는 점입니다. 13:2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여기서 용이 짐승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권세를 주었다고 합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다른 용이란 존재가 짐승에게 자신의 권세를 수여하는 장면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모든 권세와 능력을 수여하시는 시편 110편의 모습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짐승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되었는데 그 상처가 나았다고 합니다.
13:3절을 보십시오.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여기서 죽게 되었다 에 상응하는 헬라어 단어는 스피조입니다. 이 단어는 요한계시록에서 등장할 때 어린 양이 죽임을 당했다고 서술할 때 쓰는 그 단어입니다. 심지어 이 현상을 본 이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Τίς ὅμοιος τῷ θηρίῳ” 티스 호모이스 토 데리오. 누가 이 짐승과 같은가?
이 표현은 홍해를 도하한 이후 하나님을 찬양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백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 온 것입니다. 누가 우리 하나님과 같은가? 란 표현에서 하나님을 없애고 짐승으로 바꾼 것입니다.
요한이 본 환상은 단순히 세상 임금이 기적을 행했다는 식의 구조가 아닌 종교적 차원의 존재들이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가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세상도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더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의 상처와 낫게 되는 그 과정을 통해 온 땅이 그 짐승을 경배합니다. 요약하면 여기서 등장한 용과 그에게서 권세를 받은 짐승과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해보면 상당히 유사한 점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 양과 짐승은 각각 하나님과 용에게 그 권세와 능력을 수여 받습니다. 어린 양과 짐승은 죽임을 당했다가 다시 부활했습니다. 어린 양과 짐승은 많은 이들의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습니다. 먼저 어린 양은 십자가와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세상은 이기셨지만 한 짐승은 폭력과 억압으로 성도들을 이깁니다. 어린 양의 통치 기간은 영원에서 영원이지만 한 짐승의 통치는 마흔 두 달, 유한한 시간입니다. 어린 양과 그의 십자가를 따르는 자들은 죽은 것 같지만 영생을 누리고 한 짐승을 따르는 자들은 마흔 두 달이 지나고 나면 모두 멸망한다는 점입니다.
요한이 본 환상이 이 유사한 점을 시사하는 것은 성도들의 대적인 세상은 제국적인 모습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차원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시대의 제국은 단순한 로마 제국이 아닌 황제가 자신을 신이라고 하며 많은 이들이 로마를 종교처럼 숭배하던 시대였습니다. 지금의 나라들과는 조금 다른 성격의 차원이었습니다. 리차드 보컴의 말처럼 이 한 짐승은 로마 제국과 로마 제국이 자신을 하나님으로 칭하며 속국들이 그들을 신으로 섬기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석학적으로 보자면 마틴 로이드 존스의 주장처럼 이 한 짐승은 오늘날에도 해석될 수 있고, 되어야 합니다. 이 아래의 세상은 언제나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를 싫어한다고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을 신으로 섬기고 그것을 숭배하는 종교적 성향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득세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한 짐승은 단순히 로마 제국이 아닌 타락한 인간 세상, 즉 아담 군상들을 총칭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이 짐승은 그리스도와 유사하게 보이는 변장된 그리스도 적그리스도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서 가르치는 자들 그리고 거짓된 용과 세상을 숭배하게 만드는 자들 바로 그들이 거짓 선지자들인 것입니다. 마귀의 공격은 입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그것은 그들의 가르침과 교회의 가르침이 상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마귀들의 공격은 언제나 겉으로 보기엔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고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는 것과 같지만 하나님은 없고 자신과 자신의 유익에만 경도된 것입니다. 자신을 신으로 신격화하고 그런 이들을 추앙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짐승은 신성 모독하는 이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12:17절에서 마귀들이 입을 벌려 강물을 토하여 냈었는데 그 강물의 토함이 결국 어떠한 것인지를 요한계시록 13장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사 기독교회와 진리의 기독교회의 싸움, 그것이 영적인 전쟁이며 종말에 있을 싸움입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해 비방하고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에 사는 자들도 비방하고 있습니다. 이 구조는 다니엘 8:10절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 군대에 미칠 만큼 커져서 그 군대와 별들 중의 몇을 땅에 떨어뜨리고 그것들을 짓밟고 또 스스로 높아져서 군대의 주재를 대적하며 그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를 없애 버렸고 그의 성소를 헐었으며 그의 악으로 말미암아 백성이 매일 드리는 제사가 넘긴 바 되었고 그것이 또 진리를 땅에 던지며 자의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여기서 그것은 뿔입니다. 세상 왕을 은유하는 뿔이 스스로 커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군대와 하늘의 별들을 떨어트리고 짓밟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하늘의 군대와 별들은 신자들을 은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왕들이 교회를 박해하도록 일정기간 허락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소를 헐었고 제사를 폐했으며 진리를 땅에 던지며 자의로 행하여 형통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이며 거짓 선지자들의 모습입니다. 진리가 없이 자신의 뜻대로 행하고 형통을 이루어 가려는 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자의로 행하다 상응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아사입니다. 그들은 형통을 만들고 진리와는 무관합니다. 문제는 그런 세상이 잠깐 득세 하더라는 것입니다. 13:7절입니다.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시편의 고백처럼 이 땅 위에서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잘 됩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힘이 듭니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와 무관하게 사는 자들이 훨씬 더 큰 영광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자괴감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당면한 현실입니다. 성경은 신자들에게 세상의 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복이 아닌 하늘의 복과 승리가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의 현상에 대해 현혹되어선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며 가까이 있는 자들은 인간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결정하심에 따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8절입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이들은 다 짐승에 경배한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아래의 세상이 승승장구 하고 거기에 현혹되겠지만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들은 그 세상에 경배하지 않고 고난과 인내의 삶을 견뎌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9-10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사로 잡혀갈 자는 사로 잡혀갈 것이고 칼에 죽을 자는 죽어야 하지만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로 잡혀 갈 자는 사로 잡혀간다는 말은 예레미야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레미야 15: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은 포로가 될 자들이 있을 것이며 칼에 죽을 자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 왕들을 섬긴 것에 대한 댓가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 신실한 자들도 겪어야 하는 현실이었습니다. 43:11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와서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칠 것이라
여기서도 동일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사로 잡혀 포로가 되고 칼에 죽을 때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자들은 안전합니까? 아닙니다. 괴로움과 어려움을 함께 겪습니다. 그러나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 예언과 약속 안에서 그를 믿고 인내하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 현실을 요한계시록은 그대로 가져 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형통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더 형통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현실 속에서도 신실하게 믿음을 갖고 인내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이미 예정하신 자들일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정이 주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을 인간이 막을 수 없고 역사가 흔들어 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셨기에 우린 완성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명한 현실의 파도가 높을지라도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예정하심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함께 하나님과 손을 잡고 이 바다를 넉넉히 걸어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서다
[요한계시록 30. 설교문]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 요한계시록 13:1-4
우린 지난 시간 마귀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전쟁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마귀와
"죽임당한 짐승 vs 죽임당한 어린양 … 적그리스도의 위장된 복음” 신자들의 싸움은 결국 ‘입’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바른 진리를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진리를 무시한 채로 인본주의적인 해석과 믿음을 고수할 것인가?사실 짐승에 대한 서술이 등장하는 요한계시록 13장의 내용도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을 담고 있는 환상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예나 지금이나 있습니다. 그리고 다들 훌륭한 통찰력을 갖고 설교를 준비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정말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설교자나 교인들이 모두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오늘은 요한은 또 다른 환상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짐승에 관한 것입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동물 모양의 형태를 갖고 있는 한 짐승은 다니엘 7:1-7절에 등장을 합니다.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이 그 침상에서 꿈을 꾸며 뇌 속으로 이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그 일의 대략을 진술하니라 다니엘이 진술하여 가로되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여기서 보시면 바다에서 짐승 넷이 나왔다고 합니다. 본래 고대 근동에서 바다는 하나님의 질서가 없는 곳을 은유하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용과 뱀은 세상 왕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해를 그대로 가져 와서 요한은 서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목할 점은 다니엘은 네 개의 다양한 제국이 있다고 서술했다면 요한은 한 짐승이 그 모든 네 동물의 형상을 갖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절을 보시면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이란 말은 일차적으로는 로마를 은유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나아가서 이 바다에서 올라온 한 짐승은 다니엘에서 말했던 많은 제국들의 모습을 이 짐승이 갖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이 땅 위에 세워진 모든 하나님을 대적하여 선 세상 군왕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짐승은 단순히 세상 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닌 종교적 존재라는 점입니다. 13:2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여기서 용이 짐승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권세를 주었다고 합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다른 용이란 존재가 짐승에게 자신의 권세를 수여하는 장면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모든 권세와 능력을 수여하시는 시편 110편의 모습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짐승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되었는데 그 상처가 나았다고 합니다.
13:3절을 보십시오.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여기서 죽게 되었다 에 상응하는 헬라어 단어는 스피조입니다. 이 단어는 요한계시록에서 등장할 때 어린 양이 죽임을 당했다고 서술할 때 쓰는 그 단어입니다. 심지어 이 현상을 본 이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Τίς ὅμοιος τῷ θηρίῳ”
티스 호모이스 토 데리오.
누가 이 짐승과 같은가?
이 표현은 홍해를 도하한 이후 하나님을 찬양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백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 온 것입니다. 누가 우리 하나님과 같은가? 란 표현에서 하나님을 없애고 짐승으로 바꾼 것입니다.
요한이 본 환상은 단순히 세상 임금이 기적을 행했다는 식의 구조가 아닌 종교적 차원의 존재들이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가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세상도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더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의 상처와 낫게 되는 그 과정을 통해 온 땅이 그 짐승을 경배합니다.
요약하면 여기서 등장한 용과 그에게서 권세를 받은 짐승과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해보면 상당히 유사한 점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 양과 짐승은 각각 하나님과 용에게 그 권세와 능력을 수여 받습니다. 어린 양과 짐승은 죽임을 당했다가 다시 부활했습니다. 어린 양과 짐승은 많은 이들의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습니다. 먼저 어린 양은 십자가와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세상은 이기셨지만 한 짐승은 폭력과 억압으로 성도들을 이깁니다. 어린 양의 통치 기간은 영원에서 영원이지만 한 짐승의 통치는 마흔 두 달, 유한한 시간입니다. 어린 양과 그의 십자가를 따르는 자들은 죽은 것 같지만 영생을 누리고 한 짐승을 따르는 자들은 마흔 두 달이 지나고 나면 모두 멸망한다는 점입니다.
요한이 본 환상이 이 유사한 점을 시사하는 것은 성도들의 대적인 세상은 제국적인 모습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차원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시대의 제국은 단순한 로마 제국이 아닌 황제가 자신을 신이라고 하며 많은 이들이 로마를 종교처럼 숭배하던 시대였습니다. 지금의 나라들과는 조금 다른 성격의 차원이었습니다. 리차드 보컴의 말처럼 이 한 짐승은 로마 제국과 로마 제국이 자신을 하나님으로 칭하며 속국들이 그들을 신으로 섬기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석학적으로 보자면 마틴 로이드 존스의 주장처럼 이 한 짐승은 오늘날에도 해석될 수 있고, 되어야 합니다.
이 아래의 세상은 언제나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를 싫어한다고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을 신으로 섬기고 그것을 숭배하는 종교적 성향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득세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한 짐승은 단순히 로마 제국이 아닌 타락한 인간 세상, 즉 아담 군상들을 총칭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이 짐승은 그리스도와 유사하게 보이는 변장된 그리스도 적그리스도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서 가르치는 자들 그리고 거짓된 용과 세상을 숭배하게 만드는 자들 바로 그들이 거짓 선지자들인 것입니다. 마귀의 공격은 입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그것은 그들의 가르침과 교회의 가르침이 상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마귀들의 공격은 언제나 겉으로 보기엔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고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는 것과 같지만 하나님은 없고 자신과 자신의 유익에만 경도된 것입니다. 자신을 신으로 신격화하고 그런 이들을 추앙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짐승은 신성 모독하는 이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12:17절에서 마귀들이 입을 벌려 강물을 토하여 냈었는데 그 강물의 토함이 결국 어떠한 것인지를 요한계시록 13장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사 기독교회와 진리의 기독교회의 싸움, 그것이 영적인 전쟁이며 종말에 있을 싸움입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해 비방하고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에 사는 자들도 비방하고 있습니다. 이 구조는 다니엘 8:10절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 군대에 미칠 만큼 커져서 그 군대와 별들 중의 몇을 땅에 떨어뜨리고 그것들을 짓밟고 또 스스로 높아져서 군대의 주재를 대적하며 그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를 없애 버렸고 그의 성소를 헐었으며 그의 악으로 말미암아 백성이 매일 드리는 제사가 넘긴 바 되었고 그것이 또 진리를 땅에 던지며 자의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여기서 그것은 뿔입니다. 세상 왕을 은유하는 뿔이 스스로 커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군대와 하늘의 별들을 떨어트리고 짓밟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하늘의 군대와 별들은 신자들을 은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왕들이 교회를 박해하도록 일정기간 허락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소를 헐었고 제사를 폐했으며 진리를 땅에 던지며 자의로 행하여 형통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이며 거짓 선지자들의 모습입니다. 진리가 없이 자신의 뜻대로 행하고 형통을 이루어 가려는 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자의로 행하다 상응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아사입니다. 그들은 형통을 만들고 진리와는 무관합니다. 문제는 그런 세상이 잠깐 득세 하더라는 것입니다. 13:7절입니다.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시편의 고백처럼 이 땅 위에서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잘 됩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힘이 듭니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와 무관하게 사는 자들이 훨씬 더 큰 영광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자괴감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당면한 현실입니다. 성경은 신자들에게 세상의 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복이 아닌 하늘의 복과 승리가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의 현상에 대해 현혹되어선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며 가까이 있는 자들은 인간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결정하심에 따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8절입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이들은 다 짐승에 경배한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아래의 세상이 승승장구 하고 거기에 현혹되겠지만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들은 그 세상에 경배하지 않고 고난과 인내의 삶을 견뎌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9-10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사로 잡혀갈 자는 사로 잡혀갈 것이고 칼에 죽을 자는 죽어야 하지만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로 잡혀 갈 자는 사로 잡혀간다는 말은 예레미야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레미야 15: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은 포로가 될 자들이 있을 것이며 칼에 죽을 자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 왕들을 섬긴 것에 대한 댓가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 신실한 자들도 겪어야 하는 현실이었습니다. 43:11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와서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칠 것이라
여기서도 동일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사로 잡혀 포로가 되고 칼에 죽을 때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자들은 안전합니까? 아닙니다. 괴로움과 어려움을 함께 겪습니다. 그러나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 예언과 약속 안에서 그를 믿고 인내하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 현실을 요한계시록은 그대로 가져 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형통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더 형통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현실 속에서도 신실하게 믿음을 갖고 인내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이미 예정하신 자들일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정이 주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을 인간이 막을 수 없고 역사가 흔들어 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셨기에 우린 완성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명한 현실의 파도가 높을지라도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예정하심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함께 하나님과 손을 잡고 이 바다를 넉넉히 걸어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months ago | [Y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