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 서다

[예레미야 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바다를 뒤흔들어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예레미야 31:31-35


우린 지난 시간 하나님의 계획은 남유다의 멸망 이후 온전한 이스라엘의 회복까지 포함된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전화위복이란 말처럼 그들의 그 고난과 무너짐이 도리어 더 큰 갱신과 회복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버리지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실 것인데 반드시 그렇게 하셔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창조한 이스라엘과 피조 세계를 아무런 갱신의 형태도 없는 상태에서 멸절시킨다면 그것을 만드신 당신의 의도가 무너지는 것이며 당신의 실패를 전제하는 입니다. 또한 그 위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언약하신 분의 말이 허공의 메시지와 같이 되기 때문에 이 땅에 대한 어떤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파멸에 이르게 둘 수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유다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피조 세계도 기억하신다는 점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예레미야 31:27절을 보십시오.
예레미야 5. 복된 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며 멸하며 곤란케 하던것 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리는 날이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짐승이란 인간을 제외한 피조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짐승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단어 베헤마는 가축으로 주로 번역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아래의 세상을 만드실 때 에덴에 있던 것이 사람과 베헤마입니다. 에덴동산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노아 시대에도 베헤마를 방주에 함께 들어가게 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피조 세계를 파멸하는 것이 목적인 분이 아님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자와 사랑을 기본적으로 갖고 계시기에 이 아래의 자신이 만든 피조 세계와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파멸케 하는 분이 아니라 다시 갱신되도록 하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회복은 결국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된 피조 세계가 다시 회복되어 온전한 샬롬에 이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이 땅을 향한 목적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예레미야의 시대에 포로기가 허락된 것은 단순히 약간의 고침이 아니라 완전한 새로고침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완전히 무너트려 다시 세워 하늘의 것으로 새롭게 만들어 내셔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포로기라고 하는 광야로 이스라엘을 끌고 가서 신혼의 사랑으로 그들과 함께 살면서 다시 언약을 맺음으로 당신의 신실하심을 입증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새롭게 갱신된 백성들이 나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구조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조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베리트 언약입니다.
북왕조 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멸망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의 골자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구도 예배하지 않고 경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32절을 보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손을 잡고 데려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남편과 주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남편은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한 남편과 한 아내가 결혼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본적인 골격인데 구약 성경은 한 남편의 역할을 하나님에게 한 아내의 역할을 남성과 여성의 구별없이 이스라엘에게 배정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남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새로운 남편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들의 남편 히브리어로 바알 이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바알을 찾아 그를 섬겼다고 말한 것입니다.
전술했지만 여기서 남편이란 단어는 히브리어 바알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우상신 바알을 떠올리게 합니다.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내가 그들의 바알이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 바알을 자신의 신으로 삼았던 것에 대한 풍자적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라는 것인데 그 계약을 파기한 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인정하지 않으시고 새롭고 갱신된 공동체를 만들어 내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갱신은 이스라엘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광야로 가는 것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이 그 당시에는 포로 시기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목적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불렀지만 이스라엘은 가나안 일곱 족속의 우상을 하나님으로 섬겼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원했던 다산과 풍요를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다움을 요구하고 바알은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줄 것이라고 만든 우상 신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진단하신 내용은 이것입니다. 예레미야 2: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두 가지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이것이 죄가 되는 민족은 이스라엘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길을 만들고 먹을 것을 챙기며 돈을 버는 것이 소위 말하는 생존 아닙니까? 그 일을 위해서 신을 만들고 예배하는 것이 이 아래의 삶의 방식 아닙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심의 목적은 하나님과 함께 살고 그 분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를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적에 서로 동의하여 합의한 것이 여기서 말하는 베리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파기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이 아래의 세상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갱신된 포로기 이후의 백성들과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시겠다고 한 것입니다.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렇다면 왜 첫 언약은 실패했을까요?
하나님은 모세와 세운 그 첫 언약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판단하십니다. 예레미야 31:33절입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첫 언약은 돌판이 밖에 있었습니다. 그들과 멀리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으나 그 법도를 이스라엘이 멀리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과 연단을 통해 그들의 삶과 가슴 속에 하나님의 법도가 새겨 지도록 할 것이라고 단언하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포로기인 것입니다. 고난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비유를 하나 설명 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15:11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12절을 보면 두번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분깃을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달라는 구문은 명령문 도스 모이 토 에피발론 메로스 우시아 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자식이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물려 달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큰 문제적 행동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던 바리새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단순히 돈을 조금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은 나에게 죽은 자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극악무도한 폐륜적 행위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일에 대해 저주를 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그 요구대로 줍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의 그 무도함을 참아주신 것입니다. 그 이후 그 아들은 허랑방탕하게 모든 재산을 탕진해서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현실은 이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은 세상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고 돼지 쥐엄 열매도 먹을 수 없을 정도의 가난과 결핍을 경험합니다. 그러자 그는 깨닫고 돌이킵니다.
누가복음 15:17-19절을 보세요.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여기서 보시면 그는 돌이켜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우린 둘째 아들의 후회와 회개를 주목합니다만 지난 주 설교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이 모든 비유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관용입니다. 전술했지만 아버지가 유산을 달라고 하는 아들을 저주하거나 돌로 쳐 죽이지 않은 것은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를 용납했기 때문입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중요하기 때문에 헬라어 원문으로 읽어드리면서 구문독해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Καὶ ἀναστὰς ἦλθεν πρὸς τὸν πατέρα ἑαυτοῦ·
카이 아나스타스 엘덴 프로스 톤 파테라 헤아우투 에티 테 아우투
그리고 그가 일어나서 아버지를 향해서 갔다 스스로.

ἔτι δὲ αὐτοῦ μακρὰν ἀπέχοντος εἶδεν αὐτὸν ὁ πατὴρ αὐτοῦ
에티 데 아우투 마크란 아페코 에이돈 아우톤 호 파테르 아우투
아직도 거리가 상당히 멀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셨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헬라어 구문이 도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에서 주어와 동사는 그의 아버지 호 파테르 아우투 가 그를 보셨다 에이돈 는 것이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상당히 멀리 있었다는 형용표현이 앞서 있습니다. 모든 서양 언어는 앞에 등장하면 중요한 것입니다. 도치를 시켜 놓았다는 것은 돌아선 탕자와 아버지의 거리가 상당히 멀었음을 더 강조하는 그림인 것입니다. 탕자와 아버지의 거리감이 멀었지만 하나님은 그 거리감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그것을 보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탕자에 대한 관심을 놓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이렇게 행동합니다.

καὶ ἐσπλαγχνίσθη καὶ δραμὼν ἐπέπεσεν
ἐπὶ τὸν τράχηλον αὐτοῦ
카이 에스페라코세 카이 드라몬 에페페센
에피 톤 트라켈론 톤 아우투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애가 끓게 되시고 미친듯이 달려가서 그의 목을 감싸안고

καὶ κατεφίλησεν αὐτόν.
카이 카테피레센 아우톤
그에게 입을 맞추셨다

하나님은 탕자가 집을 나간 이후에 맘 편하게 계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망하게 될 것을 다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시간을 허락하신 이유는 그 과정이 있어야 다시 그가 아버지를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생하던 탕자가 돌아서서 하나님에게 초라하게 거지 모습으로 나타셨을 때 아버지는 그를 저 멀리서 바라보고 애가 끓게 되셔서 달려가서 그를 안아 주셨습니다. 이 모습에서 우린 이스라엘과 우리의 삶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와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는. 이제 밖에 있던 아버지의 법령은 그에게 살이 되어 기쁨으로 동의하는 내용이 되었을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지 않습니까. 집에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아버지와 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집에 있었던 첫 번째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대해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집 밖을 다녀 온 두 번째 아들은 집 밖을 다녀 온 이후로 아버지와 한 몸이 되었습니다. 누가 탕자입니까?

본론으로 돌아와서 포로기를 겪으면서 밖에 있던 아버지가 안으로 들어오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고 그것이 ‘새 언약’입니다. 우리의 삶에 적용해보면 우린 이 아래의 세상에 왜 왔습니까? 아버지의 집, 아버지의 통치,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피부의 언어로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밖에 있는 목사나, 전도사나, 장로님이나 권사님들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아버지를 절대로 떠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내 안에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 언약입니다. 밖에 있던 하나님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의 삶에 오신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과 손을 잡고 걷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역사를 주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31:3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심비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 누가 가르칠 이유도 없고 강요할 이유도 없는 하나님과 함께 하기로 작정하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새 언약을 맺은 이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제 우리가 그 새언약의 백성이 되었다고 단언합니다. 고린도후서 3: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바울이 이렇게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새언약의 백성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음주에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새언약의 핵심이자 증거, 바로 그 분에 관한 이야기를 말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최근 시험 기간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시험을 잘 보았고 점수도 많이 올랐습니다. 그런데 한 두 명이 걸렸습니다. 점수가 오르지 않은 것입니다. 많은 아이들이 수고했고 좋은 결과를 얻었으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만 그 한 두명이 더 크게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저의 죄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법을 모르고 주신 것에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찬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그 죄가 얼마나 나를 괴롭게 하는지를 알고 그것을 멀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으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삶을 우린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저 밖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법도와 진리를 우리가 알게 될 것입니다.

유산을 달라는 탕아를 저주하지 않으시고 돌아온다는 그를 저 멀리서 보고 달려가서 미친듯이 껴안으시는 하나님, 그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주어진 삶 가운데 늘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는., 예레미야서의 표현처럼 남편이신 하나님을 둘러싼 신부 이스라엘의 삶이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months ago (edited) | [Y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