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 서다

[예레미야 3 설교문]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종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나무들을 심되 심는 자가 그 열매를 따기 시작하리라 에브라임 산 위에서 파수꾼이 외치는 날이 있을 것이라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 예레미야 31:1-10.


우린 지난 시간에 예레미야 28-29장에 등장하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거짓된 화평과 번영을 기반으로 한 대중적인 니즈에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지점은 이것입니다. 겉보기엔 참된 선지자 같지만 이면은 거짓 선지자라는 점입니다. 본래 율법에 따르면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에 대한 기준은 그들의 말이 이루어지는가에 있습니다. 그들의 그 예언이 성취 되었는가를 봐야 합니다. 문제는 그들의 말이 이루어지는가 아닌가를 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냐의 경우를 보면 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예언을 합니다. 대중들은 열광했습니다. 그런데 비해 예레미야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처럼 말을 합니다.
예레미야 28:1절을 보겠습니다.

그 해 곧 유다 왕 시드기야가 다스리기 시작한 지 사 년 다섯째 달 기브온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6절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하니라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네가 예언한 말대로 이루사 여호와의 성전 기구와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이 곳으로 되돌려 오시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너는 내가 네 귀와 모든 백성의 귀에 이르는 이 말을 잘 들으라 나와 너 이전의 선지자들이 예로부터 많은 땅들과 큰 나라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되리라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말에 아멘으로 화답을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이 아니라 내가 말하는 바를 들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차이점입니다. 겉보기에도 하나냐가 권위 있는 예언자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실상은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습니까? 시간이 가기만 기다려야 합니까?

예레미야는 나와 너 이전의 선지자들이 예언을 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우린 성경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에 의해 감동되어 선언한 설교와 기록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바른 선지자들의 설교는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에 근거해야 합니다. 단순히 복을 빌어주는 성경 구절 하나를 읽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맥락과 가치, 성경이 말하려는 바를 숙지하고 그 틀 안에서 성경을 바탕으로 예언하고 설교하는 자들이 참된 선지자들입니다.
지금도 많은 설교자들이 있고 대부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했다고 확신할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하나님도 까불면 죽인다고 하는 시대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기억하셔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성경의 기록에 부합한 설교를 하고 있는가? 그 사람이 기독교 교리와 부합한 설교를 하고 있는가? 어거스틴을 비롯한 많은 교부들의 가르침과 교리적 고백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가? 그 사람들이 그런 것에 근거하여 겸손하게 설교를 하는가 아니면 그저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하나님이 그렇게 말했다고 우기는 식의 설교를 하는가 잘 보시면 그 사람의 거짓과 참의 여부를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전 어릴 때부터 설교가 전부라고 생각했지만 한국 교회의 구조상 설교가 전부이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목양이나 체계, 그리고 거기서부터 나오는 혜택들도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고 그런 면에서의 제한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이 교회에 오시라고 영상을 나누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의 설교를 들으시고 신앙생활을 유익하게 하시길 바랍니다. 다만 즉흥적이고 성경에 기반하지 않는 단순히 열광주의적이고 대중적인 열망에 부합하는 설교를 하는 이들을 주의하시는 것을 고려해보시기를 제안드리는 것입니다.

각설하고 오늘은 예레미야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새 언약 시리즈 1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칠십 년을 채우고 돌아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칠십은 물리적인 숫자일 수도 있지만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하심이 채워져야 한다는 의미의 완전수 칠십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품으신 복된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벨론에 끌려 가야 하고 거기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주된 요지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신학 안에서 이 예언을 도식화 해보면 우린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어 하고 천국을 빨리 가고 싶어 합니다. 도망쳐서 피한 곳에는 낙원이 없지만 우린 언제나 낙원을 그려보곤 합니다. 그리고 그 낙원이 인간의 입장에서 상상하는 이상적인 장소로 표현 또는 이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땅에서 피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복된 일을 위해서라고 단언합니다. 예레미야 29:32절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느헬람 사람 스마야와 그의 자손을 벌하리니 그가 나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기 때문에 이 백성 중에 살아 남을 그의 자손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 내가 내 백성에게 행하려 하는 복된 일을 그가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렇다면 복된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나누었지만 복된 일은 토브입니다. 토브는 하나님 나라가 구현되었을 때 하나님이 선언하신 표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바벨론 땅에서 칠십 년을 살라고 하신 이유는 오직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갱신을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는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론적 개념, 다시 말해 예루살렘이란 지명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30장에서 그들이 반드시 돌아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예레미야 30:8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 버리며 네 포박을 끊으리니 다시는 이방인을 섬기지 않으리라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그들을 위하여 세울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나의 종 야곱아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먼 곳으로부터 구원하고 네 자손을 잡혀가 있는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누릴 것이며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의 멍에를 꺾고 자유를 주실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스라엘이 가진 그 당시의 모습 그대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지명인 예루살렘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화려하게 하나님의 신부로 꾸미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며 목적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은 전혀 하나님의 백성다움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겉모양은 이스라엘이었지만 그 속은 이미 세상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들의 산학과 신앙은 세속화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다움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꿀 부분은 바꾸면 된다는 식이겠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근본이 타락했으며 하나님의 백성다움이 없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갱신을 위해 그 옛날 이스라엘을 태어나게 했던 자궁과 같은 곳으로 그들을 다시 돌려 보내야 했습니다. 그 자궁이 어디입니까. 세상과 다를바 없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말씀을 받고 참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회복했었던 곳 말입니다. 바로 광야입니다.
예레미야는 철저하게 바벨론 포로기의 시간이 그들이 광야를 겪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은유는 모든 포로기 예언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이 중심이 되시는 말 그대로 하나님 나라의 현현이었습니다. 광야를 거쳐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구조와 도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는 시간을 거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 나라로 완성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30:21절을 보십시오.

그 영도자는 그들 중에서 나올 것이요 그 통치자도 그들 중에서 나오리라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리니 그가 내게 가까이 오리라 참으로 담대한 마음으로 내게 가까이 올 자가 누구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여기서 보시면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산에서 법도를 주시면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이 표현은 선지서와 율법에서 자주 등장하던 표현이고 예레미야서 안에서도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칠십 년 포로 생활과 귀환을 통해 그들이 자신의 연단된 백성이 되고 자신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레미야 31:1절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면서 너는 내 백성이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시작을 하고 있는데 그 멸망과 회복의 과정은 결국 하나님 나라와 백성이 되기 위함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이르시되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말하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여기서 보시면 그들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대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한 예언 중간 마다 애굽과 광야를 떠올리게 하는 표현들을 사용하게 하시는데 그들의 포로 시간이 광야와 같은 것이며 그 기능을 수행하는 곳이라는 인식을 주지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너희가 잘못해서 고난을 당하지만 그 고난의 본래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 다움을 위한 것이다 가 하나님의 선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린 어찌보면 당연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겨두신 그 가나안 일곱 족속과 같은 존재와 내용들을 빨리 종교심을 갖고 치우려고 해선 안 됩니다. 그걸 통해 우리가 만들어 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아침에 기억해야 하는 내용입니다.

다른 관점에서 우리가 조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광야를 지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우릴 왜 이렇게 고생 시키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있어서 광야는 고난의 길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길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시절이 신혼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이 간극을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고생과 괴로움의 시간으로 광야를 이해하지만 하나님은 함께 하는 시간으로 광야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2절을 보십시오.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 모든 족속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아무것도 없고 씨를 뿌려도 무엇인가를 얻지 못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열매를 주셨고 그들은 그것을 따라 걸어갔습니다. 이것이 광야 생활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말씀을 받고 주야로 만나와 메추라기, 불과 구름 기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습니다. 초라해도 영적으로 부유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레미야의 시대는 그런 시절은 과거가 되어 버렸고 그들의 정신 마저도 퇴색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들은 하나님을 부르지도 않고 찾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그런 시간을 허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다시 우리의 언어로 도식화하자면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작정되었습니다. 그것은 부정과거시제, 이미 결정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린 왜 그 확정된 길을 돌아 돌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대체 왜 그런 광야의 생활을 주시는 것입니까? 처음 설교 때도 말씀 드렸지만 우린 이 어려운 삶 속에서 하나님이 숨겨두신 하나님 자신을 찾고 만나고 알아야 합니다. 그 분이 누구시며 그 분의 사역과 성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진리의 본체이신 그 하나님을 가져야 합니다. 건물 성전이 아니라 존재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전은 돈으로 건물을 쌓는게 아니라 인내로 우리 안에 쌓여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은 분명히 예레미야도 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굳이 돌아올 것이라면 떠나야 하느냐고 이스라엘은 묻고 있는 것이고 그런 이스라엘의 불만에 대해 거짓 위로를 하는 것이 거짓 선지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반드시 그들이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복을 누릴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예레미야 3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이방들이여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떼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셨으니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서 복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선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선한 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명사 투브는 예레미야 2:7절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읽었지만 거기서 그들이 아름다운 것을 먹게 되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아름다운 것이 투브입니다. 역시 광야에서 하나님이 먹이시던 그 행위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전 예전부터 축구선수 메시를 좋아했습니다. 여러 면에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축구 선수들이 받는 가장 권위 있는 상을 받기 전에 굉장히 유명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선수가 영상에 나와 “메시야, 여전히 축구하는 것이 즐겁니?” 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메시가 “당연하지” 라고 말하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아마 그 질문에는 이런 의미들이 담겨져 있을 것 같습니다.

너가 지금 최고의 선수이고 많은 명예와 인기를 얻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를 할 때 행복했던 그 처음 마음을 잘 기억하고 있니?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상 편지를 보내서 오늘 물어 오신다면 무엇이라고 답하겠습니까.
너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걷는 그 일이 즐겁니?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시간이 즐겁지 않았고 하나님 한 분만 기억하는 일도 귀찮아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신과 함께 걷기 위해서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백성임을 주지시켜야 했습니다. 그것이 곧 포로기였습니다. 당장은 고난과 연단의 오늘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이 시간이 우리와 함께 하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또 주어진 길을 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

5 months ago | [Y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