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 서다

[예레미야 설교문 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렘 31:15-20.


우린 지난 시간 하나님이 칠 십년을 바벨론에서 생활하게 하신 이유를 복된 일을 위해서라고 정리했습니다. 하나님과 새 언약.. 그 복된 일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 같은 포로기의 시간을 살게 하시면서 다시 그 옛날 모세의 세대처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시기에 그 의도하신 바를 이루신 후에 우리에게 온전한 샬롬을 주실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멸망 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돌아올 회복에 대해서 누차 강조하여 예언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정한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였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유다가 다시 돌아오는 날이 있을 것이며 즐거움의 노래를 부르는 날이 올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31:4절입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나무들을 심되 심는 자가 그 열매를 따기 시작하리라
하나님은 반드시 이스라엘이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돌아올 이들에 대해 이스라엘아 라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덧붙여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나무를 심을 날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남유다가 아니라 이스라엘로 예루살렘이 아니라 사마리아를 언급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구도는 15절에서 최고점을 찍습니다. 예레미야 31:1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라헬이란 인물은 베냐민과 요셉의 어머니입니다.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은 북왕조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였습니다. 전술했지만 이 표현들은 하나같이 뜬금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는 이미 북왕조 이스라엘이 멸망을 한 이후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레미야는 남왕조의 멸망과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북왕조 이스라엘의 대표 지파인 에브라임과 그의 할머니인 라헬을 언급할까요?

하나님은 남유다의 멸망과 회복을 통해 북왕조 이스라엘까지 회복하실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온전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하나님이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남유다가 멸망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면 북왕조 이스라엘은 온전히 역사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북왕조 이스라엘을 그대로 두실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원한 인자와 사랑을 그들에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일정 기간동안 바벨론에 끌려 간 이후 돌아올 때 남유다가 아니라 온전한 이스라엘로 회복될 것이라고 선언하시고 있으며 이것은 멸망한 북왕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더 나아가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지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남 유다에 제한된 것이 아닌 더 크고 온전한 것을 향해 있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이 구조를 우리의 인생과 역사 안에서 적용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과 고난을 주시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게 허락하시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더 큰 뜻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지엽적이고 감정적입니다. 그 순간만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보고 듣는 것이 언제나 절대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을 넘어서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그 분은 지금 오늘의 현실이 아니라 완전한 그림 속에서 그 분의 백성을 인도합니다. 내가 북왕조 이스라엘을 버릴 수 없다 라는 명제는 그 당시 남유다 사람들에게는 크게 감동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지금 성경을 믿고 읽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은 온전하시고 완전한 뜻이 있으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저도 제 인생을 돌아보면 그 순간만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인정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은 그 순간을 넘어 영원의 차원의 것이기에 우리는 끌려 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즐겁게.

북왕조 이스라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우리가 당황할 수 있지만 이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떠올리게 합니다. 20절입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이 멸망한 에브라임을 생각할 때 창자가 끓는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한국적인 것으로 바꾸면 애가 닳는다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사랑하셨고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싫어하셔서 북왕조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닌 훈육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잠깐 무너진 것이고 멸망한 것입니다. 실제로 북왕조 이스라엘은 그들의 멸망으로 인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그들이 탄식했습니다. 그들은 징벌을 받아야 했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회복되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무관했던 북왕조 이스라엘은 멸망으로 인해 하나님을 찾는 족속이 된 것입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못한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란 표현입니다. 처음 송아지가 멍에를 메면 익숙하지 않고 힘들어 합니다. 멍에에 익숙해져야 하는 송아지였던 에브라임과 북왕조 이스라엘은 그 멍에를 짊어지는 것을 견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레미야의 조국인 남유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레미야 5:5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지도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


이 구절은 굉장히 유명한 구절입니다. 예레미야 5:1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진리를 아는 사람들을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고 선언합니다. 그 후 만나는 그들에게 너희들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길과 말씀은 하나님의 훈육하심의 멍에를 짊어지는 것으로 입증되는 것인데 그것을 거절했다는 말입니다. 북왕조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그들이 멍에를 지기 싫어하는 송아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유다도 동일한 이유 때문에 멸망했음을 독자들은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훈련과 양육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이지만 그 사랑 안에는 훈육과 양육의 개념이 포함됩니다. 그것을 버티지 않고 버리겠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입니다. 예레미야 30:11절을 보세요.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할 것이라 너를 흩었던 그 모든 이방을 내가 멸망시키리라 그럴지라도 너만은 멸망시키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법에 따라 너를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만 여기지는 아니하리라

이것이 하나님 사랑이며, 하나님의 훈육하심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훈육할 때 훈육과 징계를 하지 않는다면 부모의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부르시고 자녀로 삼으셨다면 그 백성들을 자신의 백성답게, 자녀답게 만들어 가실 권한과 책임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박차서 벗어나버린 것이 북왕조 이스라엘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멸망한 것입니다. 그 멸망과 과정 가운데서 북왕조 이스라엘은 후회했고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호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도 당연히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멸망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 멍에를 같이 짊어질 것을 요청하셨고 그것에 북 왕조 이스라엘은 동의한 것입니다.

따라서 남유다의 멸망과 회복에는 온전한 이스라엘의 회복까지 내포된 것입니다. 실제로 예레미야와 유사한 시대를 살았던 에스겔은 이런 환상을 봅니다. 에스겔 37: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네 민족이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거든 너는 곧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 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가져다가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선지자들은 하나같이 남유다의 포로기와 멸망 이후 하나님의 새언약이 세워질 것인데 그 대상이 온 이스라엘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은 언제나 우리보다 크고 온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 안에 갇힌 창조물이기 때문에 시간 밖에 계신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린 그 순간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순간이 아니라 영원 속에 계신 분이기 때문에 순간을 넘은 어떤 계획으로 백성들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끌려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이 그 뜻을 알려 주신다고 해도 절대로 우린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들의 오늘이고 현실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개념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다면, 그 분의 뜻하심이 나의 계획과 생각보다 우선하고 온전한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당장 당면한 오늘을 수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주해보겠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이스라엘을 다시 세워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옛언약의 구조를 회복하려 하십니다. 이것을 성경은 새창조라고 말합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그 옛날 모세가 홍해를 함께 건넜던 이스라엘과는 너무 거리가 먼 세상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광야와 같은 포로기를 보내게 하신 것입니다. 그 기간을 거치면서 그들은 하나님과 새로운 갱신된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과정이 복된 것입니다.
여러분 복이 무엇입니까? 만사가 형통하고 자식들이 좋은 대학교를 가고, 사업이 잘되면 복이 있는 것입니까? 성경이 언제 그런 복을 약속했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돈을 많이 벌어 항상 성공하고 슬픈 일 하나도 없다는 복입니까? 교회를 잘 섬기고 목사들에게 잘하면 받는 그런 복입니까? 그런 것은 성경의 복과 사실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복된 일은 하나님과의 연합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31:31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을 열심히 알아야 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옵니다. 그것이 새언약의 시대입니다.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이 밖에서 백날 천날 외치는 그 하나님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자신을 직접 계시하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것이 새언약입니다. 겉과 겉이 아닌 영과 영으로 속과 속으로 하나님과 한 몸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된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복” 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가?

말씀을 마무리 하면서 온 이스라엘이 회복된 때가 있습니까? 역사 속에서 새 언약의 대상인 온 이스라엘이 세워진 때가 언제입니까?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은 북왕조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 국한되지 않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을 얻은 온 믿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8: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브리서 저자는 예레미야 31장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새 언약에 대한 중보자가 예수시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은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셨던 온 이스라엘의 회복과 새 언약의 대상인 이스라엘은 결국 예수와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말하는 것임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서로 이야기 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고 서로 이야기 할 필요도 없는 시대가 바로 성령의 시대 아닙니까? 진리의 성령이 우리 안에 오는 시대가 왔으니 그 시대를 여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새 언약의 피를 흘린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새 언약의 약속은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이제 여름 수련회 시즌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들 여름 수련회 준비로 사역자들이 바쁩니다. 전 여름 수련회 문화가 좋은 점도 있지만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밖에 있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찾아오는 듯한 구조로 성도들이 인식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아니 계십니다. 예수께서 성령이 오시는 그 날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는 것과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내 안에서 이미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깨달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저기서 찾고 여기서 찾는다고들 난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예수라는 분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를 깨닫게 되었고 그것을 알리고 선언하는 자신이 새언약의 사도라고 말합니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가 밖에 있는 조문과 법령을 의지할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 안에 예수께서 사시고, 예수 안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꼐서 우리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복된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니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그 옛날 남유대가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서 말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5 months ago (edited) | [Y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