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제19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정의화입니다.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한 고민을 담아 2016년 '새한국의비전'을 설립하고,
유튜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채널을 구독/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재)
봉생병원 의료원장
새한국의비전 이사장
약력)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부산 봉생병원 원장(신경외과 전문의)
15대 ~ 19대국회의원(5선 의원)
19대 후반기 국회의장(The 19th Speaker of the National Assemb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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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화의새한국의비전TV
너무나 슬픕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강남주 총장님을 떠나보내려니 가슴이 먹먹하고 저려옵니다.
오면 가야하고 만나면 헤어져야 하는 생노병사의 인생 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유독 강남주 총장님이 홀연히 떠나시니 그저 슬플 따름입니다.
어릴때 수정동 이웃집 어른이셨고, 1989년 제1회 봉생문화상을 수상하신 후 인연이 깊어져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제겐 삼촌같은 분이셨고 제 삶의 향도의 한분이셨으며 천금같은 부산문화계의 거목이셨습니다.
부산 문화계의 큰 지도자로써 문화의 불모지 부산을 오늘의 문화도시 부산으로 만드는데 쌓으신 공로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것입니다.
강남주 총장님은 역사문화유산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강남주 총장님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깊은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한일 조선통신사 역사 기록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 유산"으로 남기기 위해 한국측을 대표하여 혁혁한 공로를 세우셨습니다. 한일 조선통신사 사업에 심혈을 기우리신 노력은 한일간의 우호를 증진시키고 용서와 화해를 통한 한일관계 복원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이제 강남주 총장님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내야할 시간이되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만나뵐 수 없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강남주 총장님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부디 영면하시옵소서
옷깃을 여미며 삼가 정의화 올립니다.
2 months ago | [YT]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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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화의새한국의비전TV
동래봉생병원이 개원 35주년을 맞았습니다. 1990년 6월 뇌척추신경, 심혈관, 소화기 중점 병원으로 시작해 현재 19개 진료과, 42명 전문의, 500여명 직원, 4개 의료관, 300병상급 종합병원으로 성장한 동래봉생병원에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3 months ago (edited) | [YT]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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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라는 한 정치인을 역사의 기록 한켠에 남기고자 Tv조선의 어느 기사에 올린 댓글 중에서 발췌한 글을 소개합니다. 김문수 장관은 저와 15대 16대 17대 국회의원으로 인연을 맺었고 연배는 제가 3년 높지만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사이였습니다. 경기도지사를 끝낸 뒤의 정치적 행보가 과거와 노선을 달리하기도 하여 실망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치인 김문수는 역사의 평가에 맡기기로 하고 인간 김문수에 대해 제가 몰랐던 훌륭한 점들을 알게해준 댓글이라 제 유튜브의 기록물에 남기고자 합니다.
"김문수 후보를 지지하며"
우리는 이제 알았습니다.
국회의원 3번과 도지사 2번을 하는 동안
아직도 봉천동 산비탈 국민주택에 살고 계시다는 걸 말입니다.
남들은 국회의원 3번이면 큰돈을 만질 수 있다는데
당신은 그저 지금까지 청렴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몰랐습니다.
당신은 민주화 운동으로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생사고락을 같이한 동료들이 붙잡히지 않도록
끝까지 침묵을 지킨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이제 알았습니다.
민주화 운동 시절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해
한쪽 귀가 멀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늙은이의 어둔 귀먹음을 탓하였습니다.
참 부끄럽습니다.
우리는 몰랐습니다.
당신은 온몸으로 부딪혀가며
대한민국의 올바른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저항해 온 이력을 말입니다.
우리는 이제 알았습니다.
불굴의 의지로 저항을 하며 지켜온 정신을 보상하고자
보상금을 준다고 해도 그것을 거절했음을 말입니다.
그것을 받음으로 팍팍한 살림이 나아질 수 있음에도
그 또한 국민의 세금이라고 거절한 위대한 소신을 말입니다.
우리는 몰랐습니다.
당신은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인
서울대학교 상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수재였음에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
그들의 고통을 함께 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알았습니다.
최고의 학벌로 편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들의 삶이 더 소중하기에
학업을 포기하고 그들의 곁에 머물렀습니다.
진정 당신은 낮은 곳에서 사랑을 베푸는 일을 말입니다.
우리는 몰랐습니다.
당신이 저 넓은 땅에 삼고초려로
반도체 공장을 짓도록 한 일을 말입니다.
여러 신도시를 만듦과
서울 간 이동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혁신의 GTX를 만든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이제 알았습니다.
평택에 삼성반도체를 유치시키고
파주에 엘지디스플레이 공장을 짓게 하고도
동탄, 광교에 신도시를 개발하고도
판교테크노밸리도 개발하고
편리한 고속철도 GTX를 만들고도
사사로운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음을 말입니다.
우리는 몰랐습니다.
당신이 도지사가 되기 위해 발이 부러 트도록 뛰어다니면서
후원금을 아껴 쓰고 남은 돈을 당에 헌납한 것을 말입니다.
같이 고생한 동지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사줄 만도 했는데
절대 개인적으로 쓸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한 것 말입니다.
우리는 이제 알았습니다.
당신이 도지사 선거에서 사용하고 남은 비용을
그대로 당에 다시 헌납한 것을 말입니다.
풍족하게 쓰고도 모자랄 판에 아껴 쓰고 남은 돈을
다시 헌납한 것은 이 또한 국민의 돈이라 그런 것 아닙니까.
우리는 몰랐습니다.
당신이 도지사가 된 후 첫 번째 행보가
바로 한센촌의 방문이었다는 걸 말입니다.
아무도 찾기를 꺼려하는 곳에
당신은 기꺼이 가서 손을 잡고
그들을 위로해 주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영혼이 맑은 남자
정치를 하며 충분히 고관대작으로 잘 살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낮춰 서민으로 살아온 당신
당신이 약자를 위한 눈물
그것은 눈물이 아니라
뜨거운 함성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지난날 일제강점기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중에서 요절하신 '윤동주'시인을 불러내 봅니다.
그가 쓴 <서시>에 한 구절을 대입해 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정말 당신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사람입니다.
후략
김문수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 올림.
3 months ago (edited) | [YT]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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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입니다.♡♡♡
제4부 복국: 이승만의 나라 되찾기
이승만은 1875년 3월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안골에서 부친 이경선과 서당훈장 김창은의 외동딸인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이승만은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의 16대손 이었다.
조상은 대대로 서울서 살았다. 증조부 때 가세가 기울여 황해도로 내려갔다.
두살 때인 1977년 서울로 이주하였다.
15세에 박씨와 결혼하였으나 심한 성격불화 등으로 이승만이 미국에서 돌아온 1912년경 이혼하였다.유일한 혈육인 봉수는 1904년 미국으로 왔으나 8살에 필라델피아에서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천자문을 배우고 과거도 쳤으나 낙방하고 갑오경장으로 과거가 폐지되자 친구 신긍우의 추천으로 1895년 4월2일 미국 북감리교 헨리 아펜젤러가 세운 신식학교 배제학당에 입학하였다.
영어실력이 일취월장하여 배제학당 졸업하던 1898년 7월 8일 600여 귀빈 앞에서 영어로 한국의 독립이라는 주제로 연설하였다.
이승만이 배재학당에서 배운 가장 소중한 것은 새로운 혁명적 사상이었다. 개신교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유, 평등, 민권 등의 근대적 정치이념을 깨우치고 미국식 민주주의 제도를 신봉하게 되었다. 이무렵 서재필을 만나 따르게 된다. 서재필의 지도아래 협성회라는 토론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협성회보를 창간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을 한글과 영문으로 발간했다.
고종황제를 둘러싼 보수세력들이 서재필의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부정하고 대통령제의 공화정으로 바꾸려 한다고 날조하므로서 고종황제는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이승만도 이때 매일신문과 제국신문등 자신이 창간에 간여한 언론매체를 통하여 극렬한 반정부 데모를 조직 선동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하지만 투옥의 직접적 계기는 1898년 11월 19일 그가 중추원 의관(종9품)으로 임명된 다음,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의화군을 새 군주로 옹립하면서 일본에 망명중인 박영효를 영입하여 새로운 혁신내각을 조직하려는 쿠데타 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재판과정에서 혐의가 입증되지 않는 바람에 탈옥 미수죄로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경무청 구치소에 수감되었을 때 감방동지 2명과 함께 탈옥을 기도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다.
형량은 나중에 황제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옥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선교사들이 차입해준 성경으로 죄수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였으며 한국 개신교 역사상 처음으로 40여명의 양반출신 관료와 지식인들을 기독교로 개종 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감옥시절 갖는 또하나의 의미는 그무렵의 개화파 젊은이들은 모조리 옥살이를 하고 있었던 셈이었는 데 그들과 감방 동료였고 유길준의 친동생인 유성준과 가깝게 지냈으며 독립협회 간부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등 개화파 거물들이 들어왔고 이준, 양기탁, 안국선등이 감방 동료였다.
나중에 미국에서 활동할 당시 최대의 정적이 되어버린 박용만도 함께 있었다.
러일전쟁후 감방동료들이 풀려났으나 이승만을 아끼던 민영환과 한규설, 미국선교사들이 나섰으나 거의 막바지인 1904년 8월9일에 석방되었다.
고종황제 주변의 개혁파 총신인 민영환과 한규설이 이승만의 미국 밀파 계획을 세우고 그해 11월 4일 밀사 자격으로 워싱턴의 대한제국 주미공사관에 보내는 정부훈령을 가방 밑에 숨기고 떠나게 되었다.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육로로 시카고를 거쳐 섣달 그믐날 워싱턴DC에 도착하였다. (한달 보름정도).
서울 주재 미국공사로 근무한 적 있는 친한파 하원의원 딘스모어 (Hugh A. Dinsmore) 를 통해 1905년 2월 20일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를 30분간 면담하고 미국이 한국에 대한 조약상의 의무를 다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약속받았다. 본국의 민영환과 한규설 앞으로 자세한 면담 보고서를 보냈다. 그러나 그해 7월1일 헤이가 병사하는 바람에 허사가 되어버렸다.
공로명 전 외무부장관은 자신이 쓴 외교노트 '이승만의 역사적 혜안'에서 이승만이 고종의 밀지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간 것을 "이승만의 한국 외교사에의 등단'이라고 풀이했다.
" 비록 실패로 끝나긴 했으나 존헤이 국무장관을 만난 것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한미수호조약에 따른 조약상의 의무를 다해달라는 청원서를 낸 것 등을 어김없는 외교 행위였다고 평가했다.
이승만이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담한 것은 하와이 교민들의 노력이었다. 1905년 6월 미 육군장관 윌리엄 테프트가 하와이에 들렸을 때 4천 하와이 교민들은 한인들의 독립 보존 의지를 테프트에게 전달하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대대적인 환영대회를 열었다.
하와이 감리교 선교회의 존 와드맨이 한인대표인 이승만과 하와이의 한인 대표 격인 한인목사인 윤병구가 미국대통령을 만날 수 있도록 테프트 장관의 소개장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해 8월5일 루즈벤트 대통령이 만나주었고 이승만은 하와이 교민들의 청원서를 전달했으며 루즈벨트는 사안이 워낙 중요하므로 정식 외교채널을 통해 제출하면 강화회의에 내놓겠다고 약속하였다.
공사관 김윤정 서기관이 필요한 조치를 정부의 훈령없이는 안된다고 거절하여 이루지 못했다. 김서기관은 이미 나라가 기운다는 것을 알고 일본 공사관과 내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하와이 교포들의 청원서는 사문화되고 이승만은 민영환 앞으로 8월 9일 쓴 편지에서 실패의 원인을 김윤정의 협조 거부라고 밝혔다. 김윤정은 일본에대한 협조 대가로 나중에 전라북도 지사와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었다.
이승만은 미국에 갈 때 밀사의 사명 외에 미국에서 대학교육을 받을 야심을 품고 있었다.
한국의 저명한 선교사들의 추천서를 챙겨두었고 선교시들은 이구동성으로 정치범으로 수감중 40여 명의 동료죄수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승만은 1905년 2월 서른의 나이에 조지 워싱턴대학 콜럼비안 학부에 입학하였다. 배제학당 졸업을 인정받아 2학년에 편입하였고 1907년 6월5일 학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계속 관심을 가졌던 워싱턴포스트에는 졸업식에서 이승만이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하였다.
귀국하면 감옥에 갈 위험이 크다고 아버지가 귀국을 반대하였다.
이승만은 시간이 꽤 흐른 다음 하버드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나 하버드에서는 박사학위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프린스튼 대학에서 이승만에게 2년 이내에 박사학위를 마칠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과 함께 기숙사에서 무료로 생활 할 수 있는 혜택까지 베풀어 주었다.
1910년 훗날 미국대통령이 되는 월슨 총장으로부터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은후 6년만인 1910년 10월 10일에 귀국하여 서울 YMCA에서 성경과 만국공법(국제법)을 가르쳤다. 그는 당시 최고학력의 지식인이었으므로 수많은 청년들이 강연을 들으려고 모였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자유주의 사상을 불어넣고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려고 했다.
그는 전국을 누비면서 13개 선교구역을 방문하고 , 33차례의 집회를 통해 7,535명의 학생을 만났다고 한다.
일본헌병들의 감시를 받게 되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이승만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 종로학당 교장으로만 일했다.
일제가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개신교 세력의 민족운동을 타도하려 했고, 그 파장이 이승만에게도 밀려왔다. 이사건은 평북 신천의 기독교계 신성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초대총독 데라우치를 암살하려 했다는 조선총독부의 날조로 비롯되었다.
이승만도 위험한 인물로 체포대상이었지만 미국 선교사들의 보호로 체포를 면하고 1912년 5월 매4년마다 열리는 세계감리교 총회에 참석을 권유받고
37회 생일인 1912년3월26일 중풍으로 몸져 누워있는 부친에게 눈물의 작별인사를 하고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기약없는 망명길이었다.
보름 가까이 일본에 머물면서 유학생 대상으로 강연도 하고 한인 학생대회에 의장 역할도 하기도 하였다.
4월 10일 미국으로 떠나 시애틀을 거쳐 감리교 총회가 열리는 미네소타의 미네아폴리스로 갔다. 대회 기간중 연설을 통해 "한국의 자주독립이 국제 평화에 필수이며, 이를위해 세계의 모든 기독교도들이 단결해야 한다"는 취지의 연설을 했다. 대회의 결론이 일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하므로서 이승만은 허탈하였다.
하와이에서 한인기독학원을 세워 남녀공학의 민족교육기관을 만들었다.
이학교는 1928년까지 기숙사 제도로 운영되었으며 주로 소학교 6학년 과정을 이수시켰다.
독립된 한인교회 설립을 역설한 결과 1918년 7월 29일 호놀루루에 신립교회가를 설립하였고 12월23일 명칭을 한인기독교회로 바꾸기로 결정함으로써 이승만이 이끄는 새로운 민족교회가 탄생했다.
3.1운동 직후 한반도 안팎에서는 세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이승만은 모든 임시정부에서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하나는 1919년 3월21일 블라디보스톡에서 대한인 국민회가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이승만을 국무 및 외무총장(국무총리겸 외무장관)으로 한 노령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또하나는 1919년 4월 11일에 선포된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이 사실상의 정부수반이 되었고 4월 23일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 임시정부는 최고위직인 집정관 총재로 이승만을 뽑았다.
포항공대 고정휴교수는 첫 이승만 연구 박사학위 논문에서 그이유를 첫째는 구한말 개혁의 선구자이자 6년 동안의 옥고를 치른 정치범, 그리고 미국대통령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호소한 청년 외교가이자 미국의 철학박사라는 명망때문이고 둘째는 독립과 관련해 한국민들이 막연히 미국에 대해 갖고 있었던 기대감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승만은 워싱턴을 주 무대로 삼아 외교 독립운동을 폈다.
활동 본부였던 한국위원회는 3.1운동서부터 해방 이후까지 유지되다가 정부수립 이후에는 주미대사관으로 바뀌었다.
상하이에서는 세개의 임시정부를 하나로 통합하게되어 1919년 9월에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세워지게 되었다.
임시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추대되었다.
이때부터 한국위원회는 구미위원부(The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라고 불렀다.
이승만은 외국에는 대통령(President) 사용하고 국내용으로는 "집정관 총재"라는 호칭을 썼다.
1919년 6월 14일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등 열강정부에, 그리고 6월17일에는 파리 강화회의 의장 끌레망소에게 각각 한국에 완벽한 자율적 민주정부가 탄생했다는 것과 자신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하였다. 6월18일에 그는 일본 천황 앞으로 국서를 발송, 한반도에 적법적인 대한공화국이 수립되었으므로 일본은 당장 한반도에서 일본 군대철수와 외교관 외의 관리들을 철수 시킬 것을 촉구하였다.
이 국서는 임병직을 통해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에 전달되었다.
구미위원부는 대한민국 명의의 독립공채를 만들어 이승만과 김규식 공동명의로 공채표를 발매하여 거금을 마련하였다.
1921년까지 최소한 8만천351달러의 자금을 마련하였다.
이 자금으로 상하이 임시정부에 매달 1천달러 이상을 보내고 필라델피아 서재필과 파리의 황기환에게 보내 영문 및 불문잡지 한국평론과 자유한국, 그리고 다른 많은 독립운동 관련 저서 및 팜프레의 출판을 지원하였다.
구미위원부는 미국내 21개 도시와 런던, 파리 등 유럽의 주요 도시에 한국 친우회를 조직하고 활동을 지원하여 2만5천여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이때 미국인 헐버트 교수(Homer B Hulbert)와 백( S.A. Beck)목사 등이 위원부의 선전위원으로서 여러도시를 순방하면서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강연을 했다.
또하나의 중점사업은 의회의원들에게 접근, 상하 양원에서 한국독립 문제를 상정하여, 토론하게 하는 것이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이 현지로 부임해야한다는 압력이 거세지자 내키지는 않았으나 상하이에 가기로 결심 하였다.
일본이 그에게 3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으므로 출발은 비밀로 하고 하와이에서 친구 보스윅이 11월16일 일본을 거치지않고 상하이로 가는 배편을 구해 2등항해사를 매수하여 이승만과 임병직은 남몰래 승선시켜 밀항하게 되었다.
12월 13일 임정청사를 방문하여 각료와 직원을 접견하고 12월 28일 교민단이 베푼 환영회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1921년 1월 1일 신년 축하식을 계기로 임시대통령으로서 공무를 시작하였다.
미국에서 활약하던 임시대통령이 대정략과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을 가지고 오리라고 기대했던 상하이의 정객들은 적이 실망했다. 이들은 이승만의 3.1운동 전후에 윌슨대통령에게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 통치 하에 둘 것을 청원했던 사실 등을 들추어 내어 비난하기 시작했다. 사면초가에 처한 이승만은 시종 수동적 자세로 정국을 수습하려 했으나 여의치 못했다.
9개국이 모여 군비축소 회담을 한다는 소식에 이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위한 준비작업을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승만은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승만은 천신 만고 끝에 상하이를 떠난 뒤 한달이 지나 1921년 6월29일 호놀루루에 도착하였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이승만의 예언이 맞아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만주 침략을 규탄하기 위한 국제연맹 총회가 1933년 초에 열리게 되자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제네바로 갔다.
각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한국 독립문제를 의제로 채택해주도록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일본의 압력으로 결국 채택되지 못했다.
희망과 좌절 사이에 헤매며 분투하고 있는 동안 이승만은 제네바에서 국제 연맹 총회에서 활약할 즈음에 헌신적인 아내가 될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 도너를 1933년 초에 제네바의 호텔 식당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 여행을 마치고 비엔나로 가는 기차를 타기위해 제네바에 온 길이었다. 이승만은 식당에서 빈자리가 없자 웨이트의 도움으로 두 모녀의 양해를 얻어 합석하게 된다.
이때 이승만은 58세, 프란체스카는 33세였다. 25년 차이였다.
그후 소련에 가서 호소해보라는 일부 도움을 준 외국인들의 조언에 따라 모스코바에 갔으나 도착 하루만에 외무부 직원이 비자가 착오로 발급되었다고 하면서 즉시 떠나라고 한 일이 있었다. (후에 밝혀진 바로는 일본의 압력이 있었다고 한다).
이승만은 모스크바로 가는 도중 비엔나에 들르면서 두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고 결혼을 약속했다. 프란체스카는 정식으로 미국에 이민을 신청하여 1년 뒤 독자적으로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1934년 10월 8일 두사람은 뉴욕의 몽클레이 호텔에서 존 헤인스 홈즈 목사와 윤병구 목사의 공동주례로 결혼식을 하였다.
그들의 결합은 동지적 결합이었다. 왜냐하면 그녀 역시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한국의 독립을 위해 바쳤으니까.
그녀는 모국어가 독일인인데다 영어와 불어에 능통했으며, 속기와 타자의 특기보유자였다. 국제무대에서 활약하는 이승만의 비서로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프란체스카의 회고록 이승만대통령의 건강(2007년 도서출판 촛불)을 보면 첫 만남부터 동양의 노신사에게 매혹된 듯하다.
서툰 프랑스어로 "맛있게 드세요"라고 예의를 갖춘 동양의 노신사에게 사람을 끄는 신비한 힘이 느껴졌다고 그들의 첫 만남을 돌이켰다.
바로 다음날 제네바의 "라 트리뷴 도라앙" 신문에 이승만의 사진과 함께 인터뷰 기사가 대서특필 됐다. 프란체스카는 기사를 오려 스크랩을 한다음 이승만에게 전달했고 이승만은 감사함으로 차를 대접했다.
그후 어머니 몰래 잦은 데이트를 하였다. 사랑은 싹텄고 서신왕래가 이어졌다. 그리고 모스크바에 가는 길에 비자를 받으러 비엔나에 들린 이승만은 프란체스카와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1941년 12월에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이승만이 오래 전부터 예상해왔던 미.일 전쟁이 일어났다. 그에 따라 한국 독립의 가능성도 보이게 되었다. 임시정부의 외교부장 조소앙은 이승만을 주미외교부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승만은 그 자격으로 미국정부를 상대로 임시정부의 승인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망명객 신분으로 미국관리를 만나기 어려웠기 때문에 로버트 올리버 박사를 로비스트로 고용하였다. 로비의 목적은 상해임시정부를 미국 정부가 승인하고, 무기대여법에 따라 무기를 공급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한국독립에 관심이 많은 인사들을 규합하여 한미협의회라는 후원단체를 만들어 미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한미협의회는 1942년 3.1절을 앞두고 2월27일부터 3월1일까지 백악관 근처의 라파예트 호텔에서 '한인 자유대회'를 개최했다.
커피하원의원의 임정의 즉각 승인을 강조하는 연설과 워싱턴의 WINX방송망을 통한 실황방송으로 상당한 홍보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국무부 설득을 하는 노력 중에 이승만은 미 국무부가 임시정부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방침임을 알게 되었다.
이승만은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 를 1941년 여름 뉴욕의 유명출판사인 플레밍 H. Revell co.에서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일본 군국주의의 실체를 역사적으로 밝히고 일본이 곧 미국을 공격하게 될 것임을 경고했다. 그런지 몇달 안되어 그의 예언은 맞아 떨어졌다. 12월 7일 일본 항공모함의 함재기들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한 것이다.
책은 이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승만은 미국을 나갈 때마다 미국무부의 까다로운 절차를 받으므로 미국국적 취득을 권유 받았으나 "한국이 곧 독립될 것이므로 소용없다"는 말로 거절하여 끝까지 무국적자로 남았다.
에필로그
이승만은 해방후 40일이 지난 1945년 10월 5일에야 미국을 떠날 수가 있었다. 만70세의 나이에 뉴욕, 하와이, 괌을 거쳐 10월16일에야 조국에 발을 디뎠다.
이승만은 한반도에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최대한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중국식 군주제 전통을 이어온 이 나라에 미국식 민주공화제 정부를 수립하려 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평등사상에는 공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이 민족보다는 이데올리기를 앞세워 나라를 소련의 속국으로 만들려 한다는 판단 아래 그들을 적대시했다.
한마디로 이승만은 민족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벗어난 다른 어떤 정치노선과도 타협하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유영익교수의 저서 "이승만의 삶과 꿈"의 제1부 "이승만의 삶"의 종지부의 글을 소개한다.
"우남 이승만은 필생 염원했던 조국광복과 근대적 독립국가 수립의 꿈을 아쉽게도 한반도의 남쪽에서 만 실현했다. 그렇지만 그는 지난한 건국사업을 촌철도 빌리지 않고 필설의 힘 만으로 성취함으로써 희세의 위재임을 증명, 과시했다."
7 months ago | [YT]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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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화의새한국의비전TV
저자 안병훈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을 소개합니다.
조선시대말기와 근세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에게 특히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알고싶은 분들께 일별하시길 바랍니다. 많은 역사적인 사진들이 이해에 큰 도움을 드릴 것입니다.
저자 안병훈은 서울법대를 나와 조선일보 기자로 시작, 대표이사 부사장을 역임한 분이다.
제3부 흥국편: 이승만의 나라 일으키기
1953년 7월27일 휴전. 일년이 지난 다음해 7월26일 미국을 공식 방문하게 된다.
워싱턴에 도착 닉슨부통령의 환영을 받고 환영행사에서 15분간 즉흥 연설하였다.
"워싱턴의 겁쟁이들 때문에 한국은 통일되지 못하고 공산세력의 위세만 과시해주었다."
아이젠하워와는 의견 충돌도 있었으나 상하원 합동회의의 연설을 하였다.
33번의 박수를 받았다.
약40분간의 연설이 끝나고 이승만은 참석자들의 기립박수 속에 퇴장하였다.
그는 이틀뒤 내셔널 프레스클럽 연설을 통해 "의회에서 내 연설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내가 미국에 즉시 선전포고라도 하라고 한 걸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는 모양 입니다만, 나는 자유세계를 수호하는 원대한 정책을 미국에 제안한 것 뿐입니다" 라고 해명 하였다.
자유당은 1954년 5월20일 실시된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원내과반수를 훨씬 넘는 114석을 학보하는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개헌선에 22석이 모자라 구 자유당소속 15명과 무소속의원을 영입하여 개헌선인 136명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1954년 9월6일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 철폐 등을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10일간의 찬반 토론 끝에 표결에 들어갔다.
결과는 개헌에 필요한 재적 2/3에 단 1표가 모자랐다.
부결되었으나 사사오입 원리에 따라 개헌을 가결로 처리하므로서 국회는 아수라장이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1960년 봄 4.19가 일어났다.
3.15 선거에서 이기붕이 노골적인 부정을 저지르며 부통령에 당선되는 것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3.15 부정선거에 시민, 학생, 지식인, 언론이 들고 일어났다. 이에대해 경찰이 실탄을 발사하였다.
이 실탄사격이 항의를 혁명으로 바꿔 놓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승만은 4.19가 나자 부상자들의 병실을 찾아 "젊은이들이 분노하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니다" 라면서 위로했다.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되었어? 부정을 왜 해. 암 부정을 보고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
내가 그만두면 한사람도 안 다치겠지. 재차 김정렬 국무총리에게 물었다.
그는 대세를 파악하자 마자 즉각 사임했다. 자신의 주도로 제정한 대한민국 헌법의 '구속성'을 깨끗이 받아들인 대단원 이었다.
1960년 4월 26일은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스스로 결심한 역사적인 날이다.
11년8개월 만에 이화장으로 돌아갔다.
외무부 장관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하였다.
허정 권한대행을 만난 매카나기 주한 미대사가 프란체스카 여사께서 이박사의 건강이 좋지않아 하와이로 요양을 갔으면 좋겠다고 부탁하더라고 의논하였다. 허정은 국내에 계시면 일어날 문제들도 있을 것 등을 고려하여 동의하고 출국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5월29일 새벽 하와이로 요양차 출국하게 된다.
출국문제로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허정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허정은 이박사를 떠나 보내고 우남의 경우를 통해 사람은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 짓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말을 실감했다고 회고록에 썼다.
이 여행이 망명으로 굳어진 여행이 되었으나 여러 자료들을 볼 때 이박사는 돌아갈 것을 믿고 계셨다.
영접나온 하와이의 오중정 총영사에게 "내가 여기 좀 쉬러왔어, 한 3주일 쉬고 갈꺼야. 오 영사!" 라고 했다.이승만은 자신이 어느 결에 망명객의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1963년 국내에서는 이승만의 귀국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하였으나 혁명정부는 귀국을 막았다.
"귀국을 연기하라는 훈령이 왔다는 얘기를 듣고 눈물을 글썽이며 "모든 사람들이 나라에서 얘기하는 것을 들을 줄 알아야돼...내가 이제 살아서 남은 일은 우리나라에 가서 죽는 것 밖에 없오" 그리고 우셨다.
6월 20일 이승만이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7월18일 위에서 출혈이 심해 혈압이 급격히 떨어졌다.
1965년 7월 19일0시 35분 임종하셨다. 90세 였다.
1965년 7월21일 밤 11시 유해를 실은 특별기가 이륙하였다.
하와이에 온지 5년 2개월만에 귀국길에 올랐다.
7월27일 중구에 있는 정동교회에서 영결식을 하고 동작동 국립묘지로 모셔졌다.
그후 27년후 1992년3월23일 프란체스카 여사도 남편의 묘소에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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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안병훈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을 소개합니다.
조선시대말기와 근세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에게 특히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알고싶은 분들께 일별하시길 바랍니다. 많은 역사적인 사진들이 이해에 큰 도움을 드릴 것입니다.
저자 안병훈은 서울법대를 나와 조선일보 기자로 시작, 대표이사 부사장을 역임한 분이다.
제2부 호국편:
1950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 북한군이 기습 남침하였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을 오전 10시 30분에 만나 춘천 근교까지 밀고 내려왔다고 보고하였다.
신장관은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을 되풀이 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경찰정보로 상황이 심각하고 위급하다고 생각했다. 고재봉 비서관을 통해 예상 밖으로 힘이 강해 위급하다는 말을 듣자 잠을 잊은 채 자정을 넘겼다.
다음날 새벽 3시에 맥아더 장군께 전화를 걸었다.
"오늘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은 누구의 책임이오? 어서 한국을 구하시오"라고 무섭게 항의하였다. 그리고 바로 워싱턴의 장면 주미대사에게 전화로 지시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을 즉시 만나 이렇게 전하시오. 적은 우리 문전에 와 있다고, 미 의회가 승인하고 트루먼 대통령이 결재한 2천만달러 무기지원은 어떻게 된 것이오!"
신성모와 이기붕 서울시장, 조병옥이 와서 "서울을 떠나셔야 겠읍니다'고 하자. "안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그러나 결국 수원으로라도 피해주어야 작전하기 훨씬 쉽겠다는 말에 열차를 탔다.
대구에 오전 11시40분에 도착하였다.
대구까지 온 것을 알자. "평생 처음 판단을 잘못했어. "서울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대구에서 1시간 머무르고 열차를 서울로 돌렸다.
전쟁 초기의 다급한 상황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서의 품위를 잃지않고 국가수호를 위해 내린 조치를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 연구원은 이렇게 꼽았다.
첫째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이 세계대전의 빌미를 제공하는 장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둘째 한국민은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총력전을 펼치겠다.
셋째 금번 북한의 불법남침을 남북통일의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겠다.
이제 미소에 의해 인위적으로 그어진 38도선은 북한이 먼저 침범했기 때문에 이제 필요가 없어졌다.
넷째 이 위기를 타개하고 북진통일을 위해서는 미국과 유엔의 지원이 필요하다.
이승만의 이 걑은 판단과 조치는 전쟁 발발 후 얼마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이것을 최대로 이용해 남북통일의 발판으로 삼겠다고 발상한 국가 지도자였다.
이승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미국의 참전이었다.
유엔 안보리 이사회의 결의안 체택에 따라 미국은 해공군을 파병하고 6월 30일 지상군 파병을 결정했다. 이것은 이승만의 대미외교에 매진한 결과 트루만의 결심을 얻어내었던 것이다.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9월28일 89일만에 서울을 탈환하였다.
9월 29일 정오에 환도식이 거행되었다.
멕아더 장군의 연설후 이승만 대통령은 연설에서 "오늘의 이 감격스러운 순간을 있게 해준 맥아더 장군과 휘하의 유엔군 장병들에게 뭐라고 감사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하면서 태극무공훈장을 맥아더에게 수여하였다.
나중의 이야기이지만 이승만이 휴전에 결사반대하고 나서자 미국은 신탁통치반대 당시에 이어 두번째로 이승만 제거 계획을 수립했다.
2011년 1월19일자 중앙일보에 게재된 연세대학 박영림교수의 기고에 의하면 당시 미국측이 대안으로 떠올린 인물이 참모총장으로 승진해 있던 백선엽 장군이었다는 것이다. 백선엽이 도리어 이승만의 주장을 확고하게 뒷받침하는 바람에 미국도 애초의 계획을 단념했다고 한다.
정일권 회고록에 보면,
이승만은 "장군, 38선 돌파를 주장하는 장군의 굳은 의사를 변함없이 믿어도 되겠습니까?"
멕아더는 "물론입니다, 38선 이북을 두려워할 생각은 추호도 없읍니다 ".라고
말했다. 이승만대통령은 "그것입니다. 동해안의 한국군은 내일쯤 38선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 추적권은 한국군에 인정해주시기 바랍니다"
맥아더는 "해야지요. 하지만 이틀 정도의 여유는 있어야겠습니다".
10월1일 김일성에게 항복을 권고 할 작정입니다. 불응했기 때문에 부득히 돌파하는 수 밖에 없다는 형식을 취할 작정입니다. 워싱턴과 합의를 본 사안입니다."
이승만은 정일권 참모총장과 군수뇌부를 대통령 집무일로 불렀다.
정일권에게 넘긴 쪽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대한민국 국군은 38선을 넘어 즉시 북진하라. 1950년 9월30일 대통령 이승만."
10월19일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 국군이 미군보다 먼저 평양에 입성했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기뻐하였다.
"됐어, 됐어".
열흘후 평양 시민환영대회에 참석하여 테러의 위험을 무릅쓰고 군중 속에 들어가 군중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정일권은 노구인데 그같이 초연할 수 있는 담력이 어디 숨어 있는지 감탄할 따름이었다.
1950년 11월 6일 중공군 50만명이 참전하므로써 전세는 역전되고 후퇴를 하게된다.
한국전쟁의 휴전제의는 전쟁 발발 1년뒤 소련의 마리크 유엔대사가 제기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김일성의 남침으로 이미 제거된 38선을 또다시 재생시키는 어떠한 휴전도 반대하며 휴전협상을 개시하는 경우 실지를 회복할 때까지 단독적인 행동을 취하겠다고 성명발표하고 7월 3일 트루먼 대통렁에게 발송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백선엽 한국측 대표를 만나 "백만 중공군이 내려와 있는 마당에 휴전이 말이 되는가? 우리는 통일이 목표야, 지금 휴전하려는 것은 국토를 분단하는 것이야. 나는 절대 반대다'.
그러나 미국사람들이 저러니 안 갈 수도 없겠지. 미국사람들과 협조하는 뜻도 있으니 참석토록 하라고 하였다.
전쟁이 한창일 때인 1952년 12월 2일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 당선자가 수영비행장에 내렸을 때 한국정부 인사는 아무도 없었다.
도착일시와 장소를 비밀에 부친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자리에 있던 미 8군 사령부에 도착해 아들 존을 찾았다. 그의 외아들 존 소령이 한국전에 참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튿날 재회하고, 군사 증강보다는 휴전에 더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영연방사단, 미2사단과 한국군 수도사단 등을 시찰한 다음 한국을 떠날 예정이었다. 이승만은 시간관계로 고별인사를 못하고 떠난다는 전갈을 받자 약소국의 처량한 처지에 비감해하면서도 아이젠하워의 무례한 태도에 화가 치밀었고 메세지를 이렇게 보냈다.
"귀하가 이곳에 오지 않는다면 본인은 국무위원들을 집무실에 불러들여 직접 성명을 발표하겠다. 성명을 통해 미국대통령으로 당선된 아이젠하워 장군이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가면서 한국 국가원수에 대한 고별인사의
예의를 차리지 않고 떠난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공표할 생각이오."
공항으로 가던 아이제하워는 아연실색 차를 돌려 경무대로 갔다.
아이젠하워의 방문은 이승만에게는 중요하였다.
국민들에게 미국과 자신이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수행한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이렇게 매듭지었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을 만나고 각료를 소개받는데 카메라 기자 등 언론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방을 나오자 한국군 3군 의장대와 군악대 그리고 사진기자들이 몰려있었다"
휴전을 공약으로 내건 아이젠하워가 당선되었으나 이승만은 휴전회담 시작서부터 결사반대하였다.
당시로부터 22년이 지나 1975년 8월3일 뉴욕타임스는 새로 분류된 기밀문서에 근거를 두고 보도하였다.
"미국은 이승만 체포와 다시 미군정 하에 두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 중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기사였다."
미국은 휴전 조인을 앞두고 곤경에 빠졌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였고 이것은 미국에 큰 위협이었다.
그리고 결정타는 반공포로 석방이었다. 전세계가 놀랐다.
미국이 이승만을 달래려고 미국으로 초청했으나 "나는 못간다. 국무장관 덜레스를 보내라"고 버티었다.
미국은 국무차관 월터 로버트선을 특사로 파견했다.
그는 워싱턴에 돌아간 후 의회보고서에 "한마디로 그의 주장은 공산주의와의 싸움이다. 우리 동맹국 모두가 그의 정신을 지녔다면 세상은 덜 시끄러울 것이다" 라고 썼다.
그는 한미 상호 방위조약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였다.
이승만이 제안한 휴전 수락조건은 4가지였다.
1.한미방위조약 체결
2. 장기 경제원조및 첫조치로 2억달러 공여
3.한국군 증강계획의 지속
4. 한미고위급 회담 정례화
미국은 결국 이조건을 수락해야 했다.
휴전협정이 조인되자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가 이렇게 말했다.
"싸워서 이기기보다 평화를 얻는게 더 어려웠고 적군보다 이승만 대통령이 더 힘들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이익을 위해 우방 미국의 세계전략을 여러 번 수정하게 만들었다.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미국과의 투쟁으로 태어났고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계를 놀라게 한 반공포로 석방.
.
1953년 6월 18일 이승만은 유엔군이 관리하던 포로수용소 문을 강제로 열고 송환에 반대하는 북한군 반공포로들을 석방하라고 한국군에 명령했다.
국군은 유엔군 초병들을 감금하거나 무장해제하여 반공포로 약3만명을 풀어주었다.
이과정에서 971명이 붙잡혀 수용소로 되돌아갔고 61명이 사살되었으며, 116명이 부상하였다.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은 미국이 한국을 제치고 공산 측과 휴전에
합의본 뒤 서둘러 떠나려 한다면 한국군이 단독으로 북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승만의 도박은 한미동맹이라는 한국의 생명줄로 결실을 맺었다.
한국이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것은 실수가 아니라 침략자들과의 싸움을 무승부로 끝낼 수 없다는 이승만의 고매한 이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이대통령 지휘 하에 벌어진 이 수용소의 대탈출은 무엇이라고 할까?
자유의 대탈출이라고 할까? 그렇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를 위한 그리고 생존을 위한 일대 엑소더스였다고 이승만 대통령과 당사자들은 확신했을 것이다.
이승만의 예지와 배짱은 대한민국을 창건하고 위기에서 구해냈다.
몇 세기에도 나타나기 어려운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나라가 망한 때 하나님은 이승만을 한국에 내려보내 주셨다.(이도형 한국논단 대표) " 이승만 연구회 콜로퀴엄" 에서
1953년 가을 리처드 닉슨 부통령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서울에 왔다. 특별협상팀을 이끌고 있던 아서 딘은 닉슨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대통령의 이빨을 뽑고, 그로부터 무기를 빼앗아 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는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우리의 친구들이 상황이 나쁠 때 만 친구인 척하는 데 반해 이대통령은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진정한 친구입니다".
그때 이대통령은 78세였다. 닉슨이 관찰한 이승만은 날씬한 몸매에 걸음거리가 활달하고 악수할 때 힘도 세었다.
미대통령의 친서를 건네받고 정확한 발음으로 큰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친서에 아이젠하워는 한국이 또다른 전쟁을 시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천명한 뒤, 이승만이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요청한 내용이었다.
이승만은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주 좋은 편지입니다".라고 하고는 화제를 옮겨갔다. 일본문제, 아시아, 태평양 정세를 이야기하더니 미국정부가 한국에 원조해주는 방식을 비판했다.
닉슨은 다시 화제를 친서 쪽으로 돌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요청을 들어 주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는 사실을 솔직히 말씀드린다"고 하였다.
"나도 귀하에게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미국으로부터 받은 도움에 대해서 그리고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대해서 나는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관계로 해서 나는 미국의 정책과 맞지 않는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나는 노예상태의 북한 동포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평화적 방법으로, 하지만 필요하다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통일을 성취하는 것이 지도자로서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닉승의 거듭된 요청에도 두사람은 합의를 보지 못하고 헤어졌다.
다음날 보안을 위해 직접 타이프를 쳤다면서 두페이지 짜리 종이를 꺼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이 이승만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귀국은 가장 중요한 협상력 하나를 잃을 뿐 아니라 우리는 모든 희망을 잃을 것입니다.
내가 모종의 행동을 취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늘 공산주의자들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우리 서로 솔직합시다. 공산주의자들은 미국이 평화를 갈망하므로 그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양보도 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나는 그들이 생각이 맞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그러나 그들 공산주의자들은 내가 미국과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가진 그 불안감을 없애 줄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귀하가 도쿄에 도착할 즈음인 내일 아이젠하워 대통령께 답신을 보내겠습니다. 그 편지를 읽어보고 파기해주셨으면 합니다."
쪽지를 건네주며 보고용으로 쓰셔도 좋다고 말했다.
닉슨의 회고록에 이렇게 되어있다.
"내가 한국이 단독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부 다 미국을 도와주는 일입니다. 나는 한국이 단독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알고 있어요. 우리는 미국과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가면 모두를 얻을 것이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두를 잃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다 닉슨은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한국인의 용기와 인내심, 그리고 이승만의 힘과 지혜에 깊은 감동을 받고 떠났다. 나는 이대통령이 공산주의자를 상대할 때는 "예측 불가능성"을 유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통찰력 있는 충고를 한데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그후 더 많이 여행하고 더 많이 배움에 따라 그 노인의 현명함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언론인 조갑제의 기록)
조갑제는 이렇게 매듭을 지었다.
"최고의 반공 전략가인 닉슨이 이승만 대통령을 극찬한 것은 요사이 조국에서 잊혀진 존재가 된 이 위대한 선각자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자료가 될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서명하였으나 이승만은 그 한달전 6월25일 서울로 온 아이젠하워대통령의 특사인 로버트슨과 18일간의 회담을 하고
이승만대통령은 휴전의 운영을 저해하지 않겠다는 양보의 대가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장기간의 경제원조, 한국군 20개사단으로 증강 등 5개 항목의 약속을 문서로 받아내었다.
2006년 연세대 출판부에서 출판된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승만의 최대업적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최고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는 국가의 목표를 규정하고 국가이익을 극대화 하는 일이다. 대통령은 어떠한 경우에도 국가를 보위해야 만 하는 책임과 의무를 지닌 그야말로 막중한 직책이다.
대한민국의 생존과 안보를 책임졌던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의 임무수행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이승만은 대일 평화조약 발효일을 3개월 앞둔 1952년 1월18일 국무원 고시 14호로 평화선, 즉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선언을 발표하였다.
평화선에는 당연히 독도가 우리 영토로 포함되어 있다.
일본의 반발과 충격은 컸다. 변영태 외무부장관의 성명을 통해 한국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독도는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한 최초의 희생물이었다. 해방과 함께 독도는 다시 우리의 품안에 안겼다. 독도는 한국 독립의 상징이다. 이섬에 손을 대는 자는 모든 한민족의 완강한 저항을 각오하라. 독도는 우리겨레 영해의 닻이다. 이것을 잃고서야 어찌 독립을 지킬 수 있겠는가. 일본이 독도 탈취를 꾀하는 것은 한국에 재침략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승만은 농지개혁에 적극적이었다.
평소 농지개혁에 적극적 입장을 보였던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임명했다. 1940년대 후반 남한전체 인구의 70.9%가 농민이었고 그중 80% 이상이 소작 혹은 자소작 (자작과 소작을 겸한)농민이었다.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이승만은 6.25전쟁 발발하기 직전에 농지개혁을 단행하여 농지의 70-80%정도를 농민에게 분배하였다. 정부로부터 분배받은 농민들은 땅을 갖는 자작농이 되면서 이승만 지지기반이자 한국의 국민으로 포섭되어 갔다.
북한은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이었으나 남한은 유상몰수 유상분배로 결국 제3세계 국가 중 세번째로 잘되었다는 주장이 나올만큼 연구자들의 인식이 바뀌었다.
이승만은 1948년 15월 7일 자의 서울신문에 실린 발언을 소개하면,
"북한식 농지개혁을 할 경우 정부가 대지주가 되고 농민들은 다 소작인으로 경작하게 되어 전에는 지주의 노예가 되던 것이 이제는 정부의 노예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
이승만은 원자력에 대한 선구적인 이해와 집착으로 1959년 원자력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1956년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전기기술 대가인 워커 시슬러가 이승만에게 에너지원으로서 원자력의 무한한 가능성과 원자력 연구기관 및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었다.
이에따라 1956년 3월에 문교부 기술교육국 안에 원자력과를 설치하고 4월에 최초로 연구생 2명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58년에는 원자력법이 제정되었고 이에따라 1959년 1월 원자력원이 발족되고 산하에 원자력 연구소가 설치되었다.
35만불을 들여 시험용 원자로가 도입되어 설치공사가 시작되고 하야 후 인 1962년 3월에 가동되었다. 이승만이 씨를 뿌린 한국의 원자력 연구소는 1980년대에 이르러 독자모델의 한국형 경수로를 개발하는 결실을 맺었다.
조선일보 이하원기자는 2011년 이렇게 썼다. "400억달러의 초대형 원전공사를 따낸 배경에는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의 혜안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한해를 마감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제11차 우남 학술대회에서 전시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이렇게 요약하였다.
1.이승만은 북한의 기습남침 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했다. 국가보안법을
제정, 군내 숙군을 시작으로 남한내의 공산당의 조직활동을 봉쇄했다.
2. 전쟁이 발뱔하자 바로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 냈다. 또 국군을
유엔군과 함께 싸우게 하고 유엔이 이 전쟁을 끝까지 책임지게 하였다.
3.한반도 통일, 북진통일이라는 전쟁목표를 확고히 하고 이를통해 국권을
수호하고 국군의 전력증강을 이룩하는 한편 한미방위조약 체결이라는
숙원을 달성하였다.
4.이승만은 이러한 지도력으로 미국과 유엔군으로부터 강한 신뢰와
충성심을 얻어냈다.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전쟁중 이승만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반공지도자라고 칭송하였으며, 매슈 리지웨이 장군은 자기
국민에 대한 편애가 심했으며, 마음 속에는 애국심 밖에 없는 것으로
보였으며 이로인해 불가능한 일을 끊임없이 요구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2부 끝
7 months ago | [YT]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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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화의새한국의비전TV
저자 안병훈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을 소개합니다.
조선시대말기와 근세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에게 특히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알고싶은 분들께 일별하시길 바랍니다. 많은 역사적인 사진들이 이해에 큰 도움을 드릴 것입니다.
저자 안병훈은 서울법대를 나와 조선일보 기자로 시작, 대표이사 부사장을 역임한 분이다.
필자는 국회 부의장 재임시 프린스톤 대학교에 이승만 홀을 만들기위해 한국동창회가 모금운동을 할 때 5000달러를 기부한 적이 있다. 평소 오늘의 자유민주주의 공화국 대한민국을 건국한 그 공로 하나만으로도 이승만 대통령은 국부로 인정받고 존경 받아야 한다고 늘 생각해왔다. 초등학교 6학년때 이기붕등 당시 권력자들이 이승만 몰래 행했던 3.15부정선거로 전국이 데모로 혼란스러울 때 스스로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떠났던 당시를 기억하고 있다.
안병훈 선생의 대통령 이승만을 읽고 일부를 발췌하여 나의 유튜브에 남겨서 후배들과 후손들이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제대로 알고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4부로 나누어 기록한 이책은
제1부 건국: 이승만의 나라 세우기.
제2부 호국: 이승만의 나라 지키기,
제3부 흥국: 이승만의 나라 일으키기,
제4부 복국: 이승만의 나라 되찾기
로 구성하였다.
사료로 귀중한 수십점의 사진들과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오늘날의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어 소개하는 바 이다.
제1부 건국편:
1945년 8.15.일 일본은 마침내 패망하고 우리는 36년간의 압제에서 해방하였다. 그해 10월 16일 이승만은 맥아더 사령관의 전용기로 도쿄에서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다.
그는 다음날 기자회견을 하고 33년만의 환국 소식에 약5만명의 환영군중이 중앙청 광장에 모였다. 그는 우후죽순처럼 난립한 수많은 정당들의 대동단결을 강조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가 유행했다.
여운형의 인민공화당은 "위대한 지도자에게 충성의 감사와 만강의 환영을 바친다"는 환영담화를 발표했다. 미군정 책임자 존 하지장군은 환영연설에서 '한국의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그는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이미 일종의 '위기를 극복하기위해 '신이 내려준 인물'이 되었다(2008년.그레고리 핸더슨 지음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38선으로 남북은 나뉘게 되고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렁하게 되고 해방정국은 공산주의자가 판치게 되었다.
해방에 맨먼저 탄생한 정당은 조선공산당이었다. 해방 당일인 8월 15일과 16일에 걸쳐 서울 종로의 장안빌딩에서 일단의 공산주의자들이 모여 재경혁명자 대회를 열고 조선공산당을 결성하기로 결의했다.
건준의 주동세력들은 조선공산당의 책동에 따라 돌연 9월 6일 전국 인민대표자회의를 소집해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11일에는 이승만을 주석으로 하고 좌우익을 망라한 각료 명단을 발표하였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원봉, 조만식, 김병로 김성수 등 7인은 본인 승락도 없이 발표되었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원봉은 귀국도 안한 상태였다. 미군정청의 아놀드 군정장관은 즉각 강경하고도 모욕적인 인공 부인 성명을 발표하였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개국 외상회의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에 합의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한국인은 해방이 되었다고 즉시 독립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탁통치를 맨 먼저 반대하고 나선 인물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이미 3상회의전 열흘 전에 방송연설을 통해 소련이 한국과 한국민을 노예로 만들고자 한다고 신탁통치를 비난했다. 그는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을 모국이라 부르면서 한반도를 소련의 일부로 만들려고 한다"면서 한반도가 둘로 쪼개지고 내전을 피할 수 없게 된다고 역설하였다.
전국의 반탁시위에 동조하던 좌익들이 1946년 1월 2일 소련의 지령에 의해 신탁통치 찬성으로 갑자기 바뀌게 되고 좌우익 간의 대립이 더욱 격렬해졌다.
소련은 1946년 2월 8일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발족시키고 동시에 토지개혁 실시를 포함한 10대 강령 을 발표했다. 그후 여러과정을 거치면서 '북조선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선'이 결성되고 이 기반으로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과 신민당이 합당하여 9월 9일 북조선 노동당을 창건했다. 북조선은 이미 정부수립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10월 8일부터 10일 사이에 북조선 5도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를 열고 북한에 별개의 공산당을 만들기로 최종 결정한 서북 5도 당대회가 열렸다.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만들어지면서 김일성이 군중 앞에 처음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승만은 1946년 6월3일 호남유세중 정읍에서 인구의 2/3가 거주하는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이 발언은 국내의 모든 정파들은 물론이고 하지 군정장관도 충격을 받게되었다. 당장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좌익연합세력인 민주주의 민족전선 (약칭 민전)은 비난성명을 발표하였다. 한국민주당은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모스코바 3상회의가 완전히 실패하였으나 미국은 소련, 영국. 중국 대표와 재협의 해보려 했으나 소련측이 회의 참석을 거부함에 따라 결국 마셜 미국무장관은 그해 9월 17일에 달레스 법률고문과 오스틴 주유엔대사에게 유엔상정을 지시한다.
이승만이 도미하여 미국 조야에 호소한대로 한국문제가 유엔에 상정하게 된다. 미국은 한국의 독립문제 해결을 1947년 9월 제2차 유엔총회에 제기하여 의제로 체택하게 된다.
주요내용은 하나는 공정한 선거감시를 위해 9개국 대표로 유엔한국 임시위원단을 설치한다. 둘째는 한국 국민의 대표선출을 위하여 48년 3월1일 이전에 인구비례에 따라 보통 선거와 비밀투표 원칙에 의한 선거를 실시한다. 세째는 선거후 이들 대표자들이 가급적 빨리 국회를 소집하여 정부를 수립한다. 네째는 정부는 남북한 군정당국으로 부터 모든 권한을 이양받고 자체 국방군을 조직하여 가급적 속히 가능하면 90일 내로 점령군이 철수할 수 있도록 관계국과 협의한다는 것이었다.
1948년 1월12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은 서울에서 회합을 가졌으나 소련군 사령관과 그로미코 주유엔대표, 김일성 등이 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성명은 남북한 총선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해준 셈이었다. 위원단은 총회결의 112호를 남한에서 만 실시할 수 있는 지를 질의하였다.
남한에서 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하여야 한다는 미국결의안을 찬성 31, 반대2, 기권2로 결의하였다.
남한군정은 1948년 3월1일, 남한 단독 총선거를 1948년5월10일에 실시할 것을 발표하였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던 민족진영의 두 거두 김구, 김규식은 1948년 4월 23일 평양에서 열린 김일성의 '조선통일을 위한 3김 합의'에 참석 결과적으로 김일성의 정치적 책략에 이용만 당했다.
소련 붕괴 후 밝혀진 '한국관련 "소련 공산당 정치국 결정" 이라는 문서에 의하면 평양 남북협상 회의는 평양의 소련군 사령부가 건의해 1948년 4월12일 소련공산당이 승인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국가건설이 시작되었다.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였는 데 대한민국이 재산, 성별, 종교, 지역 등의 차별을 넘어 동일한 참정권을 일거에 쟁취했다늗 것은 실로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보통선거의 확립은 우리나라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제도화를 이룩한 역사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1948년 7월 12일 헌법이 제정되고, 7월17일 공포되었다. 그리고 20일에는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1948년 8 15일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부수립을 내외에 널리 선포하였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로서 민주공화국으로 성립되었다. 당시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중시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노선을 주장하는 사람도 많았다.
건국이후 긴역사가 흐른 오늘날, 어떤 선택이 정당했는가를 판정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난 60년간의 세계사는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보장해주고 그것을 국가체제의 기본원리로 채택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가 인간의 물질적 복지와 정신적 행복을 증진하는 올바른 방향이었슴을 보여주었다.
계급, 당, 국가를 우선하는 전체주의적 관료제적 지배 체제 하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정신과 창의성은 억압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모두가 빈곤해지고 말았다.
이승만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두가지의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하나는 남북협상파인 김구와 김규식의 비협력이다. 이들은 5.10 총선거를 보이콧 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 절대다수가 참여하여 만든 대한민국 정부를 해체하라고 주장하였다.
또다른 도전은 국내 좌파세력의 반정부 투쟁이었다.
남로당은 5월 총선직후부터 총선무효와 단독정부 반대, 미군철수,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면서 격렬한 정부 전복 투쟁을 벌였다. 5.10선거를 방해하기위해 일어난 제주 4.3사건은 정부수립 후에도 진정되지 않았다. 다수의 세력이 한라산으로 들어가 항전을 계속하였다.
2개월 후인 그해 10월 20일에는 4.3사건 토벌작전을 명령받고 제주로 출동하려던 여수. 순천지구의 14연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어서 11월2일부터 이듬해 1월30일 사이에는 대구지방에서도 제6연대의 3차에 걸친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국군 내부에는 공산 프락치가 침투해 이들이 남로당의 지령을 받고 반국가 반란을 꾸민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이와 동시에 특수부대를 남쪽에 보내 공공연하게 대한민국 붕괴작전을 폈다. 남한의 빨치산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인민유격대의 이재호부대, 김달삼 남도부 부대, 이현상 부대의 공세와 이를 저지하려는 정부와의 총격 속에서 많은 무고한 양민이 희생되었다.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우리 현대사에서 1910년 이후 진정한 전환점이 있다면 그것은 1945년 해방에서 1948년 헌법제정과 정부수립 선포로 이어진 전 과정을 포함하는 대한민국 건국이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혁명이었고 프랑스혁명이나 미국의 혁명과 마찬가지로 성공한 혁명이었다"
대한민국형적 의미는 최소한 삼중적이었다.
첫째는 독립국가로 재탄생하여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 주권국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두번째는 우리가 나라의 주인인 국민으로 승격했으며 바로 그 국민을 자유롭고 평등한 주인으로 인정하는 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는 사실이다.
세번째는 그러한 공화국이 채택한 국가이상과 이념이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최고 가치로 하고 재산권을 존중하는 자유민주주의 였다는 점이다.
7 months ago | [YT]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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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분석가 김용섭이 쓴 책 <라이프 트렌드 2025 : 조용한 사람들>을 소개한다 - 3편
제12장 AI at Work와 AI 스트레스
일하는 방식이 바뀌면 인재상, 채용과 교육, 부동산 시장이 다 바뀐다. 이것은 당신의 삶을 바꾸고, 당신의 비즈니스 기회를 만들어 줄 가장 중요하고 가장 거대한 트렌드 이슈이다. AI를 비롯한 기술 진화가 초래한 산업 변화, 경제 변화는 일하는 방식을 바꾼다. 대표적인 것이 '하이브리드 워크와 AI at Work'이다. 생산성이 더 높고 효율적이므로 일하는 방식이 바뀌는 것이다.
AI at Work는 2025년 당신의 삶을 바꾸고, 당신의 비즈니스 기회를 만들어줄 거대한 트렌드 이슈이다. AI at Work에서 어떤 작업이 대체되고 어떤 작업이 살아남을 지, 채용과 인사에서 작업 중심 채용이 증가하면 어떤 변화가 생길지 우리는 계속 지켜봐야 한다. 과거의 직업관, 직장관으로 미래의 직업. 고용 변화를 바라보면 안된다.
팬데믹이 '하이브리드 워크' 확산에 결정적 계기였지만 펜데믹이 끝나도 공실율은 더 상승했다.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일하는 방식의 변화다. 이제 하이브리드 워크는 트렌드가 아니라 문화다. AI열풍이 촉발한 'AI at Work'로 생산성이 높아지고 업무 인력이 줄어든 것도 사무실 공간을 줄일 또 다른 이유가 된다.
2024년 한국 기업에서도 구조조정이 본격화 되고 있고, 조직 문화의 변화, 평가와 보상 방식의 변화와 함께 하이브리드 워크와 AI at Work 도 계속 대두되고 있다. 한국의 오피스 공실률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고, 상권의 변화와 위기에도 대비해야 한다.
ABS (자동 볼 스트라이크 시스템), 야구에서 자동 투구 판정기계가 도입된 후 볼-스트라이크 판정에 불만을 제기하는 베테랑들이 많아졌다. 그들이 누리던 혜택이 없어진 것이다. 아무래도 심판은 그간 베테랑들에게 더 유리한 판정은 내린 것이다. AI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다른 분야를 보자. 법 적용 에서도 판사, 검사, 변호가 누구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그러니 전관 예우가 있고 유명 로펌이나 변호사가 막대한 힘을 가지고 검사는 권력을 휘두른다.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공정성과 투명성을 요구한다. 로봇과 AI가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AI at Work는 조직 내 평가와 보상에서 투명성과 공정성을 더 강화할 것이며 신상필벌도 더 현실화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다. 인간이 가진 비효율과 비합리를 걷어 내는 일에 로봇과 AI는 많은 역할을 할 것이다.
이제 진짜 증강인류의 시대가 열렸다. 증강인류란 2010년 구글 CEO 에릭 슈밋이 처음 사용한 말인데 "인터넷 네트워크에 연결된 기기가 그냥 작동하고, 사용자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자동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라 하고 이를 증강인류라고 했다. 2023년을 거치면서 2010년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이야기했던 증강인류가 이제 스마트폰+AI를 기반으로 현실로 구현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인류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 언어의 장벽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 언어 장벽이 사라진다는 것은 인간과 기계사이의 소통과 교감도 완볙히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증강인류는 인간의 지적인 능력뿐 아니라, 신체적 능력, 사회적 능력까지 모두 키워준다. 이미 현실화 되었고 갈수록 더 당연해지는 일이다. 증강인류는 사람이 소통하는 방식, 사람끼리 어울리는 방식, 지식을 쌓는 방식, 일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고, 의식주를 비롯한 삶의 태도, 가치관과 세계관 등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2025년, 현실이 된 증강인류의 시대에 우리가 가지는 욕망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소비 트렌드와 라이프 트렌드, 비즈니스 트렌드에서 가장 강력한 변수를 오늘날 우리는 만나고 있다.
출처: <라이프 트렌드 2025 : 조용한 사람들>, 김용섭, 도서출판 부키
7 months ago | [YT]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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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화의새한국의비전TV
트렌드 분석가 김용섭이 쓴 책 <라이프 트렌드 2025 : 조용한 사람들>을 소개한다 - 2편
제 2장 텍스트 힙과 모형책의 묘한 관계
독서열풍을 주도하는 Z세대, 그리고 책의 변신. 텍스트 힙은 글자를 뜻하는 텍스트에 Hip을 붙여 책 읽는 것이 멋있다는 의미로 쓴다. 국제불명이며 한국에서 만들어 우리끼리 만 쓰는 말이다. 텍스트 힙의 중심 세력은 20대 여성이다. 세대로는 Z세대이다.
책은 사지 않지만 모형 책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도서관은 가지 않지만 도서관 같은 쇼핑몰을 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책을 읽지 않아도 굿즈처럼 사는 사람도 생겨났다. 독서보다 독서모임을 통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런 현상 모두가 사실은 책의 종말이 아니라 책의 새로운 기회일 수도 있다.
제3장 Solopreneur, 역사상 가장 강력한 개인의 시대
Solopreneur는 Solo와 기업가 뜻인 Entrepreneur의 합성어이다. 즉 1인 기업가다. 결정적 이유는 생성형 AI 열풍이 만들어낸 증강인류(과학기술의 힘을 활용해 지적. 신체적. 정서적 능력이 크게 향상된 인간) 때문이다. 혼자서도 충분히 기업적 가치를 가지며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포브스에서 흥미로운 기사가 나왔는데 소프트웨어 개발자이자 칼럼리스트 Aytekin Tank가 쓴 "지금이 솔로프러너가 되기 가장 좋은 시기이다" 다. 그는 2023년에 바 업무를 자동화하라는 책을 발간하였는데 이 책의 부제가 '더 적게 일하고, 더 많이 달성하고 중요한 일을 위해 두뇌를 절약하라'다. AI도구와 업무 생산성 도구로 문제를 해결하고 혼자 일하기 수월한 환경을 구축한다면 어떨까? 당신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은 던져보아라.
프리 에이전트보다 솔로프러너가 더 방향성이 맞다. 사교육의 중심이 입시 위주에서 직업 및 직무 능력 위주로 전환될 가능성도 있다. 한번 배운 것은 평생 써먹는 시대가 아니라, 계속 새로운 것을 배워야 계속 일하고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1인이지만 대규모 조직을 가진 기업과 같은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1인 기업의 새로운 진화가 가시화되고 있다. 유튜브가 방송 산업을 바꾸고 콘텐츠 분야의 솔로프리너를 양산한 것처럼 생성형 AI로 인해 음악, 영화 등의 분야에서 솔로프리너의 양산이 예상된다. 음악 작곡뿐아니라 영화 제작에서도 생성형 AI로 놀라운 영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누구나 자본 없이도 생성형 AI를 활용해 전쟁 영화, SF영화까지 만들어 낼 수 있다.
바야흐로 1인 매체, 그것도 지역 소도시 기반의 인터넷 매체가 특종보도를 하여 사회젹 큰 반향을 일으키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로컬은 앞으로도 중요할 것이고, 오프라인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1인 매체도 얼마든지 자신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는 시대다. 이제 혼자서도 언론 매체로서, 기업으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전문성을 갖추는 것 만큼이나 기술도구를 효과적으로 활용해 멀티 플레이어가 되는 것이 필수다.
제4장 자발적 고립주의자들의 시대
최근 들어 자발적 고립주의들의 대표격인 쇼펜하우어 열풍이 우리 사회에 거세게 몰아쳤다. 1인가구와 비혼주의자의 증가, 극단적 개인주의의 만연은 더욱더 강력한 흐름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2025년 외로움과 고립에 대한 더 진전된 욕망, 더 진화한 사회상은 우리에게 어떤 변화와 기회를 가져다줄까? 갈수록 1인 가구와 비혼주의자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고 개인주의가 주류인 시대가 되었다. 더이상 우리는 함께 어울려 일하고,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을 당연시 하지 않는다.
19세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중에 한사람으로 철학, 문학, 예술, 과학등 여러분야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 쇼펜하우어 이다. 평생 고독한 철학자로 살아간 그는 내향적인 사람, 자발적 고립주의자 였다. 헤르만 헤세, 프란츠 카프카, 앙드레 지드, 톨스토이, 안톤 체홉, 모파상, 카를 융, 찰스 다윈, 조지 버나드 쇼 등 셀 수 없이 많은 철학자, 작가, 음악가들이 쇼펜하우어를 탐구하고,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슴을 고백하였다. 심지어 프리드리히 니체도 쇼펜하우어 때문에 자기도 철학을 하였다고 했다.
2023년 9월에 출판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는 출간 7개월만에 60만 부를 넘겼다. 사람과의 관계를 기피하며 자발적 고립에 빠져드는 이들이 늘어났고 메신저로는 대화하지만 전화통화는 기피하는 콜 포비아도 확산되었으며 현실에서 도피해 쇼트나 유튜브 영상중독에 빠지는 이들도 늘어났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 이라는 입장이다. "인생은 혼자다. 혼자서도 단단해질 줄 알아야 한다"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사르트르는 "우리는 타인들이 우리를 판단하는 잣대로 우리 자신을 판단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살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타인들의 판단과 평가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결국 타인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문제인 것이다.
어쩌면 타인과 비교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은 한국인일지 모른다. 경제력에 있어서는 분명 세계에서 상위권일 정도로 풍요로운데 OECD 국가 중 자살률은 최상위권이고 행복지수는 최하위권이다. 실존주의는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상이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철학을 실존주의라고 명명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타인 자체가 지옥이 아니라 타인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지옥을 만든다. 그러니 "타인은 소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타인의 긍정적인 말은 기분좋게 들으면 되고 부정적인 말은 소음이라 여기고 무시하면 된다. 부정적인 말과 진심 어린 조언은 다르다. 내가 조언을 요청했을 때가 아니면 상대의 말은 다 쓸데없는 오지랖이나 오만한 참견과 잔소리에 불과하다.
어떻게 타인의 소음을 통제할 것인가?
한국에서도 마음챙김, 명상이 트렌드가 되었고, 자신의 중심을 잡고 자신의 소리를 듣고자 하는 이들이 늘었다. 철학열풍은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왜 한국인은 행복하지 않을까? 타인과의 비교때문일까?
글로벌 조사기관 입소스의 세계행복 2024에 따르면 30개국의 평균은 "행복하다 71% vs 불행하다 29%인데 반해 한국은 48% 대 52%이다. 추세를 보면 더 놀랍다. 2011년에는 71%가 행복하다 였다. 12년 간 한국인의 행복이 크게 줄어든 셈이다. 일본과 한국이 비슷하게 늘 최하위권이다. 두 나라는 경쟁이 치열하고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며 히키코모리 (은둔형 외톨이)가 사회 문제라는 공통점이 있다. 미혼율도 계속 높아지고 출산율도 OECD 최하위권이다. 세대갈등 이슈가 계속 제기되는 공통점도 있다.
행복지수는 GDP와 기대 수명, 사회적 지지, 자유, 부정부패, 관용 등 6개 항목으로 행복지수를 산출한다. 한국은 2012년 첫 보고서 때 56위, 계속 50-60위권이다. OECD 국가중 늘 최하위권이다. 돈도 문제지만 타인과의 비교가 근본 배경에 큰 요인으로 짐작케한다.
자연인 또는 은둔형 외톨이가 이유가 무엇이든 계속 늘어나고 있다. 최소 6개월 이상 집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일본서는 히키코모리 라는 은둔형 외톨이 이다. 2023년 12월 보건복지부 발표에 따르면 19-34세, 은둔형 외톨이 청년은 54만명 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청년 은둔형 외톨이가 가장 많은 지역이 서울이며 1인 가구 비율이 가장 높은 곳도 서울이다. 일본의 경우는 일본 정부 추산 히키코모리는 약 146만명, 그 중 40대가 40% , 60세 이상이 25%이다. 경쟁에 대한 압박감도 크고, 학벌주의, 타인과의 비교도 일본과 한국이 심한 편이다. 성적 부진과 학업 스트레스. 진학과 취업 실패 등 문제로 1020세대에 시작된 은둔형 외톨이가 3040세대를 지나 5060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은둔형 외톨이는 자립적 고립처럼 보여도 엄밀히 말하면 사회의 구조적 문제 때문에 도태되고 고립된 것이다. 자립적 고립은 필요하면 다시 사회로 나가는 경우를 말한다.
방송의 나는 자연인이다와 나혼자 산다 프로가 6-8%의 높은 시청률과 10년 이상 롱런하고 있다. 자립적 고립이 일시적 관심, 반짝 유행이 아니라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이자 보편적 문화 트렌드가 된 셈이다.
이미 유럽은 결혼은 비주류가 되고 동거가 결혼을 대체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1980년 40만 건이던 혼인 횟수가 2023년 19만 건으로 반토막 났다. 최근 3년간은 비슷하다. 1인 가구도 1980년 4.8%였는데 2023년에는 35.5% 였다. 혼자 사는 1인 가구가 천만 명을 넘어섰다.
1인가구와 자발적 고립과 느슨한 연대는 긴밀히 연결되는 화두다. 우리사회는 집단주의가 강한 사회로 학연,지연. 혈연이 강하던 사회였는데 갈수록 자기의 의지와 무관하게 연결된 혈연, 학연, 지연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인맥은 단순히 아는 사이가 아니라 이해관계가 얽히고 투명성과 공정성을 해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집단주의가 퇴조되고 개인주의가 부각되면서 인맥의 힘도, 인맥을 활용한 불공정, 불투명도 줄어든다. 2030 세대 직장인은 연차와 나이가 아니라 능력과 성과에 따른 보상을 요구하며, 이것이 한국 기업에서 세대 갈등, 조직 문화 이슈의 중요 배경 중 하나가 된다.
서로 연결로 인한 장점은 일부 취하되 그런 연결이 주는 부담스러움 이나 복잡함은 덜어내겠다는 느슨한 관계를 만들어 내었다. 개인주의 관점에서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태도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결혼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다. 결혼관이 바뀌면 가족관이 바뀌고 출생과 자녀에 대한 태도도 바뀔 수 있다. 이 변화는 유럽이 먼저 겪었고 미국도 겪었고 어느새 우리도 겪고 있다.
느슨한 연대는 궁극적으로 패러다임을 넘어 문화로 자리 잡은 만큼 2025년에도 우리는 계속 느슨한 연대가 미칠 영향에 종속해야 한다.
출처: <라이프 트렌드 2025 : 조용한 사람들>, 김용섭, 도서출판 부키
7 months ago | [YT]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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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화의새한국의비전TV
구독자 여러분! 행복한 설명절 보내길 기원합니다.
2025년 설을 맞아 김용섭 트렌드 분석가의 책을 읽고 서평을 남깁니다.
세상의 변화에 관심이 있거나 비지니스에 도움을 받고자 하면 "조용한 사람"들이란 부재가 붙어 있는 이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2편
Solopreneur는 Solo와 기업가 뜻인 Entrepreneur의 합성어이다.
즉 1인 기업가다.
결정적 이유는 생성형 AI 열풍이 만들어낸 증강인류(과학기술의 힘을 활용해 지적. 신체적. 정서적 능력이 크게 향상된 인간) 때문이다.
혼자서도 충분히 기업적 가치를 가지며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포브스에서 흥미로운 기사가 나왔는데 소프트웨어 개발자이자 칼럼리스트 Aytekin Tank가 쓴 "지금이 솔로프러너가 되기 가장 좋은 시기이다" 다.
그는 .2023년에 바 업무를 자동화하라는 책을 발간하였는 데 이책의 부제가 '더 적게 일하고, 더 많이 달성하고 중요한 일을 위해 두뇌를 절약하라'다.
AI도구와 업무 생산성 도구로 문제를 해결하고 혼자 일하기 수월한 환경을 구축한다면 어떨까? 당신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아라.
프리 에이전트보다 솔로 프러너가 더 방향성이 맞다.
사교육의 중심이 입시위주에서 직업및 직무 능력 위주로 전환될 가능성도 있다. 한번 배운 것은 평생 써먹는 시대가 아니라, 계속 새로운 것을 배워야 계속 일하고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1인이지만 대규모 조직을 가진 기업과 같은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1인 기업의 새로운 진화가 가시화되고 있다.
10.
19세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중에 한사람으로 철학, 문학, 예술, 과학등 여러분야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 쇼펜하우어 이다.
평생 고독한 철학자로 살아간 그는 내향적인 사람, 자발적 고립주의자 였다.
헤르만 헤세, 프란츠 카프카, 앙드레 지드, 톨스토이, 안톤 체홉, 모파상, 카를 융, 찰스 다윈, 조지 버나드 쇼 등 셀 수 없이 많은 철학자, 작가, 음악가들이 쇼펜하우어를 탐구하고,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슴을 고백하였다. 심지어 프리드리히 니체도 쇼펜하우어 때문에 자기도 철학을 하였다고 했다.
2023년 9월에 출판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는 출간 7개월만에 60만 부를 넘겼다.
사람과의 관계를 기피하며 자발적 고립에 빠져드는 이들이 늘어났고 메신저로는 대화하지만 전화통화는 기피하는 콜 포비아도 확산되었으며 현실에서 도피해 쇼트나 유튜브 영상중독에 빠지는 이들도 늘어났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 이라는 입장이다.
"인생은 혼자다. 혼자서도 단단해질 줄 알아야 한다"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사르트르는 "우리는 타인들이 우리를 판단하는 잣대로 우리자신을 판단한다....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살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타인들의 판단과 평가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결국 타인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문제인 것이다.
어쩌면 타인과 비교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은 한국인일지 모른다.
경제력에 있어서는 분명 세계에서 상위권일 정도로 풍요로운데 OECD 국가 중 자살률은 최상위권이고 행복지수는 최하위권이다.
실존주의는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상이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철학을 실존주의라고 명명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타인 자체가 지옥이 아니라 타인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지옥을 만든다. 그러니 "타인은 소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타인의 긍정적인 말은 기분좋게 들으면 되고 부정적인 말은 소음이라 여기고 무시하면 된다.
부정적인 말과 진심어린 조언은 다르다. 내가 조언을 요청했을 때가 이니면 상대의 말은 다 쓸데없는 오지랖이나 오만한 참견과 잔소리에 불과하다.
어떻게 타인의 소음을 통제할 것인가?
한국에서도 마음챙김, 명상이 트렌드가 되었고, 자신의 중심을 잡고 자신의 소리를 듣고자 하는 이들이 늘었다. 철학열풍은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11.
왜 한국인은 행복하지 않을까? 타인과의 비교때문일까?
글로벌 조사기관 입소스의 세계행복 2024에 따르면 30개국의 평균은 "행복하다 71% vs 불행하다 29%인데 반해 한국은 48% 대 52%이다.
추세를 보면 더 놀랍다.
2011년에는 71%가 행복하다 였다. 12년간 한국인의 행복이 크게 줄어든 셈이다. 일본과 한국이 비슷하게 늘 최하위권이다.
두나라는 경쟁이 치열하고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며 히키코모리 (은둔형 외톨이)가 사회 문제라는 공통점이 있다. 미혼율도 계속 높아지고 출산율도 OECD 최하위권이다. 세대갈등 이슈가 계속 제기되는 공통점도 있다.
행복지수는 GDP와 기대수명, 사회적 지지, 자유, 부정부패, 관용등 6개항목으로 행복지수를 산출한다.
한국은 2012년 첫 보고서 때 56위, 계속 50-60위권이다.
OECD 국가중 늘 최하위권이다.
돈도 문제지만 타인과의 비교가 근본 배경에 큰 요인으로 짐작케한다.
자연인 또는 은둔형 외톨이의 이유가 무엇이든 계속 늘어나고 있다.
최소 6개월 이상 집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일본서는 히키코모리 라는 은둔형 외톨이 이다.
2023년 12월 보건복지부 발표에 따르면 19-34세, 은둔형 외톨이 청년은 54만명 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청년 은둔형 외톨이가 가장 많은 지역이 서울이며 1인가구 비율이 가장 높은 곳도 서울이다.
일본의 경우는 일본 정부 추산 히키코모리는 약 146만명, 그중 40대가 40% , 60세 이상이 25%이다.
경쟁에 대한 압박감도 크고, 학벌주의, 타인과의 비교도 일본과 한국이 심한 편이다. 성적부진과 학업스트레스. 진학과 취업 실패등 문제로 1020세대에 시작된 은둔형 외톨이가 3040세대를 지나 5060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은둔형 외톨이는 자립적 고립처럼 보여도 엄밀히 말하면 사회의 구조적 문제 때문에 도태되고 고립된 것이다.
자립적 고립은 필요하면 다시 사회로 나가는 경우를 말한다.
방송의 "나는 자연인이다와 나혼자 산다" 프로가 6-8%의 높은 시청률과 10년이상 롱런하고 있다. 자립적 고립이 일시적 관심, 반짝 유행이 아니라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이자 보편적 문화트렌드가 된 셈이다.
12.
소제목이다.
"2030년이면 결혼 제도가 사라지고 90%가 동거로 바뀔 것이다"
1998년 세계적 미래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자크 아날리의 "21세기 사전" 에 나오는 말이다.
이미 유럽은 결혼은 비주류가 되고 동거가 결혼을 대체하는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는 1980년 40만 건이던 혼인회수가 2023년 19만 건으로 반토막 났다.
최근 3년간은 비슷하다.
1인가구도 1980년 4.8%였는데 2023년에는 35.5% 였다.
혼자사는 1인가구가 천만명을 넘어섰다.
1인가구와 자발적 고립과 느슨한 연대는 긴밀히 연결되는 화두다.
우리사회는 집단주의가 강한 사회로 학연, 지연. 혈연이 강하던 사회였는데 갈수록 자기의 의지와 무관하게 연결된 혈연, 학연, 지연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인맥은 단순히 아는 사이가 아니라 이해관계가 얽히고 투명성과 공정성을 해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집단주의가 퇴조되고 개인주의가 부각되면서 인맥의 힘도, 인맥을 활용한 불공정, 불투명도 줄어든다.
2030 세대 직장인은 연차와 나이가 아니라 능력과 성과에 따른 보상을 요구하며, 이것이 한국 기업에서 세대갈등, 조직문화 이슈의 중요 배경 중 하나가 된다.
서로 연결로 인한 장점은 일부 취하되 그런 연결이 주는 부담스러움이나 복잡함은 덜어내겠다는 느슨한 관계를 만들어 내었다. 개인주의 관점에서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태도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결혼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다. 결혼관이 바뀌면 가족관이 바뀌고 출생과 자녀에 대한 태도도 바뀔 수 있다. 이변화는 유럽이 먼저 겪었고 미국도 겪었고 어느새 우리도 겪고 있다.
여러분은 이런 변화를 감지하고 있는가요?
13.
최근 우리나라도 비만이 차츰 사회적 문제가 되고있다. 요요현상으로 다이어트도 작심 3일이 되기 십상이다. 미국의 병원에서는 비만환자가 많아 병동에 환자를 들어 옮길 수 있는 기구가 필수품이고 건장한 근육질의 가호조무사가 필요할 지경이 되었다.
한마디로 비만은 질병이고 만병의 근원이다.
운동과 다이어트로도 쉽지않다.
그런데 비만환자들에게 복음이 내렸다.비만치료제의 출연으로 성공한 다이어트 비법이 생긴 것이다.
위고비 주사로 14kg을 뺐다는 얼론 머스크, 위고비 도움으로 40kg뺐다는 오프라 윈프리 등 단기간에 다이어트에 성공한 유명인들이 많다.
비만치료제 신약들이 가장 먼저 팔리는 미국을 비롯해, 비만 치료제 시장이 전 세계의약품 시장부터 패션과 뷰티 운동, 식품관련 산업, 사람들의 욕망까지 모두 흔들고 있다.
과연 한국은 어떻게 될까?
2023년 4월 위고비는 한국 식의약품안전처로 부터 국내 품목 허가를 받았지만 , 글로벌 공급 부족을 이유로 아직 국내 출시는 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젭바운드(마운자로의 상품명)도 당뇨약인데 비만약으로 확대 허가 받았다.
위고비는 한달 처방가격이 1350달러, 젭바운드는 1060달러이다.
한국도 2024-2025년 관심이 증폭될 것이다.
위고비는 심혈관질환으로 인한 심장마비, 뇌졸중 위험성 낮추는데 사용된다.
결정적으로 비만을 잡으면 수명이 길어진다. 비만을 해결하면 심혈관 질환, 만성 신장 질환까지 해결된다.
필자의 생각에는 노인인구가 늘어나는 고령화 시대에 건보재정에도 도움이 될것으로 생각한다.
비만 치료제 열풍은 한국에서도 곧 시작될 것이고, 점점더 커질 전망이다.
14.
이책의 말미에 아주 중요한 파트로 AI at Work와 AI 스트레스에 대한 전망이다.
일하는 방식이 바뀌면 인재상, 채용과 교육, 부동산 시장이 다 바뀐다.
이것은 당신의 삶을 바꾸고, 당신의 비즈니스 기회를 만들어 줄 가장 중요하고 가장 거대한 트렌드 이슈이다.
AI를 비롯한 기술진화가 초래한 산업변화, 경제 변화는 일하는 방식을 바꾼다. 대표적인 것이 '하이브리드 워크와 AI at Work'이다. 생산성이 더높고 효율적이므로 일하는 방식이 바뀌는 것이다.
AI at Work는 2025년 당신의 삶을 바꾸고, 당신의 비즈니스 기회를 만들어줄 거대한 트렌드 이슈이다.
AI at Work에서 어떤 작업이 대체되고 어떤 작업이 살아남을 지, 채용과 인사에서 작업 중심 채용이 증가하면 어떤 변화가 생길지 우리는 계속 지켜봐야한다.
과거의 직업관, 직장관으로 미래의 직업. 고용 변화를 바라보면 안된다.
팬데믹이 '하이브리드 워크' 확산에 결정적 계기였지만 펜데믹이 끝나도 공실율은 더 상승했다.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일하는 방식의 변화다.
이제 하이브리드 워크는 트렌드가 아니라 문회다. AI열풍이 촉발한 'AI at Work'로 생산성이 높아지고 업무 인력이 줄어든 것도 사무실 공간을 줄일 또 다른 이유가 된다.
2024년 한국 기업에서도 구조조정이 본격화 되고 있고, 조직문화의 변화, 평가와 보상방식의 변화와 함께 하이브리드 워크와 AI at Work 도 계속 대두되고 있다. 한국의 오피스 공실률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고, 상권의 변화와 위기에도 대비해야 한다.
ABS (자동 볼 스트라이크 시스템), 야구에서 자동 투구 판정기계가 도입된 후 볼-스트라이크 판정에 불만을 제기하는 베테랑들이 많아졌다. 그들이 누리던 혜택이 없어진 것이다. 아무래도 심판은 그간 베테랑들에게 더 유리한 판정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AI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다른분야를 보자. 법 적용 에서도 판사, 검사, 변호가 누구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그러니 전관예우가 있고 유명 로펌이나 변호사가 막대한 힘을 가지고 검사는 권력을 휘두른다.
우리사회는 점점 더 공정성과 투명성을 요구한다. 로봇과 AI가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AI at Work는 조직내 평가와 보상에서 투명성과 공정성을 더 강화할 것이며 신상필벌도 더 현실화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인간이 가진 비효율과 비합리를 걷어 내는 일에 로봇과 AI는 많은 역할을 할것이다.
이제 진짜 증강인류의 시대가 열렸다.
증강인류란 2010년 구글 CEO 에릭 슈밋이 처음 사용한 말인데 "인터넷 네트워크에 연결된 기기가 그냥 작동하고, 사용자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자동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라 하고 이를 증강인류라고 했다.
2023년을 거치면서 2010년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이야기했던 증강인류가 이제 스마트폰+AI를 기반으로 현실로 구현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인류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 언어의 장벽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 언어 장벽이 사라진다는 것은 인간과 기계사이의 소통과 교감도 완볙히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증강인류는 인간의 지적인 능력뿐 아니라, 신체적 능력, 사회적 능력까지 모두 키워준다. 이미 현실화 되었고 갈수록 더 당연해지는 일이다.
증강인류는 사람이 소통하는 방식, 사람끼리 어울리는 방식, 지식을 쌓는 방식, 일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고, 의식주를 비롯한 삶의 태도, 가치관과 세계관 등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2025년, 현실이 된 증강인류의 시대에 우리가 가지는 욕망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소비 트렌드와 라이프 트렌드, 비즈니스 트렌드에서 가장 강력한 변수를 오늘날 우리는 만나고 있다.
이책의 내용들이 시대의 변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리라 생각한다.
끝 2025.
7 months ago | [YT]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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