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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안병훈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을 소개합니다.
조선시대말기와 근세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에게 특히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알고싶은 분들께 일별하시길 바랍니다. 많은 역사적인 사진들이 이해에 큰 도움을 드릴 것입니다.
저자 안병훈은 서울법대를 나와 조선일보 기자로 시작, 대표이사 부사장을 역임한 분이다.

제3부 흥국편: 이승만의 나라 일으키기

1953년 7월27일 휴전. 일년이 지난 다음해 7월26일 미국을 공식 방문하게 된다.
워싱턴에 도착 닉슨부통령의 환영을 받고 환영행사에서 15분간 즉흥 연설하였다.
"워싱턴의 겁쟁이들 때문에 한국은 통일되지 못하고 공산세력의 위세만 과시해주었다."
아이젠하워와는 의견 충돌도 있었으나 상하원 합동회의의 연설을 하였다.
33번의 박수를 받았다.
약40분간의 연설이 끝나고 이승만은 참석자들의 기립박수 속에 퇴장하였다.
그는 이틀뒤 내셔널 프레스클럽 연설을 통해 "의회에서 내 연설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내가 미국에 즉시 선전포고라도 하라고 한 걸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는 모양 입니다만, 나는 자유세계를 수호하는 원대한 정책을 미국에 제안한 것 뿐입니다" 라고 해명 하였다.

자유당은 1954년 5월20일 실시된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원내과반수를 훨씬 넘는 114석을 학보하는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개헌선에 22석이 모자라 구 자유당소속 15명과 무소속의원을 영입하여 개헌선인 136명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1954년 9월6일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 철폐 등을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10일간의 찬반 토론 끝에 표결에 들어갔다.
결과는 개헌에 필요한 재적 2/3에 단 1표가 모자랐다.
부결되었으나 사사오입 원리에 따라 개헌을 가결로 처리하므로서 국회는 아수라장이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1960년 봄 4.19가 일어났다.
3.15 선거에서 이기붕이 노골적인 부정을 저지르며 부통령에 당선되는 것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3.15 부정선거에 시민, 학생, 지식인, 언론이 들고 일어났다. 이에대해 경찰이 실탄을 발사하였다.
이 실탄사격이 항의를 혁명으로 바꿔 놓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승만은 4.19가 나자 부상자들의 병실을 찾아 "젊은이들이 분노하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니다" 라면서 위로했다.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되었어? 부정을 왜 해. 암 부정을 보고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
내가 그만두면 한사람도 안 다치겠지. 재차 김정렬 국무총리에게 물었다.
그는 대세를 파악하자 마자 즉각 사임했다. 자신의 주도로 제정한 대한민국 헌법의 '구속성'을 깨끗이 받아들인 대단원 이었다.
1960년 4월 26일은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스스로 결심한 역사적인 날이다.

11년8개월 만에 이화장으로 돌아갔다.
외무부 장관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하였다.
허정 권한대행을 만난 매카나기 주한 미대사가 프란체스카 여사께서 이박사의 건강이 좋지않아 하와이로 요양을 갔으면 좋겠다고 부탁하더라고 의논하였다. 허정은 국내에 계시면 일어날 문제들도 있을 것 등을 고려하여 동의하고 출국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5월29일 새벽 하와이로 요양차 출국하게 된다.

출국문제로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허정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허정은 이박사를 떠나 보내고 우남의 경우를 통해 사람은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 짓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말을 실감했다고 회고록에 썼다.
이 여행이 망명으로 굳어진 여행이 되었으나 여러 자료들을 볼 때 이박사는 돌아갈 것을 믿고 계셨다.
영접나온 하와이의 오중정 총영사에게 "내가 여기 좀 쉬러왔어, 한 3주일 쉬고 갈꺼야. 오 영사!" 라고 했다.이승만은 자신이 어느 결에 망명객의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1963년 국내에서는 이승만의 귀국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하였으나 혁명정부는 귀국을 막았다.
"귀국을 연기하라는 훈령이 왔다는 얘기를 듣고 눈물을 글썽이며 "모든 사람들이 나라에서 얘기하는 것을 들을 줄 알아야돼...내가 이제 살아서 남은 일은 우리나라에 가서 죽는 것 밖에 없오" 그리고 우셨다.

6월 20일 이승만이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7월18일 위에서 출혈이 심해 혈압이 급격히 떨어졌다.
1965년 7월 19일0시 35분 임종하셨다. 90세 였다.

1965년 7월21일 밤 11시 유해를 실은 특별기가 이륙하였다.
하와이에 온지 5년 2개월만에 귀국길에 올랐다.
7월27일 중구에 있는 정동교회에서 영결식을 하고 동작동 국립묘지로 모셔졌다.
그후 27년후 1992년3월23일 프란체스카 여사도 남편의 묘소에 합장되었다.

7 months ago | [Y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