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건 그대일까 그때일까"
90년대에 X세대로 20대를 보내고 과거를 기록에 남겨 훗날 오늘을 추억하며 경제적 자유를 꿈꾸는 개미


꿈꾸는깨미

무학재, 1963. 2. 28(조선일보)

한 수도꼭지에 2000가구 1만여 명이 매달려 살아가는 서울 무학재 고갯마루에는 매일 통금이 풀릴 때부터 물통 행렬이 길게 줄을 섰다.

본지 '한국의 장글' 시리즈 3회(1963년 2월 28일 자)에 실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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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7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기억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바로 어린아이가 입은 옷인데 옛날에는 어린아이들이 이런 옷을 많이 입었단다.

소위 밑트임 옷으로 걸음마 하는 아기들에게 입혔던 옷으로 돌아다니면서 대소변을 편하게 볼 수 있게 했던 옷.

그당시 1회용 기저귀가 없던 시절이니 엄마 입장에서는 기저귀 빨래도 줄이고, 아기 입장에서도 옷을 내리고 대소변을 처리 할 수 없으니 참으로 편했던 옷이었을거 같다. 다만 남자이의 경우 고추를 다 내놓고 다니니 좀...

이 옷은 6-70년대 전반에 걸쳐서 아기들이 입었던 옷이라고 하는데 세월이 가면서 아기들의 인권도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서 퇴출된 옷이란다.

주로 부잣집아이들 보다는 서민들이 사는 평벙한 동네를 가면 이런 밑트임 옷을 입은 아이들이 종종 보였다고 하는데 세월이 지나서 이렇게 사진 한 장으로 남아서 그 시절 그때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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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진공작전 중 체포된 광정단 결사대원, 1922년

1922년 9월 25일 소대장 강승경과 30여 명의 동지가 폭탄과 장총으로 무장하고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 삼수군 영성 경찰관주재소를 급습하여 벌여 순사 마츠이 요시미를 사살하였지만, 김창일(21), 김서운(23), 한진술(23)이 체포되고 몇 명의 대원은 전사하였다.



1923년 1월 15일에 함흥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복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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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혜산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 박달, 1938.9.22
#3 보천보 사건 국내 내응조직원으로 일경에 체포된 박금철, 1937.10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 동북항일연군 90여 명과 한국의 재만한인조국광복회 80여 명 등 약 170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 주재소(지금의 파출소)를 기습 공격하여 일시 점령했다가 퇴각한 사건. 오늘날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서 언급, 연구되고 있다.

김일성을 국내외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보천보 전투’는 1937년 6월 4일 밤부터 전개되었는데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의 국내 진입에 ‘조선민족해방동맹’ 지부 조직이 호응하여 이루어졌다. 무산으로 진출한 최현의 4사가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일성은 국내 진공과 4사 지원이라는 2가지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거점으로 보천보를 습격하였다고 한다.

습격자들은 상대적으로 방비가 허술한 보천보 주재소를 공격했는데 동북항일연군 90여 명, 내응한 국내의 재만한인조국광복회원 80여 명 등 항일세력 170여 명이 동원되었다.

습격 당시 주재소에는 일제 경찰은 셋, 조선인 보조원이 둘 있었다. 170여 명이 맹렬한 공격을 펼쳤으나 멀리서부터 기관총 사격을 하면서 진격하는 바람에 상황을 파악한 주재소 내 5명 모두 도주에 성공했다. 결국 순사의 딸인 2살배기 여아 1명(야네 에미꼬)과 주재소의 일본인 민간 요리사 1명이 유탄(빗나간 탄환)에 맞아 죽고 공격 후에 주재원 5명의 무장(소총 5정, 총탄 수백 발)을 탈취했다.

목적 자체가 선전에 있었던 만큼 전술 면에서 큰 성과는 없었으며 보천보 점령 후 토벌군이 본격적으로 오기 전에 허둥지둥 보천보를 빠져나갔다.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다음 날 경찰대가 추격하는 중 교전하여 일본 측은 사망자 7명, 부상자 14명이 발생했으나 동북항일연군 측 피해자는 수십 명이었다.

일본군은 보천보 전투의 결과에 매우 놀라 그 다음해부터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대토벌작전을 벌였다. 1939년부터 일본군, 만주군 등 70여만 명을 동원하여 토벌에 나서고 그 결과 동북항일연군은 이 작전으로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생포되었고 김일성을 비롯한 생존 병력들은 그해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소련 영역으로 탈출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이 종료되었다. 보천보 전투에 도움을 주었던 조국광복회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 조국광복회 조직은 이 사건으로 739명이 검거되었고 188명이 기소돼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

이 사건이 영향력을 지니게 된 데는 동아일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 사건 자체만 보면 민간인과 여아 1명이 희생된 해프닝에 가까운 사건이었는데 이를 대서특필하면서 호외기사를 내보냈다. 총독부의 보도통제를 슬쩍 우회하는 편법을 썼기 때문이다. 항일세력을 '비적'으로 칭하는 총독부의 방침을 따르면서도 김일성이라는 누가 봐도 조선인의 이름을 중간 제목에 박아 버려 겉으로는 비적 떼라고 알리면서 조선인들에게 소멸된 줄 알았던 조선인 항일세력이 만주에 존재하고 잠깐이나마 한반도에 진입했다고 대문짝처럼 광고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의 이름은 조선 전역에서 유명해졌는데 일제 말 삼천리 잡지에서 김일성의 행적 및 신원에 대해 직접 취재 및 주변인들 인터뷰까지 했을 정도였다. 해방 직후 중도우파 성향 잡지사 <선구>에서 창간기념으로 1945년 11월 여론조사를 하였는데 여기서 김일성이 군무부장에 1위로 조사된 사례를 보더라도 김일성의 명성은 상당했다. 중도파 여운형과 사회주의 독립운동 노선과 척을 진 김구도 이 사건에 주목했을 정도다. 당시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 폐간 이후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느라 금주, 금연하고 있었는데 보천보 전투 소식을 듣고 동네 사람들을 모아서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보천보 전투로 얻어진 김일성의 명성은 당시로는 엄청난 것이었다. 강대한 일제 치하에서 순응하던 조선인들에게 보천보를 일제 치하에서 탈환한 소위 김일성 장군에 대한 기대는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나뭇잎으로 두만강을 건너며 축지법을 쓴다"는 비현실적인 이야기까지 퍼질 정도로 대단하였다. 김일성은 여기에서 얻어진 명성을 발판으로 해방 후 쟁쟁한 빨치산 선배들을 제치고 북한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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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프 리처드 내한공연 , 이화여대 대강당, 1969.10.16~19

클리프 리처드는 1958년 첫 싱글 “Move It”으로 데뷔한 이후로 수십장의 음반을 발매하면서 가수, 배우로 활동했고 영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리면서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1960년대에 무지막지한 히트곡들을 쏟아내며 대성공을 거두었고, 7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1973년에 유로비전 콘테스트 출품작인 싱글 Power to All Our Friends가 히트했으나 75년에는 히트작이 전혀 나오지 않는 등 1960년대보다는 상대적 하락세를 겪었다. 그러나 1976년에 음악 스타일을 록으로 바꾸면서 그의 최고작 앨범 중 하나인 I'm Nearly Famous가 영국에서 다시 성공하였고, 앨범 수록곡이자 싱글인 Devil Woman이 미국 시장에서까지 성공하여 다시금 빛을 보았다. 1979년에도 싱글 We Don't Talk Anymore이 다시 영국,미국 시장에서 모두 탑텐을 찍고 성공하며 30대 중후반의 나이에도 가수로서 여전히 죽지 않은 기량을 보여주었다. 이후로도 1980년대에도 성공과 함께 가수로서 쭉 기량을 이어나갔다.



한때에는 한국에서 유행하는 모든 팝스타들의 선조격 인물로 대한민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60~70년대만 해도 한국에서는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 보다 더 큰 인기를 얻었으며, 특히 60년대 초반 클리프 리처드 주연의 음악영화 'The Young Ones'가 '틴에이저스토리'라는 이름으로 개봉되어 당시로서는 엄청난 관객몰이를 하며 여성을 중심으로 큰 팬덤이 형성되었다. 아무래도 검열 때문에 들어오기 힘들었던 다른 락스타들과 달리 클리프 리처드는 팝스타이기에, 내한을 오기 쉬운 환경이었고 한국 정서와도 맞는 노래를 만든 편이기에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다고 볼 수 있다. 외국가수의 내한공연이 전무하던 시절 클리프리처드의 내한과 여성팬들의 열광적 반응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또한, 역대 최초로 한국에 내한한 동시대 최고의 팝스타이다.



1969년 10월 MBC의 초청으로 서울 시민회관과 이화여대 강당에서 한 차례 씩 개최한 내한 공연이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The Young Ones"를 당시 한국에서 부르던 흑백 영상이 국내 방송에서도 나온 바 있다.

이때의 공연을 부정적으로 바라본 언론이 당시의 공연 상황을 악의적으로 왜곡 보도를 하기도 했는데, 그러한 내용이 수십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사실인 양 잘못 알려져 왔다. 대표적인 사례로 클리프 리처드가 여대생이 던진 속옷으로 코를 풀었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속옷이 아니라 손수건이었다고 한다. 클리프 리처드도 자기가 코를 푼 건 레이스가 달린 손수건이었다고 말했고, 당시 공연 주최 측이었던 정홍택 기자가 명백한 거짓 소문이라고 확언한 바 있다.

클리프 공연 때 여성 팬들이 무대 위로 팬티를 던졌느니 속옷을 던졌느니 하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꽃과 손수건을 던졌고, 일부 팬들은 미리 준비한 선물 보자기를 던지기도 했다. 선물과 손수건 등은 우리 주최 측 사람들이 모두 수거를 했기 때문에 팬티를 벗어 던졌다는 것은 잘못 전해진 것임을 입증 할 수 있다.




이외에도 공연 중 사람들이 실신하는 광란의 모습이었다는 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기 위해 있지도 않은 일을 만들어 기사로 내보내 당시 공연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명예를 훼손했다. 그리고 최초의 해외 가수 공연인 만큼 당시 한국에서 파급력이 강했고, 그만큼 잘못된 정보를 담은 소문들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당시 언론의 태도가 부정적이었던 이유는 외국 문화 침투, 국내 분위기 변화 등을 우려한 한국 정부가 해외 가수의 공연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언론이 그에 동조하여 부정적인 날조 기사를 내보냈다는 것. 하지만 당시의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에 젊은 여성들이 소리를 지르며 손수건과 선물을 던졌다는 것만으로도 기성세대에게 큰 충격이었으며, 이는 73년 클리프 리처드의 재내한시 입국금지 처분으로 공연이 무산되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클리프 리처드는 1969년 공연 이후 34년이 지난 2003년에 서울을 다시 찾아 공연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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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두(천연두)예방벽보, 1920년대

천연두는 마마(媽媽), 두창(痘瘡), 포창(疱瘡), 역질(疫疾), 호역(戶疫) 또는 적사병(赤死病)이라고도 부르는 두창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생기는 전염병이었다.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던 질병이었던 천연두는 1977년의 마지막 발병을 끝으로 더 이상 자연적인 발병 사례가 없는, 즉 인류가 처음으로 박멸한 병이다.

존재하던 당시에는 전반적인 치명률이 30% 정도로 높으며 특정 상황에서는 100%까지도 올라가는 위험한 질병이었다. 생존해도 얼굴과 몸에 심한 흉터가 남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도 삼국시대에 이미 존재했으며 옛말로 '마마'라고 했다. 신라의 처용가에 나오는 '역신'이 천연두와 관련 있다는 설도 있다. 그 위력이 상당했는지, 민간에서는 천연두를 '손님' 등의 존칭으로 부르며 '배송굿'을 벌여 천연두 귀신'님'이 얼른 나가기를 빌었을 정도.

조선 시대 세종의 첫 자식이었던 정소공주가 1424년(세종 6년) 2월 25일에 천연두에 걸려 13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당시 왕실의 모든 어른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받았던 정소공주의 죽음에 상심한 세종이 정소공주의 시신을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아서 공주의 염을 하는 시간이 늦어졌다는 야사가 존재했을 정도이며, 세종은 이후로도 정소공주가 생전에 타고 놀던 그네를 바라보며 무척 슬퍼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 정조의 정비 효의왕후도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아 곰보였다고 한다. 삼간택을 마치고 국혼을 위해 궁에 들어와 있을 때 천연두를 앓았다. 그렇게 추녀가 돼서 정조와 금슬이 좋지 못한 게 아니냐는 설도 있으나, 효의왕후와 정조 모두 천연두를 약하게 앓았고, 금슬도 날이 갈수록 좋아졌었다. 다만 자식이 없었을 뿐이다.

1790년대 박제가와 정약용 등이 협력하여 지은 '종두방서'에 제너식 종두법(우두법)이 있는 것이 보여 조선 후기 우두법의 존재 자체는 알았던 것으로 보이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지식은 실제 인명 구제에 제대로 동원되지 못했다.

1946년 유행해서 4,234명이 사망했고, 한국 전쟁 중이던 1951년에는 4만 명이 감염되어 11,530명이 사망할 정도의 위력을 떨쳤다. 아무래도 한국전쟁 중 천연두가 유행하는 지역의 유엔군과 노출돼서 그런 듯.
하지만 1954년부터 10명 정도로 크게 감소했으며, 1960년 3명의 천연두 환자가 발생한 이후로 한국에서는 천연두가 완전히 사라졌다.

조선 영조대의 인물이자 소론의 중추였고,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신 오명항의 초상을 보면 천연두로 인한 상처 자국이 얼굴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오명항은 이후에 간 건강이 악화돼, 생전 남긴 초상화에 병세가 점차 심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흔히 조선 시대 초상화의 사실주의를 극찬할 때의 예시로 자주 들곤 한다.

백범 김구도 어릴 적 천연두를 심하게 앓았다가 겨우 죽다 살아났는데, 얼굴에 후유증으로 마마 자국이 나이 들어서까지 군데군데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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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행된 내무부 주택조사에 사용된 괘도,1960년

당시 화장실의 형태가 그림으로 설명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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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감옥 외감옥, 1924년 조선형무소사진첩

재래의 감옥은 원형으로 공주감옥은 일제강점기까지 남아있었다. 지름은 30미터이며 담의 높이는 한 길, 폭은 3자 정도였다.

멀리 공산성 진남루가 보인다. 조선시대 공주목 감옥은 2개가 있었고, 내감옥의 위치는 감영에 인접한 곳인 현 공주시자원봉사센터 자리, 외감옥은 현 공주보건소 앞 늘푸른교회 자리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검토하였다.

외감옥은 현재의 출장소를 의미합니다. 이에 대해 본감을 내감옥이라고 불렀다.

이 외감옥의 윤곽은 환상형이었으며, 사진의 중앙에 타원형으로 보이는 것이 외곽으로, 이것이 환상형을 이루고 있다.

외곽은 벽돌 담으로 높이가 약 한 길(약 3.03미터)이다. 구내의 면적은 약 150평이며, 안에 감방이 한 동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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