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프 리처드는 1958년 첫 싱글 “Move It”으로 데뷔한 이후로 수십장의 음반을 발매하면서 가수, 배우로 활동했고 영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리면서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1960년대에 무지막지한 히트곡들을 쏟아내며 대성공을 거두었고, 7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1973년에 유로비전 콘테스트 출품작인 싱글 Power to All Our Friends가 히트했으나 75년에는 히트작이 전혀 나오지 않는 등 1960년대보다는 상대적 하락세를 겪었다. 그러나 1976년에 음악 스타일을 록으로 바꾸면서 그의 최고작 앨범 중 하나인 I'm Nearly Famous가 영국에서 다시 성공하였고, 앨범 수록곡이자 싱글인 Devil Woman이 미국 시장에서까지 성공하여 다시금 빛을 보았다. 1979년에도 싱글 We Don't Talk Anymore이 다시 영국,미국 시장에서 모두 탑텐을 찍고 성공하며 30대 중후반의 나이에도 가수로서 여전히 죽지 않은 기량을 보여주었다. 이후로도 1980년대에도 성공과 함께 가수로서 쭉 기량을 이어나갔다.
한때에는 한국에서 유행하는 모든 팝스타들의 선조격 인물로 대한민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60~70년대만 해도 한국에서는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 보다 더 큰 인기를 얻었으며, 특히 60년대 초반 클리프 리처드 주연의 음악영화 'The Young Ones'가 '틴에이저스토리'라는 이름으로 개봉되어 당시로서는 엄청난 관객몰이를 하며 여성을 중심으로 큰 팬덤이 형성되었다. 아무래도 검열 때문에 들어오기 힘들었던 다른 락스타들과 달리 클리프 리처드는 팝스타이기에, 내한을 오기 쉬운 환경이었고 한국 정서와도 맞는 노래를 만든 편이기에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다고 볼 수 있다. 외국가수의 내한공연이 전무하던 시절 클리프리처드의 내한과 여성팬들의 열광적 반응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또한, 역대 최초로 한국에 내한한 동시대 최고의 팝스타이다.
1969년 10월 MBC의 초청으로 서울 시민회관과 이화여대 강당에서 한 차례 씩 개최한 내한 공연이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The Young Ones"를 당시 한국에서 부르던 흑백 영상이 국내 방송에서도 나온 바 있다.
이때의 공연을 부정적으로 바라본 언론이 당시의 공연 상황을 악의적으로 왜곡 보도를 하기도 했는데, 그러한 내용이 수십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사실인 양 잘못 알려져 왔다. 대표적인 사례로 클리프 리처드가 여대생이 던진 속옷으로 코를 풀었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속옷이 아니라 손수건이었다고 한다. 클리프 리처드도 자기가 코를 푼 건 레이스가 달린 손수건이었다고 말했고, 당시 공연 주최 측이었던 정홍택 기자가 명백한 거짓 소문이라고 확언한 바 있다.
클리프 공연 때 여성 팬들이 무대 위로 팬티를 던졌느니 속옷을 던졌느니 하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꽃과 손수건을 던졌고, 일부 팬들은 미리 준비한 선물 보자기를 던지기도 했다. 선물과 손수건 등은 우리 주최 측 사람들이 모두 수거를 했기 때문에 팬티를 벗어 던졌다는 것은 잘못 전해진 것임을 입증 할 수 있다.
이외에도 공연 중 사람들이 실신하는 광란의 모습이었다는 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기 위해 있지도 않은 일을 만들어 기사로 내보내 당시 공연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명예를 훼손했다. 그리고 최초의 해외 가수 공연인 만큼 당시 한국에서 파급력이 강했고, 그만큼 잘못된 정보를 담은 소문들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당시 언론의 태도가 부정적이었던 이유는 외국 문화 침투, 국내 분위기 변화 등을 우려한 한국 정부가 해외 가수의 공연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언론이 그에 동조하여 부정적인 날조 기사를 내보냈다는 것. 하지만 당시의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에 젊은 여성들이 소리를 지르며 손수건과 선물을 던졌다는 것만으로도 기성세대에게 큰 충격이었으며, 이는 73년 클리프 리처드의 재내한시 입국금지 처분으로 공연이 무산되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클리프 리처드는 1969년 공연 이후 34년이 지난 2003년에 서울을 다시 찾아 공연을 하였다.
꿈꾸는깨미
클리프 리처드 내한공연 , 이화여대 대강당, 1969.10.16~19
클리프 리처드는 1958년 첫 싱글 “Move It”으로 데뷔한 이후로 수십장의 음반을 발매하면서 가수, 배우로 활동했고 영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리면서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1960년대에 무지막지한 히트곡들을 쏟아내며 대성공을 거두었고, 7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1973년에 유로비전 콘테스트 출품작인 싱글 Power to All Our Friends가 히트했으나 75년에는 히트작이 전혀 나오지 않는 등 1960년대보다는 상대적 하락세를 겪었다. 그러나 1976년에 음악 스타일을 록으로 바꾸면서 그의 최고작 앨범 중 하나인 I'm Nearly Famous가 영국에서 다시 성공하였고, 앨범 수록곡이자 싱글인 Devil Woman이 미국 시장에서까지 성공하여 다시금 빛을 보았다. 1979년에도 싱글 We Don't Talk Anymore이 다시 영국,미국 시장에서 모두 탑텐을 찍고 성공하며 30대 중후반의 나이에도 가수로서 여전히 죽지 않은 기량을 보여주었다. 이후로도 1980년대에도 성공과 함께 가수로서 쭉 기량을 이어나갔다.
한때에는 한국에서 유행하는 모든 팝스타들의 선조격 인물로 대한민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60~70년대만 해도 한국에서는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 보다 더 큰 인기를 얻었으며, 특히 60년대 초반 클리프 리처드 주연의 음악영화 'The Young Ones'가 '틴에이저스토리'라는 이름으로 개봉되어 당시로서는 엄청난 관객몰이를 하며 여성을 중심으로 큰 팬덤이 형성되었다. 아무래도 검열 때문에 들어오기 힘들었던 다른 락스타들과 달리 클리프 리처드는 팝스타이기에, 내한을 오기 쉬운 환경이었고 한국 정서와도 맞는 노래를 만든 편이기에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다고 볼 수 있다. 외국가수의 내한공연이 전무하던 시절 클리프리처드의 내한과 여성팬들의 열광적 반응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또한, 역대 최초로 한국에 내한한 동시대 최고의 팝스타이다.
1969년 10월 MBC의 초청으로 서울 시민회관과 이화여대 강당에서 한 차례 씩 개최한 내한 공연이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The Young Ones"를 당시 한국에서 부르던 흑백 영상이 국내 방송에서도 나온 바 있다.
이때의 공연을 부정적으로 바라본 언론이 당시의 공연 상황을 악의적으로 왜곡 보도를 하기도 했는데, 그러한 내용이 수십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사실인 양 잘못 알려져 왔다. 대표적인 사례로 클리프 리처드가 여대생이 던진 속옷으로 코를 풀었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속옷이 아니라 손수건이었다고 한다. 클리프 리처드도 자기가 코를 푼 건 레이스가 달린 손수건이었다고 말했고, 당시 공연 주최 측이었던 정홍택 기자가 명백한 거짓 소문이라고 확언한 바 있다.
클리프 공연 때 여성 팬들이 무대 위로 팬티를 던졌느니 속옷을 던졌느니 하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꽃과 손수건을 던졌고, 일부 팬들은 미리 준비한 선물 보자기를 던지기도 했다. 선물과 손수건 등은 우리 주최 측 사람들이 모두 수거를 했기 때문에 팬티를 벗어 던졌다는 것은 잘못 전해진 것임을 입증 할 수 있다.
이외에도 공연 중 사람들이 실신하는 광란의 모습이었다는 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기 위해 있지도 않은 일을 만들어 기사로 내보내 당시 공연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명예를 훼손했다. 그리고 최초의 해외 가수 공연인 만큼 당시 한국에서 파급력이 강했고, 그만큼 잘못된 정보를 담은 소문들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당시 언론의 태도가 부정적이었던 이유는 외국 문화 침투, 국내 분위기 변화 등을 우려한 한국 정부가 해외 가수의 공연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언론이 그에 동조하여 부정적인 날조 기사를 내보냈다는 것. 하지만 당시의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에 젊은 여성들이 소리를 지르며 손수건과 선물을 던졌다는 것만으로도 기성세대에게 큰 충격이었으며, 이는 73년 클리프 리처드의 재내한시 입국금지 처분으로 공연이 무산되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클리프 리처드는 1969년 공연 이후 34년이 지난 2003년에 서울을 다시 찾아 공연을 하였다.
7 months ago (edited) | [Y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