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 혜산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 박달, 1938.9.22
#3 보천보 사건 국내 내응조직원으로 일경에 체포된 박금철, 1937.10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 동북항일연군 90여 명과 한국의 재만한인조국광복회 80여 명 등 약 170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 주재소(지금의 파출소)를 기습 공격하여 일시 점령했다가 퇴각한 사건. 오늘날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서 언급, 연구되고 있다.
김일성을 국내외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보천보 전투’는 1937년 6월 4일 밤부터 전개되었는데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의 국내 진입에 ‘조선민족해방동맹’ 지부 조직이 호응하여 이루어졌다. 무산으로 진출한 최현의 4사가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일성은 국내 진공과 4사 지원이라는 2가지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거점으로 보천보를 습격하였다고 한다.
습격자들은 상대적으로 방비가 허술한 보천보 주재소를 공격했는데 동북항일연군 90여 명, 내응한 국내의 재만한인조국광복회원 80여 명 등 항일세력 170여 명이 동원되었다.
습격 당시 주재소에는 일제 경찰은 셋, 조선인 보조원이 둘 있었다. 170여 명이 맹렬한 공격을 펼쳤으나 멀리서부터 기관총 사격을 하면서 진격하는 바람에 상황을 파악한 주재소 내 5명 모두 도주에 성공했다. 결국 순사의 딸인 2살배기 여아 1명(야네 에미꼬)과 주재소의 일본인 민간 요리사 1명이 유탄(빗나간 탄환)에 맞아 죽고 공격 후에 주재원 5명의 무장(소총 5정, 총탄 수백 발)을 탈취했다.
목적 자체가 선전에 있었던 만큼 전술 면에서 큰 성과는 없었으며 보천보 점령 후 토벌군이 본격적으로 오기 전에 허둥지둥 보천보를 빠져나갔다.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다음 날 경찰대가 추격하는 중 교전하여 일본 측은 사망자 7명, 부상자 14명이 발생했으나 동북항일연군 측 피해자는 수십 명이었다.
일본군은 보천보 전투의 결과에 매우 놀라 그 다음해부터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대토벌작전을 벌였다. 1939년부터 일본군, 만주군 등 70여만 명을 동원하여 토벌에 나서고 그 결과 동북항일연군은 이 작전으로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생포되었고 김일성을 비롯한 생존 병력들은 그해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소련 영역으로 탈출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이 종료되었다. 보천보 전투에 도움을 주었던 조국광복회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 조국광복회 조직은 이 사건으로 739명이 검거되었고 188명이 기소돼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
이 사건이 영향력을 지니게 된 데는 동아일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 사건 자체만 보면 민간인과 여아 1명이 희생된 해프닝에 가까운 사건이었는데 이를 대서특필하면서 호외기사를 내보냈다. 총독부의 보도통제를 슬쩍 우회하는 편법을 썼기 때문이다. 항일세력을 '비적'으로 칭하는 총독부의 방침을 따르면서도 김일성이라는 누가 봐도 조선인의 이름을 중간 제목에 박아 버려 겉으로는 비적 떼라고 알리면서 조선인들에게 소멸된 줄 알았던 조선인 항일세력이 만주에 존재하고 잠깐이나마 한반도에 진입했다고 대문짝처럼 광고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의 이름은 조선 전역에서 유명해졌는데 일제 말 삼천리 잡지에서 김일성의 행적 및 신원에 대해 직접 취재 및 주변인들 인터뷰까지 했을 정도였다. 해방 직후 중도우파 성향 잡지사 <선구>에서 창간기념으로 1945년 11월 여론조사를 하였는데 여기서 김일성이 군무부장에 1위로 조사된 사례를 보더라도 김일성의 명성은 상당했다. 중도파 여운형과 사회주의 독립운동 노선과 척을 진 김구도 이 사건에 주목했을 정도다. 당시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 폐간 이후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느라 금주, 금연하고 있었는데 보천보 전투 소식을 듣고 동네 사람들을 모아서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보천보 전투로 얻어진 김일성의 명성은 당시로는 엄청난 것이었다. 강대한 일제 치하에서 순응하던 조선인들에게 보천보를 일제 치하에서 탈환한 소위 김일성 장군에 대한 기대는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나뭇잎으로 두만강을 건너며 축지법을 쓴다"는 비현실적인 이야기까지 퍼질 정도로 대단하였다. 김일성은 여기에서 얻어진 명성을 발판으로 해방 후 쟁쟁한 빨치산 선배들을 제치고 북한을 장악했다.
꿈꾸는깨미
#1 #2 혜산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 박달, 1938.9.22
#3 보천보 사건 국내 내응조직원으로 일경에 체포된 박금철, 1937.10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 동북항일연군 90여 명과 한국의 재만한인조국광복회 80여 명 등 약 170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 주재소(지금의 파출소)를 기습 공격하여 일시 점령했다가 퇴각한 사건. 오늘날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서 언급, 연구되고 있다.
김일성을 국내외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보천보 전투’는 1937년 6월 4일 밤부터 전개되었는데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의 국내 진입에 ‘조선민족해방동맹’ 지부 조직이 호응하여 이루어졌다. 무산으로 진출한 최현의 4사가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일성은 국내 진공과 4사 지원이라는 2가지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거점으로 보천보를 습격하였다고 한다.
습격자들은 상대적으로 방비가 허술한 보천보 주재소를 공격했는데 동북항일연군 90여 명, 내응한 국내의 재만한인조국광복회원 80여 명 등 항일세력 170여 명이 동원되었다.
습격 당시 주재소에는 일제 경찰은 셋, 조선인 보조원이 둘 있었다. 170여 명이 맹렬한 공격을 펼쳤으나 멀리서부터 기관총 사격을 하면서 진격하는 바람에 상황을 파악한 주재소 내 5명 모두 도주에 성공했다. 결국 순사의 딸인 2살배기 여아 1명(야네 에미꼬)과 주재소의 일본인 민간 요리사 1명이 유탄(빗나간 탄환)에 맞아 죽고 공격 후에 주재원 5명의 무장(소총 5정, 총탄 수백 발)을 탈취했다.
목적 자체가 선전에 있었던 만큼 전술 면에서 큰 성과는 없었으며 보천보 점령 후 토벌군이 본격적으로 오기 전에 허둥지둥 보천보를 빠져나갔다.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다음 날 경찰대가 추격하는 중 교전하여 일본 측은 사망자 7명, 부상자 14명이 발생했으나 동북항일연군 측 피해자는 수십 명이었다.
일본군은 보천보 전투의 결과에 매우 놀라 그 다음해부터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대토벌작전을 벌였다. 1939년부터 일본군, 만주군 등 70여만 명을 동원하여 토벌에 나서고 그 결과 동북항일연군은 이 작전으로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생포되었고 김일성을 비롯한 생존 병력들은 그해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소련 영역으로 탈출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이 종료되었다. 보천보 전투에 도움을 주었던 조국광복회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 조국광복회 조직은 이 사건으로 739명이 검거되었고 188명이 기소돼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
이 사건이 영향력을 지니게 된 데는 동아일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 사건 자체만 보면 민간인과 여아 1명이 희생된 해프닝에 가까운 사건이었는데 이를 대서특필하면서 호외기사를 내보냈다. 총독부의 보도통제를 슬쩍 우회하는 편법을 썼기 때문이다. 항일세력을 '비적'으로 칭하는 총독부의 방침을 따르면서도 김일성이라는 누가 봐도 조선인의 이름을 중간 제목에 박아 버려 겉으로는 비적 떼라고 알리면서 조선인들에게 소멸된 줄 알았던 조선인 항일세력이 만주에 존재하고 잠깐이나마 한반도에 진입했다고 대문짝처럼 광고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의 이름은 조선 전역에서 유명해졌는데 일제 말 삼천리 잡지에서 김일성의 행적 및 신원에 대해 직접 취재 및 주변인들 인터뷰까지 했을 정도였다. 해방 직후 중도우파 성향 잡지사 <선구>에서 창간기념으로 1945년 11월 여론조사를 하였는데 여기서 김일성이 군무부장에 1위로 조사된 사례를 보더라도 김일성의 명성은 상당했다. 중도파 여운형과 사회주의 독립운동 노선과 척을 진 김구도 이 사건에 주목했을 정도다. 당시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 폐간 이후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느라 금주, 금연하고 있었는데 보천보 전투 소식을 듣고 동네 사람들을 모아서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보천보 전투로 얻어진 김일성의 명성은 당시로는 엄청난 것이었다. 강대한 일제 치하에서 순응하던 조선인들에게 보천보를 일제 치하에서 탈환한 소위 김일성 장군에 대한 기대는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나뭇잎으로 두만강을 건너며 축지법을 쓴다"는 비현실적인 이야기까지 퍼질 정도로 대단하였다. 김일성은 여기에서 얻어진 명성을 발판으로 해방 후 쟁쟁한 빨치산 선배들을 제치고 북한을 장악했다.
7 months ago (edited) | [Y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