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베이트케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베이트케뎀은 우리의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토라 가운데 계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 분을 향하고 있었음을 더욱 깊이 예배합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토라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토라포션에 맞추어 하나님의 때에 따라 꺼내 전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베이트 케뎀 예배와 함께 하는 모든 이에게 임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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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밭] 레크-레카 לך־לך Lech-Lecha → 바예라 וירא Vayera 5786(2025)

창세기 18장 1절과 2절의 연결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신비롭고 깊은 장면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1절에서는 분명히 “여호와께서 (...)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바예라 엘라브 아도나이, וירא אליו יהוה)”라고 말하는데, 곧이어 2절에서는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쉘로샤 아나심, שלשה אנשים)”라고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이 두 구절은 서로 다른 존재를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같은 현현의 두 모습일까요? 이스라엘의 신비 전통은 이 장면을 단순한 서술로 보지 않고, 신적 빛의 현현으로 해석합니다.

이 전통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맞이한 세 손님은 세 명의 천사로도 볼 수 있지만, 더 정확하게는 신적 광휘의 세 가지 빛이 그의 인식 속에 사람의 형상(첼렘 아담, צלם אדם)으로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하나님의 세 가지 속성—헤세드(자비, חסד), 게부라(심판, גבורה), 티프에레트(조화, תפארת)—의 현현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 겹의 빛으로 스스로를 입고 나타나신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신적 빛(오르 엘로키, אור אלוקי)은 ‘세계들의 연속’, 즉 아찔루트(אצילות)에서 브리아(בריאה), 예찌라(יצירה), 그리고 아시야(עשיה)로 내려오면서 점차 ‘옷을 입듯’(히트랍슈트, התלבשות) 감각화됩니다. 이렇게 빛이 내려올 때, 관조자, 즉 예언자의 의식과 감각 체계에 맞는 형태로 보이고 들리게 됩니다.

우리가 “보았다, 들었다, 먹었다”고 표현하는 현상은 사실 예언자의 인식 구조에 맞게 형성된 감각적 외피(레부쉬, לבוש)에 대한 경험입니다. 외피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재이지만, 그 본질은 빛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눈이 본 것은 실제 물질이지만, 그 물질은 예언적 인식이 형성한 외피”라는 말은, 그가 보고 만진 것의 현상적 차원은 물질(아시야의 차원)이지만, 그 실체는 상위 세계의 빛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언자의 의식에서는 이러한 체험이 일정한 단계를 거쳐 이루어집니다. 먼저 지성(세켈, שכל), 상상 및 형상 능력(딤욘, דמיון), 감각기관이 정화되고 정렬됩니다. 이를 ‘거룩해진 상상’(딤욘 메크다쉬, דמיון מתקדש)이라 부르며, 이는 단순한 공상이나 상상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을 정확히 형상화하도록 정제된 인식 기능을 뜻합니다.

이어서 빛은 예언자의 인식 구조에 맞게 형상을 입습니다(히트랍슈트, התלבשות). 이렇게 나타난 형상은 사람의 모습, 목소리, 식사 장면 등으로 감각 표면 위에 표현됩니다. 예언자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그 형상을 감각적으로 경험하며,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현현이 예언자의 인식 구조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현실 세계에서도 실제로 행동합니다. 아브라함이 손님을 환대하고 음식을 준비한 것은 물질적 현실에서 일어난 ‘진짜 행위’였습니다. 예언적 비전이 환상만은 아니고, 하늘의 빛이 인간의 행동을 통해 현실화되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예언(네부아, נבואה)이란 신적 빛(오르 엘로키, אור אלוקי)이 인간의 의식(네페쉬, נפש) 안으로 흘러들어와, 그 사람의 지성(세켈, שכל)과 상상 능력(딤욘, דמיון)을 통해 감각적 형상으로 표현되는 상태로 설명됩니다. 다시 말해, 예언은 그저 미래를 말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실재가 인간의 인식 안에 들어와 형상으로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예언(네부아, נבואה)은 이렇게 정의될 수 있습니다. “상위 세계의 빛이 예언자의 의식 속으로 내려와, 그의 상상력과 감각을 통하여 형상화되는 현상이다.” 이 과정은 주로 히트랍슈트(התלבשות, 옷 입음)라 불리는 현상으로 설명됩니다.

즉, 빛이 인간 인식의 옷을 입음으로써 감각적 세계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은 하나님이 어떤 말을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아니라, 신의 빛을 보는 것, 체험하는 것, 그리고 의식 안에서 그 빛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창세기 20장 7절에서도 아브라함은 “그는 예언자/선지자(네비, נביא)”라고 직접 불립니다. 토라 자체가 아브라함을 예언자로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근거로, 아브라함이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 아니라, 깨어 있는 상태에서 신적 현현을 지각한 사람으로 이해합니다. 그는 예언적 인식의 문이 열린 사람, 즉 신의 빛을 감각적 현실 속에서 본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토라포션 바예라, 창세기 18장의 “여호와께서 (...)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라는 말씀과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있는지라”라는 말씀은 분리된 두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 현현의 두 층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빛을 옷으로 입고, 인간의 감각 세계 속에서 세 사람의 모습으로 드러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깨어 있는 예언자였기에, 그는 그 신성의 광휘를 현실 속에서 보았고, 그 빛을 환대함으로써 하늘의 자비를 세상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결국, 이 장면은 하늘의 빛이 물질세계 속에 나타난 사건이며, 하나님의 현현이 인간의 사랑과 행위를 통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온 순간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이번 주간에 부여받습니다. 과연 나에게 있는 믿음이, 내가 물질세계 가운데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이 나의 예언적 인식이 형성하는 감각의 외피 가운데 하나님의 빛이 현현할 수 있는 토대 위에 형성된 믿음인지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예민하게 발달해 있는 감각은 나의 자아를 만족시키고 어떻게 하면 내 육신을 잘되게 할지를 고민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같이 하나님의 현현을 기다리며 언제든 그분을 영접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그 빛을 발견하기 위한 것일 겁니다. 이번 주간 그 빛을 발견하는 순간 아브라함과 같이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창18:2)”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샤밭샬롬/

3 days ago | [YT] |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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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밭] 노아흐 נח Noah → 레크-레카 לך־לך Lech-Lecha 5786(2025)

레크-레카(לך־לך)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첫 명령입니다. 문자적으로는 “떠나라”라는 의미이지만, “레크-레카”는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너의 본질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곧, 외적인 정체성을 벗고 참된 내적 자아로 귀환하라는 소명입니다.

아브람은 히(이)브리(עברי)라 불립니다. 히(이)브리(עברי)는 ‘저편으로 건너간 자’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히브리’라는 표현(עברי)이 등장하는 구절은 창세기 14장 13절입니다.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אַבְרָם הָעִבְרִי)에게 알리니 (...)”(창14:13)

아브람의 이름(אברם) 앞에 ‘히브리인(עברי)’이라는 정체성이 붙어 있습니다. 즉, 아브람은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히브리 사람으로 불린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강을 건넌 것이 아니라, 세상적 정체성의 차원을 떠나 하나님이 계신 차원으로 건너간 존재가 된 것입니다. 복은 소유가 아닙니다. 복은 흐름의 통로로 선택된 자에게 부어지며, 아브람이 복의 근원이 된 것은 그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이 세상으로 흘러가도록 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צדק 짜다크)로 여기시고.”(창15:6)

여기서 히브리어 에무나(אמונה, 믿음)는 존재 전체를 하나님께 의탁하는 신뢰를 의미하고, 의(צדק)는 관계적 수용을 의미합니다. 즉, 믿음이란 존재의 방향성을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입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서는 이 본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11:8)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신앙이란 ‘어디로 가는가’가 아니라 ‘어떤 존재로 변하는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상을 걸어가는 것은 그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재를 따라 현실의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간다는 의미입니다. 그 길은, 곧 네페쉬(נפש, 혼적 생명)에서 루아흐(רוח, 영적 자각, 감정 다스림)로 상승하는 여정이며, 다시 네샤마(נשמה, 신적 본질)로 상승하는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동일한 영적 구조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인간 존재 전체의 본질 전환을 요구하는 창조적 명령이었습니다. 주님의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은 레크-레카를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성을 갖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핵심적인 제자도 명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복음 16:24)

여기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바로 자아의 껍질을 벗는 레크-레카의 삶을 의미합니다. 아브람이 고향과 친족을 떠난 것처럼, 제자는 자기중심 정체성과 안전의 기반을 떠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존재로 태어나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여정은 존재의 이동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특정한 위치로 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며 그분 안으로 이동하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이 보여주실 땅을 향해 갔듯이, 제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실 생명과 정체성을 향해 전진합니다.

아브람의 떠남이 영혼의 본질로 들어감(레크 레카)이라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감(요 15:4 “내 안에 거하라 ...”)을 말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제자의 삶을 산다면 그것이 바로 영혼의 본질로 들어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즉, 레크-레카는 “너 자신에게로 가라”는 명령이었고, 예수님의 명령은 “너의 참된 자아가 있는 나에게로 오라”는 초청입니다.


우리의 존재 구조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나의 네페쉬는 처음엔 육에 속한 사람의 혼으로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는 것, 생존 본능, 세상의 인정에 묶인 정체성에서 말씀에 눈을 뜨고 육신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으로 나아가면서, 나의 루아흐는 마음과 영의 각성에 집중하여 회개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인지하는 단계로, 나의 네샤마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존재로써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의 삶을 실천하는 존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곧 레크-레카의 영적 구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바로 레크-레카의 길이며, 나를 따르는 자는 자기 본질(네샤마)로 들어가게 된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창세기 12장 2절에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7:38)”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람이 복의 통로가 된 것처럼, 제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흐름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존재가 됩니다.

레크-레카는 곧 예수님의 제자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너 자신에게로 돌아오라”고 부르시고, 예수님께서 “나에게로 오라, 그리고 내 안에서 너의 참된 자아를 발견하라”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레크-레카는 과거의 명령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본질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기 정체성 속에 있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떠나라는 말씀은 두려운 명령이 아니라, 참된 자아를 회복하라는 초대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초대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있습니다.

레크-레카의 주간에 주님안에서 저편으로 건나가 히브리(עברי)인이 됩시다.

/샤밭 샬롬/

1 week ago | [YT] | 31

Beit KEDEM

노아흐 5786(2025) 토라포션 내용의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시는 듯하여, 게시글에 해당 내용을 공유합니다.

Q.
1. 사탄이 자유의지가 없으며 인간의 티쿤을 위해 하나님이 쓰시는 피조물(영)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사탄의 origin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2. ‘불못’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게 아니라 소멸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요? (지금까지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등의 말씀으로 영원한 고통 심판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A.
샬롬. 주신 질문들은 어려운 주제입니다. 아래 설명 드리겠지만, 이 또한 충분치 못할 수도 있습니다. 글의 한계이나, 여러 번 묵상하시다 보면 빛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1. 사탄은 타락한 천사가 아니라, 애초부터 하나님의 심판의 측면이 드러난 게부라의 왜곡된 빛 또는 발현(Menifestation of God’s Judgmental will)입니다. 사탄은 존재론적 반역자가 아니라 우주적 균형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좌편, Left Side of God)이지요. 사탄은 본질적으로 게부라(심판의 빛)의 왜곡된 파생으로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존재를 의도적으로 창조/허락하셨고 이것을 시험과 분리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탄은 하나님의 통제 밖으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욥기 1장에서도 이것을 보여주는데, 사탄은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의 허락 아래 욥을 시험합니다. 그래서 사탄을 하나님 왼편의 힘(כח הדין)이라고 표현하며, 빛에서 떨어져 제한된 상태로 있는 심판의 발현이라고 합니다.

사탄은 쉐비라트 하켈림에서 설명했었지만, 그릇이 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깨질 때를 본질적 기원으로 봅니다. 게부라의 불균형으로 인해 קליפה(클리파)가 형성되었고, 에덴 동산의 선악과 사건을 통해 사람 위에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사탄의 권세는 인간이 죄를 받아들임으로인해 인간 영역까지 확대된 것입니다.

클리파가 인간 의식에 들어왔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인간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 중심이 아니라 자기 욕망 중심으로 판단하고 결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클리파는 어떤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가리는 왜곡된 사고 구조입니다. 그 본질은 ‘나는 하나님 없이도 나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다’라는 의식입니다. 이것이 에덴에서 뱀이 하와에게 넣어준 의식입니다.


2. 성경의 영원한 고통(불)과 영원한 소멸은 상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시간의 무한한 고통이 아니라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상태’를 표현하는 히브리적 종말 언어입니다. 용어를 좀 구분을 하자면;

1) 게힌놈(גיהנם)
: 정화의 불이고 임시적입니다. 게힌놈은 정화를 목적으로 하고, 거룩함이 있는 부분은 구원되고 타락된 일시적 흔적은 사라지는 곳입니다. 혼합되어 있는 빛의 왜곡 흔적을 없애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안에 남은 부정한 잔재를 불꽃의 정화작용으로서 제거한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이것은 죄 자체가 불에 타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영혼에 생긴 왜곡 흔적이 분리되어서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불못, 아감 하에쉬(אגם האש)
: 이것은 나하르 디누르נהר דינור(심판의 불 강/불의 강)으로 표현할 수도 있으며, 천상에서 흘러나오는 심판의 불길을 말합니다. 불못은 최종 판결 및 폐기의 성격을 가집니다(되돌릴 수 없음). קליפה(클리파, 껍질/가림)를 최종적으로 무력화/소멸시키는 것에 해당합니다. 회복, 정화가 불가능한 어둠의 본질 자체가 소멸되는 것인데, 이것을 התבטלות히트바틀루트 라고 합니다. 이 말은 ‘자기 중심의 소멸’을 말하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로 투명하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둘째 사망과 연결시켜 설명 드렸었는데요, 둘째 사망은 불못의 결과입니다. 생명과의 완전 단절이고, 존재의 끝이라는 의미입니다.

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이라.” 이것이 분리/고통의 개념 자체이고 소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고통의 영원한 유지 장소가 아니라 모든 죽음 개념을 끝내는 종말적 소멸의 불을 의미합니다.

계21:4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이나 아픔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만약 사탄과 악인들이 끝없이 존재하며 고통받는 구조라면 더 이상 아픔이 없다는 선언은 모순이 됩니다. 따라서 불못은 고통 지속의 공간이 아니라 심판의 최종 소멸을 뜻합니다.

말4:1 “악인은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날에 그들을 불살라 그 뿌리와 가지도 남기지 아니하리라.” 불살라 없어진다는 소멸을 말합니다.

악은 실체가 아니라 빛의 부재입니다. 빛이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면 악은 스스로 무(에인)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못을 빛의 마지막 회수 장소라고 일컬을 수 있습니다. 빛이 회수되면 그릇(클리파)는 존재 자체를 유지할 수 없으므로 소멸되는 것입니다.


3. 이사야 66:24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는 죽지 아니하고 그 불은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벌레תּוֹלַעַת는 문자적으로 구더기이지만, 히브리어에서는 시체를 분해하는 자연적 과정(소멸)이라는 상징 표현입니다. 죽지않는다/꺼지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적 끝없음(헬라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심판이 완전히 이루어져 중단되지 않는다’는 심판의 철저함을 상징합니다.

미드라쉬 라바에서는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것은 불이 실제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자들 앞에서 심판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음을 말한다’라고 표현합니다. 즉 ‘꺼지지 않는 불’은 하나님의 공의가 완전히 이루어짐을 의미하고, ‘죽지 않는 벌레’는 악의 잔재가 완전히 부패되어 더 이상 생명으로 돌아오지 못함을 상징합니다. 벌레는 קליפה가 빛을 잃고 스스로 소멸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는 표현은 또한 히브리적 과정법으로 상징됩니다. 심판이 중단되지 않고 완전히 수행됨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적 사고에서 죽지 않는다는 표현은 ‘그 과정이 끝까지 시행된다’, ‘결코 무시되거나 취소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심판이 생명력을 완전히 제거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는 완전한 종결을 확정짓는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קליפה의 최종적 해체입니다. 심판의 확실성과 진지함을 극대화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무거움을 가지기 위함입니다.

왜 하나님은 단순히 소멸된다, 끝난다라고 말하지 않고, 밤낮 괴로움, 불못,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는 강한 언어를 사용하셨을까요? 이것은 히브리적 정신과 하나님의 계시 방식의 본질적 특징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성경의 ‘정보’로는 움직이지 않고 ‘깨달음, 깊은 인식’에 의해서만 변화됩니다. 하나님은 단순 정보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 전체를 각성시키기 위해 때로는 충격적, 극적 언어를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울때를 생각해보면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두려움, 경각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하심이고, 회개의 문을 열게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부드러운 선언이 아니라 우주의 근본을 뒤흔드는 절대적 진리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가 생명을 선택하도록 흔들어 깨우시고 하나님과 온전한 하나됨을 이루게 하시기 위해 이렇게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

1 week ago (edited) | [YT] | 23

Beit KEDEM

[샤밭] 베레쉬트 בראשׁית Bereshit → 노아흐 נח Noah 5786(2025)

노아의 시대, 세상은 이미 그 자체로 깨어진 그릇(שבירה, 쉐비라)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빛을 담을 수 없는 그릇처럼 갈라져, 욕망과 폭력으로 스스로를 삼켜 버렸습니다. “모든 혈육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창 6:12)는 말씀처럼, 인간은 육신(בשר, 바사르)의 감각으로 살아가며 영의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육신은 끝없는 결핍의 소리를 냅니다. 그 결핍은 “갖고 싶다”는 욕망으로 번역되고, 욕망은 경계를 세워 나와 남을 구분합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나의 것”을 쌓기 위해, 그리고 더 높은 곳에 이름을 새기기 위해 하늘까지 탑을 쌓으려 했습니다. 그것이 바벨의 교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은 소유하지 않습니다. 영은 이미 공유의 영역에 존재합니다. 모든 것은 그 안에서 하나이며, 빛은 빛을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을 감당하지 못한 깨어진 그릇의 그 파편 속에서 인간의 세계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분열, 욕망, 탐심은 그 깨진 파편의 잔향입니다. 노아의 시대는 바로 이 깨짐이 절정에 달한 시대였습니다.

노아(נח, 노아흐)는 그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의 조롱 가운데서도 방주(תֵבה, 테바)를 지었습니다. 테바는 말씀의 그릇이라고 표현합니다. 테바는 곧 ‘말’(דבר, 다바르)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세우는 사람이었고, 그 안으로 들어갔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이 모든 육신의 부패함으로 물들어갈 때 하나님은 우리 안의 노아를 통해 말씀의 피난처를 세우십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방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방주에 들어갔다고 해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홍수가 기다리고 있지요.

홍수(מבול, 마불)는 정화의 물이었습니다. 이 홍수 사건의 물을 미크베(מקוה)라 하는데, 이것은 세상을 씻어내고 영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씻어 다시 빛을 받을 준비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담의 죄로부터 새롭게 시작하신 티쿤(תיקון)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깨진 그릇이 다시 빛을 담을 수 있도록 정화되는 시간, 그것이 홍수의 시간입니다.

노아가 방주 안에서 사십 일 동안 물 위를 떠다닌 것은, 마치 인간의 내면이 자신의 깊은 의식 속을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 위에 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땅(אדמה, 아다마)에 뿌리박지 않은 상태 — 인간적 확실성을 내려놓고,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의 흐름에 맡기는 상태입니다. 이를 “비툴 하예쉬”(ביטול היש)라 부릅니다 — ‘자기 존재를 무(無)화 시키는 것’. 자기 자신을 비우지 않고는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물이 그쳤을 때, 비둘기(יונה, 요나)가 새 잎을 물고 돌아옵니다. 그 순간은 창조의 아침과도 같습니다. 비둘기는 쉐키나(שכינ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며, 잎은 평화의 언약을 말합니다. 무지개(קשת, 케셰트)는 그 언약의 징표로 하늘에 걸렸습니다. 케셰트의 일곱 빛깔은 세피로트(ספירות, 세피로트), 즉 하나님의 성품들이 서로 조화될 때 드러나는 빛의 조화입니다. 심판과 자비가 균형을 이루는 곳, 그곳에 진정한 생명이 다시 시작됩니다.

우리 안에 새로운 균형이 생겨나고, 하나님의 성품들이 열매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방주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곧 방주이고, 그분의 사랑이 곧 물 위의 평안입니다. 그분 안에서 깨어진 심령들은 다시 하나로 모이고, 빛은 흩어짐 없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우리 영적 여정은 하나의 곡선처럼 이어집니다. 깨짐에서 시작해 영혼의 교정(티쿤)으로 끝나는 곡선. 이 티쿤의 원은 결국 십자가와 부활의 원 안에서 완성됩니다. 노아의 방주는 나무로 만들어졌고, 그리스도의 방주는 나무 십자가로 세워졌습니다. 노아의 무지개가 하늘의 자비를 상징했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땅 위의 자비를 완성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소중한 언약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소유의 욕망과 경계의 두려움 속에 있지만, 나의 루아흐와 네샤마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합니다.

“네 방주를 말씀 속에 지어라. 네가 피할 곳은 세상 바깥이 아니라, 말씀 안이다.”

베레쉬트에서 이어지는 노아의 이야기는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홍수의 물이 그친 곳에서 새로운 인간의 시간이 열렸듯, 우리의 삶도 매일 깨지고 다시 빛을 담는 과정입니다. 육신은 여전히 욕망하지만, 영은 공유를 기억합니다. 그 기억이 우리를 다시 하나님을 향한 여정으로 이끕니다. 그 기억을 되살려, 테바를 짓고 그 안에 들어가는 노아흐의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샤밭샬롬.

2 weeks ago | [YT]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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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구속의 시간

이스라엘의 인질들이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그들의 가족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로 기뻐하며 하나님께 찬송드리는 모습을 보며, 저 역시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의 해방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맡기신 영광스러우면서도 무거운 사명의 깊이를 다시금 느끼게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기쁨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더욱 임하기를 간절히 구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2023년 10월 7일, 바로 쉐미니 아쩨레트(שמיני עצרת)와 심카 토라(שמחת תורה)의 날에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된 이 침략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많은 이들이 인질로 잡혀가고, 끔찍한 폭력과 학살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들만의 역사가 아닌, 우리 영혼의 여정에 대한 계시입니다. 이스라엘이 공격받았다는 것은 곧 우리의 육신이 영을 공격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하마스(חמס)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폭력, 강탈, 억압을 뜻합니다.이것은 우리 안의 육신적 본성, 즉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내면의 폭력성을 상징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육신은 스스로를 중심에 두고, 감각으로 인식되는 것만이 전부라 주장하며, 만족을 주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 무질서하게 만듭니다.

하마스가 심카 토라의 날에 공격했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그들은 “토라를 기뻐하는 날”을 더럽히고 짓밟았습니다. 이는 곧 토라의 기쁨, 곧 말씀을 향한 사랑 자체를 강탈당한 사건이며,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창 25:32)고 말하던 에서의 영, 즉 감각의 세계에 갇힌 인간의 사고를 상징합니다.

쉐미니 아쩨레트(שמיני עצרת)는 ‘여덟째 날에 머무름’을 뜻합니다. ‘쉐미니(שמיני)’는 8을 의미하며, 7이 완전한 창조의 순환이라면 8은 그 너머의 영원의 차원, 하나님과 함께 머무는 안식의 단계를 상징합니다. ‘아쩨레트(עצרת)’는 ‘멈추다, 머물다, 함께하다’는 의미로, 이 날은 하나님께서

“이제는 너희가 나와 함께 머무르라”

하시는 친밀한 초청의 날입니다. 바로 그 날, 육신은 영원의 세계를 부정하며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이는 보이는 세계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거부하고 공격한 상징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요?
우리가 나만을 위한 단독자로 살아가며, 자기중심적인 경계를 세울 때, 그 이기심은 결국 영의 세계를 폭력으로 물들이는 힘이 됩니다.

내 육체의 두려움 속에 갇혀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만 집중할 때, 나의 만족이 채워지지 않을 때마다 세상은 분열되고, 결국 그것이 전쟁과 폭력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 전쟁의 근본 원인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있는 탐욕과 이기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두신 생명과 사랑의 씨앗이 이웃 안에도 있음을 깨닫지 못한 채,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고, 결국 서로를 죽이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분명 말세의 징조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가장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은,
이 전쟁이 바로 “나로부터 시작된 영적 전쟁”이라는 관점입니다. 그리고 물리적 세계에서 이 영적 싸움을 가장 강하게 감당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도 수없이 넘어졌지만,
하나님께서 맡기신 빛의 통로로서의 역할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명이 너무도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안에 하나님의 카보드(כבוד, 영광)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함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삶, 곧 하나님 나라의 성품과 질서를 우리 삶을 통해 증거하는 일입니다.

“쉐마 이스라엘(שמע ישראל)!”
지금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모든 열방의 이스라엘이 그분의 메시지를 들어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 안의 영이 티쿤(תיקון, 회복/교정)을 이루면, 우주는 변합니다. 하나님의 우주는 우리 안의 내면 세계에 있습니다. 내면의 질서가 회복될 때, 세상도 회복되는 것입니다.

‘티쿤’은 단순히 주는 행위가 아니라, 주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삶, 곧 하나님의 사랑이 행동으로 흘러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럴 때 우리의 존재는 참된 티쿤으로 변화됩니다.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까요?
그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아케이다(עקדה)’—‘묶음’이라는 뜻처럼,
아브라함은 그 행위를 통해 자신의 육체적 관점과 이기심을 묶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하나님의 음성을 두려워했지, 자신의 현실적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확히 2년이 지난 5786년 티슈리 22일, 쉐미니 아쩨레트,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이스라엘을 축복하셨습니다. 쉐미니 아쩨레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희는 멈추어 나와 함께 머물라.
창조의 일곱 날이 끝나고,
이제 영원의 세계에서 나의 안식에 참여하라.

그날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하나 되어 머무는 날, 영원과 시간,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가 만나는 날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며, 우리의 티쿤을 통해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간의 리듬 속에서 또 하나의 신비를 발견합니다.

창세기 41장 1절의 말씀 — “미케쯔 슈나타임 야밈 - 2년이 끝난 후에(מקץ שנתים ימים)"

요셉이 감옥에 갇힌 지 2년 후 바로의 부름을 받으며, 그의 감금은 끝나고 구속(גאולה)의 문이 열렸습니다. ‘2년’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숨겨진 구속의 전환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지난 2년 또한 그와 같은 구조 속에 있습니다. 요셉이 잊힌 어둠의 시간을 지나 구원의 부름을 받았듯, 이스라엘도 고통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구속의 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쉐미니 아쩨레트의 시간 구조는 바로 그 ‘2년의 문’을 여는 순간— ‘완성(7)’을 넘어 ‘초월(8)’로 나아가는, 역사의 쉐비라(파괴)와 티쿤(회복)이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2년의 끝에서, 요셉의 구속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우리 모두를 새로운 빛의 질서로 초대하시는 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시간 이스라엘로 인해 기뻐하면서도 잠잠히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토라를 주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더 깊이 들어갑시다.

/찬송을 받으소서 주 우리 하나님 우주의 왕이시여/

2 weeks ago | [YT] |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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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밭] 수코트 סכות Sukkot → 베레쉬트 בראשׁית Bereshit 5786(2025)

창조는 시작입니다. 우리 영혼의 시작, 인생의 시작은 모두 창조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시작할 수 없습니다. ‘베레쉬트 בראשית(태초에)’라는 단어 안에는 하나님의 내적 의지와 지혜, 곧 호크마(חכמה)가 이미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를 여셨고, 그 말씀은 곧 생명의 숨결, 네샤마(נשמה)와 연결됩니다.

창조 이전의 신비한 순간을 찜쭘(צמצום)이라 말씀드렸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비워 피조물이 존재할 공간을 마련하셨습니다. 무한한 분이 자신을 비우셨기에, 우리에게 시작이 가능해졌습니다. 우리가 시작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그 ‘자기 비움’ 안에 포함된 은혜의 표현입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시딤에서는 인간을 “창조의 동역자”라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여섯 날 동안 창조하셨듯, 인간도 그분의 형상으로 창조의 여정을 계속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가 보통은 느끼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실제적인 영적 유전이 우리에게 흐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빛에서 빛이 낳아진 것”이라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네샤마(נשמה)가 우리 안에서 다시 빛을 내는 것이죠.

그래서 세상은 “빛이 있으라” 하셨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는 발전과 재창조의 과정을 통해 풍성함을 누려왔습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빛의 속성 때문인데요, 사람에게는 감추어진 빛이 존재합니다. 이것을 오르 하가누즈(אור הגנוז)라고 하는데, 이 빛은 세상 바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목적을 따라 인간 안으로 스며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빛을 “모든 생명 속에 내재한 하나님의 광채”라 하며, 이스라엘은 그 빛이 바로 사람 안의 영혼, 네샤마(נשמה)로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이 감추어진 빛이 사람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불어넣으신 네샤마(נשמה)는 그분의 창조적 빛이 인간 속에 깃든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숨결을 가진 존재라는 뜻이지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불어넣으신 생명의 불꽃이라 할 수 있고, 네샤마는 우리가 다다를 수 있는 영혼의 가장 깊은 차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빛이 세상 가운데 드러난 절정이 바로 예슈아(ישוע)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후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하시며 숨을 내쉬셨다(요한복음 20:22)” 하신 장면은, 하나님이 처음 사람에게 네샤마를 불어넣으신 창조의 그 순간이 다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네샤마가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내 안에 있는 네샤마의 역사이며, 나의 존재가 단순히 육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결로 이루어졌다는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처음과 끝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를 시작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면, 나의 마지막 또한 그분께 있습니다. 네샤마는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것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로마서 11:36)”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합니다. 독생자의 본래 의미는 에하드(אחד), 즉 하나됨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는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슈아(ישוע)입니다. 말씀인 다바르(דבר)는 곧 창조의 원천이며, 예슈아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인간이 잃어버린 에하드, 곧 하나님과의 하나됨을 회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말씀만이 다시 이 세상을 재창조의 과정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한계로 인해 에하드로 나아갈 수 없던 사람들에게 예슈아는 다시 네샤마(נשמה)의 숨결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 숨이 회복될 때, 사람은 자신의 본질이 육신이 아니라 영혼임을 깨닫습니다. 그때부터 다시 숨쉬기 시작한 영혼은 하나님의 창조적 숨결을 따라 살게 되고, 그 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 때 아담에게 숨을 주셔서 생령이 되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시작을 있게 하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 그것이 곧 토라(תורה)의 길입니다. 예슈아는 하토라(התורה)로서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란 하나님의 창조적 말씀을 오늘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매일의 믿음의 행위가 티쿤(תיקון) 행위가 되어 세상을 다시 에하드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의 마음과 사랑을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창조는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생명의 운동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빛이 있으라” 하신 그 순간처럼, 오늘도 우리의 영혼 속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그분의 음성이 울리고 있습니다. 베레쉬트 — 우리 안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 열립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의 생명력이 오늘도 우리 안에 가득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샤밭샬롬.

3 weeks ago | [YT] |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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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밭] 하아지누 האזינו Ha'azinu → 수코트 סכות Sukkot 5786(2025)

수코트(סכות, 초막절)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간 장막(סכה, 수카) 아래 거하며 하나님의 쉐키나(שכינה, 임재)의 그늘 속에 보호받았음을 기억하는 절기이자, 가나안 땅에서의 마지막 수확을 기뻐하며 감사드리는 절기입니다. 토라는 레위기 23장과 신명기 16장에서 이 절기를 기뻐하라는 명령과 수코트(סכות)를 함께 제정하며, 그 기쁨은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실천임을 강조합니다.

초막은 바람과 햇빛이 스며드는 임시 거처로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드러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신뢰하도록 이끕니다. 이는 “믿음의 그늘(צל האמונה, 짤 하에무나)”이라 불리는데, 초막에 거하는 행위를 신뢰의 행위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초막절에는 네 가지 종류의 식물(ארבע מינים, 아르바 미님)을 준비합니다. 레위기 23장 40절에 언급된 네 가지 식물은 ‘에트로그(אתרוג)’, ‘루라브(לולב)’, ‘하다쓰(הדס)’, ‘아라바(ערבה)’입니다. 이 식물들은 각기 다른 향기와 맛, 생태적 특성을 지니며, 공동체의 다양성과 하나님과의 통일성을 상징합니다.

‘에트로그(אתרוג)’는 시트론이라는 향기로운 감귤류 과일로, 향기와 맛을 모두 지녀 토라의 지식과 선한 행실을 겸비한 사람을 상징하며 ‘마음(לב, 레브)’을 대표합니다.
‘루라브(לולב)’는 대추야자나무의 어린 잎으로, 맛은 있으나 향기는 없어 지식은 있으나 선행은 부족한 사람을 상징하며, 곧게 솟은 형상 때문에 ‘척추(שדרה, 쉬드라)’를 의미합니다.
‘하다쓰(הדס)’는 도금양(Myrtus, 머틀) 가지로 향기는 있으나 맛은 없어 선행은 있지만 지식은 부족한 사람을 상징하며, 작고 푸른 잎들이 눈을 닮아 ‘눈(עיניים, 에이나임)’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라바(ערבה)’는 버드나무의 가지로 향기도 맛도 없어 지식과 선행 모두 부족한 사람을 상징하지만, ‘입술(שפתיים, 스파타임)’을 대표하여 기도와 찬양으로 성결케 되어야 할 인간의 필요성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초막절에 이 네 가지가 함께 묶여 흔드는 행위를 하는데, 이것은 공동체의 모든 차이를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의례로 이해하며, 초막절의 기쁨(שמחה, 심하)은 이 통합된 다양성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적 여정 속에서 우리는 각각의 다른 모습의 영혼의 몸을 현재 이루고 살아갑니다. 또한 그 영적 수준과 이해도는 과거, 현재, 미래 또는 공간의 다름에 따라 모두 다양성을 가지고 나타나게 되지요.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형태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각 영혼을 향한 계획과 목적이 다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 네 종류가 하나로 묶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음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기록하는데, 여기서 ‘거하시매’는 본래 ‘장막을 치다’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곧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 장막(סכה, 수카)을 치신 사건임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초막으로 오셨습니다. 초막(סכה, 수카)은 ‘말쿠트’(מלכות, 하나님의 통치)의 상징인데, 초막을 덮는 쓰카크(סכך)는 하나님의 쉐키나(שכינה, 임재)의 보호막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영적 통로이며, 인간이 세속적 거처를 떠나 하나님의 빛(אור אין סוף, 오르 에인 소프)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초막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렇듯 나 자신을 비우고, 자신의 안정과 통제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의탁하는 내적 훈련이자 하나님과의 결합을 갈망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초막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고,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초막 안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스스로를 모두 비우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함께할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초막은, 그리고 그날의 초막절은 하나님이 친히 그분의 형상과 모양으로 완성된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사건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가 토라를 살아내며, 초막에서 하나님을 만날 그 기쁨(שמחה, 심하) 가운데 사는 것은, 현실을 초월하는 자유의 상태를 갈망하며, 하나님과의 하나됨을 기대하는 마음 가운데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 기쁨의 초막절에 네 가지 종류의 결합을 이 시간 동안 우리 이웃과 이뤄내며, 하나님과의 하나 됨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변과 하나의 몸을 이뤄, 초막에서 만날 신랑의 형상과 그와 같은 형상의 신부의 만남을 기대하며 초막절로 들어갑니다.

샤밭샬롬.

1 month ago | [YT]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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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밭] 바옐레크 וילך Va’yelech → 하아지누 האזינו Ha'azinu 5786(2025)

하늘과 땅에 귀를 기울이라는 모세의 마지막 노래 하아지누(האזינו)는 단순한 시가 아니라, 영혼 깊숙이 스며드는 부르심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육신이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이스라엘 백성과 모든 창조 세계에 호소합니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האזינו השמים, 하아지누 하샤마임) 내가 말하리라. 땅이여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ותשמע הארץ, 베티쉬마 하아레츠)!”(신32:1). 히브리어 האזינו(하아지누)는 단순히 청각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듣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주의를 집중하여 듣고 응답하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예수님께서 반복하여 말씀하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11:15)와 깊은 공명을 이룹니다.

우리는 모두 귀를 가졌지만, 실제로는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은 종종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을 선택적으로 들으며, 불편하거나 불리한 진실은 흘려버립니다. 이러한 ‘선택적 청취’는 사실상 영혼이 들리지 않는 상태와 다르지 않습니다. 모세가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운 것은, 영혼을 향한 호소였습니다. “이제 마지막이 다가왔으니, 제발 영혼의 귀를 열고 들으라.” 이것은 모세의 간절한 유언과도 같습니다.

하아지누(האזינו)는 또한 심판과 자비의 긴장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의 배신과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의 신비는 하나님의 사랑을 하늘의 이슬처럼 내리는 은혜라고 표현하며,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비가 이슬처럼 조용히 내려 영혼을 깨운다고 설명합니다.

하아지누(האזינו)의 ‘듣는다, 귀를 기울이다’는 행위는 데베쿠트(דבקות), 하나님과의 영적 결합을 의미하며, 토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צלם אלוהים, 첼렘 엘로힘)에 점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욤 키푸르(יום כיפור, 대속죄일)를 앞두고 있습니다. 히브리 달력으로 티슈리(תשרי)월 10일인 이날은 레위기 16장 29절에 따라 “너희 영혼을 괴롭게 하라”는 명령 아래 금식과 철저한 참회의 날입니다. ‘괴롭게 한다(ענה, 아나)’는 단순히 고통을 가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영혼을 낮추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철저히 비우는 것을 뜻합니다. 욤 키푸르는 ‘모든 문이 닫히기 전, 가장 깊은 내면의 문이 열리는 날’로 묘사됩니다. 또한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빛 앞에서 가장 투명해지는 때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욤 키푸르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의 자기희생으로 속죄제물(כפר, 카파르: 덮다, 속죄하다)이 되셨습니다(히9:12). 그의 피는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던 휘장을 찢어(마27:51), 1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셨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르던 벽이 무너졌고, 우리는 에하드(אחד, 하나됨)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욤 키푸르의 중심 메시지인 ‘덮음과 화해’를 역사 속에서 완결, 그리고 성취시킨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하아지누(האזינו)가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은 단순한 순종이 아니라, 시간의 신성화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매 순간을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드리는 행위, 즉 현재를 ‘카이로스(하나님의 시간)’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욤 키푸르를 앞두고 우리는 육신이 듣고 싶은 소음을 내려놓고, 영혼이 토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리스도의 피가 헛되지 않도록 삶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날의 회개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사랑의 보답입니다.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그분께 드리는 전인격적 헌신입니다.

하나님의 절기는 결코 무심히 지나가는 날짜가 아닙니다. 하아지누(האזינו)가 우리를 ‘들음’으로 초대하고, 욤 키푸르가 ‘덮음과 회복’으로 인도할 때, 우리는 곧 초막 안에서 신랑 되신 주님과 재회하게 될 것입니다. 초막절의 초막은 비어 있지만, 그 비움 속에서 영혼은 새로워져 데베쿠트의 친밀함을 누립니다. 이때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소음에 귀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에 가까워진 영혼으로 그분의 음성에 응답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 시간이 다가옵니다.

기쁨과 경외가 공존하는 이 날들 속에서, 우리 모두가 겸손히 귀를 열어 듣고, 시간을 거룩히 구별하며, 주님과의 에하드를 회복하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이 모세가 남긴 노래의 마지막 외침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대속의 길 위에서 우리가 걸어야 할 참된 회개의 길입니다.

샤밭샬롬.

1 month ago (edited) | [YT] | 27

Beit KEDEM

[샤밭] 니짜빔 נצבים Nitzavim → 바옐레크 וילך Va’yelech 5785(2025)

우리가 걷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발을 움직이는 행위가 아닙니다. 걷는다는 것은 언제나 어떤 목적을 가지고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적 없는 걸음은 없습니다. 인간만이 직립보행을 허락받은 존재인 이유는, 다른 피조물처럼 눈앞의 본능만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저 먼 곳을 바라보며 지속적으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머리는 항상 땅에서 가장 위에 놓여 있으며, 그 머리에 내려오는 하나님의 왕관―케테르(כתר, 왕관)―은 인간이 단순히 자기 욕망을 위해 걷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향해 걷는 존재임을 상기시킵니다.

바옐레크(וילך, “그가 갔다”) 토라포션은 인간이 그 길에서 벗어날 것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보다 먼저 건너가사…”(신명기 31:3). 하나님은 이스라엘 앞서 걸어가시며 길을 예비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세에게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나를 버리고 언약을 어길 것이라”(신명기 31:16)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를 잊어버리고, 자기 뜻과 자아의 원함에 사로잡혀 길을 벗어나게 됩니다. 그 결과는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끊임없는 배신과 회개의 순환, 다시 말해 한계와 무력감 속의 반복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앞에서 걸어가시며, 언약을 끝내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지금 이 순간 무릎을 꿇고 회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의 욕망과 자아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길을 이탈하게 만들지만, 그 굴레를 결단으로 끊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역사의 흐름과 영혼의 운명이 걸린 시간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로쉬 하샤나(ראש השנה, 새해의 머리 – 올해는 양력2025년 9월 22일 일몰부터 24일 일몰까지)가 의미를 가집니다.

로쉬 하샤나는 단순히 새해가 아닙니다. 유대 전통은 이 날을 *욤 하딘(יום הדין, 심판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이 날 모든 인간의 행위를 심판하시고, 생명책에 그 이름을 기록하거나 지우신다고 믿습니다. 동시에 이는 아담의 창조일로 간주되며, 인류 전체의 기원이자 새 출발의 상징이 됩니다.

쇼파르(שופר, 뿔나팔)의 소리는 우리의 영혼을 흔들며 잠든 양심을 깨웁니다. 그것은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원초적 탄식, 회개의 울음소리입니다. 인간의 죄와 무력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비의 보좌를 열어주심을 알려주는 음성입니다.

이 날을 단순한 새해의 시작이 아니라 영혼의 재창조의 날입니다. 인간이 자기 존재 전체를 하나님 앞에 새롭게 세우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적 균형이 새롭게 조정된다고 볼 수 있는데, 기도와 회개, 그리고 쇼파르의 음성이 하나님의 보좌를 심판에서 자비로 옮기며, 우주적 말쿠트(מלכות, 왕권)가 새롭게 확립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신비는 인간의 결단과 우주의 질서가 맞닿아 있다는 사유를 열어줍니다.

바옐레크의 메시지와 로쉬 하샤나는 결국 하나로 만납니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잊고 자기 길을 가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배교.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신비. 그리고 그 사랑 속에서 다시금 회개하고, 생명책에 기록되기를 바라는 영혼의 몸부림. 이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서사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걷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목표를 향해 걷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향해 걷도록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우리의 머리 위에는 땅의 욕망이 아니라, 하늘의 왕관 *케테르(כתר, 왕관)가 놓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걸음은 방황이 됩니다. 로쉬 하샤나의 심판 앞에서, 그리고 바옐레크의 경고 앞에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다시금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쇼파르의 나팔 소리는 여전히 울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종말의 경고이자, 새로운 창조로 나아가라는 초대입니다. 우리의 걸음이 이제는 자기 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새로워진 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샤밭샬롬.

1 month ago | [YT]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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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밭] 키 타보 כי־תבוא Ki-Tavo → 니짜빔 נצבים Nitzavim 5785(2025)

사람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선택을 합니다. 이 선택들은 흩어진 점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하나의 선이 되어 우리 삶의 궤적을 그려냅니다. 결국 인생의 마지막에는, 내가 어떤 선택을 축적해왔는지가 드러나며 그 결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토라는 이 결정을 하나님과 영원 속으로 들어갈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짓는 중대한 선택으로 묘사합니다.

어린 시절(영혼의 어린 시절 또한)의 선택은 대부분 자기 중심적입니다. 배고픔, 욕망, 자아실현 같은 직접적인 욕구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숙의 과정은 “나”의 경계를 넘어 “이웃”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토라포션 니짜빔(נצבים)은 바로 그 전환의 순간을 선포합니다. 왕에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모두가 언약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은, 삶은 고립된 개인의 성취로만 완성되지 않고 공동체적 연대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시딤은 이 장면을 각 개인의 영혼에 깃든 신적 불꽃, 곧 니초츠 엘로키(ניצוץ אלוקי)의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불꽃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 만나고 합쳐질 때 비로소 큰 불길이 됩니다. 인간의 영혼은 세피로트(ספירות)의 차원과 연결된 신비적 유기체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는 티쿤(תיקון, 영혼의 교정)으로 이어질 수 있고, 이것은 세피로트의 완성을 가져옵니다. 우리의 선택은 단지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흩어진 신적 빛을 모으고 세계 전체를 회복하는 우주적 사건인 것입니다.

모세는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 30:19)를 선포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 곧 하임(חיים)은 단순히 육체적 생존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과의 데베쿠트(דבקות, 신적 결합)이며, 생명을 택하는 행위는 에츠 하하임(עץ החיים, 생명나무)의 흐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신성의 완성을 가져오는 것이고, 우주적 티쿤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 14:6)고 하시며, 모세가 선포한 “생명을 선택하라”는 요청을 자기 안에서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생명나무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하는 존재는 예수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단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요소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장벽은 고정관념, 이념, 가치관, 정치적 견해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들입니다. 그것들은 우리와 이웃을 갈라놓고, 영혼의 일치를 방해하는 경계선을 세웁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인간 영혼이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더 큰 장애물입니다. 오늘 내가 내리는 작은 선택 하나가 이 장벽을 두텁게 만들 수도 있고, 혹은 그것을 허물고 빛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니짜빔은 단순히 ‘언약 앞에 서 있다’는 역사적 사건을 넘어서, 인간 실존의 본질적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나는 어떤 선택을 했는가? 그 선택은 하나님과, 그리고 이웃과 더 가까워지게 하는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 곧 우리의 삶을 정의할 것입니다.

결국 니짜빔, 곧 “서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심을 매일 선택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입니다. 내가 그렇게 서 있을 때, 삶은 더 이상 내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홀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직조되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 또한, 자기사랑(아하바트 아츠모, אהבת עצמו)을 십자가와 함께 못박고, 육신의 안락을 위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삶을 선택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니짜빔은 우리를 하나님의 언약 앞에 굳건히 세워 놓습니다. 이것은 실존적 초대이며, 우주적 참여이며, 동시에 사랑과 생명의 길로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절대적 요청입니다.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존재를 규정하고, 그 존재가 곧 영원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의 선택 속에서 다시 서야 합니다. 바로 그 자리가 니짜빔의 자리이며, 하나님과 함께 영원 속으로 들어가는 문 앞입니다. 이번 한 주 우리 굳게 서는 삶을 하나님께 보여줍시다.

샤밭샬롬.

1 month ago | [YT] |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