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베이트케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베이트케뎀은 우리의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토라 가운데 계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 분을 향하고 있었음을 더욱 깊이 예배합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토라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토라포션에 맞추어 하나님의 때에 따라 꺼내 전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베이트 케뎀 예배와 함께 하는 모든 이에게 임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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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it KEDEM

[샤밭] 하아지누 האזינו Ha'azinu → 수코트 סכות Sukkot 5786(2025)

수코트(סכות, 초막절)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간 장막(סכה, 수카) 아래 거하며 하나님의 쉐키나(שכינה, 임재)의 그늘 속에 보호받았음을 기억하는 절기이자, 가나안 땅에서의 마지막 수확을 기뻐하며 감사드리는 절기입니다. 토라는 레위기 23장과 신명기 16장에서 이 절기를 기뻐하라는 명령과 수코트(סכות)를 함께 제정하며, 그 기쁨은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실천임을 강조합니다.

초막은 바람과 햇빛이 스며드는 임시 거처로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드러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신뢰하도록 이끕니다. 이는 “믿음의 그늘(צל האמונה, 짤 하에무나)”이라 불리는데, 초막에 거하는 행위를 신뢰의 행위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초막절에는 네 가지 종류의 식물(ארבע מינים, 아르바 미님)을 준비합니다. 레위기 23장 40절에 언급된 네 가지 식물은 ‘에트로그(אתרוג)’, ‘루라브(לולב)’, ‘하다쓰(הדס)’, ‘아라바(ערבה)’입니다. 이 식물들은 각기 다른 향기와 맛, 생태적 특성을 지니며, 공동체의 다양성과 하나님과의 통일성을 상징합니다.

‘에트로그(אתרוג)’는 시트론이라는 향기로운 감귤류 과일로, 향기와 맛을 모두 지녀 토라의 지식과 선한 행실을 겸비한 사람을 상징하며 ‘마음(לב, 레브)’을 대표합니다.
‘루라브(לולב)’는 대추야자나무의 어린 잎으로, 맛은 있으나 향기는 없어 지식은 있으나 선행은 부족한 사람을 상징하며, 곧게 솟은 형상 때문에 ‘척추(שדרה, 쉬드라)’를 의미합니다.
‘하다쓰(הדס)’는 도금양(Myrtus, 머틀) 가지로 향기는 있으나 맛은 없어 선행은 있지만 지식은 부족한 사람을 상징하며, 작고 푸른 잎들이 눈을 닮아 ‘눈(עיניים, 에이나임)’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라바(ערבה)’는 버드나무의 가지로 향기도 맛도 없어 지식과 선행 모두 부족한 사람을 상징하지만, ‘입술(שפתיים, 스파타임)’을 대표하여 기도와 찬양으로 성결케 되어야 할 인간의 필요성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초막절에 이 네 가지가 함께 묶여 흔드는 행위를 하는데, 이것은 공동체의 모든 차이를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의례로 이해하며, 초막절의 기쁨(שמחה, 심하)은 이 통합된 다양성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적 여정 속에서 우리는 각각의 다른 모습의 영혼의 몸을 현재 이루고 살아갑니다. 또한 그 영적 수준과 이해도는 과거, 현재, 미래 또는 공간의 다름에 따라 모두 다양성을 가지고 나타나게 되지요.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형태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각 영혼을 향한 계획과 목적이 다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 네 종류가 하나로 묶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음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기록하는데, 여기서 ‘거하시매’는 본래 ‘장막을 치다’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곧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 장막(סכה, 수카)을 치신 사건임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초막으로 오셨습니다. 초막(סכה, 수카)은 ‘말쿠트’(מלכות, 하나님의 통치)의 상징인데, 초막을 덮는 쓰카크(סכך)는 하나님의 쉐키나(שכינה, 임재)의 보호막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영적 통로이며, 인간이 세속적 거처를 떠나 하나님의 빛(אור אין סוף, 오르 에인 소프)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초막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렇듯 나 자신을 비우고, 자신의 안정과 통제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의탁하는 내적 훈련이자 하나님과의 결합을 갈망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초막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고,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초막 안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스스로를 모두 비우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함께할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초막은, 그리고 그날의 초막절은 하나님이 친히 그분의 형상과 모양으로 완성된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사건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가 토라를 살아내며, 초막에서 하나님을 만날 그 기쁨(שמחה, 심하) 가운데 사는 것은, 현실을 초월하는 자유의 상태를 갈망하며, 하나님과의 하나됨을 기대하는 마음 가운데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 기쁨의 초막절에 네 가지 종류의 결합을 이 시간 동안 우리 이웃과 이뤄내며, 하나님과의 하나 됨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변과 하나의 몸을 이뤄, 초막에서 만날 신랑의 형상과 그와 같은 형상의 신부의 만남을 기대하며 초막절로 들어갑니다.

샤밭샬롬.

5 days ago | [YT] | 25

Beit KEDEM

[샤밭] 바옐레크 וילך Va’yelech → 하아지누 האזינו Ha'azinu 5786(2025)

하늘과 땅에 귀를 기울이라는 모세의 마지막 노래 하아지누(האזינו)는 단순한 시가 아니라, 영혼 깊숙이 스며드는 부르심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육신이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이스라엘 백성과 모든 창조 세계에 호소합니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האזינו השמים, 하아지누 하샤마임) 내가 말하리라. 땅이여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ותשמע הארץ, 베티쉬마 하아레츠)!”(신32:1). 히브리어 האזינו(하아지누)는 단순히 청각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듣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주의를 집중하여 듣고 응답하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예수님께서 반복하여 말씀하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11:15)와 깊은 공명을 이룹니다.

우리는 모두 귀를 가졌지만, 실제로는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은 종종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을 선택적으로 들으며, 불편하거나 불리한 진실은 흘려버립니다. 이러한 ‘선택적 청취’는 사실상 영혼이 들리지 않는 상태와 다르지 않습니다. 모세가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운 것은, 영혼을 향한 호소였습니다. “이제 마지막이 다가왔으니, 제발 영혼의 귀를 열고 들으라.” 이것은 모세의 간절한 유언과도 같습니다.

하아지누(האזינו)는 또한 심판과 자비의 긴장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의 배신과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의 신비는 하나님의 사랑을 하늘의 이슬처럼 내리는 은혜라고 표현하며,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비가 이슬처럼 조용히 내려 영혼을 깨운다고 설명합니다.

하아지누(האזינו)의 ‘듣는다, 귀를 기울이다’는 행위는 데베쿠트(דבקות), 하나님과의 영적 결합을 의미하며, 토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צלם אלוהים, 첼렘 엘로힘)에 점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욤 키푸르(יום כיפור, 대속죄일)를 앞두고 있습니다. 히브리 달력으로 티슈리(תשרי)월 10일인 이날은 레위기 16장 29절에 따라 “너희 영혼을 괴롭게 하라”는 명령 아래 금식과 철저한 참회의 날입니다. ‘괴롭게 한다(ענה, 아나)’는 단순히 고통을 가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영혼을 낮추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철저히 비우는 것을 뜻합니다. 욤 키푸르는 ‘모든 문이 닫히기 전, 가장 깊은 내면의 문이 열리는 날’로 묘사됩니다. 또한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빛 앞에서 가장 투명해지는 때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욤 키푸르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의 자기희생으로 속죄제물(כפר, 카파르: 덮다, 속죄하다)이 되셨습니다(히9:12). 그의 피는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던 휘장을 찢어(마27:51), 1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셨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르던 벽이 무너졌고, 우리는 에하드(אחד, 하나됨)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욤 키푸르의 중심 메시지인 ‘덮음과 화해’를 역사 속에서 완결, 그리고 성취시킨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하아지누(האזינו)가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은 단순한 순종이 아니라, 시간의 신성화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매 순간을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드리는 행위, 즉 현재를 ‘카이로스(하나님의 시간)’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욤 키푸르를 앞두고 우리는 육신이 듣고 싶은 소음을 내려놓고, 영혼이 토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리스도의 피가 헛되지 않도록 삶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날의 회개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사랑의 보답입니다.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그분께 드리는 전인격적 헌신입니다.

하나님의 절기는 결코 무심히 지나가는 날짜가 아닙니다. 하아지누(האזינו)가 우리를 ‘들음’으로 초대하고, 욤 키푸르가 ‘덮음과 회복’으로 인도할 때, 우리는 곧 초막 안에서 신랑 되신 주님과 재회하게 될 것입니다. 초막절의 초막은 비어 있지만, 그 비움 속에서 영혼은 새로워져 데베쿠트의 친밀함을 누립니다. 이때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소음에 귀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에 가까워진 영혼으로 그분의 음성에 응답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 시간이 다가옵니다.

기쁨과 경외가 공존하는 이 날들 속에서, 우리 모두가 겸손히 귀를 열어 듣고, 시간을 거룩히 구별하며, 주님과의 에하드를 회복하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이 모세가 남긴 노래의 마지막 외침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대속의 길 위에서 우리가 걸어야 할 참된 회개의 길입니다.

샤밭샬롬.

1 week ago (edited) | [YT] | 27

Beit KEDEM

[샤밭] 니짜빔 נצבים Nitzavim → 바옐레크 וילך Va’yelech 5785(2025)

우리가 걷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발을 움직이는 행위가 아닙니다. 걷는다는 것은 언제나 어떤 목적을 가지고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적 없는 걸음은 없습니다. 인간만이 직립보행을 허락받은 존재인 이유는, 다른 피조물처럼 눈앞의 본능만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저 먼 곳을 바라보며 지속적으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머리는 항상 땅에서 가장 위에 놓여 있으며, 그 머리에 내려오는 하나님의 왕관―케테르(כתר, 왕관)―은 인간이 단순히 자기 욕망을 위해 걷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향해 걷는 존재임을 상기시킵니다.

바옐레크(וילך, “그가 갔다”) 토라포션은 인간이 그 길에서 벗어날 것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보다 먼저 건너가사…”(신명기 31:3). 하나님은 이스라엘 앞서 걸어가시며 길을 예비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세에게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나를 버리고 언약을 어길 것이라”(신명기 31:16)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를 잊어버리고, 자기 뜻과 자아의 원함에 사로잡혀 길을 벗어나게 됩니다. 그 결과는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끊임없는 배신과 회개의 순환, 다시 말해 한계와 무력감 속의 반복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앞에서 걸어가시며, 언약을 끝내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지금 이 순간 무릎을 꿇고 회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의 욕망과 자아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길을 이탈하게 만들지만, 그 굴레를 결단으로 끊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역사의 흐름과 영혼의 운명이 걸린 시간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로쉬 하샤나(ראש השנה, 새해의 머리 – 올해는 양력2025년 9월 22일 일몰부터 24일 일몰까지)가 의미를 가집니다.

로쉬 하샤나는 단순히 새해가 아닙니다. 유대 전통은 이 날을 *욤 하딘(יום הדין, 심판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이 날 모든 인간의 행위를 심판하시고, 생명책에 그 이름을 기록하거나 지우신다고 믿습니다. 동시에 이는 아담의 창조일로 간주되며, 인류 전체의 기원이자 새 출발의 상징이 됩니다.

쇼파르(שופר, 뿔나팔)의 소리는 우리의 영혼을 흔들며 잠든 양심을 깨웁니다. 그것은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원초적 탄식, 회개의 울음소리입니다. 인간의 죄와 무력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비의 보좌를 열어주심을 알려주는 음성입니다.

이 날을 단순한 새해의 시작이 아니라 영혼의 재창조의 날입니다. 인간이 자기 존재 전체를 하나님 앞에 새롭게 세우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적 균형이 새롭게 조정된다고 볼 수 있는데, 기도와 회개, 그리고 쇼파르의 음성이 하나님의 보좌를 심판에서 자비로 옮기며, 우주적 말쿠트(מלכות, 왕권)가 새롭게 확립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신비는 인간의 결단과 우주의 질서가 맞닿아 있다는 사유를 열어줍니다.

바옐레크의 메시지와 로쉬 하샤나는 결국 하나로 만납니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잊고 자기 길을 가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배교.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신비. 그리고 그 사랑 속에서 다시금 회개하고, 생명책에 기록되기를 바라는 영혼의 몸부림. 이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서사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걷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목표를 향해 걷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향해 걷도록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우리의 머리 위에는 땅의 욕망이 아니라, 하늘의 왕관 *케테르(כתר, 왕관)가 놓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걸음은 방황이 됩니다. 로쉬 하샤나의 심판 앞에서, 그리고 바옐레크의 경고 앞에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다시금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쇼파르의 나팔 소리는 여전히 울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종말의 경고이자, 새로운 창조로 나아가라는 초대입니다. 우리의 걸음이 이제는 자기 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새로워진 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샤밭샬롬.

2 weeks ago | [YT] | 30

Beit KEDEM

[샤밭] 키 타보 כי־תבוא Ki-Tavo → 니짜빔 נצבים Nitzavim 5785(2025)

사람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선택을 합니다. 이 선택들은 흩어진 점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하나의 선이 되어 우리 삶의 궤적을 그려냅니다. 결국 인생의 마지막에는, 내가 어떤 선택을 축적해왔는지가 드러나며 그 결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토라는 이 결정을 하나님과 영원 속으로 들어갈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짓는 중대한 선택으로 묘사합니다.

어린 시절(영혼의 어린 시절 또한)의 선택은 대부분 자기 중심적입니다. 배고픔, 욕망, 자아실현 같은 직접적인 욕구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숙의 과정은 “나”의 경계를 넘어 “이웃”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토라포션 니짜빔(נצבים)은 바로 그 전환의 순간을 선포합니다. 왕에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모두가 언약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은, 삶은 고립된 개인의 성취로만 완성되지 않고 공동체적 연대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시딤은 이 장면을 각 개인의 영혼에 깃든 신적 불꽃, 곧 니초츠 엘로키(ניצוץ אלוקי)의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불꽃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 만나고 합쳐질 때 비로소 큰 불길이 됩니다. 인간의 영혼은 세피로트(ספירות)의 차원과 연결된 신비적 유기체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는 티쿤(תיקון, 영혼의 교정)으로 이어질 수 있고, 이것은 세피로트의 완성을 가져옵니다. 우리의 선택은 단지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흩어진 신적 빛을 모으고 세계 전체를 회복하는 우주적 사건인 것입니다.

모세는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 30:19)를 선포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 곧 하임(חיים)은 단순히 육체적 생존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과의 데베쿠트(דבקות, 신적 결합)이며, 생명을 택하는 행위는 에츠 하하임(עץ החיים, 생명나무)의 흐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신성의 완성을 가져오는 것이고, 우주적 티쿤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 14:6)고 하시며, 모세가 선포한 “생명을 선택하라”는 요청을 자기 안에서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생명나무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하는 존재는 예수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단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요소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장벽은 고정관념, 이념, 가치관, 정치적 견해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들입니다. 그것들은 우리와 이웃을 갈라놓고, 영혼의 일치를 방해하는 경계선을 세웁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인간 영혼이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더 큰 장애물입니다. 오늘 내가 내리는 작은 선택 하나가 이 장벽을 두텁게 만들 수도 있고, 혹은 그것을 허물고 빛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니짜빔은 단순히 ‘언약 앞에 서 있다’는 역사적 사건을 넘어서, 인간 실존의 본질적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나는 어떤 선택을 했는가? 그 선택은 하나님과, 그리고 이웃과 더 가까워지게 하는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 곧 우리의 삶을 정의할 것입니다.

결국 니짜빔, 곧 “서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심을 매일 선택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입니다. 내가 그렇게 서 있을 때, 삶은 더 이상 내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홀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직조되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 또한, 자기사랑(아하바트 아츠모, אהבת עצמו)을 십자가와 함께 못박고, 육신의 안락을 위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삶을 선택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니짜빔은 우리를 하나님의 언약 앞에 굳건히 세워 놓습니다. 이것은 실존적 초대이며, 우주적 참여이며, 동시에 사랑과 생명의 길로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절대적 요청입니다.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존재를 규정하고, 그 존재가 곧 영원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의 선택 속에서 다시 서야 합니다. 바로 그 자리가 니짜빔의 자리이며, 하나님과 함께 영원 속으로 들어가는 문 앞입니다. 이번 한 주 우리 굳게 서는 삶을 하나님께 보여줍시다.

샤밭샬롬.

3 weeks ago | [YT] | 38

Beit KEDEM

[샤밭] 키 테쩨 כי־תצא Ki-Tetzei → 키 타보 כי־תבוא Ki-Tavo 5785(2025)

토라가 전하는 축복과 저주는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물질적 풍요와 고난의 부재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 속에서 축복은 언제나 권력, 부, 안락함으로 환원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점쟁이나 무당을 찾고, 각종 종교의 의식을 빌려 한 번 뿐인 인생에서 역경 대신 평탄한 길을 걸으며, 가족의 안위와 물질적 번영을 얻기를 바랐습니다.

유럽의 수많은 왕조와 그들이 남긴 궁전들은 인간이 추구한 축복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비엔나의 쇤부른 궁전에 들어서면 황실의 위엄을 과시하려 세운 정원과, 1700년대부터 이어져 온 동물원까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축복’이라 불리는 화려함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 끝은 모두 덧없는 허상으로 남았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늘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매달려 왔으나, 그 대답은 언제나 물질적 풍요와 권력의 덧없음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키 타보 포션은 이러한 인간의 오래된 습관에 다른 출발점을 제시합니다. 신명기 28장은 축복과 저주의 기준을 분명히 선포합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신 28:1–2)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신 28:15)

토라가 말하는 축복과 저주는 단순한 보상과 형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적 질서 속에서 인간 영혼의 회로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드러내는 원리입니다. 순종이란 억압적인 복종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본래의 창조 질서로 귀환하는 행위입니다. 받으려는 삶은 결국 저주로 변하고, 나누기 위한 삶만이 축복으로 변환됩니다.

특히 키 타보 포션에 등장하는 ‘첫 열매’의 규례는 이러한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응축합니다. 첫 열매는 단순히 곡식의 한 다발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이 가진 가장 순수한 열정을 하나님께 바치는 사건입니다. 영혼의 첫 열정은 자기 자신을 위한 불꽃이 아니라, 빛을 나누기 위한 출발점입니다. 이 열정은 세피로트의 균형을 가동하는 에너지와 같으며, 그것이 자신만을 위해 머물면 회로는 끊어지고 빛은 흩어집니다. 결국 나누어지지 않는 축복은 그림자로 변하고, 그림자는 저주로 굳어집니다. 축복과 저주는 우주의 언어이며, 빛과 그림자의 변증법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시는 은밀한 메시지입니다.

고린도전서 말씀은 이 토라의 메시지를 더욱 깊은 차원으로 확장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0)라 부릅니다. 신명기의 첫 열매가 인간의 기억과 감사의 행위였다면, 그리스도의 첫 열매는 인류 전체를 위한 구속과 부활의 보증입니다. 산산이 흩어진 영혼의 빛을 다시 모으고, 어둠 속에서 갇힌 인간의 삶을 해방시키는 첫 결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구원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우주적 약속의 실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풍성한 삶이란 단순히 물질적 만족이나 안전이 아니라, 영혼이 빛을 흘려보내며 하나님의 질서 속에 들어가는 삶입니다. 다시 말해, 축복은 받는 데서 완성되지 않고, 나누는 데서 영원히 빛을 발합니다.

결국 키 타보 포션이 전하는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인생이 아무리 수많은 축복으로 둘러싸여 있다 하더라도, 주기 위한 삶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저주로 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첫 열정을 하나님께 드리고, 빛을 나누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빛은 흩어지지 않고 하나로 모여 에하드의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인류가 오랜 세월 붙잡으려 했던 축복은 사실 그림자였지만, 말씀 속에서 나누어진 삶은 그림자를 빛으로 전환시켜 세대를 넘어 영원히 남게 됩니다.이번 키 타보 주간에 그림자가 아닌 빛을 발견하고 이웃과 그 빛을 나누는 시간 보내시길 기도합니다. 우리의 나눔 속에서 더 큰 하나님의 빛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샤밭샬롬.

1 month ago | [YT] | 24

Beit KEDEM

[샤밭] 쇼프팀 שׁפטים Shoftim 5785(2025) → 키 테쩨 כִּי־תֵצֵא Ki-Tetzei

키 테쩨 말씀인 신명기 21장 10절은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울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손에 넘기시므로 네가 그들을 사로잡은 후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키 테쩨(כִּי־תֵצֵא, “네가 나갈 때”)라는 제목은 단순한 외적 전투의 상황을 넘어, 인간 존재 전체가 끊임없이 겪는 내적 전쟁에 대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삶은 늘 싸움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전쟁 서술은 피의 기록이 아니라, 영혼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순종, 빛과 어둠 사이의 투쟁을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언제나 미움과 배척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민족의 이름, 야샤르-엘(יִשְׂרָ-אֵל, “곧바로 하나님께”)은 인간 내면에 새겨진 불멸의 원형을 드러냅니다. 우리 안에도 야샤르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성의 벽을 뚫고 곧장 빛으로 향하려는 의지, 결코 꺼지지 않는 작은 불꽃입니다. 에고는 이 불꽃을 억누르려 하지만, 불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가는 비밀스러운 자력이며, 동시에 은혜의 자기 증명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불꽃 앞에서 늘 흔들립니다. 내려놓지 못하는 집착,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 어떤 하나가 우리의 발목을 붙듭니다. 그것이 바로 토라가 말하는 ‘적군’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을 우리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처리하지 못할 때, 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전쟁은 타인을 향한 칼날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결단의 질문이 됩니다.

히브리어로 회개를 뜻하는 테슈바(תְּשׁוּבָה, “돌아옴”)는 잃어버린 본래의 자리, 곧 야샤르엘의 빛을 다시 찾는 길입니다. 회개란 나의 껍질을 벗겨내고, 원래의 투명한 심연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영혼이 본향으로 회귀하는 우주의 움직임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태복음 11:28)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그렇게 받기 위해서 애쓰며 살아가던 그 삶에서 이제 다시 빛으로 돌아오라는 바로 이 귀환의 초대이며, 내적 전쟁의 끝에서 드러나는 참된 샤밭의 빛입니다.

키 테쩨 토라포션은 단일 토라포션에서 가장 많은 74개의 계명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인간 내면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상징의 지도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우리는 욕망을 기다림으로 정화하고, 생명에 대한 자비를 통해 더 높은 차원의 자비를 일깨우며, 작은 행위의 정직함 속에서 전체 세계의 균형을 회복합니다. 우리 안의 니쪼쪼트(נִיצוֹצוֹת, 신적인 불꽃들)을 구출하는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산산이 흩어진 빛을 모으는 작은 실천들이 모여, 세상은 다시 원래의 빛을 회복하게 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3)라 말했습니다. 이는 키테쩨 토라포션의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신21:23)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토라는 시신을 밤새 매달지 말고 조속히 묻으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그 형상이 모욕당하지 않도록 존엄을 회복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 구절은 역설로 뒤집혔습니다. 저주받은 자리에서 빛이 드러났고, 모욕의 자리에서 존귀가 회복되었습니다. 인간적 패배의 가장 낮은 자리가 곧 하나님의 영광의 가장 높은 자리로 전환된 것입니다.

엘룰(אֱלוּל)의 시간은 바로 이 싸움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스스로를 비추고, 포기하지 못하는 것들을 내려놓으며, 내적 전쟁의 결말을 준비하는 달입니다. 곧 티슈리월이 오게 되지요. 하나님은 이미 승리를 우리 손에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를 현실로 만드는 것은, 오늘 내가 내리는 작지만 영원한 결단입니다.

삶은 끊임없이 우리를 두 갈래 길에 세웁니다. 내 욕망(세상)을 붙들 것인가, 하나님을 붙들 것인가. 그 길목에서 우리가 테슈바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이스라엘의 승리의 역사는 단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내 삶 속에서 새롭게 펼쳐지는 현재의 사건이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영혼은 마침내 전쟁을 멈추고, 빛을 향해 곧장 걸어 들어갑니다.

샤밭샬롬.

1 month ago | [YT] | 26

Beit KEDEM

[샤밭] 르에 ראה Re’er → 쇼프팀 שׁפטים Shoftim 5785(2025)

심판이라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삶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죽음을 선사합니다. 법정에 들어선 사람은 누구나 압니다. 재판관의 한마디가 그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에, 변호인은 최선을 다해 피고인의 입장을 변호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목소리가 그 자리에서 관철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모든 방향이 재판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영적인 삶의 법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갈 영원의 차원에서 훨씬 더 중대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죽음 이후의 심판만을 떠올릴 뿐 지금 이 순간에 벌어지고 있는 재판을 간과합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매 순간 재판이 벌어지고, 그 재판관의 자리에 서 있는 이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 안의 자아가 모든 감각의 문을 관리하며, 내가 무엇을 보고 듣고 말하는지를 결정합니다. 하지만 그 결정은 대개 나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그 과정에서 내 영혼의 목소리는 점점 들리지 않게 됩니다. 욕망은 한 번 양보받으면 다음에는 더 큰 요구를 합니다. 그 결과 내 삶의 색은 자아의 욕구에 맞춰 칠해지고, 영혼은 점점 움츠러들어 버립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입니다.

쇼프팀 토라포션에서는 이를 지적하며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들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신16:18). 이 말씀의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흥미롭게도 “성”이 아니라 “성문들(쉐야레카, שעריך)”이라고 표현합니다. 성문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사람의 감각기관, 곧 눈과 귀와 입 등을 가리킵니다. 각 문마다 재판관을 세우라는 것은 곧, 내가 무엇을 받아들이고 내보내는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마음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생각과 욕망을 분별하지 않으면, 그 자리는 곧 사탄의 속삭임에 빼앗기기 마련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23:11)

그러나 우리의 감각은 너무 크고, 우리의 욕망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큰 자’로 살아가려 합니다. 이 욕망이란 거대한 탐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상에서 부지불식간에 흘러나오는 작은 생각들,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내가 이만큼 했으면 된 것 아닌가?”,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와 같은 마음속 대화들입니다. 이 모든 것은 내 자아가 재판관 자리에 앉아 판결을 내려버린 결과입니다.

그러나 성문에 세워야 할 재판관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감각의 문마다 세울 때, 비로소 그분의 뜻이 나의 내적 세계에서 판결을 내리고, 내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이어받아,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둠의 세력과의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참된 전쟁은 외부가 아니라 내 안의 욕망과의 싸움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 토라를 배우며 다시 새겨야 할 마음가짐은 분명합니다. 내 모든 감각기관에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나의 판단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 이상 자기욕망의 법정에 서는 피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 안에서 자유를 얻는 백성이 됩니다. 오늘 이 샤밭에 우리의 생각과 의견을 내려놓고, 주님의 샬롬 속에서 내 영혼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자리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1 month ago | [YT] | 27

Beit KEDEM

[샤밭] 에케브 עקב Eikev 5785(2025) → 르에 ראה Re’er 5785(2025)


'르에'는 ‘보라’라는 뜻입니다. 보는 것은 단순한 시각적 행위가 아니라, 존재와 삶을 해석하는 방식이며,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인식의 지도가 그려집니다. 같은 사건, 같은 현실도 어떤 이에게는 축복으로, 또 다른 이에게는 저주로 다가옵니다.
토라포션 '르에'는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외부의 사건보다 그 사건을 담아내는 우리의 내면이 삶의 의미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결국 복과 저주의 차이는 상황이 아니라 관점의 차이에 있습니다.



관점은 단번에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걸어온 길, 겪어온 관계, 그리고 우리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선택해 온 가치들의 층위 위에 세워집니다. 하지만 인간의 관점은 불완전하고, 때로는 자기 자신만의 울타리에 갇히기도 합니다. 나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모든 관점들은 우리를 한계에 갇히게 만듭니다.
영은 한계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라고 하는 육신을 기준으로 사고하는 삶은 확장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결국 이 한계를 넘어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관점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 다다른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시선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변모하는 것을 뜻합니다.



나를 중심으로 한 시선은 세계를 이기적으로 재단합니다. 이 시선은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모든 것을 ‘좋음’이라 부르고, 그 욕망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나쁨’이라 규정합니다. 그러나 이기심이 이타심으로 변화되면, 나의 관점은 전혀 다른 지평을 바라보게 됩니다. 타인의 기쁨과 아픔 속에서 나의 마음이 움직이고, 나의 선택이 타인을 살리는 방향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복을 선택하는 눈’입니다.



우리는 종종 영적인 세계를 마치 물리적 세계와 분리된 영역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영의 성장은 육신의 삶을 통과해야만 가능합니다. 몸이 있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는 선택하고 행동하며, 그 모든 과정이 영혼의 형태를 빚습니다. 물리적 세계에서의 반복적인 훈련과 작은 실천들이 영혼을 세우는 기둥이 됩니다.



르에의 메시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를 멈춰 세웁니다. “보라”는 말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그것은 단지 눈앞의 형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하나님의 뜻과 생명의 가능성을 바라보는 훈련입니다. 복과 저주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운명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형성되는 내면의 풍경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선택의 문 앞에 서 있으며, 그 선택은 관점의 전환에서 시작됩니다.



결국 ‘보라’는 명령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더 깊이, 더 넓게, 더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초대입니다. 그렇게 관점이 변화될 때,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시선과 맞닿게 되고, 그 안에서 비로소 복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르에는 저희 부부의 결혼 토라포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저희 부부의 그 관점과 인식을 바꾸기 위해 토라의 삶으로 부르신 것 같습니다. 물리적인 세계에서 내가 하는 매일의 선택이 육신이 아닌 영이기를, 받기 위함이 아니라 주기 위함이기를 오늘도 기도합니다.



샤밭샬롬.

1 month ago | [YT] | 39

Beit KEDEM

[샤밭] 바에트하난 ואתחנן Va’etchanan → 에케브 עקב Eikev 5785(2025)

히브리어로 “목이 곧은 백성”은 עם קשה ערף(암 케셰 오렢)으로 표현됩니다. 이 표현은 신명기 9장 6절과 13절에서 사용되며, 직역하면 “목이 단단한 백성” 또는 “고집 센 백성”을 의미합니다. קשה (카셰)는 “단단하다”, “완고하다”를 뜻하고, ערף(오레프)는 “목덜미” 또는 “목”을 가리킵니다. 보통 이 관용구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집스럽고 반항적인 태도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하는 성향을 나타냅니다.

암 케셰 오렢(עם קשה ערף)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살펴보면, 이 표현은 단순한 부정적 특성을 넘어 영적이고 실존적 차원에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목이 곧음”은 인간 영혼의 יצר הרע(예쩨르 하라아, 악한 성향/경향성)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고집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려는 자기중심적 태도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부정적인 특성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고집이 다 있는데, 이 고집은 긍정적으로 전환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고집은 거룩함을 향한 열정으로 바뀔 수 있으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사명을 강렬하게 추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고집은 우리가 믿음의 여정을 갈 때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불굴의 의지로 나타나며, 이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는 자들의 헌신을 강화합니다. 물론 우리는 자신의 “목이 곧음”을 תשובה(테슈바, 회개)를 통해 그리고 תורה(토라) 공부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암 케셰 오렢(עם קשה ערף)는 또한 영혼의 내적 갈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נשמה(네샤마)와 יצר הרע (예쩨르 하라아, 악한 성향) 사이의 긴장 속에 있다고 표현합니다. 목이 곧음은 이 물질적 본성이 하나님의 빛(אור אין סוף, 오르 에인 소프, 무한의 빛)에 저항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 고집은 완전히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영혼이 תיקון(티쿤, 교정)을 통해 우리 영혼의 미션을 성취하기 위한 도전입니다. 이스라엘의 반항은 영혼이 신성한 근원과 씨름하며 더 높은 의식으로 올라가려는 과정의 일부입니다.

루바비치 랍비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과 씨름하는 민족이라고 보았으며, 이는 그들이 단순히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깊이 탐구하고 도전하는 영적 열정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이 고집은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אור לגויים(오르 라고임, 열방의 빛)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강인함을 제공합니다. 금송아지 사건(신명기 9:16-21)에서 이스라엘의 반항은 실패였지만, 모세의 중보와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 그들의 사명이 재확인되었고, 미드라쉬에서는 이 부분을 이스라엘의 고집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언약의 지속성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우리는 내 안의 이스라엘이 이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영적 속성이 일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신비에서는 עם קשה ערף와 금송아지 사건, 그리고 깨진 돌판(신명기 9:17)을 שבירת הכלים(쉐비라트 하켈림, 그릇의 파괴) 개념과 연결합니다. 이스라엘의 고집은 신성한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지만, 새 돌판(10:1-5)은 תיקון עולם(티쿤 올람)을 상징합니다. 이 과정에서 고집은 영적 갱신과 재창조의 기회로 전환됩니다. 개인이 자신의 “깨진 조각”(실패와 고집)을 인정하고, 이를 תשובה와 영적 노력으로 재구성하여 하나님과의 연결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암 케셰 오렢(עם קשה ערף)는 일상적 삶에서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것은 모든 행동, 심지어 세속적인 것들까지도 하나님을 섬김으로 전환이 가능함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집스럽게 자신의 목표를 추구한다면, 그것이 처음에는 자신을 위한 것일 수 있지만, 결국 나의 목적이 변화되는 때에 이를 토라 공부와 이웃사랑으로 돌려 그 힘과 능력이 거룩한 목적으로 사용되게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일상의 삶에서 나의 목적을 하나님께 고정하기 위해 기도의 삶으로 나아가고, 회개의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저에게 있는 하나의 확신은, 때로는 지치고 어려울지라도 우리가 멈추지 않고 이 토라의 빛을 사모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의 데베쿠트를 향해 계속 나아간다면 우리의 목이 곧음은 곧 전환의 때를 맞이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일 수도 있습니다.

샤밭샬롬

2 months ago (edited) | [YT] | 28

Beit KEDEM

최근 베이트케뎀을 사칭하여 비슷한 이름과 프로필 이미지를 사용하며 기부·후원 요청을 하는 사례가 발견되었습니다.
해당 댓글을 삭제하고, 해당 사용자를 숨김처리하였으나 주의 부탁드립니다.

혹시 기부 요청을 받으셨거나, 받으신다면 반드시 사실 여부를 먼저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 의심되는 계정은 저희에게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2 months ago (edited) | [YT] |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