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에 귀를 기울이라는 모세의 마지막 노래 하아지누(האזינו)는 단순한 시가 아니라, 영혼 깊숙이 스며드는 부르심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육신이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이스라엘 백성과 모든 창조 세계에 호소합니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האזינו השמים, 하아지누 하샤마임) 내가 말하리라. 땅이여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ותשמע הארץ, 베티쉬마 하아레츠)!”(신32:1). 히브리어 האזינו(하아지누)는 단순히 청각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듣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주의를 집중하여 듣고 응답하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예수님께서 반복하여 말씀하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11:15)와 깊은 공명을 이룹니다.
우리는 모두 귀를 가졌지만, 실제로는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은 종종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을 선택적으로 들으며, 불편하거나 불리한 진실은 흘려버립니다. 이러한 ‘선택적 청취’는 사실상 영혼이 들리지 않는 상태와 다르지 않습니다. 모세가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운 것은, 영혼을 향한 호소였습니다. “이제 마지막이 다가왔으니, 제발 영혼의 귀를 열고 들으라.” 이것은 모세의 간절한 유언과도 같습니다.
하아지누(האזינו)는 또한 심판과 자비의 긴장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의 배신과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의 신비는 하나님의 사랑을 하늘의 이슬처럼 내리는 은혜라고 표현하며,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비가 이슬처럼 조용히 내려 영혼을 깨운다고 설명합니다.
하아지누(האזינו)의 ‘듣는다, 귀를 기울이다’는 행위는 데베쿠트(דבקות), 하나님과의 영적 결합을 의미하며, 토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צלם אלוהים, 첼렘 엘로힘)에 점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욤 키푸르(יום כיפור, 대속죄일)를 앞두고 있습니다. 히브리 달력으로 티슈리(תשרי)월 10일인 이날은 레위기 16장 29절에 따라 “너희 영혼을 괴롭게 하라”는 명령 아래 금식과 철저한 참회의 날입니다. ‘괴롭게 한다(ענה, 아나)’는 단순히 고통을 가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영혼을 낮추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철저히 비우는 것을 뜻합니다. 욤 키푸르는 ‘모든 문이 닫히기 전, 가장 깊은 내면의 문이 열리는 날’로 묘사됩니다. 또한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빛 앞에서 가장 투명해지는 때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욤 키푸르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의 자기희생으로 속죄제물(כפר, 카파르: 덮다, 속죄하다)이 되셨습니다(히9:12). 그의 피는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던 휘장을 찢어(마27:51), 1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셨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르던 벽이 무너졌고, 우리는 에하드(אחד, 하나됨)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욤 키푸르의 중심 메시지인 ‘덮음과 화해’를 역사 속에서 완결, 그리고 성취시킨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하아지누(האזינו)가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은 단순한 순종이 아니라, 시간의 신성화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매 순간을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드리는 행위, 즉 현재를 ‘카이로스(하나님의 시간)’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욤 키푸르를 앞두고 우리는 육신이 듣고 싶은 소음을 내려놓고, 영혼이 토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리스도의 피가 헛되지 않도록 삶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날의 회개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사랑의 보답입니다.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그분께 드리는 전인격적 헌신입니다.
하나님의 절기는 결코 무심히 지나가는 날짜가 아닙니다. 하아지누(האזינו)가 우리를 ‘들음’으로 초대하고, 욤 키푸르가 ‘덮음과 회복’으로 인도할 때, 우리는 곧 초막 안에서 신랑 되신 주님과 재회하게 될 것입니다. 초막절의 초막은 비어 있지만, 그 비움 속에서 영혼은 새로워져 데베쿠트의 친밀함을 누립니다. 이때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소음에 귀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에 가까워진 영혼으로 그분의 음성에 응답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 시간이 다가옵니다.
기쁨과 경외가 공존하는 이 날들 속에서, 우리 모두가 겸손히 귀를 열어 듣고, 시간을 거룩히 구별하며, 주님과의 에하드를 회복하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이 모세가 남긴 노래의 마지막 외침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대속의 길 위에서 우리가 걸어야 할 참된 회개의 길입니다.
Beit KEDEM
[샤밭] 바옐레크 וילך Va’yelech → 하아지누 האזינו Ha'azinu 5786(2025)
하늘과 땅에 귀를 기울이라는 모세의 마지막 노래 하아지누(האזינו)는 단순한 시가 아니라, 영혼 깊숙이 스며드는 부르심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육신이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이스라엘 백성과 모든 창조 세계에 호소합니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האזינו השמים, 하아지누 하샤마임) 내가 말하리라. 땅이여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ותשמע הארץ, 베티쉬마 하아레츠)!”(신32:1). 히브리어 האזינו(하아지누)는 단순히 청각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듣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주의를 집중하여 듣고 응답하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예수님께서 반복하여 말씀하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11:15)와 깊은 공명을 이룹니다.
우리는 모두 귀를 가졌지만, 실제로는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은 종종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을 선택적으로 들으며, 불편하거나 불리한 진실은 흘려버립니다. 이러한 ‘선택적 청취’는 사실상 영혼이 들리지 않는 상태와 다르지 않습니다. 모세가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운 것은, 영혼을 향한 호소였습니다. “이제 마지막이 다가왔으니, 제발 영혼의 귀를 열고 들으라.” 이것은 모세의 간절한 유언과도 같습니다.
하아지누(האזינו)는 또한 심판과 자비의 긴장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의 배신과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의 신비는 하나님의 사랑을 하늘의 이슬처럼 내리는 은혜라고 표현하며,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비가 이슬처럼 조용히 내려 영혼을 깨운다고 설명합니다.
하아지누(האזינו)의 ‘듣는다, 귀를 기울이다’는 행위는 데베쿠트(דבקות), 하나님과의 영적 결합을 의미하며, 토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צלם אלוהים, 첼렘 엘로힘)에 점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욤 키푸르(יום כיפור, 대속죄일)를 앞두고 있습니다. 히브리 달력으로 티슈리(תשרי)월 10일인 이날은 레위기 16장 29절에 따라 “너희 영혼을 괴롭게 하라”는 명령 아래 금식과 철저한 참회의 날입니다. ‘괴롭게 한다(ענה, 아나)’는 단순히 고통을 가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영혼을 낮추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철저히 비우는 것을 뜻합니다. 욤 키푸르는 ‘모든 문이 닫히기 전, 가장 깊은 내면의 문이 열리는 날’로 묘사됩니다. 또한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빛 앞에서 가장 투명해지는 때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욤 키푸르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의 자기희생으로 속죄제물(כפר, 카파르: 덮다, 속죄하다)이 되셨습니다(히9:12). 그의 피는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던 휘장을 찢어(마27:51), 1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셨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르던 벽이 무너졌고, 우리는 에하드(אחד, 하나됨)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욤 키푸르의 중심 메시지인 ‘덮음과 화해’를 역사 속에서 완결, 그리고 성취시킨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하아지누(האזינו)가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은 단순한 순종이 아니라, 시간의 신성화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매 순간을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드리는 행위, 즉 현재를 ‘카이로스(하나님의 시간)’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욤 키푸르를 앞두고 우리는 육신이 듣고 싶은 소음을 내려놓고, 영혼이 토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리스도의 피가 헛되지 않도록 삶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날의 회개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사랑의 보답입니다.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그분께 드리는 전인격적 헌신입니다.
하나님의 절기는 결코 무심히 지나가는 날짜가 아닙니다. 하아지누(האזינו)가 우리를 ‘들음’으로 초대하고, 욤 키푸르가 ‘덮음과 회복’으로 인도할 때, 우리는 곧 초막 안에서 신랑 되신 주님과 재회하게 될 것입니다. 초막절의 초막은 비어 있지만, 그 비움 속에서 영혼은 새로워져 데베쿠트의 친밀함을 누립니다. 이때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소음에 귀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에 가까워진 영혼으로 그분의 음성에 응답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 시간이 다가옵니다.
기쁨과 경외가 공존하는 이 날들 속에서, 우리 모두가 겸손히 귀를 열어 듣고, 시간을 거룩히 구별하며, 주님과의 에하드를 회복하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이 모세가 남긴 노래의 마지막 외침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대속의 길 위에서 우리가 걸어야 할 참된 회개의 길입니다.
샤밭샬롬.
2 weeks ago (edited) | [YT] |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