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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처강

한국군 안습전설 10가지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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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래 영상의 스크립트를 게시글로 변환한
글입니다.

https://youtu.be/D-4IQj02s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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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F-15K 사출사건입니다.

2010년 7월 21일, 이 날은 공군 장성들의
기량유지비행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이날 한 공군 소장은 F-15K 전투기에
올라서 비행을 준비중이었습니다. 그는
전투기만 3천시간 이상 몰아본 베테랑이라서
그가 사고를 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전투기가 이륙을
대기하려고 서있던 그때, 갑자기 캐노피가
깨지면서 분리되고는 사출좌석이 하늘 높이
치솟아올랐습니다. 다행히도 사출좌석에
앉아있던 공군 소장은 안전하게 낙하산을 타고
지상에 착지했습니다. 소장이 구조된 뒤
정비인원들은 황급히 기체로 달려가서
살펴봤습니다. 분명 소장은 기체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사출레버를 당겼을 것이니까요.
그러나 기체에는 어떠한 문제도 없었습니다.
알고보니 공군 소장이 손이 미끄러져서 실수로
사출레버를 당겼던 것입니다. 여기에 해당 소장이
베테랑이긴 했지만, 구식이었던 F-5 전투기
베테랑이라는 것이 밝혀졌죠. 그래서인지
한 동안 장성들의 기량유지비행을 못하게
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강화도 해병대 총기난사 사건입니다.

2010년, 김민찬이라는 젊은 장정이 해병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는 어렸을때부터 작은 체구와
못생긴 외모 때문에 초중고 내내 왕따와 학폭에
시달려왔었죠. 그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자신이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곧바로
해병대에 입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해병대에서의
폭력과 가혹행위는 학교에서 당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김민찬 해병은 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작은 체구와 못생긴 외모 때문에
부대원들에게 멸시를 당하며 온갖 성적 학대를
당해야 했었는데요. 그에게 후임들이 들어온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히려 기수열외
시켜버려서 이제는 후임들에게도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하는 상황이 되었죠. 그에게도
친한 병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의 후임이었던
정모 해병이었는데요. 왜냐하면 정모 해병역시
김민찬 해병과 똑같은 포지션이었어서
무자비한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김민찬 해병은 어마어마한
가혹행위에도 마음을 다잡고 군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유일하게 의지하던 가족인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김민찬 해병은 휴가를
나와서 할머니를 보내주고 부대로 복귀했지요.

그런 그를 맞이한 것은 부대원들의 뜨끈한
오줌이 담겨있는 그의 철모였습니다. 그는
철모에 담긴 오줌을 마시면서 비장한 결의를
다졌습니다. 이 사람같지도 않은 것들을
같은 처지인 정모 해병과 함께 모의해서
해병수육으로 만들어버려야겠다는 결의 말이죠.
정모 해병도 김민찬 해병에게 어느정도
동조해서 수류탄으로 고가초소를 폭파하기로
하였습니다. 2011년 7월 4일, 김민찬 해병은
상황병과 당직부관이 탄통과 탄통키를 두고
담배피우러 간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곧바로 탄약을 탈취해서 자신의 K2 소총에
끼우고는 공중전화 박스에서 전화를 하고 있던
해병 한 명을 그대로 쏴죽였죠. 그리고 그는
정말로 원한이 있던 사람들을 사냥하러
생활관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선, 후임
할 것 없이 생활관에 총탄을 퍼부었죠.
어차피 기수열외된 상황이라 후임들도 그를
전우애 구멍으로만 생각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에서 이제 실무배치된지 보름밖에
안되가지고 해병대 기합이 덜들어간 권혁
해병이 김민찬 해병에게 달려들어서 총기를
탈취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김민찬 해병은
총기 멜빵이 걸려버리면서 총을 진짜로
빼앗길뻔한 위기에 직면했죠. 여기서 만약에
단 한 명이라도 달려와서 권혁 해병을 도왔다면,
총기를 빼앗고 사건은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병대 기합이 잘 들어가있는
그의 선임들은 모두가 벌벌 떨기만 할 뿐,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죠. 이윽고 몸싸움 끝에 김민찬 해병은
총구를 권혁 해병의 하반신에 겨누는데에 성공했고
곧바로 방아쇠를 당겨버렸습니다. 하지만
권혁 해병은 총을 맞은 상황에서도 김민찬
해병을 문 밖으로 밀어내는데에 성공했고
침대로 문을 막아서 더이상 그가 못들어오게끔
후속조치까지 완벽히 해냈습니다.

그리고 권혁 해병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죠.
피가 너무 많이 나와서 선임들에게 지혈을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해병대 기합이
너무 빡세게 들어가서인지 선임들은 여전히
벌벌 떨 뿐,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김민찬 해병은 정모 해병과 조우했습니다. 정모 해병은
겁이 나서 수류탄을 고가초소에 던지지
못한 상태였죠. 그래서 수류탄을 빼앗아서
폭사를 시도했지만, 김민찬 해병은 파편상을
입고 살아남았구요. 체포되어져서 국군의
최연소 사형수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마초 상남자 해병대라는 이미지는 사라졌구요.
해병문학 내지는 비문학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아니라고 현실부정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다음 에피소드를 준비했습니다.

세 번째, 빤쓰런 사건입니다.

김민찬 해병이 총기를 난사하던 그 시각,
해병대 막사 근처 민가들에서도 총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총소리가 울려퍼지자 수많은 해병들이
각개빤쓰 차림으로 부대밖으로 대탈주를
하는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주민들이 각개빤쓰를 입은 해병들에게
왜 부대 밖으로 아침부터 빤쓰 차림으로
돌아다니냐고 물어보니 겁에 질린 얼굴로 대답
없이 걸음아 나살려라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총소리가 나자 무슨 일인지 알아보거나
대응하기는 커녕 겁이 나서 부대 밖으로
빤쓰바람으로 도망친 해병들이었던 것입니다.

근데 이거 군무이탈죄 아닌가? 여튼
이 사건으로 빤쓰런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구요.
체면이고 법이고 다 무시할 정도로 급하게
도망간다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사건 당시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절찬리에 이용되어지고 있는 단어고
보처강 채널에서도 자주 쓰는 단어이니 만큼
먼 미래에도 계속 쓰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네 번째, 노크귀순 사건입니다.

2012년 9월 29일, 염장무와 얼마 안되는
강냉이밥을 먹으며 배고픔에 시달리던 한 북한군
병사가 탈영했습니다. 그는 3일간 북한군의
휴전선 전연지대 50km를 뚫고 군사분계선마저
넘어서 드디어 한국측 영토에 도착했죠. 그곳은
22사단 56연대가 관할하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북한군이야
워낙에 상태가 메롱해서 그러러니 해도
군사분계선을 넘어왔는데 한국군측의
경고사격이나 경고방송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남하해서 마지막 관문인
한국군측 GOP 철책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GOP철책에 도착해도 한국군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 철책도
넘어오더니 곧장 동해선 경비초소로 향했죠.
그러나 경비초소 앞에 왔어도 한국군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분노한 그는
수많은 한국군 장교들의 모가지를 날려버리는
무자비한 타격을 가했죠. 바로 초소문에 노크를
했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노크를 해도 초소 내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이상해서 초소 안을 보니
경계병력들은 모두 자고있었습니다.
그는 혀를 끌끌 차며 다시 털레털레 길을
떠났고 내륙초소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배고파 죽겠으니 이번에는 제발 응답을
해달라는 마음으로 초소앞에 갔지만,
역시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수많은 한국군 장교들의 군복을 벗겨버릴
한방, 노크를 시전했죠. 그제서야 잠에서 깬
병력들이 나와서 그를 인도해주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자 나라가
뒤집어졌습니다. 경계에 완전히 실패하고
심지어 경계근무 병력들이 자고 있어서
북한군이 노크를 해서 귀순한 것이니까요.
만약에 귀순목적이 아니라 기습공격 목적이었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것입니다. 이와중에 하사관이
순찰 도중 귀순병력을 발견했다는 거짓보고를
올렸다는것도 알려지자 군은 가루가 되도록
까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탈북병사의
노크 두 방으로 수많은 관련 군인들이
군복을 벗어야 했죠.

다섯 번째는 윤일병 사건입니다.

2014년 4월 6일, 육군 28사단에서 근무중이던
윤모 일병이 냉동식품을 먹다가 목에 걸려서
병원으로 긴급히 이송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뇌사상태에 빠지고는 다음날 사망했죠.
당시 저는 군복무 중이었는데요. 이 사건으로
사단에서 음식물을 체할때까지 먹지말고
천천히 먹으라는 지시가 내려왔었습니다.
일부 부대에서는 흔히 하는 군대식 해결방법인
냉동식품 통제까지 했었죠. 그렇게 단순
사고사로 마무리 지어지나 했더니...

그를 치료했던 군의관들은 그가 실려올때부터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온몸이 멍자국으로
뒤덮혀있고 뼈가 골절된 흔적까지 있었거든요.
이건 단순 급체사고라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사건을 둘러싼 충격적인 증언들까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평소에 집중적으로
구타하고 가혹행위를 하던 병력들이 있었으며
사건 당일에도 그들과 함께 있다가 변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곧바로 수사에 착수한
군은 충격적인 사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윤일병은 전입 직후부터 하사관을 포함한
5명의 병력들에게 지속적이고 잔인한
구타를 당해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들은
윤일병의 건강상태가 나빠지면 자체적으로
링거를 투여하는 등의 치료를 한 뒤
또 다시 구타하는 악마같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윤일병은 전역날만을 기다리며
참고 또 참았습니다. 돈을 갈취당하는건
당연한 것이었고 5kg짜리 아령으로 두들겨
맞았죠. 가해 병사들은 윤일병이 구타당한다는
사실이 알려질까봐 자신의 부모가 조폭이니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보복하겠다고
협박해서 부모님의 면회마저도 거부하게끔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윤일병은 사건 당일 선임들의
냉동식품 악기바리를 당한 직후에 복부를
수십차례 맞았고 결국 그의 전역날은 영영
오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전국적으로 군을 비난하는 여론이 잇달았습니다.
그가 맞아죽기까지 오랜기간동안 군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냐는 것이었죠.
특히나 가해병사들의 범행동기가 그저
재미를 위해서였다는 것이 밝혀져서
많은 국민들을 경악시켰죠.
결국 군에서는 내무부조리 척결을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사건으로
인해서 군의 인식은 완전히 나락을 가버리게 되었죠.

여섯 번째는 임병장 사건입니다.

2014년 6월 21일, 이날 갑자기 진돗개가
발령되어가지고 저는 단독군장을 하고
생활관에서 대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무슨일인지 알아보니까 22사단 관할구역에서
전역을 앞둔 병장 한 명이 총기난사를 하고
무장탈영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대체 무슨 억한 사정이 있었길레 전역을 앞두고
총질을 해야했는지 그 내막이 궁금했습니다.
그는 바로 22사단에서 복무중이던 임도빈
병장이었습니다. 임도빈 병장은 입대 직후부터
왜소한 체구와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서 거의
전부대원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특히 그는 마른 체구 때문에 선후임 할것 없이 그를
해골바가지라고 놀려댔죠. 결국 그는 끝없는
왕따 속에서 전역만을 바라보고 견뎌왔습니다.
그러나 사건 당일, 근무를 하러 초소로
올라가자 초소에 그려진 낙서를 하나 보고
마음속의 트리거가 당겨지고야 말았죠.

그 낙서는 해골바가지 낙서였으며 임도빈 병장을
조롱하는 내용이 적혀져있었습니다. 그는
그대로 근무복귀를 하던 도중에 앞서가던
근무자들에게 뒤에서 정확히 조준사격을 가해
거꾸러트렸죠. 그리고는 무장한 채
강원도 고성군 일대로 도주를 시작했습니다.
무장병력이 사람을 죽이고 민간인 거주지역으로
진입했으니 당연히 난리가 났죠. 일부
지역에서는 대피령이 떨어졌으며 특전사까지
출동해서 차단선을 치고 임도빈 병장의
수색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임도빈 병장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도 군의 차단선을 유유히
돌파하며 강원도 산악지대를 돌아다녔죠.
그러나 그는 결국 기진맥진 할 수 밖에
없었고 군병력들과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에 총구를 대더니 방아쇠를 당겼죠.

운이 좋게도 그가 쏜 총알은 심장을 비껴가서
생존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앞서 벌어진 윤일병 사건과 묶여져서
취급받게 되었는데요. 둘 다 내무부조리로
인해서 벌어진 사건이었기 때문이죠.
여기에 당시 한 시민의 인터뷰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윤일병 사건과 임병장 사건을
가리켜 대한민국 군대의 현실을 뼈저리게
관통하는 한 마디를 던졌기 때문입니다.

" 참으면 윤일병, 못참으면 임병장이다.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믿고 아들을 군대 보내나? "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일곱 번째는 오인사격 형사입건 사건입니다.

임도빈 병장이 탈영하자 그를 찾으러
수색작전을 나간 7명 구성의 분대가 하나
있었습니다. 해당 분대는 6월 여름의
우거진 강원도 산길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죠. 그러던 중 갑자기 어디선가 핑-
하는 소리와 함께 총알이 날아와서 꽂혔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어떤 정체모를
병력이 자신들에게 총을 쏘고 있었죠.
분대원들은 총을 쏜 사람이 임도빈 병장인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총을 쏘고 있으니까 곧바로
응사를 했죠. 치열한 총격전 끝에 다행히도
상대방은 임도빈 병장이 아니었으며 아군오사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이 7명의 분대원들은 모조리 업무상
과실치상 혐의로 형사입건되었으며 강도높은
조사를 받았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접하고
군이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 싸울 수가 없는
허수아비 조직이 되었구나, 이런 심정 많이
느꼈습니다. 그래요. 아군오사,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긴 하죠. 하지만 전쟁나면 아군오사는
어느 지역에서든 흔하게 일어납니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어느 나라든지간에
아군오사를 방지하기 위한 훈련은 해도
병력들한테 아군오사 하면 다 니네
형사처벌해서 죗값 물릴거야. 이런말 안하는지
아세요? 그럼 아군오사 날까봐 뭔 일 나도
총을 안쏘는 결과가 나오거든. 설사 적이
나를 쏘고있다고 해도 망설이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나라나 고의성이 있는게 아니면
이런 경우에는 처벌 안해요. 심지어 이 사건은
먼저 사격을 받아서 응사를 한거잖아요.
근데 왜 범죄자로 몰아가냐고...
아군총에 맞아죽고 현충원에 가야 속이 시원하냐?

다행히도 국민들에게 엄청나게 욕을 먹고는
불기소처분으로 끝났는데요. 진짜 애국심
털끝만큼도 안남는 사례입니다. 아니 전쟁나면
총을 쏘라는거야 말라는거야?

여덟 번째는 관심병사들에게는 탄약지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임병장은 홀몸이지만, 엄연히 총과 실탄을 휴대한
무장병력입니다. 그런데 수색과 차단선에
투입된 병력들 중 관심병사들한테는 탄약조차
지급하지 않고 맨총들고 투입시켰습니다.
자 그런데 아직 군대 안가신 분들이라면
잘 모르시겠지만, 관심병사 한 부대에
한 두명 있을것 같죠? 이거 말해도 되는가
모르겠는데 저희부대의 경우 대대 정원 중
XX%가량이 관심병사로 분류된 상태였습니다.
이게 왜 그런지는 분대장파견 자료를 볼때
안 사실인데, 정말 아주 사소하고 다양한
사유로 관심병사로 분류되기 때문입니다.
집이 못살면 관심병사, 여자친구 있어도
관심병사, 한부모가정은 관심병사, 등등
어마어마해요. 그래서 투입된 병력 중에서
많은 수가 탄약을 못받았어요. 그럼 뭐로
싸우라고? 아니 그럼 왜 데리고 간거에요?
관심병사라서 못믿겠고 사고날거 같으면
아예 생활관에서 티비나 보고 앉아있으라고
하지? 고기방패로 쓰려고 데려왔어?

이런 위험천만한 실전에 관심병사라는 이유로
많은 병력들에게 탄약도 안주고 실전투입시키는
군대가 대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나라가
있습니까? 이것 때문에 임도빈 병장과 조우에
성공한 부대도 많은 병력들이 실탄이 없다보니까
소대장이 병력들을 대피시키고 홀로 임도빈
병장과 1:1로 맞서 싸우는 세계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결국 소대장은 홀로
임도빈 병장을 추격해들어가다가 팔에 총상을
입어서 추격에 실패하고 돌아와야 했어요.
후속병력이 아무도 못따라갔으니 추격은
LOS처리 된거지. 저는 이 사례를 군대에서
접하고는 진짜 애국심도 LOS처리 되었습니다.

아홉 번째는 정보사 군무원 정보유출 사건입니다.

2024년 6월, 한국해커가 북한 서버의 정보를
털다가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북한 서버에 한국측 공작원 목록이 전부다
기재된 문서가 저장되어있던 것이죠.
그리고 이 출처를 역추적해서 들어가니
정보사령부 소속 50대 군무원 한 명이
나왔습니다. 결국 그는 군사정보 유출혐의로
조사받았는데요. 그리고 믿기 힘든 사실이 밝혀졌죠.
그는 2017년부터 체포되는 그 순간까지 중국간첩에게
포섭되어져서 정보사 소속의 대외 휴민트 요원,
한마디로 공작원들의 정보를 모조리 하나도
남김없이 싸그리 다 넘긴 것이었죠. 그냥
정보업계에 핵폭탄을 갈겨버렸다는 이야기였고
대한민국의 대외 휴민트전력은 이것으로
소멸되고야 말았습니다. 화들짝 놀란
정보당국들은 블랙요원들에게 대피를 지시하고
최대한 귀국을 시켰지만, 한국측이 눈치를
깠다는 것을 안 적국들에서는 요원들을 일제히
검거해버렸죠. 결국 많은 수가 끔찍한 고문 속에
정보사 벽에 붙여진 별로서 사라져갔습니다.

사태가 이지경인데도 도주와 증거인멸
가능성이 있는 피의자에게 구속영장도
발부하지 않아서 버젓이 밖을 활보하고
다녔습니다. 사건 발생 두달이 다되어서야
간신히 구속영장 발부가 이루어졌고 조사가
진행되어질 수 있었죠. 그러나 그에게
최소 징역 7년 이상부터 형량이 시작되는
간첩죄가 적용되지 못했습니다. 대체 왜???
간첩죄는 적국을 위해서 일한 사람만
처벌 할 수가 있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죠.
적국 어디야? 북한. 그래서 북한 간첩만
잡을 수 있고 중국, 러시아 간첩은 못잡는
법이었어요. 그래서 이런나라 간첩들은
국가기밀을 캐가다가 잡혀도 징역 1년 정도의
솜방망이 처벌만 받았을 정도구요. 이 문제
때문에 30년 전부터 꾸준히 적국규정은 빼자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뭐냐 애국보수라고
하시는 분들이 반대를 하면서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 어어어오디서 감히 적국규정을 빼자는거야?!
대한민국의 주적은 북한이야! 너 빨강이지! "

이러면서 기를 쓰고 반대를 했었다구요.
그래서 이 법이 처벌수위가 엄청 쎈 법인데도
중국간첩들한테는 이 법을 적용을 못시키고
있던 거라니까요. 진짜 이사람들 오성홍기에
절할때부터 알아봤지만, 진짜 한 번 털어봐야
됩니다. 분명 중국이랑 뭐 커넥션 있을거에요.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서 그간 개정이 꾸준히
무산되었던 간첩법도 개정이 될... 려고 하다가
지금은 또 그때랑은 반대로 진보쪽에서 법 개정에
제동을 걸어가지고 통과를 못시키고 있으니
답답해 미칠 지경입니다. 좌우합작 매국프로젝트냐고...

열 번째는 포천 오폭사건입니다.

2025년 3월 6일 오전 10시경, 승진훈련장에서는
전투기들의 폭격훈련이 한창이었습니다.
F-35에 이어서 F-15K도 폭탄을 투하했죠.
그런데 다음 순서인 KF-16 전투기들이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한편 포천시 이동면 일대에는 아침에 출근할
사람들은 다 출근하고 소수만이 남아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굉음과 충격파가
이어지더니 창문이 깨지고 건물이
무너졌습니다. 폭격인줄 알고 나와본 주민들은
이것이 진짜 폭격이었다는 것을 알고 충격에
빠졌습니다. 전쟁이 난 줄 알았으니까요.
그런데 폭격의 주체는 놀랍게도 북한군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한국군이었죠.
당시 KF-16 전투기 두 대가 근처의 승진훈련장에
폭격훈련을 하러 이륙했는데요. 이들은
좌표를 잘못 입력하고도 2차 확인을
하지도 않았구요. 맑은 날씨임에도 육안으로
식별하는 절차마저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결국 8발의
500파운드폭탄은 승진훈련장이
아닌 애먼 민가에 우루루 쏟아지고야 말았죠.

참고로 항공폭탄은 포탄과는 달리 속도가
느리고 포탄처럼 강한 압력을 버텨야하는게
아니다보니까 탄체가 얇고 더 많은 양의
폭약이 들어갑니다. 당시 폭격에 사용된
MK.82 항공폭탄의 폭약 충전량은 87kg으로
이정도면 구축함도 한 발에 무력화시킬 정도죠.
그리고 한 발의 화력은 155mm 고폭탄 12발과
맞먹습니다. 즉 155mm 고폭탄 96발분의
화력이 한순간에 쏟아졌다는 것입니다. 당시 2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는데요. 사망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게 정말 기적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죠.

2 days ago | [YT] | 19

보처강

페이스북에 올라온 미국 불매운동 대참사

나이키신고 반미운동하던 그 가락 그대로

4 days ago (edited) | [YT] | 70

보처강

9월 16일 보처강 채널 멤버십 업데이트 공지

멤버십 선공개 영상 2개가 업로드되었습니다.

1. F-14 톰캣을 격추하라! 작전명 : 기린

2. 한국에서 전쟁이 난다면 어느 계절이 유리할까?

채널의 멤버십 프로그램에 가입하신 분들께
모두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며 더 좋은 컨텐츠로
보답하겠습니다.

멤버십 가입링크

youtube.com/channel/UC3vT1NuSY4F-XiH3rs8DtzA/join

5 days ago | [YT] | 12

보처강

다수의 UFO에게 격추당한 민항기, 이타비아 87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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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래 영상의 스크립트를 게시글로 변환한
글입니다.

https://youtu.be/7gdEHs0b-7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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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6월 27일 20시 8분, 이탈리아 볼로냐
공항에서 팔레르모 공항으로 가는 국내선 DC-9
여객기 한 대가 이륙했습니다. 이 항공기는 이타비아
항공 소속의 870편 여객기였죠. 해당 기체는
1966년 생산된 기체로 아직 기령이 쌩쌩한
편이라서 기체에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20시 56분, 티레니아 해상에 진입했다는 마지막 무전을
끝으로 레이더망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렸습니다.

이탈리아군에서는 늦은 밤중에 사라진
870편을 수색했지만, 이미 어두워진 터라서
소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틑날부터
870편의 잔해와 시신들이 인근 섬들에
밀려오면서 결국 870편의 추락과 탑승한 81명의
전원 사망이 확인되었죠. 그러나 곧이어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수색에 참여한 선박들에
검은 양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쓴 미국인들이
탑승하더니 대뜸 레이더기록들을 삭제할것을
지시했습니다. 이에 대한 기밀을 유지하지
않으면 보복하겠다는 협박도 이어졌죠. 그리고
지상에서도 870편이 비행했던 당시 공역정보에
대한 광범위한 은폐시도가 이어졌습니다.
대체 왜 각국 정부는 81명의 인명이 사망한
항공사고를 필사적으로 은폐하려고 들었을까요?

당시 항공사고 조사관들은 비행 당시
공역정보를 취합하려고 했지만, 많은 수의
정보가 이미 누군가에 의해서 삭제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공역정보를
토대로 상황을 재구성하는것이 어려워졌죠.
다른 자료들도 요청하면서 간접정보로
상황을 추론하려고 했지만, 이마저도 암암리에
알 수 없는 세력의 방해를 받게 되면서
곧장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가장 확실한 방법에 기대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항공기에 탑재된 블랙박스를 인양하는 것,
그리고 흩어진 870편의 잔해들을 모아다가
조립해서 어떤 원인으로 추락했는지 알아보는
방법이었습니다.

조사단은 870편이 해상에서 추락했다는 점을
이용해서 소해정 한 척을 협조받을 수 있었고
해당 해역을 스캔했는데요.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870편의 잔해를 찾는데에는
성공했는데, 마치 파편들이 이미 공중에서
폭발한 상태로 바다에 흩뿌려진 것 처럼
여기저기 흩어져있었습니다. 이 말은
분명 870편이 외부요인이건 내부요인이건
간에 폭발사고로 추락했다는 것이었죠.
따라서 조사단은 두 가지 가능성을 내놨습니다.

첫 번째는 폭탄테러였습니다.

당시에는 항공안전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던
시절이라서 항공기의 공중납치나 폭탄테러가
횡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이탈리아는 각 정치세력들이 극렬하게 대립하는
일명 납의 시대였구요. 극좌 테러단체로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붉은 여단도 이탈리아가
본거지였습니다. 붉은 여단은 1968년,
68혁명 이후에 신좌파세력 중 폭력혁명을 외치는
극단주의자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인데요.
수많은 언론인과 정부인사들을 납치해서
끔찍하게 고문하고 살해하는 등 극악무도한
짓거리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따라서 870편 역시 이들이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 폭탄테러를 감행했을
가능성이 높았죠.

두 번째는 오인격추였습니다.

조사단은 공역정보에 대한 접근이 대개
차단된 상황이라서 부정확한 주변지역
거주민들의 증언도 적극적으로 수집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이상한 증언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870편이 레이더상에서
사라졌던 그시각, 주변 주민들은 찢어지는 듯한
전투기 폭음을 들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것도 한 두대가 아니라 여러대 말이죠.
이상함을 느낀 조사단은 전투기들의 예상
경로상에 있는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증언을 수집한 결과 해질녘 무렵에
자기집 위를 낮게 날아갔던 삼각날개를 가진
전투기들에 대한 증언도 얻어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사건이 하나
발생했습니다. 사건발생 한달 뒤 사고현장에서
300km정도 떨어진 이탈리아의 실라산
중턱에서 소련제 MIG-23 전투기 한 대가
추락한 채로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전투기는 리비아국적의 전투기였다는
것이 밝혀졌죠. 대체 이 전투기는 왜 멋대로
남의 나라 한가운데까지 침투해왔으며 왜 거기서
추락을 하게 된 것일까요?

리비아에서는 해당 전투기가 훈련도중
산소공급장치 고장으로 조종사가 사망한 후
자동조종장치에 의해서 비행하다가 거기까지
가서 추락한것이라고 주장했죠. 실제로도
불가능한것은 아닙니다. 1989년, 소련군의
공군기지에서 MIG-23 한 대가 이륙했는데요.
엔진에 문제가 생겨서 조종사가 곧바로
사출좌석을 땡겨서 탈출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전투기는 엔진문제를 스스로
해결해버리더니 자동조종상태로 전환되어져서
800km를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벨기에의
한 민가에 떨어져서 소년 한명이 사망한
참사가 일어났죠. 그러나 리비아측의 설명과는
달리 현장에서 발견된 시신을 부검해보니 870편
추락사건 당일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또한 MIG-23은 소련에서 최초로 룩다운과
슛다운 기능까지 갖춘 전투기였구요. 중거리
공대공능력을 자랑하는 당시 리비아가 도입한
최신 전투기 중에 하나였죠.

그리고 조사단은 의문의 세력이 미처 파기하지
못한 사고당시 레이더정보를 일부 입수하는데에
성공했습니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짧은
시간안에 여러개의 미확인 비행물체,
즉 UFO들의 항적들이 찍혀있었죠.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부정확한 정황증거일 뿐이고
조사단은 확실한 입증자료인 870편의 잔해를
궁극적으로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82년,
이탈리아 상층부의 지시로 이 사건은
미제사건으로 분류된채 수사가 중단되게
됩니다. 그러나 수사가 석연찮게 중단되자
유가족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여론도 사건조사를 원하는 목소리를
높혔죠. 결국 이탈리아 정부는 1987년부터 수사를
재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사단의 갖은 노력끝에 1992년,
사건발생 12년만에 해저에 있던 잔해들을
인양하는데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인양
과정에서 870편의 잔해들과 같이 수면위로
부상한 것은 놀랍게도 미국제 전투기들이 쓰는
보조연료탱크였습니다. 조사단은 잔해들의
조립과 분석을 이어나갔는데요. 이윽고 1993년,
드디어 폭발 원인에 대해서 근본적인 접근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나 조사 과정에서
오인격추 가능성은 낮아졌습니다. 일단
폭발잔해들을 분석한 시료에서는 당시
이탈리아 공군이 사용하던 미국제 공대공
미사일의 폭발물질이나 추진물질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기체를 다 조립해보니 비행기를 산산조각낸
폭발은 동체 뒤에서 시작된 폭발이었구요.
동체 앞쪽에 뚫린 구멍은 미사일이 직격되면서
생긴 구멍이 아니라 뒤쪽의 화장실에서
내부 폭발이 시작되면서 뒤에 있던 거대한
동체가 폭발력으로 앞쪽으로 발사되면서 승객들을
가루로 만들어버리고 전방동체를 관통했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870편의 동체에 난 수많은 파편흔들은
결국 폭발력에 의해 찢겨진 동체가 파편화
되면서 남긴 흔적으로 밝혀졌습니다.
결과적으로 1994년, 수사 결과가 나왔는데요.
미상의 테러단체가 이타비아 870편에 테러를
가하려고 했고 폭탄을 화장실로 가져갔는데 그때
폭탄이 작동되어져서 870편이 추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족들은 납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탑승객 중
누군가가 극렬한 테러리스트였다는
이야기였으니 결과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죠.
그러나 이외의 증거들이 발견되지를 않아서
결국 사건은 폭탄테러로 확정되어졌습니다.

그런데...

2013년, 이탈리아 대법원에서는 이타비아
870편 사고가 미상국가의 전투기에 의한
오인격추사건이었다고 최종적으로
판결했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정부가
유가족들에게 손해배상을 하라고 명령했죠.
또한 사건과 직접적으로 프랑스가
연관되어있다는 결과가 발표되어져서
프랑스 정부에게도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대체 이게 어떻게된 일이었을까요?

주민들에게서 취합한 목격담은 삼각날개 전투기가
초저공비행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탈리아군에는 삼각날개를 가진 전투기가
없었습니다. 그 거리까지 작전거리가 닿는
인근 국가중에서 저공침투가 가능한 삼각날개
전투기를 보유한 국가는 프랑스 뿐이었죠. 바로
미라주 3E형 말입니다. 또한 870편에서 발견된
폭발물 잔해들은 미국제 공대공 미사일에서
사용하는 폭발물들이 아니라는 점이었죠.
물질 구성이 미묘하게 다른 타국의 미사일이라면
어떨까요? 게다가 조사단이 폭발 시작지점으로
지목한 후방동체의 화장실은 정작 비교적
멀쩡한 상태로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해질녘 한밤중에 전투기가 초저공비행을
할 일이 얼마나 될까요? 참고로 초저공비행은
적의 지상기반 레이더를 회피하려고
침투비행을 할때나 쓰는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지상기반 레이더들은 높고 먼 곳은
잘봐도 낮고 가까운것은 잘 못보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래서 냉전기에 적의 지상기반
레이더를 회피하기 위해서 초저공침투폭격이
유행이었던 것이구요. 또한 당시 870편이
실종되자 최초로 수색에 나섰던 것은 다름 아닌
인근에서 우연히 비행중이던 이탈리아 공군의
F-104 스타파이터 전투기였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고 당시 공역에는
리비아의 국가수반 전용기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리비아의 독재자인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타고 있었던 전용기였죠.
당시 카다피는 유고연방에서의 순방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던 참이었습니다.
그리고 2023년, 결정적인 폭로가 이어졌죠.
이탈리아의 총리였던 줄리아노 아마토는
당시 프랑스와 미국, 이탈리아가 짜고 카다피를
공해상에서 암살하려고 했는데 실수로
애먼 민항기를 격추했다고 한 것입니다.
그는 여기에 더해서 당시 이탈리아 사회당 출신의
전 총리였던 베티노 크락시가 카다피에게
공해상에서 암살작전이 있을 것이라고
귀띔까지 해줬다고 증언했습니다. 이탈리아
현 총리까지 해당 발언이 사실이라며
인정해서 오피셜로 굳혀졌죠. 과연 그날의
진실은 어땠을까요?

1969년, 리비아 육군 중위가 기계화여단을
몰고 수도 트리폴리로 입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왕을 끌어내리고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했죠. 그의 이름은 무아마르 알 카다피,
당시 나이는 고작 27살이었습니다. 그는
기습적인 석유 국유화를 단행하면서
국부를 쌓았습니다. 리비아의 경제는 날이갈수록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뼛속부터
반서방주의자였습니다. 그리고 1977년,
그가 북한 정권처럼 카다피 혼자서 나라를
다스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되자
본색을 드러냈죠. 그는 수많은 반서방
테러단체에 오일머니를 뿌려댔고 그 결과
서방 각국에서는 온갖 형태의 테러가
일어나면서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군사적으로도 성장한 리비아는 서방세계에
공공연히 무력시위를 감행하고 핵개발에
나섰는데요. 당연히 미국이 극대노했고
인접국가인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그대로
불똥이 튀어버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는 리비아의 인접국가이자 리비아에게
맨날 뚜들겨 맞던 차드에 전투기부대와
외인부대를 전개해서 리비아를 압박하기
시작했는데요. 서방에서도 리비아에
경제제제를 실시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다피는 오일머니와 자국의 산업역량을 필두로
잘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꾸
테러리스트를 지원한다는 점에 서방의
인내심은 한계까지 치닳았죠. 결국 미국과
프랑스, 이탈리아는 1980년 6월 27일에
유고연방 외유를 마치고 돌아오는 카다피
전용기를 격추하는 극비 작전을 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카다피가 예정대로
귀국길에 오르자 이 세 나라는 행동에 나서게 되었죠.

지금부터 말씀 드리는 것은 제가 당시 상황을
추측해서 재구성한 부분입니다.

1980년 6월 27일, 카다피의 전용기는
베오그라드 공항을 출발했습니다. 카다피가
출발했다는 소식을 접한 미국의 NSA는
곧바로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극비리에
코르시카에 배치한 전투비행대들로 상황을
전파했죠. 프랑스군은 작전에 투입할 전투기로
미라주 3E형을 골랐습니다. 이들 전투기들은
사거리 20km짜리 마트라 530 중거리
공대공미사일을 운영할 수가 있었구요.
마르코니사의 전파고도계를 가지고 있어서
저공침투가 가능했죠. 우방국인 이탈리아를
상대로 저공침투를 해야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레이더에 프랑스 전투기들의
침투 항적이 찍힐 경우 리비아 국가원수 암살의
장본인이 너무나도 쉽게 밝혀질 것이니까요.
따라서 전투공역 이외의 지역에서는 절대
항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지상기반레이더들을
회피하려고 미라주 3E형들이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들 전투기들은 각자 마트라 530 중거리
공대공 미사일을 한 발씩을 센터라인
하드포인트에 장착하고 양측 주익에
추가연료탱크를 장착했을 것입니다.
저고도 침투는 당연히 기압이 높다보니
항력이 많이 발생해서 항속거리가 더
떨어집니다. 안그래도 삼각날개는 장거리
항속비행에 불리하죠. 그래서 무장을
최소화하고 연료탱크만 큰 것으로 달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가 맡은 역할은
마트라 530 미사일을 기습적으로 발사해서 카다피의
전용기를 떨구는 킬러 역할이었을 것입니다.

이탈리아 공군은 F-104 두 대를 출격시켜서
혹시 모를 리비아군의 대응에 대비합니다.
F-104들도 레이더는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야간 작전을 수행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리비아공군이 설사 출격해서 프랑스군의
킬러 전투기들을 노린다면 이들을 막아세울
목적이었습니다. 다만 너무 많이 띄우면
일반적인 초계활동이 아니라는 것을 추후에
레이더 항적정보나 비행계획서로 증명이 되니
일부러 소수만 띄우게 되었죠. 프랑스의 킬러
전투기들은 목표공역인 티레니아 해상으로
레이더망을 피해서 저공으로 접근했습니다.
티레니아 해상은 공해상이라서 카다피가
의문사 당하더라도 외교적으로 책임을 묻기가
어려운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때, 리비아쪽 방향에서도 저공침투로
리비아 공군 MIG-23MS 편대가 시칠리아
방면으로 접근해오기 시작했습니다.
2023년 줄리아노 아마토의 폭로 당시
그는 경고를 받은 카다피가 전용기에 탑승하지
않았을것이라고 추측했는데요.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카다피가 이후에 별도의
귀국편으로 귀국했다는 자료도 없고
카다피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상 강행돌파를
선택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여지거든요.
그렇지 않았으면 리비아군 MIG-23들이
예상 통과지점인 티레니아 해상으로
대거 출격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따라서 이날 해당 공역에 출몰했던 미확인 비행물체,
즉 UFO들의 정체는 다양한 나라의 전투기였던 것입니다.

이윽고 미라주 3E들은 티레니아 해상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지상관제가 알려준
방향대로 위를 바라보니 정말로 카다피의
전용기가 저 멀리서 지나가고 있었죠. 그 즉시
미라주 3E들은 SEPR 841 보조추진 로켓을
점화해가지고 최고속도로 상승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카다피의 전용기를 뒤에서 따라잡는
코스로 접근하기 시작했는데요. 고도
3만피트에 다다르고 레이더를 킨 순간 이들을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리비아군의 MIG-23편대
였습니다. 리비아군의 MIG-23 편대는
시칠리아를 관통해와서 티레니아 해상에
도착할때 쯤 SEPR 841 로켓의 시커먼 연기와
함께 상승하는 미라주 3들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보조로켓 추진장치 특성상 당연히 매연이
심하다보니까 육안으로 탐지가 쉽거든요.

미라주 3 들은 예상치도 못한 적기에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유리한 위치에
있던 것은 미라주 3들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보조로켓 추진장치를 이용해서
빠르게 고도를 선점한 미라주 3와는 달리
MIG-23들은 아직도 애프터버너 키고
낑낑대며 상승중이었거든요. 그렇게
양측간의 치열한 공중전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당시 근처에 비슷한 고도를 비행하던
항공기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이타비아
870편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은 기체의
블랙박스에 그대로 녹음이 되어있었는데요.
기장과 부기장이 공중전 광경을 보고 저것 좀
보라며 놀라하는 대화가 오고간 것이었죠.

결국 미라주 3들은 일단 MIG-23들 먼저
처리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미라주 3가
챙겨온 무장이라고는 각자 마트라 530 미사일
한 발 뿐이었죠. 결국 이들은 격렬한 공중전 끝에
MIG-23 한 대를 마트라 530으로
대파시키는데에 성공했습니다. 조종사들의
실력이 낮았던 리비아 공군의 MIG-23들은
미라주 3의 격추에 실패했으며 연료가
떨어지자 곧바로 줄행랑 치기 시작했습니다.
미라주 3E들 중 마트라 530을 쏘지 않은
기체는 단 한대 뿐이었죠. 이 기체의
조종사는 아까 봐놨던 카다피 전용기의 고도와
진행방향을 바라봤습니다. 해질녘 노을빛에
실루엣만 비쳐보이는 민항기 한대가
하늘을 날고 있었죠. 카다피 전용기가
확실했습니다. 그는 빙고퓨얼이 얼마
안남은 상황에서 카다피 전용기의 측면코스로
접근해서 침착하게 레이더로 조준했습니다.
그리고 미사일을 발사했고 카다피 전용기는
공중분해되어져서 추락하기 시작했죠.

같은 시각, 이탈리아 공군의 F-104 두 대는
전투가 벌어진 공역의 한참 서쪽을 초계하고
있었습니다. 리비아 공군이 설마 이탈리아
영공을 정면돌파해서 올 리가 없었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러나 뒤를 돌아보고 뒤늦게 리비아
공군의 전투기들이 출몰했다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이들은 그 즉시 기수를 돌려서
전투공역으로 향했고 동시에 보조연료탱크를
분리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반토막난
민항기 한 대가 불덩어리가 된 채 추락하는 것을
보고 작전이 성공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F-104들은 몇 분 뒤 지상관제로부터
이타비아 870편이 해당 공역에서 사라졌으니
수색하라는 지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격추한 것은 카다피 전용기가
아니라 이타비아 870편이었던 것이죠.
당시 미라주 3에게 피격당한 MIG-23은
조종불능에 빠진채 하염없이 활공하다가
실라 산 중턱에 추락했구요. 카다피 본인은
암살시도를 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카다피 역시
남의 나라 영공에 전투기들을 무단으로
밀어넣어서 군사작전을 한 것이니 그 역시
리비아 공군의 출동 사실을 부인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카다피 암살작전은
실패로 막을 내렸고 애꿎은 민항기 한 대만
격추당하고야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미라주 3 전투기의 가장
어두운 실전 격추기록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사고 유가족들은 다행히도 자신의 가족 중
한 명이 테러리스트였다는 누명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죠.

그렇다면 사건 이후 관련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1988년, 람슈타인 공군기지에서
에어쇼가 열렸습니다. 이때 이탈리아 공군의
MB-339 훈련기의 곡예비행도 실시되었는데요.
이때 3대의 훈련기가 갑자기 충돌하더니
관중석을 덮친 람슈타인 공군기지 참사사건이 벌어졌죠.
이때 사고를 일으키고 사망한 조종사들은 날디니 중령과
누타넬리 중령이었습니다. 물론 굉장히 위험한
곡예기동이었지만, 두 중령은 해당 기동을
이전까지 수백차례 성공시켰고 이탈리아에서도
알아주는 베테랑 조종사였죠. 그러나 이 사건의
원인은 석연찮게도 두 조종사의 훈련부족으로
황급히 결론내려지고 사건이 종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조종사는 당시 티레니아 해상에서
초계를 돌던 두 대의 F-104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당시 공군 지휘관들과
관련자들을 기소했는데요. 약속이나 한 듯이
공소시효가 지난 시점에서 검찰이 움직였고
결국 공소권 없음으로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카다피는 2011년 아랍의 봄 시위가
터지자 시민군을 피해서 도망을 갔는데요.
동시에 카다피 세력을 때려잡으려는 서방의
오딧세이의 새벽작전이 시작되었죠.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프랑스 공군은 카다피의
차량행렬이 어디있는지 눈에 불을 키고
찾아다녔습니다. 결국 프랑스 공군의 공습으로
카다피가 큰 부상을 입었구요. 이윽고
사로잡히더니만 수시간 만에 머리에 총알이 박힌
시체로 발견되었죠. 시위대가 그렇게 급하게
카다피를 처형할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말이죠.
그리고 혼란한 와중에 군중 사이에
숨어들어가지고 사로잡혀서 조리돌림당하던
카다피에게 기습적으로 권총을 쏘고 도망간
사람은 프랑스 정보국의 블랙요원이라는 설이
유력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어둠이 리비아와 프랑스,
이탈리아에 드리우게 되었습니다.

6 days ago (edited) | [YT] | 21

보처강

한국군의 흑역사 10가지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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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래 영상의 스크립트를 게시글로 변환한
글입니다.

https://youtu.be/anHipsoaJ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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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공군참모총장 납치사건입니다.

1990년 9월 어느날 아침, 당시 정용후
공군참모총장은 여느날처럼 출근을 위해서
관사를 나왔습니다. 그런데 정체불명의
차량들이 다가오더니 이내 정총장 앞에 섰죠.
그리고 차량들에서는 괴한들이 우루루
나오더니만 순식간에 정총장을 납치해서는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렸습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요? 어떻게 백주대낮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군대장이 납치당한 사건이
일어날 수가 있었던 것일까요?

당시 몇년 전부터 공군에서는 KFP사업이라는
차세대 전투기를 도입하는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무려 120대에 달하는 전투기를 국내에서
라이센스 생산을 통해가지고 도입하는
사업이었는데요. 이 사업의 최종경합대상으로는
F-18C/D 레거시호넷과 F-16 블럭 32형이
올라와서 경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군은 당시
경량전투기였던 F-5에 넌덜머리가
난 상태라서 쌍발의 중형급 전투기였던 레거시
호넷을 원했습니다. 단발엔진을 장착한
F-16보다는 크고 비싼 전투기였지만, 당시
한국은 고속성장중이었어서 못사줄것 까지는
없는 상황이었죠. 결국 최종적으로
레거시 호넷이 선정되었고 공군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공군은 레거시 호넷을
도입하기 위한 사전작업에 착수했고 미국으로
조종사들을 연수보내기까지 했는데요.

문제는 레거시 호넷의 판매고가 신통치 않자
제작사에서는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서
기체가격을 무려 50%나 올려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80대밖에 도입을 못할 위기에 처하자
청와대에서는 기종을 다시 선정하라고
지시했는데요. 여기에 공군이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정용후 공군참모총장은
이미 채택된 기종을 바꿀 수는 없으며 레거시
호넷을 도입하기 위한 준비가 진행중이라고
맞서기 시작했죠. 그리고 레거시호넷을
원하고 있던 공군에서도 집단적으로
반발하면서 80대여도 좋으니 레거시호넷을
달라고 주장했죠.

청와대는 난처한 입장에 처했습니다. 이 일이
커지면 청와대가 이 사업 관련해서 뽀찌를
받은 부분이 드러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바로 공군참모총장을 납치해서 감금하는
것이었죠. 1990년 9월 어느날 아침,
정용후 공군참모총장이 납치당해져서
내려진곳은 당시 광화문 근처에 있던
국군 정신병원이었습니다. 이곳은 정신병원
이라고는 하지만, 안보사범들을 불법적으로
감금하고 고문하는 곳이기도 했죠.
정용후 참모총장은 이곳에 감금되어져서
무자비한 구타와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 사이에 청와대에서는 정용후 참모총장이
비리를 저질렀다며 누명을 씌워 경질해버린 다음
한주석 대장을 후임 참모총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전투기는 F-16으로
재선정되어졌고 그것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KF-16입니다.

정용후 참모총장은 25일간의 감금 끝에
풀려났습니다만, 복권되지도 않았죠. 그는 치욕속에서
몇 년간 칩거하다가 노태우 정부가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복수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당시
전투기 재선정과정에서 비리가 있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폭로한 것이었죠. 이것으로 율곡사업
특별감사가 시작되었고 그간에 있었던
대형 방산비리들이 처단될 수 있었으니 정용후
총장은 국방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셈입니다.

두 번째, 연천 예비군훈련장 폭발사고입니다.

1993년 6월 10일, 경기도 연천 다락대
훈련장에서는 예비군 동원훈련이
한창이었습니다. 동원된 예비군들은 M114
155mm 곡사포를 실사격 하려고
준비중이었는데요. 한참 멀리 떨어진 포대본부
천막 안에서도 실사격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지축을 울리는 굉음이 들려오더니만
이내 뜨거운 바람이 천막을 덮쳤습니다.
무슨일인지 포대본부 인원들이 밖에 나와보니
기절초풍할만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사람
살덩어리들이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폭발 현장을 가보니 포 주변에 쌓아둔장약과 포탄이 모조리 폭발해서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무려 20명이 사망했고 지휘라인의
모든 지휘관들이 군복을 벗어야 했을 정도로
대형사고였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이때
폭발이 어떤 과정에서 왜 일어났는지는
군당국에서도 추측만 할 뿐 명확한 원인은
밝혀지지가 않은 상태입니다. 군당국에서는
일단 두 가지 가능성을 이야기하는데요.
포탄에 신관을 결합하는 과정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관은 일정 회전수와 활성화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터지지 않습니다. 실제로 모
포병부대에서는 부하들이 말 안들으면 행보관이
신관을 포탄에 결합해놓고 함마로 수차례
때리면서 다 죽자고 협박했음에도 터지지
않았다는 증언이 있을 정도로 앵간해서는
안터집니다. 155mm 고폭탄 본체 역시 이론상
낙뢰를 3회 이상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구요. 설사 내부 화약이 연소된다고
하더라도 보통은 급격한 폭발이 아니라 느리게
연소되며 화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가능성으로 제기되는건 장약이 폭발하면서
옆에 있던 포탄들도 유폭했다는 설인데요.
장약은 작은 충격이나 열에도 쉽게 폭발적으로
연소되므로 장약폭발까지는 어찌저찌 인간의
부주의로 일어났다고 치더라도 주변 포탄들이
연쇄 유폭해서 싸그리 다 터졌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어렵죠. 결국 이 사건은 아무리
안전한 폭발물이어도 굉장히 낮은 확률로
원인불명의 폭발이 일어날 수 있다는 교훈만을
안겨준 채 아픈 역사로 남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KLH사업입니다.

1990년대, 한국은 코브라 공격헬기를
보조하고자 소형 정찰헬기를 도입하는
사업을 진행했는데요. 소형 정찰헬기를
도입하는 김에 너무 작고 힘이 약해서 문제가
많았던 500MD헬기까지 대체하자고 해서
소요량이 무려 147대까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량으로 양산하게 되었으니 국내
항공산업도 육성할 겸 라이센스 생산으로
도입하기로 했는데요. 후보기종으로는 당시
베스트셀러 헬기들이던 Bo-105와 A-109헬기가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군에서 성능요구사항을
이상하게 짜가지고 이 두 기종 모두 사업에서
탈락하는 초유의 사태가 터지고야 말았죠.
결국 사업이 지연되었는데요. 이 사이에
미국에서는 OH-58이나 중고로 사가라고
압력까지 들어왔구요. 사업에서 탈락해서
못먹는 감 찔러나보자는 식이었던 국내업체들은
산자부와 짝짜꿍해서 국산개발로 가자고
억지를 부려대가지고 사업은 안드로메다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 사이에 육군항공대에서 필요로 하는
정찰헬기의 도입시점 데드라인은
계속 다가오니 결국 긴급소요분인 13대만
도입하기로 했죠. 이 과정에서는 기종선정도
졸속으로 이루어져서 아무거나 사오자는
식으로 급하게 Bo-105가 선정되었는데요.
소량도입이다보니까 그냥 직도입으로 사오는게
저렴한 상황이었지만, 기존에 라이센스
생산을 이미 국내업체한테 의뢰하기로
약속했는데 그걸 어기고 직도입해오기가 좀
그런거야. 그래서 고작 13대를 생산하려고
국내에 생산라인도 다 깔아서 라이센스
생산으로 들여오게 되었습니다. 그럼 그
생산라인 까는 비용, 라이센스비를 다 13대의
헬기에 청구해야죠. 그래서 대당 100억원이라는
막대한 가격이 청구되었습니다. 참고로 Bo-105
보다 4배나 체급이 큰 블랙호크 헬기를
당시 대한항공에서 라이센스 생산해가지고
도입하는 가격이 대당 90억원이었으니
얼마나 비싸게 도입했는지 알 수 있죠.
그리고 추후에 기종 선정과정에서 방산비리까지
있었다는게 밝혀지면서 관련자들이 징역형에
처해지기도 했구요. 나중에 비슷한 일이 일본의
아파치 도입때 일어나게 되었는데요. 우리가
남말할 처지가 아니라는거...

네 번째, 공비토벌작전 중 총기난사 사건입니다.

1996년 9월 18일, 북한의 특작부대가 동해안에
침투해서 정찰작전을 진행하던 도중에
잠수함이 좌초되었습니다. 이들은 잠수함의
승조원들과 함께 강원도 내륙지대로 숨어들면서
연인원 100만명이 동원된 강릉 무장공비
토벌작전이 시작되었죠. 그런데 9월 22일,
강원도 양구의 부대에서 한 병사가 K2 소총과
실탄, 수류탄을 휴대한 채 초소로 근무교대를
위해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무교대
도중 몰래 이탈해서는 다시 부대로 돌아와
생활관 문을 열어재꼈습니다. 생활관에서
휴식을 취하던 소대원들은 근무투입상태
그대로 생활관으로 돌아온 그를 어리둥절
쳐다봤는데요. 이내 그는 K2 소총을 겨누더니
연사로 긁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9명을 사살하고 민통선 북쪽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는 평소 내무부조리에 불만이 많았는데
공비토벌이다 뭐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총기난사를 저지르고 월북을 시도했던 것이죠.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즉시 추격대가 출동해서 해당 병사를
포위하는데에 성공했구요. 투항하지 않으면
사살하겠다고 해서 그는 총을 버리고 투항하게
되었습니다. 무장공비들 때문에 이 사건은
크게 보도되지 않고 묻혔지만, 군은 이 사건으로
내부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다섯 번째, 표종욱 일병 사건입니다.

무장공비토벌이 한창이던 1996년 10월 22일,
2사단 공병대 소속이었던 표종욱 일병이
싸리빗자루를 만들기 위해서 부대 뒷산에
올라갔습니다. 당시에는 빗자루가 보급나오는게
아니라 나뭇가지를 모아서 싸리빗자루를
만들어서 썼거든요. 그러나 표종욱 일병은
복귀시간이 되었는데도 오지 않았습니다.
당시 부대 근처는 공비들이 출몰하는
곳이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대에서는
제대로된 수색작업도 없이 표종욱 일병의
탈영으로 결론내렸죠. 그리고 표종욱 일병이
평소에 여자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안
헌병대에서는 군탈체포조를 자택으로
출동시켜서 가족들에게 표종욱 일병을
내놓으라고 깽판을 놨습니다.

그러나 표종욱 일병의 행방은 엉뚱한곳에서
단서가 잡혔죠. 11월 5일, 도주 중이던
무장공비 한 명이 사살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입고 있던 군복은 놀랍게도 표종욱 일병의
군복이었습니다. 군에서는 그제서야 표종욱
일병이 실종되었던 곳을 수색했는데요.
표종욱 일병은 실종장소에서 불과 50m
떨어진 곳에서 끔찍하게 난도질 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죠. 부검 결과 표종욱 일병은
무장공비들에게 붙잡혀서 고문을 당하다가
살해된것으로 결론나왔습니다. 당연히 유
가족들은 까무러쳤죠. 유가족들은 군에게
탈영했다는 아들을 찾아내라고 소리치며
울부짖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군은 세간의
질타를 받아야 했었습니다. 실종장소를 단
한번이라도 수색만 해봤으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은 없었을테니까요. 사건 이후 플라스틱
빗자루가 보급나오기 시작해서 싸리빗자루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 이 사건의 유일한
위안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여섯 번째, 린다김 사건입니다.

2000년, 린다 김이라는 무기 로비스트가
군 기밀자료를 외부로 반출한 죄로
기소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사 결과 그녀는
이전까지 있었던 수많은 무기사업들에서
무기업체들의 로비자금을 받아서 군 장성들에게
발라주는 역할을 했구요. 이 과정에서 수수료를
챙겨가지고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죠. 당시 린다 김의 미국 저택은
집 대문열고 집까지 말타고 30분을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니까 비리 규모가
어느정도였는지는 그저 절레절레였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고위 장성들에게 성접대까지
해주고 군사 기밀자료를 빼내서 업체에게
제공해 사업에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주기까지
했던 것이죠. 대표적인 사업이 백두, 금강 정찰기
사업인데요.

이런 로비 때문에 비싼 돈을 지출했지만, 반대로
호커 800이라는 너무 작은 기체를 도입해가지고
체공시간이나 작전능력이 모두 최악을 달리는
정찰기들을 도입할 수 밖에 없었죠. 이후
한국군은 소형 비즈니스제트기만 보면 치를
떠는 상황이 되었구요. 정찰능력의 부족문제는
20년 뒤에 팰콘 2000S 정찰기와 글로벌호크가
도입되면서 간신히 땜빵시킬 수 있었습니다.

일곱 번째, 포천 농협 총기강도사건입니다.

2002년 10월 11일, 포천 농협에 복면을 쓴
괴한이 K1기관단총을 들고 난입했습니다.
그는 은행원들을 위협하면서 큼지막한 자루에
돈을 쓸어담으라고 지시했죠. 그리고 그는
돈을 가지고 승용차에 탑승 한 뒤 사라졌습니다.
당시에는 CCTV나 블랙박스 같은게 활성화가
많이 되지 않았던 시점이라서 잡기 어려울
수도 있었는데요. 그러나 범인은 멍청하게도
군용 K1기관단총을 범행용으로 사용해가지고
수사속도는 굉장히 빠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불과 2주 뒤, 육군소속 37살 상사의
단독범행으로 파악되어졌고 그는 자택에서
헌병대에게 체포되어졌습니다. 범인은
당시 카드빚에 시달리고 있었어서 범행을
저질렀구요. 훔친 2500만원 중 2천만원을
카드빚을 갚는데에 사용했었다고 합니다.

여덟번째, 530GP 사건입니다.

2005년 6월 19일 새벽 2시 반, 28사단의
530GP에서 김동민 일병이 근무를 스던 중
초소를 나와서 갑자기 생활관으로 향했습니다.
고요한 정적속의 생활관에 핑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던져졌죠. 자고있던 병사들은
날벼락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김일병은
수류탄 공격에서 살아남은 병력들에게
소총을 난사했죠. 폭발음을 듣고
체력단련실에서 김중위가 뛰쳐나왔지만,
그 역시 사살당했죠. 김동민 일병은
배전반을 부셔서 막사를 정전시킨 뒤 다시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초소로 돌아가 근무를
섰습니다. 그러나 전병력을 집합시켜서 실탄 실셈을
해봤고 결국 김동민 일병이 범인으로 밝혀져서
그자리에서 체포될 수 있었습니다.

날이 밝자, 나라가 뒤집혀졌습니다. 잠자던
전우들을 공격하고는 다시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초소로 돌아가 근무를 스던 그의 사이코패스적
행동은 전국민들에게 충격을 줄 수 밖에 없었죠.
군에서 조사결과 당시 김동민 일병은 전입
직후부터 시작된 무자비한 내무부조리에
정신적으로 망가지기 시작하다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결론나왔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내무부조리 문제가 전국민적인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군은 이전까지 이어지던
수많은 내무부조리로 인한 총기난사사건에도
묵묵무답이었지만, 이 사건부터는 더이상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인터넷과 미디어의
발달로 사건의 진상이 빠르게 전국민들에게
퍼져나갔고 내무부조리를 성토하는 여론이
형성되어져서 군이 비판받았거든요.
군에서는 내무부조리 척결을 위해서 여러
방책들을 내세워서 실행하는 수 밖에 없었죠.
예를 들자면 웃음벨 같은것....

일각에서는 김동민 일병이 입대전에 하던
모 FPS게임 때문에 폭력적으로 변해가지고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했는데요.
한국군 안습전설 시리즈를 정주행 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1950년대부터 총기난사
사건 많았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그양반들은
대체 무슨 게임을 그렇게 재미있게 즐기셨길레
수류탄 까고 총기난사를 했을까요?

아홉번째, 육군훈련소 짜장사건입니다.

2005년 1월 10일, 논산 육군훈련소
29연대에서는 저녁점호준비가 한창이었습니다.
당시 192명의 훈련병들은 저녁점호때 조교나
교관들에게 털리지 않으려고 열씸히 마대자루를
밀며 청소를 진행했는데요. 문제가 터졌습니다.
청소를 이미 다 마치고 점호를 기다리던 사이에
배가 아플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화장실에 가서는 애써 닦은 변기에 짜장을
한무데기 생산하는 일이 왕왕 터지고는 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당시 29연대 화변기가
수압이 약한 급수방식으로 바뀌면서 짜장이
잘 안내려가는 일이 많았어요. 그래서 중대장이
화장실 청소상태를 점검하려고 딱 사로 문을
벌컥 열었는데, 추운 겨울철 오줌발도 얼어붙는
날씨 속에서 뜨끈하고 구수한 열기가 펄펄
뿜어져 나오는 짜장 한무데기가 화변기
한가운데에 떡하니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중대장은 훈련병들에게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192명의 훈련병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훈시했습니다.

" 지금 사로에 있는 짜장은 훈련병들의 기합이
빠져있음을 의미한다! 전우 한 명의 실수가
모두를 위태롭게 하는법이다! 지금부터 한 명씩
나와서 여기있는 짜장을 손가락으로 찍어서
먹어라! "

192명의 훈련병들은 한 명씩 나와서 화변기에
놓여있는 이름모를 전우의 짜장을 손가락으로
찍어서 시식하기 시작했으니 이 어찌 기합이
아닐쏘랴? 라이라이차차차 아 여기 육군이지 참
강한친구 대한육군~!

그리고 훈련병들은 이 전우애 가득한 훈훈한
일화를 집에 편지로 적어서 알리게 되었죠.
이것을 본 부모님들은 차라리 애를 패지
어떻게 짜장을 먹일 수가 있냐고 분노했고
언론에 제보하면서 사태가 겉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습니다. 결국 국방부장관이
대국민사과를 해야했고 해당 중대장은
군법재판에 회부되어져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열번째, F-15K 맨홀뚜껑 사건입니다.

2007년 9월 9일, 11전투비행단에서 F-15K
전투기가 작전을 마치고 귀환했습니다.
비행단 요원들은 전투기를 토잉카에 걸고
주기를 위해서 끌고 이동을 했는데요. 이동 중에
갑자기 전투기가 한쪽으로 확 기울면서
넘어지고야 말았습니다. 상태를 확인해보니
전투기가 넘어지면서 주익이 파손된 상태였죠.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해보니 랜딩기어 한 쪽이
맨홀에 빠져있었습니다. 알고보니 맨홀뚜껑이
깨져있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지나가다가
뚜껑이 깨지면서 랜딩기어가 빠져버려가지고
전투기가 넘어졌던 것이었죠. 이 사건으로
인해서 주익을 수리하느라 2억원정도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사람이 다치거나 죽은 사건은 아니긴
하지만, 전투기가 맨홀에 빠진 황당한
사건이라서 전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지게 되었죠.
이때 사람들이 맨홀뚜껑에 킬마크를
새겨야한다는 조롱까지 했을 정도라서 군은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 week ago | [YT] | 18

보처강

이스라엘이 카타르를 공습했다고 합니다.

GDP 우리나라에 반에 반토막짜리 나라도 저렇게
실행력이 우수한데

우리나라는 국민들이 에스트로겐 폭발하는 갱년기가
오셨는지 단체로 에겐국 만드셔서 나라 망할 판국인데도
쫄아가지고 오줌지리며 벌벌 떨면서 북벌도 못하겠다,
선제타격도 못하겠다, 핵무장도 못하겠다 해댑니다.

이스라엘 뒤를 미국이 봐주고 있어서 그렇다고
또 핑계대면서 하남자 에겐남 논리 들이댈분들에게
이야기드리겠습니다.

한미동맹 어디있습니까?

1 week ago | [YT] | 66

보처강

9월 8일 보처강 채널 멤버십 업데이트 공지

멤버십 선공개 영상 2개가 업로드되었습니다.

1. 한국도 사오려고 했던 프랑스제 전투기, 미라주 F1

2. 북한은 왜 핵을 만들었으며 왜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
- 북핵시리즈 몰아보기

채널의 멤버십 프로그램에 가입하신 분들께
모두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며 더 좋은 컨텐츠로
보답하겠습니다.

멤버십 가입링크

youtube.com/channel/UC3vT1NuSY4F-XiH3rs8DtzA/join

1 week ago | [YT] | 11

보처강

프랑스가 가장 많이 판매한 전투기, 미라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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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래 영상의 스크립트를 게시글로 변환한
글입니다.

https://youtu.be/qIxFIxbZxx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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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냉전이 시작되자 소련군 폭격기 부대가
서독을 넘거나 중부유럽을 통해서 들어와가지고
핵폭격을 할 수 있다는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우라강부터 시작해서
미스테르까지 우루루 도입해봤지만,
미국이나 영국같은 항공선진국들의 전투기에 비해서
영 성에 안찼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이미 초음속 전투기들이 나오는 판국이었거든요.
그래서 항공산업에서 한발짝 뒤쳐졌다는
현실을 만회하고 좀 더 빠르게 날아가
폭격기를 잡기 위해서 1952년 초음속
요격기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요구조건은
마하 1.3이상의 속도를 가진 요격전투기였죠.
여기에 전천후, 즉 야간전투도 해야했으니
당연히 레이더가 장비될것을 요구했구요.
여러 업체들이 입찰했는데 닷쏘사는 당시에
마르셀 닷쏘 550번 모델을 제시했죠.
추후에 미라주 1이라고 명명된 이 기체는
놀랍게도 델타익을 채용한 물건이었습니다.

전편인 슈페르 그리퐁편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프랑스정부에서 델타익이
고속에서 유리한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연구용역 줘가지고 아세날 1301이라는
시제기를 만들었다고 말씀드렸죠? 근데
아세날 1301이 미라주 1보다 등장이
느렸습니다. 즉 이 말은 이미 다른 업체들이나
유수한 항공공학자들보다 닷쏘사 사장인
마르셀 블로허가 훨씬 더 앞서서 델타익의
가치를 알아봤다는 것입니다. 그저 천재만재죠.

암튼 이렇게 뛰어난 성능의 시제전투기인
미라주 1이 등장했습니다. 엔진은 국산 엔진이
아니라 영국제 시들리 바이퍼 엔진을
쌍발로 장착한 쌍발 전투기였는데요. 실험비행에서
일단 애프터버너도 안달았는데 엔진의 깡추력으로
마하 0.95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했구요. 애프터버너를
가동하면 마하 1.1까지도 추진이 되었죠. 능력치로만
따지면 슈페르 미스테르랑 비슷한데, 기동성은
훨씬 더 좋아서 블로허가 추진한 델타익 전투기
프로젝트가 옳았음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많았죠. 일단 미라주 1은 너무
작은 경전투기다보니까 당시 무거운 무게로
평이 안좋던 노르사의 AA.20 공대공 미사일을
한 발 밖에 장착할 수 없었어요. 게다가
기관포를 달 공간도 없었고 항속거리도
매우 구렸죠. 레이돔과 항전베이도 쪼매나니
제대로된 레이더는 언감생심이었습니다.
게다가 목표로 하던 마하 1.3이라는
속도는 SEPR라고 불리는 보조추진 로켓을
점화시켜야만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나라들이 대개 보조추진장치 없이
제트엔진과 애프터버너로만 초음속 전투기를
만들던 것과는 달리 좀 덜떨어진 방식이긴 하죠.
물론 프랑스가 그만큼 동시기 다른나라들보다
상승력과 가속력에 치중한 능력치를 원했다는
것이긴 한데, 보조추진로켓은 여러모로
달고다니기 불편한 물건이었죠. 게다가
이는 당시 후보에 오른 다른 업체 전투기들이
다 달고 나왔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개선형인 미라주 2에 와서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미라주 2는 최고속도가
마하 1.6으로 늘기는 했지만, 나머지 특성들은
그대로였어요.

블로허는 미라주시리즈의 설계자체는 문제가
없으니까 이걸 좀 뻥튀기한 전투기를
개발했는데요. 이렇게 해서 1956년에
첫 비행을 하게 된 것이 바로 프랑스 항공산업의
미래를 결정지은 세기의 역작, 미라주 3였습니다.
최대이륙중량은 13톤급으로 지금 현재
FA-50이랑 비슷한데요. 자체중량은 7톤급으로
적어도 F-16A형 정도는 됩니다. 뭐 이정도면
경전투기 아니냐고 하실 분들도 계시는데요.
당시로서는 나름 큰 체급이었습니다. 초창기
전투기들의 체급이 자체중량 5톤 정도에서
놀기도 했구요. 게다가 그전에 나온 미라주 1은
체급이 얼마였는지 아세요? 자체중량 3톤에
최대이륙중량 5.5톤이었습니다. 이렇게
체급이 커질 수 있었던 원인은 바로 프랑스
국산 스네크마사가 드디어 다른 나라들의
엔진들과 견줄 수 있는 명품 엔진을
개발했기 때문이죠. 바로 아타 09 엔진입니다.
추력은 1만 3천파운드를 제공하고 있구요.
덕분에 속도는 마하 1.8 이상으로 늘어났죠.
여기에 SEPR 841이라는 신형 보조로켓을
추진시키면 마하 2.2까지 순식간에
가속이 가능했습니다. 일격일탈의 요격기로서는
정말 환상의 성능이었죠.

델타익을 갖춰서 고속에서 유리하구요.
동체도 기존처럼 드럼통 체형으로 전투기를
만들면 고속에서 안정성이 처지는 경향이 있는데
새로운 기법들을 도입해서 쌔끈빠끈한
몸매로 다듬게 되었죠. 덕분에 고속에서의
공기흐름이 더 매끈해져서 안정적인
비행에 가능했습니다.

여기에는 시라노 레이더가 장착되어져서
최대 25km거리에서 적기를 탐지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보다 넓어진 레이돔과
항전베이로 인해서 드디어 제대로된 레이더가
장착된 것이죠. 뭐 동시기에 등장했던
F-4 팬텀기에 비하면 좀 떨어지기는 한데
팬텀기는 쌍발 대형 전투기라서 더 큰
레이더가 들어간다는 것을 기억하셔야합니다.
여기에 사거리 20km짜리 마트라 530 공대공
미사일이 장착됩니다. 마트라 530
공대공미사일은 반능동레이더유도방식의
중거리 공대공 미사일인데요. 동시기의
미국제 스패로우 미사일보다는 사거리가
짧았지만, 이전작인 노르사의 AA.20보다는
훨씬 더 사거리가 길어진 수준이었구요.
이정도면 미라주 3가 빠른 속도로 상승해서
적 폭격기에 미사일을 멕여주고 튀기에는
나쁘지 않은 사거리였죠.

다만 하드포인트는 꼴랑 3개로 좀 문제가 있어서
나중에 양산형인 미라주3C형에서 5개로
늘어나게 되었죠. 여기에서는 미국제
사이드와인더 B형 단거리 공대공미사일도
운영할 수가 있는데요. 나중에는 프랑스 국산
단거리 공대공미사일인 매직 미사일이
개발되면서 사이드와인더B형을
대체해버렸습니다. 매직미사일 같은 경우에는
사이드와인더B형이랑 동체급인데도 불구하고
최대사거리가 10km로 사이드와인더 B형보다는
훨씬 길었구요. 로켓모터도 강력해서 마하 3의
속도로 적기를 따라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뛰어난 전투기로 탄생한 미라주 3는
시범비행을 보자마자 수많은 박수갈채를
받았구요. 초도양산형모델인 미라주3A
10대를 선주문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운영해본 결과는 대만족.
곧바로 훈련기용도로 나온 과도기형 양산모델인
미라주 3B를 주문했구요. 30mm DEFA
기관포 두 문을 장착해서 본격적인
요격전투기 사양으로 나온 찐양산형인
미라주 3C형까지 우루루 지르게 되었죠. 여기에
레이더 대신 카메라를 장착한 미라주 3R형도
도입하게 되었구요. 그런데 프랑스군은 좀
아쉬운게 하나 있었습니다. 미라주 3가 진짜 딱
폭격기나 때려잡는 요격기로나 적합하지
막상 공대지임무나 공대함임무로 써먹으려면
항법장치가 없어서 문제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전폭기버전 미라주 3로 1964년에 나온 궁극의
미라주3가 바로 미라주3E형이었습니다.

동체를 연장해서 항전베이와 레이돔 크기를
더 키웠구요. 레이더는 훨씬 더 고성능인
시라노 2 레이더로 개량되었습니다. 공대공과
공대지 듀얼모드를 가지는 아주 선진적인
레이더였죠. 공대지 모드에서는 폭탄이나
로켓의 탄도계산도 가능해서 훨씬 정확도가
높은 공대지 타격을 할 수가 있었죠. 게다가
마르코니사의 저고도 항법레이더가 별도로
기체 하단부에 장비되어져서 저고도 침투임무도
수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상기반 레이더는
높고 먼 곳은 잘 봐도 가깝고 낮은 것은 잘
못본다는 단점이 있거든요. 그래서 저고도
침투가 당시에는 유행이었습니다. 프랑스
국내형 미라주3E 같은 경우에는 25kt의 출력을
내는 AN-52 전술핵폭탄을 운반할 수 있도록
개량이 들어가졌습니다. 그래서 프랑스는
소련의 지상군이 서독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오면
이 핵폭탄으로 찜질을 해줄 생각이었죠.

그렇게 해서 얼마나 팔았냐구요? 무려 1422대나
판매되었습니다. 프랑스가 이제까지 만든
전투기 중에서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죠.
일단 프랑스가 미라주 3E형 192대를
포함해서 총 348대를 사줬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규모의 경제는 다 갖췄죠.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서도 많이 팔릴 수 밖에
없던 이유가 틈새시장 공략에 성공했어요.
미국이랑 친하지 않거나 돈 없어서 미국제
못사는 나라들이 있죠. 그렇다고 소련제
전투기 쓰기에는 싫은 경우에는 결국
미라주 3밖에 답이 없었습니다. 적절한 가격에
당시로서는 최첨단인 공대공 레이더도
달려있고 아쉬운대로 중거리 공대공능력도
있죠. 속도 마하 2로 빠르죠. 일단 자국을
지킬 요격기로서는 딱인거야. 그래서
우루루 도입했던 것입니다.

대표적으로는 이스라엘에서 이 미라주 3가
출시되자마자 전세계 유대인들에게 기부금을
걷어서 76대를 업어갔는데요. 1960년대 내내
이 미라주 3를 가지고 엄청난 전공을 세워가지고
미라주 3의 해외판매량 폭증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다만 닷쏘가 전투기를 너무
잘 만들어준 탓에 아랍국가들이 분노해서
프랑스에 밸브를 잠그겠다고 협박해댔다는
사소한 찐빠가 있었죠. 결국 프랑스는
이 협박에 굴복해서 이스라엘에 대해
무기금수조치를 실시했습니다. 따라서
미라주 3의 추가판매는 물론이거니와
부품조차도 몰래몰래 넘겨줘야하는 상황이 되었죠.

놀랍게도 호주가 프랑스 다음으로는
최대 도입국인데요. 무려 116대를 라이센스
생산으로 도입해서 애지중지 굴렸습니다. 호주는
미라주 3의 시제기가 비행할때부터 이미
이 전투기의 우수성에 반해버려가지고 아예
프랑스군이랑 거의 동시기에 덜컥 도입계약을
체결했을 정도였죠. 남아공에도 74대가
판매되었습니다. 당시 악명높은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해서 전세계로부터 왕따를
당하던 남아공은 미국제 전투기도, 소련제
전투기도 살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요. 이때
프랑스가 제 3세계의 오야붕을 자처하고
미라주 3를 팔아준 것이죠. 다만 이스라엘처럼
끼워팔기를 시전했구요. 이것을 판 다음에는
역시 프랑스가 전세계적인 비난에 직면했죠.
이 사건으로 유엔에서는 아예 남아공에 전세계가
무기를 팔지 말자고 권고하는 유엔안보리
제제안이 통과가 될 정도였습니다.

이외에 스페인도 사갔고 꽤 여러 나라들이
도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라주 3에도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마하 2의 속도를 내려면 보조추진로켓을
점화해야한다는 상당히 덜떨어진 방식이라서
문제가 있었구요. 가장 큰 문제는 기체가
크지 않은데 이것 저것 많이 때려넣다보니까
항속거리랑 폭장량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폭장량은 4톤 정도라가지고
적절한 수준이기는 했는데요. 정작 주익의
구조와 배선배치문제로 하드포인트가
5개로 제한되다보니 그다지 많은 무장을
장착하기가 어려웠죠. 항속거리는
2400km라가지고 이전작인 미스테르
시리즈보다 길구요. 요격전투기 치고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축이었는데요. 문제는 이것을 쓰는
나라들은 프랑스랑 달리 호주나 남아공,
아르헨티나처럼 넓은 영토를 커버해야하는
경우가 많았구요. 이스라엘의 경우는 장거리
침투비행까지 하다보니까 항속거리가 짧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항속거리를
커버치려고 연료탱크를 추가로 주익에 달면
자기방어용 단거리 공대공 미사일 달 자리만
나오고 정작 폭탄 달 자리가 하나도 없는
상황이라서 의미가 없었죠.

이런 문제가 극대화 되었던 것이 바로
포클랜드 전쟁입니다. 1982년, 아르헨티나의
군사정부는 경제정책 실패로 인해서
정권유지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려고 영국령 포클랜드를
침공해서 먹어버렸는데요. 당시 영국은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어서 대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총리가 포클랜드 탈환을 천명하면서 사태는
양국의 전면전으로 발전되었죠. 다만 당시
영국은 포클랜드까지 무려 1만 2천km나
떨어져 있어서 항모전단을 보내야 했는데요.
당시 정규항모를 죄다 돈 없어서 퇴역시켜버린
통에 우수한 성능인 팬텀기를 동원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결국 쓸 수 있는
전투기라고는 경항모에 있는 해리어
수직이착륙기였거든요. 초음속 기종도 아니었습니다.
딱 로켓싸개 정도의 능력치인데요. 반대로
아르헨티나군은 제대로된 마하 2급 초음속 요격전투기인
미라주3를 가지고 있어서 전쟁 전에는
아무도 영국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을 못했죠.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미라주 3들이
포클랜드 해역에서 영 힘을 못썼습니다.
물론 해리어 전투기에 미국이 전방위 락온이
가능한 단거리 공대공미사일인
사이드와인더L형을 제공한것도 좀 컸는데요.
가장 큰 문제는 역시 항속거리였습니다.
당시 포클랜드섬에는 전투비행단이 상주할만한
크기의 비행장이 없었거든요. 그럼 결국
본토에서 미라주 3가 날아와서 제공권을
잡아줘야하는데 미라주 3가 포클랜드
상공에서 체공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5분 밖에 안되었었습니다. 이런데 어떻게 싸워?
결국 포클랜드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돌아가고야 말았죠.

결국 이러저러한 한계가 있기도 해서
프랑스에서는 1988년에 미라주 2000으로
대체시키고는 전량 퇴역시켜버렸구요.
나머지 나라들도 현재는 운영하는 나라가
딱 한 나라 밖에 없습니다. 바로 파키스탄.
파키스탄은 1970년대에 미라주 3를
사갔는데요. 파키스탄 영토에 침범한 인도군의
캔버라 폭격기를 격추시키는 등 전형적인
요격기로서 큰 활약을 했죠. 파키스탄군은
미라주 3가 마음에 들었는지 호주군에서
퇴역시킨 미라주3도 사와서 추가적으로
장비하고 그랬습니다. 근데 왜 이런
구닥다리 전투기를 유지하냐먼 파키스탄 공군은
현재까지도 인도공군에 비해서 규모면에서는
매우 열세인 상황입니다. 전투기
한 대가 아까운 상황이라 쉽사리 미라주 3를
퇴역시키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1990년대부터 대대적인 개량사업에
들어갔는데요. 탐지거리 75km의
그리포레이더를 장착하고 사거리 70km짜리
중국제 PL-12 중거리 공대공미사일을
인티시켰습니다. 이 물건은 암람과 같은
능동레이더유도 미사일이라서 일정거리까지만
전투기의 레이더가 유도해주면 미사일이
레이더시커를 키고 적기를 알아서 따라가 맞는 물건이죠.

현재는 지속적으로 개량사업이 진행되면서
사거리 120km짜리 공대지 미사일인 H-4나
활공유도폭탄까지 인티가 되었구요. 사거리
550km짜리 라드2 스텔스 핵순항미사일까지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오래전에 단종된 전투기인데 부품은
어디서 구하냐구요? 일단 파키스탄 공군에서
전세계를 돌면서 퇴역시킨 중고 미라주 3들을
업어옵니다. 그리고 우리 핫싼 큰형님께서
뻰찌랑 빠루 들고 가가지고 최첨단 글라놀로지로
부품단위로 깔끔하게 분해합니다. 분해한
부품들은 다시 연마하고 코팅하는 과정을
거쳐서 새 제품처럼 출고하는 오늘도 평화로운
파키스탄 되겠습니다.

총평하자면 미라주 3는 프랑스 항공산업과
닷쏘사를 일거에 세계에서 탑급으로 올려놓은
우주명작 전투기가 되시겠습니다. 적절한
성능에 적절한 가격에 심지어 개발국가도
적절하게 노빠꾸 마인드를 갖춘 프랑스라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기종으로서 이름날 수가
있었죠. 하지만 도입국들은 프랑스의
안보환경과는 다른 경우가 많아서 미라주 3의
특성이 그 안보환경과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엉뚱한
부분에서 불평불만을 많이 들어먹었던
전투기입니다. 뭐 불만이 있으면 미제 사서 쓰면
되겠지만, 대개 그럴 형편이 안되거나 그럴
처지가 아닌 나라들이었으니 참 어렵죠.

2 weeks ago | [YT] | 23

보처강

사자보이즈도 울고갈 북한에서 곰잡은 썰

상황이 이런데 북벌이 불가능하다?
북한보다 수십배 많은 국방비를 내 나이만큼 세월을
써왔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인 나라에서
고작 북한군따리한테 패배를 걱정해야한다면
어떤 대통령 말대로 그많은 돈은 다 떡사먹었습니까?

2 weeks ago | [YT] | 53

보처강

한민족의 생존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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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래 영상의 스크립트를 게시글로 변환한
글입니다.

https://youtu.be/C3LOhb0SF1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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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북벌편 영상에서 저는 대한민국이
저출산으로 인한 멸망이 확정되었으며 그 과정은
풍요속의 안락사가 아닌 베네수엘라나
소말리아라고 알려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멸망은 안타깝게도 제가 노인이 되기 전에
찾아올 것임이 확실해졌습니다. 한국의
멸망이 확정되었다는 것은 한국인들만
애써 외면하는 사실입니다. 외국에서도
한국이 이번 세기 중반에 멸망할 것임을
기정사실로 오피셜하게 박아두고 있더군요.
제가 즐겨보는 해외 과학채널인 쿠르츠게작트에서도
몇주전에 한국의 멸망이 확정되었다는 영상이 올라와서
조회수 천만회를 넘기기도 했었죠. 이제
대한민국의 멸망을 막기 위한 유일한 방법인
북벌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습니다.
제가 북벌을 하겠다고 나선 것은 놀랍게도
저의 책임이 아닙니다. 제가 북벌을 하겠다고
나서게 만들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나라를
이지경 이몬양으로 망가뜨려놓고 저출산에
400조원 퍼붓고도 세계 최악의 저출산을
만들어냈으며 북벌이 아니면 국체를 유지할
수도 없게끔 만든 우리의 정치인들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제가 북벌 과정에서 5천여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할 수 있다고 언급한 것을
가지고 전쟁을 해서 5천명의 젊은이들을
죽일 바에는 너 혼자 죽으라고들 합니다.
좋습니다. 반대하시는 분들은 원하시는대로
북벌을 막을 유일한 방법으로서 저를 제거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하려는 북벌을
막으십쇼. 그러면 북벌반대파 여러분이
원하시는 미래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절망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살며 5천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매년 목숨을 포기하는 나라,
5만명 이상의 국민들이 매년 범죄로
살해당하는 나라, 50만명 이상의 국민들이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는 나라, 500만명 이상의
국민들이 실업자인 나라, 그런 나라 만드십쇼.
저는 어차피 죽고 없을테니 그런 끔찍하고
드러운꼴 안봐도 되니까 상관 없습니다.
단지 남은 사람들이 불쌍하고 걱정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북벌로서 필요한 우리의 민족의 영토는
어느정도이며 어디까지를 북벌의 대상에
넣을 것인가? 그것은 이상이나 환상, 혹은
과거의 고구려시절 영광에 취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 아닌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분석된
필요성에 의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판단한 대한민국의 북벌로서
필요한 가장 일차적이자 기본적으로
확보해야하는 영토는 바로 민족의 최소생존권인
압록강과 두만강을 자연경계로 나누는
반도입니다. 현재의 남북한 영토를 합친, 즉
통일된 영토죠.

북한지역을 전면 재개발해서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고 북한인구를
흡수하여 저출산 문제가 해결될때까지
인구그래프의 중간 연결고리 문제를 해결하며
나아가 한국을 남북한 합쳐서 1인당 GDP
5만불, 인구 1억의 경제대국으로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한민족은 반도의 남쪽영토를
고도화된 고부가가치산업을 이끌어가고
기술집약적인 산업을 육성하는 민족의
연구소로 이용하게 될 것입니다. 반도의
북쪽 영토는 새로 재개발을 진행하여
개발집약적인 산업들이 들어설 것입니다.
그리고 비교적 저렴한 인건비를 통해
반도 남쪽에서는 꺼져가는 제조업이 대대적으로
육성되어 민족의 공장 역할을 할 것입니다.
남쪽에서 연구하면 북쪽에서 생산하고
그것을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하여 남북지역
공동으로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지역 중
하나로 우뚝 스게 될 것입니다.

민족의 최소생존권역의 확보를 통한
경제대국이라는 기본적인 전제조건이
달성된다면 우리는 넥스트 스텝으로
민족의 권장생존권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이 주어집니다. 바로 동북 3성을
포함한 만주와 연해주입니다. 고구려와
발해가 누렸던 전통적인 강역이죠. 이곳은
민족의 최소생존권역이 보장되지 않고
경제대국이 되지 못하면 갈 수 없는 지역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의 인구는 남북한 합친 것보다
많아서 투표권 주면 당연히 중국인 대통령 나오고
중국어로 공용어 정해지겠죠. 그리고 한국이
민족의 최소생존권역인 북한지역과
권장생존권역인 만주와 연해주를 지금 당장
받아온다고 하더라도 이들 지역 모두를
개발해서 성장시킬 여력은 전혀 없습니다.

있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연해주는 그렇다 쳐도
동북 3성은 인구도 많고 엄청나게 넓은
지역이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가장 낙후된 지역인 북한지역을 먼저 개발하려고
만주와 연해주지역에서 재원을 빼온다면
당연히 현지 민심은 이반될 것입니다.
안그래도 동북 3성이 중국 내부에서는
소외된 깡촌취급 당하는 중인데 여기서
더 차별을 받는다면 바로 분리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 지역들은 허구헌날
폭탄테러가 횡행하는 아시아판 소말리아가
될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만주와 연해주는
러시아와 중국을 맞대고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항상 만주를 제국의 고환같은 곳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동아시아에서 강대해진
제국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항상 먹는 곳이 만주였습니다.

명나라도, 조선도 이를 시도했었고 가깝게는
국공내전때 장제스와 만주사변 이후의
일본이 있었죠. 그래서 아주 중요한 곳이면서도
동시에 만약 제국이 약화된다면 가장 먼저
안보위기를 겪으면서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는
곳이 바로 이 만주라는 곳입니다. 만주는 여러
세력에게 포위당한 내륙이라는 지리적인
불리함을 가지고 있구요. 동시에 산맥 사이에
위치한 넓은 평원과 구릉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나름대로 꿀땅인 곳을
차지하려는 세력들은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만주를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이곳을 먹은 제국의 급소라는 의미로
제국의 고환이라는 표현을 썼던 것입니다.
그 말은 만약 한국이 지금 당장 만주로
쳐들어가서 땅을 먹었는데 북한지역
개발한답시고 만주의 자본을 끌어다 쓰면
당연히 현지인들이 반발하겠고 그럼
개판나겠죠. 이상황에 외부세력이 끼어들어서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곧바로 안보위기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서 제국은
무너질테고 저는 벙커 안에서 권총을
들어야겠죠. 그래서 저는 전편인 북벌편에서도
이곳으로 진출하더라도 군사적인 목적만
달성한 채 합병하지 않고 군을 물려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냉정하게 따져서 지금 우리는
만주를 통치할 능력이 안됩니다. 아 연해주는
가능합니다. 거기는 인구가 적거든요.

그래서 저는 한민족이 최소생존권역을
달성한 뒤 경제대국이라는 업적을 먼저 찍어야
권장생존권역인 만주와 연해주로 갈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만약 가까운 미래에
제가 구상한 한반도 백년대계가 성공해서
한민족의 최소생존권역에서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다면 드디어
만주와 연해주를 수복할 수 있으며 한민족은
안정적이고 자체적인 식량수급이 가능해집니다.
참고로 만주지역에서는 연간 1400만톤의
쌀이 생산되며 이는 대한민국의 쌀 생산량의
3.5배에 달하는 양입니다. 쌀만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잡곡과 옥수수, 콩 같은 작물들도
어마어마합니다. 연해주 역시 지금 현재
한국의 풀무원이 진출해서 경작을 해본 결과
마치 미국의 옥수수밭을 떠올리게 하듯 끝도
없이 펼쳐진 콩밭을 일구어내는데에
성공했습니다. 따라서 민족의 권장생존권으로
진출한다면 우리민족은 한반도 남부의 연구소
지역, 북한지역의 공장지역에 이어서 만주와
연해주의 식량생산기지를 확보하여
1, 2, 3, 4차 산업 모두를 풍족하게 보유한
진정한 제국으로서 탈바꿈됩니다.

권장생존권역까지 확보하고 중국내부에서도
비교적 낙후된 곳이었던 만주지역, 그리고
러시아 내부에서도 깡촌이었던 연해주를
대대적으로 개발하고 기업농으로 전환하여
효율화를 실시하면 장기적으로 인구는
3억명까지 증가할 것입니다. 1인당 GDP는
5만불 선에 머물며 잠시 저성장처럼 보이겠지만,
그동안 최소생존권역에서 식량확보문제로 높은
물가에 시달리던 우리 민족은 단군 이래
최대의 물가안정을 구가하면서 실질구매력과
생활수준은 1인당 GDP 6~7만불급의 생활을
영위하게 될 것입니다. 대량의 옥수수재배가
가능해지면서 축산업도 발달할 것이고
기업형 농장에서 생산된 축산물들로 많은
사람들이 한우를 좀 더 저렴한 값에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만주와 연해주를
수복한다면 대한민국의 헌법 제 3조와 정면으로
위배된다면서 반대하는데요. 참고로 헌법에
명시된 한반도라는 개념은 지정학적인 한계가
딱히 정해져있지 않습니다. 요동반도와 만주,
연해주를 묶어서 한반도라고 해석하는것 역시
가능하며 이를 이미 세간에서는 만반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주변 제국인
중국과의 장기간의 대치가 가능해집니다.
먼 미래에 이 상태로 지속 번영을 누린다면
민족의 최대 통치한계권역까지도 노려볼 수
있는데요. 서쪽으로는 중국의 양쯔강 이북지역,
서쪽으로는 몽골, 북쪽으로는 시베리아 전역, 동쪽으로는
사할린섬부터 캄차카, 마가단, 베링해협까지, 남쪽으로는
일본이 있습니다. 우리민족은 동아시아 전역을
석권하였으며 완전한 세계제국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주변에 감히 쳐들어오거나 위협을
가할 세력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거대해진
경제력으로 우주개발에 힘을 쏟아가지고
우리 민족이 우주로 힘차게 뻗어나갈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저는 이런 과도한 팽창주의를 지지하는편이
아니며 필요성에 의해서만 진출해야한다는
신중한 입장입니다. 최대통치권역이라고
표현한 것 자체가 이때쯤부터는 우리의
행정력과 군사력이 닿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자칫 잘못하면
반란이나 소요사태로 인해서 제국이 소련처럼
한 순간에 붕괴되고 다시 압록강과 두만강쪽으로
소득 없이 쪼그라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제국의 붕괴 과정에서
우리 민족은 민족 전체가 말살당하는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과유불급,
뭐든 과하면 안하느니만 못한 법입니다.

제가 북벌을 이루고 죽은 뒤 먼 미래에
우리민족이 권장생존권역을 확보하거나
혹은 필요에 의해서 최대통치권역으로
확장되는 것, 그리고 우주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 후손들의 선택에 달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첫 시작인 북벌을 이루지 못한다면
후손들은 선택권 조차도 없어진 채 다른
민족들의 군홧발에 짖밟히겠고 한국인이라는
존재는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후손들이 세계제국을 이루거나, 혹은 이루지
않거나를 결정하는 것은 후손들의 선택이지만,
그 선택권을 주는 것은 저와 여러분의 몫입니다.

2 weeks ago | [YT] | 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