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감사함을...수필로 담았습니다


좋은생활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저서 "군주론" (The Prince)을 읽고

                            조근수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 예술과 음모가 얽히고, 도시국가들 사이의 권력 다툼이 일상이었던 그곳에서, 한 사내가 정치의 전장에서 물러나 유배처럼 은거하며 펜을 들었다. 그의 이름은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그가 남긴 "군주론(Il Principe)"은 책상이 아니라 전쟁터와 궁정의 복도에서 태어난 글이었다.

“È molto più sicuro essere temuto che amato.”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훨씬 더 안전하다.

직역하면 단순한 문장이다. 그러나 이 말은 책 전체의 심장을 대신 뛰게 하는 문장이다. 마키아벨리는 인간의 본성을 믿지 않았다. 그는 인간을 변덕스럽고, 배은망덕하며, 자기 이익 앞에서는 관계를 버리는 존재로 보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위기 앞에서 쉽게 무너진다. 그러나 두려움은, 그 마음이 사라질 때까지 상대의 행동을 묶어두는 쇠사슬이 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오래 멈춰 있었다. 도덕 교과서 속 나는 늘 사랑과 신뢰를 권력의 기초라 배웠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말 앞에서, 수많은 역사와 현실의 사례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정치, 기업, 심지어 가정의 권력 구조까지. 사랑만으로는 지켜내기 어려운 순간들이 분명 있었다.

“Un principe prudente non può, né deve, mantenere la parola data quando tale osservanza torni contro di lui.”
현명한 군주는, 그 약속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오게 될 때 그것을 지킬 수도, 지켜야 할 이유도 없다.

이 말은 나에게 배신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는 이유를 댔다. 정치의 세계에서 약속은 절대적 도덕 규범이 아니라,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전쟁이 터지고, 연합이 깨지고, 상황이 급변할 때, 과거의 약속이 군주와 국가를 옭아맨다면 그것은 미덕이 아니라 파멸의 사슬이 된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과거 내 삶에서 한 약속들을 떠올렸다. 끝까지 지켜 아름답게 남은 약속도 있었지만, 변한 상황 속에서 결국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약속도 있었다. 개인의 인간관계에서도 이런데, 전쟁과 권력 다툼 속이라면 그 냉혹함이 얼마나 클까.

"군주론" 속에는 수많은 역사적 사례가 숨 쉬고 있다. 나폴리 왕국의 몰락에서, 로마 교황청의 권력 유지 방식에서, 그리고 프랑스와 스9페인의 교묘한 외교 술수에서 그는 교훈을 뽑아냈다. 그는 단순히 이론을 말하지 않는다. 실패한 군주의 예를 들며, 그들이 어떤 순간에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 그리고 살아남은 군주가 어떤 전략을 썼는지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그는 민중과 귀족 사이의 미묘한 균형, 전쟁 준비의 필연성, 신하와 군대의 충성 관리까지 세밀하게 다룬다. 모든 내용이 단 하나의 질문에 수렴한다. “군주는 어떻게 살아남는가.”

읽으며 나는 카이사르를 떠올렸다. 민중의 사랑과 군사력을 동시에 쥐었지만, 귀족들의 칼날 앞에서 무너졌다. 진시황은 두려움과 강압으로 천하를 통일했지만, 그 두려움이 제국의 수명을 짧게 했다. 반면 링컨은 전쟁 속에서도 신뢰와 이상을 놓지 않았기에 ‘영원한 대통령’으로 남았다. 마키아벨리의 말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또 어떻게 무너지는지 역사는 이미 답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 책은 군주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왕국의 군주다. 가족 안에서, 회사 안에서, 혹은 내 마음 속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사랑과 두려움, 신의와 배신 사이에서 우리는 선택을 강요받는다.

마키아벨리는 권력을 칼에 비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책을 읽으며 권력은 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칼은 쥔 자의 손에 따라 생명을 지키는 방패가 될 수도, 무너뜨리는 흉기가 될 수도 있다. 그는 칼을 예리하게 가는 방법을 알려주었지만, 그것을 어디에 휘두를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책을 덮은 뒤 독자 스스로에게 맡겨진 질문이었다.

500년 전, :군주론"은 교황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다. 너무도 날것 그대로 권력의 속살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500년 후, 하버드와 서울대를 비롯한 수많은 명문대에서 필독서로 지정된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이상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그가 말한 “두려움과 사랑”이라는 두 축을 오래 떠올렸다. 비둘기의 부드러운 깃털과 칼날의 냉혹함을 동시에 지닌 권력의 얼굴. 마키아벨리는 그 가면을 벗겨냈다. 이제 그 얼굴을 본 이상, 나는 다시 예전처럼 순진한 군주로는 돌아갈 수 없다.

4 months ago | [YT]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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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이 있는 쪽으로

괜찮아, 나는 너를 믿어
세상이 등을 돌려도,
찬바람이 문틈으로 스며들어도
나는 여전히 너를 믿어

너는 흰 구름처럼 부드럽고
햇살처럼 따뜻한 사람이니까
비가 내려도, 밤이 깊어도
네 마음의 빛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네 한마디는 등불이었고
네 손길은 다리였으며
네 웃음은 꺼지지 않는 불꽃이었어
그 불꽃 앞에서 나는 숨을 고르고 일어섰어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말해
괜찮아, 나는 너를 믿어
내일도, 모레도, 끝내는 말할 거야
괜찮아, 나는 너를 믿어

힘들면 내게 기대어
네 돌덩이 같은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줄게
말이 되지 않아도, 눈물만 흘러도
나는 끝까지 들어줄게

너의 발자국 옆에는
언제나 내 발자국이 있었어
비에 씻겨도, 눈에 묻혀도
우린 같은 방향으로 걸어왔어

비 내리던 골목길에서도
눈 덮인 새벽길에서도
우리는 같은 온기를 품고
서로의 어깨를 스쳤어

홀로라는 생각이 널 삼키려 할 때
기억해, 꼭 기억해
깊은 물결 속에도 너를 맞는 항구가 있다는 걸
그곳엔 불빛이 켜져 있고,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 불빛은 흔들리지만 꺼지지 않고
바람에 기울지만 다시 곧게 서고
밤이 깊을수록 더욱 또렷해져
너를 이끌고, 너를 품을 거야

네가 있었기에 계절을 건널 수 있었어
겨울이 길어도, 여름이 숨 막혀도
그 끝에는 늘 네가 있었어
네 이름이 나를 일으켜 세운 날들을 나는 기억해

그 기억은 마른 땅에 스미는 빗물처럼
나를 적시고, 나를 살아 있게 해
너의 이름이 내 심장을 두드릴 때마다
나는 다시 내일로 걸어갈 수 있었어

그래서 나는 다시, 그리고 또다시 말해
괜찮아, 나는 너를 믿어
언제나, 나는 너를 믿어
그리고 우리는 불빛이 있는 쪽으로, 함께 걸어갈 거야

불빛이 있는 쪽으로,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우리는 함께 걸어갈 거야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항구로,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끝내 함께 닿을 거야

4 months ago | [YT]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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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숨결

                 조근수

사랑은 노력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햇빛처럼 스며와 마음을 적시고,
바람처럼 스쳐와 심장을 흔들고,
물결처럼 번져와 세상을 물들였다.

여름의 끝,
매미 울음이 아스팔트 위에 부서지고,
장미잎의 붉음이 마지막 숨을 태우던 날,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 전부인 듯,
그 순간이 영원인 듯,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꽃이 피면 물을 주듯,
강이 흐르면 물길을 지키듯,
그 마음 또한 가꾸어야 했다.

햇살이 꽃잎을 감싸듯,
빗방울이 땅을 적시듯,
내 마음은 네 곁을 거두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면 온기를 더했고,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펼쳤다.
기다림의 날에는 침묵을 지켰고,
흔들리는 날에는 손을 꼭 잡았다.

사랑은 노력으로 시작되지 않았지만,
시작된 사랑은 노력으로 숨 쉰다.
그 노력이 없으면 시들고,
그 노력이 있으면 다시 핀다.

가을의 첫 서리가 내릴 무렵,
나는 알았다.
사랑이란 불씨는 스스로 타오르지 않고,
우리의 손길과 숨결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나는 너를 가꾼다.
햇살처럼, 바람처럼,
그리고 사랑의 숨결처럼.

長風遠渡 (장풍원도)
細雨長留 (세우장류)
花恒有秀 (화항유수)
心自無休 (심자무휴)

긴 바람 멀리 건너가도
가는 비는 오래 머물고,
꽃은 늘 고운 빛을 품고
마음은 스스로 쉼이 없네

4 months ago | [YT]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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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돌아온 날, 그 빛을 지키는 날 – 광복 80년의 노래


빛은 매일 떴으나, 우리의 하늘은 밝지 않았다.
아침의 해는 들녘 위에 걸렸지만, 그 빛은 마음에 닿기 전에 꺾였다.
바람은 골목을 지나갔지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그 바람 속에 실리지 못했다.
걷는 발자국은 흙 위에서 사라졌고, 웃음은 입술 위에서 말랐다.

이름을 부르면 잡혀가고, 노래를 부르면 끌려가던 시절.
학교의 책에서 우리 글자는 지워졌고, 마을 어귀의 비석에는 낯선 글씨가 새겨졌다.
아이들은 제 이름을 조국의 말로 쓰지 못했고, 어머니들은 자식에게 고향의 자장가를 가르칠 수 없었다.
말은 목구멍까지 차올라도, 내뱉는 순간 날아드는 채찍이 그 말을 삼켰다.

등잔불 아래, 우리는 조심스레 종이쪽지를 돌려 읽었다.
거기엔 몰래 베껴 쓴 시 한 편, 빼앗긴 하늘을 되찾겠다는 짧은 약속이 있었다.
그 글자를 읽는 눈빛이 얼마나 뜨거웠던가.
하지만 등잔불은 길게 타오르지 못했고, 그림자는 벽에 기대어 온밤 떨었다.

시장에 선 어머니의 바구니에는 곡식 대신 침묵이 담겼고,
논밭을 가는 농부의 손에는 낫 대신 전해진 소문이 들려 있었다.
웃음을 지어도 그 웃음은 눈까지 번지지 못했다.

계절은 바뀌어도, 굴종의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봄이 와도 꽃은 피지 않았고, 여름이 와도 강물은 자유롭게 흐르지 못했다.
가을의 곡식은 남의 창고로 들어갔고, 겨울의 눈송이마저 낯선 발자국에 밟혀 흙과 섞였다.

그러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낯선 군복이 마을 어귀를 지날 때도, 눈빛 속의 빛은 꺼지지 않았다.
모래바닥에 몰래 그린 태극 문양,
흙담 밑에 묻어둔 독립신문 한 장,
그 모든 것이 어둠 속에서 깜박이는 등불이었다.

우리는 알았다.
이 어둠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 별빛이 여전히 하늘 어딘가에서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그날이 오면, 우리는 온몸으로 달려 나가 그 빛을 안아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그날의 아침은 오래 잠겨 있던 하늘이 갑자기 열리듯 찾아왔다.
닫힌 창문이 스스로 열리고, 묵직하던 공기가 바뀌었다.
오래 붙잡아 두었던 숨이, 마침내 터져 나왔다.

누군가 달려오며 소리쳤다.
“자유다! 해방이다!”
그 목소리는 바람이 되어 골목을 돌고,
산등성이를 넘어, 들판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냈다.

하얀 옷이 골목마다 모였다.
낯선 군복과 군모는 그날, 두려움의 표식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손에 태극기가 펄럭였고,
오래 숨겨 두었던 깃발이 창고와 서랍, 흙담 밑에서 쏟아져 나왔다.

“대한독립 만세!”
그 외침은 한 번의 소리가 아니었다.
산이 따라 울리고, 강이 메아리쳤으며,
아이의 목소리와 노인의 목소리가 한데 섞여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눈물이 있었다.
기쁨의 눈물, 그리움의 눈물, 돌아오지 못한 이를 부르는 눈물.
팔을 벌려 서로를 끌어안았고,
오래 이별했던 이들이 재회의 말을 잊은 채 울었다.

그날의 공기는 다르게 불었다.
바람 속에는 ‘다시’라는 말이 숨어 있었고,
햇빛 속에는 ‘함께’라는 뜻이 숨어 있었다.
풀잎 하나, 먼지 한 톨까지도 자유를 노래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 순간,
누구나 알았다.
이 기쁨이 영원히 계속되려면,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광복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음을.

광복은 기쁨의 문이었지만, 그 문 너머는 꽃길이 아니었다.
환희가 가시기도 전에, 거리는 혼란의 소리로 가득 찼다.
각자의 깃발이 서로 다른 하늘을 가리켰고,
하나였던 목소리는 방향을 잃고 갈라졌다.

해방의 빛은 국경을 가르지 못했다.
38선이라는 보이지 않는 선이 땅과 사람을 가르며
형제를 나누고, 강과 산을 갈라놓았다.
그 선을 넘어 갈 수 없는 발걸음은
마치 다시 묶인 발목처럼 무겁고 쓰렸다.

그리고 전쟁이 왔다.
산천은 포연에 가려지고, 들판은 총성과 함성에 뒤덮였다.
집은 무너지고, 길은 끊기고,
마을의 이름이 불길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사람들은 다시 일어섰다.
폐허 위에 집을 세우고, 끊어진 다리를 놓았다.
손바닥만 한 논에서 자란 한 줌의 쌀을 나누며,
배고픔 속에서도 서로의 등을 밀었다.

자유란, 되찾는 순간보다
지켜내는 날들이 더 길고 더 힘겹다는 것을
우리는 배웠다.

우리는 이제 전쟁의 굉음도, 굶주림의 한숨도 모른 채 살아간다.
아침이면 전등을 켜고, 밤이면 마음껏 불을 밝힌다.
깃발은 매일 바람에 나부끼지만,
그 깃발이 언제 처음 펄럭였는지를 묻는 이는 드물다.

80년 전, 이름을 부르는 것이 목숨을 건 일이었지만
우리는 이름을 쉽게 잊고,
그 이름들이 만든 역사를 가볍게 흘려보낸다.

광복은 축하하는 기념일로 남았지만,
그 의미를 지키는 날들은 점점 줄어든다.
그러나 역사는 조용히 경고한다.
자유는 지키지 않으면 빼앗긴다고.

80년 전,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깃발을 들었다.
이제 그 깃발은 우리 손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종이 위의 역사로가 아니라,
피와 숨결이 깃든 살아 있는 깃발로 건네주어야 한다.

미래의 아이들이 자유를 당연하게 여기더라도,
그 자유를 지켜낸 날들이 있었음을 잊지 않게 해야 한다.

우리는 약속해야 한다.
다시 어둠이 찾아오더라도,
그 빛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작은 부정에도 침묵하지 않고,
작은 정의에도 기꺼이 손을 내밀겠다고.

80년 전의 빛은 한순간의 외침으로만 지켜지지 않았다.
그것은 매일의 선택, 작은 용기,
그리고 불편을 감수하는 결심 위에 서 있었다.

80년 전, 그날의 빛이 우리에게 왔다면
80년 후, 우리는 그 빛을 다음 세대에게 건네야 한다.
더 선명하고, 더 뜨겁게,
더 오래 타오를 수 있도록.

빛은 돌아왔다.
이제 그 빛을 지키는 날이
우리의 매일이어야 한다.

4 months ago | [Y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