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博川 최정순


꽃 시들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몸은 죽어 가도 향기는 남는 것
눈 감을 때까지 온전한 생명체인 것을.




  博川 최정순

 
눈에 보이는 것
다가 아니듯
입 뛰쳐나간 게
다는 아니지

아름다운 향기 품은
입바른 꽃잎들
거센 바람에 흩어지듯
허공에 뿌려지는 수많은 말

피지 못한 꽃
몽우리 터져 죽은 기억
가지야, 너는 아는가
뿌리야, 너는 그 슬픔 아는가

생각의 가지 마음의 뿌리
인고의 계절 견디며 너희들,
화신花神 만나 순리 배워
말의 꽃을 피워라.



이별
      博川 최정순

 
구름 벗고
살그머니 다가와
향기로운 입맞춤 남긴 당신

먹구름 쌓여
얼굴 감추더니
뇌우雷雨 깊은 상처 주고

구멍 난
내 가슴 깊이
대못 하나 쾅, 박고 떠나가네.




博川 최정순

전시장에서
                博川 최정순


고원古原 유 화백
흘러가는 나그네 눈길

족자 속 수줍게 피어난
한 떨기 민들레꽃
나비 한 마리 날아오른다

고독의 쓸개 먹고
희열의 열매 먹으며
허공 중 표표히 유영하다
침묵하는 찻잔 속
마지막 발목 적신다.

 

첫눈
       博川 최정순


사락사락 덮고 덮는 반가운 손님
포근한 하얀 솜이불 온 누리 덮고 덮어
나무, 지붕, 마당, 빨랫줄 잠재우고
쏟아지는 양광에 소년의 은빛 눈물 되어
하염없이 땅속으로 스며드는데
더럽고 추악한 세상살이 수정처럼 정화되어
삼라만상 오롯이 형형하게 빛나고
살아온 추억들 뇌리로 녹아드는구나.

 

겨울비
         博川 최정순

 
아무 데도 쓰잘 데 없는 너
아무도 반기지 않는 너
외롭고 고독의 눈물 뿌리며
온다, 오누나
떨어진 낙엽 짓뭉개며
마른 가슴속으로 파고들며
온다, 오누나
네 마음 닮은 나
주방 부리나케 달려가
달콤 쌉싸름 청춘차
곰삭은 애통차
갇혀 버린 두메차
독한 망각차 끓여 내놓으니
섬돌 내려앉아
차 한잔씩 하고 가시오. 

4 months ago | [YT] | 3

博川 최정순

중앙탑에서
            博川 최정순


한반도 한가운데 세워진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중원에 홀로 우뚝 서
한반도 치솟는 정기 모아
천하 굽어 살피고 있으니
나그네 잠시 발길 멈춰
인간사 무사무탈하기를
큰 절 올려 간절히 빌고 비니
저 멀리 찬바람 맞는 빨간 능금
알알이 옹골차게 영글어 가고
탄금호 핏빛 석양에
정겨운 우륵 가얏고 한 가락
갈대꽃 살랑살랑 흔들며 지나간다.

 

석상(石像)
                博川 최정순


한반도 막내 제주
금능 석물원
땅 뚫고 나와 멈춘
곰보 용암석 깎아
여기저기 사람
얼굴 수놓았는데
각양각색 수없이
많은 인간 표정
환하고 밝은
얼굴 있는가 하면
일그러지고
어두운 얼굴도 있네
왜,
내 눈길은 자꾸만
어두운 쪽으로만 갈까
아무래도,
알 수 없는 노릇일세.

 

귀부龜趺
     博川 최정순


중원 미륵리 미륵대원彌勒大院 터
거대하게 버티고 있는 한반도 최대
중원中原 미륵리彌勒里 사지寺址 귀부龜趺
비석 받치던 너의 모습
비신碑身 없어져 구멍만 달랑 남았고
석비石碑 세월의 강물에 흔적 없네
그래도 두 마리 새끼 거북
천년 칼바람 굽이치는 파도 견디며
어미 품 올망졸망 남아 있네
강산 옷 아무리 바뀐다 해도
누구도 갈라놓지 못할
거북이 가족.

4 months ago | [YT] | 3

博川 최정순

가을비
            博川 최정순

 
가슴속 응어리진 한 북받쳐
만물 휘젓는 휘모리장단
넓고도 황홀한 풍악산 일만이천봉
층층 비단결 수놓은 만첩홍산萬疊紅山
바람 따라 절승경계絶勝境界 돌고 돌다
하염없이 무심히 내리고

묘향산 칠성골 반석 위
휘감고 휘감기어 몸부림치다
박천 떠난 최씨 가문 소식에
한스러운 피눈물 씻으며
쓸쓸한 청천강 서편으로
서럽게 울고 간다.

 

가을 바람
            博川 최정순
 

가파른 하늘재 넘어
송림松林 사이로
다가서는 한 뭉텅이
감나무 부딪히고 사과나무 얽혀
열매마다 핏빛 멍울 짙게 남기고
단호박 짙게 드리운 주름살 펴며
필사적으로 머물다 간다

회갈색 깊디깊은 구렁이 계곡 따라
인고의 상처 눈물 발 밑 뿌리며
먼저 지나간 인연 허위허위 쫓아와
인적 드문 산등성이 골짜기
이리저리 소요하며 거닐다가
허수아비 혼자 하늘 보고 꺼덕이는
몸서리치게 외로운 텅 빈 들판에도 머물다
콩 줄기 비집어, 비집어 툭툭 건들며
석류알 터져라 사력 다해 불다
겨울로 간다.



가을밤
           博川 최정순


나무 옷 훌훌 벗어
땅 위 포목布木 되어 눕고
서리 입은 꽃잎 남루한 소복만
담장 밑 서성이며 떨고 있는데

돌밭 호박 나체로 뒹구는
벼폭 다리 잘려나간 황금들판
허수아비만 허허로이 서
하얀 비닐봉지에 덮인 짚덩이

북녘서 다가오는 겨울바람 소리
풀벌레 마지막 노래 서글픈데
둘 곳 없는 마음 들녘 헤매면
먹빛 어둠 속 잡념만 무성하네

이슬 끊임없이 가슴에 내려
도둑맞은 잠 뜨개질로 달래며
저 멀리서 나를 향해 손짓하는
죽음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가네.

4 months ago | [YT] | 4

博川 최정순

 

안성 바우덕이 축제에서
                         博川 최정순

 
집안 무고 기후 순풍 풍년 들어
가축 무사 객지 나간 가족 건강
어름산이 빌고 비는 비나리 마치고

높으나 높은 삼줄 생명 걸어
신들린 공처럼 튀어 올라
흔들흔들 휘청휘청 줄꾼
양반네들 야유 허공에 흩뿌리네

신명나는 홍재비 풍치기
오방색 부채꽃으로 피어나는 창공
하늘 땅 사람과 교감하여
하늘 당기고 땅 일으키는 풍물재비
어름산이 배우씨 주고받는 재담
풍자 해학 가을 수놓는데

안성 바우덕이 남사당패
익살맞게 육실허게 잘도 논다.

 

만추(晩秋)에
         박천 최정순


혼재된 적갈 가을빛 받으며
멀고 긴 자드락길 걷고 걸으니
잠자는 잡목들 침묵으로 덮고
구름 떠난 하늘은 시리기만 한데

앙상한 나목들 겸허히 고독 씹고
정령精靈의 고해만 대롱대롱
바람 따라 낙엽 쌓이다 흩어지고
알몸으로 험한 세파와 조우하는데

해 저무는 등허리의 검붉은 바다
성근 별 창백한 그림자 희미하고
반쪽 푹 썩어 문드러진 야윈 반달
허무에 순응하려는지 이별마저 붉다.

 


낙엽(1)
           博川 최정순


개밥풀꽃 핀 듯
적단풍 버릇처럼 취하여
앵도라진 붉은 입술
중심 잃은 몸뚱이 꿈틀대고

낙하하며
세상을 씹어대며
넘어지고 자빠져
시체처럼 포개지고

치기 어린 항거도
거두지 못할 흑빛 무덤도
부질없는 인사만 겹겹이 쌓여져
죽음의 그림자에 쫓겨
절망 아래 널브러진다.

 

낙엽(2)
        博川 최정순


여명 고개 드는 새벽
안개 덮인 계단 내려서니

소복소복 낙엽 진영
모두 날개 잃고 누웠네

밤새 먹빛 여의도록
달도 별도 울고

황금기 찬란한 전설
서릿발 아래 차갑기만 한데

사납게 흘러가는 세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어디론가 흩어진다.

 

4 months ago | [YT] | 3

博川 최정순

천수만에서
              博川 최정순


운명이 된
쓰린 가슴 삭이며
안면도 영목항 떠나
효자도 지나는 뱃길
맥주 거품 하얀 길
꼬리 무는 선미파 뒤로
괭이갈매기 시김새하며 선회하고
수면은 고기비늘처럼 반짝인다

거센 물살 몸 가누면서
이마 맞대고 속살거리는 조각섬들
옹기종기 동양화처럼 떠 있는데
거센 바람 외씨버선발로 뛰어가며
한 음 한 음 키운 처절한 한恨 소리
이 섬 저 섬 휘돌다 허망하게 부서진다

아득한 옛날의 지순한 사랑
가뭇없이 묻혀 가는 슬픈 전설
파도길 타고 슬그머니 흘러들어
팔작지붕 처마 끝 올라앉은 바다제비
목 놓아 소리하는 부침새 꺾음새는
미학의 절제 없이 제멋대로 출렁인다.

 

간월암에서
                博川 최정순


넓게 팔 벌려 얼싸안은 모감주나무
섬 속 섬에서 달 보다 도 얻은 무학대사 도량처
물때 따라 열고 닫는 속세 이음길
갈매기 우웽우웽 소리치며 나그네 인도하니
소원 한 자락 소원 탑에 올리고
채움 비움 답 찾아 해탈문 올랐는데
몇백 년 풍상 견디며 살아온 사철나무
홀로 파란색 옷 입고 외로운 나그네 반기니
마음의 채움과 비움 바로 거기 있었네
경내 들어서 좁쌀만큼 비우고 좁쌀만큼 채우니
중생들 수복修福 기원하는 스님의 독경 소리
중생들 번뇌 씻어 줄 스님의 독경 소리
갈매기 날개 실어 멀리멀리 날아가고
간월암 황금빛 낙조 길게 누우면
나그네 하많은 응어리 풀어헤치고
얼굴 붉게 물들이며 활활 타고 있다.

4 months ago | [YT] | 4

博川 최정순

농촌풍경
              博川 최정순


자식 키워 대처 내보내
둘 남은 산촌 노인네
척박한 손바닥 논
써레질하는 할아버지
못밥 나르는 할머니
염천 달래려
얼음 둥둥 띄워 마시는
막걸리 탁배기잔에
어리는 자식들
밤 오면 평상 누워
눈길 뜨락 돌리면
은빛 달 먹고
지천으로 피어나는 달개비꽃
개구리 개골개골
쓸쓸함만 더 하네.

 

위도의 꽃
           博川 최정순


해무에 온몸 포박당한 격포항
잠시 갈 길 잃고 서성이다
핵 폐기물에 몸살 앓았다던
궁금하고 궁금하여 찾은 위도
허균의 이상세계 율도국
고슴도치 닮았다 위도蝟島라네
가파른 망월봉 비척비척 오르니
넓디넓은 해변 그림처럼 누워 있고
험준한 봉우리 내려가다 보니
자장율사 창건한 내원궁 내원암
나를 잠시 쉬어 가라 하네
암자 대청마루 앉아 눈길 멀리 던지니
망망한 푸른 물결 보며 퍼렇게 울다 지쳐
길마다 산등허리마다 꽃 피운 상사화
하얀 미소로 육지 향해 하늘거리며
포구 버리고 떠난 사람들에
그리움 가득 안고 하얀 손짓하네.

 

청산도에서
              博川 최정순


완도 저 멀리 남쪽
몇 마리 새끼 거느린
산 푸르고 물 푸르러 청산도靑山島
그러나 바닷길 요충지라 전란도 많았지
불쑥 솟은 매봉산 허위허위 올라 굽어보면
산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 진저리 치며
뱀처럼 구불거리며 좁다란 평야로 스며들다
아득히 펼쳐진 넓디넓은 바다에 발 적시네
고샅 고불고불 둘레길 어깨 마주하고 늘어서
산 찾아 물 찾아온 나그네 발길 끊임없이 이어지고
바람결 고개 끄덕이는 청보리 파도 속
파랗게 일어나 서글프게 일렁이는 그리움 하나
느리게 느리게 님의 초분草墳 넘어간다.

4 months ago | [YT] | 3

博川 최정순

칠장사에서
             博川 최정순

 
발길 천 근 나그네
잠시 쉬어 가는 칠장사
경내 둘러보니

험상궂은 사천왕상
눈 부릅떠 노려보는데
풍상에 상처받은 무명석탑 주위로
들꽃 활짝 펴 위로하는데

허허, 탱화에 궁예와 임꺽정이
뜬금없이 웬 말이련가
서글픈 전설 안은 칠장사 단청
빛바래 지쳐 있네

명당이 도대체 무엇이관데
세도가들 불 질러 뺏고 뺏겨
철당간 깃발 주인 바뀔 때마다
칠장사 동종 탄식하였다지

나그네 발길 옮기며
무심코 흘러나오는 소리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이제와 다를 게 무엇이더뇨.

 

부처님 오신 날에
                    博川 최정순
 

님께서 연꽃 즈려밟고 오신 날
각양각색 연꽃등 대롱대롱 불 밝혀
홍진에 물든 중생 마음 밝히니
삼라만상 모두 허공 보고 웃는데

무릎 관절 앓는 노모
거북처럼 어기적거려 내,
근처 나뭇가지 주워 지팡이 삼게 하니
노모 미소 꽃비처럼 퍼지고

종두 스님의 명종 108번 울어
자비 깨우쳐 연기緣起 알리니
노모 독실한 불자 아니어도
오늘만큼은 탐욕그릇 저 멀리 던지네.

 
 

스승의 날 근처에서
                      博川 최정순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고 했던가 하필 스승의 날 다음 날 TV에 이런 프로가 방영되다니 구제불능의 학생을 어쩔 수가 없어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 착하고 순진한 어느 여교사가 언성을 높이며 회초리를 들었다고 악동 친구 학생이 스마트폰인가 뭔가로 녹음하고 촬영하여 당한 학생에게 건네서 학부형이 득달같이 찾아와 폭언 폭력을 과시하고 경찰에 고소하고 그야말로 난장판을 쳤던 게 아니던가. 사회의 잘못인가 학생의 잘못인가 선생의 잘못인가 스승의 날 근처의 마음만 쓸쓸하네. 창밖에는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봄비만 하염없이 내리고.

 

4 months ago | [YT] | 3

博川 최정순

헤이리의 봄
              博川 최정순


명지바람 나풀나풀 춤사위
새초롬히 버들가지 애무하는데
감자 고구마 어린 손 슬그머니 벌리네

미소로 정다웁게 재롱떠는 꽃길
봄 햇살 자박자박 까치걸음
순진무구한 아기처럼 날아들고

쇼윈도 책 찢어 마구 던진 모습에
창작의 무늬 쑥쑥 발돋움질
작가의 고뇌 반추하며 흩어져 있네

헤이리 봄의 향연
여기저기 꿈틀꿈틀 속살거리며
생명의 꽃 피우고 있더라.

4 months ago (edited) | [YT] | 3

博川 최정순

봄(1)
    博川 최정순
 

저 멀리서 여명 기웃거리는
청갈치빛 유리창 활짝 여니

깊고 깊은 대지 자궁 속
겨우내 숨었던 양기 기지개 켜자
온몸으로 봄 부르며 다가온 밤비
옷자락 길게 끌고 간 자리엔
나뭇가지마다 생명 아롱아롱
비둘기 빗물에 세수하며
웃구구구구 노래하는데

황홀하게 활짝 웃는 햇살
개나리 진달래 살포시 내려앉고
깊은 계곡 얼음장 녹이며
저 먼 언덕에서
봄 개화開花하여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봄(2)
    博川 최정순


머리 헤치고 달려오다
바람 쉬어 가는 보갑골
하늘 눈물 뚝뚝 흘려
실개천 보태는,

호드기 불던 선돌
이남박 인 언년
남몰래 눈 얽혀
가슴 터지는,

백년해로 부뚜질 마주하며
씨앗 뿌려 울고 웃던
그림자 품은 언덕에
산벚꽃 흐드러지는,

온 산야 얼음 털고
알몸 드러내 네 활개 활짝 펴고
양광 악수하며 기지개 펴는,
그네들의 봄. 봄. 봄.


봄꽃
  博川 최정순

어린 별 종종종 내려와
눈물방울 흩뿌려지는 밤
닫혔던 꽃잎 살며시 열며
여명의 길 숨가쁘게 달려온
눈부신 햇살 가득 먹고
전신 불태우며 가냘픈 날갯짓
붉은 얼굴 가득 미소 물들이고
독보다 더 짙은 향기 품어
섬세한 미소로 아침 인사하며
활짝 웃는 너의 꽃다운 모습
호수 같은 그리움 밀어 올려
온몸으로 벌 나비 유혹하여
자연을 재창조하는 너는,
신의 축복 어린 선물이구나.

4 months ago | [YT] | 3

博川 최정순

막내동생 결혼식
                     博川 최정순


손잡은 오빠 손에
저승 아버지 내려와 인도하니
시월의 꽃으로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탐스럽고 예쁜 수련

깨끗 청순한 마음으로
피어나라 나의 축복 기도 속
금강보다 더 굳게 맺은 백년가약
축하객 천둥 우뢰 박수 소리
신랑 신부 반기는데

아버지 가신 빈자리
어머니 이슬로 채운다.

4 months ago | [Y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