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博川 최정순
꽃 시들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몸은 죽어 가도 향기는 남는 것
눈 감을 때까지 온전한 생명체인 것을.
말
博川 최정순
눈에 보이는 것
다가 아니듯
입 뛰쳐나간 게
다는 아니지
아름다운 향기 품은
입바른 꽃잎들
거센 바람에 흩어지듯
허공에 뿌려지는 수많은 말
피지 못한 꽃
몽우리 터져 죽은 기억
가지야, 너는 아는가
뿌리야, 너는 그 슬픔 아는가
생각의 가지 마음의 뿌리
인고의 계절 견디며 너희들,
화신花神 만나 순리 배워
말의 꽃을 피워라.
이별
博川 최정순
구름 벗고
살그머니 다가와
향기로운 입맞춤 남긴 당신
먹구름 쌓여
얼굴 감추더니
뇌우雷雨 깊은 상처 주고
구멍 난
내 가슴 깊이
대못 하나 쾅, 박고 떠나가네.
博川 최정순
등에 부침
장석주
1
누이여, 오늘은 왼종일 바람이 불고
사람이 그리운 나는 짐승처럼 사납게 울고 싶었다.
벌써 빈 마당엔 낙엽이 쌓이고
빗발들은 가랑잎 위를 건너뛰어 다니고
나는 머리칼이 젖은 채
밤 늦게까지 편지를 썼다.
자정 지나 빗발은 흰 눈송이로 변하여
나방이처럼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유리창에 와 흰 이마를 부딪치곤 했다.
나는 편지를 마저 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엎드려 혼자 울었다.
2
눈물 글썽이는 누이여
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
저 고운 불의 모세관 일제히 터져
차고 매끄러운 유리의 내벽에
밝고 선명하게 번져나가는 선혈의 빛.
바람 비껴불 때마다
흔들리던 숲도 눈보라 속에 지워져 가고,
조용히 등의 심지를 돋우면
밤의 깊은 어둠 한 곳을 하얗게 밝히며
홀로 근심없이 타오르는 신뢰의 하얀 불꽃.
등이 하나의 우주를 밝히고 있을 때
어둠은 또 하나의 우주를 덮고 있다.
슬퍼 말아라, 나의 누이여
많은 소유는 근심을 더하고
늘 배부른 자는 남의 아픔을 모르는 법,
어디 있는가, 가난한 나의 누이여
등은 헐벗고 굶주린 자의 자유
등 밑에서 신뢰는 따뜻하고 마음은 넉넉한 법,
돌아와 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
숨은 꽃
장석주
1
너... 숨은
꽃이 아름답다
겨울 잠에서 깨어난 뱀들이 또아리를 틀고
짓누르는 땅거죽 헤집고 돋는 초록의 들판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냥 태연히 떠나갈 수는 없다
핏방울 떨어지듯 앙징맞게 맺힌 꽃망울이여
숨어서 앙칼지게 쏘아보는 꽃이여
2
징그러워라, 상처 아문 뒤 철죽보다 더 짙은 붉음으로
타는 이 삶이 괴로움은 죄보다 더 가시같다
세상에 태어나 이 괴롬보다 더 큰 괴롬은 없었다
널 향한 미친 피의 참을 길 없는 줄달음질에
난 서릿발 풀린 흙덩이마냥 부서지고 싶었다
그러나, 보라... 삶은 징그럽고도 다정한 것,
가량비 흐릿한 저 들녘에 하염없는 꽃상여 행렬을...
우린 더욱 살아봐야 하리, 삶은 포기할 수 없는 것
살아서 타는 괴롬으로 더욱 생생히 빛나야 하리
메이비
장영수
(천막교실, 가마니 위에 비는
내리고)
우리는 고무신으로 찝차를
만들었다. 미군 찝차가
달려왔다 네가
내리고.
미군들이 쑤왈거리다가 메이비,
하고 떠나고, 그리하여 너는
메이비가 되었다.
미제 껌을 씹는 메이비. 종아리 맞는
메이비.
흑판에 밀감을 냅다 던지는
메이비. 으깨진 조각을 주으려고
아이들은 밀려 닥치고.
그 뒤에, 허리에 손을 얹고 섰는
미군 같은 메이비.
남자보다 뚝심 센 여자애보다
뚝심 센 메이비. 여자애를 발길로
걷어 차는 메이비.
지금은 비가 내리고.
어느 틈엔지 미군들을 따라
떠나 버린 메이비.
바다 건너 가 소식도 모를
제 이름도 모를 메이비. 어차피
어른이 되어서는 모두가 고아였다.
메이비. 다시는 너를
메이비라고 브르지 않을 메이비.
그 여자
장영수
그 여자. 중년의 갈잎처럼
타버린 살결에. 흐트러진 축축한
머리칼.
소년원에 잡혀간 아들과.
아는 집 아이를 보아주는
딸과. 거쳐도 없이, 세 식구가
헤매이는 서울의 새벽은 안개와
연기에 휘감기었다.
그 여자. 겨울이면 식모를
살고. 더운 한철은 채소를
팔고. 노점단속에 걸리면
닷새를 살고.
어느날. 소년원을 도망친 아들은
찾아와, 돈 오백원을 졸랐다.
어머니가 가진 돈 천이백원은 내일
채소를 살 돈이었건만. 아들은
그날 밤, 그 돈을 훔쳐
달아났다.
그 여자. 나는 그날 이후. 길을
걷다가. 뻐스를 탔다가. 또는
저 남쪽 어느 부두에 이르렀다가.
수없는 그 여자를 보았다. 세상은
첩첩, 안개와 연기에 덮여.
아무도 깨뜨리지 못한다, 안개와
연기.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 세상은, 불현뜻 돌아선다.
맹인 부부 가수
정호승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쎄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 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 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 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 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 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 사람이 되었네
슬픔은 누구인가
정호승
슬픔을 만나러
쥐똥나무 숲으로 가자.
우리들 생의 슬픔이 당연하다는
이 분단된 가을을 버리기 위하여
우리들은 서로 가까이
개벼룩풀에 몸을 비비며
흐느끼는 쥐똥나무 숲으로 가자.
황토물을 바라보며 무릎을 세우고
총탄 뚫린 가슴 사이로 엿보인 풀잎을 헤치고
낙엽과 송충이가 함께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을 형제여
무릎으로 걸어가는 우리들의 생
슬픔에 몸을 섞으러 가자.
무덤의 흔적이 있었던 자리에 숨어 엎드려
슬픔의 속치마를 찢어내리고
동란에 나뒹굴던 뼈다귀의 이름
우리들의 이름을 지우러 가자.
가을비 오는 날
쓰러지는 군중들을 바라보면
슬픔 속에는 분노가
분노 속에는 용기가 보이지 않으나
이 분단된 가을의 불행을 위하여
가자 가자
개벼룩풀에 온몸을 비비며
슬픔이 비로소 인간의 얼굴을 가지는
쥐똥나무 숲으로 가자.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조정권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혼자이오나 혼자가 아니옵니다.
혼자이오나 여전히 혼자가 아니옵니다.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이 마음 오랫동안 혼자 향하고 있었아오나 향하지 아니하였읍니다.
이 마음 오랫동안 혼자 물굽이 일었아오나 응결하지 아니하였읍니다.
어느 고적한 밤의 어깨에 기대어 그 침묵의 물굽이를 향하고 있었아오나 향하지
아니하였읍니다.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내 스스로 이룬 근심이니 내 스스로 순종하라고 그분은 타이르십니다.
내 스스로 향한 불길이니 내 스스로 순종하라고 그분은 타이르십니다.
정결하게, 그리고 공손하게, 내 스스로 순종하라고 그분은 타이르십니다.
혼자이오나 이 마음 아직 혼자에 이르지 못했읍니다
혼자이오나 이 마음 아직 혼자 이루지 못했읍니다
혼자이오나 이 마음 아직 혼자 향하지 아니하였읍니다
혼자이오나 이 마음 아직 혼자 응결하지 못했읍니다
혼자이오나 이 마음 혼자로서 그득하지 못했읍니다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이 마음 비어 있으나 가득히 차 넘치옵니다
이 마음 비어 있으나 가득히 넘치고 있아옵니다.
이 마음 비어 있으나 가득히 비어서 넘치옵니다.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오늘은 그분이 지긋한 마음으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읍니다.
오늘은 그분이 힘겨운 짐을 내려놓고 앉아 계시는 모습을 뵈었읍니다.
오늘은 그분이 하늘에 기대어서
육신도 짐도 다 벗어놓은 채 가슴만으로 앉아 계시는 모습을 뵈었읍니다.
77년 가을
조정권
이삿짐을 꾸리다가 장롱 뒷벽 먼지 구덩이에서 찾아낸
결혼 사진첩을 아내는 애지중지 책더미와 함께 싸기 시작한다.
육개월에 한 번씩 소동을 벌일 때마다 들쑤셔지는 세간살이 속에서도
책과 사진첩은 의례 따라 가야 되는 것이라고 아내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과는 일체 상관할 바 없이
안심하고 허리에 매달려 따라오는 어린 것들과 같이
그러나 나는 반대다.
우리가 미련을 가지고 끌고 다니던 것
한사코 소중하게 모셔 놓았던 것들 가운데도
버려야 할 것은 너무 많고
이제부터는 그런 것들과는 무관하게 지내야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런 것들과는 무관하게 또다시 긴 겨울을 나야 하는 것이다.
당신이 애지중지 정돈하려 하는 책과 기념사진첩
그 속에 있는 우리들의 과거는 지나치게 정돈되어 있고
정이 되어 있는 과거가 우리들의 생활에서 장식이 되는
그런 이로움은 이제부터는 막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런 것들과 무관하게 한 겨울을 나야 하는 것이다.
살아보면 살아 볼수록 더 좁디 좁은 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는 사람에게는
이삿짐이란 가벼워야 하고 간편해야 하지 않겠는가.
삼십세
최승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즐거운 일기
최승자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오늘도 여의도 강변에선 날개들이 풍선돋힌 듯 팔렸고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의
밤하늘에선 달님이 별님들을 둘러앉히고 맥주 한 잔씩 돌리며 봉봉 크랙카를
깨물고 잠든 기린이의 망막에선 노란 튤맆 꽃들이 까르르거리고 기린이 엄마의
꿈속에서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피곤한 기린이 아빠의
겨드랑이에선 지금 남 몰래 일 센티 미터의 날개가 돋고...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 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
많이 사랑해 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놀아났읍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대설주의보
최승호
눈 덮인 채
해일처럼 굽이치던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 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풍매화
하종오
떠돈들 어떠리 떨어진들 어떠리
언제든지 떨어지면 움 돋겠지
진달래가 골백송이 흐득흐득 울어도
풍매화는 바람 따라 날아다닌다.
골짝에 죽어 있는 메아리를 살려내고
벌목꾼이 버리고 간 도끼소리 찾아내고
땅꾼이 잃어버린 휘파람도 찾아내어
그 덧없는 소리들 데불고 무얼 하는지
풍매화는 이곳저곳 기웃거린다.
혼자서 싹틀 힘도 없으면서
어디든지 뿌리내리면 숲이 이뤄지겠지
풍매화는 득의양양 산맥을 날아다니지만
대포알 묻힌 땅 버릴 수 없고
녹슨 철조망 무사히 바라볼 수만 없어
머뭇거리니 마침내 바람도 잠잠해진다.
이제는 묻혀야지, 몸 바쳐야 할 자리는 여기.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하종오
우리야 우리끼리 하는 말로
태어나면서도 넓디넓은
평야 이루기 위해 태어났제
아무데서나 푸릇푸릇 하늘로 잎 돋아내고
아무데서나 버려져도 흙에 뿌리박았는기라
먼 곳으로 흐르던 물줄기도 찾아보고
날뛰던 송장메뚜기 잠재우기도 하고
농부들이 흘린 땀을 거름삼기도 하면서
우리야 살기는 함께 살았제
오뉴월 하루볕이 무섭게 익어서
처음으로 서로 안고 부끄러워 고개 숙였는기라
우리야 우리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총알받이 땅 지뢰밭에 알알이 씨앗으로 묻혔다가
터지면 흩어져 이쪽 저쪽 움돋아
우리나라 평야 이루며 살고 싶었제
우리야 참말로 참말로 참말로
갈라설 수 없어 이 땅에서 흔들리고 있는기라
바다 일부
홍영철
1
내 사랑은 우리집 책상 속에 잠들어 있어요. 고운 노래를 들으면 그것은 하늘
위로 날아갔다 돌아오곤 해요. 꿈꾸는 바다가 보여요. 깨울 수 없는 그
바닷가에는 고기떼들만 하얗게 죽어 있어요.
2
새들의 지붕 위로 푸른빛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어요. 발가락을
간지르던 새앙쥐도 떠나가고 나는 심심히 오래된 그림책을 펼쳐요. 잠든 때에도
오렌지빛 바다는 얘기해요. 흩날리는 거리에서 돌아오면 피곤한 손을 닦아
주기도 해요.
3
나는 모른다고 했어요. 책상 위 제라늄이 왜 자꾸 시드는지를. 내 낡은 머리칼
위에는 왜 늘 겨을 바람이 펄럭이는지를. 이따금 열린 창틈으로 새틀구름이
지나가고 지금 내 귀에는 어둠 소리만 가득해요. 떨어져 쌓이는 쓸쓸한 바닷가도
보여드릴께요.
작아지는 너에게
홍영철
말이 달려오다.
연갈색 갈기 뒤에는
알몸인 너의 그대가 숨어 있다.
바람이 분다.
어디에도 불빛은 보이지 않는다.
냇물은 어디로도 흐르지 않는다.
뒷산이 가라앉는다.
너는 흰꽃을 꺾는다.
못에 찔린 발가락이 너는 몹시 아프구나.
가라, 절룩거리며.
달려오는 너의 그대와
너의 그대의 말에게로 가서
그 꽃묶음을 건네주려므나.
너의 그대와 너의 그대의 말은
꽃향기에 취해
더욱 거센 숨소리로 달려가리니.
쥐들이 너의 다친 발가락을 물어뜯는구나.
너는 모르느냐.
동해에는 폭풍 경보가 내려졌다.
고기떼들이 다 땅 위로 올라와
너와 네 이웃의 집뜰을 범하고
거친 비린내를 세우고 있다.
너는 또 부서진 기타를 치는구나.
그러나 그런 시시한 노래 소리로는
돌멩이들의 달콤한 새벽잠만 깨워 놓을 뿐
한 마리 개똥벌레의 날음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드디어 흰 꽃묶음을 건네주었구나.
잘했따.
너의 발가락은 이제 다 나았다.
너의 그대의 등허리는 너무나 눈부시다.
잊어버리자.
일전의 일들은 슬로우 비데오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너는 잠시만 울어야겠따.
너의 그대와
너의 그대의 말은
가라앉은 산으로 가서
함께 가라 앉았다.
아침이 올 것이다.
나뭇가지 너머가 훤하지 않느냐.
그런데 너는
왜 자꾸 작아지느냐.
왜 자꾸만 작아지느냐.
섬에 누워
홍희표
섬이 날 가두고
회오리 바람으로 날 가두고
원산도 앞에는 삽시도
삽시도 앞에는 녹도.
파도가 날 가두고
피몽둥잇 바람으로 날 가두고
프랑크톤 위에는 조각달
조각달 위에는 왕보리나무.
젖은 예수님 걸어오고
다리꺾인 게 걸어오고
오, 열 두 입이 목메인 섬
오, 하늘로 흘려보낸 섬.
2 days ago | [YT]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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博川 최정순
詩
- 안찬수 -
그대가 쓰는 시는
밥이 아니다
반찬이 아니다
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쓰는 시는
숟가락인가
밥을 먹기 위한
숟가락인가
그대가 쓰는 시는
젓가락인가
반찬을 집어먹기 위한
젓가락인가
그대가 쓰는 시는
그릇인가
물을 마시기 위한
그릇인가
아니면
그대가 쓰는 시는
의자인가
군림하기 위한 의자인가
아니면
그대가 쓰는 시는
담배인가
피우다가 버린 담배인가
아니면
그대가 쓰는 시는
휴지인가
섬세한 항문을 닦는
휴지인가
아니면 그대가 쓰는 시는
꽃인가
무덤 위에 피는 꽃인가
아니면 그대가 쓰는 시는
가을바람인가
꽃잎 떨구는 가을바람인가
아니면
그대가 쓰는 시는
총알인가
온몸으로 날아가 박힌 총알인가
분노인가
열정인가
꿈인가
도화선인가
깃발인가
혁명인가
혁명보다 깊은 사랑인가
아, 무엇인가
내가 쓰는 시는
내가 쓰는 시는
시
- 최하림 -
눈이 지천으로 오는 밤에 시를 써야지
머리를 눈에 박고 써야지
눈 속을 걸어가는 사내 몇
불을 찾는 사내 몇
겨울까마귀 몇
죽은 자들도 그런 밤엔 불을 찾아
몇날이고 몇밤이고 언덕을 넘겠지 그들의 목소리
벌판을 헤매겠지. 그들의 불을 찾으러? 꿈꾸는 불? 그 불 속에
밤차가 달리고 겨울까마귀들이 공중을 떠돌겠지
--겨울까마귀가 중부 지방엔 없어요, 여보.
중부지방이 아니야, 내가 말하는 건...
나는 그 살도 뼈다귀도 안다 바람이 그들 소리로
하늘을 울리는 걸 안다 당신도 그 소리를 알았으면 좋겠어
아이들도 이웃도 그 나라의 바다쪽으로
검은 머리를 빗겨내리며
붉은 불빛 속에서 마음을 드러내고
어머님이 나를 보시듯, 그래 어머님이...
오오 떠오르는 어머님이여
그날 저녁도 우리는 어둔 거리를 헤맸읍니다.
세종로 우체국 옆 담뱃가게에서 솔을 한갑 사고, 거스름돈을 받고, 어느
술집으로 들어갈까 망설이면서 거리 끝까지 걸어갔댔읍니다.
詩는
- 조병화 -
시는 공기처럼 우주 어디에나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걸 볼 수 있는 시인에게만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보고 감지할 수 있는 감성이 있고
그걸 처리할 수 있는 지성이 있고
그걸 말로 잡을 수 있는 재능이 있고
언어로 단단히 묶어 둘 지혜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어로 단단히 묶어 둔 그 시를
아름답게 닦고, 다듬어서
고독한 영혼들에게 뿌려 주는 것이다
사막의 이슬처럼.
별처럼.
시는 술이다
- 정공채 -
시를 읽는 동안에
나직이 따뤄지는
흰빛
술의 잔의 가득함.
시를 읽고 있는 동안에
오고 있는
따사로운 불빛의 가득한 점등.
시를 읽고 있는 동안
가버렸던
마차의 삐걱대는 바퀴가
싣고 오는 가을.
시끄럽지 않은
밤의
저 푸른 별의 얼굴.
잊어버린
도시의 밤하늘!
이 모두가 시를 읽고 있는 동안에
조용히 혼자의 술.
희디흰 혼자의 술.
시냇가
- 박귀례 -
언제부터인가
내 숲 속의 시냇가는
하늘 사닥다리가 보이는
기도의 밀실
무릎 꿇고.
남 몰래 앓던 피부병 알몸
철벙 담겄다.산 너머--
어디서 내려오는
붉은 보랏빛 일몰인가.
티눈 같이 솟구던
비늘꽃 간데 없고
윤기 자르르
피어나는 속살 배냇짓하여라.
시대병 환자(時代炳患者)
- 박세영(朴世永) -
솔개미가 빙빙 단엽기(單葉機)*같이 날른다.
소란한 도시는 떠는 듯 무장을 하였다.
청년단원들이 나팔을 불고 지나 가고
트럭이 쉴 새 없이 도심지대를 향하여 달리고 있다.
납작한 보루같이 그 병원의 집 위론 고사포(高射砲) 둘이 솟았다.
금방에 나르던 솔개미가 사라지니
연기가 무럭무럭 콩크리트의 굴둑은 길기도 하다.
내 눈이 미쳤나 보면 볼수록 늘어가는 고사포,
공장마다 솟는 굴둑,
이리하여 도시는 완연히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독까스를 마신 질식한 사나이,
시대병 환자다.
그러나 나를 환자라고 보는 이가 없다.
보아주는 이조차 없다.
* 단엽기 : 몸체 양편에 한 개 씩의 날개가 달려 있는 비행기.
시를 생각하며
- 조태일 -
도무지 시를 생각할 수 없도록
바삐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눈을 감고 두근거리는 가슴 열어
이렇게 중얼거려본다.
도대체 시가 무엇이길래
남들이 그렇게 소중히 하는
가정까지를 버리는가.
도대체 시가 무엇이길래
질서를 버리는가.
도무지 시를 사랑할 힘마저 빠져
지쳐 늘어지고 싶은 날엔
살을 꼬집어 아파아파하며
이렇게 중얼거려본다.
도대체 시가 무엇이길래
육신과 영혼을 이끌고 지옥까지 들어가는가.
도대체 시가 무엇이길래
나라 앞에서 초개처럼
하나뿐인 목숨까지 열어놓고 바치는가.
시를 안 쓰고는 못 배길 그런 날은
오랫동안 버렸던 펜을 들기 전에
이렇게 중얼거려본다.
도대체 시가 무엇이길래
목숨 걸고 자기를 주장하는가
속으로 차오르는 말을 풀어놓는가
시보다 더 자유로운 세계를 찾아서
나는 시를 썼던가. 쓸 것인가.
시인
- 김광섭 -
꽃은 피는 대로 보고
사랑은 주신 대로 부르다가
세상에 가득한 물건조차
한 아름팍 안아 보지 못해서
전신을 다 담아도
한 편에 二천원 아니면 三천원
가치와 값이 다르건만
더 손을 내밀지 못하는 천직
늙어서까지 아껴서
어릿궂은 눈물의 사랑을 노래하는
젊음에서 늙음까지 장거리의 고독
컬컬하면 술 한잔 더 마시고
터덜터덜 가는 사람
신이 안 나면 보는 척도 안 하다가
쌀알만한 빛이라도 영원처럼 품고
나무와 같이 서면 나무가 되고
돌과 같이 앉으면 돌이 되고
흐르는 냇물에 흘러서
자죽은 있는데
타는 노을에 가고 없다
시인(詩人)
- 김동리 -
온갖 것 생각하고 느낌에 겨운 이
시인 아닌 사람 있을까
죽음에 눈물 짓고
삶을 다시 가다듬는, 그리고
아아 부드러운 눈길 스칠 때
사랑을 노래하지 않는 이 있을까
파초잎을 두들기는 한밤의 빗소리
사랑은 멀리 두고 저녁녘의 함박눈
이를 모두 그 누가 시 아니라 하느뇨
말을 꼬부려 얽어 내는 마음의 무늬
이는 더욱 다듬어진 시
그러나 이 보다 우주(宇宙)를 고아 내는
그러한 참된 시는 흔치 않으리
시인과 농부
- 조석구 -
비인칭 주어로
살고 있는 그리움
불규칙 동사로 저무는 하루
그대 슬픔이 누워 있는 언덕에
잡초로 꺾인 서러운 꿈이
들꽃으로 서 있다
향기도 없이 쓸쓸하게
바람에 기대어
들빛을 꺾어
들바람을 꺾어주던 그대의 손엔
물꼬를 보고 오는
저문 삽이 들려 있구나
아, 나는 들꽃을 안고 울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울었다
누군가 가지고 놀다버린
이 시대의 상황이 노을에 젖고
가난이 강물로 흐르는
황토흙 길 끝 그대 집에
해바라기 노오랗게 피고
은빛 램프 켜지는 날
나는 다시 한번 울고 싶다
시인들
- 오규원 -
자원 전쟁 시대 유류 전쟁 시대 그러나 걱정 마라, 우회 전쟁 시대, 이 글은 패배 전쟁 시대의 이 얘기가 아니니 오해 마라. 시는 언제나 패배이니 승리는 오해 마라. 시인의 나라는 높은 산골짜기에 있다.
시인의 나라는 잎이 바싹거려도 살이 바싹바싹 부서지는 골짜기에 있다. 골짜기에는 실속 없는 장난 애매모호한 대화 무능한 노랫소리가 구름이 되어 산허리를 졸라맨다. 그때마다 산의 키가 항상 구체적으로 자란다.
산속 골짜기에는 李箱이 병신들과 함께 누워 히히닥거린다. 늙은 여자 사이에서 릴케가, 동성 연애가 랭보가 낄낄낄 웃으며 보고 있다. 도망가는 여자 앞에 꽃을 뿌리는 병신 素月을 보며 萬海가 이별을 찬미하는(이별이 아름답다는 것은 흉한 거짓말이다!) 염불을 외운다.
시는 추상的이니 구상的은 오해 마라. 시인은 병신이니 안 병신은 오해 마라. 지금 한국은 산문이다. 정치도 산문 사회도 산문 시인도 산문이다. 산문적이기 위한 전쟁 시대, 시인들이 전쟁터로 끌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끌려가지 못하는 병신들만 남아 제복도 없이 아, 시를 쓴다.
시인에게
- 강창민 -
그대가 잠들어 쓰는 시
떨리는 신경을 몰래 늘이어
어제는 어떤 꿈을 서럽게 짰는가
가난한 만큼 확실한 꿈을 꾸라, 그대여
꾸어도 빼앗기지 않고
빼앗겨도 더욱 넉넉해지는
그것이 무엇인가 말하라
가위에 눌려
그대가 소리쳐 부르던 이름은
눈 뜨면 늘
노란 나비처럼 사라지고 말았지.
다시 잠들려 애쓰는 그대여
뜰에 나가 겨울 비를 맞으며,
통금에 잠긴 어둔 골목을 보고 섰으면
누가 보고 싶은지 말하라.
그대가 잠깨어 쓰는 시
무서워무서워 고쳐 썼다가
다시 적고 만 그 노래
그것을 불러라, 바보야
시인 학교
- 김종삼 -
오늘 강사진
음악 부문
모리스 라벨
미술 부문
폴 세잔느
시 부문
에즈라 파운드
모두
결강
김관식,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소리지름. 지참한 막걸리를 먹음.
교실내에 쌓인 두터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김소월
김수영 휴학계
전봉래
김종삼 한 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눔. 브란덴브르그 협주곡
제5번을 기다리고 있음.
교사.
아름다운 레바논 골 기에 있음.
시월의 기도문
- 정일근 -
시월에는 무신이게 하소서
천고마비보다 시고시인비이게 하소서
서정성으로 둔갑하는 누이의 가을 사랑 속에서도
번번이 결별의 비수는 빛나고
안경을 벗은 안맹의 여린 내 시선으로도
반도를 움켜쥐는 바람의 손길이며
한반도의 툭툭 불거진 슬픔의 힘살들이 환히 보입니다
하여 시월 속으로 떠나간 사람들의 길을 따라
이제는 당당하게 걸어가게 하소서
시월에는 유신이게 하지 마소서
가을이 주는 넉넉한 풍요로움으로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즐거이 일하고 놀이합니다
하누님 당신은 늘 그대로 하늘에서 쉬시고
시월에는 무신이게 하소서
그리하여 시월의 공산 같은 달밤이 오면
아이들, 낙엽, 대통령, 바보, 눈물, 풀꽃 모두 모여
고운 시를 읽게 하소서
높은 더욱 낭낭히 높은 목소리로 시를 읽게 하소서
식
- 최문수 -
이제 나는
허리를 더 구부리며 살아야 한다고,
하루를 발갛게 물들인
서쪽의 황혼이 두 눈알을 찌를 땐
더 더욱 팔근육에 힘을 당겨야 할 꺼라고
셋이레 지난 내 씨알 연호가 운다
소젖먹고 자라는 녀석의 눈동자에서
이슬젖은 풀잎들의 발성을 들으며
나는 비로소 아늑해야 할 땅이 되었음을 안다
군용담요 위, 비취타올을 들판 삼아
한 웅큼씩 싸고 누워있는 녀석의
싱싱한 풀밭을 볼 때마다
나는
시가 한 그릇 일용할 양식이었으면 좋겠다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
신록
- 서정주(徐廷柱) -
어이 할꺼나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남 몰래 혼자서 사랑을 가졌어라
천지엔 이미 꽃잎이 지고
새로운 녹음이 다시 돋아나
또 한번 날 에워싸는데
못 견디게 서러운 몸짓을 하며
붉은 꽃잎은 떨어져 내려
펄펄펄 펄펄펄 떨어져 내려
신라 가시내의 숨결과 같은
신라 가시내의 숨결과 같은
풀밭에 바람 속에 떨어져 내려
올해도 내 앞에 흩날리는데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꾀꼬리처럼 울지도 못할
기찬 사랑을 혼자서 가졌어라
신문지 밥상
- 정일근 -
더러 신문지 깔고 밥 먹을 때가 있는데요
어머니, 우리 어머니 꼭 밥상 펴라 말씀하시는데요
저는 신문지가 무슨 밥상이냐며 궁시렁궁시렁하는데요
신문질 신문지로 깔면 신문지 깔고 밥 먹고요
신문질 밥상으로 펴면 밥상 차려 밥 먹는다고요
따뜻한 말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요
따뜻한 마음은 세상까지 따뜻하게 한다고요
어머니 또 한 말씀 가르쳐 주시는데요
해방 후 소학교 2학년이 최종 학력이신 어머니, 우리 어머니의 말씀 철학
신부
- 서정주 -
新婦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新
郞하고 첫날밤은 아직 앉아 있었는데, 新郞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
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읍니
다. 그것을 新郞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新婦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읍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면 달아나 버렸읍니다.
그러고 나서 四十年인가 五十年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 일
이 생겨 이 新婦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新婦
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新婦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
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읍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제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읍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
아 버렸읍니다.
신의주-단동(丹東)에서
- 신경림 -
낮은 지붕들이 처마를 맞댄
골목으로 들어가면 대포집이 보일거야
판자문을 밀고 들어서면 자욱한 담배 연기
돼지고기가 타고 두부찌개가 끓고
어디서 본 듯한 같은 주름들
귀에 익은 웃음소리
손을 흔드는 사람도 있겠지
오래간만이라고 왜 이제서 왔느냐고
다가와 잡는 손들도 있을 거야
나는 울지 않을 거야
마디마다 기름때가 낀
못 박힌 거친 손들을 잡더라도
신이 내게 묻는다면
- 천양희 -
무너진 흙더미 속에서
풀이 돋는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리
저 미물보다
더 무엇이라고 말을 하리
다만 부끄러워
때때로 울었노라
대답할 수 있을 뿐
풀은 자라
푸른 숲을 이루고
조용히 그늘을 만들 때
말만 많은 우리
뼈대도 없이 볼품도 없이
키만 커간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리
다만 부끄러워
때때로 울었노라
대답할 수 있을 뿐.
1 week ago (edited) | [YT]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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博川 최정순
전시장에서
博川 최정순
고원古原 유 화백
흘러가는 나그네 눈길
족자 속 수줍게 피어난
한 떨기 민들레꽃
나비 한 마리 날아오른다
고독의 쓸개 먹고
희열의 열매 먹으며
허공 중 표표히 유영하다
침묵하는 찻잔 속
마지막 발목 적신다.
첫눈
博川 최정순
사락사락 덮고 덮는 반가운 손님
포근한 하얀 솜이불 온 누리 덮고 덮어
나무, 지붕, 마당, 빨랫줄 잠재우고
쏟아지는 양광에 소년의 은빛 눈물 되어
하염없이 땅속으로 스며드는데
더럽고 추악한 세상살이 수정처럼 정화되어
삼라만상 오롯이 형형하게 빛나고
살아온 추억들 뇌리로 녹아드는구나.
겨울비
博川 최정순
아무 데도 쓰잘 데 없는 너
아무도 반기지 않는 너
외롭고 고독의 눈물 뿌리며
온다, 오누나
떨어진 낙엽 짓뭉개며
마른 가슴속으로 파고들며
온다, 오누나
네 마음 닮은 나
주방 부리나케 달려가
달콤 쌉싸름 청춘차
곰삭은 애통차
갇혀 버린 두메차
독한 망각차 끓여 내놓으니
섬돌 내려앉아
차 한잔씩 하고 가시오.
5 months ago | [YT]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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博川 최정순
중앙탑에서
博川 최정순
한반도 한가운데 세워진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중원에 홀로 우뚝 서
한반도 치솟는 정기 모아
천하 굽어 살피고 있으니
나그네 잠시 발길 멈춰
인간사 무사무탈하기를
큰 절 올려 간절히 빌고 비니
저 멀리 찬바람 맞는 빨간 능금
알알이 옹골차게 영글어 가고
탄금호 핏빛 석양에
정겨운 우륵 가얏고 한 가락
갈대꽃 살랑살랑 흔들며 지나간다.
석상(石像)
博川 최정순
한반도 막내 제주
금능 석물원
땅 뚫고 나와 멈춘
곰보 용암석 깎아
여기저기 사람
얼굴 수놓았는데
각양각색 수없이
많은 인간 표정
환하고 밝은
얼굴 있는가 하면
일그러지고
어두운 얼굴도 있네
왜,
내 눈길은 자꾸만
어두운 쪽으로만 갈까
아무래도,
알 수 없는 노릇일세.
귀부龜趺
博川 최정순
중원 미륵리 미륵대원彌勒大院 터
거대하게 버티고 있는 한반도 최대
중원中原 미륵리彌勒里 사지寺址 귀부龜趺
비석 받치던 너의 모습
비신碑身 없어져 구멍만 달랑 남았고
석비石碑 세월의 강물에 흔적 없네
그래도 두 마리 새끼 거북
천년 칼바람 굽이치는 파도 견디며
어미 품 올망졸망 남아 있네
강산 옷 아무리 바뀐다 해도
누구도 갈라놓지 못할
거북이 가족.
5 months ago | [YT]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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博川 최정순
가을비
博川 최정순
가슴속 응어리진 한 북받쳐
만물 휘젓는 휘모리장단
넓고도 황홀한 풍악산 일만이천봉
층층 비단결 수놓은 만첩홍산萬疊紅山
바람 따라 절승경계絶勝境界 돌고 돌다
하염없이 무심히 내리고
묘향산 칠성골 반석 위
휘감고 휘감기어 몸부림치다
박천 떠난 최씨 가문 소식에
한스러운 피눈물 씻으며
쓸쓸한 청천강 서편으로
서럽게 울고 간다.
가을 바람
博川 최정순
가파른 하늘재 넘어
송림松林 사이로
다가서는 한 뭉텅이
감나무 부딪히고 사과나무 얽혀
열매마다 핏빛 멍울 짙게 남기고
단호박 짙게 드리운 주름살 펴며
필사적으로 머물다 간다
회갈색 깊디깊은 구렁이 계곡 따라
인고의 상처 눈물 발 밑 뿌리며
먼저 지나간 인연 허위허위 쫓아와
인적 드문 산등성이 골짜기
이리저리 소요하며 거닐다가
허수아비 혼자 하늘 보고 꺼덕이는
몸서리치게 외로운 텅 빈 들판에도 머물다
콩 줄기 비집어, 비집어 툭툭 건들며
석류알 터져라 사력 다해 불다
겨울로 간다.
가을밤
博川 최정순
나무 옷 훌훌 벗어
땅 위 포목布木 되어 눕고
서리 입은 꽃잎 남루한 소복만
담장 밑 서성이며 떨고 있는데
돌밭 호박 나체로 뒹구는
벼폭 다리 잘려나간 황금들판
허수아비만 허허로이 서
하얀 비닐봉지에 덮인 짚덩이
북녘서 다가오는 겨울바람 소리
풀벌레 마지막 노래 서글픈데
둘 곳 없는 마음 들녘 헤매면
먹빛 어둠 속 잡념만 무성하네
이슬 끊임없이 가슴에 내려
도둑맞은 잠 뜨개질로 달래며
저 멀리서 나를 향해 손짓하는
죽음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가네.
5 months ago | [YT]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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博川 최정순
안성 바우덕이 축제에서
博川 최정순
집안 무고 기후 순풍 풍년 들어
가축 무사 객지 나간 가족 건강
어름산이 빌고 비는 비나리 마치고
높으나 높은 삼줄 생명 걸어
신들린 공처럼 튀어 올라
흔들흔들 휘청휘청 줄꾼
양반네들 야유 허공에 흩뿌리네
신명나는 홍재비 풍치기
오방색 부채꽃으로 피어나는 창공
하늘 땅 사람과 교감하여
하늘 당기고 땅 일으키는 풍물재비
어름산이 배우씨 주고받는 재담
풍자 해학 가을 수놓는데
안성 바우덕이 남사당패
익살맞게 육실허게 잘도 논다.
만추(晩秋)에
박천 최정순
혼재된 적갈 가을빛 받으며
멀고 긴 자드락길 걷고 걸으니
잠자는 잡목들 침묵으로 덮고
구름 떠난 하늘은 시리기만 한데
앙상한 나목들 겸허히 고독 씹고
정령精靈의 고해만 대롱대롱
바람 따라 낙엽 쌓이다 흩어지고
알몸으로 험한 세파와 조우하는데
해 저무는 등허리의 검붉은 바다
성근 별 창백한 그림자 희미하고
반쪽 푹 썩어 문드러진 야윈 반달
허무에 순응하려는지 이별마저 붉다.
낙엽(1)
博川 최정순
개밥풀꽃 핀 듯
적단풍 버릇처럼 취하여
앵도라진 붉은 입술
중심 잃은 몸뚱이 꿈틀대고
낙하하며
세상을 씹어대며
넘어지고 자빠져
시체처럼 포개지고
치기 어린 항거도
거두지 못할 흑빛 무덤도
부질없는 인사만 겹겹이 쌓여져
죽음의 그림자에 쫓겨
절망 아래 널브러진다.
낙엽(2)
博川 최정순
여명 고개 드는 새벽
안개 덮인 계단 내려서니
소복소복 낙엽 진영
모두 날개 잃고 누웠네
밤새 먹빛 여의도록
달도 별도 울고
황금기 찬란한 전설
서릿발 아래 차갑기만 한데
사납게 흘러가는 세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어디론가 흩어진다.
5 months ago | [YT]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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博川 최정순
천수만에서
博川 최정순
운명이 된
쓰린 가슴 삭이며
안면도 영목항 떠나
효자도 지나는 뱃길
맥주 거품 하얀 길
꼬리 무는 선미파 뒤로
괭이갈매기 시김새하며 선회하고
수면은 고기비늘처럼 반짝인다
거센 물살 몸 가누면서
이마 맞대고 속살거리는 조각섬들
옹기종기 동양화처럼 떠 있는데
거센 바람 외씨버선발로 뛰어가며
한 음 한 음 키운 처절한 한恨 소리
이 섬 저 섬 휘돌다 허망하게 부서진다
아득한 옛날의 지순한 사랑
가뭇없이 묻혀 가는 슬픈 전설
파도길 타고 슬그머니 흘러들어
팔작지붕 처마 끝 올라앉은 바다제비
목 놓아 소리하는 부침새 꺾음새는
미학의 절제 없이 제멋대로 출렁인다.
간월암에서
博川 최정순
넓게 팔 벌려 얼싸안은 모감주나무
섬 속 섬에서 달 보다 도 얻은 무학대사 도량처
물때 따라 열고 닫는 속세 이음길
갈매기 우웽우웽 소리치며 나그네 인도하니
소원 한 자락 소원 탑에 올리고
채움 비움 답 찾아 해탈문 올랐는데
몇백 년 풍상 견디며 살아온 사철나무
홀로 파란색 옷 입고 외로운 나그네 반기니
마음의 채움과 비움 바로 거기 있었네
경내 들어서 좁쌀만큼 비우고 좁쌀만큼 채우니
중생들 수복修福 기원하는 스님의 독경 소리
중생들 번뇌 씻어 줄 스님의 독경 소리
갈매기 날개 실어 멀리멀리 날아가고
간월암 황금빛 낙조 길게 누우면
나그네 하많은 응어리 풀어헤치고
얼굴 붉게 물들이며 활활 타고 있다.
5 months ago | [YT]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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博川 최정순
농촌풍경
博川 최정순
자식 키워 대처 내보내
둘 남은 산촌 노인네
척박한 손바닥 논
써레질하는 할아버지
못밥 나르는 할머니
염천 달래려
얼음 둥둥 띄워 마시는
막걸리 탁배기잔에
어리는 자식들
밤 오면 평상 누워
눈길 뜨락 돌리면
은빛 달 먹고
지천으로 피어나는 달개비꽃
개구리 개골개골
쓸쓸함만 더 하네.
위도의 꽃
博川 최정순
해무에 온몸 포박당한 격포항
잠시 갈 길 잃고 서성이다
핵 폐기물에 몸살 앓았다던
궁금하고 궁금하여 찾은 위도
허균의 이상세계 율도국
고슴도치 닮았다 위도蝟島라네
가파른 망월봉 비척비척 오르니
넓디넓은 해변 그림처럼 누워 있고
험준한 봉우리 내려가다 보니
자장율사 창건한 내원궁 내원암
나를 잠시 쉬어 가라 하네
암자 대청마루 앉아 눈길 멀리 던지니
망망한 푸른 물결 보며 퍼렇게 울다 지쳐
길마다 산등허리마다 꽃 피운 상사화
하얀 미소로 육지 향해 하늘거리며
포구 버리고 떠난 사람들에
그리움 가득 안고 하얀 손짓하네.
청산도에서
博川 최정순
완도 저 멀리 남쪽
몇 마리 새끼 거느린
산 푸르고 물 푸르러 청산도靑山島
그러나 바닷길 요충지라 전란도 많았지
불쑥 솟은 매봉산 허위허위 올라 굽어보면
산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 진저리 치며
뱀처럼 구불거리며 좁다란 평야로 스며들다
아득히 펼쳐진 넓디넓은 바다에 발 적시네
고샅 고불고불 둘레길 어깨 마주하고 늘어서
산 찾아 물 찾아온 나그네 발길 끊임없이 이어지고
바람결 고개 끄덕이는 청보리 파도 속
파랗게 일어나 서글프게 일렁이는 그리움 하나
느리게 느리게 님의 초분草墳 넘어간다.
5 months ago | [YT]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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博川 최정순
칠장사에서
博川 최정순
발길 천 근 나그네
잠시 쉬어 가는 칠장사
경내 둘러보니
험상궂은 사천왕상
눈 부릅떠 노려보는데
풍상에 상처받은 무명석탑 주위로
들꽃 활짝 펴 위로하는데
허허, 탱화에 궁예와 임꺽정이
뜬금없이 웬 말이련가
서글픈 전설 안은 칠장사 단청
빛바래 지쳐 있네
명당이 도대체 무엇이관데
세도가들 불 질러 뺏고 뺏겨
철당간 깃발 주인 바뀔 때마다
칠장사 동종 탄식하였다지
나그네 발길 옮기며
무심코 흘러나오는 소리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이제와 다를 게 무엇이더뇨.
부처님 오신 날에
博川 최정순
님께서 연꽃 즈려밟고 오신 날
각양각색 연꽃등 대롱대롱 불 밝혀
홍진에 물든 중생 마음 밝히니
삼라만상 모두 허공 보고 웃는데
무릎 관절 앓는 노모
거북처럼 어기적거려 내,
근처 나뭇가지 주워 지팡이 삼게 하니
노모 미소 꽃비처럼 퍼지고
종두 스님의 명종 108번 울어
자비 깨우쳐 연기緣起 알리니
노모 독실한 불자 아니어도
오늘만큼은 탐욕그릇 저 멀리 던지네.
스승의 날 근처에서
博川 최정순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고 했던가 하필 스승의 날 다음 날 TV에 이런 프로가 방영되다니 구제불능의 학생을 어쩔 수가 없어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 착하고 순진한 어느 여교사가 언성을 높이며 회초리를 들었다고 악동 친구 학생이 스마트폰인가 뭔가로 녹음하고 촬영하여 당한 학생에게 건네서 학부형이 득달같이 찾아와 폭언 폭력을 과시하고 경찰에 고소하고 그야말로 난장판을 쳤던 게 아니던가. 사회의 잘못인가 학생의 잘못인가 선생의 잘못인가 스승의 날 근처의 마음만 쓸쓸하네. 창밖에는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봄비만 하염없이 내리고.
5 months ago | [YT]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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博川 최정순
헤이리의 봄
博川 최정순
명지바람 나풀나풀 춤사위
새초롬히 버들가지 애무하는데
감자 고구마 어린 손 슬그머니 벌리네
미소로 정다웁게 재롱떠는 꽃길
봄 햇살 자박자박 까치걸음
순진무구한 아기처럼 날아들고
쇼윈도 책 찢어 마구 던진 모습에
창작의 무늬 쑥쑥 발돋움질
작가의 고뇌 반추하며 흩어져 있네
헤이리 봄의 향연
여기저기 꿈틀꿈틀 속살거리며
생명의 꽃 피우고 있더라.
5 months ago (edited) | [YT]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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