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기쁨교회

예수기쁨교회 설교와 강의.
#설교 #교리 #기독교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김후식 목사.
경기도 군포시 번영로 498 402호.
4호선 산본역 4번 출구. 노브랜드 산본역점 왼편 건물 4층.
070-7537-1992.

교회 후원계좌: 농협 301-0273-4923-41 예수기쁨교회


예수기쁨교회

자유의지와 구원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한 기초적인 지식-정리_김후식 목사




1. 아우구스티누스
Non posse non peccare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음)
인간의 의지는 죄에 속박되어 있어 죄를 짓지 않을 자유가 없다.


2. 펠라기우스
Posse non peccare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음)
타락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의지의 자유를 가지고 있어서, 스스로 선을 선택할 수 있다. 스스로의 노력과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죄는 본성이 아닌 습관에 불과하다. 은총은 구원에 있어 단지 도움의 수준에 불과하다.


3. 반펠라기우스주의 Semipelagianism
인간의 의지가 죄로 인해 약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선을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어서, 구원을 향한 스스로가 선택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인간이 먼저 믿음을 향한 의지를 보이면 하나님이 그에 대해 응답하셔서 은혜를 주신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총의 협력을 주장하는 것이다.


4. 에라스무스 vs. 마틴 루터
에라스무스가 반펠라기우스주의의 노선에 서서 인간의 의지의 선택이 구원에 대한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지만, 마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노선에 서서 인간의 의지는 죄에 속박되어 있는 노예의지(bondage of the will)일 뿐이라 주장했다.


5. 존 칼빈
존 칼빈도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입장에서 인간의 전적 타락을 주장했다. 이 전적 타락은 인간이 타락할 수 있는 가장 악한 상태로 떨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지정의와 육체에까지 죄의 영향력이 미치는 전인적인 타락이라는 것이다.


6. 아르미니우스
17세기 네덜란드의 신학자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는 이중예정과 같은 칼빈의 가르침에 대항하여 반펠라기우스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 주장은 도르트회의를 통해 정죄되었고, 도르트신조를 낳았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핵심 주장은 예지예정론으로 특징지어 볼 수 있다. 하나님이 택자들을 예정하실 때, 미래에 믿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선택을 미리 보시고 그들의 믿음을 조건으로 택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주장할 때,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총을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것으로 본 것이 독특하다. 칼빈은 영원 전에 택함 받은 사람들에게만 믿을 수 있는 은혜를 주신다고 했지만, 아르미니우스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행하는 은총을 주셔서 믿을 수 있는 자유를 주셨고, 그 은총을 받아들여 믿음을 선택할 지 말지는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다고 본 것이다. 이 선택의 자유에 따라서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을 영원 전에 미리 보시고서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7. 조나단 에드워즈
에드워즈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의 핵심에 의지의 자기결정 능력(self-determining power of the will)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보았다. 의지의 자기결정 능력을 다른 말로 하면, 외부의 영향에서 완전히 독립된 중립적인 의지라는 뜻이다. 인간의 의지가 완전한 중립성을 가진 상태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자유의지(free will)라는 말이다. 에드워즈는 자유의지에 대한 이런 생각이 일반적이지 않다고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생각할 때에는, 외부의 강압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여 자발적으로 한 행위라는 뜻이라 말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자유의지는 외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완전히 중립적 상태의 의지-그런 의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다. 그렇게 완전히 중립적인 상태에서 선택을 하는 것이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자유의지는 그런게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단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자유의지로 한 행위라고 생각한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도덕적 필연성의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에드워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 서서 인간은 도덕적 불능 상태에 있다고 했다. 이는 도덕적 필연성을 말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죄에 속박된 의지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도덕적 필연성이다. 사람들은 이 도덕적 불능 상태에서 선택을 한다. 에드워즈는 영적 선과 도덕적 선을 구분한다. 영적인 선은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도덕적 불능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이 영적인 선을 행할 수 없다. 반면에 도덕적 선은 도덕적 불능 상태에 있는 사람들도 행할 수 있다. "도덕적"이라는 형용사가 "도덕적 불능"과 "도덕적 선"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혼동될 수 있지만,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도덕적 불능"에서 도덕은 영적 선을 의미하고 "도덕적 선"에서 도덕은 일반적 의미에서 윤리를 말한다. 예를 들면, 도덕적 불능 상태에 있는 사람들도 부모를 공경할 수 있고, 거짓말보다 진실을 말하기를 선택할 수 있고, 사람들을 죽이기 보다는 살리는 걸 선택할 수 있고, 남의 것을 탐내기 보다는 탐욕을 내려 놓는 것을 택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선을 도덕적 선이라 부른다.


에드워즈가 도덕적 필연성과 일반적인 의미의 자유의지에 대해 이렇게 정리해 놓을 때,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가장 강력한 반박은 도덕적 불능상태에서 선택하는 행위는 비난이나 칭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확장하면 도덕적 불능 상태에서 한 선택에 대해서는 도덕적 책임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하다는 말이다. 이는 일견 그럴 듯해 보이는 반론이다. 말을 할 수 없는 아기에게 왜 말하지 못하느냐고 비난할 수 없는 것처럼 스스로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믿지 않은 것에 대해 책임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이 반론에 이렇게 답한다. 도덕적 필연성, 즉 인간에 대해서 말하면 도덕적 불능상태에서도 자신의 본성에 따라 선택한 행동에 대해서 비난이나 칭찬이 합당하다. 그 도덕적 불능 상태에서 선택하는 행위는 모두 자신이 원해서 하는 행동이므로 비난과 칭찬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이 원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죄를 사랑하고 선택하여 범죄하는 것은 비난 받아 마땅하고 더 중한 죄일수록 더 큰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결코 누군가 강제적으로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어떤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는-예를 들어, 이슬람 원리주의 사회에서- 그것을 강제하는 법과 환경과 분위기 속에서 살아야 하지만, 그것도 최종적으로 강제하는 힘은 아니다.). 모든 불신자들은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원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도덕법을 어기는 것이다.


반대로 도덕적 필연성을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면, 하나님은 필연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을 가지고 계시므로 언제나 영원히 거룩하고 의로운 행동을 하시는데, 이에 대해서 비난이나 칭찬이 불가능하지 않고, 찬양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정리하면, 인간의 의지는 완벽한 중립 상태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고-이는 의지라는 행위가 첫 선택을 가능하게 했던 의지로 무한히 퇴행하는 반복되는 의지 또는 무한히 순환하는 의지를 상상하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게다가 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도덕적 불능 상태에 있어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믿을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와 칼빈과 에드워즈와 가장 중요하게는 성경의 계시를 따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은혜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추가적 설명
 에드워즈의 [Freedom of the Will]은 제목이 "의지의 자유"지만, 이 의미를 여러 차원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의지와 에드워즈가 말하는 자유의지는 전혀 다른 차원이기 때문에, 에드워즈 전에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와 칼빈이 말한 것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위에서 이해에 착수해야 합니다!!


 의지가 free하다는 것에 대해
1.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완전한 중립적 상태에서 자기결정능력이 있는 것으로 이해함
2. 에드워즈는 외부의 강압에 의한 선택이 아닌, 자신이 원하여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으로 이해함
3. 에드워즈는 도덕적 불능 상태(죄에 지배 당하고 있는 의지)와 상관 없이도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있을 수 없다고 함.
4. 에드워즈는 심지어 하나님 자신의 의지작용도 도덕적 필연성에 따라 행하신다고 말한다. 물론 인간의 작은 지성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속성을 말할 때는 심히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말이다. 이것은 에드워즈의 워딩이다. "만약 어떤 일들에서 하나님이 우세한 적합함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는다면, 모든 일들에서 그렇게 결정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런 필연성이 하나님의 영광과 잘 일치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는 경향을 전혀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심히 손상시킬까 봐 수 많은 일들에서 하나님께 이런 필연성을 돌리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 month ago (edited) | [YT] | 2

예수기쁨교회

수요교리 강좌는 15일 실시간 방송 마지막에 말씀 드렸듯이, 1/22, 29일 2/5, 12일, 이렇게 네 번의 수요일에 휴강함을 알려 드립니다. 다음 수요교리 강좌는 2월 19일에 실시간 방송됩니다.

8 months ago | [YT] | 0

예수기쁨교회

이 번 주에 설교 녹화가 되지 않아 설교 전문을 올려 드립니다.

요 4.1-15. 예수님의 개인 전도 1 Personal Evangelism of Jesus 1



한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은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영원 전에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어야 하고,
성령께서 그 사람의 영혼에 은혜의 씨앗을 심으셔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신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들이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전도라고 부릅니다.
성령께서 한 사람을 부르실 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통해 그 일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한 이름 없는 여인을 전도하시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처럼 전도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전도에서 개인전도의 원리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저는 본문에서 다섯 가지 원리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원리들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본문이 펼쳐지는 배경을 잠깐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실 마음을 품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본문에서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정결 예식에 관해 논쟁한 사람이 바리새인일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바리새인들도 그런 분위기의 연장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유월절에 성전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일들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점점 적대적인 분위기를 띠게 됩니다.
예수님의 명성이 점점 커지고,
세례 요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세례를 받는 상황을 적대적으로 감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불신앙과 적대적인 감시로부터 떠나 보다 환대하는 갈릴리 지역으로 가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실 때 택하실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정도입니다.
먼저, 요단강을 건너 북쪽으로 갈릴리 호수 아래까지 가서,
다시 요단강을 건너 갈릴리 지역으로 가는 것입니다.
당시 사마리아인들을 적대시하는 유대인들이 그들과의 접촉을 꺼리며 크게 돌아가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꼭 그 길만을 이용한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서 갈릴리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은 산지길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바로 갈릴리로 가는 것입니다.
그 길로 가면 훨씬 쉽고 빠르게 갈릴리로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갈릴리로 가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요단강 근처의 마을들에서 세례를 베푸시는 일을 하셨다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보다는 그냥 북쪽으로 가서
갈릴리 호수 아래 쪽에서 갈릴리로 건너가는 길을 택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을 택하신 것은 단순히 더 빠르고 좋은 길이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다른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수가라 하는 동네로 가셨습니다.
그곳은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다고 합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은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 올 때 세겜의 아들 하몰에게서 산 밭을 말할 것입니다.
수가는 세겜과 연관이 있는 동네일 것입니다.
거기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우물은 아마도 자신이 산 땅에 야곱이 판 우물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이 우물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이 우물에 도착한 때는 뜨거운 햇살이 가장 강하게 내리쬐는 정오였습니다.
팔레스타인의 건조한 기후에 그늘이 없는 환경은 탈진을 일으키기에 알맞습니다.
6절에 보시면, 예수님은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셨다고 합니다.
우리말 번역이 예수님의 상태를 잘 전달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말 그대로 탈진할 정도로 피곤하여서,
우물 곁에서 털썩 주저 앉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아침 일찍 출발하셔서 오전 내내 걸어서 그곳에 도착하셨을 겁니다.
탈진할 만도 하지요.
예수님이 진짜 인간이라는 사실이 여기서도 드러납니다.


그 때 한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옵니다.
여기서부터 예수님과 그 여인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여기에서 저는 개인 전도의 다섯 가지 원리를 소개하려 합니다.
오늘은 분량 상 그 중에 두 가지 원리만 다루겠습니다.


첫 번째로, 사회 문화적 장벽을 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는 적어도 세 가지의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넘지 않으면 대화조차 불가능합니다.


먼저, 인종적인 장벽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혐오했습니다.
이방인들도 혐오했지만,
사마리아인들도 그에 못지 않게 혐오했습니다.
특별히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한 이후에 혼혈화가 되었고,
그들의 종교 또한 혼합적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나름 성경에 근거한 종교를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그들의 성경은 반쪽짜리였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을 그들의 성경으로 취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은 좋은 때는 유대인과 자신을 동일시 했지만,
전쟁이 유대인에게 불리한 상황으로 돌아갈 때는,
자신들은 유대인들과 다르다고 했고,
유대인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물론 유대인들도 사마리아인들에게 보복을 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골이 깊은 적대감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의 접촉을 매우 꺼렸습니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부정해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성과의 만남이라는 장벽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근동의 문화에서 서로 알지 못하는 여인이 남자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커다란 위험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결혼한 여성은 그 자체만으로도 간음의 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장벽은 도덕적인 것입니다.
이 여인은 아무도 물 길으러 오지 않는 정오에 혼자서 우물에 나왔습니다.
보통 아침이나 저녁 시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와서 물을 깃는데 이 여인은 혼자 온 것입니다.
그것은 이 여인에게 도덕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이러한 장벽들을 생각할 때 어떤 유대인 남자가 서로 알지 못하고,
유부녀일 가능성이 있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고,
크게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말을 거셨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고,
예수님만 있는 상황에서 그 여인에게 말을 거셨습니다.
“물을 좀 달라”


사마리아 여인의 대답을 보면,
지금까지 말했던 장벽들이 있는데도 말을 걸어 온 이 남자가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되었을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요한은 여인의 놀람의 가장 중심적인 이유에 대해 말해 줍니다.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인종적인 이유가 가장 큰 것이란 말입니다.
거기에 모르는 이성간의 만남이라는 점과,
여인의 도덕적인 부분이 긴장감을 더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려고 할 때에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 있었던 것과 같은 장벽이 아닌 다른 장벽을 마주하게 됩니다.
물론 이성 간의 대화는 조금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1세기 팔레스타인의 상황에 비하면 그 장벽은 아주 약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의 가장 큰 장벽은 개인주의적인 삶의 방식과 종교에 대한 냉담함일 것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전도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그런 냉담함에 다가가는 것이 매우 힘들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일부러 탈진하시기까지 하시면서 그 우물을 찾아가셨고,
거기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그것도 유대인들이 접촉하게 되면 부정해 진다고 생각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물을 좀 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여인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해 사회 문화적인 장벽을 넘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죄도 없으시고,
죄 때문에 겪을 지도 모르는 어떤 두려움도 없으셨습니다.
또한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편견도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과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벽을 마주하면 넘어가려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그저 그 장벽 때문에 전도를 포기하고 맙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닮은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구령의 열정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주님은 구령의 열정으로 먼 길을 탈진할 정도로 걸으셔서 정확한 시간에 그 여인이 나타날 곳까지 가셨습니다.
장벽을 넘는 데에 가장 필요한 것이 이 구령의 열정입니다.
한 사람에게 영혼의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에,
전도는 가장 소중한 선물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영혼을 반드시 구원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통해서든지 그를 구원하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구령의 열정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 구령의 열정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며 지옥으로 달려가는 그들의 발걸음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전도에 있어서 패배감에 사로잡히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마른 막대기와 같은 사람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큰 일을 하실 수 있음을 믿읍시다.
저와 여러분이 선천적으로 열정이 특심한 사람들이 아닐지라도,
성령께서 구령을 위한 열심을 불어넣으실 때 마른 막대기와 같은 우리의 마음에도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줄 믿습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여러분에게 주신 인생에 이제 신앙적인 도전은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단 한 명이라도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갈 때에 전도의 열매 없이 빈 손으로 가지 않을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개인 전도의 두 번째 원리는,
현재의 상황에서 영적인 진리로 인도하는 대화의 매개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10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여인과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인 자신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는 것이 여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어떤 성경학자들은 여인이 이 남자가 자신에게 남자로서 일종의 플러팅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거라고 합니다.
속된 말로 하면 껄떡대고 있다고 생각했단 말입니다.
과연 그럴 수도 있지만,
본문은 그런 분위기를 거의 내비치지 않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눈빛과 표정과 행동에서 여자가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단지,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인 자신에게 호의를 요청한다는 사실이 의아할 뿐이었을 겁니다.
그런 의아함을 가진 여인에게 예수님은 “생수”라는 매개체를 가지고 대화를 시도하십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생수를 좀 구했습니다.
여인에게 생수를 구하신 이유는 예수님은 탈진할 정도로 피곤하셨고,
여인은 우물에 내려가서 물을 뜰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근동의 우물은 상당히 깊이 내려가서 물동이로 물을 퍼서 올라와야 하는 구조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여인이 예수님께 물을 떠 드리기 위해서는 그런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인이 의아해 했지만 어떤 열린 마음으로 대답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여인의 마음에 어떤 관심이 생길 만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선물”과 자신의 정체에 대해 말씀하시고,
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생수를 구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여인이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대화가 이어지게 됩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영적인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니고데모처럼 물리적인 생수의 의미로 밖에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12절의 질문을 하는데,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싶어합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야곱의 후손이라고 여겼습니다.
혼혈이기 때문에 반은 맞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 성경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다윗이나 그 이후의 선지자들에 대해서는 연결을 짖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사람들은 족장들과 모세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우물은 야곱이 파서 물려 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야곱을 언급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 길을 그릇도 없이 맑은 물을 줄 수 있다면,
어떻게 줄 수 있다는 말인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물을 줄 수 있다면 분명 야곱보다 큰 사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아는 것이 복음의 핵심 중에 핵심이니까 점점 중요한 진리로 향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다시 영적인 구원의 의미가 담긴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우리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수는 영생을 뜻하고,
이 물을 마시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게 되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에,
마르지 않고 솟아나는 샘물처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영생수를 주실 수 있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정체입니다.


하지만, 여인은 아직 우리와 같은 영적인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신비한 능력으로 계속해서 맑은 물을 공급할 수 있다는 말로 이해를 한 것 같습니다.
여전히 마시는 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시는 물”이라는 매개체를 사용해서 여인과 대화를 이어가시면서,
계속해서 영적인 진리를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전지한 입장에서 이런 대화를 할 수는 없지만,
우리도 완결된 하나나님의 특별계시인 신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적인 진리를 일상적인 것에 빗대어 대화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쁨이라는 주제로 대화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우울한 사람들이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친구에게 제가 가진 기쁨에 대해서 자주 얘기해 줍니다.
기쁨과 슬픔은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이고,
또한 예수님 안에 있는 기쁨과 소망의 이유로 이어가기에 굉장히 좋은 주제입니다.


최근에 어떤 기쁨을 느껴 보았는지 질문하면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얘기를 하기 좋아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지고,
참으로 상대방의 이야기 속에서 그 사람을 알아가고 이해하기 위해 잘 듣다 보면,
이야기 그 자체만으로도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대화를 통해 신뢰하는 관계를 만들어 가면,
더 깊은 이야기도 할 수 있게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진심으로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진솔하고 겸손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조급해 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관계를 만들어 간다면,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진리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일입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그 일을 하시도록 한 사람에게 진리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해 줄 수 있습니다.
오래 걸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진실하게 대화해 간다면,
성령께서 그 마음에 역사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도의 장벽을 넘어서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다가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영혼의 인도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year ago | [YT] | 3

예수기쁨교회

수요 교리강좌 예고.
뉴시티 교리문답 강좌를 마쳤기 때문에, 다음 강좌를 소개합니다.
다음 강좌는 네덜란드 교회에서 "아버지 아 브라켈"이라고 불리는 존경받는 빌헬무스 아 브라켈의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예배"라는 걸작에서 실천적인 교리들을 소화하여 교리 강좌의 형식으로 소개하려 합니다.
그 주제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성화와 거룩함.
하나님을 사랑함.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
하나님을 경외함.
순종.
영적 담대함.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고백함.
만족.
자기 부인.
인내.
정직함.
금식.
깨어 있음.
고독.
경건한 묵상.
노래.
맹세.
경험.
이웃 사랑.
겸손.
온유함.
화평.
부지런함.
불쌍히 여김.
사려 깊음.
영적 성장.
경건한 신자의 영적 퇴보.
영적 어둠.
영적 무감각. 등.

1 year ago (edited) | [YT] | 2

예수기쁨교회

하나님의 인도에 관한 훌륭한 책을 소개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은 현재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살기 힘든 면도 있지만, 이 책의 저자 케빈 드영 목사같은 젊고 훌륭한 영적 리더들이 많기에 소망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에 대해 한 마디만 해야 한다면 한국 교회에 꼭 필요한 책이라 말하고 싶다.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도움이 가득한 책이다. 개혁파 신학이 일상의 영역에서 얼마나 힘 있고 적절한 함의를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한 예가 되는 책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에 대해 몇 가지만 들어 보겠다.



1. 재치 있고 재미 있어서 독자들이 힘들이지 않고 읽을 수 있다

케빈 드영 목사 특유의 재치와 위트 때문에, 읽는 내내 즐거움을 잃지 않고 읽게 된다. "우리는 교리를 만지작거리며 갖고 놀고, 교회를 갖고 놀고, 여자 친구와 남자 친구를 갖고 놀고, 대학 전공을 갖고 놀고..."같은 재미있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표현들을 갖고 노는 노련함을 책의 끝까지 유지한다. 사전을 찾자야 하는 어려운 말들이 거의 없다. 논지의 구조도 아주 분명하고 단순해서 구조파악하는 어려움도 거의 없다.



2. 신학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거의 없다

케빈 드영 목사의 신학적 배경은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개혁파 신학이다. 개혁파 신학의 강점은 성경을 가장 통합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개혁파 신학의 탄탄한 유산은 공부할 수록 더욱 감탄하게 되며, 이런 유산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이 책의 훌륭한 점은 개혁파 신학의 길을 따르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읽어도 큰 거부감이 없다는 것과, 개혁파 신학이 일상적 삶에 얼마나 적절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3.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실천적 유익을 준다

선택의 문제 앞에서 성경적 답을 찾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90년대 말에 유행했던 "하나님의 뜻 찾기" 운동의 헛점을 정확히 짚어 내며, 그 성경적 대안을 아주 단순하게 제시한다. 이 책의 원제가 말하듯이 "당장 무엇인가를 하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말하며, 그 권고의 근거가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는 "지혜의 길"이라 가르친다. 하나님은 A부터 E까지의 가능한 선택지 중에 일반적으로 A나 C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 모든 선택지들 중에 하나님이 이미 성경에 계시하신 거룩한 삶에 합당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길을, 성경과 다른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의 조언과 기도를 사용하여, 지혜롭게 스스로 선택하는 길을 주셨다는 것이다. 기복주의 신앙의 강력한 영향 속에서 신앙생활 해 온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책을 통해 기복주의 신앙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성경적 지혜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4. 목회자들에게는 신학 연구와 목회 사역의 좋은 열매의 모범을 보여준다

필자는 목회자로서 케빈 드영 목사의 사역에 부러움과 부끄러움과 감사를 동시에 느낀다. 서구 기독교 유산의 풍부한 광맥을 발견한 저자가 그 영적 풍성함을 누리며 목회하는 모습에 부러움을 느끼고, 하나님께서 필자에게 주신 삶과 목회의 부르심 가운데 좋은 열매를 거두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은 모습을 돌아보며 부끄러움을 느끼고, 개혁파 신학의 전통 위에서 목회하면서 그 열매로 이런 훌륭한 책을 내어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익을 주는 모범을 보여준 것에 감사한다. 이 글을 읽었다면 지금 당장 이 책을 사서 읽으시길 바란다. blog.naver.com/lightnheat/223374671324

1 year ago (edited) | [YT] | 2

예수기쁨교회

기독교 윤리학-웨인 그루뎀




미국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극찬을 받고 있는 기독교 윤리학 책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기준을 갖지 못한 채 시대의 바람에 따라 이리 저리 흔들리고 있는 것은 기독교 윤리에 대한 지식의 부족이 한 몫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성경적인 윤리적 기준을 매우 포괄적이고 오늘날의 문제들을 간과하지 않으며 용기 있게 전달해 주는 소중한 자산이다. ​

필자가 이 책을 소개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는 책 자체의 훌륭함도 있지만, 출판사의 신학적 입장과 상당히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유산의 가치를 폄하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웨인 그루뎀의 성경 전체를 보는 틀은 신칼빈주의의 "창조, 타락, 구속"이다. 하지만, 부흥과 개혁사는 개혁파 신학자들이 견지해 온,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의 틀을 따른다. 이 차이는 문화 사역과 정치 참여의 실행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신칼빈주의자들은 소위 "변혁적 세계관"을 가지고, 구속을 창조의 회복 및 재창조로 본다. 그래서 모든 문화 사역을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로 여기고 이러한 사역의 결과가 내세에까지 이어진다고 본다. 하지만, 개혁파 신학은 "보존적 세계관"을 견지한다. 개혁파 신학의 성경 이해는 완성을 포함한다. 완성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갑자기 일어나지 교회의 문화 사역의 결과로 일어나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문화 활동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참여하면서도 그 한계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

예를 들어, 보존적 세계관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이렇게 이해한다. 교회는 세상 나라의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고, 정치 참여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맡기는 것이다. 이 차이는 오늘날 교회의 정치 참여로 인해 교회가 지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도 정치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제1의 관심사는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제일의 관심사와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일에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제 1일의 관심사와 목표에 집중하며 정치의 이슈에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정교분리의 근본적인 정신이다. 하지만,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은 세상 나라의 시민으로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투표라도 잘 해야 한다. ​

다시 처음 하려고 한 얘기로 돌아가 보면, 부흥과 개혁사는 보존적 세계관 또는 문화관을 견지하고 있지만, 변혁적 세계관에 따라 저술한 그루뎀의 책을 발간하는 용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누군가에게는 변질로 비칠 수 있지만, 필자와 같은 사람에게는 용기 또는 지혜로 보인다. 그루뎀이 가지고 있는 개혁파의 공통적 유산의 가치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루뎀이 가진 차이를 용기 있게 경고하면서도 지혜롭게 출판을 감행한 것이다. 이 책이 한국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일독을 권한다.
[출처] 기독교 윤리학-웨인 그루뎀|blog.naver.com/lightnheat

1 year ago (edited) | [YT] | 2

예수기쁨교회

(오늘 설교 녹화가 되지 않아 설교문을 올려 드립니다.)

약 3.1-12.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No Human Being can Tame the Tongue

야고보서는 처음에 소개했던 주제들을 반복하고 확장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지난 본문들에서는 가난한 자와 부자에 대한 주제를 다뤘는데,
3장부터 4장 12절까지는 지혜와 말에 대한 주제로 돌아갑니다.
오늘 본문은 주로 혀에 대해 고찰합니다.
혀는 음식 맛을 보고 먹을 때도 사용하지만,
더 중요한 기능은 말과 노래를 위한 것이지요.
야고보의 관심은 주로 말하는 기능에 있습니다.

혀의 능력은 주로 말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의 능력에 관심이 아주 큽니다.
말을 잘하는 것과 성공에는 아주 큰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치는 말로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2차 대전 때 처칠이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연설 했을 때는,
프랑스가 패망하기 직전이었고,
독일의 영국 침공이 눈앞에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나치와 협상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처칠을 압박했지만,
처칠은 승리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연설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나치와 끝까지 싸웠고,
유럽을 지켜내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결국 연합국이 승리했습니다.
말의 힘을 보여주는 역사의 한 장면입니다.

야고보도 이런 얘기를 해 주면 뭔가 솔깃할 것 같은데,
그런데, 야고보는 말을 잘하면 성공한다거나,
말을 잘하는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혀는 누구도 길들일 수 없는 지체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의 강조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말을 잘하면 성공하기 때문에,
최선으로 노력하여 말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단지, 누구도 혀를 통제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려 노력합니다.
혀를 통제하기 위해 모든 지혜와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도적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 여러분이 말에 대한 복음적인 관점을 갖게 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의 첫 번째 관심은 선생들에게 있습니다.
선생이라 할 때 야고보의 마음 속에는 랍비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랍비는 공동체에서 가장 존경 받는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랍비는 재해나 전쟁이 났을 때 가장 먼저 구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랍비의 말은 누구나 경청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과도할 정도로 존경을 받던 랍비에 대한 전통이 교회에서도 이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잘못된 동기로 선생이 되려 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고보는 교회에게,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숫자를 말하는 겁니다.
남을 가르치려는 마음을 많이 갖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될 수도 있지만,
문자적으로 선생의 숫자가 많은 것을 뜻합니다.
너도 나도 가르치는 사람이 되려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선생은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말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기 마련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비판이 자유로운 세상에서는,
말을 많이 해야 하는 목사들의 말실수가 이슈가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미 목사들은 자기 말에 대한 심판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목사나 교사들만 말에 실수가 많은 건 아닙니다.
사람들은 거의 모두 말에 있어서 실패합니다.
자기가 한 말 때문에 후회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야고보의 말은 말에 있어서 실수가 없게 해서 온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만일 말에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온 몸도 통제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지만,
누구도 그럴 수 없다는 겁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네 가지 비유를 듭니다.
우선 두 가지 비유는 혀가 작지만 아주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는 걸 빗대기 위해,
재갈과 키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가지 비유는 혀의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힘을 빗대기 위해,
불과 길들여지지 않는 동물에 비유합니다.

먼저, 혀는 말의 재갈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말을 통제하기 위해 재갈을 사용했습니다.
말의 길죽한 입에는 어금니와 앞니 사이에 이가 없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에 고삐를 당기면 혀에 자극을 줄 수 있는 쇠붙이를 걸어서,
기수가 고삐로 말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쇠붙이지만,
사람보다 큰 말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큰 힘을 가졌습니다.

둘째로, 혀는 배의 키와 같습니다.
큰 배라도 조타수가 방향타를 돌리면 배 아래에 있는 키가 움직이면서 배의 방향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배에서 키는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배 전체의 진로를 결정하는 힘이 있습니다.

말의 재갈이나 배의 키나 모두 작지만 전체를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혀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직 혀의 부정적인 힘을 강조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두 가지 비유는 혀가 얼마나 파괴적인 힘을 가졌는지 보여줍니다.

야고보는 먼저, 혀는 불이라고 합니다.
작은 불씨로 시작된 불이 커다란 건물을 태우고,
엄청난 넓이의 숲을 까맣게 태워버립니다.

6절은 좀 어려운 표현들이 나와서 같이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이 구절에서 특히 어려운 표현은 “불의의 세계라”와 “삶의 수레바퀴”입니다.
“불의의 세계”라는 말은 혀는 불의가 집중된 지체라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혀로는 거의 모든 악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손이나 발이 표현할 수 없는 악을 혀로는 할 수 있습니다.
단지 표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은 태우는 불처럼 파괴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는 말은 우리 삶의 반복되는 전 과정에 파괴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혀의 악한 영향력은 우리 인격 전체를 더럽힙니다.
혀에는 마치 지옥과 파이프 라인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지옥의 가스관으로부터 악한 가스를 공급받아
우리의 인격과 삶을 불사른다는 것입니다.
지옥은 끊임 없이 타는 불입니다.
혀도 꺼지지 않는 불처럼 그 악을 생산해 내며 인생들을 파괴하는 일을 쉬지 않습니다.

혀의 부정적인 영향력에 대한 두 번째 비유는 혀가 길들일 수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야고보는 짐승이든 새든 파충류든 바다의 생물이든 인간이 길들일 수 있고 또 길들여 왔다고 합니다.
물론 이 말은 과장법일 겁니다.
상황과 환경만 주어진다면 그럴 수 있다는 얘기겠지요.

하지만, 어떤 사람도 혀는 길들일 수 없다고 합니다.
자기 혀든 남의 혀든 길들일 수가 없습니다.
저도 어릴 때 제 혀가 제 의지와는 상관 없이 마구 날뛰던 때가 있었습니다.
한 일 년 정도 욕을 심하게 했던 걸 기억합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습니다.
한 일 년 정도 욕을 하고는 더 이상 욕을 하지 않게 되었는데,
별다른 이유 없이 욕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야고보는 이 혀를 쉬지 않고 뛰어 다니면서 공격하고 찢고 죽이며,
전갈이나 뱀처럼 무시무시한 독이 가득한 동물에 비유합니다.
혀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극에 달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가장 끔찍할 수도 있는 설명이 남아 있습니다.
혀는 하나님이 만드신 다른 피조물들과는 다르게,
독특한 모순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단물을 내는 샘은 단물만 내고,
쓴 물을 내는 샘은 쓴 물만 냅니다.
한 샘에서 마시기 좋은 물과 쓴 물을 동시에 낼 수는 없습니다.
무화과 나무에서 올리브가 열릴 수 없고,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낼 수 없듯이,
쓴 맛이 가득한 소금 물이 신선한 단물을 낼 수는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셨지만 그것은 기적일 뿐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입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말이 함께 나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그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을 향한 욕설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욕설은 다른 말로 하면,
신성모독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이러한 모순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마귀는 사람들을 저주하지만,
동시에 찬양과 저주를 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인간의 입에서만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온다는 겁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혀에 대한 고찰을 끝내 버립니다.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여운을 남기고 끝을 맺습니다.
단지, 10절에서 단 한 마디 꾸짖음을 합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혀가 이렇게 모순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리스도인들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혀를 찬송과 축복의 도구로 사용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알면서도 완벽하게 지킬 수가 없습니다.
혀는 누구도 길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혀에 대한 야고보의 가르침이 여기서 끝나버린다면,
우리는 이 모순된 혀 때문에 실망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감사하게도, 야고보는 4장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4장 6절부터 10절에 보면, 야고보는 겸손이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혀를 사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겸손은 어떤 것일까요?

주님은 정결법에 따라 음식법을 지키는데 집중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마 15:11)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바로 혀의 악한 영향력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혀가 생산해 내는 그 악한 영향력이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18절)

우리는 먼저,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죄와 악함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계속 스스로 말을 잘 해 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남보다 좀 낫게 말하는 자신을 보며 흡족할 때도 있고,
또 실수를 하고 잘 못 말할 때는 자신에게 심히 실망하는 동시에,
그렇게 말하게 만든 사람들을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먼저 자신의 마음이 죄로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언어생활을 거룩하게 하는 실재적인 변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죄악을 깊이 인정하면 인정할수록 여러분의 혀는 부드러워 질 것입니다.
성경 속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모두 그랬습니다.
한 사람의 거룩함은 자신의 죄의 깊이를 깨닫는 정도에 비례합니다.

이사야는 보좌에 앉으신 만군의 여호와의 환상을 보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고,
후에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닙니다.
교회를 핍박했던 자신의 죄의 실상과,
그토록 위대한 사도의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오염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죄의 오염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보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혀는 계속해서 교만한 말들을 쏟아 낼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스스로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여기지 않고,
여러분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들의 죄보다 더 생생하고 깊이 자각할 때,
여러분의 혀는 겸손한 말들을 내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혀를 제어할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혀를 통제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을 믿고,
끊임 없이 여러분의 말에 대한 은혜를 구하십시오.
여러분의 말이 달라질 때까지 계속 구하십시오.
말은 단순히 단어 몇 개 바뀐다고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말의 근원인 마음이 은혜로 감화를 받아야 바뀌게 됩니다.
여러분의 입술이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입술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성령을 읽으며 진리의 밝은 빛과 은혜의 열을 구하십시오.
진리로 총명해지고 사랑으로 따뜻해진 말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신앙의 길에 별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기쁨을 여러분의 언어 생활에서 누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는 말하는 데 있어서 큰 자유를 누립니다.
거룩한 지식과 자녀된 기쁨으로 자녀가 집 안에서 부모와 형제 자매와 자유롭고 평안하게 말하듯이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쓴 경건한 글들을 읽고 그들의 생각과 말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꼭 읽어 보실 것을 추천합니다.
선한용 목사님이 번역하시고,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출판한 “성어거스틴의 고백록”이라는 책의 번역을 추천합니다.
자신의 죄와 방황과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사랑을 기도의 형식에 담아 고백하는 글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의 정직한 자기 이해와 고백과 찬양과 감사와 사랑의 언어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첫째, 여러분의 마음 속의 죄악을 깊이 인정하고,
둘째, 여러분의 입술의 열매를 위해 항상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셋째, 고백록과 같은 경건한 선배들의 책을 읽으며 그들의 생각과 말을 배워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이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사람들을 향한 축복으로 가득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year ago (edited) | [Y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