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3.1-12.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No Human Being can Tame the Tongue
야고보서는 처음에 소개했던 주제들을 반복하고 확장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지난 본문들에서는 가난한 자와 부자에 대한 주제를 다뤘는데,
3장부터 4장 12절까지는 지혜와 말에 대한 주제로 돌아갑니다.
오늘 본문은 주로 혀에 대해 고찰합니다.
혀는 음식 맛을 보고 먹을 때도 사용하지만,
더 중요한 기능은 말과 노래를 위한 것이지요.
야고보의 관심은 주로 말하는 기능에 있습니다.
혀의 능력은 주로 말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의 능력에 관심이 아주 큽니다.
말을 잘하는 것과 성공에는 아주 큰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치는 말로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2차 대전 때 처칠이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연설 했을 때는,
프랑스가 패망하기 직전이었고,
독일의 영국 침공이 눈앞에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나치와 협상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처칠을 압박했지만,
처칠은 승리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연설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나치와 끝까지 싸웠고,
유럽을 지켜내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결국 연합국이 승리했습니다.
말의 힘을 보여주는 역사의 한 장면입니다.
야고보도 이런 얘기를 해 주면 뭔가 솔깃할 것 같은데,
그런데, 야고보는 말을 잘하면 성공한다거나,
말을 잘하는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혀는 누구도 길들일 수 없는 지체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의 강조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말을 잘하면 성공하기 때문에,
최선으로 노력하여 말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단지, 누구도 혀를 통제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려 노력합니다.
혀를 통제하기 위해 모든 지혜와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도적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 여러분이 말에 대한 복음적인 관점을 갖게 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의 첫 번째 관심은 선생들에게 있습니다.
선생이라 할 때 야고보의 마음 속에는 랍비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랍비는 공동체에서 가장 존경 받는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랍비는 재해나 전쟁이 났을 때 가장 먼저 구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랍비의 말은 누구나 경청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과도할 정도로 존경을 받던 랍비에 대한 전통이 교회에서도 이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잘못된 동기로 선생이 되려 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고보는 교회에게,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숫자를 말하는 겁니다.
남을 가르치려는 마음을 많이 갖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될 수도 있지만,
문자적으로 선생의 숫자가 많은 것을 뜻합니다.
너도 나도 가르치는 사람이 되려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선생은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말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기 마련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비판이 자유로운 세상에서는,
말을 많이 해야 하는 목사들의 말실수가 이슈가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미 목사들은 자기 말에 대한 심판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목사나 교사들만 말에 실수가 많은 건 아닙니다.
사람들은 거의 모두 말에 있어서 실패합니다.
자기가 한 말 때문에 후회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야고보의 말은 말에 있어서 실수가 없게 해서 온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만일 말에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온 몸도 통제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지만,
누구도 그럴 수 없다는 겁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네 가지 비유를 듭니다.
우선 두 가지 비유는 혀가 작지만 아주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는 걸 빗대기 위해,
재갈과 키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가지 비유는 혀의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힘을 빗대기 위해,
불과 길들여지지 않는 동물에 비유합니다.
먼저, 혀는 말의 재갈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말을 통제하기 위해 재갈을 사용했습니다.
말의 길죽한 입에는 어금니와 앞니 사이에 이가 없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에 고삐를 당기면 혀에 자극을 줄 수 있는 쇠붙이를 걸어서,
기수가 고삐로 말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쇠붙이지만,
사람보다 큰 말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큰 힘을 가졌습니다.
둘째로, 혀는 배의 키와 같습니다.
큰 배라도 조타수가 방향타를 돌리면 배 아래에 있는 키가 움직이면서 배의 방향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배에서 키는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배 전체의 진로를 결정하는 힘이 있습니다.
말의 재갈이나 배의 키나 모두 작지만 전체를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혀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직 혀의 부정적인 힘을 강조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두 가지 비유는 혀가 얼마나 파괴적인 힘을 가졌는지 보여줍니다.
야고보는 먼저, 혀는 불이라고 합니다.
작은 불씨로 시작된 불이 커다란 건물을 태우고,
엄청난 넓이의 숲을 까맣게 태워버립니다.
6절은 좀 어려운 표현들이 나와서 같이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이 구절에서 특히 어려운 표현은 “불의의 세계라”와 “삶의 수레바퀴”입니다.
“불의의 세계”라는 말은 혀는 불의가 집중된 지체라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혀로는 거의 모든 악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손이나 발이 표현할 수 없는 악을 혀로는 할 수 있습니다.
단지 표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은 태우는 불처럼 파괴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는 말은 우리 삶의 반복되는 전 과정에 파괴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혀의 악한 영향력은 우리 인격 전체를 더럽힙니다.
혀에는 마치 지옥과 파이프 라인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지옥의 가스관으로부터 악한 가스를 공급받아
우리의 인격과 삶을 불사른다는 것입니다.
지옥은 끊임 없이 타는 불입니다.
혀도 꺼지지 않는 불처럼 그 악을 생산해 내며 인생들을 파괴하는 일을 쉬지 않습니다.
혀의 부정적인 영향력에 대한 두 번째 비유는 혀가 길들일 수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야고보는 짐승이든 새든 파충류든 바다의 생물이든 인간이 길들일 수 있고 또 길들여 왔다고 합니다.
물론 이 말은 과장법일 겁니다.
상황과 환경만 주어진다면 그럴 수 있다는 얘기겠지요.
하지만, 어떤 사람도 혀는 길들일 수 없다고 합니다.
자기 혀든 남의 혀든 길들일 수가 없습니다.
저도 어릴 때 제 혀가 제 의지와는 상관 없이 마구 날뛰던 때가 있었습니다.
한 일 년 정도 욕을 심하게 했던 걸 기억합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습니다.
한 일 년 정도 욕을 하고는 더 이상 욕을 하지 않게 되었는데,
별다른 이유 없이 욕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야고보는 이 혀를 쉬지 않고 뛰어 다니면서 공격하고 찢고 죽이며,
전갈이나 뱀처럼 무시무시한 독이 가득한 동물에 비유합니다.
혀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극에 달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가장 끔찍할 수도 있는 설명이 남아 있습니다.
혀는 하나님이 만드신 다른 피조물들과는 다르게,
독특한 모순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단물을 내는 샘은 단물만 내고,
쓴 물을 내는 샘은 쓴 물만 냅니다.
한 샘에서 마시기 좋은 물과 쓴 물을 동시에 낼 수는 없습니다.
무화과 나무에서 올리브가 열릴 수 없고,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낼 수 없듯이,
쓴 맛이 가득한 소금 물이 신선한 단물을 낼 수는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셨지만 그것은 기적일 뿐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입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말이 함께 나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그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을 향한 욕설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욕설은 다른 말로 하면,
신성모독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이러한 모순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마귀는 사람들을 저주하지만,
동시에 찬양과 저주를 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인간의 입에서만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온다는 겁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혀에 대한 고찰을 끝내 버립니다.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여운을 남기고 끝을 맺습니다.
단지, 10절에서 단 한 마디 꾸짖음을 합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혀가 이렇게 모순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리스도인들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혀를 찬송과 축복의 도구로 사용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알면서도 완벽하게 지킬 수가 없습니다.
혀는 누구도 길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혀에 대한 야고보의 가르침이 여기서 끝나버린다면,
우리는 이 모순된 혀 때문에 실망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감사하게도, 야고보는 4장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4장 6절부터 10절에 보면, 야고보는 겸손이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혀를 사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겸손은 어떤 것일까요?
주님은 정결법에 따라 음식법을 지키는데 집중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마 15:11)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바로 혀의 악한 영향력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혀가 생산해 내는 그 악한 영향력이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18절)
우리는 먼저,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죄와 악함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계속 스스로 말을 잘 해 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남보다 좀 낫게 말하는 자신을 보며 흡족할 때도 있고,
또 실수를 하고 잘 못 말할 때는 자신에게 심히 실망하는 동시에,
그렇게 말하게 만든 사람들을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먼저 자신의 마음이 죄로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언어생활을 거룩하게 하는 실재적인 변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죄악을 깊이 인정하면 인정할수록 여러분의 혀는 부드러워 질 것입니다.
성경 속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모두 그랬습니다.
한 사람의 거룩함은 자신의 죄의 깊이를 깨닫는 정도에 비례합니다.
이사야는 보좌에 앉으신 만군의 여호와의 환상을 보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고,
후에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닙니다.
교회를 핍박했던 자신의 죄의 실상과,
그토록 위대한 사도의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오염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죄의 오염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보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혀는 계속해서 교만한 말들을 쏟아 낼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스스로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여기지 않고,
여러분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들의 죄보다 더 생생하고 깊이 자각할 때,
여러분의 혀는 겸손한 말들을 내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혀를 제어할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혀를 통제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을 믿고,
끊임 없이 여러분의 말에 대한 은혜를 구하십시오.
여러분의 말이 달라질 때까지 계속 구하십시오.
말은 단순히 단어 몇 개 바뀐다고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말의 근원인 마음이 은혜로 감화를 받아야 바뀌게 됩니다.
여러분의 입술이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입술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성령을 읽으며 진리의 밝은 빛과 은혜의 열을 구하십시오.
진리로 총명해지고 사랑으로 따뜻해진 말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신앙의 길에 별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기쁨을 여러분의 언어 생활에서 누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는 말하는 데 있어서 큰 자유를 누립니다.
거룩한 지식과 자녀된 기쁨으로 자녀가 집 안에서 부모와 형제 자매와 자유롭고 평안하게 말하듯이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쓴 경건한 글들을 읽고 그들의 생각과 말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꼭 읽어 보실 것을 추천합니다.
선한용 목사님이 번역하시고,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출판한 “성어거스틴의 고백록”이라는 책의 번역을 추천합니다.
자신의 죄와 방황과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사랑을 기도의 형식에 담아 고백하는 글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의 정직한 자기 이해와 고백과 찬양과 감사와 사랑의 언어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첫째, 여러분의 마음 속의 죄악을 깊이 인정하고,
둘째, 여러분의 입술의 열매를 위해 항상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셋째, 고백록과 같은 경건한 선배들의 책을 읽으며 그들의 생각과 말을 배워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이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사람들을 향한 축복으로 가득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기쁨교회
(오늘 설교 녹화가 되지 않아 설교문을 올려 드립니다.)
약 3.1-12.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No Human Being can Tame the Tongue
야고보서는 처음에 소개했던 주제들을 반복하고 확장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지난 본문들에서는 가난한 자와 부자에 대한 주제를 다뤘는데,
3장부터 4장 12절까지는 지혜와 말에 대한 주제로 돌아갑니다.
오늘 본문은 주로 혀에 대해 고찰합니다.
혀는 음식 맛을 보고 먹을 때도 사용하지만,
더 중요한 기능은 말과 노래를 위한 것이지요.
야고보의 관심은 주로 말하는 기능에 있습니다.
혀의 능력은 주로 말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의 능력에 관심이 아주 큽니다.
말을 잘하는 것과 성공에는 아주 큰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치는 말로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2차 대전 때 처칠이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연설 했을 때는,
프랑스가 패망하기 직전이었고,
독일의 영국 침공이 눈앞에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나치와 협상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처칠을 압박했지만,
처칠은 승리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연설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나치와 끝까지 싸웠고,
유럽을 지켜내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결국 연합국이 승리했습니다.
말의 힘을 보여주는 역사의 한 장면입니다.
야고보도 이런 얘기를 해 주면 뭔가 솔깃할 것 같은데,
그런데, 야고보는 말을 잘하면 성공한다거나,
말을 잘하는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혀는 누구도 길들일 수 없는 지체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의 강조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말을 잘하면 성공하기 때문에,
최선으로 노력하여 말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단지, 누구도 혀를 통제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려 노력합니다.
혀를 통제하기 위해 모든 지혜와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도적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 여러분이 말에 대한 복음적인 관점을 갖게 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의 첫 번째 관심은 선생들에게 있습니다.
선생이라 할 때 야고보의 마음 속에는 랍비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랍비는 공동체에서 가장 존경 받는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랍비는 재해나 전쟁이 났을 때 가장 먼저 구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랍비의 말은 누구나 경청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과도할 정도로 존경을 받던 랍비에 대한 전통이 교회에서도 이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잘못된 동기로 선생이 되려 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고보는 교회에게,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숫자를 말하는 겁니다.
남을 가르치려는 마음을 많이 갖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될 수도 있지만,
문자적으로 선생의 숫자가 많은 것을 뜻합니다.
너도 나도 가르치는 사람이 되려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선생은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말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기 마련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비판이 자유로운 세상에서는,
말을 많이 해야 하는 목사들의 말실수가 이슈가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미 목사들은 자기 말에 대한 심판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목사나 교사들만 말에 실수가 많은 건 아닙니다.
사람들은 거의 모두 말에 있어서 실패합니다.
자기가 한 말 때문에 후회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야고보의 말은 말에 있어서 실수가 없게 해서 온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만일 말에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온 몸도 통제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지만,
누구도 그럴 수 없다는 겁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네 가지 비유를 듭니다.
우선 두 가지 비유는 혀가 작지만 아주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는 걸 빗대기 위해,
재갈과 키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가지 비유는 혀의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힘을 빗대기 위해,
불과 길들여지지 않는 동물에 비유합니다.
먼저, 혀는 말의 재갈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말을 통제하기 위해 재갈을 사용했습니다.
말의 길죽한 입에는 어금니와 앞니 사이에 이가 없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에 고삐를 당기면 혀에 자극을 줄 수 있는 쇠붙이를 걸어서,
기수가 고삐로 말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쇠붙이지만,
사람보다 큰 말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큰 힘을 가졌습니다.
둘째로, 혀는 배의 키와 같습니다.
큰 배라도 조타수가 방향타를 돌리면 배 아래에 있는 키가 움직이면서 배의 방향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배에서 키는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배 전체의 진로를 결정하는 힘이 있습니다.
말의 재갈이나 배의 키나 모두 작지만 전체를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혀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직 혀의 부정적인 힘을 강조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두 가지 비유는 혀가 얼마나 파괴적인 힘을 가졌는지 보여줍니다.
야고보는 먼저, 혀는 불이라고 합니다.
작은 불씨로 시작된 불이 커다란 건물을 태우고,
엄청난 넓이의 숲을 까맣게 태워버립니다.
6절은 좀 어려운 표현들이 나와서 같이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이 구절에서 특히 어려운 표현은 “불의의 세계라”와 “삶의 수레바퀴”입니다.
“불의의 세계”라는 말은 혀는 불의가 집중된 지체라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혀로는 거의 모든 악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손이나 발이 표현할 수 없는 악을 혀로는 할 수 있습니다.
단지 표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은 태우는 불처럼 파괴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는 말은 우리 삶의 반복되는 전 과정에 파괴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혀의 악한 영향력은 우리 인격 전체를 더럽힙니다.
혀에는 마치 지옥과 파이프 라인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지옥의 가스관으로부터 악한 가스를 공급받아
우리의 인격과 삶을 불사른다는 것입니다.
지옥은 끊임 없이 타는 불입니다.
혀도 꺼지지 않는 불처럼 그 악을 생산해 내며 인생들을 파괴하는 일을 쉬지 않습니다.
혀의 부정적인 영향력에 대한 두 번째 비유는 혀가 길들일 수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야고보는 짐승이든 새든 파충류든 바다의 생물이든 인간이 길들일 수 있고 또 길들여 왔다고 합니다.
물론 이 말은 과장법일 겁니다.
상황과 환경만 주어진다면 그럴 수 있다는 얘기겠지요.
하지만, 어떤 사람도 혀는 길들일 수 없다고 합니다.
자기 혀든 남의 혀든 길들일 수가 없습니다.
저도 어릴 때 제 혀가 제 의지와는 상관 없이 마구 날뛰던 때가 있었습니다.
한 일 년 정도 욕을 심하게 했던 걸 기억합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습니다.
한 일 년 정도 욕을 하고는 더 이상 욕을 하지 않게 되었는데,
별다른 이유 없이 욕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야고보는 이 혀를 쉬지 않고 뛰어 다니면서 공격하고 찢고 죽이며,
전갈이나 뱀처럼 무시무시한 독이 가득한 동물에 비유합니다.
혀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극에 달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가장 끔찍할 수도 있는 설명이 남아 있습니다.
혀는 하나님이 만드신 다른 피조물들과는 다르게,
독특한 모순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단물을 내는 샘은 단물만 내고,
쓴 물을 내는 샘은 쓴 물만 냅니다.
한 샘에서 마시기 좋은 물과 쓴 물을 동시에 낼 수는 없습니다.
무화과 나무에서 올리브가 열릴 수 없고,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낼 수 없듯이,
쓴 맛이 가득한 소금 물이 신선한 단물을 낼 수는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셨지만 그것은 기적일 뿐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입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말이 함께 나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그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을 향한 욕설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욕설은 다른 말로 하면,
신성모독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이러한 모순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마귀는 사람들을 저주하지만,
동시에 찬양과 저주를 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인간의 입에서만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온다는 겁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혀에 대한 고찰을 끝내 버립니다.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여운을 남기고 끝을 맺습니다.
단지, 10절에서 단 한 마디 꾸짖음을 합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혀가 이렇게 모순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리스도인들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혀를 찬송과 축복의 도구로 사용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알면서도 완벽하게 지킬 수가 없습니다.
혀는 누구도 길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혀에 대한 야고보의 가르침이 여기서 끝나버린다면,
우리는 이 모순된 혀 때문에 실망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감사하게도, 야고보는 4장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4장 6절부터 10절에 보면, 야고보는 겸손이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혀를 사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겸손은 어떤 것일까요?
주님은 정결법에 따라 음식법을 지키는데 집중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마 15:11)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바로 혀의 악한 영향력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혀가 생산해 내는 그 악한 영향력이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18절)
우리는 먼저,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죄와 악함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계속 스스로 말을 잘 해 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남보다 좀 낫게 말하는 자신을 보며 흡족할 때도 있고,
또 실수를 하고 잘 못 말할 때는 자신에게 심히 실망하는 동시에,
그렇게 말하게 만든 사람들을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먼저 자신의 마음이 죄로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언어생활을 거룩하게 하는 실재적인 변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죄악을 깊이 인정하면 인정할수록 여러분의 혀는 부드러워 질 것입니다.
성경 속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모두 그랬습니다.
한 사람의 거룩함은 자신의 죄의 깊이를 깨닫는 정도에 비례합니다.
이사야는 보좌에 앉으신 만군의 여호와의 환상을 보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고,
후에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닙니다.
교회를 핍박했던 자신의 죄의 실상과,
그토록 위대한 사도의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오염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죄의 오염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보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혀는 계속해서 교만한 말들을 쏟아 낼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스스로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여기지 않고,
여러분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들의 죄보다 더 생생하고 깊이 자각할 때,
여러분의 혀는 겸손한 말들을 내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혀를 제어할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혀를 통제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을 믿고,
끊임 없이 여러분의 말에 대한 은혜를 구하십시오.
여러분의 말이 달라질 때까지 계속 구하십시오.
말은 단순히 단어 몇 개 바뀐다고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말의 근원인 마음이 은혜로 감화를 받아야 바뀌게 됩니다.
여러분의 입술이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입술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성령을 읽으며 진리의 밝은 빛과 은혜의 열을 구하십시오.
진리로 총명해지고 사랑으로 따뜻해진 말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신앙의 길에 별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기쁨을 여러분의 언어 생활에서 누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는 말하는 데 있어서 큰 자유를 누립니다.
거룩한 지식과 자녀된 기쁨으로 자녀가 집 안에서 부모와 형제 자매와 자유롭고 평안하게 말하듯이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쓴 경건한 글들을 읽고 그들의 생각과 말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꼭 읽어 보실 것을 추천합니다.
선한용 목사님이 번역하시고,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출판한 “성어거스틴의 고백록”이라는 책의 번역을 추천합니다.
자신의 죄와 방황과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사랑을 기도의 형식에 담아 고백하는 글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의 정직한 자기 이해와 고백과 찬양과 감사와 사랑의 언어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첫째, 여러분의 마음 속의 죄악을 깊이 인정하고,
둘째, 여러분의 입술의 열매를 위해 항상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셋째, 고백록과 같은 경건한 선배들의 책을 읽으며 그들의 생각과 말을 배워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이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사람들을 향한 축복으로 가득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years ago (edited) | [Y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