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이 말씀에서 영감을 받아, 예수님이신 생명의 떡을 바쁜 현대인들에게
한 조각의 말씀으로 전하며 영혼에 쉼과 힘을 더하고자 합니다.”


떡한조각

우리는 종종 이런 의문을 품게 됩니다. "왜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갈등이 있을까?"
그 뿌리는 각자가 자신만의 '옳고 그름'의 기준을 가지게 된 것에서 시작됩니다.
원래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은 하나님만의 고유한 권한이었는데, 인간이 선악과를 먹으면서 상황이 달라졌죠.

재미있는 점은, 이것이 단순한 불순종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겁니다.
마치 법정에서 판사 한 명만이 최종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것처럼, 선악을 구분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하나님 한 분에게만 있어야 했습니다.

절대 기준인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떠나 타락한 우리는 절대 기준이 없기에 각자 다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가장 가까운 예로 부부 관계를 들 수 있습니다. 같은 상황을 두고도 남편은 "이건 문제야"라고 생각하는데 아내는 "전혀 문제될 게 없는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죠. 각자가 자신만의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다 보니 생기는 일입니다.
더 심각한 경우에는 완전히 가치관이 뒤집어질 수도 있습니다. 나쁜 것을 좋다고 하고, 좋은 것을 나쁘다고 하는 식으로요. 마치 흑백이 완전히 뒤바뀌는 것처럼요.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절대적인 기준을 알려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제자들이 배고파서 안식일에 밀 이삭을 따먹었을 때,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셨습니다. 형식적인 규칙보다는 사랑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보셨기 때문이죠.

결국 이 모든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이제 우리에 기준을 내려놓고,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에 우리로 돌아가 생명나무이신 예수님을 날마다 택하며
우리의 기준이 되어주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 모든 선악을 결정하고
사사기의 표현처럼 "각자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해 사랑의 영이신 성령님을 따라 살아야 겠습니다.

7 months ago | [YT] | 3

떡한조각

우리는 인생이라는 여정 속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목표를 찾아 헤맵니다.
마치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듯, 세상적인 '성공', '행복', '인정'이라는 이름의 목적지를 향해 달려갑니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또 다른 공허함을 마주하게 됩니다.

화려한 조명 아래 서 있는 수많은 연예인들을 보세요. 그들은 세상이 말하는 '성공'이라는 정상에올라, 명예와
돈과 권력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하지만 또 다시 공허감과 외로움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물질과 성공이 메워 줄 알았던 마음 속에 공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부터 영원을 사모하고 영원을 채워야만 채워 질 수 있게 설계하셨기에 영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으로 채울 때에만 목적지에 도달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우리의 손으로 인생이라는 배의 키를 움켜쥐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우리가 탄 배가 노아의 방주인지, 아니면 그저 우리 마음대로 조종하는 작은 보트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가 선장이 되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찾아야 할 진정한 평안은 예수님께 우리 인생의 운전대를 맡길 때 찾아옵니다.
그분이 우리의 항해사가 되실 때, 우리 믿는 자들의
여정은 결코 실패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단순한 운전자가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 여정의 "진정한 목적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삶에서 예수님은 시작이자 끝이며, 여정이자 목적지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 믿는 자들은 더 이상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찾던 그 길이기 때문입니다.

7 months ago (edited) | [YT]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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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그 본질을 찾아서

우리는 흔히 예배라고 하면 주일날 교회에 나와 찬양하고 말씀 듣고 축도 받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도 예배의 한 형태이지만,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궁극적인 예배는 무엇일까요?

예배라는 단어는 앵글로색슨어 'weorthscipe'에서 유래했습니다. '가치'(weorth)와 '신분'(scipe)이 합쳐진 이 단어는 '존경과 숭배를 받을 가치가 있는 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가치를 올려드리는 것'이 예배의 본질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24).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이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가 진정 무엇을 섬기며 살아가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주식투자, 부동산, 학벌, 경력, 자녀, 취미생활... 우리는 이런 것들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붓고 있습니까? 충격적이게도, 성경은 하나님보다 우리 마음속에 더 큰 가치를 두는 모든 것을 우상이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광의 배송사고'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이 엉뚱한 곳으로 배달되는 것이지요. 마치 101호에 가야 할 택배가 1001호로 잘못 배달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배송사고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입니다.

놀랍게도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죄'를 뜻하는 단어는 모두 '과녁에서 빗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이 다른 곳으로 빗나간 것, 그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런 영적 배송사고의 심각성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이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 크리스천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분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생각이 점점 더 어두워져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라기 선지자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말 1:7).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형식적이고 불성실한지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다시 로마서 12장 1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양이나 떡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그것도 죽은 제물이 아닌 '산 제물'로 말입니다. 우리의 영은 살아있되 육신의 욕망은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받으실 영적 예배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을 하다 보면 세금 신고 시 유혹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정직과 공의를 사랑하시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우리가 진실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때 금전적 손해를 감수하고도 정직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에 누군가의 찬양이나 높임이 필요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분은 우리의 예배를 받기 원하십니다. 마치 신랑이 신부의 사랑고백을 듣고 싶어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더욱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에 있어 매우 질투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출 34:14). 이것은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줍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주시기까지 한 그 사랑의 크기를 생각해보십시오.

이제 우리의 예배를 돌아볼 때입니다.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예배가 아닌, 우리의 전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한 합당한 응답일 것입니다.

8 months ago | [YT] | 3

떡한조각

복음 이해의 다양성

우리는 모두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각자가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은 매우 다양합니다. 이러한 다양성은 때로는 복음의 본질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1, 일차원적 복음 이해의 한계

많은 이들이 복음을 단순히 십자가에서의 대속적 제사로만 이해하려 합니다. 이는 마치 5일간의 사막 여정을 앞둔 사람이 자동차를 얻게 된 기쁨에 사로잡혀, 정작 중요한 브레이크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파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복음의 한 측면만을 강조하다 보면 신앙생활의 온전한 모습을 놓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십자가

십자가 사건은 단순히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연합하시려는 위대한 계획의 첫 단계였습니다.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리라"는 말씀이 이를 암시합니다. 불의한 인간이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의로운 처소가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3, 성령의 내주하심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성령님을 우리 안에 모시기 위한 정결케 하심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했듯이, 성령 없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육체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 마음에 새겨져 예수님처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4, 부활의 소망

그러나 복음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사망을 이긴 사건이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주는 증거입니다. 그분은 첫 열매로서 우리의 부활을 보증하셨습니다.

복음의 온전한 그림

진정한 복음의 완성은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십자가의 구속, 성령의 내주하심, 그리고 부활의 소망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복음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큰 그림을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교리적 이해를 넘어, 우리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생명력 있는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가 그분과 온전히 연합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8 months ago | [Y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