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에 대한 염려가 선한 동기를 가로막을 때가 많다. 가령 구제의 동기를 결핍에 시달릴 결말의 염려가 자주 가로막는 것처럼, 실제로도 염려대로의 결말이 일어나는 일은 매우 흔하기에 이는 어쩔 수 없다. 그 아무리 선한 동기여도 실행함에 여러가지를 따져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잊지 말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바쳐 드리는 열매의 대부분이 '선한 동기의 실행' 에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지에 도움을 받아 선한 동기를, 동기로만 두지 않고 실행함은 분명 그분께 접붙인 자들이 맺는 열매인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본다면 우리로부터 맺혀질 열매는 그 얼마나 무수한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품은 선한 동기의 수가 전부, 열매로 맺힐 수 있는 가능성의 수이다.
그러니 결말의 염려보다 열매가 될 선한 동기를 바라보며 주 안에서 담대함을 내자, 결말은 영원까지를 미리 바라보시며 최후의 선을 이루고자 계획대로 주실 하나님의 선한 경륜에 감사함으로 맡기우자!
돌의 너무 심히 모난 부분은 흐르는 물에 두어 그 세류에 다듬으려다간 소요의 시간이 한이 없으며 잘 다듬어지지도 않는다. 다른 부분들과 다른 더 중한 재질이기에 지금껏 모나게 남아온 탓이다. 또 오랜 시간 세류에 맡겼다간 모나지 않은 부분들도 함께 갈아 상실되게 할테다.
이에 되려 세월의 낭비없이 또 안전히 모난 곳만 쳐내기 위해서는 쇠와 정을 대야만 한다. 엄한 곳을 치지 않고자 단단히 고정시키고서 말이다.
하나님의 경륜도 그러한 것 같다. 우리의 현생은 짧기에 낭비되지 않아야 하고, 심히 모난 곳들은 당신의 선한 일들에 쓰임 받기에는 적절치 않고, 이에 하나님도 쇠와 정을 대셔야 한다. 옴짝달싹 피하지 못하게 우리를 결박한 상황으로써
그리고 그 결박에 묶여 대처도 회피도 못하고 맞은 쇠와 정은 심히 아프고 당혹스럽다. 원망스럽기도하다. 아버지가 자녀를 이렇게까지 대하시나 싶어서,
허나 그럼에도 이 상황이 진실로 쇠와 정이라면, 이보다 더 세심하고 자애로운 경륜이 또 없다. 이로써 나는 생애 그 어느 때보다 내 모남을 극히 경계하여 새겨뒀을 것이며, 더욱 그분의 선한 역사에 쓰임받기 좋은 모양새로 다듬어져 있을 터이니 말이다.
눅12:25 - 26.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키는 내게 속했으나 내가 원하는대로 통제할 수 없는 대표적인 것으로써, 내 몸도 내 맘대로 못 다루는 우리가 그 얼마나 능없고 연약한 존재인지 잘 보여준다. 헌데 내게 속한 것도 그렇다면, 그 바깥의 것은 오죽이나 더하겠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안부터 밖까지 모든 것들을 과도히 염려한다. 그 모든 것들이 내 의도대로 되지 않을까봐, 내 통제를 벗어나 잔인하게 나를 헐벗길까봐
그리고 이가 바로, 나의 연약함을 잊음으로 나타나는 그 과도한 염려이다. 내가 나 하나도 온전히 통제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잊었기에 나타나는 염려, 또는 통제에 실패한 내가 연약한 이로 전락(?)해 드러날 것에 대한 염려, 염려 이전부터 본디 나는 연약한 존재건만!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염려 중 많은 부분이 내 존재를 잊어서 하게 된 과도한 것임을 일깨우고자 말씀하신다. "너는 네 키도 통제할 수 없는 존재잖니"
그리고 비로소 내 연약한 존재를 깨달은 우리는 찾고 의뢰케 된다. 예수님이 소개하시는 '나의 하나님, 아버지' 를
눅12:28,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사실 연약함 그 자체는 타락의 특성이 아니다. 이에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연약함을 우리는 죄스럽다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연약함이 죄에 사로잡힌 도구가 될 때, 타락의 특성처럼 죄스럽게 곡해될 뿐이다. 오히려 연약함은 선의 도구가 된다면, 능력의 하나님을 찾아 아버지 되심을 의뢰할 주요한 동기가 되며, 또 그만큼의 안심과 평안을 누리게 한다.
그래서 우린 내 연약함을 잘 알고 인정해야 한다. 나의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과도한 염려와 통제를 내려놓으며
우리가 선망하는 하나님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구현하고자 해도 결코 그 수준과 차원에는 다다를 수가 없어 ‘관념들로만 서술될 수 있는’ 지점에 있고, 우리는 그 관념들을 알아가고 이해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선망이 더욱 자라나고 깊어져 가게 된다. 그 선망함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이다.
이는 성경 말씀을 보며,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의 서술에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가슴이 터질듯한 사랑을 느껴보았던 이라면 무슨 의미인지 잘 알 것이다. 그리고 그 선망의 사랑으로 인해, 또한 부족할지언정 우리는 그와 같은 존재로서의 나를 도모케 된다.
곧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관념을 앎과 이해함에서 많은 부분 시작되고, 선망으로 깊어 지며, 그 선망은 행함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에 관해서는 깨지지 않는 일률의 도와도 같다. 앞서도 서술했듯,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은 많은 부분 관념적이기에,
그런데 어찌 앎을, 묵상을 등한시 하겠는가?, 이를 등한시하면, 관념의 영역에서 서술된 하나님을 어찌 발견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따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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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안에 읽는 신앙 고민(70) | <결말의 염려보다 열매가 될 동기를>
결말에 대한 염려가 선한 동기를 가로막을 때가 많다. 가령 구제의 동기를 결핍에 시달릴 결말의 염려가 자주 가로막는 것처럼, 실제로도 염려대로의 결말이 일어나는 일은 매우 흔하기에 이는 어쩔 수 없다. 그 아무리 선한 동기여도 실행함에 여러가지를 따져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잊지 말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바쳐 드리는 열매의 대부분이 '선한 동기의 실행' 에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지에 도움을 받아 선한 동기를, 동기로만 두지 않고 실행함은 분명 그분께 접붙인 자들이 맺는 열매인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본다면 우리로부터 맺혀질 열매는 그 얼마나 무수한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품은 선한 동기의 수가 전부, 열매로 맺힐 수 있는 가능성의 수이다.
그러니 결말의 염려보다 열매가 될 선한 동기를 바라보며 주 안에서 담대함을 내자, 결말은 영원까지를 미리 바라보시며 최후의 선을 이루고자 계획대로 주실 하나님의 선한 경륜에 감사함으로 맡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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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로 번지는 교회
3분 안에 읽는 신앙 고민(69) | <침묵 안에서 보는 믿음과 은혜>
때론 하나님의 침묵 때문에 은혜로 살아있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기에 우리는 더 크게 부르짖게 되고, 그 침묵 안에서 더 선명히 들려질 우리의 부르짖음은 보게 합니다.
끝까지 포기 않고 하나님을 붙들려는 내 믿음을, 하나님의 침묵을 무대로 더욱 생동하는 믿음을, 또 이로써 그 믿음을 살아있게 하는 은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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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안에 읽는 신앙 고민(68) | <가장 필요 없으나, 가장 필요한 메시아>
예수님은 율법을 통해 죄의 문제를 해소하거나 해소의 방책은 소유했다고 여기는, 그래서 죄에 대하여는 메시아가 필요치 않은 민족에게 오사, 결코 해소될 수 없는 절대적인 죄의 실상과 당신이 그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메시아 임을 역설하셨다.
곧 당시 일어난 소요와는 별개로, 해당 민족의 기존 인식상에서 '죄의 메시아인 예수님' 은 가장 필요없었으나, 그럼에도 가장 필요한 메시아로서 자신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성경이 설명하는 예수님은, 현대의 사람들이 죄의 문제를 절대적 주제로 여기지 않는 배경 위에서 더욱이나 불필요해졌다.
허나 그럼에도 우리가 이를 외면할 수 있는가?, 우리는 안다. 아무리 세상이 불필요하다 해도 누구에게나 가장 필요하신 분이 죄의 메시아인 예수님 임을, 그래서 세상이 흥미를 갖지 않고 또 외면할 것을 알면서도 설명하고 전해야 하건만;;
이에, 근래 몇몇 새신자 교육 교재를 살피다. 하나님 나라로의 초대를 강조하나 그와 상대적으로 죄의 문제를 빈약히 다룬 한 경우를 보고, 그 의도는 이해가 갔으나, 예수님의 자기 선포와는 다른 결 같아 큰 아쉬움이 들었다.
예수님은 당대의 그때부터 항시 죄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려는 분이였고, 이는 곧 오늘 우리도 당신의 초대를 받아, 당신과 함께 먹고 마시기 위해, 진지하게 나와 우리의 죄의 문제를 선 이해할 것을 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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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로 번지는 교회
3분 안에 읽는 신앙 고민(67) | <혼재하지만, 결국 다른 나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메시아에 의해 가이사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길 바랐던 이들에게, 이는 그 얼마나 명확한 구분을 지어주는가?, 두 나라는 결국엔 하나일 수 없는, 세금의 취수가 다른 구별된 나라라고!
이에 그 아무리 현재까지는 둘 사이가 혼재한 듯 보여도, 그래서 가이사의 나라를 휘어 잡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는 시도들이 있다지만, 이 시도들은 결국 어리석게 드러날 것이다.
두 나라는 하나가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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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로 번지는 교회
25.12.18 근황 |
#진리로번지는교회를세우기위한
#성인대상취미미술교습소
#흑백소묘전문
이번 주간부터 소묘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세우게 될 교회는 평일간에는 그 건물이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취미미술교습소를 겸하고자 하거든요. 이를 준비하기위해 13년 만에 연필을 다시 잡았습니다.
이 교습소가 교회의 운영을 유지하는데에, 또 세상과의 접점을 만드는 데에 잘 소용됐으면 합니다.
손이 너무 굳어서 힘드네요, 헌데 아주 오랜만에 그리니, 고정관념이 다 깨져 있어서, 한편으로는 재밌네요^^
2 days ago | [YT]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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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로 번지는 교회
3분 안에 읽는 신앙 고민(66) | <쇠와 정을 대시는 경륜>
돌의 너무 심히 모난 부분은 흐르는 물에 두어 그 세류에 다듬으려다간 소요의 시간이 한이 없으며 잘 다듬어지지도 않는다. 다른 부분들과 다른 더 중한 재질이기에 지금껏 모나게 남아온 탓이다. 또 오랜 시간 세류에 맡겼다간 모나지 않은 부분들도 함께 갈아 상실되게 할테다.
이에 되려 세월의 낭비없이 또 안전히 모난 곳만 쳐내기 위해서는 쇠와 정을 대야만 한다. 엄한 곳을 치지 않고자 단단히 고정시키고서 말이다.
하나님의 경륜도 그러한 것 같다. 우리의 현생은 짧기에 낭비되지 않아야 하고, 심히 모난 곳들은 당신의 선한 일들에 쓰임 받기에는 적절치 않고, 이에 하나님도 쇠와 정을 대셔야 한다. 옴짝달싹 피하지 못하게 우리를 결박한 상황으로써
그리고 그 결박에 묶여 대처도 회피도 못하고 맞은 쇠와 정은 심히 아프고 당혹스럽다. 원망스럽기도하다. 아버지가 자녀를 이렇게까지 대하시나 싶어서,
허나 그럼에도 이 상황이 진실로 쇠와 정이라면, 이보다 더 세심하고 자애로운 경륜이 또 없다. 이로써 나는 생애 그 어느 때보다 내 모남을 극히 경계하여 새겨뒀을 것이며, 더욱 그분의 선한 역사에 쓰임받기 좋은 모양새로 다듬어져 있을 터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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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로 번지는 교회
3분 안에 읽는 신앙 고민(65) | <키도 통제 못하는 과도한 염려자에게>
눅12:25 - 26.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키는 내게 속했으나 내가 원하는대로 통제할 수 없는 대표적인 것으로써, 내 몸도 내 맘대로 못 다루는 우리가 그 얼마나 능없고 연약한 존재인지 잘 보여준다. 헌데 내게 속한 것도 그렇다면, 그 바깥의 것은 오죽이나 더하겠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안부터 밖까지 모든 것들을 과도히 염려한다. 그 모든 것들이 내 의도대로 되지 않을까봐, 내 통제를 벗어나 잔인하게 나를 헐벗길까봐
그리고 이가 바로, 나의 연약함을 잊음으로 나타나는 그 과도한 염려이다. 내가 나 하나도 온전히 통제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잊었기에 나타나는 염려, 또는 통제에 실패한 내가 연약한 이로 전락(?)해 드러날 것에 대한 염려, 염려 이전부터 본디 나는 연약한 존재건만!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염려 중 많은 부분이 내 존재를 잊어서 하게 된 과도한 것임을 일깨우고자 말씀하신다. "너는 네 키도 통제할 수 없는 존재잖니"
그리고 비로소 내 연약한 존재를 깨달은 우리는 찾고 의뢰케 된다. 예수님이 소개하시는 '나의 하나님, 아버지' 를
눅12:28,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사실 연약함 그 자체는 타락의 특성이 아니다. 이에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연약함을 우리는 죄스럽다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연약함이 죄에 사로잡힌 도구가 될 때, 타락의 특성처럼 죄스럽게 곡해될 뿐이다. 오히려 연약함은 선의 도구가 된다면, 능력의 하나님을 찾아 아버지 되심을 의뢰할 주요한 동기가 되며, 또 그만큼의 안심과 평안을 누리게 한다.
그래서 우린 내 연약함을 잘 알고 인정해야 한다. 나의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과도한 염려와 통제를 내려놓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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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로 번지는 교회
3분 안에 읽는 신앙 고민(64) | <시대 정황을 반영한 성경을 따라>
갈라디아 교회 내 거짓교사들의 활동으로 할례 비할례 논쟁이 일고, 이로써 구원의 요건에 대해 논쟁하는 유대인 비유대인 양 진영을 위시한 분열과 갈등이 심화되자,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오직 한 구원을 붙들 것을 역설하였고
동시에 이런 행악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할거라는 강력한 경고로써, 서로 갈등 중인 두 진영 모두가 기존에 동의하고 있었던 죄악들의 항목에, 교회 공동체 분열 조장의 죄악들을 같은 선상에 추가한다.
갈5:20.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 과
당시 교회의 상황을 반영하여, '새롭게 등장한 악' 을 두 진영 모두에 깨우쳐 극히 경계시키고자 한 것인데,
이를 보며, 물론 당연하게도 성경의 내용을 이 시대에 새로 덧붙일 수야 없지만, 그럼에도 마주한 시대의 '새로운 정황' 을 반영한 흔적이 뚜렷한 성경의 저작 의도를 따라,
오늘날 우리도 최소한 그 적용만큼은 현 시대의 새로운 정황을 반영하는데, 더욱더 열리고 폭 넓어져야 하지 않나 싶다.
너무 과도히 문자적 의미에만 매여 시대를 아우르지 못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우리로인해 퇴색되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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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로 번지는 교회
3분 안에 읽는 신앙 고민(63) | <우리의 순전한 빛깔>
빛은 빨강 초록 파랑 삼원색이 섞여 되려 흰색 빛이 된다. 그리고 우리의 순전함도 바로 이런 빛의 경우와 같지 않을까 싶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된 우리를 이리 가운데로 양을 보냄과 같다 하셨고, 이는 이미지 적으로 환원할 때, 이리와 같은 세상의 갖가지 색에 맞부딪혀 채색 될 일들이 있음을 전제한다.
곧 우리는 아무 색도 묻히지 않을 차폐의 장소로 파송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 색도 묻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색도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순전함은 빛과도 같아서 빨강 초록 파랑, 세상이 자신의 빛깔로 물들이고자 묻혀댐에도, 그 색들을 순전함의 흰 빛으로 산출해낸다. 때로는 단호함으로 때로는 지혜로이 소용함으로 때로는 의를 위해 품음으로,
그리고 그렇게 흰 빛으로 드러난 우리는 마치 아무 빛깔도 섞지 않은 듯 순전하게 보여진다. 실상 그 모든 빛깔을 소화한 우리건만, 그럼에도 거룩의 빛깔로 드러난 것이다.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섞지 않은)"
3 days ago (edited) | [YT]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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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로 번지는 교회
3분 안에 읽는 신앙 고민(62) | <관념의 주 사랑>
우리가 선망하는 하나님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구현하고자 해도 결코 그 수준과 차원에는 다다를 수가 없어 ‘관념들로만 서술될 수 있는’ 지점에 있고, 우리는 그 관념들을 알아가고 이해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선망이 더욱 자라나고 깊어져 가게 된다. 그 선망함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이다.
이는 성경 말씀을 보며,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의 서술에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가슴이 터질듯한 사랑을 느껴보았던 이라면 무슨 의미인지 잘 알 것이다. 그리고 그 선망의 사랑으로 인해, 또한 부족할지언정 우리는 그와 같은 존재로서의 나를 도모케 된다.
곧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관념을 앎과 이해함에서 많은 부분 시작되고, 선망으로 깊어 지며, 그 선망은 행함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에 관해서는 깨지지 않는 일률의 도와도 같다. 앞서도 서술했듯,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은 많은 부분 관념적이기에,
그런데 어찌 앎을, 묵상을 등한시 하겠는가?, 이를 등한시하면, 관념의 영역에서 서술된 하나님을 어찌 발견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따를 수 있겠는가?
3 days ago (edited) | [YT]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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