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을 일구다 보면 자주 손에 잡히는 것이 있다. 새순이 올라올 흙 속에서 불쑥 고개를 내미는 비닐 조각, 썩지 않은 비료 포대, 플라스틱 끈. 텃밭 농사를 짓고 있는 나는, 예전에 이곳을 일구었던 누군가가 남긴 흔적을 매일같이 파내며 농사를 시작한다. 땅은 그 모든 것을 묵묵히 품고 있지만, 그것은 생명을 돕는 유산이 아니라 방해하는 잔해다.
이 땅을 일구었던 사람들 손에서 왜 이런 것들이 남겨졌을까? 열심히 농사짓던 그 손은 왜, 떠날 땐 땅을 이렇게 두고 갔을까?
그리고 바다가 떠오른다. 바다 쓰레기의 상당수가 수산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업이라는 생업을 통해 바다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바다를 오염시키는 주체이기도 하다는 사실. 그 사실은 내 마음을 오래 불편하게 했다.
그리고 이 불편함은 나의 일터인 학교에서도 반복된다.
교육은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는 환경이 오히려 어른들로 인해 위태로워지는 모습을 자주 본다.
교사인 나는 때때로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과 행동이, 진짜 아이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내 편의나 감정, 혹은 익숙한 관성에 기댄 것인지. 윤리적 경계가 무너진 채 아이들을 대하는 어른들을 보면, 그들이 교육의 현장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학부모 역시 다르지 않다. 아이를 위한다는 이름으로 교육 전체를 흔드는 무리한 요구, 학교를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삼아 쏟아지는 민원들. 그 모든 순간이 학생들의 성장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우리 어른들은 알아야한다.
교사를 위협하는 학부모 민원, 그로인해 목숨을 잃어가는 교사들..
경제적 만족도를 얻지 못해 근무시간을 자발적으로 줄여가는 일부 교사들의 근무행태, 가르치는 학생앞에 부끄러울 뒷모습을 보이는 일부 비윤리적 교사들의 뉴스,
교육생태계를 망치는 일부 어른들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과 열심히 가르치고자 하는 교사들이 받는다.
텃밭이든, 바다든, 학교든, 그 모든 공간에는 ‘자라나는 무엇’이 있다. 그 공간에서 살아가고, 일하고, 영향을 끼치는 우리가 오히려 그 터전을 해치고 있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오늘도 텃밭에서 비닐 조각을 줍는다. 그건 단순한 쓰레기가 아니다. 이곳을 잠시 지나간 누군가의 무심함이자, 지금 이 자리를 살아가는 나의 책임이다.
그 책임은 교실에서도 다르지 않다. 아이의 눈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 수업을 준비하는 나의 마음가짐, 누군가의 민원을 대하는 태도까지, 모든 것이 아이들의 삶과 교육환경에 스며든다.
우리는 터전을 지키는 사람인가, 망치는 사람인가. 이 질문은 결코 남을 향한 비난이 아니라, 내가 매일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표다.
밭에 아무것도 심지 않으면 그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가만히 두면 어느새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난다. 이 사실은 사람의 마음이나 아이의 성장과 너무도 닮아 있다. 아이에게 아무것도 심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관심 속에서 자라는 것은 대체로 좋은 것이 아니다. 나쁜 습관, 부정적인 생각, 이기적인 태도 같은 것들이 어느새 그 마음을 채운다.
교육은 단지 지식을 전달하거나 행동을 교정하는 일을 넘어서, 아이의 마음밭에 어떤 씨앗을 심고 어떻게 자라나게 할지를 고민하는 과정이다. 훈육은 이미 자라버린 가시와 잡초를 뽑아내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단순히 ‘뽑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자리에 어떤 생각과 습관을 다시 심고, 얼마나 자주 돌보는지가 더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한들, 그것이 아이 안에 뿌리내리려면 반복적인 관심과 일관된 태도가 필요하다.
때로는 ‘별일 아니겠지’ 싶은 행동도, 사실은 이미 마음밭에 자라기 시작한 잡초일 수 있다. 그냥 두면 괜찮아질 거라는 기대는, 어쩌면 방치에 가까운 태도일 수 있다. 교육은 기다림이 필요하지만, 그 기다림은 결코 손 놓고 있는 시간이 아니다. 매일의 관찰과 대화, 조용한 개입과 따뜻한 시선이 쌓여 아이의 마음을 키운다.
잡초는 뽑아냈다고 끝이 아니다. 비가 오고 햇살이 들면 다시 자란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하루하루의 훈육과 교육이 반복되어야 아이 안에 건강한 생각과 행동이 자리를 잡는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
이 문장을 곱씹다 보면, 아이들의 성장에도 어딘가 비슷한 결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들에겐 공통되고 비슷한 조건들이 있다. 무조건적 애정, 일관된 양육, 안정된 환경, 그리고 아이가 자신의 속도로 자랄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어른이 곁에 있다는 것. 이런 토대 위에 자란 아이는 대체로 단단하고 따뜻하다. 그들의 눈빛엔 안정이 있고, 마음엔 여유가 있다. 비슷한 울타리 속에서 자란 아이들, 그 모습은 참 닮아있다.
하지만 반대로,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아이들의 사정은 참 복잡하고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자주 옮겨 다니는 집과 학교에 지쳐 마음 둘 곳이 없고, 또 누군가는 눈치 속에서 자라며 스스로 작게 만든다. 어떤 아이는 과잉보호로 인해 스스로 선택해 본 경험이 없고, 또 어떤 아이는 아예 돌봄의 손길 없이 방치된 채 외롭게 자란다. 같은 또래인데도, 저마다의 사연이 다르고, 그 무게 또한 서로 다르다. 불안의 모양도 다르고, 상처의 깊이도 제각각이다.
그래서일까. 삐뚤어진 듯 보이는 아이들의 행동을 마주할 때면, '왜 저럴까?' 대신 '무슨 일이 있었을까?'를 떠올려야 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 뒤에는, 우리가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사정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성장은 단순한 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그 아이가 어떤 울타리에서 자라고 있는가, 그 울타리가 얼마나 따뜻하고 안정적인가 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울타리를 조금 더 단단하게, 조금 더 넉넉하게 만들어주는 것 아닐까.
그리고 나는 요즘 ‘울타리’라는 말에 자주 마음이 머문다. 아이의 성장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종종 울타리를 ‘지켜줘야 할 것’으로만 생각한다.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낯선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고, 어린 존재를 안전하게 감싸주는 공간으로서의 울타리.
그런데, 울타리도 그 크기가 문제다. 너무 좁은 울타리는 아이의 숨을 막는다.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없고, 도전할 수 있는 여백이 없고, 부모의 기준과 기대 안에서만 살아가야 할 때 아이는 비록 ‘안전’ 속에 있는 듯 보여도 자신이 누구인지 탐색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반대로 울타리가 너무 넓어지면 아이들은 어디까지가 자신의 영역인지, 어디서부터 조심해야 하는지 감각을 잃게 된다. 관심 없는 방임은 아이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게 만드는 ‘혼란’을 준다. 가야 할 길을 모르고, 돌아올 곳도 느껴지지 않을 때 아이의 마음은 의외로 쉽게 지치고, 외로워진다.
그래서 나는 ‘울타리’는 그저 단단하기만 한 경계가 아니라, 아이의 나이와 성숙도에 따라 조절 가능한, 살아 있는 구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아주 가까운 곳에, 따뜻한 손길 안에 머무르게 하다가 점차 울타리의 반경을 넓혀주는 것. 실수할 수 있는 공간을 주고, 부딪히며 배워도 괜찮은 영역을 열어주는 것. 그러면서도, 아이가 길을 잃을 때 돌아올 수 있는 ‘기다림의 자리’로 울타리를 지켜주는 것.
그럴 때 아이는 조금씩 자기만의 속도로 세상을 배우고, 방향을 찾아가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게 된다. 단지 울타리 안에 있는 아이가 아니라, 울타리 바깥을 바라보며 그 경계를 스스로 확장해 나갈 수 있는 아이. 나는 그런 아이들이 결국엔 더 건강하게, 그리고 더 자유롭게 자란다고 믿는다.
문득 자전거를 처음 배웠던 기억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 처음 보조 바퀴를 떼고 자전거를 타게 되었을 때 아버지가 뒤에서 자전거를 붙잡고 함께 달려주셨다. 그 손이 내 자전거를 잡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무섭지 않았고, 넘어질 걱정도 덜했다. 그래서 힘차게 페달을 밟았고,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손이 이미 자전거에서 떨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부모는 어느새 몇 걸음 뒤에서 "잘하고 있어!" "괜찮아, 계속 가봐!" 그렇게 응원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놀라면서도 한 가지를 분명히 느꼈다. 비록 지금은 혼자지만, 그들이 나를 믿고 있다는 것, 내가 혼자서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준다는 것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었다는 것.
그때의 경험은 단순히 자전거를 배운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나 두려움 앞에 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어린 시절의 그 따뜻한 목소리, 그 박수 소리, 그 믿음의 기운이 마치 마음속에 깔린 ‘정서적 울타리’처럼 나를 붙잡아 준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있는 울타리. 세상이 아무리 거칠어도, 나를 응원해준 누군가의 마음이 지금도 내 안에 살아 있다는 사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아이 곁을 영원히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혼자서도 일어설 수 있도록 마음속에 울타리를 지어주는 일이라 생각한다. 손은 놓을지라도, 믿음은 놓지 않는 것. 곁을 물러서더라도, 사랑은 물러서지 않는 것. 그런 울타리가 한 사람의 삶을 지탱해주는 가장 든든한 힘이 되어줄 수 있다.
텃밭의 허브처럼, 아이의 향기로 가득한 세상이 가능할까? 나는 가끔 생각한다.
요즘 엄마들은 아이를 온실 속 화초처럼 키우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어디서 무슨 바람이 불어도 다칠까 봐, 작은 흙먼지 하나 묻을까 봐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통제하려 한다.
그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과연 아이는 그렇게 안전지대 속에서
스스로 뿌리내리고, 꽃 피우고, 향기를 퍼뜨릴 수 있을까?
며칠 전 텃밭에서 3년차 레몬밤을 보며 문득 떠올랐다.
황량한 겨울 추위를 이겨낸 작은 덩어리는
이내 땅속 깊이 단단히 뿌리를 뻗기 시작한다.
그리고 흙 위로 올라온 잎은 어느새 옆구리에 새싹을 틔워내며
상쾌한 레몬 향기를 뿜어낸다.
잡초는 내가 뽑아내도 또 자라고,
허브는 내가 애써 가꾸지 않아도 더 넓은 공간으로 퍼져나간다.
그 생명력은 스스로 겨울을 이겨내고,
비바람 속에서 몸으로 배운 덕분이다.
텃밭에서 허브를 바라볼 때마다
‘자기 자리를 지키며, 스스로 영역을 넓히는 힘’이
얼마나 귀한지 새삼 깨닫는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안전하지만 답답한 온실이 아니라,
찬바람 불고 폭우가 내리는 세상 속에서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자신만의 향기를 찾는 연습이 필요하다.
어른이 대신 막아주고, 대신 자라주고, 대신 향기를 퍼뜨려준다면
아이의 생명력은 어디서 길러질까.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온실을 단단히 둘러싸는 일이 아니다.
추운 겨울에도 흙 속에서 홀로 버티며 자라게 하는 일이고,
때로는 차가운 바람에 몸을 맡기고
때로는 스스로 햇빛을 찾아 고개를 드는 일이다. 그래서 언젠가 꽃을 피울 때, 그 향기가 더 오래도록
깊고 진하게 퍼져나갈 수 있는 것이다.
텃밭의 허브처럼,
자신의 뿌리로 땅을 깊이 품고
자기만의 향기를 스스로 피워내는 존재로 키우는 것—
그것이 진정한 양육의 태도가 아닐까. 아이들이 스스로 겨울을 이겨내고,
낯선 환경에 한 번씩 흔들리며 다시 땅을 붙잡는 경험을 통해
더 단단해지고, 더 넓은 곳으로 퍼져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한 번씩 흔들릴 수 있는 세상 속에서 아이들을 단단하게 붙잡아주는 땅이 되어야 하는 부모는 통제하고 대신 막아주는 역할이 아니라 잔잔하고 일관된 일상을 살아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안정되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면 된다. 그것이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역할일 것이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기다림' 식물을 키우다 보면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는 것이 있다. 햇볕을 쬐게 하고 물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식물이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그 자리를 지켜주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분을 자주 옮기거나, 분갈이를 자주 해주는 것이 정성을 다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변화가 반복되면 식물은 오히려 안정적으로 자라기 어렵다. 뿌리를 제대로 내릴 틈도 없이 흙이 달라지고, 햇빛의 방향이 바뀌고, 물주는 방식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새로운 교실, 처음 만나는 선생님, 낯선 친구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자신만의 균형을 찾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은 각자 다르다. 누구는 빠르게 적응하고, 누구는 조금 더 더디게 다가간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아이가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환경이 조용히 뒷받침해주는 일이다.
한 아이가 떠오른다. 우리 반에 눈물이 잦고,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던 학생이 있었다. 쉬는 시간에도 혼자 있는 일이 많았고, 작은 일에도 감정이 북받쳐 우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처음엔 성격이 예민한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그 아이는 짧은 시간에 여러 번 이사를 다닌 경험이 있었다.
부모님은 부동산을 통해 좋은 수익을 거두었다고 했다. 새 아파트를 사고팔며 계속해서 거주지를 옮겨왔고, 그에 따라 아이의 학교도, 생활환경도 자주 바뀌었다. 그 사이 아이는 한곳에 오래 머물며 친구를 사귀고, 선생님과 관계를 쌓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익숙해질 만하면 또 이사를 가야 했고, 친숙해질 무렵엔 또다시 낯선 곳에서 새로 시작해야 했다.
그 시간 동안 아이는 마음속에 뿌리를 내릴 틈이 없었던 것이다. 매번 처음처럼 시작해야 했고, 그것은 어린 마음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일이었다.
아이들은 어른이 결정한 삶의 구조 속에서 살아간다. 부모의 선택은 때로는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아이에게는 그 변화가 깊은 불안으로 다가올 수 있다. 특히 자주 바뀌는 주거 환경은 아이의 정서적 안정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안정된 환경에서 아이는 서서히 마음을 열고, 자신만의 속도로 성장해간다. 그 속도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그 자리를 지켜보는 어른이라면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일,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리는 일, 바로 그 기다림이 아이에게는 가장 든든한 지지이다.
교실에서 매일 아이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무언가를 ‘잘 해내는 것’보다 마음을 놓고 지낼 수 있는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자주 느끼게 된다. 아이들이 웃고, 이야기하고, 눈을 반짝이는 순간은 결국 그들이 안심하고 머무를 수 있는 공간에서 가능해진다. 처음으로 손을 들었을 때, 조용히 친구 곁에 앉았을 때,
그 모든 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의 결과인지 알기에
어른의 ‘조급함’이 얼마나 큰 방해가 될 수 있는지도 안다.
식물처럼, 아이도 흔들리지 않는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잘 자란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그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크게 무언가를 해주는 일이 아니라, 그저 지켜봐주고, 믿고 기다려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언젠가, 아이의 환한 웃음과 씩씩한 걸음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익숙한 말투 속에서 짜증이 묻어나거나, 무심히 던지는 행동에 불편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종종 ‘요즘 왜 이러지?’ 하고 의아해하지만, 그 뿌리는 어느샌가 자라난 작은 ‘습관’일지 모른다.
텃밭을 가꾸는 사람은 안다. 잡초는 처음엔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것을. 작물 사이사이에 조용히 자라다가, 어느 순간엔 뿌리를 깊게 내려 농작물의 생장을 방해한다. 아이의 나쁜 습관도 이와 닮았다. 사소해 보여도 그대로 두면 마음의 공간을 차지하고, 결국 아이의 성장을 가로막게 된다.
학교에서 교사가 아이의 문제 행동을 조심스럽게 부모에게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 말은 비판이 아니라, 아이를 위한 ‘함께 손잡자는 제안’이다. 부모가 그 손을 잡고 아이와 함께 방향을 다듬어 갈 때, 아이는 더욱 건강하고 단단하게 자라난다.
잡초는 초기에 뽑을수록 작물에 주는 피해가 적다. 아이의 습관도 마찬가지다. 시작점에서 살펴보는 것이 가장 깊은 배려이고, 가장 효과적인 교육이다.
‘지금은 괜찮아 보이지만 언젠가는...’ 하는 마음이 스쳤다면, 그 직감을 믿고 관심을 기울여 보자. 아이의 마음은 부모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더욱 곧고 단단하게 뻗어간다.
텃밭으로퇴근
[텃밭에서 떠오르는 교육철학]
7. 우리가 망치는 우리의 터전
텃밭을 일구다 보면 자주 손에 잡히는 것이 있다.
새순이 올라올 흙 속에서 불쑥 고개를 내미는 비닐 조각, 썩지 않은 비료 포대, 플라스틱 끈.
텃밭 농사를 짓고 있는 나는, 예전에 이곳을 일구었던 누군가가 남긴 흔적을 매일같이 파내며 농사를 시작한다.
땅은 그 모든 것을 묵묵히 품고 있지만, 그것은 생명을 돕는 유산이 아니라 방해하는 잔해다.
이 땅을 일구었던 사람들 손에서 왜 이런 것들이 남겨졌을까?
열심히 농사짓던 그 손은 왜, 떠날 땐 땅을 이렇게 두고 갔을까?
그리고 바다가 떠오른다.
바다 쓰레기의 상당수가 수산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업이라는 생업을 통해 바다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바다를 오염시키는 주체이기도 하다는 사실.
그 사실은 내 마음을 오래 불편하게 했다.
그리고 이 불편함은 나의 일터인 학교에서도 반복된다.
교육은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는 환경이 오히려 어른들로 인해 위태로워지는 모습을 자주 본다.
교사인 나는 때때로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과 행동이, 진짜 아이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내 편의나 감정, 혹은 익숙한 관성에 기댄 것인지.
윤리적 경계가 무너진 채 아이들을 대하는 어른들을 보면, 그들이 교육의 현장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학부모 역시 다르지 않다.
아이를 위한다는 이름으로 교육 전체를 흔드는 무리한 요구,
학교를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삼아 쏟아지는 민원들.
그 모든 순간이 학생들의 성장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우리 어른들은 알아야한다.
교사를 위협하는 학부모 민원, 그로인해 목숨을 잃어가는 교사들..
경제적 만족도를 얻지 못해 근무시간을 자발적으로 줄여가는 일부 교사들의 근무행태,
가르치는 학생앞에 부끄러울 뒷모습을 보이는 일부 비윤리적 교사들의 뉴스,
교육생태계를 망치는 일부 어른들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과 열심히 가르치고자 하는 교사들이 받는다.
텃밭이든, 바다든, 학교든,
그 모든 공간에는 ‘자라나는 무엇’이 있다.
그 공간에서 살아가고, 일하고, 영향을 끼치는 우리가
오히려 그 터전을 해치고 있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오늘도 텃밭에서 비닐 조각을 줍는다.
그건 단순한 쓰레기가 아니다.
이곳을 잠시 지나간 누군가의 무심함이자,
지금 이 자리를 살아가는 나의 책임이다.
그 책임은 교실에서도 다르지 않다.
아이의 눈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
수업을 준비하는 나의 마음가짐,
누군가의 민원을 대하는 태도까지,
모든 것이 아이들의 삶과 교육환경에 스며든다.
우리는 터전을 지키는 사람인가, 망치는 사람인가.
이 질문은 결코 남을 향한 비난이 아니라,
내가 매일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표다.
터전은 언젠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곳이니까.
3 months ago (edited) | [YT]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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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으로퇴근
[텃밭에서 떠오르는 교육철학]
6. 피어난 자리에서 묻는다.
텃밭을 일구다 보면 가끔 이런 실수를 한다.
햇볕이 잘 드는 줄 알고 골랐던 자리,
비옥한 흙이라고 믿고 심었던 곳이
시간이 지나고 보니 생각보다 그늘졌고
배수가 잘되지 않아 물러버리기도 한다.
애초에 위치를 잘못 고른 것이다.
그런데 이미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키운 작물은
옮기기 어렵다.
한참 자라는 중간에 뽑아 옮기면
뿌리가 상하고, 새 자리에 적응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그냥 두고 지켜본다.
그늘진 자리에서도
최선을 다해 열매를 맺으려 애쓰는 식물을 보면
미안하고 대견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진로든 직업이든
우리는 늘 완벽한 선택을 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상황에 이끌려,
혹은 스스로도 잘 몰라서
덜 익은 판단으로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기도 한다.
그렇게 선택한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다 보면
비록 처음 의도했던 모습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의 성과는 낼 수 있다.
꾸준히 성실하게 해내다 보면
그 분야에서 인정도 받고
가끔은 열매도 얻게 된다.
하지만
가끔 마음 한구석에서는
묻혀 있던 질문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여기가 정말 내가 있을 자리였을까?”
“내가 꽃피웠어야 할 곳은 다른 데가 아니었을까?”
텃밭의 작물처럼,
인간도 한 번 뿌리내린 뒤에는
새로운 자리로 옮기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
그 과정엔 상처도 따르고
시간도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도,
그늘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삶을
결코 헛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 자리에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열매를 맺을 수 있으니까.
다만
이제 막 씨앗을 뿌리려는 누군가가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햇볕은 어디서 가장 잘 드는지,
비가 오면 물이 어떻게 흐르는지,
먼저 천천히 둘러보라”고.
자리 하나가, 방향 하나가
앞으로의 삶을 얼마나 크게 바꿀 수 있는지를
텃밭은 조용히 가르쳐 준다.
4 months ago (edited) | [YT]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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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으로퇴근
[텃밭에서 떠오르는 교육철학]
5. 마음밭에 심는 씨앗
밭에 아무것도 심지 않으면 그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가만히 두면 어느새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난다. 이 사실은 사람의 마음이나 아이의 성장과 너무도 닮아 있다. 아이에게 아무것도 심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관심 속에서 자라는 것은 대체로 좋은 것이 아니다. 나쁜 습관, 부정적인 생각, 이기적인 태도 같은 것들이 어느새 그 마음을 채운다.
교육은 단지 지식을 전달하거나 행동을 교정하는 일을 넘어서, 아이의 마음밭에 어떤 씨앗을 심고 어떻게 자라나게 할지를 고민하는 과정이다. 훈육은 이미 자라버린 가시와 잡초를 뽑아내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단순히 ‘뽑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자리에 어떤 생각과 습관을 다시 심고, 얼마나 자주 돌보는지가 더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한들, 그것이 아이 안에 뿌리내리려면 반복적인 관심과 일관된 태도가 필요하다.
때로는 ‘별일 아니겠지’ 싶은 행동도, 사실은 이미 마음밭에 자라기 시작한 잡초일 수 있다. 그냥 두면 괜찮아질 거라는 기대는, 어쩌면 방치에 가까운 태도일 수 있다. 교육은 기다림이 필요하지만, 그 기다림은 결코 손 놓고 있는 시간이 아니다. 매일의 관찰과 대화, 조용한 개입과 따뜻한 시선이 쌓여 아이의 마음을 키운다.
잡초는 뽑아냈다고 끝이 아니다. 비가 오고 햇살이 들면 다시 자란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하루하루의 훈육과 교육이 반복되어야 아이 안에 건강한 생각과 행동이 자리를 잡는다.
오늘도 묻는다. “이 아이의 마음밭에 오늘 내가 심는 씨앗은 무엇인가?”
4 months ago | [YT]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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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으로퇴근
[텃밭에서 떠오르는 교육철학]
4. 울타리_건강한 성장에는 공통점이 있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
이 문장을 곱씹다 보면, 아이들의 성장에도 어딘가 비슷한 결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들에겐 공통되고 비슷한 조건들이 있다.
무조건적 애정, 일관된 양육, 안정된 환경, 그리고 아이가 자신의 속도로 자랄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어른이 곁에 있다는 것.
이런 토대 위에 자란 아이는 대체로 단단하고 따뜻하다.
그들의 눈빛엔 안정이 있고, 마음엔 여유가 있다.
비슷한 울타리 속에서 자란 아이들, 그 모습은 참 닮아있다.
하지만 반대로,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아이들의 사정은 참 복잡하고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자주 옮겨 다니는 집과 학교에 지쳐 마음 둘 곳이 없고,
또 누군가는 눈치 속에서 자라며 스스로 작게 만든다.
어떤 아이는 과잉보호로 인해 스스로 선택해 본 경험이 없고,
또 어떤 아이는 아예 돌봄의 손길 없이 방치된 채 외롭게 자란다.
같은 또래인데도, 저마다의 사연이 다르고, 그 무게 또한 서로 다르다.
불안의 모양도 다르고, 상처의 깊이도 제각각이다.
그래서일까.
삐뚤어진 듯 보이는 아이들의 행동을 마주할 때면,
'왜 저럴까?' 대신 '무슨 일이 있었을까?'를 떠올려야 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 뒤에는, 우리가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사정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성장은 단순한 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그 아이가 어떤 울타리에서 자라고 있는가,
그 울타리가 얼마나 따뜻하고 안정적인가 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울타리를 조금 더 단단하게,
조금 더 넉넉하게 만들어주는 것 아닐까.
그리고 나는 요즘 ‘울타리’라는 말에 자주 마음이 머문다.
아이의 성장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종종 울타리를 ‘지켜줘야 할 것’으로만 생각한다.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낯선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고,
어린 존재를 안전하게 감싸주는 공간으로서의 울타리.
그런데, 울타리도 그 크기가 문제다.
너무 좁은 울타리는 아이의 숨을 막는다.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없고, 도전할 수 있는 여백이 없고,
부모의 기준과 기대 안에서만 살아가야 할 때
아이는 비록 ‘안전’ 속에 있는 듯 보여도
자신이 누구인지 탐색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반대로 울타리가 너무 넓어지면
아이들은 어디까지가 자신의 영역인지, 어디서부터 조심해야 하는지
감각을 잃게 된다.
관심 없는 방임은 아이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게 만드는 ‘혼란’을 준다.
가야 할 길을 모르고, 돌아올 곳도 느껴지지 않을 때
아이의 마음은 의외로 쉽게 지치고, 외로워진다.
그래서 나는 ‘울타리’는 그저 단단하기만 한 경계가 아니라,
아이의 나이와 성숙도에 따라 조절 가능한, 살아 있는 구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아주 가까운 곳에, 따뜻한 손길 안에 머무르게 하다가
점차 울타리의 반경을 넓혀주는 것.
실수할 수 있는 공간을 주고, 부딪히며 배워도 괜찮은 영역을 열어주는 것.
그러면서도, 아이가 길을 잃을 때 돌아올 수 있는 ‘기다림의 자리’로 울타리를 지켜주는 것.
그럴 때 아이는 조금씩 자기만의 속도로 세상을 배우고, 방향을 찾아가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게 된다.
단지 울타리 안에 있는 아이가 아니라, 울타리 바깥을 바라보며
그 경계를 스스로 확장해 나갈 수 있는 아이.
나는 그런 아이들이 결국엔 더 건강하게, 그리고 더 자유롭게 자란다고 믿는다.
문득 자전거를 처음 배웠던 기억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 처음 보조 바퀴를 떼고 자전거를 타게 되었을 때
아버지가 뒤에서 자전거를 붙잡고 함께 달려주셨다.
그 손이 내 자전거를 잡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무섭지 않았고, 넘어질 걱정도 덜했다.
그래서 힘차게 페달을 밟았고,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손이 이미 자전거에서 떨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부모는 어느새 몇 걸음 뒤에서 "잘하고 있어!" "괜찮아, 계속 가봐!"
그렇게 응원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놀라면서도 한 가지를 분명히 느꼈다.
비록 지금은 혼자지만, 그들이 나를 믿고 있다는 것,
내가 혼자서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준다는 것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었다는 것.
그때의 경험은 단순히 자전거를 배운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나 두려움 앞에 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어린 시절의 그 따뜻한 목소리,
그 박수 소리, 그 믿음의 기운이
마치 마음속에 깔린 ‘정서적 울타리’처럼 나를 붙잡아 준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있는 울타리.
세상이 아무리 거칠어도, 나를 응원해준 누군가의 마음이
지금도 내 안에 살아 있다는 사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아이 곁을 영원히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혼자서도 일어설 수 있도록 마음속에 울타리를 지어주는 일이라 생각한다.
손은 놓을지라도, 믿음은 놓지 않는 것.
곁을 물러서더라도, 사랑은 물러서지 않는 것.
그런 울타리가 한 사람의 삶을 지탱해주는 가장 든든한 힘이 되어줄 수 있다.
8 months ago (edited) | [YT]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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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으로퇴근
[텃밭에서 떠오르는 교육철학]
3. 텃밭의 허브가 아이에게 전하는 마음
텃밭의 허브처럼, 아이의 향기로 가득한 세상이 가능할까?
나는 가끔 생각한다.
요즘 엄마들은 아이를 온실 속 화초처럼 키우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어디서 무슨 바람이 불어도 다칠까 봐, 작은 흙먼지 하나 묻을까 봐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통제하려 한다.
그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과연 아이는 그렇게 안전지대 속에서
스스로 뿌리내리고, 꽃 피우고, 향기를 퍼뜨릴 수 있을까?
며칠 전 텃밭에서 3년차 레몬밤을 보며 문득 떠올랐다.
황량한 겨울 추위를 이겨낸 작은 덩어리는
이내 땅속 깊이 단단히 뿌리를 뻗기 시작한다.
그리고 흙 위로 올라온 잎은 어느새 옆구리에 새싹을 틔워내며
상쾌한 레몬 향기를 뿜어낸다.
잡초는 내가 뽑아내도 또 자라고,
허브는 내가 애써 가꾸지 않아도 더 넓은 공간으로 퍼져나간다.
그 생명력은 스스로 겨울을 이겨내고,
비바람 속에서 몸으로 배운 덕분이다.
텃밭에서 허브를 바라볼 때마다
‘자기 자리를 지키며, 스스로 영역을 넓히는 힘’이
얼마나 귀한지 새삼 깨닫는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안전하지만 답답한 온실이 아니라,
찬바람 불고 폭우가 내리는 세상 속에서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자신만의 향기를 찾는 연습이 필요하다.
어른이 대신 막아주고, 대신 자라주고, 대신 향기를 퍼뜨려준다면
아이의 생명력은 어디서 길러질까.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온실을 단단히 둘러싸는 일이 아니다.
추운 겨울에도 흙 속에서 홀로 버티며 자라게 하는 일이고,
때로는 차가운 바람에 몸을 맡기고
때로는 스스로 햇빛을 찾아 고개를 드는 일이다.
그래서 언젠가 꽃을 피울 때, 그 향기가 더 오래도록
깊고 진하게 퍼져나갈 수 있는 것이다.
텃밭의 허브처럼,
자신의 뿌리로 땅을 깊이 품고
자기만의 향기를 스스로 피워내는 존재로 키우는 것—
그것이 진정한 양육의 태도가 아닐까.
아이들이 스스로 겨울을 이겨내고,
낯선 환경에 한 번씩 흔들리며 다시 땅을 붙잡는 경험을 통해
더 단단해지고, 더 넓은 곳으로 퍼져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한 번씩 흔들릴 수 있는 세상 속에서 아이들을 단단하게 붙잡아주는 땅이 되어야 하는 부모는
통제하고 대신 막아주는 역할이 아니라
잔잔하고 일관된 일상을 살아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안정되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면 된다.
그것이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역할일 것이다.
8 months ago (edited) | [YT]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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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으로퇴근
[텃밭에서 떠오르는 교육철학]
2. 뿌리를 내릴 시간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기다림'
식물을 키우다 보면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는 것이 있다.
햇볕을 쬐게 하고 물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식물이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그 자리를 지켜주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분을 자주 옮기거나, 분갈이를 자주 해주는 것이
정성을 다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변화가 반복되면
식물은 오히려 안정적으로 자라기 어렵다.
뿌리를 제대로 내릴 틈도 없이
흙이 달라지고, 햇빛의 방향이 바뀌고, 물주는 방식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새로운 교실, 처음 만나는 선생님, 낯선 친구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자신만의 균형을 찾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은 각자 다르다.
누구는 빠르게 적응하고, 누구는 조금 더 더디게 다가간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아이가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환경이 조용히 뒷받침해주는 일이다.
한 아이가 떠오른다.
우리 반에 눈물이 잦고,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던 학생이 있었다.
쉬는 시간에도 혼자 있는 일이 많았고,
작은 일에도 감정이 북받쳐 우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처음엔 성격이 예민한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그 아이는 짧은 시간에 여러 번 이사를 다닌 경험이 있었다.
부모님은 부동산을 통해 좋은 수익을 거두었다고 했다.
새 아파트를 사고팔며 계속해서 거주지를 옮겨왔고,
그에 따라 아이의 학교도, 생활환경도 자주 바뀌었다.
그 사이 아이는
한곳에 오래 머물며 친구를 사귀고, 선생님과 관계를 쌓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익숙해질 만하면 또 이사를 가야 했고,
친숙해질 무렵엔 또다시 낯선 곳에서 새로 시작해야 했다.
그 시간 동안 아이는 마음속에 뿌리를 내릴 틈이 없었던 것이다.
매번 처음처럼 시작해야 했고,
그것은 어린 마음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일이었다.
아이들은 어른이 결정한 삶의 구조 속에서 살아간다.
부모의 선택은 때로는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아이에게는 그 변화가 깊은 불안으로 다가올 수 있다.
특히 자주 바뀌는 주거 환경은
아이의 정서적 안정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안정된 환경에서 아이는 서서히 마음을 열고,
자신만의 속도로 성장해간다.
그 속도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그 자리를 지켜보는 어른이라면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일,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리는 일,
바로 그 기다림이 아이에게는 가장 든든한 지지이다.
교실에서 매일 아이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무언가를 ‘잘 해내는 것’보다
마음을 놓고 지낼 수 있는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자주 느끼게 된다.
아이들이 웃고, 이야기하고, 눈을 반짝이는 순간은
결국 그들이 안심하고 머무를 수 있는 공간에서 가능해진다.
처음으로 손을 들었을 때, 조용히 친구 곁에 앉았을 때,
그 모든 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의 결과인지 알기에
어른의 ‘조급함’이 얼마나 큰 방해가 될 수 있는지도 안다.
식물처럼, 아이도 흔들리지 않는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잘 자란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그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크게 무언가를 해주는 일이 아니라,
그저 지켜봐주고, 믿고 기다려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언젠가,
아이의 환한 웃음과 씩씩한 걸음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8 months ago (edited) | [YT]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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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으로퇴근
[텃밭에서 떠오르는 교육철학]
1. 잡초와 아이의 습관
부모가 놓치기 쉬운 작지만 중요한 순간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익숙한 말투 속에서 짜증이 묻어나거나, 무심히 던지는 행동에 불편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종종 ‘요즘 왜 이러지?’ 하고 의아해하지만, 그 뿌리는 어느샌가 자라난 작은 ‘습관’일지 모른다.
텃밭을 가꾸는 사람은 안다. 잡초는 처음엔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것을. 작물 사이사이에 조용히 자라다가, 어느 순간엔 뿌리를 깊게 내려 농작물의 생장을 방해한다. 아이의 나쁜 습관도 이와 닮았다. 사소해 보여도 그대로 두면 마음의 공간을 차지하고, 결국 아이의 성장을 가로막게 된다.
학교에서 교사가 아이의 문제 행동을 조심스럽게 부모에게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 말은 비판이 아니라, 아이를 위한 ‘함께 손잡자는 제안’이다. 부모가 그 손을 잡고 아이와 함께 방향을 다듬어 갈 때, 아이는 더욱 건강하고 단단하게 자라난다.
잡초는 초기에 뽑을수록 작물에 주는 피해가 적다. 아이의 습관도 마찬가지다. 시작점에서 살펴보는 것이 가장 깊은 배려이고, 가장 효과적인 교육이다.
‘지금은 괜찮아 보이지만 언젠가는...’ 하는 마음이 스쳤다면, 그 직감을 믿고 관심을 기울여 보자. 아이의 마음은 부모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더욱 곧고 단단하게 뻗어간다.
8 months ago (edited) | [YT]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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