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문화연구소는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지만 어떠한 유익도 얻지 못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The Way)을 끝까지 걸어갔던 알려지지 않은 소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 연구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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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명찬의 터치]
**남다른 산책**
1.
아카시아 향이 아직 남아 있을 때에
그 길로 들어섰지요.
바람이 불자 그냥 그림 같은 꽃비가 내렸어요.
하늘에, 땅에, 나무에 아카시아 천지였어요.
일어날 수 있을까, 걸을 수 있을까, 뛸 수 있을까
병원 침상에 누워 오래 생각했었지요.
그럴 때마다 생각 끝이 뭉툭하니 멍해졌어요.
오늘, 마침내 그 길로 들어섰어요.
한 걸음마다 고마운 얼굴 하나씩 떠올리며
아카시아 향 같은 웃음을
소리도 없이 한참 웃었어요.
2.
떨어진 꽃향기가 아직 남아 있을 때에
다시 그 길로 들어섰어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의 소유였고, 내가 애써 지켜냈다고 믿었던 것들,
사실은 그들의 소유였고
그들이 날 지켜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내 모든 지식이 앎을 가져다주었다거나
내 무지가 모름과 같지 않다는 뜻이 되었어요.
‘사는 일, 앞이 가끔 그럴 수도 있지.
절대 그렇거나 절대 아닌 일도 없는 거지.
꽃향기가 그리워 들어서는 길에
꽃잎이나 향이 남아있어 준다면 그저 좋을 뿐.’
그것에 감사해요.
그곳에 감사해요.
+
‘감사’는 언제나 내가 하는 말을 사람의 말답게 해 줍니다.
++
“그래요, 그래요. 잘하시네요.
한 번에 한 걸음씩이면 됩니다.”
새로 걸음마를 배웠다.
한 걸음, 쉬엄쉬엄
한 걸음, 방향을 잘 생각해 보고
한 걸음, 나도 모르게
한 걸음, 잠시 멈추었다가
한 걸음, 또 한 걸음.
아내의 부축으로 병원 복도를 수료하고
다음으로 동네 길도 졸업했다.
그때 이후 눈앞 풍경이 남다르다.
삶의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원하는 곳이 어디든,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한걸음에 달려갈 수는 없는 거.
흔히들 ‘남은 인생, 덤’이라고 한다.
와닿지 않는다.
시간과 세월, 안 남아서. 모자라서.
** 손명찬님은 CEO이며, 작가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이 땅을 바라보기를 원하며 오늘도 기도하며 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3 days ago | [YT]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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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민 목사의 영성터치](16)
**마구간 같은 내 마음에 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태어나신 성탄이 되면 베들레헴을 떠올리게 됩니다. 베들레헴의 마구간과 구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는 우연이 없고 오직 섭리만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태어나실 장소를 우연히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 장소를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그 탄생의 자리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은 작은 고을에 태어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을 작은 고을이라고 표현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가장 크고 위대하신 분이 작은 고을에 태어나셨습니다.
베들레헴의 뜻은 “떡집”입니다. 예수님은 떡집에 태어나신 생명의 떡이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예수님은 친히 생명의 떡이 되셔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생명의 떡을 먹을 때 영생을 선물로 받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 6:47-48)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 몸을 만듭니다. 지성의 양식인 책이 우리의 지성을 만듭니다. 우리가 먹는 생명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만듭니다. 우리가 무엇을 읽느냐가 생각의 색깔을 결정합니다. 영생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먹을 때 우리의 영혼은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생명의 떡을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크고 작음은 본질이 아닙니다.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친히 교회가 되셔서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생명의 떡을 나누어 주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마구간에 태어나셨습니다. 마구간은 누추한 곳입니다. 깨끗하지도, 잘 정돈된 곳도 아닙니다. 냄새가 나고, 소와 말의 배설물이 있는 곳입니다. 제 마음을 들여다보면 마구간 같습니다. 예수님께 보여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의 자리들이 제 안에 있습니다. 어두운 마음, 분노하는 마음, 섭섭한 마음, 억울한 마음이 있습니다. 때로는 혼란스럽고 엉클어진 마음, 우울하고 침체된 마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보여드리기가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구간 같은 제 마음에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잘 정돈된 집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마음, 지친 영혼, 냄새 나는 제 마음속으로 조용히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제가 부끄러워하며 고백할 때 “괜찮다”고 말씀합니다. “이 모습이 제 모습입니다. 향기를 발하지 못하고 냄새가 납니다.”라고 고백해도 예수님은 여전히 괜찮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꾸미지 않은 마음을 기뻐하시고, 그 마음과 함께 하길 원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을 모신 이후로 제 마구간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함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마구간을 선택하셨습니다. 저는 결혼 후 아내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품고 살아갑니다. 제 모든 모습을 알고도 이해하고 받아 주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귀히 여겨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우리의 마음도 마구간과 같습니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 2:12). 구유는 소와 말이 먹이를 먹는 여물통입니다. 작고, 낮은 곳에 있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곳에 임하셨습니다. 가장 크고 위대하신 분이 작은 구유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모신 구유는 열려 있었습니다. 비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열린 마음, 빈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낮은 곳에 태어나신 것은 우리를 높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낮아지심으로 인간을 높이셨다.” 예수님이 가난하게 태어나신 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예수님이 작은 곳에 태어나신 것은 작은 것 속에 담긴 엄청난 잠재력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밀알로 오셔서 많은 열매를 맺으셨습니다(요 12:24).
예수님이 구유에 태어나신 것은 누구나 가까이 나아 올 수 있는 사랑을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가난한 목자도, 동방 박사도, 소외된 자들도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유에서 모든 사람을 환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연약한 아기로 태어나신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껴안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약한 자, 병든 자, 가난한 자, 외로운 자들을 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왕궁을 찾지 않으십니다. 완벽한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여전히 구유를 찾으십니다. 낮고, 비어 있으며, 수줍지만 예수님을 환영하는 마음에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이 구유에 태어나신 것은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막 10:45). 그 섬김의 절정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입니다. 구유는 십자가의 전주곡이며, 십자가의 예고편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후, 베들레헴은 더 이상 작은 고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태어나신 고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구간은 더 이상 사람들이 머물기 싫어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빛 되신 예수님이 임하신 순간, 마구간은 영광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구유도 더 이상 초라한 장소가 아닙니다. 빛나는 장소가 되었고, 모든 사람이 사모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낮은 곳에 임하신 예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 복된 성탄이 되시길 빕니다.
4 days ago | [YT] |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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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환균 목사의 시선](16)
**십일조, 신약시대 성도들도 꼭 내야 하나?
“지금도 구약시대 율법의 십일조를 지키려면 할례나 안식일, 제사 제도도 같이 지켜야지 왜 돈이 되는 십일조만 지키라고 하나?”
십일조의 당위성이 크게 도전받고 있는 지금, 십일조 반대론자들의 대표적인 항변 중 하나다. 십일조는 율법을 이루신 예수님 이후 시대 성도들의 의무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각자가 얻은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는 십일조 신앙은 지금도 기본적으로 마땅하다고 믿는 이들의 반박 또한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약속하신 구약성경 말라기 3장 10절 말씀은 그들에게 둘도 없는 강력한 우군이다. 그러나 이 말씀 역시 구약시대 율법 아래 살던 이들에게 주신 말씀이어서 신약시대 성도들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이 거세다.
이 반격에 대한 십일조 찬성론자들의 보란 듯한 대응 무기가 바로 신약성경 마태복음 23장 23절이다. 아주 작은 채소류까지 십일조로 바친 당시의 바리새인들에게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는 권면으로 십일조의 형식뿐만 아니라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라는 율법의 본질도 중시하라고 균형을 잡아주신 예수님의 말씀이다.
물론 이 또한 구약시대에 속한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정황상의 한계가 있다. 그래서 십일조의 영적 원리를 주지시키는 데 초점을 둔 이 말씀을 “예수님도 십일조를 하라고 친히 명령하셨다”고 여길 직접적인 근거로 삼기에는 뭔가 2퍼센트 부족하다. 그럴 경우 신약시대 성도들이 정말 구약시대 율법 준수의 일환으로 십일조 헌금을 드리는 격이 될 수 있다.
출구는 하나다. 십일조의 정신과 원리는 구약시대의 율법에 제한받지 않는 보편적인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것인가를 가려내면 된다. 우선 율법 이전의 아브라함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살렘(예루살렘, 평강) 왕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이야기(창 14:17-20)가 대표적인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해낸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에 대해 멜기세덱은 그 모든 수확이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은택에 따른 것이라며 하나님을 찬송한다. 그러자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린다. 여기서 모든 시대의 신자가 자기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림으로 자신의 모든 소유가 곧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십일조의 기본 정신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히브리인들의 수 개념에서 1은 첫 것을 의미하고, 이 첫 것은 나머지 전체를 대신하고 대표한다. 히브리어로 10이라는 숫자를 가리키는 ‘에세르’에서 십분의 일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마아세르’가 나왔다. 여기서 10은 ‘모든 것’ 혹은 ‘완전’을 뜻하고, 1은 그 가운데서 ‘일부분’ 혹은 ‘대표’를 의미한다. 따라서 십일조는 내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그 모든 것을 대표하고 대신하는 1을 바침으로써 그 1 외의 모든 것도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겠다는 믿음과 헌신과 삶의 예배의 고백을 담아내는 복의 매개체가 된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출 13:2).
십일조의 원리에 따르면,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장자들을 다 죽이신 것은 이집트의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셨다는 의미가 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장자로 보내셔서 모든 동생들을 대신하고 대표해서 그들 모두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십일조 헌물이 되게 하셨다.
영적으로 보면 십일조에는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가 녹아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가진(창 14:18) 멜기세덱에게 바친 십일조에는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도 담겨 있었다.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레 27:30).
이 말씀에 담긴 십일조의 원리는 아브라함이 살던 고대 근동 지역의 이방 세계에도 널리 퍼져 있던 보편적인 관습에 반영되었다. 로마와 그리스를 포함해 고대의 이집트, 바빌론, 앗시리아, 엘람, 페니키아에서는 노략물이나 전체 소유의 십분의 일을 그들의 신들에게나 국가에 바쳤다.
이러한 광범위한 보편성으로 인해 십일조는 첫 사람 아담 때부터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가르치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는 에덴동산에 있던 각종 나무의 열매는 아담에게 임의로 다 먹으라고 주셨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창 2:16) 하신 것 자체가 십일조의 정신을 반영한다고 본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명령이 걸려 있는 그 선악과 하나만은 안 따먹는 것으로 하나님이 그들의 삶의 주인이며 주권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명령 전체를 지키며 살겠다는 신앙고백의 상징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류는 이 주권적인 한계선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의탁하는 믿음을 저버린 채 각자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살고자 했다. 이러한 타락의 시초를 창세기 4장에 기록된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창 4:1-5).
터툴리안을 포함한 초대교회 시대의 교부들은 가인의 제물이 배척된 이유를 십일조와 결부시켰는데, 히브리서 기자가 아벨이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히 11:4)를 드렸다고 증언한 데 그 근거를 둔다. 여기서 ‘더 나은’은 헬라어로 ‘폴뤼스’인데, ‘양이 많은’이란 뜻을 지닌다. 아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 질적으로 더 나을 뿐 아니라 양적으로도 적정한 양을 채우는 믿음으로 예물을 드렸다고 보았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가나안 정복 전쟁이었던 여리고성 전투에서도 첫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십일조의 원리가 적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성 주위를 일곱 번 도는 것만으로 승리를 얻게 하신 여리고를 정복하고 나서 그 안의 것을 하나도 취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수 6:17). 그러나 여리고성의 재물을 탐낸 아간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뒤이어진 아이성 전투에서 어이없이 패배하고 말았다. 떡으로만이 아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신 8:3) 주의 백성들에게 이보다 더 생생한 십일조 신앙의 본보기도 드물다.
신약성경은 십일조를 뛰어넘어 각자의 재산을 통용하던 초대교회에 굳이 십일조가 있었다고 따로 명시하진 않지만, 교회사에는 동방 정교회를 포함해 주후 3세기 전후부터 교회에 십일조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서방의 제롬과 어거스틴, 동방의 크리소스톰은 십일조를 옹호한 대표적인 교부들이다.
6세기 말부터는 십일조가 교회의 공식적인 종교회의를 통해 의무화되기도 했고, 교회까지 지배하려던 유럽 국가의 왕들은 십일조를 국법으로 인정했다. 이후 중앙집권화된 가톨릭의 고위층이 각종 헌금을 독식하면서 종교개혁기에는 농민들이 십일조의 개혁을 요구하기도 했다.
루터는 인류사만큼이나 오래되고 교회의 전통으로 시행되어오던 십일조의 폐지는 도둑질이란 표현을 썼고, 칼빈을 포함한 종교개혁자들 역시 십일조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당시 십일조를 남용하던 가톨릭과 달리 십일조가 본래 제정된 목적에 맞게 전임 성직자의 생계와 사역과 대외 구제(민 18:21, 신 14:22-29)를 위해 올바로 사용되게 하려고 노력했다.
현실적으로도 지금은 구약시대의 성전이나 레위인들은 없지만 교회의 예배당이나 전임 사역자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신약성경은 그들의 생계를 교인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명시하며(마 10:10, 고전 9:13-14), 교회의 예배와 교육과 선교, 구제를 위한 비용을 충당하려면 십일조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헌금으로 지정될 만하다.
물론 십일조에 대한 반감은 일리가 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숭고하고도 자유로운 신앙고백으로보다는 율법적인 축복과 저주의 잣대로만 남발한 과거의 왜곡된 관습 탓도 있고, 십일조의 목적에 맞지 않게 교회가 십일조를 남용해온 탓도 있다. 그러나 십일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도 각자가 우선적으로 보여드릴 거룩한 믿음의 표현이요 주께 온전히 헌신하는 삶의 유의미한 바운더리다.
율법 이후 복음시대의 헌금의 기준은 ‘전 재산’(행 4:32), 과부의 두 렙돈처럼(막 12:42) ‘힘에 지나도록’(고후 8:3), 그리고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롬 12:1)로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십일조보다 왜 더 많이 헌금하면 안 되냐며 십일조의 타당성을 따지고 드는 이들은 없다.
신약시대의 십일조는 그나마 최상의 너그러운 은혜다. 율법적 십일조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없어졌다. 그러나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지 않고 온전히 성취하시면서 진정한 믿음의 시험대인 자원적 십일조가 여전히 살아 있다. 이 십일조는 어떤 신약교회도 율법적으로는 강요할 수 없지만 더 중한 신앙양심, 자유함의 법이 시험한다.
십일조는 자원하여 드리면 율법이 아니지만 억지로 드리면 율법이 된다. 의식법에서는 자유하지만 탐심을 제거하는 최소한의 도덕적 신앙 원리로는 지금도 살아 있다. 평소 십일조가 부담스러운 사람은 십일조를 하는 게 좋다. 가난하든 부하든 십일조의 정신은 살려야 하고, 십일조를 안 한다고 해서 아버지 하나님이 자녀에게 벌을 준다거나 하시진 않지만 신자로서 물질에 매이지 않는 영적 성숙의 유익이나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는”(고후 9:6) 실제적인 물질의 복을 스스로 가로막는 결과는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고후 9:10).
-안환균 목사는 변증전도연구소장, 온누리교회 협동목사로 변증전도 사역을 섬기고 있습니다. 변증전도용 저서로 <기독교 팩트체크>(두란노), <하나님은 정말 어디 계시는가>(규장) 등이 있습니다. 안 목사님의 보다 많은 이야기는 유튜브 [GODTALK TV]로 들어가면 됩니다. [변증전도연구소 갓토크 TV youtube.com/@GOD-TALK-TV
2 weeks ago | [YT] |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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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민 목사의 영성터치](15)
성숙한 감사는 역설적인 감사입니다.
성숙한 감사는 역설적입니다. ‘역설(逆說, paradox)’이란 말은 겉으로는 모순되어 보이지만, 그 안에 더 깊은 진리가 숨겨져 있는 말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종종 깊은 진리를 역설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5).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이 말씀들은 모순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잃음 속에 얻음이, 낮아짐 속에 높아짐이, 죽음 속에 생명이 피어나는 영적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역설적 감사는 좋은 일이 있을 때 드리는 감사가 아니라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하지만,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불평하거나 원망합니다. 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상황을 초월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범사(凡事)’는 모든 일을 뜻합니다. 이는 좋은 일뿐 아니라, 이해되지 않는 일, 슬픈 일, 고통스러운 일까지도 포함합니다. 성숙한 감사는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범사에 성숙한 감사를 드릴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때 성숙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은 제가 자주 묵상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나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합력’이라는 말에서 영어 단어 ‘synergy(시너지)’가 나왔습니다. 시너지는 여러 요소가 상호작용하여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면,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이 결합하여 가장 선한 결과, 최상의 열매를 이루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겪은 고난은 참담하고, 잔혹했습니다. 그의 형제들은 냉혹하고 무자비하게 요셉을 괴롭혔습니다. 그를 구덩이에 던졌고, 은 스무 개에 종으로 팔아넘겼습니다. 그 결과 요셉은 13년 동안 종살이와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는 말 그대로 고난의 수레를 타고 애굽으로 끌려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자, 고난의 수레는 총리가 타는 버금 수레로 바뀌었고, 형제들이 찢어버린 채색옷은 총리가 입는 세마포 옷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실 때 요셉의 고난과 슬픔과 눈물은 서로 결합되어 그의 인생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만민의 생명을 살리는 복의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 때 성숙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성숙한 감사는 현실을 무시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자신의 비극적인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그 상황을 솔직하게 나열합니다. 그의 형편은 절망적이었습니다. 부족한 것뿐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부족함으로 가득한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합 3:17). 그러나 그는 상황을 초월해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춥니다. 그 순간 그는 즐거워합니다. 그는 기뻐합니다. 그는 놀라운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합 3:18-19).
인생의 문제는 초점의 문제, 곧 시선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시선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머물면 우리는 좌절하게 됩니다. 하지만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볼 때 소망이 솟구쳐 오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한 것을 통해 기적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베드로의 빈 배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을 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모자랐을 때, 예수님은 최상의 포도주를 차고 넘치도록 공급해 주셨습니다.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셨을 때, 그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은 3년 6개월 동안 마르지 않고 계속 흘러넘쳤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모든 것은 역전됩니다.
셋째, 고난이 변장 된 축복임을 깨달을 때 성숙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고난은 신비입니다.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고난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선물을 깨달을 때, 우리는 고난마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때때로 흑암처럼 찾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흑암 속에 보화를 숨겨두십니다.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사 45:3상). 하나님은 종종 고난이란 검은 포장지 안에 놀라운 선물을 담아두십니다. 검은 포장지에만 시선을 두고 고난을 거부하면, 그 안에 감추어진 선물을 받아 누릴 수 없습니다.
감사가 중요한 이유는, 감사할 때 영의 눈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면 고난 속에 담긴 보화를 보게 됩니다. 감사하면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를 읽게 됩니다. 성숙한 감사는 성숙한 신앙에서 시작됩니다. 감사의 깊이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깊이만큼 자랍니다. 감사는 고난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이 장차 영광이 될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이 사명으로 전환될 것을 기대하는 믿음입니다. 성숙한 감사는 현실의 어두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감사의 계절입니다. 성숙한 감사를 통해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풍성한 은혜를 깊이 누리시길 빕니다.
**강준민 목사님은 기독 베스트셀러 작가로 현재 LA새생명비전교회 담임으로 계십니다
1 month ago | [YT] |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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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명찬의 터치]
**하늘 입문**
하늘을 바라보는 가장 완벽한 자세는 펴는 것이다.
몸을 펴고 땅에 반듯하게 드러눕는 것이다.
그럼, 하늘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하늘을 이해하는 가장 완벽한 자세는 구부리는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팔과 다리를 구부리고 엎드리는 것이다.
그럼, 하늘로부터 듣게 된다.
하늘과 가까워지는 가장 바람직한 자세는 눈감는 것이다.
눈을 닫고 마음을 열어 보는 것이다.
그럼, 올라가는 것 같이 하늘이 내려온다.
+
잠들면 꿈꾸게 되고, 영원히 잠들면 영원히 꿈꾸듯 살까
++
아침에, 맑은 하늘을 본다. 마음이 맑아진다. 높디높은 존재의 위대한 힘이다. 저리도 맑은 모습에 내가 기여한 일이라곤 없다. 후우, 불어 조각구름 하나 옮길 능력도 없다. 마음이 맑아진 이들과 대가없이 함께 누릴 따름이다.
하늘은 내게 직접 이야기한 적은 없으나 믿음의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한 자유롭고 진실한 사람들로부터 하늘마음을 전해 듣는다. 그들이 세상 속에도, 곁에도 있다. 그게 삶의 한 복판에서 진실을 여는 힘이 된다. 어느 날, 하늘과 나 사이에 먹구름이 끼고 눈비가 있다 해도, 이해와 오해가 있다 해도, 시간과 한계의 차이가 있다 해도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는 조건부로 만난 사이가 아니라는 거다.
아름다운 것에는 위로, 배려, 사랑, 돌봄이 전부 들어 있다. 하늘을 초대했거나 하늘이 찾아와 깃든 것이 분명하다. 둥지 틀 듯, 하늘이 마음으로 내려와 앉는다. 하늘 품에서 생각하고, 일하고, 먹고, 쉰다. 기뻐 잠을 못 이루는 날도, 울먹이며 잠드는 날도 변함없이 하늘 품에 있다.
** 손명찬님은 CEO이며, 작가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이 땅을 바라보기를 원하며 오늘도 기도하며 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1 month ago | [YT]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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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환균 목사의 시선](15)
홍해가 갈라진 기적, 정말 역사적 사실인가?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출 14:21)
배우 찰톤 헤스톤이 모세로 등장한 영화 <십계>에 보면, 유대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한 후 홍해가 둘로 갈라져 그 사이를 마른 땅처럼 건너가는 기적이 아주 실감나게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극적인 효과를 노려 사람들의 흥미를 돋우려는 할리웃 영화의 과장된 몸짓 탓이었을까. 이 영화에 묘사된 홍해의 기적은 성경의 내용과 맞지 않다. 영화에는 모세가 홍해 위로 손을 내밀자 마자 홍해가 갈라지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성경은 이와 다르게 보고한다.
성경은 모세가 홍해 위로 손을 내밀자 그때부터 큰 동풍이 밤새도록 불기 시작해 바닷물을 물러가게 한 후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되었다고 한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출 14:21). 이집트 영토가 있는 서쪽, 곧 모세가 있는 자리가 아니라 맞은편인 동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멀리서부터 홍해를 둘로 갈랐고, 갈라진 바닥을 그 바람이 계속해서 말린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현상을 놓고 과학자들이 유체역학 등의 이론을 기반으로 실험한 결과도 있다. 2010년에 미국국립기상연구소(NCAR)와 콜로라도 대학 연구진은 강이 굽이진 부분에서는 강한 바람으로 인해 물의 갈라짐 현상이 일시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바람이 바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시뮬레이션으로 실험해본 결과, 시속 101㎞의 강풍이 12시간 동안 불 경우 약 2m 깊이의 물이 갈라지고 길이 3.2㎞, 폭 4.8㎞의 마른 땅이 약 4시간 동안 형성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람이 그치면 마른 땅은 다시 물에 잠겼다고 분석했는데, 이 연구는 미국 공공과학도서관 온라인학술지에 실제로 게재된 바 있다.
물론 홍해가 갈라진 것은 단순한 자연현상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아주 특별한 초자연적 능력에 의해 일어난 기적이다. 하나님께서 자연현상을 이용하셨다고 해서 홍해 사건의 초자연적인 기적성이 손상되진 않는다. 시편 기자 역시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시 74:13)라고 증언한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땅처럼 건너간 지역 근처 홍해의 수심은 100-200미터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리 큰 바람이 분다 해도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 없이는 바다가 둘로 쫙 갈라지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실 때도 이미 가동중이신 자연법칙을 최대한 활용하신다. 과학자들의 실험 결과는 성경에 묘사된 홍해 기적이 최소한 과학적으로도 터무니없는 사건이 아님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한 처녀의 몸 안에 기적적으로 정자를 창조하신 동정녀 탄생의 기적에서도 자연법칙은 무시되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메시아라 불리는 아기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게 하시지 않았다. 처녀의 자궁을 사용하셨고, 임신 기간 10개월을 다 채우게 하신 후 기적적인 성육신이 이뤄지게 하셨다.
C. S. 루이스도 <기적>(홍성사)이란 책에서 이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이 책에서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기적은 자연법칙을 깨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만 꼭 필요한 요소가 있을 때 초자연적인 힘을 특정 상황 속에 도입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적은 원래 창조주 하나님이 자연 가운데 늘상 해오던 일들의 축소판이라고 보았다. 기적은 하나님이 평상시에 너무 크게 하고 계신 일, 그래서 사람들이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는 일을, 바로 가까이에서 작게, 그래서 또렷하게 보이도록 해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이 단적인 예다.
이 기적은 매년 자연 질서의 일부로서 포도주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일을 축소판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예수님은 물과 토양과 햇빛을 주스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식물 유기체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데, 그렇게 만들어진 주스는 적절한 조건이 맞춰지면 포도주가 된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늘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계신 분인데, 모든 음료가 다 그렇듯 포도주 역시 결국 물이 변해서 된 것이기 때문이다. 비와 공기와 토양의 영양분과 햇빛으로 광합성 작용을 거쳐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물이 실제로 포도가 되고 포도주가 된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어느 해에 한 번은 성육신하신 분으로서 그 과정을 단축시켜 보이신 결과로 순식간에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다. 이 때 물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 식물 섬유조직 대신 어떤 토기 항아리들을 사용하셨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들을 사용해서 그분이 하신 일은 그분이 자연세계에서 늘 하고 계신 그 일이다. 기적이란 단지 지름길로 가는 것일 뿐이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마찬가지다. 매년 하나님은 몇 개의 밀알로 다량의 밀을 만들어내고 계신다. 씨가 뿌려지면 증식이 일어난다. 물고기도 증식시키셨는데, 평소에 무수한 알로 바다를 가득 채우며 늘 해오던 그 일을 자신의 인간 손, 노동자의 손을 가지고 바로 가까이서 작게 행하셨던 것뿐이다. 이런 사례들을 볼 때 하나님은 초월적이고도 초자연적으로만 일하시는 분이 아니다. 친히 창조하신 자연법칙을 최대한 활용해서 주로 일하시다가 특별한 목적이 있을 때만 기적적으로도 역사하시는 분이다.
사실 자연법칙 자체도 원래는 기적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욥 26:7)라는 말씀대로, 허공에 떠 있는 둥근 지구의 존재 자체가 이미 기적적이다. 그런 만큼 초월적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익숙한 자연법칙을 활용해서 때로 특정한 목적을 갖고 특별한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하나님께서 초월적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성경을 인류에게 주실 때에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성경 66권을 딱 완성하셔서 한 순간에 완제품으로 하사하시지 않았다. 모든 책들이 이 땅에서 자연적인 환경 가운데 만들어져야 하는 과정을 그대로 다 거치게 하셨다. 인간 저자들의 사상과 인격을 활용하시되 오류 없이 기록되게 하시고,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대대로 필사하는 과정까지 다 거치게 하시면서 수 천 년의 시간에 걸쳐 마침내 한 권의 성경으로 완성되게 하셨다.
실제로 지금 우리의 일상에서도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신다. 자연스런 일상의 사건들 속에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음성이나 손길을 경험하게 하실 때가 많다. 그래서 특정 상황 속에 있을 때는 잘 모르다가 지나고 나서 뒤돌아보면 하나님의 손길이었다고 깨닫게 되곤 한다. 이제라도 작은 일상의 사건들과 관계들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나 손길을 감지해내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그때그때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우리의 믿음이 자랄 수 있다.
사실 1500년 동안 이스라엘 역사 속에 일어난 기적적인 사건들을 한데 다 모아놔서 많아 보이지 구약성경 자체에도 홍해 기적과 같은 큰 기적은 많지 않다. 그만큼 하나님은 기적을 쉽게 남발하시는 분이 아니다. 특히 예수님과 사도들의 시대에 복음사역에 꼭 필요한 정황 가운데서 의미 있는 기적 사건들을 집중적으로 더 많이 허락하셨다고 볼 수 있는 정도다.
하나님은 질병을 고쳐주시는 기도의 응답도 기적이 아니라 약이나 수술로 보여주실 때가 훨씬 더 많다. 기도에도 주의 말씀에 대한 나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 내가 자라게 하시는 것으로 응답하실 때가 대부분이다. 물론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는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며, 그분의 주권적인 의지에 따라 누구에게든 허락될 수 있다. 그러나 마치 로또 당첨을 구하듯 늘상 특별하고도 기적적인 역사를 구하는 요행이 조장되는 신앙은 건전하지 않다.
사람들이 만든 타종교나 신화, 전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형태의 초자연적인 기적 이야기들과는 달리 성경 속의 기적들은 기독교 신앙의 전체적 구조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래서 모든 기적은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드러내고, 당시 사람들뿐만 아니라 후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그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알게 해주는 영적인 원리와 교훈을 담은 영구적인 매개체로서 성경에 기록되었다.
홍해가 둘로 갈라진 기적 역시 어린양의 대속의 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님과 함께 물로 장사지낸 바 되는 세례의 영적 진리를 드러낸다. 예수님이 광야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연상시키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후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건너가듯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가신 기적 또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쳐가야 할 영적 광야생활의 인도자가 누구신지를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그림이다.
신앙생활에서 지금도 크고 작은 모든 홍해는 내 힘만으로는 건너갈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신자인 나의 책임과 역할을 전적으로 배제하시지도 않는다. 모세가 믿음으로 손을 들어 바다 위로 내어밀었을 때 큰 동풍이 불어 홍해가 갈라진 것과 같은 원리다. 홍해가 갈라진 사건이 정말 역사적 사실인 증거는 이러한 불변의 영적 진리가 지금도 나의 구체적인 일상 속에 여전히 유효하게 살아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환균 목사는 변증전도연구소장, 온누리교회 협동목사로 변증전도 사역을 섬기고 있습니다. 변증전도용 저서로 <기독교 팩트체크>(두란노), <하나님은 정말 어디 계시는가>(규장) 등이 있습니다. 안 목사님의 보다 많은 이야기는 유튜브 [GODTALK TV]로 들어가면 됩니다. [변증전도연구소 갓토크 TV youtube.com/@GOD-TALK-TV
1 month ago | [YT]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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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민 목사의 영성터치](14)
**상처는 은혜의 빛이 스며드는 틈입니다.
상처는 아픕니다. 상처를 입은 곳에서 피가 흘러나옵니다. 상처는 몸과 마음에 금이 가는 것입니다. 깨어지는 경험을 의미합니다. 상처가 치유된 후에는 흔적이 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후에도 상흔(傷痕)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상흔을 그대로 두셨을까요? 그 신비를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성경은 한 가지 분명한 이유를 보여 줍니다. 바로 그 상흔이 도마의 약한 믿음을 강하게 한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의심 많았던 도마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전했을 때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도마를 위해 다시 찾아오셔서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친절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도마는 예수님의 상흔을 보고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의 상처는 은혜의 빛이 스며드는 틈이었습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상처의 역설적인 은혜를 묵상해야 합니다. 상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합니다. 그 이유는 연약한 인간은 매일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상처를 다루는 지혜를 몇가지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상처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상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를 흘려보내시는 창입니다. 우리가 완벽할 때가 아니라, 깨어지고 부서지고 금이 갈 때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옵니다. 요셉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십시오. 형제들이 그를 미워하여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아버지가 지어 준 채색옷을 찢었습니다. 그의 꿈을 조롱하고 짓밟았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죽이는 대신 상인에게 팔아버렸습니다. 요셉의 젊은 날은 상처가 덧입혀지는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그의 상처 위에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종살이와 옥살이를 할 때 그와 함께하셨고,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결국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상처 입은 요셉 위에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했습니다. 요셉은 받은 은혜로 형제들을 용서하고 축복했으며, 많은 생명을 살렸습니다(창 50:20).
둘째, 은혜의 빛은 상처를 통해 어두움을 밝힙니다. 빛은 어두움을 밝힐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은혜의 빛이 임하면 상처가 치유되고, 상처는 아름다움으로 변합니다. 상처가 치유되면 그 상처는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를 더욱 아름답게 변화시킵니다. 안셀름 그륀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 치유란 상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상처를 지워버리는 힘이 아니라 그 상처를 빛을 발하는 도구로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셋째, 상처는 하나님의 손길이 닿은 흔적입니다. 하나님은 상처를 없애지 않으시고, 흔적을 통해 더 큰 아름다움을 만드십니다. 일본의 전통 공예 가운데 ‘긴츠기(金継ぎ)’가 있습니다. 도자기는 충격에 약해 잘 깨집니다. 그러나 ‘긴츠기’는 옻칠과 금박으로 깨진 부분을 이어 붙여 새로운 예술로 재탄생시킵니다. 이 기법은 15세기 아시카가 요시마사 쇼군의 일화에서 유래했습니다. 쇼군은 자신이 아끼던 찻잔이 깨져 찻잔이 만들어진 중국에 보내 수리를 맡겼습니다. 중국에서 수리되지 못한 찻잔은 철사로 엉성하게 묶인 채 돌아왔습니다. 크게 실망한 그는 일본 장인들에게 찻잔을 복원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들은 금으로 이어 붙여 오히려 더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긴츠기’의 철학은 단순합니다. ”상처는 감춰야 할 흠이 아니라 새로운 아름다움이 피어날 자리다.” 금으로 이어붙인 도자기는 원래보다 더 가치 있고 더 빛납니다. 깨어짐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흔적이 오히려 은총의 표지가 되었습니다. ‘긴츠기’ 공예 예술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덮지 않고, 그 안에 머무십니다. 하나님이 상처 안에 거하실 때, 그곳에서 아름다운 빛이 새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상처를 제거하는 힘이 아니라, 상처를 통해 더욱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넷째, 치유된 상처는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는 거룩한 약입니다. 상처가 상처를 치유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우리는 상처 입은 치유자다. 우리의 상처가 은혜로 치유될 때, 그 상처는 다른 사람을 살리는 통로가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을 때, 상처 입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 나왔습니다(요 19:34). 예수님이 상처를 받으심으로 우리 죄가 용서되고 생명의 샘이 흘러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상처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합니다. 예수님의 눈물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으신 상처는 인류의 가장 큰 상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상처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 상처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죄와 죽음으로 깨어진 우리를 예수님의 피로 이어붙이셨습니다. 금보다 귀한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상처를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상처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은 금이 간 도자기 같은 우리를 예수님의 보혈로 회복시키십니다. 상처를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통해 우리 생을 더욱 아름답게 빚어 가십니다. 상처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 때문에 더욱 빛나는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 수많은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시길 축복합니다.
**강준민 목사님은 기독 베스트셀러 작가로 현재 LA새생명비전교회 담임으로 계십니다
1 month ago | [YT] |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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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문화연구소
***r기록문화연구소와 협력하는 변증전도연구소(소장 안환균 목사)가 월간목회(2025년 11월호)에 소개되었습니다. 변증전도연구소 사역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들어 있어 인용, 소개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동안 이런 식의 복음 제시를 들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기독교 = 창조질서’ 밝히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사역
“교회를 다니는 동안 이런 식의 복음 제시를 들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족의 안내로 필자가 진행하는 변증전도 집회인 ‘갓토크(Godtalk) 콘서트’에 초대받은 한 참석자의 말이다. 교회에 대한 실망으로 수년 동안 교회를 떠나 있던 그분에게는 변증적 전도의 접근이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똑같은 복음이라도 어떻게 전하느냐에 따라 그 값어치가 180도로 달라진다.
한국교회 전도집회에 여전히 유명 연예인들의 간증이 대세를 이룬다. 비신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그들이 복음으로 변화된 이야기도 너무 귀하지만, 이제는 기독교 변증을 활용해 사람들이 기독교 진리에 대해 실제로 궁금해하는 것들에 조목조목 대답해주는 전도가 이전보다 더 요긴해졌다. 청소년과 청년층의 교회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할 때마다 ‘믿는 척하는 것’이 요즘 그들이 교회 안에서 가장 잘하는 것이란 말들이 공공연하게 나도는 현실이 무척 안타깝다.
소통의 시대, 변증으로 접근하는 복음
오늘날은 실시간 디지털 매체의 발달로 소통 방식이 다변화된 고도의 정보화 사회다. 개인의 취향과 지향이 파편화되어 특정 세대 전체의 성향을 일괄해서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개인화된 삶이 두드러진 핵개인의 시대이기도 하다. 이런 때일수록 각 개인의 상황과 눈높이에 맞춘 정확한 정보 전달 능력과 의사소통의 역량이 더욱 중요해졌는데, 이는 교회의 전도 활동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자신의 참된 정체성과 가치를 찾는 삶에 목말라하는 영적 갈급함 또한 그 어느 때보다 더 절박해진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그들 한 영혼 한 영혼의 눈높이에 맞춘 성육신적 전도, 곧 ‘대답’(벧전 3:15)을 의미하는 ‘변증’을 활용해 각자의 의문에 구체적으로 맞춤답변해주는 변증전도가 특히 필요하다.
막힘없는 소통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요즘 시대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지금은 전도 대상자뿐만 아니라 교회 안의 청장년 성도들도 질문이 많다. 답을 못 찾으면 아무 일 없는 척하다가 결국 교회를 떠난다. 그러나 교회는 대화보다는 권위주의적인 설교나 목회 방식에 안주하는 기류가 여전히 강하다. 지금은 교인들을 교회 바깥의 여러 공격으로부터 지켜 알곡 성도로 만드는 양육전도 또한 매우 중요한 때인데, 이런 측면에서도 변증전도는 유용하다.
전도현장에서 만나는 비신자들 가운데 이전에 교회를 다녔다가 떠난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그들은 무언가 교회에서 상처를 받거나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그대로 안고 교회를 떠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들 각자가 품고 있는 오해나 편견을 먼저 바로잡아줘야 한다.
사람마다 하나님이나 기독교에 대해 가진 주된 의문점들이 다르다. 각자가 품은 그 의문 하나가 풀리면 복음이 들어갈 문이 열린다. 복음의 씨앗이 제대로 뿌려지려면 사람들 속에 자리한 잡초와도 같은 걸림돌들을 먼저 제거해줘야 한다. 변증전도는 바로 그 과정을 중시하는 전도다.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렘 4:3).
변증전도연구소(Apologetic Evangelism Institute)는 기독교에 대한 오해나 편견이 전도와 양육 사역을 저해하는 교회 안팎의 시대적 상황 가운데 사회에 만연한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고 기독교 복음의 진실성과 가치를 올바로 알리기 위해 설립되었다.
연구소의 핵심가치는 명확하다. 기독교는 여느 종교의 하나가 아니라 창조질서 그 자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한 특정 종교의 창시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창조주요 구속자이신 하나님 그 자신이시다. 이것이 절대진리를 인정치 않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전도로 드러내야 할 기독교만의 핵심진리다.
연구소는 논쟁적이거나 사변적인 ‘변증을 위한 변증’을 넘어 구도자와 초신자, 기존 성도 모두에게 이 기독교 복음의 본질을 다각도로 균형 있게 전달하고 공유하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기독교 진리 전파, 그 한길에 서서
홍익대 영문학과 재학 당시에 <시문학>지 신인상으로 등단할 만큼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필자는 청소년기부터 시작된 구도의 방황 끝에 대학 2학년 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만나면서 회심을 체험한 후 줄곧 문서선교로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비전을 품었다. 대학 졸업 후 두란노서원의 <빛과소금>, <목회와신학> 기자로 일했고, 규장 편집차장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풀러신학교에서 목회신학 석사(M.Div)와 변증전도 연구로 목회학 박사(D.Min) 학위를 받았다.
남가주사랑의교회와 서울 사랑의교회 부목사를 거쳐 2012년 초에 변증전도연구소를 설립하고, 2015년 초에 그말씀교회를 개척, 변증설교를 중심으로 목양과 제자훈련 사역을 병행하다가 2024년 초에 후임에게 물려주고 지금은 정기적인 변증설교로만 동역한다. 현재 변증전도연구소 소장, 온누리교회 협동목사로, 테마 영상과 변증설교에 이어 질의응답 시간으로 참석자 개개인의 의문들을 풀어주는 변증전도 집회 ‘갓토크 콘서트’, 변증전도의 원리와 방법을 소개하는 변증전도 세미나 등을 진행하고, 강의와 상담, 연구와 저술 등의 영역에서 전문적으로 변증전도 사역을 섬기고 있다.
미국 코스타(KOSTA)에서 수년 동안 기독교 변증과 큐티를 주제로 강의했고, 2012년부터 매년 한 번씩 박명룡 목사(청주서문교회)와 함께 기독교 변증 컨퍼런스를 공동개최해왔다. 국내외 지역교회들과 총신대, 백석대 등의 신학교들에서 변증전도 강의와 변증설교를 전해왔고, CTS, CGN 등의 기독교 방송과 <빛과소금>, <목회와신학> 등의 문서매체를 통해 변증전도 사역을 꾸준히 감당해오고 있다.
그동안 필자가 출간한 변증전도용 저서로는 26권의 테마별 기독교 변증서들의 내용으로 기독교 진리에 대한 26가지 질문에 답한 <기독교 팩트체크>(두란노), 타종교와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과 기독교의 하나님을 비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변증한 <하나님은 정말 어디 계시는가>(규장)를 비롯해 <당신에게 가장 좋은 소식>, <트위터에서 만난 예수>, <변증의 달인>(이상 생명의말씀사), <거저 받은 구원인가, 이루는 구원인가?>, <만화 굿 뉴스>, <7문7답 전도지>(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힌디어, 아랍어, 스페인어)(이상 변증전도연구소) 등이 있고, 최근에 <하나님은 정말 어디 계시는가>의 일본어판 <神さまは本当に どこにおられるのか >(일본 두란노)를 출간했다.
향후 사역의 방향성은 각 계층별, 연령별 비신자들의 성향을 심리적,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깊이 연구하고, 그들에게 맞는 변증전도 방법과 변증설교를 개발하여 지역교회들과 나누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아울러 교회 안팎의 현대인들이 일상의 삶에서 고민하는 문제들에 시의적절하게 답해주는 변증서 저술을 통해 기독교 진리가 왜 모든 사람들이 예외없이 경험하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유일하게 해결해줄 수 있는 창조질서의 절대이치가 되는지를 입증해나가고자 한다.
책과 현장 중심의 3대 사역
현재 대표 중심의 1인 연구소로 운영 중인 변증전도연구소에서 중시하는 사역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문서 사역이다.
테마별 변증전도용 책을 쓰거나 각 문서매체에 글을 기고하는 활동뿐만 아니라 전도현장에서 직접 사용할 수 있는 전도지를 개발해서 공급 중이다. 기독교에 대해 요즘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대표적인 7가지 질문에 간략한 답을 담아 “전해주기만 해도 전도가 된다”는 콘셉트를 가진 16쪽짜리 변증전도용 소책자인 <7문7답 전도지> 한글판은 현재까지 한국교회 전도현장에 20만 부가 넘게 보급되었다.
둘째는 말씀 사역이다.
지역교회들의 전도집회와 전도주일에 변증전도 메시지를 통해 복음을 선포한다. 또한 주일예배나 교사 헌신 예배 등의 여러 예배 시간에 다양한 테마의 변증설교를 전함으로써 초신자나 기존 성도들에게도 복음을 새롭고도 낯설게 만나게 해주는 재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 전도집회 전에 전 교인에게 전도 동기 부여 설교를 전하고, 청소년 청년 수련회 등에서도 ‘갓토크 콘서트’란 이름의 변증전도 말씀 사역을 종합적으로 진행한다.
셋째는 변증전도 세미나 사역이다.
현재 필자는 온누리교회 협동목사로서 기독교 변증을 활용한 복음전도 훈련에 관심 있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온누리교회 서빙고 캠퍼스와 양재 캠퍼스를 비롯한 전국의 캠퍼스들을 순회하며 변증전도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 변증전도는 사영리 전도나 전도폭발과 같은 기존의 전도방법을 대체하는 대체제가 아니라 보완재로서 전도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반대 질문들에 적실하게 대답해줄 내용과 방법을 나눈다. 그래서 각 지역교회가 개교회 차원에서 현재 어떤 전도방법을 실행하고 있든 전도 관심자들을 대상으로 실시될 경우 그들이 전도현장에서 그대로 활용할 만한 실용적인 지침들을 제공받을 수 있다.
그 밖에 연구소나 카페 등에서 기존 신자들이 초대해온 전도 대상자들에게 변증전도 상담을 실시하고, SNS와 유튜브 영상 등을 통해서도 각 매체에 맞는 접근방법을 활용한 변증전도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변증전도와 설교, 이렇게 하라
연구소는 지역교회들이 변증전도의 원리와 방법을 교회 교육 현장과 구역 모임 등에 활용할 수 있도록 특강이나 세미나 같은 교육 프로그램으로 협력할 수 있다. 지금은 특히 세속적 교육환경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신앙의 갈등을 겪기 일쑤인 청소년층 전도와 양육을 위한 교사 교육, 부모 교육이 절실하다. 구역 내의 초신자나 냉담자들의 신앙을 때마다 변증적 전도와 상담으로 다잡아줘야 할 구역장들에게도 맞춤형의 교육적 지원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필자는 9년 동안 담임목회를 하면서 매주일 갖가지 주제의 변증설교를 전했던 풍부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평소에 강단에서 시의성 있는 변증설교를 좀 더 효과적으로 잘 전할 수 있도록 실전 가이드라인을 공유해나가고자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변증설교는 첫째, 일방적인 주입처럼 느껴지는 선포보다는 쌍방소통의 대화처럼 들려야 한다.
둘째, 청중이 스스로 호기심을 갖고 계속 답을 찾아가고 싶도록 긴장감 있게 구성되어야 한다.
셋째, 개인의 경험과 이야기를 곁들인 감성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저건 바로 내 얘기구나’ 하는 공감을 이끌어내야 한다.
넷째, 어렵거나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기독교 용어나 교리를 청중의 일상 경험과 관련된 비유나 예화를 통해 일상 언어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해야 한다.
다섯째, 절대진리가 무시되는 시대일수록 모든 사람이 수긍할 만한 확고한 역사적·객관적 증거들을 놓치지 않고 적재적소에 포함시켜 실감나게 강조해야 한다.
여섯째, 단순히 설득하기 위한 단선적 접근보다 테마 영상처럼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좋은 문화적 매체들을 그때그때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목회자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중시되는 지금의 시대 분위기를 빨리 파악해 목회 현장에서 진심 어린 공감과 경청, 대화와 소통을 위한 변증적 전도의 방식을 전방위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이 시대에 맞는 교회 성장의 새로운 물꼬를 터나가는 데 실효성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month ago | [YT]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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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명찬의 터치]
** 눈 맞춤 **
한번, 상상해볼까요. 침묵의 심연, 그 우주 한가운데 우주복을 입은 이가 고요히 유영합니다. 이 우주에서 위란 어디일까요? 아래란 어디일까요? 앞과 뒤, 좌와 우는 또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내게 되물으시겠지요. “누가 기준...?” 그래요. 기준점에 따라 모든 방향과 좌표는 한낱 약속에 불과해집니다.
중력에 잡혀 사는 우리는 그간 영혼의 좌표를 얼마나 단조롭게 그려왔던가요. 마치 하나님은 저 아득한 수직의 끝에, 우리는 이 낮은 수평의 땅에. 그래서 그를 만나려면 늘 고개를 꺾어 하늘만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듯 무심히. 하지만 절대 사실이 아니죠. “얘야, 나는 하늘과 땅에 충만하다.(예레미야 23:24)” 그러고 보니 그렇죠. 우리가 새벽 날개를 치며 저 끝으로 날아오를지라도 그분은 거기 계시고, 가장 깊은 어둠 속에 자리를 펴도 그분의 손길은 우리를 어루만지시는데.(시편 139편)
모를 리 없는데 잠시 놓쳤겠지요. 삶이 곧잘 하는 짓입니다. 그분의 ‘높음’이 의미하는 것은 공간의 거리가 아니라 존귀함의 깊이, 우리의 ‘낮음’ 또한 지상의 좌표가 아닌, 유한한 존재로서 지닌 본연의 모자람과 미숙함일 뿐. 그런데 그분은 이 아득한 차이를 짐짓 모른 체해 주시고 가장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곁을 찾아와 눈을 맞춰주셨습니다. 한 사람 한사람의 전 생애를 통해 말입니다. 게다가 우리 안에도 계셔서 더 이상 땅의 중력에만 붙들려 살지 않도록 힘을 주십니다.(사도행전 17:28)
아, 다시, 새삼, 다행입니다. 삶의 무게에 날개 꺾일 때, 갈 길 모를 때에도 어느 방향이든 고개 돌려 보세요. 시선을 두는 바로 그곳에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시선과 마주하게 될 테니까요. 오랜 약속처럼, 서로의 눈 맞춤 속에서 우리는 독수리의 솟구침 못지않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좌표가 아닌, 영원의 시선! 그 기쁨 가운데 말입니다.
+
<깃발 올려, 깃발 내려> 게임 아시죠? 하나님과 무소부재(無所不在) 놀이를 해봅시다. 왼쪽으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아래로 고개를 떨구다가 위로... 하! 마주쳐지시지요? 코람데오!!!
++
눈을 주님께 더불어 맞추고, 스스로를 사랑할 때 뒤죽박죽의 삶도 제 빛을 되찾으리라 믿어요.
** 손명찬님은 CEO이며, 작가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이 땅을 바라보기를 원하며 오늘도 기도하며 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1 month ago | [YT]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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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환균 목사의 시선](14)
**내가 죽고 나서 천국에 갈지 못 갈지 이 땅에서 내가 어떻게 알아?
“구원의 보장이 없다면 뭐 하러 예수 믿나?”, “구원에 대한 불안에 삶의 의욕이 꺾인다.” 교회 안에서 행함 있는 믿음을 강조했더니 일부 신자들이 실제로 보인 반응이라고 한다. 구원받아 천국 가려고 예수님을 믿는 게 기독교 신앙의 전부일까? 주님과의 애틋한 사랑과 신뢰의 관계에서 우러나는 일상의 기쁨과 감사는 온데간데없는 이런 모습이 과연 바람직한 신앙인의 모습일까 반문해보게 된다.
영생을 얻는 구원은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다. 이 관계를 충실히 가꾸는 데 관심이 없어 불안과 염려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교리적으로나 법적으로는 구원받았으니까 안심해도 돼’라고 믿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을 성경이 보장하는 참된 구원의 확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주인이 아닌 종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데 노심초사하는 구원론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구원론이지 성경적인 구원론은 아닐 것이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는 가운데 곧 다가올 십자가의 죽음 뒤에 이어질 부활을 바라보며 ‘영생’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내리신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사복음서 중에서도 누가복음은 주로 '구원'이란 말을 많이 쓰고, 요한복음은 구원과 비슷한 의미로 '영생'이란 말을 많이 쓴다. 구원받은 결과로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니까 구원과 영생은 결국 같은 의미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영생을 구원이라고 바꿔 읽어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구원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다’라는 헬라어 동사 ‘기노스코’의 뜻인데, ‘체험적인 지식’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지적인 지식만이 아니라 친밀한 교제의 관계를 바탕으로 그분을 한 인격으로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따라서 영생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친밀한 교제의 관계를 맺는 것, 하나님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교제를 통해 그분과 친해지는 것이다.
성경에서 헬라어 ‘기노스코’는 히브리어로 ‘야다’인데, 남녀 사이의 성관계를 유대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다. 이 단어의 가장 주된 개념 역시 ‘경험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친밀한 관계 가운데 아는 것은 헬라어로 ‘기노스코’라 하고, 이름이나 신상 정보 정도로 아는 것은 헬라어로 ‘오이다’라고 한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는 말씀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귀신들의 지식이 바로 ‘오이다’에 해당한다. 귀신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그분과 친밀한 관계는 없어 두려워 떤다. 그리스도인이 정말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면 반드시 그분과 친밀한 교제의 관계 속에서 더욱 가까운 사이로 발전해가야 한다. 그래야 두려움과 불안, 염려가 사라지고 믿음이 자란다. 그래서
믿는다는 것과 아는 것은 사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관계를 통해 그분이 어떤 분인지 더 잘 알게 되면 그분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내 삶을 맡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을 발휘할 경우 내가 손해를 보게 된다 해도 기꺼이 믿음을 지킨다. 그렇게 하면 내가 친숙하게 아는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분의 섭리 가운데 나머지 일들을 책임져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나오는 영생은 주님과 친밀한 교제의 관계를 갖되 지속적으로 갖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말씀에 사용된 헬라어 동사 ‘기노스코’의 시제는 현재형으로 ‘기노스코신’이다. 헬라어에서 동사의 현재 시제는 동작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는 가지로 살아가는 신자들은 열매를 많이 맺고, 지속적으로나 습관적으로 범죄하는 삶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함을 누리게 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요 15:5)라는 말씀이나, “그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는 자마다 (지속적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나니”(요일 3:6)라는 말씀은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그분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는 것이 거룩한 삶을 위한 신자의 성화 과정에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건인지를 잘 보여준다.
일상에서도 우리가 누군가를 잘 알고 그와 친해지려면 단 한 번의 만남으로는 불가능하다. 처음 만났을 때 느낀 호감만으로는 더 깊은 관계로 들
어갈 수 없다. 요즘 젊은 연인들도 만난 지 백 일이 되었다든지, 1년이 되었다든지 하는 날을 기념하는 식으로 지속적인 만남을 의미 있게 여긴다. 인격체 간의 인격적인 관계가 깊어지고 발전하고 성숙해가려면 지속적인 만남과 사귐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아는 것에도 지속적인 만남과 사귐의 과정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말씀이시다. 그래서 신자가 그 하나님과 만나 교제할 수 있는 통로 또한 영혼의 호흡인 기도와 영혼의 양식인 말씀이다. 영생, 곧 구원은 이렇게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사귐의 관계라서 정적으로 고정되어 있거나 기계적인 공식처럼 굳어 있지 않다. 동적이며 살아 있다. 그래서 구원은 과거의 어느 한순간에 종결되어버린 ‘사건’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속적인 과정상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전통적인 구원관에서는 구원을 현재의 삶과 상관없이 과거의 어느 한순간에 확보된 정적인 사건의 하나로 이해한다. ‘왕년에 내가 한 번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걸 믿었기 때문에 내가 받은 구원은 영원토록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적인 구원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동적인 과정이다. 출애굽은 과거의 구원이고 광야 여정은 현재의 구원, 가나안땅 입성은 미래의 구원이라고 볼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신자들의 믿음의 대상은 그들의 구속의 근거가 되는 어떤 ‘사실’이 아니라 그들을 구속해준 ‘구속주’다. 그러니까 믿음의 대상은 비인격적인 특정 사실이 아니라 인격체인 하나님이시다. 내 믿음을 통해 어떤 사실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단회적인 것이다. 과거에 한 번 믿었던 것을 현재에도 별 노력 없이 유지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일제 시대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과거에 딱 한 번 믿고 나면 이후 그 사실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데 별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지구가 둥글다거나 1년이 365일이고 하루가 24시간이라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다. 그 믿음을 유지하는 데 방해를 받는다거나 그 믿음을 잃어버리게 될까봐 따로 애를 쓰거나 할 것도 없다. 한 번 기억으로 소유했던 것은 내 기억력이 소멸되지 않는 한 그냥 계속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인격체이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예전에 내가 한 번 가졌다고 해서 그 믿음이 고정적으로 항상 그대로 유지된다고 보기 어렵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는 서로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신실하겠다는 결혼 서약을 통해 맺어진 부부간의 관계와 비슷하다. 서로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 그 결혼의 약속을 잘 지켜나가는 것은 그냥 자동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결혼할 때 서로에게 약속했던 것을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잘 지켜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결혼 관계 역시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특정 사실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 사실과 함께 배우자라는 한 인격체와 맺어진 신뢰의 관계로 이뤄진다. 이런 관계에는 서로에 대한 신실함이 결혼 서약의 주된 요건이다. 이 신실함이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신혼시절에만 발휘되고 그 후에는 유야무야된다면, 그 결혼 관계는 결국 깨지고 말 가능성이 높다. 이 신실함이 지속되어야 그 둘의 결혼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꼭 이와 같다. 구원은 단회적인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신실하게 유지하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다. 결혼 생활처럼 예수님을 남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은 한순간의 결심과 헌신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꾸준히 지속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 사랑을 버린 에 베소 교회에게 회개를 통해 처음 행위를 가지지 않으면 촛대가 옮겨져 구원이 상실될 수 있다고 한 주님의 경고(계 2:4-5)는 지금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구원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안에 지속적으로 머무는 것이다. 이 구원의 순서는 출애굽 이후 이어진 광야 여정에 빗댈 수 있다. 이 여정에서도 신실함이 언약 관계를 성립시키는 요건이다. 하나님께는 신자들의 신실함이 곧 믿음이다. 이 신실함이 지속되어야 서로 간의 신뢰 관계가 계속 유지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는 순종이 곧 신실한 믿음의 표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불순종한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행함 있는 믿음에서 요구되는 순종은 단회적이거나 일시적인 순종이 아니라 기본적인 순종의 태도, 곧 지속적으로 순종하는 삶의 방향성이다. 구원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서 떠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지속적으로 깨어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관계가 구원과 영생을 얻는 신앙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관계를 유지하는 주된 통로인 기도하는 삶에 대해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권면할 정도였다. 그만큼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의 관계를 사모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신자의 ‘공로’와 ‘노력’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칭의 이후에도 여전히 본성상으로는 죄성을 지닌 채 살아가는 신자 역시 끊임없이 생
명과가 아닌 선악과로 자기 스스로 독립해서 제맘대로 살려는 죄인의 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영생은 하나님과의 교제이기 때문에 내주하신 성령님의 은혜와 인도하심 가운데 힘써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나아가 친밀한 사귐을 가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구원열차에 올라타게 해줄 티켓만 한 번 따면 다 된 거라는 전통적인 구원관에는 이런 친밀한 사귐을 갖기 위한 마땅한 노력마저 모두 인간의 공로로 치부되어버리곤 한다.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요 3:16)에서 ‘얻는다’는 헬라어 동사의 시제 역시 현재형이다.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얻고 그것을 계속적으로 누리는 삶이 전제되어 있다. 이 땅에서부터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가지며 사는 사람은 비록 온전하지는 못해도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영생의 능력과 기쁨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그 영생의 사귐 가운데서만 누릴 수 있는 참된 기쁨과 능력을 잘 모르면서도 ‘나는 예전에 한 번 예수님을 믿었으니까 죽고 나면 그래도 천국은 갈 거야’라고 막연히 믿고 사는 건 진정한 구원의 확신이 아니다. 참된 구원의 확신은 매일 매순간 내가 주님과의 진실한 사귐 가운데 사는 데 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이 구원이고 영생이라면, 그러한 구원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서 불안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하고도 지속적인 관계가 구원이라면, 그 관계를 통해 내 존재가 날로 더욱더 풍성해지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내가 부족함 없이 더욱 만족하게 되는 것이 참된 구원의 확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영생의 기쁨과 능력을 누리던 신자들이 죽어서도 영생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내가 죽고 나서 천국에 갈지 못 갈지 이 땅에서 내가 어떻게 알아?”라
는 말은 애초부터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지속적으로 깨어 있는 것이 모든 신자가 예외없이 가져야 할 진정한 구원의 확신이다.
-안환균 목사는 변증전도연구소장, 온누리교회 협동목사로 변증전도 사역을 섬기고 있습니다. 변증전도용 저서로 <기독교 팩트체크>(두란노), <하나님은 정말 어디 계시는가>(규장) 등이 있습니다. 안 목사님의 보다 많은 이야기는 유튜브 [GODTALK TV]로 들어가면 됩니다. [변증전도연구소 갓토크 TV youtube.com/@GOD-TALK-TV
1 month ago | [YT]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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