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문화연구소

[안환균 목사의 시선](14)

**내가 죽고 나서 천국에 갈지 못 갈지 이 땅에서 내가 어떻게 알아?


“구원의 보장이 없다면 뭐 하러 예수 믿나?”, “구원에 대한 불안에 삶의 의욕이 꺾인다.” 교회 안에서 행함 있는 믿음을 강조했더니 일부 신자들이 실제로 보인 반응이라고 한다. 구원받아 천국 가려고 예수님을 믿는 게 기독교 신앙의 전부일까? 주님과의 애틋한 사랑과 신뢰의 관계에서 우러나는 일상의 기쁨과 감사는 온데간데없는 이런 모습이 과연 바람직한 신앙인의 모습일까 반문해보게 된다.

영생을 얻는 구원은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다. 이 관계를 충실히 가꾸는 데 관심이 없어 불안과 염려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교리적으로나 법적으로는 구원받았으니까 안심해도 돼’라고 믿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을 성경이 보장하는 참된 구원의 확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주인이 아닌 종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데 노심초사하는 구원론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구원론이지 성경적인 구원론은 아닐 것이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는 가운데 곧 다가올 십자가의 죽음 뒤에 이어질 부활을 바라보며 ‘영생’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내리신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사복음서 중에서도 누가복음은 주로 '구원'이란 말을 많이 쓰고, 요한복음은 구원과 비슷한 의미로 '영생'이란 말을 많이 쓴다. 구원받은 결과로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니까 구원과 영생은 결국 같은 의미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영생을 구원이라고 바꿔 읽어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구원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다’라는 헬라어 동사 ‘기노스코’의 뜻인데, ‘체험적인 지식’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지적인 지식만이 아니라 친밀한 교제의 관계를 바탕으로 그분을 한 인격으로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따라서 영생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친밀한 교제의 관계를 맺는 것, 하나님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교제를 통해 그분과 친해지는 것이다.

성경에서 헬라어 ‘기노스코’는 히브리어로 ‘야다’인데, 남녀 사이의 성관계를 유대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다. 이 단어의 가장 주된 개념 역시 ‘경험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친밀한 관계 가운데 아는 것은 헬라어로 ‘기노스코’라 하고, 이름이나 신상 정보 정도로 아는 것은 헬라어로 ‘오이다’라고 한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는 말씀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귀신들의 지식이 바로 ‘오이다’에 해당한다. 귀신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그분과 친밀한 관계는 없어 두려워 떤다. 그리스도인이 정말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면 반드시 그분과 친밀한 교제의 관계 속에서 더욱 가까운 사이로 발전해가야 한다. 그래야 두려움과 불안, 염려가 사라지고 믿음이 자란다. 그래서
믿는다는 것과 아는 것은 사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관계를 통해 그분이 어떤 분인지 더 잘 알게 되면 그분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내 삶을 맡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을 발휘할 경우 내가 손해를 보게 된다 해도 기꺼이 믿음을 지킨다. 그렇게 하면 내가 친숙하게 아는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분의 섭리 가운데 나머지 일들을 책임져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나오는 영생은 주님과 친밀한 교제의 관계를 갖되 지속적으로 갖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말씀에 사용된 헬라어 동사 ‘기노스코’의 시제는 현재형으로 ‘기노스코신’이다. 헬라어에서 동사의 현재 시제는 동작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는 가지로 살아가는 신자들은 열매를 많이 맺고, 지속적으로나 습관적으로 범죄하는 삶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함을 누리게 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요 15:5)라는 말씀이나, “그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는 자마다 (지속적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나니”(요일 3:6)라는 말씀은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그분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는 것이 거룩한 삶을 위한 신자의 성화 과정에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건인지를 잘 보여준다.

일상에서도 우리가 누군가를 잘 알고 그와 친해지려면 단 한 번의 만남으로는 불가능하다. 처음 만났을 때 느낀 호감만으로는 더 깊은 관계로 들
어갈 수 없다. 요즘 젊은 연인들도 만난 지 백 일이 되었다든지, 1년이 되었다든지 하는 날을 기념하는 식으로 지속적인 만남을 의미 있게 여긴다. 인격체 간의 인격적인 관계가 깊어지고 발전하고 성숙해가려면 지속적인 만남과 사귐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아는 것에도 지속적인 만남과 사귐의 과정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말씀이시다. 그래서 신자가 그 하나님과 만나 교제할 수 있는 통로 또한 영혼의 호흡인 기도와 영혼의 양식인 말씀이다. 영생, 곧 구원은 이렇게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사귐의 관계라서 정적으로 고정되어 있거나 기계적인 공식처럼 굳어 있지 않다. 동적이며 살아 있다. 그래서 구원은 과거의 어느 한순간에 종결되어버린 ‘사건’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속적인 과정상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전통적인 구원관에서는 구원을 현재의 삶과 상관없이 과거의 어느 한순간에 확보된 정적인 사건의 하나로 이해한다. ‘왕년에 내가 한 번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걸 믿었기 때문에 내가 받은 구원은 영원토록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적인 구원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동적인 과정이다. 출애굽은 과거의 구원이고 광야 여정은 현재의 구원, 가나안땅 입성은 미래의 구원이라고 볼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신자들의 믿음의 대상은 그들의 구속의 근거가 되는 어떤 ‘사실’이 아니라 그들을 구속해준 ‘구속주’다. 그러니까 믿음의 대상은 비인격적인 특정 사실이 아니라 인격체인 하나님이시다. 내 믿음을 통해 어떤 사실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단회적인 것이다. 과거에 한 번 믿었던 것을 현재에도 별 노력 없이 유지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일제 시대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과거에 딱 한 번 믿고 나면 이후 그 사실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데 별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지구가 둥글다거나 1년이 365일이고 하루가 24시간이라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다. 그 믿음을 유지하는 데 방해를 받는다거나 그 믿음을 잃어버리게 될까봐 따로 애를 쓰거나 할 것도 없다. 한 번 기억으로 소유했던 것은 내 기억력이 소멸되지 않는 한 그냥 계속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인격체이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예전에 내가 한 번 가졌다고 해서 그 믿음이 고정적으로 항상 그대로 유지된다고 보기 어렵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는 서로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신실하겠다는 결혼 서약을 통해 맺어진 부부간의 관계와 비슷하다. 서로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 그 결혼의 약속을 잘 지켜나가는 것은 그냥 자동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결혼할 때 서로에게 약속했던 것을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잘 지켜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결혼 관계 역시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특정 사실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 사실과 함께 배우자라는 한 인격체와 맺어진 신뢰의 관계로 이뤄진다. 이런 관계에는 서로에 대한 신실함이 결혼 서약의 주된 요건이다. 이 신실함이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신혼시절에만 발휘되고 그 후에는 유야무야된다면, 그 결혼 관계는 결국 깨지고 말 가능성이 높다. 이 신실함이 지속되어야 그 둘의 결혼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꼭 이와 같다. 구원은 단회적인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신실하게 유지하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다. 결혼 생활처럼 예수님을 남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은 한순간의 결심과 헌신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꾸준히 지속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 사랑을 버린 에 베소 교회에게 회개를 통해 처음 행위를 가지지 않으면 촛대가 옮겨져 구원이 상실될 수 있다고 한 주님의 경고(계 2:4-5)는 지금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구원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안에 지속적으로 머무는 것이다. 이 구원의 순서는 출애굽 이후 이어진 광야 여정에 빗댈 수 있다. 이 여정에서도 신실함이 언약 관계를 성립시키는 요건이다. 하나님께는 신자들의 신실함이 곧 믿음이다. 이 신실함이 지속되어야 서로 간의 신뢰 관계가 계속 유지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는 순종이 곧 신실한 믿음의 표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불순종한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행함 있는 믿음에서 요구되는 순종은 단회적이거나 일시적인 순종이 아니라 기본적인 순종의 태도, 곧 지속적으로 순종하는 삶의 방향성이다. 구원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서 떠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지속적으로 깨어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관계가 구원과 영생을 얻는 신앙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관계를 유지하는 주된 통로인 기도하는 삶에 대해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권면할 정도였다. 그만큼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의 관계를 사모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신자의 ‘공로’와 ‘노력’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칭의 이후에도 여전히 본성상으로는 죄성을 지닌 채 살아가는 신자 역시 끊임없이 생
명과가 아닌 선악과로 자기 스스로 독립해서 제맘대로 살려는 죄인의 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영생은 하나님과의 교제이기 때문에 내주하신 성령님의 은혜와 인도하심 가운데 힘써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나아가 친밀한 사귐을 가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구원열차에 올라타게 해줄 티켓만 한 번 따면 다 된 거라는 전통적인 구원관에는 이런 친밀한 사귐을 갖기 위한 마땅한 노력마저 모두 인간의 공로로 치부되어버리곤 한다.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요 3:16)에서 ‘얻는다’는 헬라어 동사의 시제 역시 현재형이다.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얻고 그것을 계속적으로 누리는 삶이 전제되어 있다. 이 땅에서부터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가지며 사는 사람은 비록 온전하지는 못해도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영생의 능력과 기쁨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그 영생의 사귐 가운데서만 누릴 수 있는 참된 기쁨과 능력을 잘 모르면서도 ‘나는 예전에 한 번 예수님을 믿었으니까 죽고 나면 그래도 천국은 갈 거야’라고 막연히 믿고 사는 건 진정한 구원의 확신이 아니다. 참된 구원의 확신은 매일 매순간 내가 주님과의 진실한 사귐 가운데 사는 데 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이 구원이고 영생이라면, 그러한 구원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서 불안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하고도 지속적인 관계가 구원이라면, 그 관계를 통해 내 존재가 날로 더욱더 풍성해지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내가 부족함 없이 더욱 만족하게 되는 것이 참된 구원의 확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영생의 기쁨과 능력을 누리던 신자들이 죽어서도 영생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내가 죽고 나서 천국에 갈지 못 갈지 이 땅에서 내가 어떻게 알아?”라
는 말은 애초부터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지속적으로 깨어 있는 것이 모든 신자가 예외없이 가져야 할 진정한 구원의 확신이다.

-안환균 목사는 변증전도연구소장, 온누리교회 협동목사로 변증전도 사역을 섬기고 있습니다. 변증전도용 저서로 <기독교 팩트체크>(두란노), <하나님은 정말 어디 계시는가>(규장) 등이 있습니다. 안 목사님의 보다 많은 이야기는 유튜브 [GODTALK TV]로 들어가면 됩니다. [변증전도연구소 갓토크 TV youtube.com/@GOD-TALK-TV

1 month ago | [YT] |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