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에 널어둔 빨래가 사흘째 그대로였다. 햇빛은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을 내밀었다가 금세 숨어버렸고, 그 사이 옷들은 눅눅한 채로 무게를 잃지 못했다. 수건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빨래가 마르지 않는 동안 나도 제자리에 멈춰 있는 듯했다.
그냥 세탁기 안에 두면 될 걸, 굳이 꺼내 널어놓고 기다리는 건 집착 같기도 했다. 하지만 물기가 남은 옷감을 손끝으로 만질 때, 어쩐지 살아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직 다 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처럼.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게 때론 버티는 방식이 될 수도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이틀 전부터 베란다 창문을 조금 열어두었다. 비가 들이칠까 봐 자꾸 확인했지만, 결국 빗방울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바람이 드나드는 틈새에서 나는 낯선 기분을 얻었다. 창문은 열려 있는데, 방은 닫혀 있는 듯한. 세상은 흘러가는데, 나는 아직 걸음을 내딛지 않은 듯한.
밤이 되면 습기가 더 도드라졌다. 벽지 냄새, 오래된 장판 냄새, 젖은 옷감의 냄새가 겹쳐졌다. 그 냄새 속에 묘한 위로가 있었다. 어쩌면 집이란 건 완벽히 쾌적한 공간이 아니라, 조금은 눅눅하고 불완전한 채로 나를 감싸는 곳일지도 모른다.
사흘째, 결국 드라이기를 꺼내 옷들 사이를 오가며 바람을 쐬었다. 그제야 옷감들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가벼워진 건 옷뿐만이 아니었다. 묵은 마음 하나가 함께 날아간 것 같았다. 완벽하게 마르진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때로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릴 적, 나는 이불 속에서 수많은 모험을 했다. 전등의 희미한 빛 아래 만화책을 읽으며 외계인을 물리치고, 시간여행을 하며 역사를 바로잡았다. 이불은 나만의 요새였고, 세계는 내 손끝에서 구원받았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는 이불 속에서 보내는 시간의 의미가 조금 달라졌다. 더 이상 모험을 떠나기보다는 현실로부터의 도피처가 되었다.
우리 모두 이불 속에서 세계를 구해본 적이 있지 않은가? 물론, 그 세계는 우리의 상상이 만들어낸 작은 우주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 나는 이불 속에서의 또 다른 영웅적 행위를 깨닫게 되었다.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혹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요즘 시대는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바쁘게 일하고, 끊임없이 뭔가를 성취해야만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불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하루를 보내는 나날도 필요하다. 게으름을 죄악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불 속의 하루는 가장 반항적인 저항이 될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충전하는 시간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뇌는 이불 속에서 가장 창의적이다. 누워서 아무런 방해 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은 삶의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줄 때가 많다. 나는 이불 속에서 미래의 계획을 세우고, 잊고 있던 소중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때로는 스스로에게 진실한 위로를 건넨다. 그곳은 단순한 천 조각 아래가 아니라, 가장 안전한 사유의 공간이다.
이불 속에서 세계를 구하는 방법은 이제 달라졌다. 과거에는 상상의 힘으로 외부 세계를 구했다면, 지금은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이불 속에 머문다. 그리고 그 작은 행위가 결국 내 주변의 세계를 구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쯤은 이불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게 바로 내가 세계를 구하는 방식이니까.
도시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낮의 얼굴이고, 또 하나는 밤의 얼굴이다. 이 두 얼굴은 같은 공간에서 존재하지만, 서로 다른 언어로 말을 건다. 같은 거리를 걸어도, 같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셔도, 이 두 얼굴은 같은 장면을 전혀 다르게 그려낸다. 마치 낮과 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흐르고 있는 것처럼.
낮의 도시는 바쁘다. 직장인들은 정해진 리듬에 맞춰 움직이고, 신호등은 쉴 새 없이 바뀌며, 자동차의 경적 소리와 사람들의 발걸음은 어쩌면 하나의 거대한 합주곡 같다. 낮의 도시에서는 규칙과 효율이 지배한다.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정확하고, 공간은 치밀하게 설계된다. 사람들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그 틈바구니에서 미세하게 어긋난 움직임들은 곧잘 눈에 띈다. 잠깐 멈춰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은 드물고, 창가에 걸터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는 사람은 어딘가 낯설다.
하지만 밤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해가 지고 가로등이 켜지면, 도시의 두 번째 얼굴이 나타난다. 낮 동안 긴장된 근육들은 풀리고, 규칙들은 느슨해진다. 퇴근길의 피로를 안고 걷는 사람들은 조금 느려지고, 골목길의 불빛은 어둠 속에서 부드럽게 깜빡인다. 거리의 소음은 사라지고, 대신 낮에는 들리지 않던 바람 소리와 나직한 대화들이 도시를 채운다.
낮의 도시가 목적을 향한 끊임없는 움직임이라면, 밤의 도시는 목적 없이 떠도는 자유다. 밤의 카페에서는 혼자 앉아 책을 읽는 사람이나, 창가에 앉아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낮에는 한낱 불안한 공상이었던 생각들이 밤의 어둠 속에서는 더 깊고 선명하게 빛난다. 마치 어둠이 마음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어, 숨겨두었던 생각들이 자유롭게 풀려나는 것 같다.
도시의 낮과 밤은 마치 한 사람이 가진 양면성처럼, 서로를 보완하며 공존한다. 낮이 없다면밤의 의미는 흐려진다. 밤은 낮의 긴장을 풀어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고, 낮은 밤의 여유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존재한다. 만약 이 둘 중 하나가 사라진다면, 도시는 균형을 잃고 그 매력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밝기만 한 도시, 혹은 영원히 어두운 도시를 상상해보라. 그곳에서는 마침내 우리는 숨 쉴 공간을 잃고 말 것이다.
낮은 성취를 요구하고, 밤은 그 성취를 반추할 여유를 준다. 낮은 움직임과 도전을 부추기고, 밤은 그 도전의 의미를 곱씹을 시간을 허락한다. 우리는 낮 동안 누군가의 동료, 상사, 학생, 고객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밤이 되면, 그 모든 역할을 내려놓고 다시 ‘나’로 돌아온다. 불 꺼진 창가에서 혼자 마시는 차 한 잔, 고요한 공원에서 듣는 풀벌레 소리, 빌딩의 불빛을 바라보며 느끼는 알 수 없는 감정들. 밤은 우리에게 그 모든 ‘사소하지만 중요한 순간’을 선사한다.
낮과 밤의 교대는 물리적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서도 일어난다. 사람은 누구나 내면에 태양과 달을 품고 산다.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순간들이 있는가 하면, 침묵과 성찰이 필요한 순간들도 있다. 어느 한쪽에만 치우친 삶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우리가 도시의 낮과 밤을 필요로 하듯, 우리 내면도 그 두 얼굴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도시의 낮을 살아가는 것은 기술이지만, 도시의 밤을 누리는 것은 예술이다. 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속에서 창의력을 찾고, 감정을 치유하며, 자신을 돌아본다. 가끔은 밤의 도시를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주름이 펴지고, 복잡한 생각들이 정리된다. 그런 의미에서 밤은 단순한 쉼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다시 아침이 찾아오고, 도시가 눈을 뜨면 우리는 다시 바쁘게 움직일 것이다. 하지만 그 바쁨 속에서도 밤의 여운은 남아 있다. 낮 동안 지치고 흔들릴지라도, 다시 밤이 찾아와 우리를 감싸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도시의 낮과 밤 사이에서 살아간다. 그 끝없는 교차 속에서, 우리는 균형을 찾아가는 중이다.
어쩌면 도시의 진짜 아름다움은, 이 낮과 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 경계의 순간에 있는지도 모른다. 해가 질 무렵, 하늘이 붉게 타오르고, 건물의 불빛이 하나둘 켜질 때. 그 짧은 순간, 도시의 두 얼굴이 맞닿고, 우리는 삶의 고요와 움직임이 교차하는 지점을 목격한다.
거실 한구석에 자리 잡은 낡은 벽시계는 3시 15분에서 멈춘 지 오래다. 가끔 지나는 손님들은 이 시계를 보고 시간을 잘못 짚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계는 틀린 시간만을 알려주는 게 아니다. 문득 고개를 들어 그 멈춘 시각을 볼 때마다, 나는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시간이 멈춘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멈춘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마치 무심한 채찍질 같다. 하루가 바쁘게 흘러가면서도, 3시 15분의 그 정적은 내게 쉴 틈 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멈춤을 요구한다. 그 시계는 나에게 조용히 묻는다. “너는 지금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니?”
고장 난 시계가 알려주는 건 단순한 시간의 오류가 아니다. 그 안에는 멈춘 순간을 되짚어 보라는, 느긋하게 나 자신을 돌아보라는 무언의 충고가 담겨 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저 나뭇잎이 흔들리는 모습이나 지나가는 행인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장면을 통해 그 존재를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바람은 단순히 날씨의 일부가 아니다. 바람은 움직임이고, 변화이며,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수많은 순간을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실이다.
나는 종종 바람을 의인화해 상상하곤 한다. 바람은 마치 우리의 이야기를 몰래 엿듣는 장난꾸러기 같다. 내가 혼자 길을 걸으며 속삭이는 혼잣말, 친구와 나누는 소소한 비밀, 창가에서 새어 나오는 낡은 라디오의 멜로디까지, 바람은 모든 소리를 한데 모아 어딘가로 흘려보낸다. 그러다 문득, 낯선 곳에서 익숙한 냄새나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다. 나는 그것이 바람이 전해준 이야기의 흔적이라고 믿는다.
어느 날이었다. 오래된 골목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찻집 앞에서 바람이 내게 속삭였다. “들어가 보라”고. 나는 이끌리듯 문을 열고 들어갔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친구를 만났다. “우연”이라는 단어로 포장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바람이 날 데려다준 것이라고 확신했다.
바람은 때로 불편하고, 심지어 성가시기까지 하다. 거센 바람은 우산을 망가뜨리고, 꽃잎을 산산조각내며 우리의 일상을 흔들어 놓는다. 하지만 그 혼란 속에서도 바람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 “멈추지 말라”고. 바람처럼 흐르고, 흔들리며, 부서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라고.
바람은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손에 잡히지 않아도,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 바람은 단지 자연 현상이 아니다. 바람은 삶이다.
오늘도 바람이 분다. 당신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이는지, 잠시 귀 기울여보라. 어쩌면 당신이 잊고 있던 무언가를 다시 떠올리게 해줄지도 모른다.
늦가을의 새벽, 창밖으로 흩날리는 마지막 낙엽 소리가 잠을 깨운다. 이 계절은 언제나 불면증을 동반한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을 때마다, 어제와 오늘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누구는 가을을 ‘시의 계절’이라 부르지만, 나에게는 ‘침묵의 계절’이다. 고요함 속에 숨겨진 불안, 그리고 그것을 견디며 찾아오는 작은 깨달음들. 불면은 때로 고통이지만, 그 속에서 비로소 나 자신과 대화할 수 있다.
-
In the late autumn dawn, the sound of the last leaves scattering outside the window wakes me. This season always brings insomnia. Each time the cold air brushes my skin, the line between yesterday and today blurs. Some call autumn the “season of poetry,” but to me, it’s the “season of silence.” Hidden in the quiet are moments of unease and the subtle realizations that emerge through endurance. Insomnia can be painful, but it’s in those sleepless hours that I finally converse with myself.
아침마다 마시는 커피 한 잔. 흔히들 이 평범한 일상을 당연히 여긴다. 하지만 나는 이 작은 잔 속에 우주가 있다고 믿는다. 콩 한 알을 키운 태양, 이를 가꾼 농부의 땀방울, 바다를 건넌 항구의 바람, 로스팅 기계의 뜨거운 열기까지. 한 모금 속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커피를 마실 때마다 나는 이 우주와 조우한다.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평범한 것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특별해진다. 커피 향 속에서 오늘도 나는 나만의 작은 우주를 발견한다.
-
A cup of coffee every morning. Many people take this simple daily routine for granted. But I believe there is a universe inside this small cup. The sun that nurtured a single coffee bean, the sweat of the farmer who tended to it, the breeze at the port it crossed over the ocean, and the intense heat of the roasting machine—how many stories are hidden in a single sip? Every time I drink coffee, I encounter this universe. In the end, everything ordinary becomes extraordinary when you look closely. Within the aroma of coffee, I discover my own little universe once again today.
내 책상 위에 오래된 모래시계가 있다. 돌릴 때마다 느리게 흘러내리는 모래알들은 마치 내 하루하루를 비추는 거울 같다. 하지만 가끔은 문득 궁금해진다. 모래알들은 떨어지며 서로에게 어떤 말을 건넬까? ‘서로 부딪히다 보면 모양이 조금씩 달라지는 걸까?’ 아니면, 떨어지는 순간만이 전부인 걸까? 나도 모래알처럼 늘 시간 속에서 흘러가고 있지만, 누군가의 모래시계 안에 나는 어떤 흔적으로 남을까 생각해본다. 흔적은 결국 시간의 조각이다. 그리고 그 조각들은 나를 만든다.
-
On my desk sits an old hourglass. Every time I flip it over, the grains of sand slowly trickle down, as if reflecting my day-to-day life. But sometimes, I can’t help but wonder—what do the grains of sand say to each other as they fall? “Do we change shape little by little as we collide with one another?” Or is the moment of falling all there is to their existence? Like the grains of sand, I, too, flow through time, but I wonder—what kind of trace will I leave in someone else’s hourglass? Traces are, after all, fragments of time. And those fragments are what shape me.
현이
《빨래가 마르지 않는 날》
베란다에 널어둔 빨래가 사흘째 그대로였다. 햇빛은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을 내밀었다가 금세 숨어버렸고, 그 사이 옷들은 눅눅한 채로 무게를 잃지 못했다. 수건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빨래가 마르지 않는 동안 나도 제자리에 멈춰 있는 듯했다.
그냥 세탁기 안에 두면 될 걸, 굳이 꺼내 널어놓고 기다리는 건 집착 같기도 했다. 하지만 물기가 남은 옷감을 손끝으로 만질 때, 어쩐지 살아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직 다 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처럼.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게 때론 버티는 방식이 될 수도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이틀 전부터 베란다 창문을 조금 열어두었다. 비가 들이칠까 봐 자꾸 확인했지만, 결국 빗방울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바람이 드나드는 틈새에서 나는 낯선 기분을 얻었다. 창문은 열려 있는데, 방은 닫혀 있는 듯한. 세상은 흘러가는데, 나는 아직 걸음을 내딛지 않은 듯한.
밤이 되면 습기가 더 도드라졌다. 벽지 냄새, 오래된 장판 냄새, 젖은 옷감의 냄새가 겹쳐졌다. 그 냄새 속에 묘한 위로가 있었다. 어쩌면 집이란 건 완벽히 쾌적한 공간이 아니라, 조금은 눅눅하고 불완전한 채로 나를 감싸는 곳일지도 모른다.
사흘째, 결국 드라이기를 꺼내 옷들 사이를 오가며 바람을 쐬었다. 그제야 옷감들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가벼워진 건 옷뿐만이 아니었다. 묵은 마음 하나가 함께 날아간 것 같았다. 완벽하게 마르진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때로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 months ago | [YT] | 0
View 0 replies
현이
부모님 건강검진받으러 가기 전에 보여드려야지.
7 months ago | [YT] | 1
View 0 replies
현이
8 months ago | [YT] | 1
View 0 replies
현이
이불 속에서 세계를 구하다.
어릴 적, 나는 이불 속에서 수많은 모험을 했다. 전등의 희미한 빛 아래 만화책을 읽으며 외계인을 물리치고, 시간여행을 하며 역사를 바로잡았다. 이불은 나만의 요새였고, 세계는 내 손끝에서 구원받았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는 이불 속에서 보내는 시간의 의미가 조금 달라졌다. 더 이상 모험을 떠나기보다는 현실로부터의 도피처가 되었다.
우리 모두 이불 속에서 세계를 구해본 적이 있지 않은가? 물론, 그 세계는 우리의 상상이 만들어낸 작은 우주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 나는 이불 속에서의 또 다른 영웅적 행위를 깨닫게 되었다.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혹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요즘 시대는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바쁘게 일하고, 끊임없이 뭔가를 성취해야만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불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하루를 보내는 나날도 필요하다. 게으름을 죄악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불 속의 하루는 가장 반항적인 저항이 될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충전하는 시간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뇌는 이불 속에서 가장 창의적이다. 누워서 아무런 방해 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은 삶의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줄 때가 많다. 나는 이불 속에서 미래의 계획을 세우고, 잊고 있던 소중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때로는 스스로에게 진실한 위로를 건넨다. 그곳은 단순한 천 조각 아래가 아니라, 가장 안전한 사유의 공간이다.
이불 속에서 세계를 구하는 방법은 이제 달라졌다. 과거에는 상상의 힘으로 외부 세계를 구했다면, 지금은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이불 속에 머문다. 그리고 그 작은 행위가 결국 내 주변의 세계를 구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쯤은 이불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게 바로 내가 세계를 구하는 방식이니까.
9 months ago | [YT] | 1
View 0 replies
현이
도시의 낮과 밤 사이에서
도시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낮의 얼굴이고, 또 하나는 밤의 얼굴이다. 이 두 얼굴은 같은 공간에서 존재하지만, 서로 다른 언어로 말을 건다. 같은 거리를 걸어도, 같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셔도, 이 두 얼굴은 같은 장면을 전혀 다르게 그려낸다. 마치 낮과 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흐르고 있는 것처럼.
낮의 도시는 바쁘다. 직장인들은 정해진 리듬에 맞춰 움직이고, 신호등은 쉴 새 없이 바뀌며, 자동차의 경적 소리와 사람들의 발걸음은 어쩌면 하나의 거대한 합주곡 같다. 낮의 도시에서는 규칙과 효율이 지배한다.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정확하고, 공간은 치밀하게 설계된다. 사람들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그 틈바구니에서 미세하게 어긋난 움직임들은 곧잘 눈에 띈다. 잠깐 멈춰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은 드물고, 창가에 걸터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는 사람은 어딘가 낯설다.
하지만 밤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해가 지고 가로등이 켜지면, 도시의 두 번째 얼굴이 나타난다. 낮 동안 긴장된 근육들은 풀리고, 규칙들은 느슨해진다. 퇴근길의 피로를 안고 걷는 사람들은 조금 느려지고, 골목길의 불빛은 어둠 속에서 부드럽게 깜빡인다. 거리의 소음은 사라지고, 대신 낮에는 들리지 않던 바람 소리와 나직한 대화들이 도시를 채운다.
낮의 도시가 목적을 향한 끊임없는 움직임이라면, 밤의 도시는 목적 없이 떠도는 자유다. 밤의 카페에서는 혼자 앉아 책을 읽는 사람이나, 창가에 앉아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낮에는 한낱 불안한 공상이었던 생각들이 밤의 어둠 속에서는 더 깊고 선명하게 빛난다. 마치 어둠이 마음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어, 숨겨두었던 생각들이 자유롭게 풀려나는 것 같다.
도시의 낮과 밤은 마치 한 사람이 가진 양면성처럼, 서로를 보완하며 공존한다. 낮이 없다면밤의 의미는 흐려진다. 밤은 낮의 긴장을 풀어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고, 낮은 밤의 여유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존재한다. 만약 이 둘 중 하나가 사라진다면, 도시는 균형을 잃고 그 매력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밝기만 한 도시, 혹은 영원히 어두운 도시를 상상해보라. 그곳에서는 마침내 우리는 숨 쉴 공간을 잃고 말 것이다.
낮은 성취를 요구하고, 밤은 그 성취를 반추할 여유를 준다. 낮은 움직임과 도전을 부추기고, 밤은 그 도전의 의미를 곱씹을 시간을 허락한다. 우리는 낮 동안 누군가의 동료, 상사, 학생, 고객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밤이 되면, 그 모든 역할을 내려놓고 다시 ‘나’로 돌아온다. 불 꺼진 창가에서 혼자 마시는 차 한 잔, 고요한 공원에서 듣는 풀벌레 소리, 빌딩의 불빛을 바라보며 느끼는 알 수 없는 감정들. 밤은 우리에게 그 모든 ‘사소하지만 중요한 순간’을 선사한다.
낮과 밤의 교대는 물리적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서도 일어난다. 사람은 누구나 내면에 태양과 달을 품고 산다.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순간들이 있는가 하면, 침묵과 성찰이 필요한 순간들도 있다. 어느 한쪽에만 치우친 삶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우리가 도시의 낮과 밤을 필요로 하듯, 우리 내면도 그 두 얼굴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도시의 낮을 살아가는 것은 기술이지만, 도시의 밤을 누리는 것은 예술이다. 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속에서 창의력을 찾고, 감정을 치유하며, 자신을 돌아본다. 가끔은 밤의 도시를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주름이 펴지고, 복잡한 생각들이 정리된다. 그런 의미에서 밤은 단순한 쉼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다시 아침이 찾아오고, 도시가 눈을 뜨면 우리는 다시 바쁘게 움직일 것이다. 하지만 그 바쁨 속에서도 밤의 여운은 남아 있다. 낮 동안 지치고 흔들릴지라도, 다시 밤이 찾아와 우리를 감싸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도시의 낮과 밤 사이에서 살아간다. 그 끝없는 교차 속에서, 우리는 균형을 찾아가는 중이다.
어쩌면 도시의 진짜 아름다움은, 이 낮과 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 경계의 순간에 있는지도 모른다. 해가 질 무렵, 하늘이 붉게 타오르고, 건물의 불빛이 하나둘 켜질 때. 그 짧은 순간, 도시의 두 얼굴이 맞닿고, 우리는 삶의 고요와 움직임이 교차하는 지점을 목격한다.
10 months ago | [YT] | 1
View 0 replies
현이
고장 난 시계가 알려주는 시간
거실 한구석에 자리 잡은 낡은 벽시계는 3시 15분에서 멈춘 지 오래다. 가끔 지나는 손님들은 이 시계를 보고 시간을 잘못 짚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계는 틀린 시간만을 알려주는 게 아니다. 문득 고개를 들어 그 멈춘 시각을 볼 때마다, 나는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시간이 멈춘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멈춘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마치 무심한 채찍질 같다. 하루가 바쁘게 흘러가면서도, 3시 15분의 그 정적은 내게 쉴 틈 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멈춤을 요구한다. 그 시계는 나에게 조용히 묻는다. “너는 지금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니?”
고장 난 시계가 알려주는 건 단순한 시간의 오류가 아니다. 그 안에는 멈춘 순간을 되짚어 보라는, 느긋하게 나 자신을 돌아보라는 무언의 충고가 담겨 있다.
10 months ago | [YT] | 1
View 0 replies
현이
바람이 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저 나뭇잎이 흔들리는 모습이나 지나가는 행인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장면을 통해 그 존재를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바람은 단순히 날씨의 일부가 아니다. 바람은 움직임이고, 변화이며,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수많은 순간을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실이다.
나는 종종 바람을 의인화해 상상하곤 한다. 바람은 마치 우리의 이야기를 몰래 엿듣는 장난꾸러기 같다. 내가 혼자 길을 걸으며 속삭이는 혼잣말, 친구와 나누는 소소한 비밀, 창가에서 새어 나오는 낡은 라디오의 멜로디까지, 바람은 모든 소리를 한데 모아 어딘가로 흘려보낸다. 그러다 문득, 낯선 곳에서 익숙한 냄새나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다. 나는 그것이 바람이 전해준 이야기의 흔적이라고 믿는다.
어느 날이었다. 오래된 골목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찻집 앞에서 바람이 내게 속삭였다. “들어가 보라”고. 나는 이끌리듯 문을 열고 들어갔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친구를 만났다. “우연”이라는 단어로 포장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바람이 날 데려다준 것이라고 확신했다.
바람은 때로 불편하고, 심지어 성가시기까지 하다. 거센 바람은 우산을 망가뜨리고, 꽃잎을 산산조각내며 우리의 일상을 흔들어 놓는다. 하지만 그 혼란 속에서도 바람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 “멈추지 말라”고. 바람처럼 흐르고, 흔들리며, 부서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라고.
바람은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손에 잡히지 않아도,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 바람은 단지 자연 현상이 아니다. 바람은 삶이다.
오늘도 바람이 분다. 당신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이는지, 잠시 귀 기울여보라. 어쩌면 당신이 잊고 있던 무언가를 다시 떠올리게 해줄지도 모른다.
11 months ago | [YT] | 1
View 0 replies
현이
늦가을의 새벽, 창밖으로 흩날리는 마지막 낙엽 소리가 잠을 깨운다. 이 계절은 언제나 불면증을 동반한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을 때마다, 어제와 오늘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누구는 가을을 ‘시의 계절’이라 부르지만, 나에게는 ‘침묵의 계절’이다. 고요함 속에 숨겨진 불안, 그리고 그것을 견디며 찾아오는 작은 깨달음들. 불면은 때로 고통이지만, 그 속에서 비로소 나 자신과 대화할 수 있다.
-
In the late autumn dawn, the sound of the last leaves scattering outside the window wakes me. This season always brings insomnia. Each time the cold air brushes my skin, the line between yesterday and today blurs. Some call autumn the “season of poetry,” but to me, it’s the “season of silence.” Hidden in the quiet are moments of unease and the subtle realizations that emerge through endurance. Insomnia can be painful, but it’s in those sleepless hours that I finally converse with myself.
-
晩秋の夜明け、窓の外で舞い散る最後の落ち葉の音に目が覚める。この季節はいつも不眠を連れてくる。冷たい空気が肌に触れるたびに、昨日と今日の境界が曖昧になる。誰かにとって秋は「詩の季節」と呼ばれるが、私にとっては「沈黙の季節」だ。静けさの中に隠された不安、そしてそれに耐えながら見つける小さな気づき。不眠は時に苦痛だが、その時間の中で初めて自分と対話できるのだ。
11 months ago | [YT] | 1
View 0 replies
현이
아침마다 마시는 커피 한 잔. 흔히들 이 평범한 일상을 당연히 여긴다. 하지만 나는 이 작은 잔 속에 우주가 있다고 믿는다. 콩 한 알을 키운 태양, 이를 가꾼 농부의 땀방울, 바다를 건넌 항구의 바람, 로스팅 기계의 뜨거운 열기까지. 한 모금 속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커피를 마실 때마다 나는 이 우주와 조우한다.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평범한 것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특별해진다. 커피 향 속에서 오늘도 나는 나만의 작은 우주를 발견한다.
-
A cup of coffee every morning. Many people take this simple daily routine for granted. But I believe there is a universe inside this small cup. The sun that nurtured a single coffee bean, the sweat of the farmer who tended to it, the breeze at the port it crossed over the ocean, and the intense heat of the roasting machine—how many stories are hidden in a single sip? Every time I drink coffee, I encounter this universe. In the end, everything ordinary becomes extraordinary when you look closely. Within the aroma of coffee, I discover my own little universe once again today.
-
毎朝飲む一杯のコーヒー。多くの人がこの何気ない日常を当たり前のものとして捉えています。でも私は、この小さなカップの中に宇宙があると信じています。一粒のコーヒー豆を育てた太陽、それを育てた農家の汗、海を越えた港の風、焙煎機の熱気まで。一口の中にどれほど多くの物語が隠れているのでしょうか。コーヒーを飲むたびに私はこの宇宙と出会います。結局のところ、私たちが向き合うすべての平凡なものは、よく見れば特別になります。コーヒーの香りの中で、今日も私は自分だけの小さな宇宙を発見します。
11 months ago (edited) | [YT] | 1
View 0 replies
현이
내 책상 위에 오래된 모래시계가 있다. 돌릴 때마다 느리게 흘러내리는 모래알들은 마치 내 하루하루를 비추는 거울 같다. 하지만 가끔은 문득 궁금해진다. 모래알들은 떨어지며 서로에게 어떤 말을 건넬까? ‘서로 부딪히다 보면 모양이 조금씩 달라지는 걸까?’ 아니면, 떨어지는 순간만이 전부인 걸까? 나도 모래알처럼 늘 시간 속에서 흘러가고 있지만, 누군가의 모래시계 안에 나는 어떤 흔적으로 남을까 생각해본다. 흔적은 결국 시간의 조각이다. 그리고 그 조각들은 나를 만든다.
-
On my desk sits an old hourglass. Every time I flip it over, the grains of sand slowly trickle down, as if reflecting my day-to-day life. But sometimes, I can’t help but wonder—what do the grains of sand say to each other as they fall? “Do we change shape little by little as we collide with one another?” Or is the moment of falling all there is to their existence? Like the grains of sand, I, too, flow through time, but I wonder—what kind of trace will I leave in someone else’s hourglass? Traces are, after all, fragments of time. And those fragments are what shape me.
-
机の上に古い砂時計が置いてある。ひっくり返すたびに、ゆっくりと流れ落ちる砂粒は、まるで私の日々を映す鏡のようだ。でも、時々ふと思う。砂粒たちは落ちながら、お互いにどんな言葉を交わしているのだろう?「お互いにぶつかりながら、少しずつ形を変えていくのだろうか?」それとも、落ちるその瞬間だけが全てなのだろうか?私も砂粒のようにいつも時間の中を流れているけれど、誰かの砂時計の中で私はどんな痕跡を残すのだろうかと考える。痕跡とは結局、時間の欠片だ。そして、その欠片が私を形作る。
11 months ago (edited) | [YT] | 1
View 0 repl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