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Jesus Story 채널에 오신 분들을 축복합니다. :)
저는 호주 브리즈번에 살고 있는 오명석 이라고 합니다.
2011년에 호주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하여 딸 아이 한 명의 아빠가 되었고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통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마음을 받아 이 채널을 개설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 및 삶에서 만난 예수님의 이야기들을
이 채널을 통해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크리스천분들이 만난 예수님의 이야기들을 영상으로 담아내기 전,
제가 만났던 예수그리스도! 그리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들을 시간순으로 게시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매번, 실패하고 넘어지는 시골 출신의 보잘것 없는 사람 이지만,
온 마음 다하여 그분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시고 있는 기이한 일들을 전하며 예배하길 소망합니다.
[운영자 소개]
1984년 김천에서 태어났고 경남 합천 야로에서 자랐습니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L.C.F라는 농촌 지역의 학생들을 섬기시기 위해
주말마다 농촌으로 들어오신 I.V.F출신 대학생 (배신효,박기쁨,김희연)분들의
헌신과 돌봄, 그리고 가족같이 지냈던 야로제일교회 성도님들의 사랑과 기도로
성장하게 하셨고 대학시절에는, 김천구미 C.C.C에서 훈련받게 하시며
23대 총순장 으로 그 지역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예장통합 목사님이신 할아버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선교사로의 삶을 준비하며
여러 차례 선교지로 나가는 것을 원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때마다 허락하지 않으셨고
보내는 선교사의 삶을 감당할 수 있도록 호주 브리즈번 에서 비즈니스를 맡기셨습니다.
현재, 호주 브리즈번 New Dream Church 에서
정기언 목사님 양육 아래 간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 이야기Jesus Story
#십계명: 제3계명, 하나님을 영화롭게
[말씀]
출애굽기 20:7 (개혁개정)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도입]
이 계명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만 않으면 된다는 건가?
그럼 망령되이 부르지 마라는 의미는 뭘까?
이번 시간엔 위의 질문에 대한 답과 함께,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르는 제 3계명의 진짜 의미에 대해 깊게 풀어보고자 한다.
[본문 해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먼저 그 시대의 문화를 이해 해야한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수백년간 종살이 하면서 애굽이 섬기는 수많은 신들의 주술적, 마술적 관습 뿐 아니라 가나안의 우상숭배와 거짓 예언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런 이방 민족들은 자신이 섬기는 신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부르면, 그 존재를 소환하고 조종하여 자신이 원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런 주술적이고 마술적인 풍습이 익숙했을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이와 같은 목적으로 부르는 것을 엄격히 금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과 망령되게 부르지 마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살펴보자.
"이름"
원어: 히브리어: שֵׁם, shem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히 호칭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 본질,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
“망령되이”
원어: la-shav
1)욕설로 사용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훼손 시키는 것
예) ‘지저스 크라이스트’ 라며 욕으로 사용하는 행위
기복신앙, 교회 내 직분을 이용한 권력 남용 등
크리스천이라 말하면서 남을 실족하게 만들거나 하나님 이름에 먹칠하는 행위
2)자신의 이익을 위해
예)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왜곡해 타인을 속이고 조종하려는 행위
3)경외함 없이, 가볍게, 가치 없이, 형식적으로
예) ‘오마이갓‘
4)그외에도 주술적 사용, 거짓맹세, 헛되게 사용하는 것도 포함한다.
[비유]
결혼식 장에는 수많은 하객과 증인들이 가득하다.
신랑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신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언약한다.
”당신을 사랑하고, 끝까지 지키고, 내 이름과 명예로 당신을 높이겠습니다.”
신부 역시 대답한다.
“당신만을 사랑하고, 당신의 이름을 내 이름처럼 존귀히 여기며 그 이름에 걸맞는 품위로 당신을 영화롭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 아내의 본심이 드러났다. 그녀는 사실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다. 오직 그의 재력과 명성을 빌려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했을 뿐이다. 그녀는 남편의 이름을 팔아 주변 사람들을 협박하고 공갈하며, “내가 누구 아내인지 알아?”라며 거칠게 군림했다. 그녀는 약자들을 괴롭히고 거짓말로 이익을 챙기며 남편의 이름으로 사기극도 벌였다.
남편의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나올 때마다 사랑과 존귀와 명성을 드러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이름은 사람들을 찌르는 공포와 탐욕의 칼날로 변질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도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며 하나님의 이름을 그들에게 맡기셨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 이름을 오용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시켰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당신의 이름을 맡기셨음을 늘 기억해야한다.
[결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무엇일까? 그 이름에 걸맞는 수준으로 행동함으로 그 이름을 빛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을 통해 이웃사랑과 남 용서를 실현하고 삶으로 드리는 순종의 예배를 드리면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보호하는 3계명의 핵심이다.
[질문]
1)당신은 오늘, 하나님을 이용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했는가? 아니면 영화롭게 했는가?
2)당신은 오늘, ’오마이갓‘이나 ‘지저스크라이스‘ 같은 말을 함부로 내뱉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했는가?
3)당신은 오늘, 크리스천 답지 못하게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했는가? 아니면 이웃 사랑, 용서 등의 말씀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했는가?
2 months ago (edited) | [YT] | 3
View 0 replies
예수님 이야기Jesus Story
#십계명: 제2계명, 우상을 깨부수는 예배
[말씀]
출애굽기 20:4‑6 (개역개정)
4 절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절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도입]
첫 째 계명이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것이면, 둘 째 계명은 그 사랑의 표현으로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어떻게 예배하는 거냐고? 심플하게는 우리가 만든 우상의 형상을 매순간 깨부시고 보이지 않은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그럼 왜 보이지 않는대로 예배하라 하시며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신 걸까? 본문에서 3가지 이유로 설명해 보겠다.
[본문 해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우상”이란? (4절)
히브리어로 '페셀'이라 하며 ‘조각상, 형상’을 뜻한다.
1)왜곡의 위험
무한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생각으로 축소하고 왜곡한 후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한 형상으로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신 4:15‑16)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금송아지 모양으로 만들었다.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우리 수준으로 축소, 왜곡하는 것 자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의 틀을 만드는 것과 같다.)
2)주권의 침해
자신이 원하는 형상을 만든 후,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꺼냈다 뺐다하며 자신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주인 되어 하나님을 종처럼 부리는 주권 침해에 해당한다. (행 17:29)
3)관계의 파괴 – 하나님은 인격적 교제를 원하시는데, 우상은 ‘거래’ 의 수단으로만 만들어버린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는 파괴된다. (시 115:4‑8)
[비유] 사진 속 배우자와의 결혼 생활
신혼부부가 있다고 해보자. 남편이 출장 중인 아내를 그리워해 액자 속 사진만 붙잡고 하루 종일 대화한다. 정작 아내에겐 전화도 하지 않고 문자도 남기지 않는다고 상상해보라. 사진은 사랑의 추억을 상기시켜주지만, 그것이 ‘대상 그 자체’는 아니다. 출장에서 돌아와 아내를 만났지만 남편은 아내에게 말을 걸지 않고 사진만 보고있다. 아내의 마음은 어떨까?
불행히도 우리 역시 하나님께 이렇게 대하곤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예배나 사역에 더 집중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상의 형상을 만들고 섬기는 새로운 형태의 우상인 것이다.
[질문]
1)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예배의 ‘형식’ 이나 ‘사역’에 집착해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2)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축소하거나 이용하려는 마음이 있지는 않은가?
[결론]
하나님을 위한 일이지만 정착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치게 만드는 사역들은 지금도 우리 마음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엔 우상의 형상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이런 ’우상의 틀‘이 있고 이를 통해 끊임없이 우상이 제조됨을 인정해야한다. (예 17:9, 롬7:24, 롬13:14, 벧전2:11) 또한 우리는 죄악된 육신의 옷을 입고 있는 한 마음에 있는 우상의 틀을 완전히 제거할 수도 없다는 것도 인정해야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결책으로 성령을 주셨다. 날마다 성령으로 우리가 만들어내는 우상의 형상을 깨부셔야 한다. (롬8:13, 갈5:17, 요한복음 4:24)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교제 없는 예배나 사역을 성령으로 깨부수라.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중심적 예배와 사역으로 들어가라. 이것이 제 2계명이 말하는 본질적 예배이다.
3 months ago (edited) | [YT] | 2
View 1 reply
예수님 이야기Jesus Story
#십계명: 제1계명, 결혼 서약 처럼
[말씀]
출애굽기 20:3-6 (개혁개정)
3절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절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절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절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도입] 사랑의 언약으로 주어진 첫 계명
하나님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다. 그리고 마치 신랑과 신부가 결혼하듯 이스라엘의 동의하에 사랑의 언약 관계를 맺으신 후, 이 계명을 주셨다. (출 20:2). 따라서 이 첫 계명은 억압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에게 주신 사랑의 요구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첫 계명을 풀어보겠다.
[본문 해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1.“신”이란?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로 있었을 당시, 애굽엔 수백개의 신들이 있었다. (바알, 아세라, 몰렉등과 개구리, 나일강, 이, 파리, 종기,우박 등)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다른 신이란, 눈에 보이는 형상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도 포함한다. 즉 하나님 보다 더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사상과 세계관 까지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사람, 돈, 명예, 권력, 학벌, 쾌락, 자녀, 게임, TV, 심지어 성공적인 사역이 그런것들이다.
2.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마라?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단순히 문자적으로 우상이란 형상을 만들어 곁에두고 그 신을 믿지 마라는 정도일까? 이 말씀의 히브리어 직역은 “내 얼굴 앞에 어떤 다른 신도 두지 마라”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의 시선과 마음이 하나님만 바라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들이 “신”이며 그런것들을 제거 하라는 명령이다.
[비유] 혼인 서약을 깨뜨리는 슬픔
예를들어 막 결혼한 신혼부부가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런데 어느날부터 여자가 돈 많은 직장 대표와 외도를 하기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그 남자를 신혼방까지 데리고 왔다. 신랑은 투명인간 취급하고 그 남자를 쳐다보며 미소짓는다. 당신이라면 마음이 어떨까? 배신감과 깊은 아픔이 밀려올 것이다.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우리가 바로 하나님께 이러한 죄를 매일 짓고 있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마음은 어떨까?
[질문]
1)오늘 당신의 시선과 마음은 어디를 향해 미소짓고 있는가?
2)지금 당장 제거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결론]
우리는 하나님과 사랑의 언약을 맺은 관계라는 것을 잊지 말고 우리의 시선과 마음이 하나님께로만 향해야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금도 “내 얼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며 매일 우리를 초대하신다.
4 months ago (edited) | [YT] | 5
View 0 replies
예수님 이야기Jesus Story
#십계명, 대부분 십계명을 오해한다.
간혹 사람들은 십계명을 하나님이 종에게 일방적으로 명령하시는 율법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오해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단순한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신랑과 신부가 서로 동의하고 언약을 맺듯 그런 언약적 관계를 맺길 원하셨다.
그래서 십계명을 주신 것이다. 그렇기에 십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신랑(하나님)과 신부(그의 백성)가 결혼 전 서로의 동의하에 사랑의 언약을 맺는 ”서약서“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이 개념이 먼저 이해되고 나면, 십계명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지게 될 것이다. 이해를 돕기위해 이 부분을 좀 더 정리하겠다.
.
.
#십계명을 주신 이유
십계명이 결혼 서약과도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서약서를 주신 이유가 뭘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마치 신랑 신부가 언약을 맺고 결혼하듯 그런 사랑의 언약을 맺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십계명을 받고 언약 맺은 장소인 시내산은 결혼식장으로 표현하기도한다. 또한, 광야에서의 삶은 신랑과 신부가 언약을 맺은 후 함께 살아가는 신혼의 시기로 표현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광야 시절을 “신혼의 때”라고도 “말씀하셨다.
그 증거가 되는 말씀이 바로 예레미야 2:2 (개혁개정)이다.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쳐 말하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청년의 때의 인애(헤세드, 변치않는 수수힌 언약적 사랑) 와 네 신혼의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이 말씀 외에도 이 사건이 마치 결혼과도 같다는 4가지 말씀을 더 나누겠다.
1.출애굽기 19:10-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고, 준비하게 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
:그 시대 결혼 풍습에선 신부가 결혼식 전에 깨끗한 옷을 입고 정결하게 준비 했었다. 이와 동일하게 신랑 하나님은 신부 이스라엘에게 마치 결혼식 전에 신부가 몸을 정결하게 하듯 옷을 빨고 준비시키신다.
2.출애굽기 19:5-6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여기에서 ”소유(히브리어로 סְגֻלָּה / segullah)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그 시대 당시 신랑이 신부를 맞이할때 쓰는 말이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단순히 재산이나 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귀하게 여기는 보물, 특별한 사랑을 받은 존재를 뜻하는 신부를 뜻했다.
3.출애굽기 24: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모든 법도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하니라.
:이 부분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명령이 아니라 백성들이 이 말씀에 동의하며 “우리가 이 언약을 지키겠다”라는 서약임을 말해준다. 그 시대 결혼식장에서도 동일하게 신랑(하나님)이 서약을 제시하면 신부(이스라엘)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4.출애굽기 24:9-11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그 시대 결혼식에선 결혼 서약(언약) 후엔 신랑과 신부 측 가족이 함께 식사를 나누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결혼 언약이 확정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것이었다. 이와 동일하게 언약식을 마친 직 후 이스라엘 대표인 장로 70명과 모세, 아론, 나답, 아비후가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언약적 식사”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신 이유는, 이스라엘을 종으로 삼아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율법을 주신 게 아니었다. 결혼 서약과 같이 서로의 동의하에 사랑의 언약을 맺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이해 됐다면 지금 부턴 그 언약서(십계명)에 뭐라고 쓰셨고, 목적은 무엇인지 이야기 하겠다.
#언약서(십계명) 내용
십계명의 두 돌판엔 크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으로 요약된다. 그럼 이런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위한 계명들을 10가지로 세분화 시켜 말씀하신 이유는 뭘까?
단순히 지키냐 안 지키냐를 따져서 판단하시겠다는 것일까?
만약 당신 결혼상대가 날 사랑한다면 7시 정각에 일어나 7:10분까지 모닝커피를 타고 과일을 깎아 아침을 준비하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7:10분엔 잔잔한 음악과 마사지로 깨우라 했다고 가정해보라. 7:30분 정각엔 설거지, 빨래, 청소를 완료하라 강요한다. 그런 조항들을 수백개를 만든 후 “그걸 정확히 지켜야 날 사랑하는 것으로 인정하겠다.“라고 한다면 어떨까?
숨이 막힐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마음없이 억지로 지켰다고 생각해보라. 이것이 서로를 위한 진정한 사랑일까?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런식으로 율법을 오해했다. 그래서 10계명에 600개가 넘는 율법조항을 세부적으로 만들었고 철저히 지켰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책망받았다. (마15:7-9, 마23:23-24, 마23:27-28) 바리새인들은 형식적으로 율법을 다 지켰지만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아브라함은 어땠을까? 하나님이 말씀하신바를 못지켰는데 의롭다 칭찬받았다. 왜 그런걸까? 아브라함이 죄를 짓고 넘어져도 끊임없이 다시 일어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지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걸어갔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의 태도”가 이 언약서(십계명)의 핵심이다. (호6:6, 삼상16:7, 신6:5)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마음의 태도”를 “사랑”으로 보신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주신 이유는,
첫 째, 결혼 같이 언약을 맺자는 것이고 (출 19:5-6)
그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그 다음은 우리의 이웃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연약하고 심지어 악하기 까지 해서 그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 하나님도 이것을 너무나 잘 아신다.
그럼에도 이런 언약을 요구하신 또 둘 째 이유는,
율법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늘 배워가라는 것이다.
위에서도 말했듯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를 종 다루듯 율법을 일방적으로 명령하신 후 지키냐 안지키냐를 확인하시려는 게 아니다.
실패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함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율법)으로 계속 걸어가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받길 원하셨고 으런 마음의 태도를 사랑으로 보시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은 성경 곳곳에 나온다. 이것을 증명하는 3가지 말씀을 나누겠다.
1.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순한 제사의 형식이 아니라 ‘인애(헤세드, 변치 않는 사랑)’와 ‘하나님을 아는 것’, 즉 사랑의 관계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형식적으로만 따랐다. 하지만 하나님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을 원하셨던것이다.
2.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제사의 목적도, 율법을 주신 이유도 결국 하나님을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단순한 규칙 준수를 원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태도로 살아가길 원하신다.
3. 신명기 10:12-13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 하나님이 수 많은 제사의 형식을 주신것은 제사의 형식 자체를 지키라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러 실패하고 넘어지는 것에 묶이지 마라. 우리는 이런 사랑의 언약(율법)을 지켜나갈 때, 넘어지고 실패하지만 다시 일어나는 싸이클을 계속 반복하게된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2가지를 더 배우게 되는데 이것이 율법을 주신 셋 째, 넷 째 이유이다.
셋 째, 우리의 연약함, 무능력함, 악함을 인정하게 된다.(롬3: 20)
넷 째,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임을 뼈저리게 깨닫고 신랑 되신 주님의 도움만 바라보게된다. (갈3:24)
즉, 율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어 하나님의 의가 필요함을 깨닫게 하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도록 주님께로 이끈다.
이런 개념들이 먼저 이해되어야 십계명을 풀 수 있다.
그럼, 다음 글부턴 존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설명한 십계명을 뼈대로 차례대로 정리해 보겠다.
7 months ago (edited) | [YT] | 5
View 2 replies
예수님 이야기Jesus Story
제목: 우리 몸을 살아있는 제물로 드리라?
로마서 12:1 (개역개정)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구약 예배에서의 제물은 죽여야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제물 대신 우리 몸을 살아있는 거룩한 제물로 드리라고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한 희생 제물이 되셨기에, 더 이상 특정 희생 제물을 죽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구약의 희생 제물은 우리 “몸과 삶 전체”로 대체되었다.
그러므로 간단히말해 우리의 “몸과 삶“을 거룩한 제물처럼 지속적으로 드리라는 것이다.
더 나은 이해를 돕기위해 로마서 12:1절 말씀의 단어들을 원어로 풀어보겠다,
1) 너희 몸 (헬라어: σῶμα, 소마)
“몸”은 모든 신체뿐 아니라 생각과 행동까지 포함하는 삶 전체를 의미한다.
2) 거룩한 (헬라어: ἅγιος, 하기오스)
거룩하다는 의미는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기에, 세속적인 것과 구별된다는 의미이다.
3) 산 (헬라어: ζῶ, 조)
육적으로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살아있다는 의미이며, 이것은 지속성을 의미한다.
4) 제물 (헬라어: θυσία, 뒤시아)
“제물”은 우리의 헌신과 희생을 상징한다.
5) 드리라 (헬라어: παρίστημι, 파리스테미)
드리라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꺼이 “드리다”, “바치다”, “헌신하다”라는 의미이다.
6) 영적 (헬라어: λογικός, 로기코스)
단순히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합당하고 이성적인 것도 포함한다.
7) 예배 (헬라어: λατρεία, 라트레이아)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모든 행위를 포함한다.
즉, 위에서 단어 하나씩 풀어보았듯 이 말씀은 우리의 몸, 생각, 능력, 시간, 행동과 같은 삶 전체를 제물 삼아 매순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묻고, 듣고, 구별해가며 주님께 드리는것이다. 이것이 삶으로 드리는 신약적 예배다. 그리고 이 예배는 죽은 제물로 드리는 구약의 제사와는 두 가지 다른점이있다.
1.형식이 없다
구약적 제사는 특정한 틀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신약의 예배는 장소나 형식과 시간적 틀 없이, 삶의 모든 영역을 예배로 드린다.
2.한 번 드리고 끝나지 않는다
죽은 제물은 한 번 드리면 끝나지만, 살아있는 제물(몸/생각/삶)은 죽지 않기에 끊임없이 드려진다.
.
.
이렇게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실질적인 예배는,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럼 이런 예배는 어떤 것일까?
1.커피 한 잔을 마실 때,
만족함을 느끼며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을 드리는 것 자체도 예배가 된다.
2.어떤 일을 할 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거룩하고 정직하게 한다면 그 일터가 예배당이 된다. 그곳에서 매일 8시간씩 일한다면 그 시간은 예배드리는 시간이 된다.
3.공부를 할 때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는 것이라면 그 시간은 공부 시간이기 이전에 예배 시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소나 형식과 시간적 틀이 없는 바울이 말한 “영적 예배”, 즉 몸과 삶 전체로 드리는 ”합당한 삶의 예배”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과 삶을 늘 거룩하게 하며 어디서든 예배하자!
8 months ago (edited) | [YT] | 4
View 0 replies
예수님 이야기Jesus Story
주기도문 #8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인류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은, 시험(고난,고통)에 대해 뭐라고 말했을까?
1.빌리 그레이엄
금세기 최고의 복음 전도자 였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그리스도인들은 역경의 풍랑을 맞아 더 아름답게 일어날 수 있다. 그들은 비바람이 거센 산마루에서 자라는 나무와도 같다. 그런 나무에서 우리는 가장 강한 목재를 얻을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2.찰스스펄전
설교의 황태자라 불리는 찰스스펄전 목사님도 “하나님은 고난의 고지대에서 최정예 병사들을 차출하신다.”라고 말씀하셨다.
3.스캇펙
세계적 심리학자 스캇펙은 ‘아직도 가야할 길’ 이라는 책에서, ”문제를 대면하는데 따르는 정당한 고통을 회피하는 것은 우리가 그 문제를 통해 가질 수 있는 성장도 회피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럼 예수님은 시험에 대해 뭐라고 가르치셨을까? 애석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 기도의 올바른 의미를 잘 모른다. 그런분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시험에 대해 지금부터 풀어보겠다.
.
.
고난과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시험(고난,고통) 없는 성장도 없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시험을 없애는 방법을 가르치시지 않으셨고 시험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가르치셨음을 먼저 기억해야한다.
이제, 아래 3가지 핵심 사항을 설명하겠다.
1.시험에 대한 원어적 의미
2.시험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3.시험의 유익
.
.
1.시험에 대한 원어적 의미: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시옵고
성경에 나오는 시험(헬라어: 페이라스모스)은 문맥에 따라 test 또는 temptation 로 해석된다. Test로 해석될 경우,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으로 ‘달아본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이 테스트는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고 정결하게 하기 위해 허락된 것이다. 그러나 마귀가 주는 “유혹”(헬라어: 페이라스모스가 동일하게 쓰임, 영어: temptation)으로 해석될 경우, 이 유혹은 우리를 죄로 넘어뜨리기 위한 것이된다. 두 가지 모두 고난을 수반하지만,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허락하시며, 이를 통해 결국 우리의 성장을 이루어가신다.(고전 10:13). 어쨌든 이 두가지 시험은 공통적 특징이있다. 그게 뭘까? 이 시험은 마치 씨앗과도 같아서 우리 마음속에 떨어진 후 점점 자라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다윗과 사울의 케이스를 살펴보자.
다윗은, 사울을 통한 고통과 고난의 시험을 받았다. 그리고 그 시험은 마치 씨앗처럼 다윗의 속사람의 밭에 떨어졌다. 다윗은 그 시험을 받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며 이겨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런 고통과 고난이 자신의 속사람과 얽히고 섥킬 때 그것이 좋은 씨앗이 되었고 좋은 뿌리를 내리게 만들었다. 결국 튼튼한 나무의 뿌리처럼 다윗의 속사람의 뿌리가 만들어가게된 것이다. 반면 사무엘 13,15장에 보면, 불순종에서 시작한 잘못된 씨앗이 사울의 속사람 밭에 뿌리내리며 자라기 시작했다. 이것을 제거하지 못한 사울은 다윗을 향한 시기와 질투 역시 이겨내지 못하고 잠식당해간다. 사울의 마음밭에 떨어진 그 씨앗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깊은 뿌리를 내렸고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해간다. 이로인해 다윗을 죽이기 위해 10여년간 창을 들고 다니는 살인의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시험과 유혹을 만날 때 이것들이 우리 속사람에게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기억하고 기도해야한다.
2.시험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예수님은 마6:13절에서 고통, 어려움, 이라는 단어를 마귀가 주는 시험이란 단어로 사용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마귀가 주는 그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는 태도를 가르치셨다. 여기서 기도하라는 원어적 의미는 단순히 점잖게 기도하는 행동을 넘어서 긴급한 간구를 의미한다. 마치 사단이 우리를 묶어 놓은 밧줄에서 우리를 구해달란 긴급한 간구인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까지 해야할까? 단순하다. 우린 아버지의 도움없이 사단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치 우리가 적군에게 묶인 상태에 있는 것 처럼, 긴급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라 가르치신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늘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태도를 유지하게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한 유혹이 오면, 자신의 힘과 의지로만 마귀와 싸운다. 그러나 기억할것은 아주 약한 유혹도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위와같이 적극적으로 기도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시험에 이겼다고 끝난 게 아니다. 겸손하게 늘 깨어있어야한다. 눅13:15 에 봐도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 후 떠났으나 적절한 시기가 올때까지만 잠시 떠났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 사탄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시험했다. 지금도 동일하게 사탄은 우리를 넘어뜨릴 작은 틈을 찾고 있다. 그러므로 늘 깨어있어야한다. 그러나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건 알지만 시험에 드는 일은 분명히 있다. 베드로, 다윗, 엘리야 그리고 아브라함도 시험에 들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것은 실패하고 넘어져도 하나님의 은혜의 손을 요청하며 그 손을 잡고 다시 일어나, 하나님을 향한 방향으로 다시 걸어가는것이다. 이걸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타밈(온전하다.)“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타밈 즉, 온전하다는 말씀은, 죄를 한 번도 안짓고 율법적으로 흠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넘어지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방향으로 계속해서 걸어가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험이 올 때, 내 힘으로 싸우려 하지말고 주님께 구해달라 기도하는 태도를 가져야한다. 뿐만아니라 실패하고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하나님을 향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태도를 가져야한다.
3.시험의 유익
성장을 위해선 시험이라는 고통과 고난을 통한 내면의 깨어짐을 통과해야한다. 그 깨어짐 없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성장을 위해 광야에서 시험을 받게하셨다. 이 말은 우리가 고난을 통해 성장되도록 창조주가 창조세계를 디자인 하셨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시험을 통과할때 얻을 수 있는 유익들을 살펴보자. 성경은 시험(고난과 고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야고보서 1:2-3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Temptation)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2) 야고보서 1:12
시험(Temptation)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3) 욥기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4) 신명기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줄이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5) 베드로전서 4:1-2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6) 히브리서 5:7-8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7)야고보서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뎌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8)로마서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
9)베드로전서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0)히브리서 12:11
모든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라.
또 다른 예를 살펴보자.
고통은 ”진주“를 만든다.
조개는 어떻게 진주를 만드는지 아는가? 조개는 외부에서 들어온 모래알이나 이물질로 인해 고통을 느낄 때 만들어진다. 작고 보잘것없는 이물질이 조개의 내부에 상처를 내며 지속적으로 자극을 주는 과정에서, 조개는 이를 견디기 위해 자신의 분비물을 끊임없이 만들기 시작한다. 그 결과, 세월이 흐르며 이물질은 아름답고 귀한 진주로 뒤덮혀가며 탄생한다.
고통은 ”산삼“을 만든다.
인삼과 산삼의 DNA는 같다. 인삼 씨앗이 일반적인 환경에서 자라면 인삼이 되지만 극한의 환경(척박한 땅, 변덕스러운 날씨, 산소가 낮은 고산지대, 곰팡이 공격, 한정된 영양분)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면 산삼이 된다.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과정을 통해 희귀 사포닌, 폴리페놀, 플라보노이드 등의 더 다양한 물질들을 고농도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고통은 ”정금“을 만든다.
정금은 불의 시험을 통해서만 순수함을 얻는다. 금속 속에 섞여 있는 불순물은 뜨거운 불길에 녹아 태워지고, 그 과정에서 오직 순수한 금만이 남는다. 불길은 금속을 녹여내는 고통을 주지만, 동시에 그 불순물을 걸러내어 찬란한 정금을 만든다.
고통은 “근육 운동”과도 같다.
근육은 가만히 있을 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근육을 써서 근육 세포가 찢어질 때 더 큰 근육 세포가 만들어진다. 근육이 커지고 강해지려면 이런 고통과 시련을 통과해야하듯 영성도 근육과 같아서 단련할수록 커지고 강해진다. 세례요한과 예수님도 광야에서 심령이 강해지셨고 이스라엘 백성도 광야에서 강해졌으며 미래 사역을 감당하도록 준비되었다.
시험(고난, 고통)은 ”시험 문제지를“ 푸는 것과 같다.
시험(고난, 고통)강도는 당신이 감당해야할 사역 사이즈에 비례한다. 학생들이 자기 학년에 맞는 수준의 시험 문제지를 풀고 채점 후 무엇이 부족한지 파악하듯, 자신이 이 시험을 몇 점에 통과했는지 채점하고 약점을 보완시켜야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준에 맞는 사이즈의 사역을 맡기시며 다음 레벨로 계속 성장해 나가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아둘람 굴에 숨어살때 단련되며 성장하게 하셨다. 그리고 준비가 되었을 때 자신처럼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다윗에게 보내셨다. 그때 다윗은 그들을 공감해주며 위로하고 섬길 수 있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다윗이 처했던 그 시험은, 하나님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만들기 위해 내면의 근육을 만드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고난과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시험(고난,고통) 없는 성장도 없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시험을 없애는 방법을 가르치시지 않으셨고 시험을 대하는 태도를 가르치셨음 늘 기억하자.
오늘 당신이 만난 어려움, 고통, 고난은 무엇인가?
나 역시 어젯밤부터 시험이 있었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대수롭지 않은 시험었으나 잘 이기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는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주님께 묻고있다.
당신도 시험을 만났다면, 잘 이겨내길 도전한다.
8 months ago (edited) | [YT] | 9
View 0 replies
예수님 이야기Jesus Story
하나님은 시험을 참고 시련을 견디는 종들을 어떻게 대우하실까?
야고보서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뎌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자신을 사랑하는 자로 대우하신다.
시험을 참고 시련을 견딜 수 있는 이유, 이 말씀 하나면 충분하다.
8 months ago | [YT] | 6
View 1 reply
예수님 이야기Jesus Story
성숙한 인격의 크기가 사역의 크기이다.
그러므로 사역을 키우려 하지 말고 인격을 키우려하자.
8 months ago | [YT] | 4
View 0 replies
예수님 이야기Jesus Story
믿음? 단순히 귀로 듣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당신은 지금까지 아래 말씀을 잘못 알았을 수 있다.
로마서 10:17 (개역개정)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서론]
많은 사람들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는 구절을 읽고, 믿음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들으면 생긴다고 오해하곤 한다. 하지만 이 구절의 원어적 의미는 그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성경이 말하는 “들음”의 올바른 의미를 다시 이야기 하고자한다.
.
.
들음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물리적 행위가 아니다
“듣는다”라는 단어는 보통 우리의 귀를 통해 소리를 듣는 물리적 행위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원어적 ”들음(ἀκοή, akoē)“은 헬라어로 ‘아코에’ 이며, 이 단어는 단순히 소리만 듣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에서의 “들음”은 귀로 듣고 마음으로 받아들인 후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행동을 포함한다.
예를들어, ‘우리 아이는 말을 참 잘 들어요.’라고 할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모두 안다. 아이가 청각이 좋아 소리를 잘 듣는다는 것이 아닌 말을 경청하고 잘 따른다는 뜻이지 않은가?
이를 성경으로도 다시 증명해 보겠다.
성경에는 많은 사람들이 귀로 복음을 들었지만 믿음이 생기지 않았던 사례가 있다. 예수님께서 여러 기적을 행하시며 말씀을 선포하셨지만,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오히려 그분을 배척했다. 그들은 귀로 예수님의 말을 들었지만, 마음으로는 닫혀 있었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귀로 들었지만, 모두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를 분명히 하시며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태복음 11:15)라고 하셨던 것이다.
반면,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며 “내가 만지기만 해도 나을 것이다”(마가복음 5:28)라고 믿었던 사건은 믿음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받아들였으며, 행동으로 반응했다. 이처럼 ”들음“은 말씀을 단순히 듣는 것을 넘어서, 그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행동하는것을 포함한다.
[결론]
믿음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듣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보여줄 때 시작된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다른말로 ’참믿음’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예배당)에 말씀 들으러가자’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단순히 귀로 듣기 위해 가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삶 속에서 행동하러 가자’의 의미인 것이다.
믿음은 그런 “들음”에서 시작됨을 되새기며 교회로 향하자!
8 months ago (edited) | [YT] | 7
View 2 replies
예수님 이야기Jesus Story
#주기도문 E.P 7 '용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용서에 대한 학문을 연구하는 스탠퍼드 대학교의 Fred luskin 박사는 용서에 대해 새롭게 정의했다. 용서란 나의 아픈 감정을 치유하고 해방되며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지 남을 위한 단순한 도덕적 의무가 아니다. 결국 용서하지 못하면 내게 유익이 아니라 해가 된다는 뜻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용서란 “나를 위한 것”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에게 용서하지 못할 극악무도한 잘못을 저지른 경우, 용서란 불가능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또한 어떤 누구도 용서해야 한다고 감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우리 크리스찬은 어떻게 해야 할까? 왜냐하면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18:22)
이 해결책은 예수님이 직접 가르치신 주기도문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럼 이제부터 예수님이 주기도문에서 가르치신 용서에 대한 기도를 풀어보겠다. 당신은 지금까지 이 기도를 잘못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이 기도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나면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 기도의 의미]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대부분 이 기도를 다음과 같이 조건절로 해석한다. 하나님께 죄 용서 받으려면 먼저 남의 죄를 용서해야 된다. 또는 용서한 만큼만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어 번역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행위로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잘못 해석되기 때문이다. (옙 1:7, 롬 3:24)
이 말씀의 정확한 원어적 의미는 죄 사함 받고 구원받아 은혜 속에 사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개인 및 공동체) 용서해 주신 것 같이 우리 개인 및 공동체의 죄를 용서하며 살아가겠습니다.’라는 선포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가 중요한 이유가 뭘까?
첫째, 어느 누구도 감히 용서하라고 말할 수 없지만 이 기도는 스스로 용서하며 살겠다고 선포하게 만든다.
둘째, 이 기도를 할 때마다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빚을 기억하고 감사하게 한다. 그래서 마음의 빚이 쌓이게 한다.
그런데 이 기도를 몇 번 선포한다고 해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쉽게 용서될까? 이것도 불가능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를 위해선 반드시 2가지 원칙을 기억해야한다.
나는 이 2가지 원칙을
1.The transfer of grace (은혜의 전가) 원칙
2. The holy mirror of light(거룩한 빛의 거울) 원칙
이라 부른다. 그리고 난 이 원칙을 성경의 인물들을 보며 발견했다.
지금 부터는 이 2가지 원칙을 자세히 풀어보겠다.
1.The transfer of grace (은혜의 전가) 원칙
감당하기 힘든 용서는 내 힘과 의지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인 용서를 하나님께 전가 받아야한다. 그럼 하나님의 성품인 용서를 전가받은 대표적인 인물 스데반을 살펴보자.
사도행전 7:59-60(개역개정)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당하는 순간에도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용서한다.
다음 인물은 바울이다. 바울은 사도행전과 그의 서신서들에서 자신이 많은 박해를 받았음을 언급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복수하거나 원한을 품지 않았고 그들을 용서하는 사랑을 강조했다. (딤후4:16-17, 롬12:19-21)
두 분 모두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성품 중 하나인 용서의 성품이 은혜로 부어졌기 때문이다.
2.The holy mirror of light(거룩한 빛의 거울) 원칙
이 원칙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던 작고 가벼운 죄도, 하나님의 거룩한 빛이 나오는 거울앞에 서면, 우리의 죄가 너무나 선명하고 크고 무겁고 느껴지게 된다는 원칙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당신이 하루종일 굶었다 가정해보자. 배가 너무 고파 짜장면 집에가서 짜장면과 짬뽕을 시켰다. 그리고 국물이 다 튈 정도로 심하게 면치기했다. 아차, 근데 흰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빛이 하나 없는 어두운 밤에 우리 자신을 본다면 어떨까? 아무리 노력해고 당신에게 튄 짜장면, 잠뽕 국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을것이다. 반대로 빛이 가득한 대낮에 거울로 우리 자신을 보면 어떨까? 가까에서 보면 볼 수록 흰옷에 튄 짜장면, 짬뽕 국물은 더 선명히 보일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빛 가운데 서서 우리 자신을보면, 죄의 얼룩은 심각하게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럼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해 자신의 죄를 보게 된 '이사야'를 살표보자.
이사야 6:5 (개역개정)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 하고”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자 자신의 죄가 드러나 부정한 자신이 죽게 되었노라 고백한다. 나 역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졌던 나의 작은 죄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그래서 용서해달며 울고 뒹굴었다.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또 다른 인물인 바울의 삶도 관찰해 보자. 딤전1:15에 보면 사도바울은 회심 후 누구보다 더 의롭게 살았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이라 고백한다. 왜일까? 이는 사도바울의 죄가 죄수들 보다 더 커서가 아니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죄가 더 크게 보이는 현상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께 가깝게 붙어있어야한다. 그래서 작은 죄라도 가증스럽고 혐오스러울 정도의 크고 무거운 죄로 느낄 수 있는 은혜가 부어져야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 받은 용서의 감격이 매일 넘칠것이다. 그리고 나를 용서해주신 하나님 은혜가 너무 감사해 그 빚을 갚고 싶은 마음도 생겨나게 될것이다. 그럼 그 빚은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간단하다.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의(개인, 공동체) 죄를 용서해 줌으로 갚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하나님이 내 죄와 우리 공동체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 처럼 우리도 개인과 공동체의 죄를 용서하며 살겠습니다.’ 라는 선포인 동시에 날 용서해주신 마음의 빚을 갚고자하는 의무도 함께 생기게 한다. 그리고 그 빚을 갚도록 인도한다.
그러므로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란 1)“나를 위한 것”임과 동시에 2) “하나님의 성품을 전가 받아 그 성품을 반영하는 것”이며 3)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개인 및 공동체) 용서해주신것 같이 우리도 개인 및 공동체의 죄를 용서하며 살아가겠습니다.’를 날마다 선포하길 도전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바울처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붙어있을 수 있는 은혜가 부어지길 기도하자.
8 months ago (edited) | [YT] | 5
View 1 reply
Lo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