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행 060401 04 017449 자율구독료 후원계좌 예금주 안경기 저희 부부는 32살 나이차에도 불구 하고 궁합이 아주 잘맞는 부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부부의 개인택시 일상과 경험을 공유하는 곳입니다~ 우리에게는 부족한 점이 많으며 모든 사람의 제안을 수용할 것입니다~ank121@hanmail.net 구독과 팔로우 감사합니다...010 3110 3351..누구나 출연신청 하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북한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 죽어서 기뻤던 날 1979년 10월26일 나는 북한에 있었다. 남포시 소재 농업대학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있었다. 그 다음날인 10월27일이라고 기억된다. 북한에 기본 신문인 <로동신문>에 대문짝 같은 기사가 실렸다. <박정희 역도가 뒈졌다!> 멋도 모르는 아이들까지 박정희가 죽었대! 하며 기뻐 뛰어다녔다. 통일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분위기로 들썩였다. 오로지 통일 때문에 이 모든 고생을 다하며 사는 정서의 반영이다. 통일은 미제와 그 앞잡이 저 도당 때문에 안되는 줄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12년 후에 탈북하여 연변에 체류할 때이다(1991년). 조선족 사회에서 가장 지식인 집에 찾아 간 적 있다. 연변 대학 정판용 부총장 댁인데 역시 책이 많았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뜻밖에도 <가장 악당의 책>이 있어 놀랐다. 박정희 전기에 관한 책인 것이다. 그때 만에도 한 중 수교가 없는 냉전 같은 시기였다. - 탈북하여 개방 사회에 나와 보니 매우 역설적인 것들에 직면한다. 북한에서 가장 악당이라고 했던 사람이 그 반대라는 것이다. 북한에서 가장 나쁜 나라가 가장 좋은 나라라는 것이다. 북한에서 가장 나쁜 나라는 당연히 미국과 일본이다. 미국과 일본을 가 볼 때마다 왜 이런 나라를 가장 욕했지 하며 나도 모르게 쑥스러워 지군 한다. - 나를 비롯하여 북한 사람들이 가장 욕을 많이 한 것이 박정희이다. 실물 사진은 한번도 본 적 없다. 깡마른 개상(犬相)에 새까만 안경을 낀 만화로만 보았다. 설사 실물 사진을 보여주었다 해도 김일성보다 훨씬 못 생겼을 것이다. - 남한과 북한은 일란성 쌍둥이로 똑같이 시작했다. 사실은 북한이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성장했다. 그런데 박정희 때부터 뒤집어 지기 시작했다.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 천국과 지옥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북한과의 비교 뿐 아니라 가난한 후진국 중 유일하게 선진국이 된 것이 남한이다. 모두의 노력이라고 하지만 이를 이끈 이는 박정희라고 한다. 선산이 전라도 익산인데 그 곳의 사람들도 이점은 인정한다. - 10.26 사건이 터지자 축제를 들었다는 최고의 석학 이춘근 박사가 있다. 박정희 때 해직도 당하는 등 미워하며 파고든 조갑제 대 기자가 있다. 이들은 모두 오늘날 불변의 박정희 찬양가들로 되어 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저서 제목이 모든 걸 말해준다. 가장 썼지만 단 이런 지도자가 다시 나오기를 기원해 본다. 아마도 다시 나오기 어렵지 않겠나 하면서 - 그래서 사건이 없었더라면 싱가포르 이관유 같은 독재자로 되지 않았을까. 또 실력 통일 주창자이니 통일도 이룩해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적어도 더러운 평화가 좋다는 지도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통일되면 북한 사람들도 박정희를 나처럼 놀라며 긍정할 것이다. 가장 달았지만 가장 쓴 김일성 3대세습에는 진짜 침을 뱉을 것이다.
안여택 TV
버스 승무원
1 week ago | [YT]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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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여택 TV
북한에서 오신 분글 퍼옴
북한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 죽어서 기뻤던 날
1979년 10월26일 나는 북한에 있었다.
남포시 소재 농업대학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있었다.
그 다음날인 10월27일이라고 기억된다.
북한에 기본 신문인 <로동신문>에 대문짝 같은 기사가 실렸다.
<박정희 역도가 뒈졌다!>
멋도 모르는 아이들까지 박정희가 죽었대! 하며 기뻐 뛰어다녔다.
통일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분위기로 들썩였다.
오로지 통일 때문에 이 모든 고생을 다하며 사는 정서의 반영이다.
통일은 미제와 그 앞잡이 저 도당 때문에 안되는 줄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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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후에 탈북하여 연변에 체류할 때이다(1991년).
조선족 사회에서 가장 지식인 집에 찾아 간 적 있다.
연변 대학 정판용 부총장 댁인데 역시 책이 많았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뜻밖에도 <가장 악당의 책>이 있어 놀랐다.
박정희 전기에 관한 책인 것이다.
그때 만에도 한 중 수교가 없는 냉전 같은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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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하여 개방 사회에 나와 보니 매우 역설적인 것들에 직면한다.
북한에서 가장 악당이라고 했던 사람이 그 반대라는 것이다.
북한에서 가장 나쁜 나라가 가장 좋은 나라라는 것이다.
북한에서 가장 나쁜 나라는 당연히 미국과 일본이다.
미국과 일본을 가 볼 때마다 왜 이런 나라를 가장 욕했지 하며
나도 모르게 쑥스러워 지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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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비롯하여 북한 사람들이 가장 욕을 많이 한 것이 박정희이다.
실물 사진은 한번도 본 적 없다.
깡마른 개상(犬相)에 새까만 안경을 낀 만화로만 보았다.
설사 실물 사진을 보여주었다 해도 김일성보다 훨씬 못 생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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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과 북한은 일란성 쌍둥이로 똑같이 시작했다.
사실은 북한이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성장했다.
그런데 박정희 때부터 뒤집어 지기 시작했다.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 천국과 지옥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북한과의 비교 뿐 아니라 가난한 후진국 중 유일하게 선진국이 된 것이 남한이다.
모두의 노력이라고 하지만 이를 이끈 이는 박정희라고 한다.
선산이 전라도 익산인데 그 곳의 사람들도 이점은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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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건이 터지자 축제를 들었다는 최고의 석학 이춘근 박사가 있다.
박정희 때 해직도 당하는 등 미워하며 파고든 조갑제 대 기자가 있다.
이들은 모두 오늘날 불변의 박정희 찬양가들로 되어 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저서 제목이 모든 걸 말해준다.
가장 썼지만 단 이런 지도자가 다시 나오기를 기원해 본다.
아마도 다시 나오기 어렵지 않겠나 하면서 -
그래서 사건이 없었더라면 싱가포르 이관유 같은 독재자로 되지 않았을까.
또 실력 통일 주창자이니 통일도 이룩해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적어도 더러운 평화가 좋다는 지도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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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되면 북한 사람들도 박정희를 나처럼 놀라며 긍정할 것이다.
가장 달았지만 가장 쓴 김일성 3대세습에는 진짜 침을 뱉을 것이다.
1 week ago | [YT]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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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여택 TV
“이놈의 허리야... 아직 버텨야지.”
그의 손에는 오래된 굳은살과 흙이 깊게 스며 있었다.
몇 번이고 자식들이 말렸지만,
할아버지는 끝내 논을 놓지 않았다.
“서울 사는 놈들이 먹는 밥, 이 논에서 나온 거야.”
그 한마디는
스스로를 붙잡는 마지막 자존심 같았다.
햇볕은 따가웠고, 바람은 메말랐다.
논두렁에 앉아 숨을 고를 때마다
그의 호흡엔 묵직한 세월이 묻어났다.
머리 위로 참새 떼가 날아올랐고,
허름한 모자는 이미 땀에 젖어 있었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손으로 흙을 한 줌 집어 들어,
“그래, 아직 살아 있네...” 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의 삶은 흙과 함께 시작했고,
이제 흙과 함께 끝나가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
할아버지는 집 마루에 앉아 막 베어낸 벼를 다듬었다.
작은 라디오에서는 트로트가 흘러나왔고,
그 옆에는 낡은 상자 하나가 있었다.
상자 안에는
매년 수확할 때마다 정성껏 포장해 두는 쌈채소와 김치가 들어 있었다.
그건 멀리 서울에 사는 아들과 손주에게 보낼 선물이었다.
“도시 음식은 짜다니까, 이걸 싸 먹으면 속이 편하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할아버지는 상자에 다시 천을 덮었다.
며칠 뒤, 우체국 택배원에게 상자를 건네는 손이 떨렸다.
“할아버지, 이제 직접 안 하셔도 돼요. 요즘은 다 사먹는다니까요.”
“허허, 사 먹는 밥이 다 같나. 내 손으로 한 게 더 맛있지.”
그는 그렇게 웃었지만,
돌아서는 발걸음은 조금 느려져 있었다.
그날 밤,
할아버지는 마당에 앉아 달을 바라보았다.
논물이 말라가고 있었다.
올해가, 아마 마지막이 될지도 몰랐다.
“그래도... 올해 벼 냄새는 참 좋다.”
그의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 논으로 스며들었다.
며칠 뒤, 비가 내렸다.
이웃이 논을 찾았을 때,
할아버지는 허수아비 옆에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손에는 아직 벼 한 줌이 쥐어져 있었다.
그 얼굴엔 평온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마치 오랜만에 흙과 함께 숨을 고른 사람처럼.
서울의 어느 아파트 주방,
손주는 택배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봉지에 담긴 쌈채소,
그리고 정갈하게 포장된 김치 한 통이 들어 있었다.
“엄마, 이거 할아버지가 보냈나 봐요.”
그 말에 어머니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손끝으로 김치통을 열자,
익은 김치 냄새가 천천히 퍼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작은 종이쪽지가 한 장 떨어졌다.
“우리 논은 올해로 끝이란다. 그래도 맛있게 먹어라.”
그날 저녁,
식탁 위에 놓인 김치와 쌈은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밥상이 되었다.
1 week ago | [YT]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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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여택 TV
1974년도에 윌급 215,000원은 많이 받으신분 입니다.
이때 쌀값이 한가마에 1만원내외 정도 했을걸로 생각 됩니다.
쌀 22가마정도 돈이니까 대단히 큰 돈이죠
이때 시골 머슴 년간 세경이 쌀 8~9가마 받았을 겁니다
1 week ago | [YT]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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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여택 TV
한국 서울의 거리 풍경을 담은 흑백 사진입니다.
사진 속에는 당시의 오래된 버스가 도로에 정차해 있으며,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버스 뒤편에는 여러 개의 전봇대와 복잡하게 얽힌 전선들이 당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거리에는 "국민은행"이라는 간판을 포함한 여러 상점의 간판들이 세워져 있으며, 이는 1960년대 한국의 경제 성장과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건물들의 외관, 사람들의 복장, 도로의 분위기를 통해 과거 서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1 week ago | [YT]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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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여택 TV
동네 형,누나,동생들 모여 자연스럽게 내 가족만 우선이 아닌 이웃과 함께하며 공동체를 알아가던 정다운 시절...
1 week ago | [YT]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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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여택 TV
사람 잘못 만나면 평생이 꼬인다
인생에서 누구를 만나느냐는 노력보다 더 큰 변수다.
돈보다 실력보다 무서운 게 인간관계다.
그래서 그는 늘 ※엮이면 안 되는 사람※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1.남 탓만 하며 사는 사람
실패해도 잘못해도 자기 책임은 없다.
늘 세상이나 타인을 탓한다.
이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결국 나도 피해자 의식에 물든다.
현실을 탓하는 사람 곁에선
현실을 바꿀 힘이 생기지 않는다.
2.입으로만 사는 사람
말은 그럴듯하지만 행동은 없다.
약속을 쉽게 하고 책임은 가볍게 여긴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을 봐야 한다※고 했다.
입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결국 주변의 신뢰를 갉아먹는다.
3.욕심이 끝이 없는 사람
도움을 줘도 더 달라 하고 함께 나눠도 불만이 많다.
욕심 많은 사람은 결국 모든 관계를 거래로 만든다.
※함께 일하려면 탐욕보다 신의를 먼저 봐라※고 강조했다.
욕심은 신뢰를 잠식시킨다.
4.남의 성공을 시기하는 사람
남 잘 되는 걸 못 보는 사람은 함께 성장할 수 없다.
축하 대신 비꼬고 칭찬 대신 깎아내린다.
이런 사람은 언젠가 당신의 행복에도 흠집을 낸다.
※남의 성공을 박수칠 줄 모르는 자는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고 했다.
인생을 ※사람 장사※라 표현했다.
결국 좋은 사람을 곁에 두는 게 최고의 재테크다.
믿음이 통하고!
말보다 행동이 앞서며!
욕심보다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
그런 사람 하나면!
백 명의 인맥보다 값지다!
1 week ago | [YT]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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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여택 TV
그리움 영글어서
가지도 휘이는 열매,참다 못해
가슴 찢고 나오는 비둘기떼들,
들꽃이 되고 바람 속에 몸을 푸는
갈숲도 되네
가을 햇볕에 눈물도 말려야지
가을 햇볕에 더욱 나는 사랑하고
있건만 말은 없이 기다림만 쌓여서
낙엽이 되네
아아 저녁 해를 안고 누운
긴 강물이나 되고지고
보고 싶은 너
이 마음이 저물어 밤하늘 되네
1 week ago | [YT]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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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여택 TV
형의 마지막 군번줄
겨울의 공기가 유난히 차가웠다.
산속 훈련장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칼날처럼 뺨을 스쳤다.
그날, 나는 형의 군번줄을 손에 쥐고 있었다.
희미하게 새겨진 이름,
“박현수.”
그건 형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그리고 나의 유일한 기도였다.
형은 어릴 적부터 나의 영웅이었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씌워주고,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면 항상 대신 싸워주던 사람.
“야, 울지 마. 남자는 울면 안 돼.”
그가 그렇게 말하던 날들이
아직도 귀에 선명하다.
스무 살이 되던 해,
형은 자원입대를 했다.
“나라 지키는 건 당연한 거야.”
그 말에 부모님은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훈련소로 떠나는 날,
형은 내 손에 군번줄 하나를 걸어줬다.
“내가 돌아오면 이거 돌려줘.
근데 혹시 못 돌아오면… 네가 대신 지켜줘.”
그러나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비무장지대 인근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
뉴스에는 짧은 문장으로만 나왔다.
“훈련 중 폭발 사고로 병사 1명 사망.”
그 이름을 본 순간,
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날 이후,
우리 집의 시계는 멈췄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형의 방 앞에서
군복 냄새를 맡으며 울었고,
아버지는 술잔을 붙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군번줄을 목에 걸고 학교를 다녔다.
밤마다 형의 꿈을 꾸었다.
눈 덮인 들판을 걷는 형,
멀리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던 모습.
“이제 울지 마라, 준호야.
나는 아직 여기 있잖아.”
하지만 손을 뻗으면
항상 사라졌다.
3년이 지난 어느 겨울,
나는 군에 입대했다.
형이 걸었던 길을 나도 따라 걷고 싶었다.
입소 첫날,
나는 몰래 형의 군번줄을 목에 걸었다.
밤이 되자, 내무반은 고요했다.
눈을 감으려던 순간,
침상 옆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
“야, 이불 잘 덮고 자라. 추워진다.”
형의 목소리였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내 침상 옆,
형의 군번줄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날 새벽,
부대 전체가 비상 경계에 들어갔다.
북쪽 경계선 근처에서 이상한 신호가 잡혔다고 했다.
나는 순찰조에 자원했다.
눈보라가 치는 새벽,
형이 훈련받던 바로 그 지역이었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낡은 군화 한 짝과 녹슨 군번줄 조각 하나를 발견했다.
그 조각엔 내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박준호.”
그 순간,
무전기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호야… 이제 돌려줘.
넌 충분히 지켰어.”
눈 속에서,
형의 그림자가 천천히 사라져 갔다.
바람이 잦아들자
내 목에 걸려 있던 군번줄이
조용히 끊어져 땅으로 떨어졌다.
그 위로 눈이 내려,
모든 걸 덮었다.
제대 후,
나는 형의 묘비 앞에 섰다.
손에는 군번줄 두 개.
하나는 형의 것,
하나는 내 것.
“형, 이젠 같이 있어요.
더 이상 혼자 지킬 일 없어요.”
묘비 앞의 깃발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날 밤,
나는 형의 군번줄을 묘비에 걸고 돌아섰다.
며칠 후,
부대에서는 이상한 보고가 올라왔다.
새벽 순찰 중인 병사들이
경계선 근처에서 군복 차림의 병사를 봤다고 했다.
그는 눈 속에서 조용히 경례를 하고 있었다고.
그 뒤로,
그 지역을 지나는 바람 소리엔
이상하게도 “충성!” 이라는 목소리가 섞여 들렸다.
1 week ago | [YT]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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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여택 TV
와우 신기방기 하네요
1 week ago | [YT]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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