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밀히 말하면 올해 쇼팽 콩쿠르는 살짝 반칙이다. 이미 프로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에릭 루를 우승자로 선정했으니 말이다. 재수생이나 삼수생 출전 금지 조항이 있는 건 아니지만 신인 발굴이라는 대의와는 어긋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조화가 언제나 말처럼 쉽지는 않다.
하지만 우승 이후 첫 내한 무대에서는 소득도 있었다. 압도적으로 선택 즐겨 연주하는 협주곡 1번이 아니라 2번을 KBS교향악단(지휘 레너드 슬래트킨)과 협연한 것. 그는 협주곡 2번으로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두 번째 연주자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첫 경우도 스승 당타이손이었다고 한다.
187cm의 엄청난 장신이었다. 마른 체형이어서 실제보다 더 커 보였다. 피아노 독주가 들어오기 직전 첫 악장 도입부의 관현악은 그리 가지런하지 않았다. 에릭 루의 쇼팽은 예상보다 이지적이고 분석적이었다. '츤데레'에 가깝게 보였는데 앙코르로 들려준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아리아에는 의외로 온기가 감돌았다. 단원이나 관객들 중엔 엷은 미소를 짓는 경우도 있었다.
후반은 쇼스타코비치 대곡인 교향곡 11번. 악단과 얄궂은 인연도 많은 곡이다. 2년 전에는 연주 도중 팀파니가 찢어지는 사고가 일어났지만 이원석 수석의 영민한 대처로 전화위복이 됐다.
이날도 온통 관심은 팀파니에 쏠렸다. 이원석 수석이 팀파니에 귀를 갖다대거나 채를 높이 들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거렸다. 50여 분의 대곡을 쉼없이 이어서 연주했지만 악단은 주제곡을 만난 듯 편안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서둘러 터진 안다 박수는 다소 아쉬웠지만 노장 슬래트킨은 수석들과 일일이 악수한 뒤 박수 갈채에 답하는 모습을 보였다. KBS의 주제곡다웠다. #레너드슬래트킨#에릭루#KBS교향익단
빈 필하모닉(지휘 크리스티안 틸레만)의 셋째 날 연주곡은 딱 한 곡, 브루크너 교향곡 5번이었다. 당장 틸레만이 무대로 올라오는 모습부터 범상치 않았다. 90여 분의 대곡임에도 보면대는 없었다. 단짝 빈 필과 단골 곡 브루크너를 연주할 때는 악보도 필요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첫 악장 도입부 더블베이스의 연속 피치카토부터 가슴이 뛰었다. 곧이어 현과 관이 빚어내는 깊고 두꺼운 소리의 층. 구조로는 건축물, 악기로는 오르간에 비유되는 그 사운드다. 과거의 거장들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 한 현재 지구 최강의 '브루크너 조합'일 듯싶었다.
이날도 경탄스러운 대목이 적지 않았다. 2악장 아다지오는 억지로 쥐어짜지 않아서 은은하고 여유 있었다. 3악장에서도 잊기 쉬운 춤곡의 그루브를 제대로 실렸다.
하지만 가장 놀라웠던 점은 이 모든 걸 일상의 일과처럼 척척 해내는 악단의 능력이다. 남들이 고봉 험산을 오르는 것처럼 힘겹게 등정할 때, 이들은 그저 또 하나의 음악회처럼 수행해낸다. 올 가을 베를린 필에 버금가는 악단은 오로지 빈 필뿐일 것이다. #크리스티안틸레만#빈필하모닉
불과 이틀 간격으로 같은 레퍼토리. 하겐 콰르텟과 파벨 하스 콰르텟은 공교롭게도 연주 곡목이 같았다. 사실상 고별 무대였던 전자가 작별 인사였다면, 1년만의 내한인 후자는 반가운 재회 같았다. 과연 연주 단체가 달라지면 같은 곡도 다르게 들릴까.
첫곡인 슈베르트 사중주 12번은 단악장의 곡. 단조의 불안감과 장조의 화사함이 불과 몇 마디 사이로 연신 교차했다. 작곡가의 미완성 걸작이 교향곡만이 아님을 비로소 깨달았다. 간간이 발구름을 곁들이면서 타악적 효과를 더하는 첼리스트의 모습도 흥미로웠다.
베토벤 현악 사중주 16번은 이틀 전 하겐 콰르텟의 연주곡이기도 했다. 하겐이 아기자기한 대화 같았다면, 파벨 하스는 리듬감과 강약 대비를 통해서 생생함과 입체감을 더했다. 절창은 역설적으로 가장 조용한 3악장이었다. 한껏 숨죽여 노래하는데도 오히려 설득력이 커지는 역설적 감동의 순간이었다.
후반 슈베르트 '죽음과 소녀'이 힘든 건 초장부터 곧바로 승부를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풍부한 표정이나 정교한 앙상블도 좋았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역시 숨죽이는 순간들이었다. 명배우는 조용한 읊조림으로도 관객들을 사로잡듯이, 이들은 피아노(여리게)가 포르테(강하게)만킁이나 강력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자난해에 이어 올해도 최고의 실내악 무대였다. 아울러 실내악의 세대 교체를 보여준 주간이 됐다. #파벨하스콰르텟
두 번이나 같은 대목에서 바이올린 현이 멈췄다. 하겐 콰르텟의 마지막 내한 무대. 전반 베베른의 곡을 연주하던 중이었다. 팽팽하던 현이 격렬한 피치카토 탓에 순간적으로 끊어진 것이다. 제1바이올린 루카스 하겐이 무대 뒤를 다녀오자 청중은 따뜻한 박수로 맞았다.
공교롭게 두 번째에도 같은 대목에서 또다시 풀렸다. 이번에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서 현을 맸다. 똑같은 대목을 세 번째 연주할 때는 아예 피치카토를 덜 세게 하는 방법으로 함정을 피했다. 순전히 물리적 현상일 뿐인데도 자꾸만 헤어지기 싫다는 뜻으로 들렸다.
전반 첫곡 베토벤 현악 4중주 16번은 작곡가의 마지막 실내악 작품. 비올라에서 첼로를 거쳐 바이올린으로 번지는 첫 악장 도입부부터 두런두런 나누는 남매들의 대화 같았다. 반대로 후반 슈베르트 '죽음과 소녀'에서는 간간이 미묘한 음정 불안이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했다. 18년 전 알반 베르크 4중주단의 마지막 내한 이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고별 무대가 될 듯했다. #하겐콰르텟
운동장이 달라지면 경기 내용도 변할까. 실은 지난주 베를린에서 내한공연 둘째날과 같은 레퍼토리를 보았다. 운동장(필하모니)과 팀(베를린 필), 경기 내용(레퍼토리)이 서로 최적화된 듯했다. 과연 예술의전당으로 달라지면 어떻게 될까. 개인적인 관전 포인트였다.
전반 버르토크는 사납고도 맹렬했고, 퇴폐적이면서도 끈적끈적했다. 곡목은 달랐지만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버르토크가 넉넉하게 풀어주는 편이었다면 베를린 필의 버르토크는 매섭게 다잡는 쪽에 가까웠다. 19~20세기의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발굴하는 것도 페트렌코의 장기 가운데 하나다.
전반의 버르토크와 후반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 모음곡 모두 다이내믹이 중요하고 일종의 이야기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놀랍도록 생기 넘치는 도입부의 총주 이후에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한 실내악처럼 해석한 대목들이 인상적이었다. 지휘자도 간간이 두 손을 내리고 단원들의 '자율 주행'에 내맡기는 듯했다.
독주와 합주가 어우러진 이 모음곡이야말로 스타 단원들이 즐비한 이 악단에 최적의 선곡인 듯했다. 역설적으로 이 대목들에서 페트렌코 체제의 순항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친 김에 스트라빈스키 초기 3부작을 이들의 조합으로 모두 들었으면 하는 바람도 생겼다. 다시 올 가을 오케스트라 대전에서 단연 선두. #키릴페트렌코#베를린필하모닉
베를린 필은 단원들이 인기 스타인 '올스타 팀'. 첫날 내한 공연에서 두드러진 건 더블베이스 3명에서 출발하는 단출한 편성이었다. 바그너가 아내 코지마의 깜짝 생일 선물로 작곡한 '지크프리트 목가'의 탄생 배경을 염두에 둔 것 같았다.
무작정 소리를 높이기보다는 오밀조밀하고 소박한 실내악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쉼표를 통해서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는 대목들도 인상적이었다.
전빈 슈만 피아노 협주곡의 협연자는 김선욱. 베를린에서 진은숙 협주곡으로 처음 협연한 뒤 4년만의 무대라서 감회가 남다를 듯했다. 우선 들어온 건 지휘지가 협연자를 바라보고 협연자는 단원들을 응시하는 '시선의 협연'이었다. 간간이 감정 과잉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템포와 강약의 분명한 대비를 통해서 개성을 발산하는 협연자의 담대함도 돋보였다.
후반은 브람스 교향곡 1번. 중후장대의 카라얀과 화려한 래틀 가운데 어느 쪽에 가까울지 내심 궁금했다. 첫 악장 도입부 고통의 팀파니 연타부터 카라얀에 가까워 보였다. 정점에 도달한 것처럼 보일 즈음 출력을 한껏 끌어올려 한번 더 도약하는 뒷심도 놀라웠다. 본래 군림형 지휘자는 아니지만 페트렌코의 악단 장악력과 자신감도 부쩍 커진 듯했다. 결국 승부처는 20세기 관현악을 아우른 내일이 될 듯했다. #키릴페트렌코#김선욱#베를린필하모닉
솔직히 나도 말러 보고 싶었다. 명색이 세상에서 말러 잘 하기로 소문난 악단 아닌가. 이렇게 연신 구시렁거리면서도 발걸음은 예술의전당으로 향했다. 지휘자 최수열이 진행과 지휘를 맡고 있는 '최수열의 밤 9시 즈음에'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대음악 연주회의 결정적 이점도 있다. 작곡가에게 직접 물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말러가 좋아도 곁에 앉거나 질문할 수는 없으니까. 이날 작곡가 손일훈의 '오우가'가 초연됐는데 우연히 옆자리에 앉았다.
'오우가'는 제목처럼 윤선도의 '오우가'에 바탕한 작품이다. 막간을 이용해 궁금한 점들을 여쭤보았는데 세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우선 고음역의 악기를 일부러 피했고, 다음으로 소리꾼 이봉근씨를 애초부터 염두에 두고 작업했으며, 마지막으로 여러 악기나 장르가 섞이는 대안적(alternative) 음악을 추구했다는 점이었다.
실제로도 비올라와 해금이 운치 있게 어울렸고 재즈와 미니멀한 요소들을 간간이 느낄 수 있었다. 소리꾼 이봉근씨 역시 낭송과 창을 넘나들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아련한 슬픔의 정서가 묻어난 '대나무' 편이 인상적이었다.
후반 테오 로에벤디의 음악극 '나이팅게일'은 한 쪽 분량의 곡 해설을 썼다. 악보를 보고 음원을 접했지만 실연은 처음이었다. 곡 해설을 쓸 적에는 스트라빈스키와의 연관성에 비중을 뒀는데 막상 현장에서 들으니 다소 지나쳤다는 반성이 들었다. 또한 자연 새(클라리넷)와 인공 새(나머지 악기)의 대립으로 보았는데, 후자는 트럼펫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도 뒤늦게 깨달았다. 비록 말러는 없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올해 200번째 음악회가 됐다. #최수열#이봉근#손일훈#오우가#테오로에벤디#나이팅게일#밤9시즈음에
키릴 게르스타인은 자타공인의 현대음악 전문 피아니스트. 하지만 19세기 낭만주의 협주곡을 협연할 때면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지휘 클라우스 메켈레) 첫날 공연의 협연곡이 브람스 협주곡 1번이었다.
여유 있고도 낭만적인 접근에 염려가 씻기는 듯했다. 하지만 보폭이 넓어질 때 문제는 걸음걸이를 척척 맞추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첫 악장에서 악단과 협연자의 호흡은 물론, 악단 내부에서도 매끄럽지 않은 순간들이 종종 있었다. 오히려 2악장부터 서서히 맞아 갔던 것 같다. 절반의 아쉬움, 절반의 안도가 공존했다.
후반 버르토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은 '악기들의 올림픽' 같은 곡이다. 졸저에서 관현악의 토털 사커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만큼 지휘자든 악단이든 역량을 가늠하기 좋은 곡이다.
첫 악장부터 지휘자는 매섭게 몰아치기보다는 충분한 여유를 갖고 시동을 걸었다. '슬로 스타트'에 가까웠지만 은은한 더블베이스와 반짝이는 바이올린의 트레몰로까지 이 악단의 진면목도 그제서야 살아나는 듯했다. 마지막 5악장에서 막판 스퍼트를 펼쳤다. 이날 가장 눈부시게 빛났던 순간이었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은 법. 반대로 경기 내내 헤매다가 막판에야 점수를 낸 것 같기도 했다. 아직까지 선두는 체코 필. #키릴게르스타인#클라우스메켈레#로열콘세르트헤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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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백하지만 유튜브 클래식톡은 지난 6년간 제게도 가장 재미나고 즐겁고 보람 있는 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동안 지면이든 온라인이든 아무래도 ‘문자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활동하는데 익숙했기 때문에 ‘영상 중심적’인 유튜브의 세계는 언제나 배움의 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분간 제작 여건의 문제로 휴방을 해야 할 시점이 된 것 같습니다.
향후 이 채널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만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인 듯합니다.
우선 이 유튜브에 출연해주신 음악인들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아울러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제작진에게도 고마움을 잊지 않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채널을 시청해주신 여러분들께 고마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덕분에 낯설고 힘들었던 이 세계에 용기 내어 발을 들일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 아무쪼록 건강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2025년 11월 30일
클톡지기 김성현 올림.
5 days ago | [YT] |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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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KBS교향악단
엄밀히 말하면 올해 쇼팽 콩쿠르는 살짝 반칙이다. 이미 프로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에릭 루를 우승자로 선정했으니 말이다. 재수생이나 삼수생 출전 금지 조항이 있는 건 아니지만 신인 발굴이라는 대의와는 어긋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조화가 언제나 말처럼 쉽지는 않다.
하지만 우승 이후 첫 내한 무대에서는 소득도 있었다. 압도적으로 선택 즐겨 연주하는 협주곡 1번이 아니라 2번을 KBS교향악단(지휘 레너드 슬래트킨)과 협연한 것. 그는 협주곡 2번으로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두 번째 연주자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첫 경우도 스승 당타이손이었다고 한다.
187cm의 엄청난 장신이었다. 마른 체형이어서 실제보다 더 커 보였다. 피아노 독주가 들어오기 직전 첫 악장 도입부의 관현악은 그리 가지런하지 않았다. 에릭 루의 쇼팽은 예상보다 이지적이고 분석적이었다. '츤데레'에 가깝게 보였는데 앙코르로 들려준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아리아에는 의외로 온기가 감돌았다. 단원이나 관객들 중엔 엷은 미소를 짓는 경우도 있었다.
후반은 쇼스타코비치 대곡인 교향곡 11번. 악단과 얄궂은 인연도 많은 곡이다. 2년 전에는 연주 도중 팀파니가 찢어지는 사고가 일어났지만 이원석 수석의 영민한 대처로 전화위복이 됐다.
이날도 온통 관심은 팀파니에 쏠렸다. 이원석 수석이 팀파니에 귀를 갖다대거나 채를 높이 들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거렸다. 50여 분의 대곡을 쉼없이 이어서 연주했지만 악단은 주제곡을 만난 듯 편안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서둘러 터진 안다 박수는 다소 아쉬웠지만 노장 슬래트킨은 수석들과 일일이 악수한 뒤 박수 갈채에 답하는 모습을 보였다. KBS의 주제곡다웠다. #레너드슬래트킨 #에릭루 #KBS교향익단
2 weeks ago (edited) | [YT] |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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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빈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지휘 크리스티안 틸레만)의 셋째 날 연주곡은 딱 한 곡, 브루크너 교향곡 5번이었다. 당장 틸레만이 무대로 올라오는 모습부터 범상치 않았다. 90여 분의 대곡임에도 보면대는 없었다. 단짝 빈 필과 단골 곡 브루크너를 연주할 때는 악보도 필요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첫 악장 도입부 더블베이스의 연속 피치카토부터 가슴이 뛰었다. 곧이어 현과 관이 빚어내는 깊고 두꺼운 소리의 층. 구조로는 건축물, 악기로는 오르간에 비유되는 그 사운드다. 과거의 거장들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 한 현재 지구 최강의 '브루크너 조합'일 듯싶었다.
이날도 경탄스러운 대목이 적지 않았다. 2악장 아다지오는 억지로 쥐어짜지 않아서 은은하고 여유 있었다. 3악장에서도 잊기 쉬운 춤곡의 그루브를 제대로 실렸다.
하지만 가장 놀라웠던 점은 이 모든 걸 일상의 일과처럼 척척 해내는 악단의 능력이다. 남들이 고봉 험산을 오르는 것처럼 힘겹게 등정할 때, 이들은 그저 또 하나의 음악회처럼 수행해낸다. 올 가을 베를린 필에 버금가는 악단은 오로지 빈 필뿐일 것이다. #크리스티안틸레만 #빈필하모닉
2 weeks ago (edited) | [YT]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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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빈 필하모닉
라인강의 흐름이 이렇게 유려하고 장중했을까. 빈 필하모닉(지휘 크리스티안 틸레만)의 전반 연주곡이 슈만 교향곡 3번 '라인'이었다. 틸레만과 빈 필은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함께 연주하고 녹음한 단짝.
도도하다고 할까 고풍스럽다고 할까. 갈수록 가볍고 경쾌하고 감각적인 것들이 사랑 받는 시대적 트렌드와는 일단 거리가 있다. 2악장 말미에는 잠시 슈만이 아니라 바그너의 라인을 듣는 듯했다.
후반은 브람스 교향곡 4번. 첫 악장부터 지휘자가 일일이 제어하기보다는 단원들의 '자율 운행'에 맡기는 듯했다. 2악장 도입부에서도 간간이 지휘봉을 내려놓고 눈빛으로 대신하며 기조를 이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역시 반전이 있었다.
마지막 4악장 고통의 절정에 도달하기 전에 호른의 주제를 중심으로 찰나의 실내악을 빚었다. 진부하거나 상투적이이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앙코르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신년 음악회 끝장면을 미리 보는 듯했다. #크리스티안틸레만 #빈필하모닉
2 weeks ago | [YT] |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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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파벨 하스 콰르텟
불과 이틀 간격으로 같은 레퍼토리. 하겐 콰르텟과 파벨 하스 콰르텟은 공교롭게도 연주 곡목이 같았다. 사실상 고별 무대였던 전자가 작별 인사였다면, 1년만의 내한인 후자는 반가운 재회 같았다. 과연 연주 단체가 달라지면 같은 곡도 다르게 들릴까.
첫곡인 슈베르트 사중주 12번은 단악장의 곡. 단조의 불안감과 장조의 화사함이 불과 몇 마디 사이로 연신 교차했다. 작곡가의 미완성 걸작이 교향곡만이 아님을 비로소 깨달았다. 간간이 발구름을 곁들이면서 타악적 효과를 더하는 첼리스트의 모습도 흥미로웠다.
베토벤 현악 사중주 16번은 이틀 전 하겐 콰르텟의 연주곡이기도 했다. 하겐이 아기자기한 대화 같았다면, 파벨 하스는 리듬감과 강약 대비를 통해서 생생함과 입체감을 더했다. 절창은 역설적으로 가장 조용한 3악장이었다. 한껏 숨죽여 노래하는데도 오히려 설득력이 커지는 역설적 감동의 순간이었다.
후반 슈베르트 '죽음과 소녀'이 힘든 건 초장부터 곧바로 승부를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풍부한 표정이나 정교한 앙상블도 좋았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역시 숨죽이는 순간들이었다. 명배우는 조용한 읊조림으로도 관객들을 사로잡듯이, 이들은 피아노(여리게)가 포르테(강하게)만킁이나 강력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자난해에 이어 올해도 최고의 실내악 무대였다. 아울러 실내악의 세대 교체를 보여준 주간이 됐다. #파벨하스콰르텟
3 weeks ago | [YT]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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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하겐 콰르텟
두 번이나 같은 대목에서 바이올린 현이 멈췄다. 하겐 콰르텟의 마지막 내한 무대. 전반 베베른의 곡을 연주하던 중이었다. 팽팽하던 현이 격렬한 피치카토 탓에 순간적으로 끊어진 것이다. 제1바이올린 루카스 하겐이 무대 뒤를 다녀오자 청중은 따뜻한 박수로 맞았다.
공교롭게 두 번째에도 같은 대목에서 또다시 풀렸다. 이번에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서 현을 맸다. 똑같은 대목을 세 번째 연주할 때는 아예 피치카토를 덜 세게 하는 방법으로 함정을 피했다. 순전히 물리적 현상일 뿐인데도 자꾸만 헤어지기 싫다는 뜻으로 들렸다.
전반 첫곡 베토벤 현악 4중주 16번은 작곡가의 마지막 실내악 작품. 비올라에서 첼로를 거쳐 바이올린으로 번지는 첫 악장 도입부부터 두런두런 나누는 남매들의 대화 같았다. 반대로 후반 슈베르트 '죽음과 소녀'에서는 간간이 미묘한 음정 불안이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했다. 18년 전 알반 베르크 4중주단의 마지막 내한 이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고별 무대가 될 듯했다. #하겐콰르텟
3 weeks ago | [YT]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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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베를린 필하모닉 둘째날
운동장이 달라지면 경기 내용도 변할까. 실은 지난주 베를린에서 내한공연 둘째날과 같은 레퍼토리를 보았다. 운동장(필하모니)과 팀(베를린 필), 경기 내용(레퍼토리)이 서로 최적화된 듯했다. 과연 예술의전당으로 달라지면 어떻게 될까. 개인적인 관전 포인트였다.
전반 버르토크는 사납고도 맹렬했고, 퇴폐적이면서도 끈적끈적했다. 곡목은 달랐지만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버르토크가 넉넉하게 풀어주는 편이었다면 베를린 필의 버르토크는 매섭게 다잡는 쪽에 가까웠다. 19~20세기의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발굴하는 것도 페트렌코의 장기 가운데 하나다.
전반의 버르토크와 후반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 모음곡 모두 다이내믹이 중요하고 일종의 이야기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놀랍도록 생기 넘치는 도입부의 총주 이후에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한 실내악처럼 해석한 대목들이 인상적이었다. 지휘자도 간간이 두 손을 내리고 단원들의 '자율 주행'에 내맡기는 듯했다.
독주와 합주가 어우러진 이 모음곡이야말로 스타 단원들이 즐비한 이 악단에 최적의 선곡인 듯했다. 역설적으로 이 대목들에서 페트렌코 체제의 순항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친 김에 스트라빈스키 초기 3부작을 이들의 조합으로 모두 들었으면 하는 바람도 생겼다. 다시 올 가을 오케스트라 대전에서 단연 선두. #키릴페트렌코 #베를린필하모닉
3 weeks ago (edited) | [YT]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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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베를린 필하모닉
베를린 필은 단원들이 인기 스타인 '올스타 팀'. 첫날 내한 공연에서 두드러진 건 더블베이스 3명에서 출발하는 단출한 편성이었다. 바그너가 아내 코지마의 깜짝 생일 선물로 작곡한 '지크프리트 목가'의 탄생 배경을 염두에 둔 것 같았다.
무작정 소리를 높이기보다는 오밀조밀하고 소박한 실내악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쉼표를 통해서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는 대목들도 인상적이었다.
전빈 슈만 피아노 협주곡의 협연자는 김선욱. 베를린에서 진은숙 협주곡으로 처음 협연한 뒤 4년만의 무대라서 감회가 남다를 듯했다. 우선 들어온 건 지휘지가 협연자를 바라보고 협연자는 단원들을 응시하는 '시선의 협연'이었다. 간간이 감정 과잉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템포와 강약의 분명한 대비를 통해서 개성을 발산하는 협연자의 담대함도 돋보였다.
후반은 브람스 교향곡 1번. 중후장대의 카라얀과 화려한 래틀 가운데 어느 쪽에 가까울지 내심 궁금했다. 첫 악장 도입부 고통의 팀파니 연타부터 카라얀에 가까워 보였다. 정점에 도달한 것처럼 보일 즈음 출력을 한껏 끌어올려 한번 더 도약하는 뒷심도 놀라웠다. 본래 군림형 지휘자는 아니지만 페트렌코의 악단 장악력과 자신감도 부쩍 커진 듯했다. 결국 승부처는 20세기 관현악을 아우른 내일이 될 듯했다. #키릴페트렌코 #김선욱 #베를린필하모닉
4 weeks ago (edited) | [YT]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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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최수열의 밤 9시 즈음에
솔직히 나도 말러 보고 싶었다. 명색이 세상에서 말러 잘 하기로 소문난 악단 아닌가. 이렇게 연신 구시렁거리면서도 발걸음은 예술의전당으로 향했다. 지휘자 최수열이 진행과 지휘를 맡고 있는 '최수열의 밤 9시 즈음에'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대음악 연주회의 결정적 이점도 있다. 작곡가에게 직접 물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말러가 좋아도 곁에 앉거나 질문할 수는 없으니까. 이날 작곡가 손일훈의 '오우가'가 초연됐는데 우연히 옆자리에 앉았다.
'오우가'는 제목처럼 윤선도의 '오우가'에 바탕한 작품이다. 막간을 이용해 궁금한 점들을 여쭤보았는데 세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우선 고음역의 악기를 일부러 피했고, 다음으로 소리꾼 이봉근씨를 애초부터 염두에 두고 작업했으며, 마지막으로 여러 악기나 장르가 섞이는 대안적(alternative) 음악을 추구했다는 점이었다.
실제로도 비올라와 해금이 운치 있게 어울렸고 재즈와 미니멀한 요소들을 간간이 느낄 수 있었다. 소리꾼 이봉근씨 역시 낭송과 창을 넘나들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아련한 슬픔의 정서가 묻어난 '대나무' 편이 인상적이었다.
후반 테오 로에벤디의 음악극 '나이팅게일'은 한 쪽 분량의 곡 해설을 썼다. 악보를 보고 음원을 접했지만 실연은 처음이었다. 곡 해설을 쓸 적에는 스트라빈스키와의 연관성에 비중을 뒀는데 막상 현장에서 들으니 다소 지나쳤다는 반성이 들었다. 또한 자연 새(클라리넷)와 인공 새(나머지 악기)의 대립으로 보았는데, 후자는 트럼펫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도 뒤늦게 깨달았다. 비록 말러는 없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올해 200번째 음악회가 됐다. #최수열 #이봉근 #손일훈 #오우가 #테오로에벤디 #나이팅게일 #밤9시즈음에
4 weeks ago | [YT]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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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키릴 게르스타인은 자타공인의 현대음악 전문 피아니스트. 하지만 19세기 낭만주의 협주곡을 협연할 때면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지휘 클라우스 메켈레) 첫날 공연의 협연곡이 브람스 협주곡 1번이었다.
여유 있고도 낭만적인 접근에 염려가 씻기는 듯했다. 하지만 보폭이 넓어질 때 문제는 걸음걸이를 척척 맞추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첫 악장에서 악단과 협연자의 호흡은 물론, 악단 내부에서도 매끄럽지 않은 순간들이 종종 있었다. 오히려 2악장부터 서서히 맞아 갔던 것 같다. 절반의 아쉬움, 절반의 안도가 공존했다.
후반 버르토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은 '악기들의 올림픽' 같은 곡이다. 졸저에서 관현악의 토털 사커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만큼 지휘자든 악단이든 역량을 가늠하기 좋은 곡이다.
첫 악장부터 지휘자는 매섭게 몰아치기보다는 충분한 여유를 갖고 시동을 걸었다. '슬로 스타트'에 가까웠지만 은은한 더블베이스와 반짝이는 바이올린의 트레몰로까지 이 악단의 진면목도 그제서야 살아나는 듯했다. 마지막 5악장에서 막판 스퍼트를 펼쳤다. 이날 가장 눈부시게 빛났던 순간이었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은 법. 반대로 경기 내내 헤매다가 막판에야 점수를 낸 것 같기도 했다. 아직까지 선두는 체코 필. #키릴게르스타인 #클라우스메켈레 #로열콘세르트헤바우
1 month ago (edited) | [YT]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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