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에 시작한 세미나에 무술, 휘트니스 MMA 관계자 분들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공개적인 세미나를 했고 극진가라테 시합도 나가서 입상도 했고 시합 및 쿠미테 영상도 올려놨습니다.
시합 및 스파링 영상 : 극진가라테 시절 영상
youtu.be/4wbL6jsIxqU
스파링 영상 재생목록 모음 :
youtube.com/playlist?list=PLbCjXEzv3A97HAjqquxMGFZ…
도전하러 와서 현피 뜬 썰
youtu.be/KYl4WXMG1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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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FC 최두호 선수가 처음 소속되어 있던 구미MMA 팀서 수업도 했고 부산 동천백산 도장에서 수업도 했습니다.
구미mma 세미나 기사 : m.andesmaca.net/article/%EC%96%B8%EB%A1%A0%EB%B3%B…
아래는 세미나 참가자 인터뷰 입니다.
복싱 지도자 및 UFC 출신 조성빈 선수 MMA 임병희 선수 인터뷰도 있습니다.
youtu.be/bSXtez-VNLc

당시 조성빈 선수는 해외 단체 챔피언이었는데 챔피언이 이런 세미나 와도 되냐고 하니까 "동영상 보고 배워보고 싶어서 왔다, 배워서 시합에서 사용 할 수 있으면 사용 하고 싶다" 라고 하더군요. 챔피언 마인드는 다르더군요.
마지막으로 제가 주최한 중심 세미나에 강사로 초빙 하였는데 코탑 이양훈 코치님이 레슬링 파트 수업을 해주셨습니다.
youtu.be/GmOu3sJbHGU

어차피 의심 스럽고 봐도 모르겠으면 그냥 무시해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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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여러분이 생각하는 상황에 대해서는 다 거쳐 간 상황입니다.
몇년간 열심히 하고 활동한다면 뭔가는 있나 보다 하고 봐주셨으면 합니다.
그래도 정 궁금하신 사항이 있다면 물어 보시면 답변 드리겠습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소통하면서 지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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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 및 제휴 광고 받습니다.
광고 및 제휴 : cresend.me/yushimkai


Yushimkai

이케다야 전투는 정말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방은 좁고, 적과 아군이 뒤섞여 난투극이 벌어졌다.그들 중에는 손가락이 세 개, 네 개나 잘려 나간 자가 많았다. 칼을 막으려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피안개가 자욱했고, 다다미는 피로 물들어 발밑이 미끄러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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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야 사건 후, 현장에 들어간 관리의 증언에 따르면, 방 여기저기에 베어져 떨어진 손가락과 손이 굴러다녔다고 한다. 다다미는 피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전투의 격렬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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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야 사건 당시, 신선조는 상대의 칼을 막으려는 손이나, 도주를 막기 위해 손을 잡으려는 순간을 노려 칼을 휘둘렀다. 그 결과 손가락이 잘려 나가는 일이 많았고, 이는 당시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대표적 장면이었다.

위 내용은 가장 최근의 일본도를 휘둘러서 피맛을 본 신선조 관련 내용들 중에서 좁은 공간에서 싸웠던 이케다야 사건에서의 사료다.

좁은 방안에서 다수의 인원이 칼로 싸우는데 신선조는 상대의 무장을 무력화 시키기 위해서 손과 손목을 집중적으로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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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에서 손목을 노리는 이유
무기를 잡은 손을 공격하면 상대방의 무기를 떨어 트리게 할수 있고 손가락이나 손목을 베면 출혈과 통증으로 상대방이 더이상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됨

갑주를 입어도 신체의 주요부위는 보호가 되지만 상대적으로 손과 손목은 노출이 되어 공격의 표적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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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의 곡선형 날은 베기에 특화 되어 있고 손목 손가락은 뼈가 얇고 힘줄이 많아 칼날이 스치듯 지나가도 쉽게 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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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 교범에서 손과 손목>

적의 칼을 막을 때, 그 손목을 베어 떨어뜨리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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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손을 베어 칼을 떨어뜨리게 하는 것은 전장의 상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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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손목을 겨누어 베어라. 손을 잃으면 적은 싸울 의지를 잃는다

<실전에서 손과 손목>

전국 시대에와 에도 시대에도 "손가락이 잘려 무기를 떨어트렸다" 라는 사례가 자주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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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창을 막을 때, 그 손을 베어 떨어뜨리고 창을 빼앗는 일이 자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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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베이면, 아무리 강한 자라도 싸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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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손목을 베는 것이 전장의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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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일부를 희생해서라도 손을 지켜라”, “적의 손을 노려라” 등, 손의 중요성과 실전 전술이 자주 언급됨

#新選組 #손 #손목 #사무라이 #유심회 #신선조 #무술

5 months ago | [YT] | 8

Yushimkai

진검을 들고 실전이 벌어 지면 상대방의 칼이 이렇게 들어 오면 칼을 걷어내고 그틈을 이용해 이쪽 방향으로 찌른다거나 하는 설정은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무아지경으로 칼을 휘두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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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된 후에 근처에서 검도를 연습하는 사람이 나무 가지에 양철 물통을 끈으로 묶어두고 찌르기 연습을 하는 것을 보고는,

'찌르기는 그냥 빨리 정확하게 찌르면 되는게 아니고 찌른 후 민첩하게 회수하는 동작이 중요하다'

'한번으로 죽인다는 생각을 하지마라. 몇번이고 다시 찔러라, 난 1명 죽이는데 평균적으로 3번 정도 찔렀다'라는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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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검을 쥐고 양철 물통을 찔렀는데, 허공에 끈 하나로 매달린 물통이 그대로 꿰뚫렸다는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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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 뒤에 숨어 있다가 귀가하는 자식들을 죽도로 내려치면서 "무사의 마음가짐이 안 되어 있다!(士道不覺悟!)"라든가,

"문에 들어가면서 머리부터 들이밀면 기습당했을 때 치명상을 입는다! 발부터 들이밀어라!"라고 설교했을 정도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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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타의 검은 맹자(猛者)의 검이라면 사이토의 검은 무적(無敵)의 검이다.

마지막 사무라이 신선조 3번대장 사이토 하지메
(참고로 3가지의 유파(무술)을 배운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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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무사도 하나의 무술만 파는 건 없음.

실전과 카타(형)는 구분 되어짐.
(카타가 필요 없다는게 아니라 카타를 익히고 실전에서 내가 쓸 수 있게 다시 연구가 필요함)

무기를 다루는건 이치가 없다는것.
(일전에도 쓴 글이지만 검의 합기 같은건 없음, 실제로 일본에서는 검 잡는 방법은 다 각기 다름, 마치 카라테에서 주먹 쥐는 방법이나 지르는 방법이 다른것처럼)

근현대 무술과 고류 검술이 궁합이 좋다면 현대에 와서 현대 무술에 맞게 검술을 재조합 한것일뿐.

8 months ago | [YT] | 23

Yushimkai

칼집 수축으로 인한 전투 불능
겨울 전투에서 칼집이 수축된 병사는 칼을 뽑지 못해 "막대기(칼집)으로 적을 때리다" 사망
(목검과 진검의 차이를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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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에 의해 수축된 나무 칼집은 칼을 완전히 꽉 잡아 긴급 시 뽑기 어려움.
일부 병사는 "칼집을 불에 살짝 데워 팽창시킨 뒤 사용하라"는 극단적 조언을 받았으나,
전장에서는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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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太刀)의 칼집은 말 탄 상태에서 휘두르기 편리하도록 곡선형으로 제작되었으나, 보병전에서는 칼이 칼집에 꽉 끼어 뽑히지 않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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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이 뽑히지 않을때는 주먹으로 때리라는 조언
(왜 무기가 있는데 주먹을 단련 하냐는 말에 대한 근거, 지난번 카라테 편에서도 적었지만 주먹 단련은 최후의 수단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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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대금은 칼집 입구에 걸려 뽑을 때 방해가 됨. 특히 협차(脇差)의 대금이 말 안장에 걸려 말까지 다치는 사례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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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병사는 적에게 밀려 넘어지며 협차를 뽑으려 했으나, 대금이 갑옷 끈에 걸려 실패.
결국 적의 창에 찔려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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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갑옷을 입은 상태에서 칼자루가 미끄러지면 뽑는 데 실패할 수 있음
이를 방지하기 위해 "칼자루에 거친 천을 감으라"
(비오는날 뿐만 아니라 현대 검도처럼 느슨한 잡기가 아닌 칼을 꽉 잡는 방식도 사용하는 유파도 있음
칼을 놓치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 되어 버려서 그런거 같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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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차 활용 : 주무기(창, 철포)를 잃은 후 협차를 사용할 때는
"배나 허벅지를 찌르고 목을 자르라"
(대부분 갑주로 인하여 레슬링 형태로 엉경 붙었고 갑주로 틈새를 찌르는 사람이 이김)
(결국 현대의 대동류 합기유술 이후의 기술들은 소도쯤으로 생각하는게 타당하다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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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反り이 적은 칼:
평화기에 유행한 반면 없는 칼은 칼집에 단단히 고정되지 않아 전투 중 흔들림
이는 "칼이 허리에서 흘러내려 다리를 베는" 사고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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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반면:
반면이 강한 태도(太刀)는 기마전에 최적화되었지만, 보병전에서는 칼집에서 뽑는 데 시간이 더 걸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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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차기:
칼을 허리 앞쪽에 차면 재빠르게 뽑을 수 있지만, 달리기나 구르기 시 다리에 걸려 넘어질 위험이 있음
"적과 마주칠 땐 앞차기가 유리하지만, 도망칠 땐 뒤차기를 선택하라."

뒤차기:
칼을 허리 뒤쪽에 차면 움직임이 자유로웠으나, 뽑을 때 팔이 뒤로 젖혀져 반응 속도가 느림

허리 뒤 차기의 치명적 실수
한 소대장은 칼을 뒤차고 있다가 적의 기습을 받아 뽑는 데 실패
이후 "앞차기로 습관을 바꾸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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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 위에 차기:
갑옷 위에 칼을 차면 칼집이 헐거워져 뽑기 쉽지만, 갑옷 끈과 칼집이 엉켜 움직임이 제한
권장 방식: "갑옷을 입기 전 허리에 칼을 차고, 그 위로 갑옷을 입으라."
갑옷 안에 차기:
칼을 갑옷 안에 차면 움직임이 편했지만, 긴급 시 뽑는 데 실패할 확률이 높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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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칼(타치)과 협차의 조합:
주 칼은 허리 오른쪽, 협차는 왼쪽에 차는 것이 표준
그러나 좌우 전환 없이 한쪽에 모두 차면 균형이 무너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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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 상황:
말을 탄 상태에선 협차를 안장 옆에 매달아 빠르게 뽑을 수 있도록 했음

8 months ago | [YT] | 11

Yushimkai

전투 전 점검:
”끈(紐)이 헐거워지지 않았는지 확인하라. 풀렸을 땐 이빨로 물고 다시 묶어라.“
”허리띠(帯)는 단단히 조여 움직임에 방해되지 않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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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 틈새 방어:
”목덜미(首)와 겨드랑이(脇)는 방어가 약하므로, 방패나 소매로 가려라.“
비 오는 날: ”갑옷 밑에 기모노를 두껍게 입어 미끄러짐을 방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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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두르기 vs. 찌르기:
”적의 갑옷 틈새(脇腹, 목덜미)를 노려 찌르는 것이 효과적이다. 넓은 범위를 휘두르면 체력 소모가 크다.“
창병과의 협공 시: ”창으로 적의 방어를 흐트러뜨린 뒤, 칼로 마무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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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공간에서의 싸움:
”협소한 길목에선 칼을 반으로 잡고(半身構え), 아래에서 위로 올려베는 기술(逆風)을 사용하라.“
말 탄 적 상대:
”말의 다리를 노려 베어 넘어뜨린 후, 땅에 떨어진 적을 찌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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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에서의 생존 기술:
”갑옷을 벗고 강을 건널 땐, 칼을 입에 물고 헤엄쳐라.“
(※위험한 기술로 비상시에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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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을 입은 적 상대법:
”철포나 활로 거리를 두고 틈새를 노린 뒤, 근접해 칼로 마무리하라.“
”적이 넘어졌을 땐 갑옷의 등 부분(背板)을 밟아 움직임을 봉쇄하라.“
(세키구치신신류에서 일어 나는 독특한 방법에 대한것이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왜군 #일본 #잡병물어 #임진왜란 #사무라이

8 months ago | [YT] | 13

Yushimkai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개와 고양이조차 피를 흘릴 수 있는 것은 모두 죽였다. - '요시노 진고자에몬 각서' 임진왜란 기록 중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의 첫 번째 전투인 부산진성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 선봉대 1만 8천여 명이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고, 이를 지키던 부산진첨사 정발(鄭撥)과 조선군 약 500~600명이 목숨을 걸고 맞섰다. 하지만 압도적인 병력 차이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기습으로 인해 부산진성은 함락되었고, 정발을 포함한 대부분의 수비군이 전사했다.

그러나 정발이 무능해서 부산진성을 쉽게 내줬다는 오해가 있다. ‘선조실록’에는 그가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다가 일본군을 조공 사신으로 착각하여 대비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정발은 사냥이 아니라 군사훈련을 하고 있었으며, 일본군이 상륙하자 급히 복귀해 끝까지 성을 사수했다. 그는 군사와 백성들을 모아 결사항전을 펼쳤고,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저항하다 끝내 전사했다.

당시 일본에서 포교 활동을 하던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1532~1597)는 그의 저서 ‘일본사’에서 조선군이 용감하게 싸웠다고 기록했다.

그에 따르면, 고니시 유키나가(가톨릭 세례명: 아우구스티노)는 조선군에게 목숨을 보장할 테니 항복하라는 전갈을 보냈으나, 조선군은 비웃으며 "왕에게 물어보고 오겠다"고 답하며 시간을 벌었다. 이후 조선군은 철저히 전투를 준비했고, 일본군이 해자(성벽 바깥의 도랑)를 건너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프로이스는 “조선군은 대단히 충성심이 높고 용감하게 싸웠으며, 대부분 끝까지 저항하다 전사했다. 가장 먼저 전사한 이는 조선군 총대장이었다”고 기록했다. 일본군조차 조선군의 저항에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일본군이 부산진성을 함락한 뒤, "군신(軍神)의 혈제(血祭)"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전쟁의 신에게 피로 바치는 제사라는 뜻으로, 전장에서 흘린 피를 일종의 신에게 바치는 의식처럼 여겼다는 의미다. 일본군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을 저질렀고, 심지어 개와 고양이까지 죽이며 잔혹한 대학살을 벌였다.

부산진성과 동래성에서 벌어진 조선군의 필사적인 저항은 명나라가 조선을 의심하는 것을 막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과 내통하여 자신들을 공격하려 한다고 의심했지만, 조선군이 일본군과 처절하게 싸웠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오해가 풀렸다.

이후 1597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황신(黃愼)이 명나라 사신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부산진성 전투에 참전한 일본 장수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가 “부산에서 조선군의 저항이 너무 거세 우리는 크게 기세가 꺾였다”고 증언했다. 그는 정발과 그의 첩 애향이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일본군은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거치며 전투 경험이 풍부했고,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조선군이 방어를 준비했어도, 압도적인 전투력 차이를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부산진성은 왜란 직전 성벽을 높이고 해자를 깊게 팠지만, 결국 방어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 일본군조차 부산진성을 방어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후에 더 튼튼한 자성(子城, 현재의 부산진성)을 새로 축성했다.

#임진왜란 #조선 #왜군 #부산 #정발장군

8 months ago | [YT] | 7

Yushimkai

정평구는 임진왜란 때 무주·진안·장수 지역을 공격해 오는 왜적을 대파한 일이 있었다. 왜적들이 공격해 오는 길목에 이상한 상자 수십 개를 놓아두었다. 이를 본 왜적들이 보물 상자인 줄 알고 가까이 와서 열어보자, 그 안에서 수많은 벌들이 쏟아져 나와 왜적들에게 벌침을 쏘아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얼마 후 벌에 쏘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왜적들이 어느 협곡에 들어서자, 벌이 들었음직한 상자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왜적들은 앞서 속임수를 생각하면서 이 상자들을 모두 불태워버리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왜적들이 불을 지르자마자 상자 안에 있던 화약이 터져 모두가 몰사당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김시민의 휘하에서 화약을 다루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 일본의 신식무기인 조총 앞에 조선의 창과 화살은 매우 무력했고, 이에 정평구가 오늘날의 비행기 같은 비거를 만들게 되었다.

비거를 발명하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진주 싸움에서 외부와 연락할 때 사용하게 하였다. 또한 비거를 이용하여 영남의 외로운 성에 갇혀 있던 성주를 30리 밖으로 탈출하게 했다고도 전한다. 기록에 의하면 비거는 무려 30~50리를 날았으며, 이를 이용해 정평구는 진주성으로 식량을 나르고 종이폭탄도 발명하여 전투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9 months ago | [YT] | 7

Yushimkai

마키와라: 역사에 새겨진 기본기 수련의 정수
맨주먹 단련의 목적: 굳은살 염증이 많은 주먹? 절대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주먹 단련"을 떠올릴 때, 굳은살 박힌 강철 같은 주먹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주먹 단련의 목적은 단순히 손을 딱딱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바로 정권지르기의 완성에 있습니다.
손에 굳은살이 생기고 짓물이 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과정일 뿐, 꾸준한 단련을 거치면 자연스럽게 단단하고 건강한 손을 갖게 됩니다.
강력한 주먹은 단순히 딱딱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기술과 반복된 훈련을 통해 완성된 것입니다.
마키와라(巻き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키와라는 손을 변형시키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더욱 효과적인 정권지르기를 위한 수련 도구입니다.
마키와라를 통해 우리는 올바른 자세를 익히고, 온 몸의 힘을 주먹에 실어 전달하는 방법을 깨닫게 됩니다.
역사적 기원
마키와라는 일본어로 '감긴 짚단'이라는 의미로, 오키나와 카라테의 전통적인 훈련 도구입니다.
18세기 후반 류큐왕국 시대부터 그 사용이 문헌에서 확인됩니다.
초기 형태와 발전
초기 형태: 짚이나 등나무를 감아 만든 단순한 형태
발전 과정: 점차 탄력 있는 나무판으로 발전
현대적 형태: 나무판에 패드를 덧댄 형태로 진화
역사적 문헌 기록
무비지(武備志, 1621년): 유사한 훈련 도구 언급
오키나와 고문서: 1800년대 초반 마키와라 훈련 방법 기록
마츠무라 소콘의 기록: 19세기 중반 마키와라 훈련의 체계화
마키와라 훈련의 오해와 진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마키와라 훈련의 본질을 오해합니다. 단순히 손을 딱딱하게 만들거나 굳은살을 만드는 데 집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자세와 방법으로 마키와라를 훈련한다면 오히려 손에 염증이나 부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손이 크고 굳은살이 많으면 강하다"는 생각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확한 자세와 효율적인 힘의 전달입니다.
마키와라 훈련은 단순히 손을 괴롭히는 행위가 아니라, 정권지르기의 기술적 완성도를 높이는 고된 수련입니다.
삼전(三戦) 카타: 중국에서 오키나와로 이어진 무술의 흐름
카라테의 핵심 기본기 중 하나인 삼전(三戦) 카타는 오키나와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한 기술이 아닙니다. 그 기원은 중국 무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중국 무술에서는 손바닥을 펴고 손끝으로 찌르는 형태의 삼전 기술이 존재했습니다.백학권을 참고 하시면 됩니다.
카타가 오키나와로 전해질때에 오키나와에서는 주먹을 사용하는 기법이 이미 있었습니다. 훗날 시간이 흐르는 동안 손끝으로 찌르는 동작이 주먹을 사용하는 형태로 변형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카라테의 삼전 카타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삼전 카타는 단순히 동작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자세와 힘의 사용, 호흡법 등을 수련하는 몸을 만드는 카타 입니다.
이처럼 카타는 각 무술의 기본기를 함축하고 있는 중요한 유산입니다. 카타를 등한시하고 쿠미테 연습에만 몰두하는 것은, 마치 뿌리 없는 나무처럼 위태로운 행동입니다.
류큐 왕국의 법과 맨손 무술의 발달
과거 류큐 왕국은 엄격한 법치 국가였습니다.1609년 사츠마 번의 침공 이후 무기를 통제 합니다. 자연스레 맨손 무술의 발달 필요성이 증가 합니다. 백성들이 함부로 무기를 소지하거나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기에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맨손 무술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마키와라 훈련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무기가 있는데 왜 굳이 맨손으로 싸우는 기술을 연마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무기의 품질이 조악했고, 무엇보다 항상 무기를 소지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지난번 쓴 글에 있든 각 무술의 무기는 환경적 요인과 휴대성에 따라서 정해집니다. 환경적으로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제한 된다면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맨손 무술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기술이었습니다.
사무라이는 법 위에 존재했는가
법치 국가로서 이어서 이야기 하면 일본에 대해서 오해 하는것이 많은 사람들이 사무라이가 마음대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당시 일본 역시 법치 국가였으며, 사무라이라고 해서 함부로 살인을 할수 없었습니다. 만약 사무라이가 정당한 이유 없이 사람을 죽였다면 엄중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카타: 기본기의 정수를 담은 유산
카타는 단순히 동작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각 무술의 기본기를 체계적으로 익히고 기술을 수련하기 위한 틀입니다. 카타를 통해 우리는 정확한 자세, 힘의 사용, 호흡, 집중력 등 기술 수련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단련할 수 있습니다.
"카타는 실전성이 없다", "쿠미테(겨루기)만 잘하면 된다"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쿠미테 역시 카타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며, 탄탄한 기본기 없이는 제대로 된 쿠미테를 구사할 수 없습니다.
마키와라, 기본에 충실하라
마키와라 훈련의 핵심은 기본기 수련에 있습니다. 카라테에서 정권지르기는 모든 기술의 기초가 되는 가장 중요한 기본기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수련생들이 기본기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화려한 기술이나 실전적인 겨루기에만 집중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물론 다른 무술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은 무술적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자신이 수련하는 무술의 기본기를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마키와라를 치는 이유는 기본기를 완성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정권지르기에서 힘을 효과적으로 내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어렵기 때문에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마키와라라는 도구가 사용되었습니다.마키와라를 사용하는 이유는 단순히 주먹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정확한 자세, 효율적인 힘 전달, 그리고 기본기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마키와라 훈련은 기본기를 반복적으로 연습하기 위한 도구이며, 기본기에 충실하지 않으면 무술 수련의 본질을 잃게 됩니다
자신이 수련하는 무술의 기본기는 스스로와의 약속입니다. 입으로만 기본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게으름을 피운다면, 자신의 무술에서 성장 할 수 없습니다. 마키와라 훈련은 단순한 전통이 아니라, 본질을 지키기 위한 중요한 수단입니다.

10 months ago | [YT] | 9

Yushimkai

가토 기요마사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선봉으로 조선에 침입해 한양을 거쳐 개성까지 진출, 이후 함경도까지 북진하게 된다.
조선인 2천 명과 함께 여진족 국경 근처에 위치한 노토 부락을 공격해 성 하나를 점령했으나, 곧바로 다시 빼앗기고 조선 국경으로 후퇴한다. 하지만 조선 국경을 넘어 추격해 온 여진족에게 크게 패배하는 굴욕을 겪는다.
참고로 노토 부락의 전투력은 나중에 청나라를 세운 건주여진 누르하치의 부족과 라이벌일 정도로 강력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에서 조선 의병장 정문부와 벌인 **북관대첩**에서 패배하고, 동사(凍死)와 아사(餓死)가 겹쳐 후퇴하게 된다. 이후 홍의장군 곽재우와의 전투에서도 패전하며 울산으로 물러나 울산성에 왜성을 쌓고 농성에 들어간다.
당시 왜성을 쌓는 데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전문 기술자들이 동원되었으며, 상당히 빠른 속도로 축조되었다. 이를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왜성 전문 건설회사" 같은 느낌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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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지나 칭칭 나네와 가토 기요마사
'쾌지나 칭칭 나네'라는 민요에 대한 첫 번째 설은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와 관련이 있다.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군에게 패배하고 도망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쾌재라, 청정이 나가네!"라고 외쳤고, 이것이 변형되어 오늘날의 "쾌지나 칭칭 나네"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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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와 말고기 회
일본의 말고기 회(사쿠라니쿠)에 대한 이야기도 가토 기요마사와 연결된다. 당시 일본은 육식을 금지했으나,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성에서 식량 부족으로 죽을 위기에 처하자 말을 잡아먹으며 처음으로 말고기 회를 먹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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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와 조선, 여진족의 관계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에서도 A급 장수로 평가받는 뛰어난 장군이었다. 그런 그가 조선군을 대파하고 함경도까지 진출했으나, 여진족에게는 오히려 패배했다.
흥미로운 점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전까지 평화로웠던 조선은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으나, 양란을 겪으며 다시 실전 능력을 되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양란이 끝난 후 조선군은 국경에 있던 여진족 노토 부락을 완전히 쓸어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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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 가토 기요마사에게 발린 조선군
- 그런 가토 기요마사를 발라버리는 여진족
- 양란 이후 여진족을 발라버리는 조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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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이란 이런 것
한 세기만 전쟁을 하지 않아도 싸우는 방법을 완전히 잊게 된다.
더 냉정하게 말하면, 한 세대만 실전을 경험하지 않아도 전쟁 수행 능력은 급격히 떨어진다.
무술도 마찬가지다. 필요 없으면 사라지고, 필요하면 다시 만들어지는 것

10 months ago | [YT] | 7

Yushimkai

일본 무도 여행을 통해 한국인들이 가진 무도에 대한 환상과 오해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권병일치(拳兵一致)'나 '검의 합기' 같은 개념들을 현대적 관점에서 무조건 긍정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무기 선택의 기준은 '강력함'이 아니라 '현실성'입니다. 누구나 창이 강력함을 알지만, 과거 사람들이 쉽게 구하고 휴대할 수 있는 무기는 아니었습니다. 마치 현대 무술가들에게 냉병기 시대에 가면 무엇을 선택할지 묻는다면 모두 창이라고 답하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주변에서 쉽게 구하고 휴대하기 용이한 무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각 무술 유파는 시대적 배경, 지역적 특성, 계급, 자연환경에 따라 고유한 무기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모든 사무라이가 같은 무술을 사용했던 것도 아니며, 동일한 유파라 하더라도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고쥬류(剛柔流)를 배우면서 충격적이었던 것은 '해적'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왜구는 단순한 약탈자가 아닌 고도로 훈련된 전문 무장 집단이었습니다. 한 명의 왜구를 제압하기 위해 다수의 군사가 필요했다는 기록이 이를 증명합니다.
해상 활동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무역선과 해적선의 경계는 매우 모호했습니다. 쿠로시오 해류를 따라 일본에서 대마도를 거쳐 조선이나 동남아시아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상황에 따라 무역상이 해적으로, 또는 해적이 무역상으로 변모하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신라구(新羅寇)와 왜구(倭寇)의 관계입니다. 이들은 단순한 약탈자가 아닌 다국적 무장 집단이었으며, 통역을 동반한 조직적인 활동을 펼쳤습니다. 피해를 입은 측의 기록이 더 상세한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는 역사적 관점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왜구는 일본 열도뿐만 아니라, 조선, 중국 등 다국적 세력으로 구성되었으며, 해상 이동 경로에 따라 조선, 동남아시아 등 다양한 지역을 약탈했습니다. 심지어 당시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왜구에 합세하여 조선을 공격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는 해적과 무역상의 경계가 모호했던 당시 시대상을 반영합니다.
서양의 역사 또한 약탈과 침략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자원이 부족하면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약탈하고 식민지화했던 것이 서양 역사의 한 단면입니다.
그동안 막연하게 긍정적으로만 바라보았던 무술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옛 무술은 현대의 세련된 기술 체계와는 거리가 있었고, 실전적인 몇 가지 기술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완성하는 무술보다는, 빠르게 익혀서 실전에 사용할 수 있는 무술이 생존에 더 유리했을 것입니다.
결국 역사적 맥락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무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번에 구매한여러 책중에서 '조선표류일기'는 일본 사무라이의 시각에서 조선을 바라본 흥미로운 기록입니다.
향후 책을 읽고 내용을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교과서에서는 말해주지 않는 '신라구'에 대한 내용입니다.
신라구는 9세기 , 왜구는 13세기 입니다. 신라구가 더 앞서서 해적질을 했습니다.
신라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해양문명의 성향을 띈 해운국가였고, 자연스럽게 해적들이 발흥하여, 동시대 일본 해적들과 함께 수백년간 서로 상대국을 노략질 해온 역사가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신라는 전통적으로 일본의 고대 왕조들과 극단적으로 대립해온 역사를 지녔으며, 이는 후술할 신라의 일본에 대한 수차례의 정벌을 야기했다.
신라는 일본을 침공하기 위해 당시 신라와 일본의 바다를 장악한 신라구들의 역량을 전수받아, 그들이 일본을 약탈하던 노선을 따라 일본에 수차례의 대군을 파견하여 일본을 토벌하였다.
신라 해적과 신라 해군의 일본에 대한 오랜 세월의 공세는, 일본의 고대 정권과 일본 지방민들에게 큰 두려움과 원한을 품게 하였으며, 일본 사서에 유래를 알 수 없는 신라에 대한 강력한 원한과 증오의 표현은 이러한 신라의 일본에 대한 오랜 기간의 침공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후, 신라 하대에 접어들어 신라의 왕권이 유명무실해지며 호족들이 발흥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신라 해적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장보고(張保皐)가 등장할 때까지, 신라와 일본의 앞바다는 신라 해적들의 독무대였다.

10 months ago | [YT] | 9

Yushimkai

일본에 와서 거진 10년만에 느낀 극한까지 가보는 수련을 하게 되었습니다.

맨 처음 느낀게 극진카라테를 할때 쿠미테로 인해서 내몸을 포기한적이 있었습니다. 포기 하면 그때부터 편해집니다. 이제부터 내 몸은 내가 주인이 아니다 라는 마인드를 갖은 후 부터 두려움이 사라졌는던 경험이 있습니다.

20대, 30대에 무술을 통해서 각성 했던걸 이번 일본 수련을 통해서 40대에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3시간쯤 넘어가니까 모든 번뇌가 사라집니다.
마라톤에서 느끼는 “러너스 하이”같은걸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타스 하이”

지금 몸상태가 걷지도 눕지도 못하고 있을 정도의 기분 좋은 근육통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쥬류 카타의 매력과 분카이를 통해서 합기 이전의 기술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알게 되었습니다. 이부분은 나중에 또 다루겠습니다. 카타가 가진 매력과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게 되는지 그리고 힘을 내는 방법등을 배웠습니다.

정권지르기에 대해서도 사람의 체형에 따라 스타일이 다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부분도 나중에 좀 더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매일 매일 쉬지 않고 수련을 지도 해주신 나의 선생님Kazuaki Hirooka 께 감사 드립니다. 일본의 맛있는 음식도 사주셔서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이자카야 수련도 중요 합니다 ^^ 다른 사범님들Haruyoshi Yomoda, 木村信章 도 마지막에 같이 수련 해주시고 응원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쥬류 카라테의 모든 카타를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 갑니다. 그중 여러분이 좋아 하는 삼전三戦 도 있습니다.

삼전三戦 카타 coming soon!

11 months ago | [Y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