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와 그의 계열인 정승화 김계원의 쿠데타는 사건 당시 공범혐의가 있는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이 되고 최고실권을 갖게 되면서 김재규의 쿠데타의 완성을 위한 과정이 계속 진행되었고, 합동수사본부의 합법적인 정승화 연행에 극히 반발한 김재규-정승화계 군벌들의 군사반란시도를 저지하기 위하여 결국 12.12사태가 발생되었다.
전두환 합수부장은 노재현 국방장관이 정승화 연행조사를 계속 미루면서 미온적으로 대응하므로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고 그와 동시에 정승화를 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정승화가 연행에 불응하고 무력행사로 대응한다면 제어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정승화와 가까운 고위장성이나 정승화와 직접 대화가 가능한 장군들에게 미리 정승화 연행조사의 불가피성을 구체하고 명확하게 설명하며 이해시킴으로써 협조를 구하여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만들기로 하였다.
이후 황영시, 유학성, 차규헌, 박희도, 박준병, 최세창 장기오 노태우 등의 장군들에게 30경비단에서 저녁식사 약속을 하였다. 이중에 유학성 장군과 노태우 장군만 12월 12일에 정승화를 연행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나머지 다른 장군들은 모두 일반적인 저녁식사의 자리로 알고 모이게되었다.
(1979년 12월 12일 6시 30분) 전두환 합수부장과 이학봉 수사국장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연행조사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재가를 받기위해 국무총리공관에 도착였고, 당시 신현확 총리와 최광수 비서실장도 참석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이들의 설명을 듣고 관계장관이 서명을 한뒤에 서명을 하겠다며 노재현 국방장관을 호출하였다.
(7시 00분) 정승화의 총장공관에 우경윤대령 허삼수대령이 7명의 수사관과 함께 도착하였다.
우경윤: “김재규가 정총장님 관련하여 새로운 진술을 했습니다, 총장님의 증언을 다시 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행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라고 정승화에게 말했다.
정승화: “너희들 어디서 왔어!” (고함을 치며 대답하였다)
우경윤: “총장님에 대한 조사는 이미 대통령에게 보고된 것이니 잠시 합수부에 가셔서 진술을 녹음하고 돌아오시면 됩니다.”
정승화: “이놈들 가긴 어딜가냐! 나는 육군참모총장이다, 이놈들을 잡아라! 대통령 전화를 대!” 그러자 정승화의 경호원들이 우대령과 허대령에게 달려들었다.
우경윤: “공무집행 중이다, 경호원들은 나가라.” 라고 달려든 경호원들에게 모두 이야기하였다.
(7시 15분) 그러자 부관실에서 총성이 울리고 결국 우대령이 총을 맞고 쓰러진다. 그러자 허삼수대령이 정승화에 다가가 밀착하여
허삼수: “총장님 왜 사태를 이렇게 어렵게 만드십니까?” 라고 말하자 결국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정승화가 반발을 포기하고 결국 허삼수의 연행차량에 탑승하게 되었다.
(7시 40분) 이후 이들은 서빙고 합수부조사실에 도착하였고, 허삼수가 허화평 합수부비서실장과 이학봉 수사국장에게 정승화의 연행완료를 알린다.
(7시 45분) 총리공관에서 전두환 본부장이 정승화의 연행완료를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 본부장에게 “국방장관이 올때까지 기다려 봅시다, 차한잔 합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노재현 국방장관은 연행당시 장관공관에 있다가 총리공관쪽에서 총성이 울리자 담을 넘어 시내로 도망을 가버렸다.
(연행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 다시 7시30분) 윤성민 육본차장이 “정총장이 괴한에 납치됐다”를 보고를 받고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였다. 참고로 진돗개 경보는 진돗개의 이름을 따서 만든 대한민국의 경보로, 북한의 무장공비나 특수부대원 등이 대한민국에 침투했을 때, 부대에서 탈영병이 발생했을 때 등 국지적 위협 상황이 일어났을 때 발령되는 단계별 경보 조치이다.
(7시40분) 윤성민 육본차장의 발령에 따라 정승화계의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헌병대장등이 부대로 복귀하여 군출동을 준비하였다.
(8시10분) 변규수 육본보안부대장은 정승화가 괴한에 의한 납치가 아니고, 정승화를 합수부에서 연행한것이라고 윤성민차장에게 보고하였다.
(8시20분) 그러나 윤성민 육본차장은 정승화가 납치가 아니고 합수부에 연행되어 서빙고 조사실에 있다는 걸 알고도 진돗개 둘을 확대발령한다.
(8시40분) 장태완 수경사령관도 납치가 아닌 합수부에서 연행한것이고 합수부장이 최대통령에게 보고중임을 보고 받았다.
(8시50분) 윤성민 차장은 발악의 심정으로 9공수여단의 출동까지 명령하였다.
(9시00분) 노재현 국방장관이 계속 나타나지 않자, 전두환 본부장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자신이 나가서 찿아 보겠다하였고, 결국 연행 2시간 30분 만에 전두환 본부장이 총리공관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전두환 합수부장은 총장공관에서의 총격사건을 보고 받은후, 30경비단으로 가서 모여 있는 장군들에게 정승화 연행의 필요성과 총리공관에서의 총격사건을 모두 설명하며, 이후 정승화의 연행배경을 국방부와 육군본부 지휘부에도 정확하게 사실을 알렸다.
(10시00분) 도망갔던 노재현 국방장관이 드디어 최규하 대통령과 첫 통화가 되었다.
최규하: “지금 어디에 있소, 당장 공관으로 오시오”
사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1공수여단 이기룡 대령이 육본에 직접 가보기 위해 1한강교 검문소를 통과했는데, 이것을 하소곤 작전참모부장이 “박희도장군의 1공수여단이 서울로 출동” 이라고 오보를 보고하였다. 육본지휘부가 이 보고를 받고 수경사령부로 이동하였고, 노재현 국방장관은 또다시 미8군으로 도망갔다.
(10시30분) 전두환 합수부장이 김용휴 국방차관과 김종환 함참의장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정승화의 육본측이 병력을 동원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출동금지를 요청하였다.이후 김용휴 국방차관과 노재현 국방장관의 통화가 이루어졌고, 노재현 국방장관이 정식 지휘명령으로 정승화측의 문홍구 합참본부장과 이건영 3군사령관에게 전화를 하여 병력출동금지 명령을 내리게된다. 이로 인하여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이 정승화측 육본의 병력출동 금지명령을 내림으로써 사태는 결국 수습되는 국면으로 진입한다.
(10시45분) 육본지휘부와 정승화측 군벌들이 모여있는 수경사에서는 합수부 서빙고 조사실을 공격하여 정승화를 구출하려는 시도와 함께 총리공관 까지 급습하여 최규하 대통령을 납치하자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는 결국 실행되지 못한다.
(11시00분) 이에 따라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은 이성을 잃고 흥분하여 수경사 전 장교를 소집한 후 30경비단과 보안사에 대한 무차별 공격준비를 지시하였다. 그러나 수경사 장교 450명중에 실제로 장태완의 소집에 응한 장교는 오직 60명 뿐이였다. 이에 대한 이유는 바로 당시 일반 장교들도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때 김재규와 공모혐의가 있다는 걸 알고있었고, 합수부의 정승화 연행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결국 장태완은 9공수여단 출동을 독촉하고 수경사 야포부대에 30경비단과 합수부에 대한 포격대기명령을 내린다. 구명회 야포단장은 장태완의 포격명령이 무모하고 상식에 맞지 않는다 생각하고 실탄이 아닌 조명탄을 준비하였으며, 윤성민과 이건영은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에 출동대기 명령을 내렸고, 정병주도 출동명령을 내렸다.
(11시30분)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전차 20대 장갑차 30대로 30경비단과 보안사령부를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출동했다는 보고가 합수부에 접수되었다.
(11시40분) 이에 따라 결국 조홍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대장에게 장태완 사령관의 체포를 지시하였고, 조홍장군은 자신의 직속상관인 장태완을 체포하라는 지시에 동의하며,신윤희 부단장에게 장태완의 체포를 지시하였다.
(11시50분) 최세창 3 여단장에게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반란현행범으로 체포할 것을 요청하였다.
(12시00분) 장태완의 무모한 행동은 항명수준을 넘어 반란행위에 준하며 군 정식지휘계통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판단한다고 결론을 내린후, 이후 전두환 합수부장은 장태완을 군사반란으로 판단하고 대통령과 국가기관을 방호하고, 군 통수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보안사령관의 고유업무인 ‘대전복 작전’ 차원에서 대응하기로 결론을 내리게된다.
노재현 국방장관이 유선으로 분명하게 병력출동금지를 명령했는대도 정승화-김재규 계열의 강경파 장군들이 명령에 불복하고 병력을 동원한 것은 국가변란 행위임을 분명히 하고, 김용휴 국방차관에게 장태완의 불법적인 병력출동상황을 보고하며, 대전복 정부군 출동요청이 불가피함을 보고하였다. 이에 따라 최규하 대통령에게는 대통령 경호실장을 통해 대전복 정부군 출동을 요청하였고, 1,3,5 공수여단에 대전복 작전을 위한 출동이 요청되었다.
(12월 13일 0시 40분) 1군단과 9사단에 정부군 병력지원을 요청하였고, 수경사 장교들 대부분이 정승화의 공모혐의를 알았고, 장태완의 비이성적 명령을 따르지 않으려는 분위기에서 신윤희중령은 조홍 단장의 명령대로 장태완을 체포함과 동시에 최세창 여단장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박종규 중령이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하였다.
(03시30분) 장태완과 정병주가 모두 체포되며, 나머지 육군본부측 장군들의 무장도 모두 해제되었다.
결론적으로 이로써 전두환 보안사령부의 ‘대전복 작전’으로 인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고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반란을 준비하려했던 김재규-정승화 계열 군벌들의 군사반란 상황을 모두 해산시키게되었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연행계획을 최종 보고하러 간 이후 8시간 30분만에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12.12 사태’다.
만약 10.26 사건에서 정승화에게 공모혐의가 있음이 일찍 드러나서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이 되지 못했다면, 정승화가 합수부의 합법적 연행에 반발하지 않고 응했다면, 노재현 국방장관이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지켰거나 10시간 동안 숨어 다니지 않았다면, 사태가 이처럼 악화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전두환 보안사령부의 현명한 판단력이 없었다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계열의 군사반란이 최종적으로 성공하여, 국가의 권력을 최종장악, 대한민국은 김재규의 손안에 놀아나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김재규가 권력을 장악하여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의 번영은 존재하지 않았을것이며, 조국근대화도 무산되고, 자주국방도 무산되며,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보다 못한 극심한 후진국으로 전락하여 국민들은 모두 북한보다도 못한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을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생전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많은 총애를 받았던 진실된 전두환 장군, 전두환 대통령은 이미 대통령이 되기전에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출했으며, 이후 역사적 운명과 함께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대한민국의 번영을 이끌어간 진정한 영웅이였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 12.12 사태의 진실 -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와 그의 계열인 정승화 김계원의 쿠데타는 사건 당시 공범혐의가 있는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이 되고 최고실권을 갖게 되면서 김재규의 쿠데타의 완성을 위한 과정이 계속 진행되었고, 합동수사본부의 합법적인 정승화 연행에 극히 반발한 김재규-정승화계 군벌들의 군사반란시도를 저지하기 위하여 결국 12.12사태가 발생되었다.
전두환 합수부장은 노재현 국방장관이 정승화 연행조사를 계속 미루면서 미온적으로 대응하므로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고 그와 동시에 정승화를 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정승화가 연행에 불응하고 무력행사로 대응한다면 제어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정승화와 가까운 고위장성이나 정승화와 직접 대화가 가능한 장군들에게 미리 정승화 연행조사의 불가피성을 구체하고 명확하게 설명하며 이해시킴으로써 협조를 구하여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만들기로 하였다.
이후 황영시, 유학성, 차규헌, 박희도, 박준병, 최세창 장기오 노태우 등의 장군들에게 30경비단에서 저녁식사 약속을 하였다. 이중에 유학성 장군과 노태우 장군만 12월 12일에 정승화를 연행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나머지 다른 장군들은 모두 일반적인 저녁식사의 자리로 알고 모이게되었다.
(1979년 12월 12일 6시 30분)
전두환 합수부장과 이학봉 수사국장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연행조사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재가를 받기위해 국무총리공관에 도착였고, 당시 신현확 총리와 최광수 비서실장도 참석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이들의 설명을 듣고 관계장관이 서명을 한뒤에 서명을 하겠다며 노재현 국방장관을 호출하였다.
(7시 00분)
정승화의 총장공관에 우경윤대령 허삼수대령이 7명의 수사관과 함께 도착하였다.
우경윤: “김재규가 정총장님 관련하여 새로운 진술을 했습니다, 총장님의 증언을 다시 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행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라고 정승화에게 말했다.
정승화: “너희들 어디서 왔어!” (고함을 치며 대답하였다)
우경윤: “총장님에 대한 조사는 이미 대통령에게 보고된 것이니 잠시 합수부에 가셔서 진술을 녹음하고 돌아오시면 됩니다.”
정승화: “이놈들 가긴 어딜가냐! 나는 육군참모총장이다, 이놈들을 잡아라! 대통령 전화를 대!” 그러자 정승화의 경호원들이 우대령과 허대령에게 달려들었다.
우경윤: “공무집행 중이다, 경호원들은 나가라.” 라고 달려든 경호원들에게 모두 이야기하였다.
(7시 15분)
그러자 부관실에서 총성이 울리고 결국 우대령이 총을 맞고 쓰러진다. 그러자 허삼수대령이 정승화에 다가가 밀착하여
허삼수: “총장님 왜 사태를 이렇게 어렵게 만드십니까?” 라고 말하자 결국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정승화가 반발을 포기하고 결국 허삼수의 연행차량에 탑승하게 되었다.
(7시 40분)
이후 이들은 서빙고 합수부조사실에 도착하였고, 허삼수가 허화평 합수부비서실장과 이학봉 수사국장에게 정승화의 연행완료를 알린다.
(7시 45분)
총리공관에서 전두환 본부장이 정승화의 연행완료를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 본부장에게 “국방장관이 올때까지 기다려 봅시다, 차한잔 합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노재현 국방장관은 연행당시 장관공관에 있다가 총리공관쪽에서 총성이 울리자 담을 넘어 시내로 도망을 가버렸다.
(연행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 다시 7시30분)
윤성민 육본차장이 “정총장이 괴한에 납치됐다”를 보고를 받고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였다. 참고로 진돗개 경보는 진돗개의 이름을 따서 만든 대한민국의 경보로, 북한의 무장공비나 특수부대원 등이 대한민국에 침투했을 때, 부대에서 탈영병이 발생했을 때 등 국지적 위협 상황이 일어났을 때 발령되는 단계별 경보 조치이다.
(7시40분)
윤성민 육본차장의 발령에 따라 정승화계의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헌병대장등이 부대로 복귀하여 군출동을 준비하였다.
(8시10분)
변규수 육본보안부대장은 정승화가 괴한에 의한 납치가 아니고, 정승화를 합수부에서 연행한것이라고 윤성민차장에게 보고하였다.
(8시20분)
그러나 윤성민 육본차장은 정승화가 납치가 아니고 합수부에 연행되어 서빙고 조사실에 있다는 걸 알고도 진돗개 둘을 확대발령한다.
(8시40분)
장태완 수경사령관도 납치가 아닌 합수부에서 연행한것이고 합수부장이 최대통령에게 보고중임을 보고 받았다.
(8시50분)
윤성민 차장은 발악의 심정으로 9공수여단의 출동까지 명령하였다.
(9시00분)
노재현 국방장관이 계속 나타나지 않자, 전두환 본부장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자신이 나가서 찿아 보겠다하였고, 결국 연행 2시간 30분 만에 전두환 본부장이 총리공관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전두환 합수부장은 총장공관에서의 총격사건을 보고 받은후, 30경비단으로 가서 모여 있는 장군들에게 정승화 연행의 필요성과 총리공관에서의 총격사건을 모두 설명하며, 이후 정승화의 연행배경을 국방부와 육군본부 지휘부에도 정확하게 사실을 알렸다.
(10시00분)
도망갔던 노재현 국방장관이 드디어 최규하 대통령과 첫 통화가 되었다.
최규하: “지금 어디에 있소, 당장 공관으로 오시오”
사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1공수여단 이기룡 대령이 육본에 직접 가보기 위해 1한강교 검문소를 통과했는데, 이것을 하소곤 작전참모부장이 “박희도장군의 1공수여단이 서울로 출동” 이라고 오보를 보고하였다. 육본지휘부가 이 보고를 받고 수경사령부로 이동하였고, 노재현 국방장관은 또다시 미8군으로 도망갔다.
(10시30분)
전두환 합수부장이 김용휴 국방차관과 김종환 함참의장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정승화의 육본측이 병력을 동원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출동금지를 요청하였다.이후 김용휴 국방차관과 노재현 국방장관의 통화가 이루어졌고, 노재현 국방장관이 정식 지휘명령으로 정승화측의 문홍구 합참본부장과 이건영 3군사령관에게 전화를 하여 병력출동금지 명령을 내리게된다. 이로 인하여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이 정승화측 육본의 병력출동 금지명령을 내림으로써 사태는 결국 수습되는 국면으로 진입한다.
(10시45분)
육본지휘부와 정승화측 군벌들이 모여있는 수경사에서는 합수부 서빙고 조사실을 공격하여 정승화를 구출하려는 시도와 함께 총리공관 까지 급습하여 최규하 대통령을 납치하자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는 결국 실행되지 못한다.
(11시00분)
이에 따라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은 이성을 잃고 흥분하여 수경사 전 장교를 소집한 후 30경비단과 보안사에 대한
무차별 공격준비를 지시하였다. 그러나 수경사 장교 450명중에 실제로 장태완의 소집에 응한 장교는 오직 60명 뿐이였다. 이에 대한 이유는 바로 당시 일반 장교들도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때 김재규와 공모혐의가 있다는 걸 알고있었고, 합수부의 정승화 연행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결국 장태완은 9공수여단 출동을 독촉하고 수경사 야포부대에 30경비단과 합수부에 대한 포격대기명령을 내린다. 구명회 야포단장은 장태완의 포격명령이 무모하고 상식에 맞지 않는다 생각하고 실탄이 아닌 조명탄을 준비하였으며, 윤성민과 이건영은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에 출동대기 명령을 내렸고, 정병주도 출동명령을 내렸다.
(11시30분)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전차 20대 장갑차 30대로 30경비단과 보안사령부를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출동했다는 보고가 합수부에 접수되었다.
(11시40분)
이에 따라 결국 조홍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대장에게 장태완 사령관의 체포를 지시하였고, 조홍장군은 자신의 직속상관인 장태완을 체포하라는 지시에 동의하며,신윤희 부단장에게 장태완의 체포를 지시하였다.
(11시50분)
최세창 3 여단장에게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반란현행범으로 체포할 것을 요청하였다.
(12시00분)
장태완의 무모한 행동은 항명수준을 넘어 반란행위에 준하며 군 정식지휘계통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판단한다고 결론을 내린후, 이후 전두환 합수부장은 장태완을 군사반란으로 판단하고 대통령과 국가기관을 방호하고, 군 통수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보안사령관의 고유업무인 ‘대전복 작전’ 차원에서 대응하기로 결론을 내리게된다.
노재현 국방장관이 유선으로 분명하게 병력출동금지를 명령했는대도 정승화-김재규 계열의 강경파 장군들이 명령에 불복하고 병력을 동원한 것은 국가변란 행위임을 분명히 하고, 김용휴 국방차관에게 장태완의 불법적인 병력출동상황을 보고하며, 대전복 정부군 출동요청이 불가피함을 보고하였다. 이에 따라 최규하 대통령에게는 대통령 경호실장을 통해 대전복 정부군 출동을 요청하였고, 1,3,5 공수여단에 대전복 작전을 위한 출동이 요청되었다.
(12월 13일 0시 40분)
1군단과 9사단에 정부군 병력지원을 요청하였고, 수경사 장교들 대부분이 정승화의 공모혐의를 알았고, 장태완의 비이성적 명령을 따르지 않으려는 분위기에서 신윤희중령은 조홍 단장의 명령대로 장태완을 체포함과 동시에 최세창 여단장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박종규 중령이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하였다.
(03시30분)
장태완과 정병주가 모두 체포되며, 나머지 육군본부측 장군들의 무장도 모두 해제되었다.
결론적으로 이로써 전두환 보안사령부의 ‘대전복 작전’으로 인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고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반란을 준비하려했던 김재규-정승화 계열 군벌들의 군사반란 상황을 모두 해산시키게되었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연행계획을 최종 보고하러 간 이후 8시간 30분만에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12.12 사태’다.
만약 10.26 사건에서 정승화에게 공모혐의가 있음이 일찍 드러나서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이 되지 못했다면, 정승화가 합수부의 합법적 연행에 반발하지 않고 응했다면, 노재현 국방장관이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지켰거나 10시간 동안 숨어 다니지 않았다면, 사태가 이처럼 악화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전두환 보안사령부의 현명한 판단력이 없었다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계열의 군사반란이 최종적으로 성공하여, 국가의 권력을 최종장악, 대한민국은 김재규의 손안에 놀아나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김재규가 권력을 장악하여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의 번영은 존재하지 않았을것이며, 조국근대화도 무산되고, 자주국방도 무산되며,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보다 못한 극심한 후진국으로 전락하여 국민들은 모두 북한보다도 못한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을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생전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많은 총애를 받았던 진실된 전두환 장군, 전두환 대통령은 이미 대통령이 되기전에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출했으며, 이후 역사적 운명과 함께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대한민국의 번영을 이끌어간 진정한 영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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