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4일 부활후 둘째 주, 하루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면서 남기신 목사님의 단상
노숙자
이 세상의 3대 설음이 배고픈 설음, 집 없는 설음, 늙어가는 설음이라 한다.
노숙자는 그 중에 둘째에 해당하나 나머지 둘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 경험한 노숙자가 여럿 있다.
한 분은 20년쯤 전인데 교회 본당 의자에 엎드려 있었다, 30대 초반으로 보였고 사연을 들어보니 횡설수설하는데 당장 갈 곳이 없다 했고 큰 가방을 하나 갖고 있었다. 왼 손 손가락이 몇 없었는데 그 손을 자꾸 감추려 했다. 그래도 뭔가 간절함이 있어 보여 본당 뒤편에 있는 유아실에서 당장은 있으라 했다. 새벽기도 나오시는 분들이 힘들었을 텐데 별 말씀들이 없으셔서 서너달 거기에서 머물렀다. 낮에는 고물을 줍는 일을 했고 그것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겨울이 오기 전에 고물상에 일종의 취직을 하였다. 고물상에 있는 숙소에서 지내며 고물을 줍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뒤로도 그 분은 교회를 계속 다녔는데 언제 특별한 말도 없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계신지 간혹 궁금하다.
한 분은 15년쯤 전으로 20대 후반이었고, 스스로 살아가려는 의지가 없는 분이었다.
이 분이 밤낮으로 자주 교회를 왔었다.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가치 가운데 열린교회가 있고 그 실천에 있어 일 년 내내 24시간 본당을 열어 놓는 일이었다.
동네 누군가가 기도하고 싶을 때 올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실행하기에 어려운 점들이 있어 서울 시내 대부분의 교회들이 본당 문을 잠그고 있는데 그래도 해 보자 하며 지금까지 20년 넘게 해 오고 있는 일이다.
그를 위해 한 일 가운데 본당에 값이 나갈만한 것은 두지 말자는 것이었다. 감사하게도 그렇게 큰 어려움 없이 지내올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이 못 들어오게 문을 잠글 수가 없었다.
문제는 교회 본당에 와서 앉아 있었는데 몸에서 나는 악취가 얼마나 독한지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분이 나가고 나서 의자를 닦고 또 닦고 환기를 해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시내 노숙자들의 가장 큰 문제가 냄새이다.
그 분들은 어디에 가서 몸을 씻을 곳이 없다.
공개된 개천은 다 사라졌고, 목욕탕은 돈을 주어도 노숙자처럼 보이는 이들은 들여보내 주지 않는다.
그러니 같은 옷을 계속 입고 있고 어떤 때는 여름에도 겨울 옷을 입고 있으며 그 옷에서 나는 냄새가 진동을 하니 사람들과 가까이 할 수 없음으로 도움을 받을 기회조차 차단 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교회 화장실 한 칸에 더운 물이 나오는 시설을 하여 그곳에서 노숙자들이 몸을 씻을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미리 입을 만한 옷을 준비하여 갈아 입을 수 있게 하였고, 본인의 옷은 빨아 널어 놓게 하여 다음에 올 때 가져가게 하였다.
그리되니 서로 얘기도 할 수 있었고 교회 의자에 앉아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그 분도 언젠가 말 없이 갔는데 시원섭섭했다.
최근에도 한 노숙자를 만났다.
그는 20대 후반이었다.
지난 겨울 아주 추울 때, 누군가가 본당 계단 밑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말을 한 권사님이 하셨다.
본당 계단 밑이 찬 바람은 피할 수 있는 실내이지만 콘크리트 위인데 그 추위 속에 사람이 밤새 있을 곳은 아니었다.
낮에는 보이지를 않아 일부러 밤에 둘러 보니 골판지를 깔고 침낭속에서 자고 있었다.
지난 기억이 있어, 우선 입고 있는 옷을 모두 벗고 화장실에서 몸을 씻을 수 있겠느냐 하니 그리 하겠다 하여, 그 분이 입을 만한 옷을 준비해 주었다, 우리 교회에는 초록가게라는 재활용 가게가 있어 다양한 옷들이 많이 있다.
그 분이 벗어 놓은 옷을 가지고 함께 근처에 있는 24시간 빨래방으로 가서 세탁과 건조를 하였다.
기다리는 두 시간 동안 사연을 들어 보았다.
그는 제주도가 고향이라 했다, 거기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했고, 육군 병장으로 제대하였으며, 서울에 와서 취직을 하여 근무를 하던 중 보이스피싱을 당했다고 한다. 원름 전세를 살고 있었는데 전세금과 함께 농협에서 5천만원 대출까지 받게 해서 가져 갔다 한다. 더 이상 회사를 다닐 수 없었고, 순식간에 노숙자가 되어 얼마를 지내다가 광고를 보고 곤지암 쿠팡 물류 단지에서 일을 하게 된 지 한 달 정도 되었다고 한다, 의심이 들어 사실이냐 하니 목에 거는 출입증을 보여 주었다, 왜 그 추운 곳에서 잤느냐 물으니 딱히 갈 곳이 없었고, 교회 화장실에서 용변과 더운 물이 나오니 씻을 수가 있었고, 쿠팡 셔틀버스 정류장이 인근에 있어 그리하게 되었다 한다.
그렇게 일을 하면 고시원에 들어가면 되지 않느냐 했더니, 지난 달은 열흘 정도 일했기 때문에 받은 돈을 모두 대출금 갚는데 써야 했다 한다.
이 번 달은 20일 일했는데 열흘 더 하면 2백 몇십 만원을 받게 될 것이라 해서, 그 때가 되면 고시원에 들어가기로 하고 남은 기간 동안 우리 교회 선교관에서 머물라 하였다.
우리 교회는 일시 귀국하는 선교사님들을 위한 원룸이 넷 있다, 반지하이지만 교통도 좋고 필요한 시설은 다 갖추어 있어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그가 그 밤에 잠자리를 한데 계단 밑에서 따듯한 방으로 옮기게 되었을 때 마음이 어떠했을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별 반응이 없었다.
아마도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한 충격으로 감정 반응에 이상이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돈이 없을 것 같아 몇 만원 주며 급한데 쓰라 하였는데 별 사양 없이 받았다.
다음날 밤에 가 보았는데 보일러 전원을 끄고 있길래 걱정 말고 쓰라고 켜 주었고, 방에는 건빵이 한 포대 있었다. 아마도 월급이 나올 때까지 건빵으로 버티려는 것 같았다.
다른 일로 바빠 몇 날을 지내고 나서 선교관에 가 보았더니 짐이 없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는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기에 번호를 입력해 놓고 주민증의 사진도 찍어 놓았었는데, 전화를 하니 월급이 나와서 고시원으로 옮겼다 하였다.
내 번호도 알고 있었는데 아무 연락도 없이 그리한 것이 좀 이상하기까지 하였지만 약속을 잘 지킨 것에 나름 여러 모로 감사했다.
사실은 교회의 누군가는 저런 사람들은 잘 나가지 않을 것이라 하며 염려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몇 일 후에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묻고 기독교 교리를 아주 간단하게 전하기는 하였다.
처음 대화에서 그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닌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잘 지내기를 바랄 뿐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래도 함께 기억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공개하는 글이라 조금 꺼려지는 것은 마치 광고 글처럼 여겨지는 일인데 그런 의도는 없다.
ACTS of 광동교회
2024년 4월 14일 부활후 둘째 주, 하루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면서 남기신 목사님의 단상
노숙자
이 세상의 3대 설음이 배고픈 설음, 집 없는 설음, 늙어가는 설음이라 한다.
노숙자는 그 중에 둘째에 해당하나 나머지 둘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 경험한 노숙자가 여럿 있다.
한 분은 20년쯤 전인데 교회 본당 의자에 엎드려 있었다, 30대 초반으로 보였고 사연을 들어보니 횡설수설하는데 당장 갈 곳이 없다 했고 큰 가방을 하나 갖고 있었다. 왼 손 손가락이 몇 없었는데 그 손을 자꾸 감추려 했다. 그래도 뭔가 간절함이 있어 보여 본당 뒤편에 있는 유아실에서 당장은 있으라 했다. 새벽기도 나오시는 분들이 힘들었을 텐데 별 말씀들이 없으셔서 서너달 거기에서 머물렀다. 낮에는 고물을 줍는 일을 했고 그것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겨울이 오기 전에 고물상에 일종의 취직을 하였다. 고물상에 있는 숙소에서 지내며 고물을 줍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뒤로도 그 분은 교회를 계속 다녔는데 언제 특별한 말도 없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계신지 간혹 궁금하다.
한 분은 15년쯤 전으로 20대 후반이었고, 스스로 살아가려는 의지가 없는 분이었다.
이 분이 밤낮으로 자주 교회를 왔었다.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가치 가운데 열린교회가 있고 그 실천에 있어 일 년 내내 24시간 본당을 열어 놓는 일이었다.
동네 누군가가 기도하고 싶을 때 올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실행하기에 어려운 점들이 있어 서울 시내 대부분의 교회들이 본당 문을 잠그고 있는데 그래도 해 보자 하며 지금까지 20년 넘게 해 오고 있는 일이다.
그를 위해 한 일 가운데 본당에 값이 나갈만한 것은 두지 말자는 것이었다. 감사하게도 그렇게 큰 어려움 없이 지내올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이 못 들어오게 문을 잠글 수가 없었다.
문제는 교회 본당에 와서 앉아 있었는데 몸에서 나는 악취가 얼마나 독한지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분이 나가고 나서 의자를 닦고 또 닦고 환기를 해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시내 노숙자들의 가장 큰 문제가 냄새이다.
그 분들은 어디에 가서 몸을 씻을 곳이 없다.
공개된 개천은 다 사라졌고, 목욕탕은 돈을 주어도 노숙자처럼 보이는 이들은 들여보내 주지 않는다.
그러니 같은 옷을 계속 입고 있고 어떤 때는 여름에도 겨울 옷을 입고 있으며 그 옷에서 나는 냄새가 진동을 하니 사람들과 가까이 할 수 없음으로 도움을 받을 기회조차 차단 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교회 화장실 한 칸에 더운 물이 나오는 시설을 하여 그곳에서 노숙자들이 몸을 씻을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미리 입을 만한 옷을 준비하여 갈아 입을 수 있게 하였고, 본인의 옷은 빨아 널어 놓게 하여 다음에 올 때 가져가게 하였다.
그리되니 서로 얘기도 할 수 있었고 교회 의자에 앉아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그 분도 언젠가 말 없이 갔는데 시원섭섭했다.
최근에도 한 노숙자를 만났다.
그는 20대 후반이었다.
지난 겨울 아주 추울 때, 누군가가 본당 계단 밑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말을 한 권사님이 하셨다.
본당 계단 밑이 찬 바람은 피할 수 있는 실내이지만 콘크리트 위인데 그 추위 속에 사람이 밤새 있을 곳은 아니었다.
낮에는 보이지를 않아 일부러 밤에 둘러 보니 골판지를 깔고 침낭속에서 자고 있었다.
지난 기억이 있어, 우선 입고 있는 옷을 모두 벗고 화장실에서 몸을 씻을 수 있겠느냐 하니 그리 하겠다 하여, 그 분이 입을 만한 옷을 준비해 주었다, 우리 교회에는 초록가게라는 재활용 가게가 있어 다양한 옷들이 많이 있다.
그 분이 벗어 놓은 옷을 가지고 함께 근처에 있는 24시간 빨래방으로 가서 세탁과 건조를 하였다.
기다리는 두 시간 동안 사연을 들어 보았다.
그는 제주도가 고향이라 했다, 거기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했고, 육군 병장으로 제대하였으며, 서울에 와서 취직을 하여 근무를 하던 중 보이스피싱을 당했다고 한다. 원름 전세를 살고 있었는데 전세금과 함께 농협에서 5천만원 대출까지 받게 해서 가져 갔다 한다. 더 이상 회사를 다닐 수 없었고, 순식간에 노숙자가 되어 얼마를 지내다가 광고를 보고 곤지암 쿠팡 물류 단지에서 일을 하게 된 지 한 달 정도 되었다고 한다, 의심이 들어 사실이냐 하니 목에 거는 출입증을 보여 주었다, 왜 그 추운 곳에서 잤느냐 물으니 딱히 갈 곳이 없었고, 교회 화장실에서 용변과 더운 물이 나오니 씻을 수가 있었고, 쿠팡 셔틀버스 정류장이 인근에 있어 그리하게 되었다 한다.
그렇게 일을 하면 고시원에 들어가면 되지 않느냐 했더니, 지난 달은 열흘 정도 일했기 때문에 받은 돈을 모두 대출금 갚는데 써야 했다 한다.
이 번 달은 20일 일했는데 열흘 더 하면 2백 몇십 만원을 받게 될 것이라 해서, 그 때가 되면 고시원에 들어가기로 하고 남은 기간 동안 우리 교회 선교관에서 머물라 하였다.
우리 교회는 일시 귀국하는 선교사님들을 위한 원룸이 넷 있다, 반지하이지만 교통도 좋고 필요한 시설은 다 갖추어 있어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그가 그 밤에 잠자리를 한데 계단 밑에서 따듯한 방으로 옮기게 되었을 때 마음이 어떠했을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별 반응이 없었다.
아마도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한 충격으로 감정 반응에 이상이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돈이 없을 것 같아 몇 만원 주며 급한데 쓰라 하였는데 별 사양 없이 받았다.
다음날 밤에 가 보았는데 보일러 전원을 끄고 있길래 걱정 말고 쓰라고 켜 주었고, 방에는 건빵이 한 포대 있었다. 아마도 월급이 나올 때까지 건빵으로 버티려는 것 같았다.
다른 일로 바빠 몇 날을 지내고 나서 선교관에 가 보았더니 짐이 없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는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기에 번호를 입력해 놓고 주민증의 사진도 찍어 놓았었는데, 전화를 하니 월급이 나와서 고시원으로 옮겼다 하였다.
내 번호도 알고 있었는데 아무 연락도 없이 그리한 것이 좀 이상하기까지 하였지만 약속을 잘 지킨 것에 나름 여러 모로 감사했다.
사실은 교회의 누군가는 저런 사람들은 잘 나가지 않을 것이라 하며 염려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몇 일 후에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묻고 기독교 교리를 아주 간단하게 전하기는 하였다.
처음 대화에서 그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닌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잘 지내기를 바랄 뿐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래도 함께 기억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공개하는 글이라 조금 꺼려지는 것은 마치 광고 글처럼 여겨지는 일인데 그런 의도는 없다.
1 year ago | [Y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