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원 덕은관 고민수 관장과 땀으로 흥건한 몸을 이끌고 체육관 건물 1층의 롯데리아로 들어섰다. 훅, 하고 끼쳐오는 에어컨의 찬 공기가 끈적한 피부에 달라붙는 감각은 운동을 끝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지상의 낙원이었다. 우리는 자리를 잡기보다 먼저 포스기 앞으로 향했다. 그 앞에는 이미 초로의 신사 한 분이 서 계셨다. 화면 위를 부유하는 그의 손가락은 목적지를 찾지 못한 채 연신 허공을 맴돌았다. 우리를 발견한 그는 멋쩍게 웃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먼저 하세요." 그 말속에는 미안함과 체념이 섞여 있었다.
우리는 패트가 두 장 들어간 더블엑스 세트 두 개를 시키고 플라스틱 의자에 몸을 묻었다. 등 뒤의 창문 너머로 이제막 시작한 여름 낮의 맹렬함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시간이 열기를 못 이기는 순간, 세상의 속도가 한 단계쯤 느려지는 듯한 체념을 통한 평온. 나는 그 안락함 속에서 갓 끝낸 운동의 잔상을 곱씹고 있었다. 고 관장이 샌드백을 가리키며 외치던 소리, 공기를 가르던 글러브의 마찰음, 가쁜 숨을 몰아쉴 때마다 심장에서 터져 나오던 북소리 같은 고동. 그 모든 격렬함이 이제는 먼 곳의 일처럼 아득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 관장이 문득 나를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 어르신, 계속 헤매시는 것 같은데 제가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그의 시선은 우리가 들어올 때 마주쳤던 그 신사를 향해 있었다. 그는 여전히 주문 기계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우리가 자리를 양보받고, 주문을 마치고, 음식을 받아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꼼짝없이 그 문명의 이기(利器) 앞에서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 관장은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 걸음에는 어떤 망설임도 과시도 없었다. 마치 링 위에서 상대의 빈틈을 향해 내딛는 스텝처럼, 군더더기 없고 정확했다. "어르신, 좀 도와드릴까요?" 나직하지만 분명한 목소리. 신사는 기다렸다는 듯 구원받은 표정을 지었다. 몇 마디 대화가 오가고, 이내 주문이 끝났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우리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신사의 모습은, 한 끼의 식사가 그에게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불고기버거 세트일 뿐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쩌면 그 하루의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허기와 막막함으로 점철된 오후의 시작점에서 마주하고 싶었던 작은 위안. 한 끼의 식사는 때로 우주 하나만큼의 무게를 지닌다. 몸과 마음에 여유가 넘칠 때 선의를 베푸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때 우리는 누구나 잠시 부처나 예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하루의 절반을 땀으로 채운 뒤, 고된 노동의 정점에서 맞이하는 꿀 같은 휴식의 순간에 타인의 곤경 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는 행위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그것은 단순한 인성(人性)을 넘어선 지성(知性)의 영역이다.
타인을 헤아리는 능력은 타고난 성품이라기보다 후천적으로 연마된 지성의 발현에 가깝다. 상대의 표정, 망설이는 손짓, 어색한 침묵 속에서 그의 내면을 읽어내는 것. 그의 곤란함이 단지 기계 조작의 미숙함에 그치지 않고, 어쩌면 존엄의 문제와 연결될 수 있음을 간파하는 것. 이는 고도의 공감 능력과 상황 판단력을 요구하는 지적 활동이다. 풍부하게 발달한 대뇌의 어느 한 부분이 타인의 우주를 상상하고 그 무게를 감당하게 하는 것이다.
문득 얼마 전 그에게서 왼손 보디 샷을 특훈 받던 날이 떠올랐다. 나는 번번이 팔 힘에 의지해 주먹을 뻗었고, 샌드백은 그저 둔탁하게 흔들릴 뿐이었다. 그때 고 관장이 내 골반을 잡아주며 말했다. "팔로 치는 게 아닙니다. 몸통을 돌리세요. 회전축이 살아 있어야 힘이 실립니다." 그는 말로만 설명하지 않았다. 내 몸을 직접 움직여주며 회전의 감각을 새겨 넣었다. 골반이 돌고, 허리가 따라 돌고, 그 회전력이 어깨를 거쳐 주먹 끝에 응축되는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샌드백이 마치 찢어질 듯이 깊게 파였다. 내 주먹이 만들어낸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파괴력이었다.
그는 상대의 몸을 이해하고 있었고, 더 나아가 나의 몸이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문제의 핵심을 꿰뚫고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능력. 그것이 그의 ‘눈높이 교육’의 본질이었다. 롯데리아의 포스기 앞에서 서성이던 노신사의 마음을 읽어낸 것과, 샌드백 앞에서 헛힘만 쓰던 나의 문제점을 간파한 것은 결국 같은 뿌리에서 뻗어 나온 가지였다. 둘 다 대상을 깊이 있게 관찰하고, 그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성의 산물이다.
복싱은 상대와의 거리, 타이밍, 호흡을 읽는 싸움이다. 링 위에서 벌어지는 수 싸움은 고도의 지적 유희에 가깝다. 상대의 눈빛과 미세한 근육의 떨림에서 다음 수를 예측하고, 찰나의 순간에 최적의 판단을 내려야 한다. 수천, 수만 번의 스파링을 통해 그는 인간의 움직임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도와 감정까지 읽어내는 훈련을 해왔을 것이다. 그에게 링은 비단 사각의 밧줄로 둘러싸인 공간만이 아니었다. 세상 전체가 그의 링이었고, 모든 관계가 그에게는 거리와 호흡을 조절해야 할 대상이었으리라.
나는 이런 사람에게서 복싱을 배웠다. 그의 도움으로 자리를 찾은 노신사가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무는 모습을 보며,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단순히 샌드백을 강하게 치는 기술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타인의 빈틈을 파고드는 법인 동시에, 타인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법이기도 했다. 나의 바디 샷은 이제 더 이상 헛돌지 않을 것이다. 그 주먹에 담긴 회전의 힘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 지성의 무게를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아드레날린 연구소 : 터프한 인생실험실
<바디샷과 불고기 버거>
박스원 덕은관 고민수 관장과 땀으로 흥건한 몸을 이끌고 체육관 건물 1층의 롯데리아로 들어섰다. 훅, 하고 끼쳐오는 에어컨의 찬 공기가 끈적한 피부에 달라붙는 감각은 운동을 끝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지상의 낙원이었다. 우리는 자리를 잡기보다 먼저 포스기 앞으로 향했다. 그 앞에는 이미 초로의 신사 한 분이 서 계셨다. 화면 위를 부유하는 그의 손가락은 목적지를 찾지 못한 채 연신 허공을 맴돌았다. 우리를 발견한 그는 멋쩍게 웃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먼저 하세요." 그 말속에는 미안함과 체념이 섞여 있었다.
우리는 패트가 두 장 들어간 더블엑스 세트 두 개를 시키고 플라스틱 의자에 몸을 묻었다. 등 뒤의 창문 너머로 이제막 시작한 여름 낮의 맹렬함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시간이 열기를 못 이기는 순간, 세상의 속도가 한 단계쯤 느려지는 듯한 체념을 통한 평온. 나는 그 안락함 속에서 갓 끝낸 운동의 잔상을 곱씹고 있었다. 고 관장이 샌드백을 가리키며 외치던 소리, 공기를 가르던 글러브의 마찰음, 가쁜 숨을 몰아쉴 때마다 심장에서 터져 나오던 북소리 같은 고동. 그 모든 격렬함이 이제는 먼 곳의 일처럼 아득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 관장이 문득 나를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 어르신, 계속 헤매시는 것 같은데 제가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그의 시선은 우리가 들어올 때 마주쳤던 그 신사를 향해 있었다. 그는 여전히 주문 기계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우리가 자리를 양보받고, 주문을 마치고, 음식을 받아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꼼짝없이 그 문명의 이기(利器) 앞에서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 관장은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 걸음에는 어떤 망설임도 과시도 없었다. 마치 링 위에서 상대의 빈틈을 향해 내딛는 스텝처럼, 군더더기 없고 정확했다. "어르신, 좀 도와드릴까요?" 나직하지만 분명한 목소리. 신사는 기다렸다는 듯 구원받은 표정을 지었다. 몇 마디 대화가 오가고, 이내 주문이 끝났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우리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신사의 모습은, 한 끼의 식사가 그에게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불고기버거 세트일 뿐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쩌면 그 하루의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허기와 막막함으로 점철된 오후의 시작점에서 마주하고 싶었던 작은 위안. 한 끼의 식사는 때로 우주 하나만큼의 무게를 지닌다. 몸과 마음에 여유가 넘칠 때 선의를 베푸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때 우리는 누구나 잠시 부처나 예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하루의 절반을 땀으로 채운 뒤, 고된 노동의 정점에서 맞이하는 꿀 같은 휴식의 순간에 타인의 곤경 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는 행위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그것은 단순한 인성(人性)을 넘어선 지성(知性)의 영역이다.
타인을 헤아리는 능력은 타고난 성품이라기보다 후천적으로 연마된 지성의 발현에 가깝다. 상대의 표정, 망설이는 손짓, 어색한 침묵 속에서 그의 내면을 읽어내는 것. 그의 곤란함이 단지 기계 조작의 미숙함에 그치지 않고, 어쩌면 존엄의 문제와 연결될 수 있음을 간파하는 것. 이는 고도의 공감 능력과 상황 판단력을 요구하는 지적 활동이다. 풍부하게 발달한 대뇌의 어느 한 부분이 타인의 우주를 상상하고 그 무게를 감당하게 하는 것이다.
문득 얼마 전 그에게서 왼손 보디 샷을 특훈 받던 날이 떠올랐다. 나는 번번이 팔 힘에 의지해 주먹을 뻗었고, 샌드백은 그저 둔탁하게 흔들릴 뿐이었다. 그때 고 관장이 내 골반을 잡아주며 말했다. "팔로 치는 게 아닙니다. 몸통을 돌리세요. 회전축이 살아 있어야 힘이 실립니다." 그는 말로만 설명하지 않았다. 내 몸을 직접 움직여주며 회전의 감각을 새겨 넣었다. 골반이 돌고, 허리가 따라 돌고, 그 회전력이 어깨를 거쳐 주먹 끝에 응축되는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샌드백이 마치 찢어질 듯이 깊게 파였다. 내 주먹이 만들어낸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파괴력이었다.
그는 상대의 몸을 이해하고 있었고, 더 나아가 나의 몸이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문제의 핵심을 꿰뚫고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능력. 그것이 그의 ‘눈높이 교육’의 본질이었다. 롯데리아의 포스기 앞에서 서성이던 노신사의 마음을 읽어낸 것과, 샌드백 앞에서 헛힘만 쓰던 나의 문제점을 간파한 것은 결국 같은 뿌리에서 뻗어 나온 가지였다. 둘 다 대상을 깊이 있게 관찰하고, 그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성의 산물이다.
복싱은 상대와의 거리, 타이밍, 호흡을 읽는 싸움이다. 링 위에서 벌어지는 수 싸움은 고도의 지적 유희에 가깝다. 상대의 눈빛과 미세한 근육의 떨림에서 다음 수를 예측하고, 찰나의 순간에 최적의 판단을 내려야 한다. 수천, 수만 번의 스파링을 통해 그는 인간의 움직임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도와 감정까지 읽어내는 훈련을 해왔을 것이다. 그에게 링은 비단 사각의 밧줄로 둘러싸인 공간만이 아니었다. 세상 전체가 그의 링이었고, 모든 관계가 그에게는 거리와 호흡을 조절해야 할 대상이었으리라.
나는 이런 사람에게서 복싱을 배웠다. 그의 도움으로 자리를 찾은 노신사가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무는 모습을 보며,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단순히 샌드백을 강하게 치는 기술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타인의 빈틈을 파고드는 법인 동시에, 타인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법이기도 했다. 나의 바디 샷은 이제 더 이상 헛돌지 않을 것이다. 그 주먹에 담긴 회전의 힘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 지성의 무게를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 인간어뢰 -
3 months ago | [YT] |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