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레날린 연구소 : 터프한 인생실험실

학교도서관에서 생긴 일

집에서 체육관까지 향하는 길목.좌회전 한 번이면 조카가 다니는 고등학교가 나온다. 그날도 평소처럼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조카에게서 카톡이 하나 도착했다. 사진 한 장이 첨부돼 있었다. 학교 도서관의 서가.
그 중간쯤에 익숙한 글자가 시야를 잡아챘다. ‘허세라서 소년이다.’ 내가 쓴 책이었다. 알고 보니 그 학교에는 그 책 말고도 내 책이 두 권 더 있다고 했다.도서관 속 내 이름. 누군가의 일상 속에 우연히 스며든 문장.
그게 그렇게 반가웠다. 등줄기가 따뜻해지고, 어깨가 들썩였다. 나는 어째선이 조카에게 약간의 용돈도 보냈다. 그날 저녁, 출판사에서 보낸 우편물 안엔
9쇄 발행에 대한 감사 편지와 증정본 두 권이 들어 있었다. 가볍게 넘길 수도 있었지만 그날은 뭔가 달랐다. 왠지 모르게“학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람이 움직일 때는 늘 그런 것 같다. 이유가 뚜렷한 게 아니라, 기류 같은 게 등을 밀 때. 나는 꽤 오랜 시간 청소년 진로 특강, 소년원 강연, 기업 동기부여 강사로 살아왔다. 그 시간 동안 지켜온 원칙이 하나 있다. 재능기부는 하지 않는다. 프로라면, 일에는 대가가 있어야 한다. 무료 강연은 다른 강사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으니까. 그게 내 신념이었다. 어떻게든 지켜왔다.
그런데 이번만은 달랐다. 업계도, 계약도 아니었다. 그저 내 조카가 다니는 학교였고, 그 아이가 언젠가 내 강연을 강당에서 보게 된다면 그 자체로 아주 작지만 재밌는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내가 먼저 제안하는 강연’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처음엔 전화부터 걸었다. 수업 시간일까 조심스러웠지만, 몇 번의 연결 끝에
도서관 사서 선생님과 통화가 이어졌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허세라서 소년이다』라는 책을 쓴 김남훈이라고 합니다.
제 조카가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요…”
“그런데요?”
이미 시작된 어조는 어딘지 불편했다.
“학교 도서관에 제 책이 있다고 들었어요.
혹시 일정 맞으면 학생들 진로특강이나 동기부여 강연 같은 걸,
제가 무료로라도 한번—”
“성함이 어떻게 되신다고요?”
“김남훈입니다.”
(탁탁탁. 키보드 소리)
“네, 그런데요?”
“혹시 제가 선생님 편하실 때 학교로 찾아뵈어도 괜찮을까요?”
“…네. 그러세요. 오시기 전에 연락 주세요.”
말끝은 닫혀 있었다. 어디서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환대도, 거절도 아니었다. 그저 기류가 없었다.

이틀 뒤, 나는 조심스레 학교를 찾았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웃으며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화단엔 봄꽃이 피어 있었고, 복도 끝에는 자판기에서 철커덩 캔음료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모든 게 평화로웠다.

도서관 앞에 섰다.노크 후 문이 열렸다. 안쪽에는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작은 체구의 사서 선생님이 앉아 있었다. 안경은 코끝에 걸려 있었고,
그 너머의 시선은 내가 누구인지 벌써 알고 있다는 듯, 낯섦 없이 건조했다.
“안녕하세요. 방금 전화드린 김남훈입니다.”
“아.네 안녕하세요.”
그 말은 한 줄기의 데이터였다.음의 떨림도, 감정의 여백도 없는 기계적인 문장.
그리고 마치 내 방문을 예측이라도 한 듯 다른 선생님이 곧장 나타났다.
학년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강연을 하시겠다고요?”
“네. 제 조카가 이 학교를 다녀서요. 제가 강연을 많이 다니거든요.‘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도 여러 번 출연했고요.
진로와 직업 관련 교과서에도 실렸습니다.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여긴 인문계 학교고요. 보시다싶이 여긴 도서관이거든요.”
앗.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거지. 갑자기 난기류를 만난 비행기마냥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네, 도서관에 제 책이 세 권 있다는 얘길 듣고…”
“올해는 일정이 다 찼고요. 인문계라 체육 쪽 수요는 별로 없어요.”
“아…제가 운동을 가르친다는 것은 아니구요. 전 프로레슬러이기도 하지만,
진로 관련 강연도 많이 하고 있어서요…”
“(말을 자르며)
내년에 예체능 선생님께 이야기해보고 관심 있는 학생 있으면 연락드릴게요. 호호.”

그때 나는 알았다. 이곳에는 내 말이 닿지 않는다. 자음 하나, 모음 하나.
모두 흩어져버렸다. 의미 없는 공기의 떨림. 그들은 나를 ‘운동하는 사람’이라 규정했다. 그리고 ‘운동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재차 규정했다. 그러니 인문계 고등학교 특히 도서관에선 의미와 쓸모를 찾기 힘든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엄격하게 따지자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절반의 진실만으로 사람을 정의하면, 그건 오해가 아니라, 단절이다.
나는 내가 말한 문장을 나 이외에 그 누구도 실제로 ‘들은’ 사람이 없음을 느꼈다. 여기 있는 벽은 너무 단단했다. 교무실의 공기는 이미 배경 좋은 합격자를 내정한 면접장처럼 모든 결론이 사전에 결정돼 있었다.
나는 웃었다. 자칫 진상으로 찍혀서 조카에게 불필요한 악영향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네, 감사합니다. 꼭 기회 주세요.” 그리고 돌아섰다.

교무실 문을 나서는 순간, 햇빛이 쏟아졌다. 아이들이 교정을 뛰어다녔고,
내 시계는 오후 3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문득 생각한다. 나도 누군가의 말에
이렇게 귀를 닫은 적이 있었던가? 고정관념, 직업, 껍질. 그 단어들이 하나의 벽이 되어 누군가의 가능성을 가로막은 적은 없었을까?
그리고 동시에 떠올랐다. 그 수많은 학교들, 나를 초대해주었던 선생님들.
처음엔 낯설었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아이들과의 연결을 만들어주었던
진짜 교육자들. 그들에게 더 고마워졌다.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큰 용기였는지를 이제야 조금 더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안다. 누군가는 또 다른 교무실에서 나를 환영해줄 것이란 걸.
왜냐면 아직도 세상에는 문을 여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 문을 열어줄 사람이 되기로 마음 먹었다.

- 인간어뢰 -

5 months ago | [YT] | 65